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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WIND BELL

교황 성하의 한국방문 계획과 천진암 성지의 한국천주교회 창립기념일 행사 의미와 가치와 교훈 !

글 :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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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성지의 한국천주교회 창립기념일 행사와 교황성하의 한국방문 계획 묵상.
 
嚴冬雪寒 深夜에 앵자산을 넘어 천진암 강학에 함께하던 25세 청년 이벽 성조의 발걸음(1779)이 북경 3천리를 걸어가서 영세하고 돌아오던 26세 이승훈 진사의 발걸음(1783)으로, 또 10여차례 中原 벌을 왕복하던 20여세 정하상의 조선교구 설립 준비를 위한 발걸음(1815~1825)으로, 또 마카오 2만리, 사제가 되려고 나선, 15세 김대건, 15세 최양업, 14세 최과출, 소년들의 발걸음(1836~1837)으로, 마침내 오늘에 와서, 로마 교회 78세 고령의 로마 교황 성하의 발걸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로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한국 방문과,
천진암 성지의 韓國天主敎會 創立 제235주년(1779~2014) 紀念祭 봉헌 !-
 
2014년 6월 24일 한국천주교회 發祥地이며 탄생지인 천진암 성지에서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을 기념하는 교회 창립 제235주년(1779~2014) 기념제를 거룩히 봉헌하였다. 연례 기념행사로서, 제36회(1979~2014) 제전이었다. 수원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와 전 교구장 최덕기 주교, 이성효 주교 및 변기영 몬시뇰과 30여명의 사제들과 100여명의 대신학생들과 많은 교우들이 함께하였다. 이번 기념제에는 이달 말로 도지사 재당선 연속 임기 8년을 도민들의 감사와 존경 속에 마치는 김문수 현 경기도지사와 신임 안경필 도지사의 참석으로 더욱 뜻있는 행사가 되었다.  
 
특히, 제1부 기념식에서는 모든이가 태극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4절까지 제창, 6.25 전사자들 영혼을 위한 기도와, 남북 한평화통일을 祈願하였다. 천진회 창립위원이며, 김동길 교수와 함께 천진암 성지의 100년계획 한민족 대성당 건립의 이수성 고문(前 서울대학교 총장, 前 국무총리)의 기념식사와, 8년 임기를 마치는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축사가 있었다. 이어서 교회 창립선조 후손들의 선창으로, “대한민국 만세”, “한국천주교회 만세”,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만세”, “천진암 성지 만세”를, 모두가 만세 12창을 우렁차게 목청껏 함께 불렀다.  
 
이날 기념식에 이어 기념 미사가 봉헌되고, 점심식사 직전, “天主恭敬歌” 기념비석이 제막되었다. 천주공경가는 우리나라 천주교회 최초의 聖歌이며, 1770년부터 1784년까지 천진암 성지에 모이던 청소년 선비들이 이벽 성조를 웃어른으로 모시고(爲上), 新學問 연구와 함께 자발적인 진리탐구의 講學이 절정에 오르던 1779년 겨울을 전후하여, 한국천주교회 창립초기에 이벽 성조께서 지어서, 제자들이 부르게 하던 노래로서, 천진암의 天學道場에서 賢友賢士 道友들의 天學叢林歌 (其門下如叢林)였으며, 같은 시기에 지으신(下筆), 天學 敎義 교과서와도 같은 聖敎要旨와 더부러, 심산궁곡에서나마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탄생(natalis)을 알리는, 한국천주교 신앙의 움이 트고, 교회 공동체의 싹이 돋는 고고지성(呱呱之聲)이었다.  
 
천주공경가는 다른 나라 敎會史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서,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의 實生活에서 例示를 들어 보이며, 천주교 기본 敎義를, 補儒論的이며 護敎論的으로 읊은 복음선포의 함성이었다. 歌詞 외에는, 곡조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우리나라 천주교회 신도들이 세상 끝날까지 자자손손이 부르며, 우리 신앙선조들의 자발적인 신앙을 지키고 아끼며 가꾸어야 할 신앙의 遺産이다. 
  
천주공경가와 성교요지는, 235년 전, 천진암의 天學道場을 본거지로 하여, 15년 가까이 당시 10代 후반과 20代 초반의 젊은 청소년 선비들이 주축이 되어,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면서, 한국천주교회를 창립한 기적적인 敎會史를 증명해 주는 천진암 강학의 결실이다.  
 
한국천주교회 창립 당시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10대 중반의 청소년들이었음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천진암 강학이 절정으로 이르기 시작하던 丁酉年(1777년)부터 戊戌年(1778년)과 己亥年(1779년)까지, 당시 이벽 성조 23세, 정약용 15세, 정약종 17세, 정약전 19세, 이승훈 21세, 등이었으니, 지금의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과 대학교 1, 2학년생들 나이의 청소년들이었다. 한마디로 한국천주교회 창립은 聖灵의 感導(inspiration)와 하느님 은총의 도우심으로 이벽 성조를 중심으로 모인 젊은 청소년 선비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자립적으로 이루어진 기적의 역사였다. 
 
    이벽 성조께서는 1770년 15세 경 天眞菴이 있던 廣州山脈 앵자산 북편 골짜기에 入山하여, 1784년 봄까지, 자발적으로 출발한 천진암 天學道場에 찾아드는 젊은 소년 선비들과 더부러, 천주교 교리를 함께 탐구하고 가르치며, 10계명을 준수하고, 아직 한국에는 陽曆과 요일이 전해지지 않아, 잘 모르던 그 시절, 음력으로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을 고정된 主日로 제정하여 지키고자, 천주께 기도를 바치고, 휴식하며 금식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자 정기적인 휴무날이 되기도 한 음력 주일 제정 실천이었다. 사실 天眞菴 天學堂의 天學叢林이 당시 우리나라의 兩班 常民 사회 계급타파와 남녀평등, 一夫一妻制와 노동자 정기 휴일제도, 등의 실천운동은 훗날 고종황제의 1890년대 말, 요일과 태양력 사용 선포보다 등, 일연의 사회개혁조치보다 100여년이 앞서는, 한국 사회 개혁의 획기적인 출발이었다.  
 
이 때를 즈음하여, 聖敎要旨와 十誡命歌를 지어 부르고, 모든 종교의 출발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천진암의 天學道場 청소년들이 오늘의 校歌와도 같이, 자기들 共同體歌, 즉 團體歌로서 천학총림가(天學叢林歌)로 부르던 노래가 바로 李檗 聖祖께서 지어서 부르게 하신, 천주공경가였다. 그러므로 천주공경가는 한국천주교회 청소년들의 모든 공동체의 단체가로 자자손이 부르므로서, 모든 청소년들이 신앙과 신심과 역사와 敎義와 宣敎의 열이 불타게 해야 할 것이다. 비록 늦었으나, 천진암 성지 박물관 앞에 금년에 세워진 천주공경가의 비석 건립이 주는 그 의미와 가치와 교훈을 온 국민이 마음에 되새겨야 하겠다.   
 
대학자 권철신 성현도 참석하던 己亥年 겨울, 천진암 강학에 함께 하기 위하여, 엄동설한 한 밤중에 눈쌓인 경기도 광주산맥 主峰 鶯子峴을 넘던 23세 이벽 성조의 발걸음은, 몇 년 후, 세례를 받기 위해 북경 3천리 눈 길을 걸어가고 오던 이승훈 진사의 발걸음으로 이어지고, 하느님의 종, 정약종 성현의 아들 성 정하상 소년이 10여세 시절부터, 조동섬, 이기양, 등, 이미 순교한 아버지 친구들의 유배지를 찾아 함경북도까지, 심지어 백두산 아래 무산(茂山) 땅까지도 그 험산준령을 넘으며 오고가던 발걸음이며, 더구나 북경 천주교회 3천리 길은, 조선교구 설립을 위하여 동료 유진길과 교대로 20여차례나 왕복하던 땀에 젖은 발걸음이고, 또한 정하상 성인의 어린 제자들, 즉 15세의 김대건, 최양업과 14세의 최과출 세 소년들이 사제가 되기 위하여 마카오까지 2만리 길을 6개월 동안이나 걸어가던 같은 맥락의 발걸음이었다.  
 
새로운 신앙으로 끓고 타며, 소박하고 순수한 젊은 청소년 선비들은 2천년 전 그리스도의 젊은 제자들처럼, 새로운 종교, 천주교를 힘차게 전파하며, 순교의 피로 목숨을 바쳐 증거하였을 뿐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전승하였으니, 젊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청소년들의 정신과 덕행과 열성의 발걸음은 오늘의 대신학교 교문을 들어서는 지망생들의 거룩한 발걸음으로 계승되고 있다.
 
특히 금년에는 로마의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78세의 年老하심에도 불고하고, 아시아 전역에서 모이는 청소년들과 자리를 함께하기 위하여, 8월 무더위에 유롭인들의 여름 휴가철을 한국교회와 한국을 찾는 아시아 청소년들을 위하여 포기하시고, 극동 우리나라에까지, 訪韓하시는 교황님의 발걸음은 우리에게 얼마나 감격스러운 모범이며 교과서인가 ? 더구나 20대 초반에 오른 쪽 폐를 절단하는 큰 수술로 건강을 매우 조심해야 하는 교황님께서 8월 폭염에 한국 방문을 결심하신 것은, 한국과 한국에 모이는 아시아 젊은이들에 대한 사랑과 열정의 표지(標識)이다. 
 
이벽 성조를 비롯하여, 연면(連綿)히, 그러나 힘차고 줄기차게 이어오는 한국천주교회 청소년들의 거룩한 발걸음에서 우리는 젊은이들의 신앙, 신앙의 젊은이들을 지키고, 아끼고, 가꾸며 계승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전 세계 교회는, 로마 교황 성하의 이번 한국 방문이 모든 나라의 靑少年 司牧시책과, 특히 未信者들의 자발적인 入敎를 위한 宣敎 시책의 전환점(轉換點)을 이루게 해야 할 것이다.  
 
천진암 성지에 착공된, 한민족100년계획 천진암 대성당 건립역시, 그 옛날 신앙을 목말라하던 우리 젊은 선비들이 심산 궁곡에 있던 이벽 성조의 讀書處 비좁은 天學堂 시절을 회상할 때, 불과 10여명 내외의 청소년 단체가 부르던, 천학총림가(天學叢林歌), 천주공경가를 부르던 때와 달리, 지금 530만에 이르는 신도들 뿐 아니라, 향후 사반세기(25년) 안에 도달할, 천만여명 신도 시대를 내다보며, 중국과 일본, 인도와 유롭에서 모이는 순례단들, 특히 젊은 청소년들을 위하여, 검소하고 단순한 젊은이들의 큰집으로, 세계 청소년 대성당으로 건립될 것이다.  
 
유롭의 대성당들처럼, 화려하게 건립할 자금도 없을뿐더러, 이벽 독서처에 모이던 소년들을 생각하며, 소박하고, 순수하며, 검소하고, 조촐한 성당이 될 것이다. 관광물처럼 되어가는, 중세기에 건립된 유롭의 대성당들과는 달리, 장차 천진암에 그 모습을 들어낼 천진암 대성당은 세계 만민의 평화를 위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젊은 청소년들을 위하여, 젊은이들이 찾아들어 모여서 기도하는, 기도의 큰 집, 청소년들의 대성당, 하느님의 집이 되도록 세워질 것이다.   
 
聖 요한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당시 駐韓 교황청 대사, Giovanni Blaitis 대주교를 통하여, 1993년 9월 21일에 손수 작성하시고 친필 서명하신 교황의 공식 문서를 통하여, 한국천주교회 탄생지 천진암 성지에 건립하는 새 성전 머릿돌에 교황 강복문을 보내셨다. 5일 후, 옛 79위 복자 축일(9월 26일)에 착공된 천진암 대성당은 당연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을 기념하는 한민족 대성당이다.
 
한국은 천주교회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시작하는 다른 모든 종교도 젊은 청소년들에 의하여 시작된 갸륵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니, 우리는 그 의미와 가치와 교훈을 깨달아야 한다. 신라의 불교역시 이차돈이 17세 때 시작하고, 22세에 순교하였다. 천도교, 東學역시 최제우 대신사가 16세에 家出 修道하기 시작하므로서 출발하였다.  
 
더욱이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아시아 청소년들을 만나는 충남 內浦 지역은 젊은 애국 烈士들의 고향이다. 아오내 장터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선하던 15세 소녀 유관순 여사, 청산리 전투에서 왜병들을 물리치던 대한 독립군 사령관 19세의 김좌진 장군, 중대장 16세의 이범석 장군, 항일 국권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상해로 떠나던 18세의 윤봉길 의사, 및 이청천 장군, 등과, 천주교 사제가 되기 위하여 남다른 인생길로 발걸음을 옮기던 솔뫼 출신의 15세 소년 김대건, 청양 다락골 출신의 15세 소년 최양업, 당진 출신의 14세 소년 최과출, 등, 모두가 천주와 교회를 위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內浦의 거룩한 젊은 피가 샘물 줄기처럼 흐르며, 파도처럼 출렁거리며, 온 누리에 용솟음치게 하는 로마 교황의 한국 방문이 되게 해야 하겠다. -Msgr. Byon- 
 
참고 사항:  
 
韓國天主敎會 創立聖祖로 모시는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1777년부터~1779년 간에 처음 몇차례 개최되었던 天眞菴 講學會에 참가하고 ,
 
1784년 늦 봄부터 水標洞의 李檗 聖祖 自宅 集會에 참가하고 ,
 
1785년 늦봄까지, 明禮坊의 金範禹 譯官 自宅 集會에 참가하면서, 한국 최초의 天主敎迫害, 즉, 1785년 乙巳年 迫害에 受難하고,
 
1786년부터 조직되어 약 2년내외 동안 사목활동한 臨時準聖職者團에 참가하여,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주동적인 역할을 한 분들로서,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신도들의 정신적 의지가 되고, 스승과 지도자 위치의 殉敎 先祖들이다 .   
 
종교나 사회 단체의 創立者나 創始者라는 칭호나 표현은, 그 분들의 역할과 기능과 업적, 등으로 호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創始者나 追從者들(從者旣衆-丁若鏞)을 同等視 하고, 동일 반열로 호칭하는 것은, 孫子孫女들을 祖父母들과 동등시하며, 동일 반열에 자리하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無禮 不當한 失禮라고 할 수 있다. 손자 손녀들도 할아버지 할머니로 부르며 똑같이 위해바치자는 것은  실로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서 천주교 신앙인들의 공동체를 최초로 결성한 敎會 創立者들의 가르침과 권고를 따라, 후에 入敎한 신도들과는 구별하여 말하는 것이 우리 인간사회의 언어관습이며, 사회의 통념이다. 타종교계에서도, 종교의 創始者나 主唱者들은 그 追從者들이나 有功者들과 구별한다.  
 
1979년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의 묘를 찾아 확인한 묘역을 조성할 당시, 지금 천진암 성지의 교회 창립선조 묘역의 권철신 성현 묘 우편으로 청동 십자가 자리까지 2 분의 묘역이 빈 공터로 되어 있는 이유는, 홍유한 선생과 김범우 역관의 묘를 이장할 자리였다. 필자가 두 분들의 묘를 찾아 확인한 후, 후손들도 천진암 성지로 이장하는 것을 몹시 원하였었으나, 담당 위원회(위원장 김남수 주교)와, 당시 천진암 성지를 12차례나 자주 방문하시던 김수환 추기경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하여, 현재의 5위 묘소로 끝내로 한 것이다.
   
당시 위원들 중에는 유홍렬 박사(교회역사학자, 서울대학교 교수), 이숭녕 박사(서울대학교 교수, 정신문화연구원장), 유영도 신부(로마 그레고리안 대학 修學, 神學, 哲學, 敎會法 3개 박사학위 소지자, 서울 대신학교 교회법 교수), 具天祐 신부(교회 최고 원로), 등이 있었다.   
 
그래서, 예컨대, 김범우 역관은 교회 창립초기 서울에서의 전교를 위하여 자택을 제공한 교회창립의 功勞者이지만, 한국에서 최초의 天主敎 創始者나 主唱者는 아니었고, 교회 창립의 중심적 지도자 위치로 볼 수는 없다. 洪儒漢 선생의 경우, 필자의 동창생이었던 안동교구장 故 박석희 주교가 천진암 성지에 와서 3일간 머물면서 홍유한 선생 묘 비문 건립의 문안을 필자에게 물었을 때, “한국천주교회 先覺者”로 함이 좋겠다고 답하였다. -Msgr. Byon
입력 : 2014.07.01 오전 1:5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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