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우리겨레가 나아갈 길

Tomorrow of our People

✟大韓民國 建國史에 천주교회가 한 역활 !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 Foundation history of Repuiblic of Korea supported by the Catholic Church

글 : Msgr. Byon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하기
  • 스크랩

천주교회가 大韓民國 建國을 위해 어떤 역활을 했나 ?!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우리 천주교회가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천주교회가 大韓民國 建國을 위해 어떤 ,무슨 일을 얼마나, 어떻게 했나?

Foundation history of Repuiblic of Korea, supported by the Catholic Church!- 우리 천주교회가 어떻게 세우고, 어떻게 지켜온 나라인가? 일반 국민들 대부분은, 심지어, 한국교회 성직자들도 잘 모르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세우고,또, 실제로 어떻게 지켜 왔나?  

大韓民國 國號 制定 來歷
 
1910년 한일합병으로 나라를 빼앗기고나서, 10년 후,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발발하였고, 그 이듬 해, 중국 상해에 집결한 대한민족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은, ‘황제의 나라’, ‘大韓帝國’을, ‘백성의 나라’, ‘大韓民國’이라고 고쳐 부르며,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였다. 또한 大韓은 三韓은 물론, 지금의 요령성과 길림성 지역의 옛 고구려와 발해의 강토를 포함하는 大韓民族의 국가들을 의미하고 내포하는 것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세계 2차대전이 끝나고, 美.蘇. 양대국의 점령하에 남북이 분단되자, 온갖 난관을 극복하면서, 특히, 남한의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실행하려는 정권과 북한의 소련식 自由不在 공산주의식 정치 조직의 충돌로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3년 후에서야, UN 대표 참관단을, 소련 영향하의 북한이 거부한 가운데, 1948년 5월 10일, 마침내, 한민족 역사상 최초의 자유 총선거가, 미국의 영향하에 있던 남한만이라도 우선 실시하여, 제헌국회를 결성하고, 7월 17일헌법을 제정 선포하고, 우리나라의 국호를, 임시정부의 전통을 이어받아, ‘大韓民國“이라고 제정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를 선출하였으며,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 세계에 공포하게 되기까지, 건국 전후에 천주교회가 하였던 역활을 알고 있는 국민들은, 심지어  현재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들 중에도 그리 많지 않으므로, 몇가지만이라도 우선 간추려 본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국내외에서 항일독립투쟁에 온 겨레가 힘을 모으고 있을 때, 천주교회가 한 일은 무엇인가? 너무나 많은 識者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 또 알아야 한다. 
 
사실 8월 15일가슴벅찬 우리나라 대한민국 건국기념일이다. 온 국민이 자자손손이 경축해야만 하는 뜻깊은 날이며, 건국 선조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날이다. 이 기회에 대한민국 건국 전후에 천주교회가 대한민국 건국에 힘을 보탠 역사를 더듬어 보자.
 
- 천주교회의 대한민국 건국활동사 개요-
 
대한민국 건국사에 美國 Francise Spellman 추기경 中國 우삔(于斌)대주교, 한국 노기남(盧基南) 주교,등의 잊혀진 대한민국 건국 활동 略史.-
 
해외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외국인 주교들의 잊혀진 活動 略史와 2천년 천주교회사를 훑어보면, 하느님께서는 신도들의 애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天上의 聖人聖女들 축일이나, 특히, 사도시대부터 거의 1900여년 동안 천주교회 신도들이 기념하며 경축하는 천상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기념축일에 종종 무서운 전란이 종식되는 특은을 베풀어주시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도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1941년. 12월. 8일(성모 무염시태 축일)에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세계 2차대전은 마른 봄의 산불처럼, 특히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연전연승으로 확전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일본이 승리하는듯 하였다. 성모 마리아 축일에 전쟁을 일으키면, 성모 마리아 축일에 반드시 망한다는 중세 유롭의 속담이 있는데, 사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성모승천축일무조건 항복하는 패전을 당하였다.
 
그런데, 1935년 로마에서 대주교로 서품되어 뉴욕 대교구장이 된, 미국의 천재적인 영웅 성직자 Spellman 대주교는, 남미의 빈민국 푸에르토리코, 등 남미에서 수십년간 계속 몰려오는 60 여만명 밀입국 이민들을 보살피면서, Spellman 대주교 자신이 당시 약소민족의 설움을 체감하였으니, 우리 한민족역시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품팔러 가기 시작한 후로, 특히, 한일합방 후에는 일본의 압제를 피하여,대한독립운동차,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및 윤을수 신부, 등의 미국 내 조선인 입국자가 늘어가면서,미약한 대한독립 운동가들에게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Spellman 대주교, 당시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대통령에 4선까지 당선한 Franklin.Roosevelt 대통령과 절친한 오랜 친구 사이로서, 2차 대전 중에는 미국 뿐 아니라, UN 군의 육.해.공.군의 합동 군종사령관으로 Spellman 대주교를 임명하여, 3,300여명의 종군신부들과 2500여명의 군종 목사들의 총 지휘관으로 전투 현장을 누비며 장병들을 격려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의 가미가제 자살 공격 전투기를 맞아 침몰 중인 미국의 군함에까지 달려 가서, 병사들을 구출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동시에 Spellman 대주교미국 대통령 특사로도 임명되어, 중국(장계석), 영국(처칠), 소련(스탈린), 등 유롭과 아시아의 정상들을 수시로 방문하며, 전쟁 확대 예방과 축소, 종결을 위하여, 세계 평화 조성을 위해 동분서주하므로서, 당시 Spellman 대주교는  미국 내에서 軍.官.民과 정치계에서 최고의 존경과 신망을 받는 고위 성직자였다. 특히,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종종 건강에 불편을 느끼던 Roosevelt 대통령의 해외 국제회담 외교업무에도 함께 동행하며 참여하는 일이 적지 않았고, 불가피하였다.
 
특히,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종종 건강에 이상을 느끼던 Roosevelt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으로, 해외 국제회담 업무에 함께 동행하며, 참여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사실 영국의 쳐칠 수상과 함께,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Roosevelt 대통령은 그의 자문역이며, 해외 전권특사이기도 했던, 연합군 군종 총 사령관으로 정신전력의 化身이었던 Spellman 대주교의 제안과 추진력에 힘입어, 당시 국제회의 말썽꾸러기요, 이기주의 유물론 공산주의자 스탈린을 어렵게 설득시키면서,국제연합(United Nation) 창설의 주역이기도 하였다. 
 
또한Spellman 대주교는 틈틈히 강의와 강론집 저술과 문학적인 詩文集 저작 발행에도 큰 자취를 남길 정도로, 천주교회의 목자요, 문학가이며,사상가이며, 국제 정상 외교관으로서, 특히,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전투 현장을 누비는 신출귀몰하는 군종 사령관이었다 
 
<미국 역사상 Roosevelt 라는 이름을 가진 대통령은 2명인데, 제26대 (1901~1909), 대통령Theodore Roosevelt (1858 生~1919 死)와, 4선 대통령(1932, 1936, 1940, 1944), Franklin Delano Roosevelt(1882生~1945死)을 구별해야 한다.
 
Theodore Roosevelt 는 1910년 한일합방과 전후와, 특히, 1917년에서야 종전한 세계 1차대전 직전의 국제 정세에 영향을 끼쳤고, Franklin Delano Roosevelt는 1945년에서야 종전된 세계 2차대전 전후와 전쟁 중에, 세계정세 영향을 끼쳤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국제연합군의 승리로 이끌어준 미국의 2명 대통령은 근대 인류 전쟁사에 위대한 인물들이며, Franklin D.Roosevelt 대통령이 U.N. 창설을 주도하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그의 자문역이었던 뉴욕 대교구장 Spellman 대주교의 천재적인 선견지명과 안목은 U.N.창설의 설계자요 추진의 원동력이었다.>
 
1943. 11월. 27일, Spellman 대주교는 에집트 Cairo 회담 전후에도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을 최측근 동행하며 옆에서 보좌하며, 대통령 특사로서 약소민족들의 自治權, 특히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당시 세계의 유력한 관련 4대 강국 정치 지도자들을 일일히 일부러 찾아가 만나서, 정복주의를 단념케 하고, 약소민족들의 자결주의를 설득시키는데 주력하였다.
 
당시 중국 장개석 총통의 정치 고문으로 장총통과 절친한 南京 대교구장 우빈(于斌) 대주교까지도 일부러 찾아가 만나서, 조선의 독립과 약소민족의 민족자결주의 當爲性을 알리며, 약소민족들의 독립국가 수립,지원을 강조하였다. 히틀러의 독일과 일본의 약소민족 점령주의를 막아야 한다는데 Spellman 대주교는 굳은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1945년 7월 26일, Spellman 대주교는 포스담(Potsdam), 회담에까지 루스벨트 대통령과 함께 가서, 회담에 참석한 장개석 총통과 처칠 수상,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등에게 약소민족들의 民族自決主義, 특히 大韓獨立 지원을 배후에서 틈틈이 역설하며, 루스벨트 대통령 특사의 역할도 하였다 .
 
당시 미국에 머물며 한국독립 운동에 투신하던 이승만 박사가 훗날 귀국하자마자 노기남 주교의 주선으로 마련된 명동대성당에서의 귀국 환영식 중에, 또 중국에 머물다가 좀 늦게 귀국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金九 主席도, 귀국하자마자 명동대성당에서 개최한 임시정부 요인들 귀국 환영미사 중 답사에서, 이승만 박사와 김구 주석은 각각 공식적으로 남경 우삔 대주교와 뉴욕 스펠만 대주교로부터 받은 성원를 공식석상에서 정중히 언급하며 천주교회의 주교들과 신도들에게 깊히 감사할 정도였다.
 
1945년 8월 15일, 성모 승천대축일에 마침내 일본 소화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므로서 제2차 세계대전은 종식되었다. 미국의 원자폭탄 2개 투하로 항복하였다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일본은 무서운 군사제국이었으므로, 일본 군 장병들에게, 후퇴나 항복, 같은 개념이 없던 아주 독종 군사대국이었다. 일본이 항복하게 되기까지는, 로마 교황이 앞장서서 보이는 모범과 호소에 응답하는, 전 세계 천주교 신도들의 뜨거운 기도와 ,일본, 독일의 점령주의 전쟁에 대한 강력한 비난 여론 조성과 각종 민간 대회와 행사와 궐기대회가 연일 폭격 속에서도 계속되었다.
 
전 세계 모든 천주교신도들이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시며, 지상의 신도들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을 간청하며, 특히 국내에서 뿐 아니라, 해외 하와이나 로스안젤리스, 남미, 등지에서까지, 나라없는 우리 한민족이 바치던 愛國歌 祈禱 소리,"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가 그치지 않음으로, 하늘의 손길이 일본의 소화천황 마음을 움직여도록, 또, Paris, London, Bruxelles, Berlin, 등, 전 유롭이 불바다가 되는 현실에서, 초국가적으로, 신도들이 총동원되어, 천상천하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으로 反戰과 勝戰 노력에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우리, 대한 독립을 열망하는 우리 겨레는,"大韓 사람 大韓으로 길이 보전하세!"를 모두 매일 수없이 불렀다. 교황 Pius12세 (본래 이름은, Eugenio,Maria Giuseppe Giovanni Paccelli)는 일찌기 교황청 국무성 차관 대주교 시절부터, Spellman 신부와 함께 일하여, 서로 친숙한 사이였고, 독일 Hittler 정권과 日本의 軍國主義者들이 광분하던 정복주의 전쟁을 중단시키고, 약소민족들의 민족자치주의 방향을 위해서, 특히 한국순교자 79위 시복식 후부터, '대한독립' 을 위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Spellman 대주교의 활동을 지지하였으며, 사실 몇년 후, Spellman 추기경은,차기 교황 선거 때, 새 교황물망에까지 가장 유력하게 올랐던 분으로 널리 알려졌었다. 
 
드디어 해방이 되자, 1945년 9월 8일 성모성탄일 축일에 미군은 한민족의 해방군으로서, 이미 평양에 입성한 소련군보다 한달 늦게서야 인천에 상륙하여 입국하였으며, 남한 내의 일본군 무장해제와 정권 접수를 현실적으로 진행시켜, 다음 날 9월 9일에는 미군 지휘관들이 서울에 입성하였다. 그런데, 사실, 소련은, Hyroshima에 미군의 원자폭탄이 두하되어(1945년 8월 5일, 오전 11시), 일본의 패색이 확정되자, 3일 후, 소련이 비로서 대일 선전 포고를 한 후, 총 한방 쏘지 않고, 전투할 겨를도 없이, 일본에 대한 승전국이 되었으며, 북한 지역 점령에는 약삭빠르게, 미군의 서울 입성보다 한달 일찍 평양에 들어 왔다.
 
Spellman 대주교는 미국 대통령 특사로서 2차대전 중에 전 세계를 순방하며, 전쟁 종식과 국제 평화정착을 위해 눈부신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태평양 전쟁 발발로 미 육해공군 군종 총사령관으로서 전투현장들을 방문하며 장병들을 격려하던 차, 일본이 항복하자, 미군 하지 중장(Lt. General Hodge)을 대동하고, 9월 9일 서울에 입성하자마자, 일본의 조선총독부(중앙청)에서 하지 중장과 함께 일본 총독의 항복서명 문서와 함께 공식항복을 받았고, 일본군의 무장해제 및 그 때까지만해도 일본이 잡고 있던 국내 치안 담당의 행정권을 인수하였다.
 
1945년, 9월 9일,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조선교구 설정 기념일, 오후 5시에는 즉시, Spellman 대주교가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과 함께 명동대성당에 와서 노기남 주교의 환영을 받으며, 태극기와 성조기를 내걸고, 사회 요인들과 함께 대한민국 해방과 연합군 승리를 감사하는 경축미사를 바쳤다.이날 점령군 사령관 미국 하지 중장이 명동대성당 마당에서, 경성 시민들과 특히, 조선독립운동가들이 보는 앞에서, 땅에 무뤂을 꿇고,조선인 노기남 주교의 손에 입을 맞추며 존경스러운 인사를 올리는 장면은 실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였으며, 6.25 사변 후까지도,  우리가 대신학생 이었을 때도, 그 소문이 추억으로 되풀이되어, 노인 회장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일찌기, 1925년 7월 5일,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을 전후하여, 이미 탁월한 역량을 지닌 스펠만 신부는 당시 로마에 머물면서 Paccelli 대주교(후에 교황 비오12세)와 함께 일하며, 한국 순교자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미국에서부터 수 년간 대한독립을 위하여 활약하였던 스펠만 대주교는 환영 답사에서, “79위 저 순교복자들 그림은 로마에서 본 낯익은 성화이며, 순교복자 성가도 귀에 익은, 들었던 것”이라며, 한국순교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였다.
 
1945년 9월 26일, 한국순교복자 79위 대축일에 노기남 주교는 명동대성당에서 미 군정장관 Arnold 소장과 고급 장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2차세계대전 종식으로 세계평화 회복을 주신 천주님과 이를 도와주신 성모님께 감사미사를 드렸고, 하지(Hodge) 중장은 부득이한 정객들 면담으로 불참하는 대신 전쟁종식 경축 멧세지를 보냈다.
 
그런데 점령군 사령관 미군 장성들과 영관 장교들은 명동대성당 예식에 올적마다 성당마당에서 많은 국내 요인들이 보는 가운데 땅에 무뤂을 꿇고 노기남 주교에게 깊히 절하면서 노기남 주교의 손가락에 낀 반지에 입을 맟추었다. 이는 당시 한국 지성인들과 사회 요인들을 엄청나게 놀라게 하는 광경이었고, 서울 시내에는 그 소문이 한동안 자자하여 오래 갔다. 36년간 일본에 점령당하여 무시를 받아오던 한국인들은, “천주교의 빨간 치마 입은 남자, 주교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지위의 인물이기에, 의기충천하던 점령군 사령부의 미국 개선 장군들도 만인이 보는 앞에서 한국인 노기남 주교에게 땅바닥에 무뤂을 꿇고 깊히 절하면서, 노주교의 손바닥에 입을 맟추는가!?”하며 놀라와 하였다. 천주학쟁이로 처형되던 한국에서, 천주교인들의 위신이 급상승하였다.
 
1945년 10월 16일, 미국에 머물던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자마자 바로 다음날, 노기남 주교를 제일 먼저 예방하는 자리에서, 이승만 박사는, 미국서 Spellman 대주교와 G.M. Carrol 안신부와 재미 한국인 尹乙洙 신부, 및 중국 南京의 우빈(于斌) 대주교로부터 그동안 대한독립을 위해 받은 크나큰 특별 지원에 아주 진솔하게 정중한 감사를 표하였다.
 
만주 벌판에서 굶주림과 추위로 고생하며 싸우던 우리 독립군들의 전투현장 외에, 세계 4대 강국 지도자들에게 직접 대면하여 수시로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말을 할 수 있던 사람은 미국 뉴욕 대교구장이며 루스벨트 미 대통령 특사였던 스펠만 대주교와 중국의 장개석 총통 정치 고문이었던 南京 교구장 우삔 대주교 뿐이었다.
 
1945년 12월 8일 성모무염시태 축일에는 1주일 전(12월 2일),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이 하나 둘씩 거의 모두 귀국하여, 여정을 풀자마자, 노기남 주교는 명동대성당에서 임시정부 요인들, 金九 主席과 金奎植 박사, 등을 위하여 환영미사를 함께 드렸고, 조국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그동안 임시정부의 피나는 역활과 노고와 희생에 감사를 드렸다. 상해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 환영 큰 공식행사로서는 유일한(?) 행사였다. 이미 정파와 귀국 일자, 등이 통일된 단일행사가 어려웠다. 
 
이 날 환영행사 중에, 김구 주석은 공개적인 석상에서 답사를 통하여, 그동안 대한독립을 지원한 중국의 장개석 총통과, 그 정치 고문이었던 우빈 대주교의 협력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특히, 1943. 11. 27. Cairo 회담에서, 미국의  Roosevelt 대통령의 해외 미국 대통령 특사로 활약하던 스펠만 대주교의 성원은 지대하였음을 밝혔다. 또한 1945. 7. 26. 포스담(Potsdam), 회담에까지 장총통과 함께 참석하여, 회의참석자들,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장개석 등에게 회의를 전후하여, 약소민족의 자치권과 특히 대한독립을 역설해준, 천주교 Spellman 대주교의 지지와 성원에 깊히 감사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오랜 세월 일본의 속국 국민으로 숨을 죽이고 숨어다니던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 요인들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으랴!
 
1945. 11. 1일, 천주교회의 위령의날 축일에는 노기남 주교가 명동대성당에서 2차대전 중에, 특히 오끼나와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서 전사한 연합군 전사자들과 특히 미군 전사자들 수 만명의 영혼을 위하여, 미 점령군 사령부의 민정장관 Arnold 소장과 많은 미군 장병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합동위령미사를 드렸다. 이때까지만해도,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한국을 미국처럼 생각하고, 서울과 전국에서의 각 정당 창당을 자유화하여, 공산당, 특히 남노당(南朝鮮勞動黨)이 발빠르게 조직화하며, 활발히 확대하여 나갈 때였다.
 
그리하여, 한국 천주교회가 反共精神으로, 정치에 관심을 갖게 한 것은 북한의 공산당이 1945년 가을부터 북한 땅에 있던 여러 신부들과 수녀들을 체포하고, 교회 건물을 몰수하며, 천주교 박해를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특히 서울에서 精版社의 위폐제작 살포사건이 발각되면서 천주교회는 더욱 反共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1946년 성모성월의 5월 7일, 당시 解放日報, 人民報, 등 남한에서의 공산당 기관지 발행자들은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화폐 인쇄소 치카자와인쇄소(近澤印刷所)를 발빠르게 차지하여, 精版社로 개명하고, 朴洛鐘과 宋彦弼, 등을 시켜 엄청난 위조지폐를 발행, 살포하여 경제대혼란을 일으켰으나, 곧 발각되어 체포되고, 曺在千, 洪以燮, 같은 저명한 검사 판사들에 의해 밝혀져, 주모자들은 미리 도피하고, 박낙종과 송언필 등만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美軍政廳에서는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인쇄소 정판사를 당시 사상적으로 믿을만한 천주교회가 접수케 하여, 大建印刷所로 개명하고, 梁基涉 신부를 사장으로 임명하여, 출판사 준비를 시작하였다.
 
1947년 8월 1일부터 京鄕新聞(서울신문 전신).을 발행하게 되었으니, 이는 1906년에 창간하여 발행하여 오다가 일본이 폐간시켰던 京鄕雜誌의 복간 이상으로, 옛 月刊을 日刊으로 과감히 바꾼 발전이었다.
 
1946년 9월 16일, 김대건신부 순교기념일에는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3일간의 강연회, 음악회, 등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1935년에 일본이 폐지한, 韓國殉敎者顯揚會를 재결성하였다. 이 해, 12월 12일, 점령군사령부에서는 한국 民政權을 한국인들에게 이양하여, 民政長官에 安在鴻 씨가 임명되었는데, 국내 治安을 위하여, 立法議院 구성에 천주교 대표로 장면 선생이 추천되어 참가하였다.
 
1946년 10월 9일, 미국 메리놀회 Byrne 번 신부가 초대 한국 교황대사로 임명되어 입국하자, 3일 후, 10월 12일에 명동대성당에서 노기남 주교는 환영미사를 드리고, 18일에는 미군정청과 천주교회가 古宮, 秘苑에서 환영 축하연을 공동개최하였다.
 
아직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2년 전으므로, 로마 교황청이 전 세계에서 최초로 우리나라(Corea) 대한민국을 독립국으로 승인하고, 교황대사를 임명한 것이다. 따라서 대사로서 제출하는 신임장을 받을 우리나라의 국가 원수도 아직 없을 때였다.
 
1947년 7월 7일에는, 일본이 폐지시킨 조선 천주교 청년연합회를 재결성 확대개편하고, 요한 장면 선생을 회장으로 선임하였으며. 8월 5일에는 천주교 여성청년연합회도 결성하였다. 천주교회도 정치적인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때였다. 북한에서는 평양 주교좌 대성당, 원산 주교좌 대성당, 함흥 주교좌 대성당, 연길 주교좌 대성당, 신의주 성당, 등의 천주교 성당들을 빼앗아 인민위원회 건물로 쓰면서, 신부, 수녀들을 체포 구금하며, 박해가 날로 심해질뿐더러, 남한에서도 남한의 순수한 村民들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실로 조직력을 가진 공산주의자들만이 일으킬 수 있는 대규모 放火와 폭동과 반란이 대구, 여수, 순천, 제주, 등 각처에서 그칠 날이 없어, 천주교회도 자발적으로 반공투쟁 노선에 앞장서게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U.N. 감시하에 남한에서만 5천년 역사에 최초로 자유 총선거를 실시하여 198명 제헌국회의원들이 선출되었다. 천주교 대표로 장면씨도 당선되었다. 그러나 U.N.감시단의 입국을 거부한 북한지역은 자유 총 선거가 시행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에 드디어 국회가 구성되었으므로 ,6월 20일에 노기남 주교는 모든 국회의원들과 정계 요인들을 초청하여 명동대성당에서, 대한민국 독립 축하 경축미사를 드렸다.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 박사는 축하 답사에서, “대한독립을 위해 해외에서 특히 미국 스펠만 대주교와 중국 우삔 대주교의 국제적인 지원활동에 대하여 천주교회에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표하고, 앞으로도 천주교회가 국가를 위하여 크게 이받이해줄 것을 믿고 기대하며 요청하였다. 뒤이어 제정된 헌법은 7월 17일에 선포하되었고, 이를 근거로 정부조직법, 12부 4처의 장관 임명, 등이 이루어져 대한민국 정부 조직이 우선 마무리되기에 이르렀다.
 
1948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는 헌법에 근거한 정부조직법을 따라 내각을 구성하고 드디어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며, 절대다수 지지표를 받은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나라는 로마 교황청 외에 아직 하나도 없었다. 그리하여 이 해 9월 21일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U.N.총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를 U.N.이 승인하도록, 대표단을 파견키로 하였다.
 
수석대표로, 장면 선생 외에 조병옥 박사와 모윤숙 여사, 김활란 여사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우리나라의 국제 관계가 전무하던 시절이고, 국가 재정역시 빈약하여, 우리나라는 외교의 황무지 개척에 천주교회의 지원으로 실로 기적과 같은 결실을 내게 되었다.
 
특히, 북한 공산당의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대부분의 성직자들을 체포, 구속, 처형되어, 교회를 박해하는 북한정권보다는 신앙의 자유가 있는 남한 대한민국 정부의 U.N. 승인을 위해, 천주교회는 로마 교황청과 대사관계를 맺고 있던 전 세계 70여개국 모든 나라의 외교부와 모든 국제 조직을 총동원하였다. 당시 노기남 주교는 주한 교황대사와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장에게 간청하여, 전 세계 70 여개 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로마 교황청의 지원과, 파리외방전교회를 통하여 프랑스 정부의 지원, 그리고, 메리놀회를 통하여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한국 대표단 3인의 업무를, 자기들 일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심지어 한국대표단 3인의 숙소도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길 건너에 있는 Lutetia 호텔 2층에 잡아주었고, 사무실과 타자기부터 시작하여 모든 업무에, 특히 각 언론기관과 각국 대표단 도착일과 숙소, 초청, 면담, 신생 대한민국 정부 승인 설득 사전 섭외, 등 일체를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파리 교황대사관과 함께 주선하여 주었다.
 
2차세계 대전 후 아직 전 세계 외교가의 질서가 정립되기 전이라서 U.N. 총회는 12월 초에 가서야 끝나게 되었다. 사실 대한민국 정부가 U.N.의 승인을 받는 데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의 능동적인 참여와 봉사와 협력이 지대하였다. 한국은 늦었지만 마땅히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의 노고에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파리를 지날 때마다, 종종 Lutetia 호텔 1층 식당에 가서, 옛날, 장면 선생, 조병옥 박사, 모윤숙여사, 김환란 여사, 우리 정부대표들이 늘 식사하던 자리에 가서, 옛 일을 되새며 식사하고 오는 습관이 있다.
 
1948년 12월 8일 성모무염시태 축일에 절대 다수의 국가들이 48대 6으로 대한민국을 승인하기로 확정하였으나 발표는 다음 날 9일에 하게 되었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몇몇 국가들의 반대 외에는 자유진영 대부분의 국가들이 우리나라 신생 대한민국을, 자기네 나라와 같은 정식 국가로 승인한 것이다. 당시 국내의 공산당, 특히 서울의 남노당 진영에서는, 통일 후 남북이 같은 한 나라로 승인신청해도 늦지 않는데, 왜 남조선만 혼자서 국가로 승인을 받느냐고, 연일 유엔 승인 반대 대회로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나 UN의 승인 후, 불과 1년 남짓하여,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무섭고, 잔인하고 처참한 전쟁이 시작되자, 전 세계 50 여개 국가에서 우리 대한민국을 지원하며,16개국에서는 전투병과부대 파견까지 하면서 참전하는데 있어, 1년 전 U.N. 총회의 승인은 여러 참전국들에게 참전의 근거와 합당한 이유를 주는 큰 힘이 되었다. 이 때 비로서 우리 선배 노인 사제들은 [성모님 축일의 신비로운 섭리]를 느꼇다고 한다.
 
1949년 1월 1일, 로마 교황청 다음으로 미국이 대한민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는 두 번째 나라가 되어, 한.미 국교관계가 수립되었다. 이 해 6월 14일에는 메리놀회의 Byrne 번 신부가 주교로 임명되어 축성되고, 경축미사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위시하여 3부요인들이 명동대성당 예절에 대거 함께 참석하였다. 이 해에 대통령 특사로 임명된 장면 선생은 교황청을 방문하고, 교황을 알현하였으며, 주미대사로 임명되면서, 미국의 3개 대학교로부터 차례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아, 그 이후로는, 국내에서도 “장면 박사”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 건국 전후, 선배 성직자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당시 한국의 저명한 지도자급 主要人士들이 천주교회로 입교하게 되었다. 몇몇 분의 예를 들어보자.
 
평소 백범 김구 주석과 대화를 나누며 천주교 입교를 논하던 박병래 박사(성모병원 원장)는, 1949. 6. 26. 김구 주석이 저격을 받아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가서, 운명 전의 金九 主席이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대세를 받고 눈을 감고 운명하도록 도왔다.
 
그해 11월 20일에는 鄭春洙 목사(감리교 總理師, 3.1. 독립선언 33인 민족대표 중 1인)가 개종하여, 바오로 본명으로 노기남 주교한테 영세하였다.
 
洪震(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장, 귀국 후, 非常國民會 議長) 의장이 南相喆 회장 권유로 입교 영세하였다. 계속하여 많은 지성인들이, 특히 전쟁 후에는 명동대성당에서 윤형중 신부가 맡아하는 신입교우들을 위한 교리강의에 매회 신규 모집 때마다 지성인들 6,7백여명씩이 청강하여 입교하였다.
 
六堂 崔南善 선생은, 3.1.운동 독립선언 33인 민족대표 중 독립선언문 초안자로 근대 우리나라의 大碩學으로서, 육당 선생의 천주교 입교는 한국 지성인들 사회를 크게 놀라게 하면서, 대단히 큰 영향을 주었다. 1957. 11. 17. 영세 바로 다음 날, 한국일보와 당시 라디오 방송에, “나는 왜 불교에서 가톨릭으로 改宗하였나?”라는 발표를 하여, 온 국민을 더더욱 놀라게 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38선 전역에서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서울이 3일만에 점령되고, 수원이 1주일만에, 대전이 3주일만에 북한 공산당 인민군들 한테 점령되면서, 실로 많은 성직자들과 회장들이 체포, 감금, 고문, 처형되었다. 미국에서는 Spellman 추기경(1946년 서임)이 장면 대사를 도와, 미국과 U.N.이 공산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구하도록,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Carroll 몬시뇰이 한국 전쟁 난민 구호에 미국의 온 국민이 나서서 힘쓰도록, N.C.W.C.를 결성하여 지원하였고, 휴전 후에도, Spellman 추기경은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고, 특히 성탄절을 전후하여, 휴전선에 근무하는 장병들을 위문 격려하므로써, 과거 젊은 날 2차대전 중 연합군의 군종 사령관 시절의 정신과 사명을 잊지 않고 계속하였다. 후학들은 Spellman 추기경에 대하여 특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대한민국 건국사에 있어서, 천주교회 역활의 역사적 사실은, 이승만 대통령 정부 시절, 천주교회가 일반 국민들 사이에 인끼가 높아가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일부 특정 종교인들이 서서히 묻어버리려는 의도에 의해서 점점 가려지고, 잊혀지게 되고 있다고 느끼는 동시에, 우리 천주교회 자체도 우리 선각자들의 역사를 후대인들에게 가르치고 알리는 데 너무나 소홀히 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1949년 6월 말 현재 당시 한국 교세 통계와 2013년 현재 통계 비교.
 
1949년 현재, 전국 6개 교구에, 주교 6명. 한국인 사제 144명(2013년, 현재 4,647명), 외국인 사제 58명(현재 166명), 신학생 184명(현재 1,587명), 수녀 한국인 385명(현재 10,146명). 전국 본당 131개(현재 1,647개), 당시 서울의 본당은 14개(현재 226개), 신도수 북한 교우 10만내외 추산을 제외한 남한만의 신자 수는 15만 8천명(현재530만명이고, 영세예비 신입교우는 8,516명이다. 당시 서울시민은 150만(현재 1,200만) 내외였다.
 
그러나 해방 후부터 특히 1950년 6. 25 사변을 전후하여, 북한 공산군한테 체포, 구속, 고문, 처형된 성직자는 주교 5명, 사제 82명(그 중 5명이 김수환 추기경 동창생 신부들)과 수녀 35명, 대신학생들과 수사들 29명 등. 우리나라의 어떤 박해 때도 150여명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1, 2년 동안에 이처럼 150여명이나 처형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아직도 처형된 대부분 성직자들의 무덤조차 모르고 있다. 지금도 북한 땅에는 천주교 신부, 수녀가 단 1명도 없으며,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참조.- 柳洪烈 박사  著, 한국천주교회사, 下권, 제111장, 민족의 해방과 교회 발전> 1962. 가톨릭출판사 발행, 및 CATHOLIC ENCYCLOPEDIA FOR SCHOOL & HOME, vol. 10.  1965, McGRAW-HILL BOOK COMPANY, New York, London, etc.,,,.>
 
지금 한반도를 중심으로 국제정세가 점점 전쟁위험이 고조되고 있는 상태로서, 북한의 계속적인 핵무기 개발,시험으로 우리나라는 강대국들의 각종 신무기들이 집합하여 대목장이 서기 시작하는 가운데, 최근 서울과 대도시에서는 '대통령 탄핵 촛불 시위'와 '탄핵반대 태극기 애국 궐기대회'가 대대적으로 연일 개최되고 있읍니다. 한편에서는 국정농단이라고 대통령이 하야하라고 野壇法席이고,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며, 태극기를 들고나와 궐기하는 편에서는, 탄핵이란허위 조작, 과장, 음해라며, 시위목적이 대통령 하야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의 조직 弱化와 無力化, 나아가, 국가 정권 조직의 瓦解로, 국가사회를 스크램불(scramble)을 만들어, 사회혁명을 향한 반역적 선동이라고 맛서고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대한민국의 같은 국민으로서 같은 한 형제들이니, 서로 미워하거나, 심지어 같은 종단 안에서조차 편가르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 愛國心과 民族愛가 결여된 대회는 당파적인 선전과 선동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나라가 열강의 침략으로 조선왕국이 망하고, 大韓帝國마져 국운이 風前燈火같던 시절, 천주교회는 우리 민족정신을 지키고, 가꾸고, 아끼며, 일깨우기 위하여,'1905년부터, 국내에서 최초로 유일하였던 월간지 정기 같행물, '경향잡지'에 매월, '대한셩교샤긔(大韓聖敎史記)' 큰 제목으로 하여 연재하였으니, 15년 후,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이었고, 1920년에 상해임시 정부가 결성되면서,'大韓帝國'을, '大韓民國'으로 국호를 확정하기 훨씬 이전이었읍니다.
 
당시 국내 많은 선비들은, '朝鮮'이라는 국호 사용에 젖어 있던 시절, 천주교회는, 옛날 한반도의 '三韓'을 포함하는,'大韓民族'을 의미하는 '대한셩교샤긔'를, 큰 제목으로하여 경향잡지가 일본의 압력으로 폐간될 때까지 매월 특필대서하여 사용하였읍니다. 뿐 아니라, 로마 교황청은 함흥교구, 연길교구, 평양교구, 등을 설정하며 교구장 주교를 임명할 당시, 지금의 北間島 뿐 아니라, 西間島와 東間島, 등을 지금의 함경북도와 평안북도와 연결된 대한제국 관활로 삼아, 두만강과 앞록강 건너, 만주 쪽으로 100 km ~ 150 km 내외를 오늘의 兩江 國境을 무시하고,우리 대한민족의 거주지로 삼아 교구 경계를 삼았음은, 약소민족이었던 우리나라를 위한 교황청의 합리적인 정책에 우리는 모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흔히 종교단체에서, 애국가 봉창이나 태극기 게양을 꺼리지만, 우리나라 애국가는, "하느님이 保祐하사, 우리나라 만세"에서 보듯이, 하느님께 바치는 유신론적 사상을 지닌 나라의 國民的 祈禱"이며, 愛國歌에 이러한 국민적 기도가 포함된 나라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주 못되고, 고약한 이웃 강대국들의 침략의 칼날을 우리 힘만으로는 이기기 어려우므로, 몸부림치며, 하느님의 도우심과 천상의 힘을 간청하면서,민족의 정신적 단결을 부르짖는 애절한 표현이며, 또, "大韓 사람 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세! 에서 보듯이, 선조들과 후손들과 이웃을 사랑하는, 당연하고 건전한 민족주의 정신으로서, 매우 거룩한 기도입니다.
 
 우리민족의 이러한 국민적 애절한 기도의 결과로, 아시아의 최강대국이었던 일본을 반대하며, 당시 세계 4대 강국,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국가 원수들에게까지 수차례 직접 대한독립을 거론하며 제안하던, 뉴욕대교구장 Spellman 대주교나, 남경의 우삔 대주교 같은 분들이 하늘의 使者들처럼, 우리나라의 독립과, 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과 거의 동시에 국제연합, U.N.의 승인을 바도록, 당시 전 세계에서 70여개 나라와 가장 많은 대사관계를 맺고 있던, 로마 교황청의 후원이 가능하였으며, 6.25 기습남침으로 대구,부산 외에 남한 전체가 점령된 상태에서도 대한민국이 살아 남아서, 오늘날과 같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또 7대 무역대국으로 성장하고 엄존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서는, 매월 조국과 민족을 위한 월례 촛불 기도회 때마다, 또 큰 행사 때마다, 3m x 5m 크기의 태극기를 25m 높이의 국기 게양대에 드높이 게양하고, 애국가 봉창을 항상 4절까지 전 신도들이 불렀고대한민국 만세, 한국천주교회 만세, 등 만세3창을 지난 1985년 경부터 30여년 넘게 매월 불러왔으며, 더욱이태극기 게양은 큰 행사 때는 물론, 매일 24시간, 태극기와 교황기를 ,매일 24시간 게양하여 온 것입니다.  사실 천진암 성지에서 매월 촛불을 들고 기도하던 월례 초불 기도회]를 시작한지 5년 후에, 서울 광화문에서 효순이 미순이 영혼을 위하여, 광우병 미국 쇠고기 반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정치적 시위가 시작되어, 대통령에 당선된 신임 이명박 대통령이 뒷동산으로 피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보고, 우리는 기가 막혔읍니다. 이제 모두 보도폭력이나 시위폭력을 자제하고, 순수 애국심으로 국가와 민족, 자유민주주의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겠읍니다.-Msgr, Byon  
  
<유홍렬 교수 저, 한국천주교회사 下卷 1962. 참조, Catholic Encycloped. 1965. etc.,,,참조.- 柳洪烈 박사  著, 한국천주교회사, 下권, <제111장, 민족의 해방과 교회 발전> 1962. 가톨릭출판사 발행, 및 CATHOLIC ENCYCLOPEDIA FOR SCHOOL & HOME, vol. 10.  1965, McGRAW-HILL BOOK COMPANY, New York, London, etc.,,,.> 
Msgr. Byon. www.chonjinam.org/  2012. Agt. No.188.  참조./ 
www.변기영몬시뇰사랑방.kr퍼온 글 WIND BELL   
<다시 읽어보도록 붙이는 옛글> 
 
북한 핵실험에 우리 종교인들은 침묵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保守도, 進步도, 中道도,
 
모두 正道 위에서 걸어가야 한다.
 
 
태평양과 태서양 작은 무인도 여기 저기서는 미.영.불 등 서방 강대국들의 핵실험이 1990년대 들어 계속되었었다. 제주도 만큼씩 한 불덩어리가 바다 속에서 터지니 해수 온도 상승은 물론 기류 이변 원인이 되어, 의외의 지역에까지 엘리뇨와 라니냐 등으로 태풍과 폭우의 기후 이변이 극심하게 되어 수십만 명씩 이재민이 나고 있다. 아시아 대륙의 고비 사막과 북극 凍土에서는 중.소.의 지하 핵실험으로 사천성 지역에까지 지진이 확대된다고 하였었다.
 
 
세계 도처의 지성인들과 성직자들은, 특히 교회는 이에 반대하며 중단하라는 경고를 큰 목소리로 외쳤었다. 천진암 성지의 다국어 홍보물에서도 용기를 내어 거론하였었다.(Berceau de l'Eglise
Catholique en Coree No. 12. 1994. 5. 25./이달의 천진암 불어판 제12호 ). 뒤이어 2개월 후,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그 전부터 준비해오시던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 실험 제조 금지를 역설하시며, 국제사회의 무기거래 밀무역이, 일반 생필품 무역에 못지 않다는 보도가 한창일 때, 그 현실을 개탄하시며, 각국 지도자들의 시급한 각성과 시정 결단을 강력히 촉구하셨다.
 
 
북한에서 지하핵실험이 예상된다는 보도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군사 전문가들이나 정치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사시에 불행히도 악용되어 무기화할 때, 몇 명 안되는 그 전문가들만이 죽거나 다치기야 하랴? 모든 인류와 세계에 파멸의 가공할 위협이며 심각한 당면 문제가 아닌가?
 
 
더구나 핵무기가 국가나 정권을 지키지 못하며, 핵무기로 돈을 벌 수는 없다. 구 소련이 핵무기가 없어서 무너졌는가? 핵무기가 적어서 경제난으로 백성들이 굶주렸는가? 中共이 지금 이만 큼 밥술이나 먹게 된 것이 핵무기 덕택이 아니다. 등소평의 개방 덕분이다.
 
 
핵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무서워서 미국 상품을 사주는 나라는 없다.
핵무기로 남북통일을 이룰 수는 없다. 전쟁을 좀 덜 마다하는 강대국들을 끌어들일 뿐이다.
 
 
심각한 북한 핵 문제를 놓고 보수와 진보가, 마치 해방 후 모스크바 삼상회담 직후처럼, 서로가 옳다고 떠들며, 차라리 중도를 걷자는 비굴하고 무책임한 政治家然하는 자들이 없지 않다. 良心도, 愛國心도, 事理 판단력도, 洞察力도 없는 사람들이 설치고 있는 것이다.
 
 
핵문제가 어디 정치문제며 사상문제며 노선문제란 말인가? 핵문제에는 保守도, 進步도, 中道도, 南韓도, 北韓도, 社會도, 宗敎도, 天主敎도, 佛敎도, 따로 무관하게 있을 수가 없다.
 
 
사실 保守도 아닌 사람들이, 더구나 進步도 아닌 사람들이, 더더구나 그건 中道가 아니고,
양다리 걸친 타협이란 이름의 책임회피와 직무유기를 다반사로 여기는 사람들이 현명하고 정상적인 지도자들처럼 보이려고 한다. 실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여기에는 오직 正道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오늘날 保守도 아니고, 進步도 아니며, 더구나 中道는 더욱 아니고, 오직 正道로만 나아가야 한다! 세상에는 뒤엉킨 길도 많지만, 바르고 곧은 길은 하나 뿐이 아닌가? 길가를 스치는 바람은 길이 아니다. 나무잎을 흔들며 지나갈 따름이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 사회가 나아갈 길은 保守도 아니고, 進步도 아니며, 그렇다고, 더구나 中道도 아니니, 오직 正道로만 나아가야 한다. 정치인도, 司法人도, 언론인도, 종교인도, 아니, 우리 국민 모두가,! 물론, 進步도, 保守도, 또 中道역시, 모두 正道 위에서, 正道만은 벗어나지 말아야만 하겠다!
 
 
進步가 正道를 벗어날 때, 모험과 위험의 함정으로 빠지는 길이 되고,
또 保守가 正道를 벗어나면, 기득권 유지 위한 부패로 인하여, 퇴보와 패배의 길로 가게 된다.
모두가 모를 수 없는 正道는 애국심과 신앙심과 양심이 가르쳐 주는 것이니,
이는 국가와 민족과 가정의 바탕이 되는 힘이다.
강대국의 國力이란 군사력이나 핵무기나 경제력이 아니라, 그
바탕이 되는 正道를 걸어가는 國民意識 수준이다.
 
 
사실 中道는 오늘날 우리 사회 안에서 거의가 타협의 산물이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약자의 몸부림이며, 반대와 방해를 피하면서, 존경과 영광과 추앙을 받고, 인기를 얻고자 하는 이들이 양편에서 던지는 돌에 맞을 용기가 없어서, 아주 비겁한 무골충이나, 보호색 변신만능의 오징어 같은 인생길을 찾는 이들이 가는 숨바꼭질 옆길이다.
 
 
인간사회의 외형을 규정하는 中道는 결코 우리가 걸어갈 正道가 아니다.
특히 지도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아니다.
 
 
따라서 비록, 中道가 오늘날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절충과 타협의 길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벗어나서는 아니 되는 正道는 아닐 때가 허다하다. 그런데 본래 正道로 향하는 길은 쉽고 편한 길이 아니라, 외롭고, 괴로운 길이다.
 
 
그러기에 文度公 요한 丁若鏞 承旨도, 1827년 늦봄, 65세의 노구를 이끌고, 어린 시절 자신이 10여 년간이나 공부하던 母校, 天眞菴을 마지막으로 다녀가면서, 고달프고 서글픈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 때나 이때나 나는 항상 한평생 괴로운 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한척의 조각 배 신세로세”(猶然苦海一孤舟).
 
 
그렇다. 正道는 올바른 길이다. 이 길은 걸어가기가 매우 외롭고 괴로운 길이다. 이 길을 가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외롭다. 또 正道가 있는 이 세상에는 굽은 길들이 뒤엉켜 있는데다가, 우리 자신들도 正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君子에게 있어서 中道는 必勿樂行해야 하며, 正道는 고독한 苦行의 길임을 각오해야 한다. 지쳐서 땀에 젖은 이마를 식혀주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은 正道가 아니고, 아예 길도 아니다. 길가와 길 위를 스치고 지나며, 나무잎을 흔들고 갈 뿐이다. 오늘날처럼 선풍기 만능시대에는,,,,!,
 
 
중국 태산의 절벽 아래를 굽이굽이 흐르는 三峽 계곡에서 돛단배를 타고 내리며, 허다한 갈림 길 나루터마다 내려서, 나룻배 다시 바꿔 갈아타고 오르내리기를 거듭하는 나그네의 여로처럼, 우리네 인생길은, 李白의 표현대로, “참으로 다니기도 어렵고. 살아가기도 힘든 길이다. 내리고 또 탔다가 다시 내려서 갈아타야만 할 갈림 길이 많기도 하기에!”(忽復乘舟夢日邊,行路難!,行路難!,多岐路!,,,)
 
 
어제의 進步는 오늘에 와서 保守가 되고, 그 사이에는 당장은 가장 지탄을 덜 받아 좀 안전한 中道가 있다지만 거기는 박쥐들이 왕노릇하는 동굴이 있을 뿐이다. 정치도, 사업도, 정당도, 정책도, 사람도 종교도 수시로 바꾸며, 모든 것을 다시 바꾸어 가며 살더라도, 누구도 바꿀 수는 없는, 또 바꾸어서는 아니되고, 반드시 함께 걸어가야 하는 正道는 벗어나지 말도록 하자 ! 그래야만 참되고 올바른 保守와, 진정한 進步와, 초탈한 中道가 보일 것이다.
 
 
保守도, 進步도, 中道도,
모두 正道 위에서 걸어가야 한다.
특히, 지도자는 외롭고, 괴롭고, 고달픈 正道를 걸어가야 한다!!!
 
 
Msgr. Byon
 
 
----------------------------------------------- 
 
오늘날 강대국들은 핵무기 제조와 보유를 반성해야 한다.
2012년 서울의 핵 관련 세계 정상 회의 개최를 당하여 20년전 小考를 다시 뒤적여 본다 !
-1994. 5. 25. 강론 초
-
 
핵무기를 먼저 개발하고 제조하여 보유하고 있으면서, 약소국들과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강대국들이다. 「강대국」이라는 사실 자체가 가장 「큰 무기」이기 때문에 핵무기가 없어도 아무런 위협을 받을 수 없는 것도 강대국들이다.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는 「맹수」라는 그 자체가 하나의 무기이므로, 별도 무기가 불필요하나, 스컹크 같은 연약한 동물들은 독한 방귀 같은 자신 보호무기가 필요하듯이, 사실상 핵무기 개발 제조 보유의 필요성은 약소국들에게나 있음직한 구상인데, 오늘날 핵무기란 강대국들이 먼저 만들어가지고 갖가지 목적으로 약소국들에게 겁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이들은 어른들한테서 거짓말과 욕설을 배우듯이, 약소국들이 핵무기 보유병에 전염되어, 강대국 흉내를 내보려고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인데, 따지고 보면 그 책임이 먼저 「강대국」들에게 적지 않다. 그러므로 핵무기 사찰은 강대국들이 먼저 약소국들한테 수시로 받아야 할 일이며, 또 만일, 약소국들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강대국들을 점령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핵무기 폐지는 강대국들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할 일이다.
 
특히 우리가 근세에 와서, 대륙 민족들로부터의 1637년 병자호란과 해양 민족들로부터의
1593년 임진왜란 등을 겪으며, 비참한 전란에서 살아남은 선조들의 후예인 우리로서는, 특히 통일한국을 내다보면서, 핵무기 보유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 오늘 우리나라
대한민국 국민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약소국이든 강대국이든 간에 제 정신을 잃은 각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은 핵무기를 최후로 의지하는 대상인 처럼 모시고 받들고 있다. 즉, 핵무기 신앙시대. 그러나 핵무기란 장기 독재국가들의 체제 유지나 빈곤한 국가들의 경제발전에 백해무익할 뿐이며, 각국의 자국 방어나 타국 침범에도 사실상 실용성이 없는 무기이다. 남북통일을 위해서도 분명히 무용지물이다.
 
예를 들어, 소련이 핵무기가 없어서 와해되었으며, 아직도 빈곤에서 허덕이고 있는가? 소련의 핵무기가 미국의 핵무기보다 성능이 낮고 분량이 적어서 소련의 와해를 막지 못하였는가? 따라서 미국은 핵무기 덕택으로 현 체재를 유지하고 있으며, 경제발전을 이루었는가? 소련과 중공, 등이 핵개발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세계 인류 번영에 기여했을 것이며, 자국들도 더 잘 살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상 약소국들의 핵무기 보유가 미국에 위협이 될 수 없는 동시에, 약소국들 자신의 체제 유지에도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약소국 자신들의 조직 붕괴에 가속제가 되고, 빈곤심화의 촉진제가 될 뿐인데도, 전 세계의 정치가들은 인류자멸의 핵무기 개발, 제조 등에 엄청난 자금과 정성을 바치며, 「핵무기 신앙」에 빠져 있으니, 강대국이든 약소국이든 간에 핵무기에 매달리는 나라는 광인집단이 아닐 수 없다.
 
핵무기를 제조,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의 국민들은 도대체 왜 입을 다물고 있는가? 가난하고, 무지하고 순진한 약소국 국민들을 집단 살해하는 무기들을 만들어 팔아먹고 사는, 소위 선진 강대국 국민들은, 자신들이 마시는 커피가 약소민족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무기를 팔아 벌어들인 돈으로 보다 싼 값에 사서 마실 수 있는 것이니, 저들의 커피에는 약소민족들의 피가 섞여있고, 또 자신들이 값싸게 사먹고 있는 빵에는 약소민족들의 살덩이가 섞여 있다는 것을 왜 모르고 있는가?
 
집단 살인무기를 제조 판매한 자금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강대국의 국민들은 살인강도들의 가족들이 아닌가? 무서운 집단 살인무기를 만들어 팔아먹는 나라에는 사람다운 사람들이 없고, 사람의 모습을 가진 늑대들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강대국의 언론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러한 나라의 종교 지도자들은 집단 살상 무기 대량생산과 무역거래에 관하여, 침묵할 의무가 있는가?
 
지금 우리나라는 핵무기 때문에 가공할 전쟁 위험으로 치닫고 있다. 핵무기 개발이나 제조와는 전혀 거리가 먼, 순수 산업발전용이라던 북한의 핵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큰 소리가 자연스레 나올 정도의 수준임을 드러냈고, 북한 핵을 막아야 한다는 불가피한 이유로, 우리는 우리나라를 미군의 부대 훈련장으로 쓰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구도 달갑게 여길 수 없는 미사일 배치 요청이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으니, 이는 바로 중국대륙까지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냐고, 대륙 민족의 눈매를 달라지게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남북관계와 열강들과의 관계, 또 이념과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상이한 체재 관계, 등으로 반핵적인 발언이나 주장에 대하여, 각기 전혀 다른 각도에서, 특히 남북과 열강들과의 이해관계 면에서 오해와 증오, 소외와 보복 등이 걱정스러워 사실상 속에 있는 말을 시원하게 털어놓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미국인들 중에도 핵무기를 반대하는 이들이 있고, 미국을 싫어하는 일본인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므로, 반핵주의와 반미주의가 다르고, 반미주의와 용공주의가 다른데, 왜 아시아를 불바다로 만들 성냥개비가 한반도에서 춤을 추는 마당에, 무슨 독감에 걸렸길래 한국언론들의 목소리는 숨져가는 모기들의 울음소리같이 멀리 가냘프게 귀 밖에서만 울린 뿐인가? 국제적인 열강들의 세력은 언젠가 바뀌게 되고, 모든 나라 국민들의 사상도 변하고 있지만, 민족들은 보다 영구적이며, 그 생존은 절대 선천적인 것이 아닌가?
 
이제 소련의 민주화와 인도주의화, 한마디로 소련을 변화시킨 힘이 미국의 핵무기에 있는 것이 아니니, 소련의 회개와 개방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핵무기 덕택이 아니다. 또 미국을 위시한 서방 열강들의 외교역량 덕택도 아니고, 서방 선진국들의 경제발전 덕택도 아니다. 소련개방에 핵무기가 기여한 역할은 없었다. 또 동시에 소련의 개방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경제력때문에도 아니다. 무력이나 경제력의 격차나 불균형은 국가들간의 편파와 세력별 단결을 강화시키며, 나아가서는 국가들간의 전쟁을 야기시키기 쉬울 뿐이다.
 
한마디로 (경제력)이나 칼(무력)이나 말(외교수완) 소련이 회개하고 개방되어, 인도주의 방향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 교황님의 권고를 따라, 전 세계 천주교 신도들의 기도와 성모님의 도우심 덕택이다. 신자들의 기도와 성모님의 간청을 들으시는 천주께서 저들의 마음을 움직여주셨기 때문이다. 소련의 변화는 천주께서 현대 인류에게 읽어보라고 주시는 교과서이다. 천주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체육경기와 무기 제조라는 인간들의 완력과 무력 향상이 오늘날 인류의 문화발전을 어떤 방향으로 가게 하고 있는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지성인들이
장님이 되어 있다. 마치 경제발전이 국가존립의 유일한 목적인양 생각하면서, 또 지금도 무력이라는 것이 아직도 각 국가와 인류사회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시대로 여기고 있으며, 그리하여 모든 나라가 경제발전 계획에만 광분하고 있고, U.N. 이라는 이름아래 국제회의는
장사꾼들의 노천시장처럼 되고 있을 뿐이 아닌가 한다.
 
또한, 오늘날 대부분의 정치가들과 언론인들은 천주교회가 마치 사회의 경제 문제나 복지문제 해결을 위하여 설립된 자선단체 조직체인양, 은연 중 복음의 변질을 시도하며 강요하고 있는데, 사실상 이는 자신들의 업무를 남들에게 떠넘기는 직무유기이다. 정말 교회 내의 일부 신앙인들까지 교회가 사회의 가난을 해결하는 기관인양 오판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좀 제정신을 차려야 하겠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다는 것이 물질적 지원에만 너무 집중되어 있다. 사회복지문제가 가장 최고수순으로 해결된 북 유롭이나 서방 선진국의 국민들이 천주공경에서 더욱 멀어지고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사실 소련이 회개하고 개방된 것은, 전 세계의 천주교신자들, 특히 매년 6백여만 명씩의 신도들이 로마 교황님의 권고를 따라, 파티마, 루르드, 반뇌 같은 여러 성지를 순례하면서, 무신론 공산주의, 유물론 사회주의 소련의 회개를 위하여, 소련 공산주의자들의 회심을 위해 성모님께 기도한 덕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남북통일도 신자들의 기도가 선행되고 지속되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남북한 동포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한국의 남북통일에 북한의 무기가 아무런 기여도 못할 것이며, 미국의 핵무기 덕택으로 우리겨레가 통일되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 무력으로 통일해보겠다고 전쟁을 일으켜도, 기껏해야 휴전선의 이동으로 끝나는 전란에 그칠 것이며, 엄청난 인명피해만 있을 것이다. 북한 공산주의 사상의 힘이나, 남한과 자유세계의 경제력 덕택으로 통일되지도 않고, 또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국민의식 수준과 가치관의 일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남의 손이건 자신의 손이건 간에, 손에 잡혀 있는 칼이나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무력이나 금력으로는 통일되지 않고, 일시 점령되거나 합방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외형적 체제상의 합방이나 점령이라는 것은, 내면적이며 정신적인 사랑과 이해로 이루어지는 참 통일은 아니다. 진정한 참 통일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신도들은 우선 전 민족의식의 변화, 가치관의 발전적 변화를 위하여 힘쓰며 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이해와 사랑으로 민족통일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 하늘이 무심할 수가 없다. 천상에 계신 우리 신앙의 선조들과 특히,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시며, 지상 교회의 어머니이시고, 신도들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마침내 한겨레 하나되는 평화통일의 결실을 맺게 할 수 있을 것이고, 다시는 분열하거나 서로를 죽이는 전쟁의 비극이 없게 할 수 있을 것이다. Msgr. Byon
 
<1994 5 25, “이달의 천진암12호 3면 >
 
Les armes nucléaires de grandes puissnces
 
 
De nos jours, en fabriquqnt et en possédqnt les armes nucléaires, les pays puissants menacent les petits pays faibles voire même l'humanité tout entière. Etre un pays puissant signifie déjà en soi avoir une arme la plus forte, et, sans mê̂me posséder d'arme necléaire, n'avoir pas à craindre d'être menacé. Le lion et le tigre n'ont d'autres armes que leur force et leur férocité. Le fait d'ê̂tre fauve levient l'arme la plus redoutable. Par contre, les petits animauxfaibles ont besoin d'un système de protection. Par exemlle, la mouffette sécrète et projette, comme moyen de défense, un liquide d'une odeur infecte. C'est une question inéluctqble de survie. Ainsi, dans les petits pays faibles, l'idée de posséder des armes nucléaires pourrait provenir de leur état de nécessité. Surtout, dans u pays comme la Corée qui a enduré des grurres d'invasion au cours ded son histoire : du continent, elle a eu l'invasion chinoise (Byung-Ja-Ho-Ran), de l'océan, elle a eu l'invasion japonaise(Im-Jin-Oué-Ran). En toute franchise, en tant que descendants des survivants de telles guerres implacables et prévoyant la réunification de la Corée, il nous est difficile de repousser la tentation de posséder des armes nucléaires. Mais en réalité ce sont des pays puissants qui possèdent ces armes et, à leur profit en menaçant les petits pays.
 
Comme les enfants apprennent le mensonge et l'injure auprès des adultes, les pays faibles sont infectés d'une maladie contagieuse ; l'envie de posséder l'arme nucléaire. Ils tentent d'imiter leurs prédécesseurs. Les pays puissantsdevrqient se rendre compte de tout cela et assumer leur responsabilité. Il est donc équitable que les petits pays puissent effectuer de façon régulière l'inspection des armes nucléaires en commençant d'abord dans les pays puissants. Mê̂me si de petites nations possèdent ces armes dangerruses, elles ne pourrqient, en aucun cas, occper des pays puissants. Comme on dit : "Rien n'est si contagieux que l'exemple", pour ce qui est de la suppression des armes necléaires, les pays puissants devraient se montrer comme un exemple à suivre.
 
Or, en ce moment, les hommes politiques du monde, que ce soient ceux des grandes puissances ou ceux des pays faibles, nous semblent vénérant comme Dieu, en les considérant comme l'objet de notre dernier recours. Sans doute, les effets de l'arme atomique seraient effroyables. Mais elle n'est ni si puissante et ni si utile que nous le pensions. Autrement dit, elle ne peut prolonger le maintien d'un régime dictatorial ni porter secours aux pays pauvres ; elle n'est purement et simplement que neusible. Du plus, nous pourrions nous poser des questions sur l'efficqcité. des armes necléaires pour la défense nationale de chaque pays. Prenons l'exemple de l'ancien U.R.S.S. : s'est-elle écroulée parce qu'elle n'avait pas d'armes necléaires? N'est)elle pas dans la misère complète? Ou est-ce parce que ses armes nucléaires étaient moins nombreuses et moins puissantes que celles des Etats-Unis? Et en conséquence est-ce grâce àleurs armes atomiques que les américains ont accomli leur expansion économique, tout en sauvegardant un régime démocratique?
 
La Russie et la Chine vivraient largement mieux que maintenant, si elles ne s'étaient pas tant livrées à la recherche nucléaire. De mê̂me les Etats-Unis et d'autres puissances démocratiques auraient pu contribuer plus à la prospérité de l'humanité et vivraient encore mieux aujourd'hui, s'ils ne s'adonnaient pas tant à recherche necléaire. En fait, la possession des armes nucléairs par ded petits pays ne peut ê̂tre une menace pour les Etats-Unis. Et cela n'est pas une garantie de stabilité pour leur régime politique, quel qu'il soit. En revanche, cela va accélérer leur effondrement en aggravant le processus d'appauvrissement. En dépit de tout, les politiciens se sont voués entièrement aux armes nucléaires en y investissant de façon insensée, et en y mettant le meilleur d'eux-mêmes. Quel qu'il soit le pays qui se cramponne aux armes nucléaires ne peut que faire partie du groupe des fanatiques. Comment les consciences peuvent-elles rester silencieuses devant un tel abus?
 
Pour quelle raison la bonne conscience des puissances necléaires se retranchent-elles derrière le mutisme? Les peuples, soi-disant de pays développés vivent en quelque sorte de la vente des armes qui massacrent les peuples pauvres et innocents. Du plus, ils concluent des mqrchés è des prix de rabais avec cet argent malhonnête, gagné par le carnage des innocents. Cillebt be oeyvebt-lis savoir que le café qu'ils boivent ses le sang de peuples faibles, et que le pain qu'ils mangent est la chair de ceuxci?
 
Les peuples des grandes puissances dirigéés par les fonds venant le la vente des armes, ne sont-ils pas de la mê̂me famille que celle des cambrioleur à main armée? Dans ces pays-là n'existent-ils que les loups sous forme humaine? Que sont-ils done cevenus les intellectuels? Que font-ells les presses de ces pays? Nous pourrions nous demander si tour(politiciens forçant l'achat des armes dangereuses, marchants des armes, les intellectules gardant le silence et vivant sans souci) ont le mê̂me et sont, au fond, est pareils à des loups.
 
Actuellement, la Corée court terriblement le danger de la guerre à cause des armes nucléaires. Au début, les nord coréeens afirmaient que leur recherche nucléaire serait purement destinée àl'usage industriel. Mais récemment; ils ont laissé entendre un autre son de cloche, en disant : "Nous pouvons transformer Séoul en une mer de feu" pour contrecarrer cette affirmation menaçante, sous le préteste d'empê̂cher une attaque éventuelle du Nord, les Etats-Unis annoncent partout la mise en place de missles en Corée du Sud, comme si cette péninsule était l'un des camps d'entraî̂-nement de l'armée américaine. En l'occurrence, surprise, la Chine don't l'attitude redouble de vigilance à l'égard des américains, se demande si elle n'est pas la vraie cible de ceux-ci.
 
De ce fait, nous avons l'impression que les puissances occidentales, prenant certaines parties de l'Asie qui font problème, tels que Hongkong, Taiwan; Macao et ainsi aue la Corée du Nord comme tremplin de leurs…, amorcent leur "stratégie de trente ans", qui a pour but de diviser la Chine en plusieurs blocs, de sorte que le grand bouleversement de l'Asie approche rapidement d'un moment à l'autre. Parmi les américaiss, il existe des gesns opposés aux armes nucléaires. De mê̂me parmi les japonais, il zxiste des anti-américais qui ne sont pas communistes. Ainsi, l'opposition au nucléaire est différente de l'anti-américanisme, et l'anti-amzricanisme ne correspond pas au pro-communisme. Or, pour quelle raison, la voix des presses garde-t-elle un silence pesant? Au moment où une mèche, don't la moindre flamme provoquerait un grand trouble en Asie, guette l'occasion de s'enflammer, pourquoi n'entendons nous que les échos lointains et faibles de la presse, qui touche nos oreilles comme des bourdonnements d'insectes mourqnts? Mê̂me si le pouvoir et l'idéologie changent d'un cô̂té à l'autre, que le peuple d'une nation n'est-il pas perpétuel et sa survie n'est-elle pas grandiose?
 
A présent, nous sommes persuadés que la force capable de transformer la Russie en voie de la démocratisation et de l'humanisation, n'est pas dù aux armes nucléaires des américanis ni à celles d'autres pays démocratiques. Le changement radical en Russie n'est pas fondé non plus sur la compétence diplomatique des grandes puissances occidentales, ni sur leur expansion économique. Plus prfécisément, les armes nucléaires n'ont joué aucun rô̂le dans la transformation de la Russie. En mê̂me temps, la puissance éconmique des pays développés de l'Occident n'a pas pu influencer l'ouverture de la Russie. En réalité, le déséquilibre des forces militaires et économiques ne peut que renforcer la situation d'inégalité et provoquer la guerre entre les pays opposés. Bref, ni l'attitude fermée de la Russie. En se repentant, elle revient dans la bonne direction grâce aux prières des fodèmes et à l'aide de la Sainte Mê̂me. Dieu attendrit le coeur endurci des russes. La transformation de la Russie est pour notre humanité un livre de référence en provenance de Dieu. Par les compétitions sportives et l'utilisation d'armes dangereuses progressent la violence et la force militaire. Beaucoup d'intellectuels restent aveugles quant aux conséquences et à l'influence de ce genre de choses sur développement de la civilisation humaine. Il ne faudrait pas penser comme si la croissance économique était l'unique moyen de survie d'un Etat et mettre tout l'énergie au service du projet de développement éconmique. Il ne faudrait pas non plus dénaturer l'Evangile, en considérant l'Eglise comme une organisation fondée en vue de résoudre loutes sortes de problèmes sociaux. Tout le monde doit reprendre ses esprits. Les pays développés de l'Occident don't le système de sécurité sociale est arrivé au plus haut niveau s'éloignent de plus en plus de Dieu. Qu'est-ce que tout cela signifie?
 
C'est un fait, derrière le repentir de la Russie, il y a les prières de nombreux fidèles du monde entier. Surtout suivant le conseil du Saint Père, chaque année, plus de six millions de fidèles catholique se rassemblent aux lieux saints comme Fatima, Lourdes et Banneux et prient la Vierge Marie pour le repentir des communistes. C'est précisément grâ̂ce à cesprières ferventes et persévérantes que Dieu a exaucé leurs voeux. La réunification de la Corée également ne serait réalisable d'abord que par la prière et la persévérance dans la prière.
 
Les armes nucléaires du Nord (si elles existent), ne pourraient en aucun cas contribuer à la réunification de la Corée. Celles des Etats-Unis n'amèneraient pas notre peuple è s'unir de nouveau. Ni l'idéologie communiste de la Corée du Nord, ni la puissance économique de la Corée du Sud ne sont pas capable de réaliser notre rê̂ve : la réunification de notre pays. Que ce soit de notre propre gré ou de la volonté d'autrui, la réunification est encore loin, tant qu'on essaie de l'accomplir par la force militaire ou par le pouvoir de l'argent. Utilisant de tels moyens on pourrait peut-ê̂tre occuper ou annexer un pays, mais rien de plus. Qui ne pourrait distinguer l'apparence de réunification par annexion ou occupation d'avec la réunification, réalisée par la compréhension et l'affection intérieure? Nous y arriverons finalement à l'aide de la Sainte Mère, en priant avec amour dans la sérénité et dans la compréhension pour la réunification de notre peuple.
(Père Pierre Byon Ki-Young, à Chon-Jin-Am, Berceau de l'Eglise catholique en Corée... 1994. 5. May)
Writer : Msgr. Byon    Date : 2013-01-24 21:39   Hit. 1671
--------------------------------------------------------------------
 
Denuclearization movement of war-weapon !
 
人類 破滅의 戰爭武器 非核化運動은 오늘날 우리 全 人類의 共同 最大 急先務!!
經濟發展만이 國家存立의 唯一한 目的은 아닙니다.
領土擴張 위해 他國占領과 破壞와 他國民 大量殺傷은 過去史에서나 있었던
强大國들의 存在方式이며 目的이었습니다.
核武器 自體도 危險하고 可恐한 것이지만,
核武器를 保有하고 使用하는 人間集團의 倫理觀과 價値觀이 더욱 問題視됩니다.
北韓核이 解決되어 韓半島의 非核化가 되지 않으면,
日本의 核武裝 豫防 不可能하고,
나아가서, 中國의 核武裝 解除 더 極難해지며,
美.蘇와 全 世界 各國의 核武器 完全 除去역시 不可能해지므로,
人類는 共同自滅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不幸하게도 韓半島에서 核戰爭이 勃發하면,
極東 亞細亞 大戰이 不可避하며,
第三次 世界 核大戰으로 擴大될 수 밖에 없습니다.
人類의 核戰爭 出發 舞臺가 되는 韓.中.日이 最大의 被害國으로서,
政權도, 國民도, 文化도, 文明도, 歷史도 모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雙方 어느 편이든지, 核武器, 특히 核爆彈을 使用하기 前에,
먼저 經濟 爆彈 使用으로, 核戰爭 豫防이 可能할 수 있읍니다.
人類의 武器 非核化를 위하여,
眞理와 正義와 自由를 지키고 아끼고 가꾸는 모든이가
娛樂과 遊興과 奢侈와 享樂을 멀리하고,
특히, 信仰人들은 聖母님과 함께, 一心同體가 되어 每日 天主님께 祈禱해야 합니다 ! Homo homini lupus est !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시랑이 떼가 아니라, 바로, 사람들이다! (로마 대제국 옛 政街의 격언). Veritas semper universalis et concreta, justitiaque in libertate !<眞理와 正義와 自由는 恆常 어디서나 普遍的이며 具體的입니다!
 
自由가 없는 곳에, 自由가 없는 사람에게, 眞實과 正義가 있을 수 없으니,
自由不在 社會나, 自由不在 言論 團體나,
그러한 組織體에 얽매어서 自由가 없는 사람들의 말과 글과 生活과 行動에는,
眞實도 없고, 正義도 없으며, 宣傳과 宣動만이 있게 마련입니다.
-
입력 : 2017.01.10. Msgr. Byon  www.변기영몬시뇰사랑방.kr, WIND BELL /
 
 
Copyright ⓒ 변기영 몬시뇰 사랑방 Servant Hall of Msgr. Byo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입력 : 2017.01.13 오전 12:18:11
Copyright ⓒ 변기영 몬시뇰 사랑방 Servant Hall of Msgr. Byo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