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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본당의 지평면 곡수리 공소 지역의 역사 (2)

글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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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기영 몬시뇰이 [사랑방]을 열었습니다.  
사랑방 윗묵 구석 구석에 쳐박아두었던 보따리들을 이것저것 내다가 풀어서  
교회와 사회에 혹시라도 도움이 될 것들은 죽기 전 알리려 합니다. [사랑방 출입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곡수리 공소가 있는 지평면 지역은 본래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삭주현 관할이었습니다. 삭주현은 지금의 춘천지역인데, 춘천에서도 마족산 아래 천전리(泉田里), 즉 샘밭 지역이 산수가 수려하고, 오곡이 풍성하여 고조선 시대 그 이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며 큰 고을을 이루었으니, 지금의 소양강 댐 바로 아래 지역입니다.샘밭 강가에는 지금도 선사시대의 고인돌들이 여기저기 많이 발견되어, 아직도 선사유적지 발굴작업이 수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지역에는 월성이씨라고도 부르는 경주이씨 가문이 오래 전부터, 필자의 추정으로는 신라 건국에 크게 기여한 6가라국 중 경주이씨 가문이, 적어도 통일신라 이후로,이곳 천전리에 일부가 자리잡았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춘천에서는 경주이씨들을 '샘밭이씨'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건국초기부터 훌륭한 인재들을 배출한 지역이며, 한국천주교회 창립자 광암 이벽 성조의 아버지 이부만, 작은 아버지 이호만, 등의 세대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지역으로, 이호만 공은 강원도 지역에서 가장 큰 부호로서, 식객들이 매일 100여명 내외가 여러 사랑채에 머물고 갔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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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0일 현재, 곡수리 공소 성당과 교육관과 주차장의 아름다운 모습. 비록 젊은이들은 거의 전무하다시피하여, 고령의 할머니들이 이처럼 성당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고 있습니다. 천주께 감사를 드립시다. 교우들은 새로 이사온 늙은 변기영 몬시뇰에게, 노인들이 손수 농사짓는, 감자, 마늘, 가정용 방아로 새로 찧은 햅쌀, 아욱, 오이, 고구마, 상추, 가지,  열무김치, 햇밤, 같은 야채를 자주 미사 때 가지고 와서 즐거운 얼굴로 바칩니다. 교우들에게 감사를 드립시다.> 
 
   그러나,  맏형 이부만공이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로 이주하던 시기와 동기는 확실치 않으나, 화현리 바로 건너마을에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진 이항복의 사당이 있고, 경주이씨 집안의 후손들이 학덕과 인격을 도야하는 곳이었기에, 젊은 가정들이 모여들었다고 생각됩니다.

   고려 왕건태조 이후로, 용문산 줄기의 지평 지역은 철광산이 개발되어, 질이 좋은 철을 생산하게 되자, 광산에 모여드는 광부들로 인하여, 양근, 지평, 용문, 곡수, 지역에는 자연스레 시골장이 열리게 되었고, 저명한 스님들이 수도하는 용문사와 고달사가 가까이 있어서, 곡수리는 시골 장으로서는 일찌기 여지도서(與地圖書, 上)에 나올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1980년 초까지, 약 400여년이상 시골장마당이 계속되던 곳입니다.

   양근 갈산리가 생장향인 권철신, 일신, 제신, 익신, 득신, 5형제의 명성이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던 시기에, 이곳 곡수리는 용문사를 지나는 중간 읍내 장터로서, 직암 권일신 성현이 수행원들과 함께 종종 들릴 수밖에 없는 주막이 있던 마을로, 천주교를 모를 수는 없으나, 계속된 100년의 박해로 인하여, 이곳에 천주교 신앙의 씨앗이 움터서 자라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 6.25. 사변 1년 전, 1949년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질그릇 가마를 세우고, 질그릇 화로, 시루, 물동이, 등을 만들어 팔면서 살던 김영수 요셉 회장의 외로운 전교활동으로 곡수리 지역에는 천주교회가 조금씩 알려지고, 입교자들이 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용문 성당으로 예수성탄 대축일과 예수부활축일을 지내러 가는 것조차 힘들던 때입니다. 그러나, 김영수 요셉, 등 곡수리 초대 신자들이 한 두 집씩 늘어서, 1960년대  들어서, 신자들이 20여명으로 늘었고, 1966년에는 양평본당에서 정식 '곡수리 공소'로 인정하여, 봄과 가을에 본당신부님이 곡수리에 오셔서 판공 미사를 드리면서, 신자들이 40여명으로 증가하였고, 1970년대에 와서는 70여명의 신자 단체가 되었으며, 공소회장 집에 모여, 교리공부와 주일첨례를 보다가, 30여평 남짓한 공소 건물을 지었고, 1980년대에 와서, 성가소비녀회 수녀님들이 보건소장을 맡으면서, 지역신자들 치료와 어린이 교육, 등으로 크게 발전하여, 오늘의 곡수리공소 건설에 많은 이들이 크게 희생과 봉사를 하였습니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대부분 서울로 이주하는 바람에, 곡수리에는 주로 노령인구가 주류를 이루어, 공소도 그 여파로, 공소건물 관리조차 이곳 교우들 힘만으로는 관리하기가 쉽지 않아, 양평본당 교우들의 지원봉사가 필요한 실정입니다.-<계속>-  
 
     
변기영 몬시뇰이 [사랑방]을 열었습니다.  
사랑방 윗묵 구석 구석에 쳐박아두었던 보따리들을 이것저것 내다가 풀어서  
교회와 사회에 혹시라도 도움이 될 것들은 죽기 전 알리려 합니다. [사랑방 출입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입력 : 2016.10.13 오후 4: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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