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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만성에, 큰 축하를! 김진태 신부님, 10 여년만에 교회건축학 박사학위 경사 !

글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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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만성에, 큰 축하를! 
김진태 신부님, 10 여년만에 교회건축학 박사학위 경사 !

참으로 축하드려야 할 경사 소식이 최근 봄바람에 실려서 계속 날아들고 있습니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더니, 김진태 신부님이, 만학(晩學) 10 여년만에 서울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드디어 교회건축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우리 교구에서는 물론 처음이지만, 전국적으로도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많은 성직자들이 성직자들 수보다 더 많은 성당을 지었고, 짓고 있지만, 막상 교회건축학에 대하여 기초 지식이라도 정식으로 입문이라도 해본 성직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난 20 여년간 본당 건물 건축이다, 교구청 건설본부 업무다, 하면서, 순수 교회 건축학 공부에만 집념하기 어렵도록, 한국의 젊은 교회는 전교와 사목과 교회 재정 확보, 등으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옛 시골 가난한 선비들 신세를 면치 못하면서 그래도 틈틈이, 국내외 견학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꾸준히, 끈질기게 건축학의 학사, 석사, 박사, 전 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까지 받았다는 것은 한국 교회에서 매두 드문 일이오, 격찬할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젊은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잠시 돌아보면, 김진태 신부님은 1993년 천진암 성지 보좌신부로 인사발령 받으면서부터, 고난의 길이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실제로, 장항아리나 쌀독 같은 큰 오지그릇을 만드는 것은, 뚜가리나 물방구리, 질그릇 화로나 시루 같은 작은 그릇들을 만들어 구어내는 것보다 기술과 인력과 재료가 더 많이 들고, 또 시일도 아주 훨씬 더 오래 걸리므로, 잔 그릇들을 만들기 보다 아주 늦으막하게 천천히 할 수 밖에 없다고, 우리 옛 선인들은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교훈적인 말을 우리 인간 교육과 인격도야(人格陶冶)에도 자주 써 왔습니다.
 
성직자로서 박학다식하시고, 산전수전 다 겪으셨던 우리 수원교구 전임 교구장 故 김남수 주교님께서는 주님께서 우리 교구에만 짊어주신 십자가로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 개척과, 한민족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건립 착수 초기에, 파도처럼 폭주하며 밀려오는 다양한 업무들을 직시하시면서, 천진암 성지의 보좌신부로 인사발령하는 신부는 적어도 이미 작은 본당에서 본당 주임 같은 신자단체 사목의 책임경험이 있는 사제들 중에 선발하여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김진태 신부님은 구산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하면서, 필자와 함께 미리내 성지에 이미 103위 순교자 기념대성당 건립을 마음먹고 추진하고 있던 정행만 신부님과 20 여명의 서울 신자들과 더불어 유롭의 여러 성지와 대성당들을 순례 겸 견학하는 길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고, 김신부님은 후에 군종신부 업무도 1년 더 연장하여 군 사목을 마친 후, 교구장 김남수 주교님께서 김신부님을 천진암 성지 보좌신부로 보내셨습니다.(1993년)
 
즉, 교회건축에 관심과 정성을 가지고, 느긋하게, 100년계획의 정신처럼, 서두르지도 말고, 그렇다고 게으르지도 말고, 오로지 대기만성의 정신으로, 서양의 성당들을 둘러본 김신부님은 교회건축학에 전념하기로 뜻을 세우면서, 세계적으로 점점 유명해지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성가정 대성당(Sagrada Familia)을 함께 둘러보면서, 일본에서는 이미 7~8명의 교회건축학 대학원생들과 젊은 사제들이, 그 현장에 와서, 2, 3년씩 숙식하면서, Antonio Gaudi의 후계자들과 함께 무료봉사하며 공동노력을 기울이며 교회건축 현장 실습에 참여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 유학을 생각하며 국내에서 우선 스페인어 공부에 치중하면서, 스페인 유학을 준비에 손을 대었으나, 당시에는 이 일에 난관이 많았으니, 우선 우리 교구 대신학교도 교회건축학 교수신부 양성 계획이 없어서(지금도 없겠지만), 대신학교 소속으로 스페인에 보내기를 교구장님께 청했으나, 대신학교에 편성된 예산이 전무하다며 반대의견도 적지 않았고, 또, 마드리드에 교포사목 신부로 파견하는 것도, 주교회의 해외교포사목 담당 주교님과의 예산 등이 문제가 될 뿐 아니라, 한국과 무역이 신통치 않던 스페인에는 한국인 교포신자들이 아주 드물어서 교포본당 설정도 막연한 실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교구청 소속으로도 예산편성이 어렵다고 하여, 할 수없이, 그야말로, 울며 겨자 먹기로, 교회 땅 한평도 없던 심산궁곡 천진암에 우선 토지확보에 빚투성이로 허둥지둥하던 필자역시 막막하였습니다. 교구에서는 김신부님을 신생 천진암 성지 소속 신부로서 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건립을 위한 인력양성차원에서, 천진암 성지에서 책임을 지고 유학 재정과 여타의 견학비 뒷받침을 하라고 교구에서 지침이 내렸으나, 필자는 제대로 뒷받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외 유학 길을 떠나는 젊은 사제에게 이런 사정을 본인에게 다 알릴 수도 없었고,,,.맨 손으로 당나라 유학을 가던 10 대 후반의 원효대사나 의상대사, 뒤이어 인도의 5개국까지 순방하던 혜초를 생각하며, 김신부님 앞날을 성모님께 맡길 수밖에 없었읍니다.
 
그래서 사실, 소속 교구도 있고, 부임지 근무처 성지도 있으나, 홀로 고독한 교회 건축학 공부의 길을 가야만 하는 김신부님은 자신이 책임을 지고 준비해나가야 했으며, 출국 전 스페인어 공부도 서울 종로성당 주임신부님의 호의로 종로성당 사제관에 방을 얻어 몇 달 동안 체류하면서 외국어 학원에 다녀야 했고, 후에 스페인으로 떠나는 출국준비에도 교구나 천진암 성지에서는 이렇다할 지원도 하지 못하여, 거의 모든 일을 김신부님 자신이 해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앞으로의 업무수행도 그 때나 이 때나, 우리 사제들은, 늘, “괴로운 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조각 배 한 척의 신세”임을 절감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猶然苦海一孤舟 - 문도공 정약용).
 
필자와 함께 사목하던 16명의 후배 보좌신부들 중에 필자가 가장 궁핍하던 재정난국에 출국시키게 되어 별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립니다. 더구나 우리 교구립으로 시작한 수도회 회원들이 8명이나 김신부님과 거의 같은 시기에 스페인으로 가는 바람에, 김신부님은 할 수 없이 한국어 고백성사를 비롯한 뜻밖의 새 임무가 주어져서, 건축학 공부에는 지장이 많았다기보다도 겸무가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우리 젊은 신부님들이 유롭에 공부하러 와서, 외국어 장벽 때문에 학업을 마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기초신학을 전제한 이공계 분야로 볼 수 있는 교회건축학 공부는 전 유롭의 현장 견학에 중점을 두도록 함이 실용적이라는 우리 사제들의 소견에 교구장 주교님께서도 쾌히 승낙하시어, 김신부님은 건축과가 있는 어느 대학 입학보다, 성당건축 현장이 있는 곳에 견학을 중요시하게 하였으나, 우리 못난 선배들은 백문이불여일견이라며, 견학을 많이 하도록 입으로만, 떠들었지, 충분한 여비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처지였읍니다.
 
주로 비쟌틴 양식이나 고틱양식, 로마네스크 양식 위주로 건립된 유롭의 대부분 중세기 대성당들보다는,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선인장과 도마뱀까지도 참고하는 자연주의 건축학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 유학에 김진태 신부님이 마음을 잡았으나, 한국교회 유학생들의 미개척지이며, 한국과 무역거래가 별로 없는 스페인에는 우리 교포들도 매우 적어서, 교포본당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지금은 한인교회와 담당 사제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견학위주로 일관한 7,8 년간의 유롭 유학 후 귀국하자, 교구를 비롯하여 모든 사정이 출국 직전과는 계획도 인력도 모두 달라져서, 천진암 성지 보좌로 출국했다가 귀국하자 마자 신설본당 건축에 임명되어 매달려야 했고, 교구 건설본부 업무가 주어지면서, 사실상 소기의 건축학 공부를 계속하기가 쉽지 않은 터에, 학.석.박.사 전 과정을 다 마치고, 학위까지 받았으니, 대기만성의 김진태 신부님의 학구열에 우리 모두 경의를 표합시다. -Msgr. Byon-  
입력 : 2019.03.28 오후 9: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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