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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가 나아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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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방한과 한국주교단 로마 ADLIMINA 때 교황님 강론의 근거제시가 된 순교자 황사영 진사의 백서(帛書)말씀묵상을,,,!

글 :  변기영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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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황님 강론과 일맥상통하는 근거가 된
순교자 황사영 백서(帛書) 주요 부분 주해
 
<이하는, 1801년 辛酉年 박해 때 26세로 순교하는 황사영 진사(1775~1801)가 충북 제천의 배론 산골로 피신하여, 여름내내 옹기 굽는 토굴 가마 속에서 비단에 써서,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帛書의 주요부분을, 보다 알기 쉽게 새로 시도한 譯述입니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기 훨씬 전에, 한국교회 창립선조들이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직접 천주님의 존재를 확인하여 신앙하며 공경하므로써 조선천주교회를 세웠음을 최초로 밝히고 증언한 첫 문헌이다. 작년과 금년 교황 프란치스코 선언문과 교황 聖 요한바오로 2세의 공식 강론의 근거를 제시한, 실로 귀중한 기록입니다.
 
지금의 국립대학 박사학위를 능가한다고 볼 수 있는 당시 조선 왕이 친히 수여한 진사 학위를 받은 황사영 진사가 쓴 帛書는 그 내용이 40여년 후, 이를 알리는 조선에 최초로 입국한 프랑스인 선교사 Pierre Maubant 신부의 1838년 프랑스어 보고서 문헌보다 38년이나 앞서는 고귀한 것이다.( -Msgr. Byon>
 
황사영 백서(帛書) 중 주요 부분 원문
 
主恩之於東國, 可謂逈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 而 主特擧斯道而親舁之繼又以授聖事者豫之, 種種特恩, 指不勝屈, 今年此罰, 固知罪人等, 睾負之攸致, 然 主之仁慈, 猶未全棄, 似此殘破之中, 特留一線之路, 明保肯救 東國之表證, 主佑旣如此, 若中西諸國 事主之人, 合心全力而圖之, 豈不能化殃爲吉, 救活此手掌之地耶, 罪人等以此自慰而慰人, 忍死延生, 願大爺承行主旨, 速施申救,<황사영백서 art.101>
 
위 원문의 漢字語 國語音譯
 
[,,,주은지어동국(主恩之於東國)/가위형월심상(可謂逈越尋常)/초미상유전교자래이(初未嘗有傳敎者來而)/주특거사도이친여지계(主特擧斯道而親舁之繼)/우이수성사자예지(又以授聖事者豫之)/종종특은 지불승굴(種種特恩, 指不勝屈), 금년차벌(今年此罰)/고지죄인등 고부지유치(固知罪人等,睾負之攸致)/연 주지인자 유미전기(然主之仁慈,猶未全棄)/사차잔파지중(似此殘破之中)/특유일선지로(特留一線之路)/명보긍교 동국지표증(明保肯救 東國之表證)/주우기여차(主佑旣如此)/약중서제국사주지인(若中西諸國事主之人)/합심전력이도지(合心全力而圖之)/기불능화앙위길(豈不能化殃爲吉)/구활차수장지지야(救活此手掌之地耶)/죄인등이차자위이위인(罪人等以此自慰而慰人)/인사연생(忍死延生)/원대야승행주지(願大爺承行主旨)/속속시신구(速速施申救),,,]<황사영백서 art.101>
 
위 원문에 대한 현대어 역술.
 
천주님께서 우리 동쪽 나라 조선에 베푸신 크신 은덕은(主恩之於東國),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아주 특출한 예라고 말할 수 있으니(可謂逈越尋常),
일찌기 처음부터 그 어떤 傳敎者도 들어오기 전에(初未嘗有傳敎者來而),
천주님께서는 친히 이 道를 우리 선조들에게 특별히 들어보이시고(主特擧斯道而),
우리와 마주하며 끊임없이 거들어주시고자, 聖事 거행자도 미리 마련하여 주시니(親舁之繼 又以授聖事者豫之),
가지가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특별한 은덕은 일일이 손가락 꼽아가며 셀 수가 없습니다.(種種特恩, 指不勝屈),
금년 들어 우리가 당하는 이러한 박해의 벌은(今年此罰),
우리 죄인들의 잘못 때문임을 굳게 알고 있기에(固知罪人等),
우리는 이 멍에를 지고서 가고 있읍니다마는(固負之攸致 然),
천주님의 자비는 오히려 아직도 우리를 차마 다 버리지 아니하시고,(主之仁慈 猶未全棄),
우리 모두가 살아남지 못할 이러한 파멸 속에서도(似此殘破之中),
특별히 한가닥 실낱같은 길을 남겨 두셨으니(特留一線之路),
이는 분명히, 우리를 꼭 구출하여 지키려 하심을 밝히 보이시는(明保肯救),
우리 동쪽 나라를 위한 표증이라 생각합니다(東國之表證,).
천주님의 도우심이 이미 이처럼 있사오니(主佑旣如此,),
만일 중국과 서양의 여러나라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若中西諸國 事主之人),
마음을 합하고 힘을 모아 계획을 세워 힘쓴다면(合心全力而圖之),
지금 겪는 재앙이 길복(吉福)으로 바뀌게 될 것이므로(豈不能化殃爲吉),
손바닥만한 이 땅의 우리를 건져 살리는 일이 어찌 불가능하겠습니까(救活此手掌之地耶)?
우리 죄인들은 이렇게나마 자신을 위로하고, 서로를 위로하며(罪人等以此自慰而慰人),
차마 죽지 못하는, 죽음을 참고 견디면서, 삶을 늘여가고 있사오니(忍死延生),
청컨대 주교 대인께서는 천주님의 뜻을 받들어(願大爺承行主旨),
신속히 저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시옵소서! 速施申救).
-卞基榮 몬시뇰 譯述-
 
<黃嗣永帛書 art.101>
 
 
       교황성하의 작년 방한과 금년 한국주교님들의 로마 AD LIMINA  때, 교황님의 공식 주요 강론문맥 속에는, 김학렬 신부의 독후감과 합리적 지적대로,  황사영 순교자의 백서에 나오는 文句도,,,!.  교황님의 말씀 속에 들어있는 황사영 백서의 문귀들을 대조하며 읽읍시다. 
                   
    교황성하의 작년 방한과 금년 한국주교님들의 로마 AD LIMINA  때, 교황님의 공식 주요 강론문맥 속에는, 김학렬 신부의 독후감과 합리적 지적대로,  황사영 순교자의 백서에 나오는 文句도,,,!.  교황님의 말씀 속에 들어있는 황사영 백서의 문귀들을 대조하며 읽읍시다. 
                   
                                               한국 주교들과 만남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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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 8. 14. 서울, 주교회의 주교님들과 교황 프란치스꼬 성하. <사진, 평화신문>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작년(2014. 8. 14) 여름에 한국에 오시던 첫날, 전국 주교님들에게 하신, [기억 지킴이] 말씀과, 금년 봄에 로마의 사도좌를 예방한(2015. 3. 12) 한국주교님들에게 하신 [한국의 첫 신앙공동체]에 관한 말씀을, 우리는 지나가는 일시적인 말씀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금년 성탄절과 연말연시에 묵상제목으로 삼아, 천천히 몇차례 읽어보고 되새기며, 실천하도록 합시다.
 
작년 여름에  오셔서는 [기억 지킴이] 주제로,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하느님의 종, 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복자 정약종, 등, 한국교회 신앙의 제일세대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지 않도록, 지키라고 당부하셨읍니다.(Yi Byeok e i nobili anziani della prima generazione;)
 
금년 봄에 로마의 사도좌를 단체로 공식 예방한(Ad Limina) 한국 주교님들에게는, 한국에서 천주교 [신앙의 첫 공동체]를 이룩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영세, 견진,등 일반적인 성사를 받기 전에,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천주교 신앙인들이었음을 말씀하시면서, 그 분들이 실천하신 거룩한 신도생활을 상기시키시며,(Già prima che la loro fede,,,Quella prima comunità ,,,)본받으라고 강조하셨읍니다. 국어번역문 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운 점도 있어서, 공부하는 젊은 세대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교황님이 사용하신 이태리어 원문을 이하에 올렸으며, 본 난에 들어가면 영어와 불어와 독어 번역문도 올려져 있으므로  유롭 주요 언어로 비교하며 보고자 하면, 이 홈페이지(www.chonjinam.org)의 [이번주 풍경소리] No.240호(2014. 8. 26)와,  No. 272(2015. 5.9.)호로 들어가면, 교황님 말씀 전문이 韓.英.佛.伊.西, 주요 외국어 공식 번역문이 있읍니다.
 
 
<교황님의 말씀과 대조하여보는 黃嗣永 帛書 중 일부 발췌문>
 
[,,,主恩之於東國, 可謂逈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 而 主特擧斯道而親卑之, 繼又以授聖事者豫之, *多特恩, 指不勝屈, 今年此罰, 固知罪人等, 睾負之攸致, 然 主之仁慈, 猶未全棄, 似此殘破之中, 特留一線之路, 明保肯救 東國之表證, 主佑旣如此, 若中西諸國 事主之人, 合心全力而圖之, 豈不能化殃爲吉, 救活此手掌之地耶 救活此手掌之地耶, 罪人等以此自慰而慰人, 忍死延生, 願大爺承行主旨, *速施申救,,,]<황사영백서 art.101>
 
천주의 은혜가 이 나라에 있어서는 보통 정도를 훨씬 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일찍이 전교하는 사람이 찾아온 적도 없이 천주께서는 특히 이 진리를 들어서 친히 들려주셨고, 이어서 또 성사를 주는 사람을 주신 가지가지 특별한 은혜는 손가락으로 일일이 다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금년에 저희가 받고 있는 이 벌은 원래 저희들의 배은망덕으로 일어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의 인자하심이 아직도 아주 저희를 아주 버리지는 아니하시고, 이와같이 잔인하게 파괴된 가운데서도 특히 한 줄기의 길을 남기셨음은 이 나라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표징이 뚜렷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천주의 보우하심이 이미 이와같으니, 만일 중국과 서양 각국의 천주를 섬기는 사람들이 마음을 합하여 온 힘으로 도모하면 어찌 이 앙화를 변하여 길복(吉福)으로 만들어 이 손바닥만한 땅을 살려내지 못하오리이까? 저희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옵고, 또 서로서로 다른이들을 위로하고 있아오며, 죽음을 참아가며, 실로 죽지 못해 목숨을 늘여가고 있습니다. 원컨대 주교님께서는 천주의 뜻대로 행하사, 속히 저희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주소서.<황사영 帛書, 金益鎭 譯, 한국순교사화 제4권, 가톨릭출판사, 1976>
 
     < 파도처럼 밀려오는 전 세계 각처에서 모이는 로마 순례단들을 접견하시었는데, 로마로 돌아가신 후, 1년 후에, 로마를 정례 예방하는 한국 주교들에게, 교황님께서는 또 다시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사에 대한,[기억 지킴이] 같은 노선에서, 아래 요지의 말씀을 이어가셨읍니다. 전국 주교님들을 통하여 우리 전국 교우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2015. 03. 12.)는 이처럼 사도좌를 방문한 한국 주교들에게 하신 연설에서, 최초의 한국 천주교 신자들, 즉 이벽,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등 신앙의 1세대 신앙공동체가 세례, 견진, 성체, 등의 성사를 받기 전부터, 마치 사도시대에서처럼, 이미 얼마나 거룩한 신앙생활과 신앙활동을 하였으며, 마침내는 목숨까지 바쳤는지 모를 수  없는 거룩한 기억을 잃지 맙시다. -Msgr. Byon->
 
Conferenza Episcopale Coreana (Seoul)-Giovedì, 14 agosto 2014.
한국어 cbck 번역문 & European Languages from Vatican.va>
 
<이하, 2014. 14. Agosto, 서울, 한국주교회의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 방한 첫날 한국 주교들에게 하신 연설, 한국어 번역문과 이태리어 원문.-Essere Custodi della Memoria >
 
 
한국 주교들과 만남에서 -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말씀
<서울,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강당에서.- 2014년 8월 14일, 목요일>
 
 
-[기억 지킴이]의 본분을 다하자! -
 
강우일 베드로 주교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으로 해 주신 형제적인 환영 말씀에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 교회의 활기찬 삶을 직접 보게 된 것은 저에게 커다란 복입니다. 목자로서 여러분은 주님의 양 떼를 지키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이루시는 놀라운 일들을 지키는 분들입니다. 지키는 것은 특별히 주교에게 맡겨진 임무의 하나로, 곧 하느님의 백성을 돌보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형제 주교 여러분과 함께 이 나라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지키는 임무의 두 가지 중심 측면을 성찰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 그리고 희망의 지킴이가 되는 것입니다.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들의 시복은 순교자들이 뿌린 씨앗으로 이 땅에서 은총의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기회입니다. 여러분은 순교자들의 후손이고, 그리스도 신앙을 영웅적으로 증언한 그 증거의 상속자들입니다. 또한 평신도들에게서 시작되어 여러 세대에 걸친 그들의 충실성과 끊임없는 노고로 크게 자라난, 매우 비범한 전통의 상속자들입니다. 그들은 성직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평신도였고, 그들 스스로 개척해 나갔습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가 하느님의 말씀과 직접 만나 시작되었다는 것은 뜻이 깊습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에는 아름다움과 진실성이 있어서, 복음과 복음의 요구, 곧 회개, 내적 쇄신, 사랑의 삶에 대한 요구가 이벽과 첫 세대의 양반 원로들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바로 그 메시지에, 그 순수함에, 거울을 보듯이 자신을 비추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한국 땅에 뿌려진 복음의 비옥함과 여러분의 신앙 선조들이 물려준 위대한 유산은, 오늘날 활기찬 본당 사목구와 교회 단체들의 번창에서, 탄탄한 교리교육 과정에서, 젊은이들과 가톨릭 학교, 신학교와 대학교에 대한 사목적 관심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국가의 정신적 문화적 생활에 대한 역할과 선교에 관한 힘찬 열정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선교지였던 한국은 이제 선교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보편 교회는 여러분이 세계에 파견한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은 과거의 은총을 기억하고 고이 간직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 기억으로부터 영적인 자산을 꺼내어, 앞을 내다보는 지혜와 결단으로 미래의 희망과 약속과 도전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잘 아시듯이, 한국 교회의 삶과 사명은 궁극적으로 외적, 양적, 제도적인 잣대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분명한 복음의 빛과 그 부르심에 비추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라는 회개의 촉구에 따라 판단하여야 합니다.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이란, 성장시켜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1코린 3,6 참조) 깨닫고, 동시에 성장은 과거처럼 현재에도 고난을 이겨내며 끊임없이 일하는 그러한 노고의 열매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순교자들과 지난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기억은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이상화되거나 “승리에 도취”된 기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지 않고 과거만 바라본다면, 우리가 앞으로 길을 나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적 진전을 가로막거나 실제로 멈추게 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여러분은 또한 희망의 지킴이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복음이 가져다주는 희망, 순교자들을 감격시킨 그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세상에 선포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물질적인 번영 속에서도 어떤 다른 것, 어떤 더 큰 것, 어떤 진정하고 충만한 것을 찾고 있는 세상에 이 희망을 선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형제 사제들은 여러분의 성화 직무를 통하여 이 희망을 제시하십시오. 이 성화 직무는 신자들을 전례와 성사 안에 있는 은총의 샘으로 이끌어 줄 뿐만 아니라,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라는(필리 3,14 참조)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행동하도록 끊임없이 재촉합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친교 안에서 성덕의 불꽃, 형제적 사랑의 불꽃, 선교 열정의 불꽃이 타오르게 함으로써 이 희망을 지킵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여러분이 언제나 여러분의 사제들 곁에 머무르도록 부탁합니다. 날마다 일하고 성덕을 추구하며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그들 곁에서 용기를 북돋아 주십시오. 하느님의 백성을 섬기는 그들의 아낌없는 봉사에 감사를 드린다고, 저의 사랑에 넘치는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사제들 곁에 머무르십시오. 당부합니다. 사제들 곁에 가까이 머무르십시오. 사제들이 주교를 자주 만날 수 있게 하십시오. 형제로서 또한 아버지로서 주교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 사제들은 사목 생활의 많은 순간에 그것을 필요로 합니다. 주교가 사제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사제들을 멀리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가슴 아픕니다. 저의 고향에서 몇몇 사제들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주교님께 전화해서 면담 신청을 했고, 석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답이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형제 주교님, 만일 오늘 한 사제가 주교님께 면담 신청을 하는 전화를 했다면, 오늘이나 내일 곧장 그 사제에게 전화하십시오. 만약 만나 줄 시간이 없다면, 이렇게 말하십시오. “지금은 이러이러한 일 때문에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저를 마음껏 이용하십시오.” 그렇지만 아버지의 대답을 즉시 들려주십시오. 제발, 여러분의 사제들에게서 멀어지지 마십시오.
 
선교하는 교회, 세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 교회, 특히 이 시대 사회의 변두리로 나아가는 교회가 되라는 도전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를 받아들이고 그 지체 하나 하나와 동화되는 데에 “영적인 맛”을 들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268항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공동체는 어린이들과 노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노인들의 기억과 지혜와 경험, 그리고 젊은이들의 열망을 외면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희망의 지킴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를 위하여 젊은이들의 교육을 특별히 배려하여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대학교도 중요하지만 대학교만이 아니라 초등학교를 비롯하여 모든 단계의 가톨릭 학교가 지닌 근본 사명의 수행을 뒷받침해 주십시오. 거기에서 젊은이들의 정신과 마음이 하느님과 그분의 교회에 대한 사랑 안에서 자라나고, 또 좋은 것, 참된 것, 아름다운 것 안에서 자라나서, 그들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정직한 시민이 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희망의 지킴이가 된다는 것은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으며, 특히 난민들과 이민들, 사회의 변두리에서 사는 사람들과 연대를 실행하여, 한국 교회의 예언자적 증거가 끊임없이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심은 구체적인 자선 활동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 그것도 필요한 것이지만 ― 사회, 직업, 교육 수준의 개선을 위한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사업적인 차원으로만 축소시키고, 모든 사람이 반드시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 한 인간으로 성장할 권리 - 자신의 인격과 창의력과 문화를 존엄하게 표현하여야 할 필요성을 잊어버리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는 복음의 중심에 있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 요소로 여겨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는 교회의 풍요한 유산인 사회 교리를 바탕으로 한 강론과 교리 교육을 통하여 신자들의 정신과 마음에 스며들어야 하며, 교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 반영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사도 시대의 이상은 여러분 나라의 첫 신앙 공동체에서 그 생생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상이 미래를 향해 순례하는 한국 교회가 걸어갈 길에 계속 귀감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얼굴이 그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의 얼굴일 때에, 당신 신비체의 친교 안에서 언제나 거룩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예수님의 마음에 늘 더 많은 젊은이들이 이끌려 올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중심에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또한 복음의 시작과 끝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셨다고) 나자렛 회당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마지막 날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우리 모두가 심판 받을 때 적용될 “규범”을 알려주십니다. 거기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번영의 시기에 오는 위험, 유혹이 있습니다. 위험이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한갓 “사교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곧 신비적 측면을 잃고 하느님의 신비를 거행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그러한 공동체는 영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인 가치를 지닌 조직이지만, 예언자적인 누룩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난한 이들이 교회에서 할 일은 없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역사 안에서 개별 교회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이 수없이 겪어 온 유혹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중산층의 공동체가 되어, 가난한 이들이 교회 안에서 수치심을 느끼고 그 안에 들어가기를 부끄러워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또한 정신적 웰빙, 사목적 웰빙에 대한 유혹입니다. 곧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 또는 잘사는 자들을 위한 중산층의 교회가 되려는 유혹입니다. 이는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맨 처음부터 시작되었던 일입니다.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을 꾸짖어야만 하였고(1코린 11,17), 야고보 사도는 더욱 강하고 더욱 분명하게 그들 부유한 공동체들,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들을 꾸짖어야만 하였습니다(야고 2,1-7).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쫓아내지는 않지만, 가난한 이들이 감히 교회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게, 또 제 집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도 없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번영에 대한 유혹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일을 잘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을 꾸짖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믿음 안에서 제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야 할 형제로서 여러분에게 말씀 드립니다.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의 교회는 번영하는 교회이고, 선교하는 훌륭한 교회이고, 커다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가라지를 심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바로 교회의 예언자적 구조에서 가난한 이들을 제거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마십시오.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 하나의 웰빙 교회 …… 그런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번영의 신학”에 이르렀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안 됩니다. 그저 그런 쓸모없는 교회가 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예언자적인 복음의 증거는 한국 교회에 특별한 도전들을 제기합니다. 한국 교회가, 번영하였으나 또한 매우 세속화되고 물질주의적인 사회의 한가운데에서 살고 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목자들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준보다도 기업 사회에서 비롯된 능률적인 운영, 기획, 조직의 모델들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성공과 권력이라는 세속적 기준을 따르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까지도 받아들이려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이 세상의 지혜를 판단할 수 있는 힘을 잃어 헛되게 된다면, 우리는 불행할 것입니다! (1코린 1,17 참조) 여러분과 여러분의 형제 사제들에게 권고합니다. 그러한 온갖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성령을 질식시키고, 회개를 무사안일로 대체하고, 마침내 모든 선교 열정을 소멸시켜 버리는 그러한 정신적 사목적 세속성에서 하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빕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93-97항 참조).
사랑하는 형제 주교 여러분,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감사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기억과 희망의 지킴이가 되는 여러분의 사명에 관한 이러한 묵상으로, 저는 한국 신자들의 일치와 성덕과 열정을 증진하려고 노력하시는 여러분에게 용기를 북돋아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기억과 희망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미래를 향해 이끌어 갑니다. 제 기도 안에서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겠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은총의 힘에 의지하십시오. “주님은 성실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성실하지 않더라도, 주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고 여러분을 악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2테살 3,3). 순교자들이 씨앗을 뿌리고 가톨릭 신자들이 대대로 물을 주어, 이 나라와 세상의 미래를 위한 약속으로서 여러분에게 전해진 신앙이,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기도로 이 땅에서 활짝 피어나기를 빕니다. 여러분에게, 그리고 여러분의 사목과 보호에 맡겨진 모든 이들에게 마음을 다하여 저의 강복을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부탁 드립니다. 부디,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이하 이태리어 원문>
 
Ringrazio il Vescovo Peter U-il Kang per le sue fraterne parole di benvenuto a nome vostro. È una benedizione per me essere qui e conoscere di persona la vita dinamica della Chiesa in Corea. A voi, come Pastori, spetta il compito di custodire il gregge del Signore. Siete i custodi delle meraviglie che Egli compie nel suo popolo. Custodire è uno dei compiti specificamente affidati al Vescovo: prendersi cura del popolo di Dio. Oggi vorrei riflettere con voi come fratello nell’episcopato su due aspetti centrali di tale custodia del popolo di Dio in questo Paese: essere custodi della memoria e essere custodi della speranza.
Essere custodi della memoria. La beatificazione di Paul Yun Ji-chung e dei suoi compagni è un’occasione per ringraziare il Signore che, dai semi sparsi dai martiri, ha fatto scaturire un abbondante raccolto di grazia in questa terra. Voi siete i discendenti dei martiri, eredi della loro eroica testimonianza di fede in Cristo. Siete inoltre eredi di una straordinaria tradizione che iniziò e crebbe largamente grazie alla fedeltà, alla perseveranza e al lavoro di generazioni di laici. Questi non avevano la tentazione del clericalismo: erano laici, andavano avanti da soli! È significativo che la storia della Chiesa in Corea abbia avuto inizio da un incontro diretto con la Parola di Dio. È stata la bellezza intrinseca e l’integrità del messaggio cristiano – il Vangelo e il suo appello alla conversione, al rinnovamento interiore e a una vita di carità – ad impressionare Yi Byeok e i nobili anziani della prima generazione; ed è a quel messaggio, alla sua purezza, che la Chiesa in Corea guarda come in uno specchio, per scoprire autenticamente sé stessa.
La fecondità del Vangelo in terra coreana e la grande eredità tramandata dai vostri antenati nella fede, oggi si possono riconoscere nel fiorire di parrocchie attive e di movimenti ecclesiali, in solidi programmi di catechesi, nell’attenzione pastorale verso i giovani e nelle scuole cattoliche, nei seminari e nelle università. La Chiesa in Corea è stimata per il suo ruolo nella vita spirituale e culturale della nazione e per il suo forte impulso missionario. Da terra di missione, la Corea è diventata oggi una terra di missionari; e la Chiesa universale continua a trarre beneficio dai tanti sacerdoti e religiosi che avete inviato nel mondo.
Essere custodi della memoria significa qualcosa di più che ricordare e fare tesoro delle grazie del passato. Significa anche trarne le risorse spirituali per affrontare con lungimiranza e determinazione le speranze, le promesse e le sfide del futuro. Come voi stessi avete notato, la vita e la missione della Chiesa in Corea non si misurano in definitiva in termini esteriori, quantitativi e istituzionali; piuttosto esse devono essere giudicate nella chiara luce del Vangelo e della sua chiamata ad una conversione alla persona di Gesù Cristo. Essere custodi della memoria significa rendersi conto che la crescita viene da Dio (cfr 1 Cor 3,6) e al tempo stesso è il frutto di un paziente e perseverante lavoro, nel passato come nel presente. La nostra memoria dei martiri e delle generazioni passate di cristiani deve essere realistica, non idealizzata o e non “trionfalistica”. Guardare al passato senza ascoltare la chiamata di Dio alla conversione nel presente non ci aiuterà a proseguire il cammino; al contrario frenerà o addirittura arresterà il nostro progresso spirituale.
Oltre ad essere custodi della memoria, cari fratelli, voi siete anche chiamati ad essere custodi della speranza: quella speranza offerta dal Vangelo della grazia e della misericordia di Dio in Gesù Cristo, quella speranza che ha ispirato i martiri. È questa speranza che siamo invitati a proclamare ad un mondo che, malgrado la sua prosperità materiale, cerca qualcosa di più, qualcosa di più grande, qualcosa di autentico e che dà pienezza. Voi e i vostri fratelli sacerdoti offrite questa speranza con il vostro ministero di santificazione, che non solo conduce i fedeli alle sorgenti della grazia nella liturgia e nei sacramenti, ma costantemente li spinge ad agire in risposta alla chiamata di Dio a tendere alla meta (cfr Fil 3,14). Voi custodite questa speranza mantenendo viva la fiamma della santità, della carità fraterna e dello zelo missionario nella comunione ecclesiale. Per questa ragione vi chiedo di rimanere sempre vicini ai vostri sacerdoti, incoraggiandoli nel loro lavoro quotidiano, nella loro ricerca di santità e nella proclamazione del Vangelo di salvezza. Vi chiedo di trasmettere loro il mio affettuoso saluto e la mia gratitudine per il generoso servizio in favore del popolo di Dio. Vicini ai vostri sacerdoti, mi raccomando, vicinanza, vicinanza ai sacerdoti. Che loro possano incontrare il vescovo. Questa vicinanza fraterna del vescovo, e anche paterna: ne hanno bisogno in tanti momenti della loro vita pastorale. Non vescovi lontani o, peggio, che si allontanano dai loro preti. Con dolore lo dico. Nella mia terra, tante volte ho sentito qualche sacerdote che mi diceva: “Ho chiamato il vescovo, ho chiesto udienza; sono passati tre mesi, ancora non ho risposta”. Ma senti, fratello, se un sacerdote oggi ti chiama per chiederti udienza, richiamalo subito, oggi o domani. Se tu non hai tempo per riceverlo, diglielo: “Non posso perché ho questo, questo, questo. Ma io volevo sentirti e sono a tua disposizione”. Ma che sentano la risposta del padre, subito. Per favore, non allontanatevi dai vostri sacerdoti.
Se noi accettiamo la sfida di essere una Chiesa missionaria, una Chiesa costantemente in uscita verso il mondo e in particolare verso le periferie della società contemporanea, avremo bisogno di sviluppare quel “gusto spirituale” che ci rende capaci di accogliere e di identificarci con ogni membro del Corpo di Cristo (cfr Esort. ap. Evangelii gaudium, 268). In questo senso una particolare sollecitudine chiede di essere mostrata nelle nostre comunità nei confronti dei bambini e dei più anziani. Come possiamo essere custodi di speranza se trascuriamo la memoria, la saggezza e l’esperienza degli anziani e le aspirazioni dei giovani? A questo proposito vorrei chiedervi di prendervi cura in modo speciale dell’educazione dei giovani, sostenendo nella loro indispensabile missione non solo le università, che sono importanti, ma anche le scuole cattoliche di ogni grado, a partire da quelle elementari, dove le giovani menti e i cuori vengono formati all’amore di Dio e della sua Chiesa, al bene, al vero e al bello, ad essere buoni cristiani e onesti cittadini.
Essere custodi di speranza implica anche garantire che la testimonianza profetica della Chiesa in Corea continui ad esprimersi nella sua sollecitudine per i poveri e nei suoi programmi di solidarietà, soprattutto per i rifugiati e i migranti e per coloro che vivono ai margini della società. Questa sollecitudine dovrebbe manifestarsi non solo attraverso concrete iniziative di carità – che sono necessarie – ma anche nel costante lavoro di promozione a livello sociale, occupazionale ed educativo. Possiamo correre il rischio di ridurre il nostro impegno con i bisognosi alla sola dimensione assistenziale, dimenticando la necessità di ognuno di crescere come persona – il diritto che ha di crescere come persona – e di poter esprimere con dignità la propria personalità, creatività e cultura. La solidarietà con i poveri è al centro del Vangelo; va considerata come un elemento essenziale della vita cristiana; mediante la predicazione e la catechesi, fondate sul ricco patrimonio della dottrina sociale della Chiesa, essa deve permeare i cuori e le menti dei fedeli e riflettersi in ogni aspetto della vita ecclesiale. L’ideale apostolico di una Chiesa dei poveri e per i poveri, una Chiesa povera per i poveri, ha trovato espressione eloquente nelle prime comunità cristiane della vostra nazione. Auspico che questo ideale continui a modellare il cammino della Chiesa in Corea nel suo pellegrinaggio verso il futuro. Sono convinto che se il volto della Chiesa è in primo luogo il volto dell’amore, sempre più giovani saranno attratti verso il cuore di Gesù sempre infiammato di amore divino nella comunione del suo mistico Corpo.
Ho detto che i poveri sono al centro del Vangelo; sono anche all’inizio e alla fine. Gesù, nella sinagoga di Nazareth, parla chiaro, all’inizio della sua vita apostolica. E quando parla dell’ultimo giorno e ci fa conoscere quel “protocollo” sul quale tutti noi saremo giudicati – Matteo 25 –, anche lì ci sono i poveri. C’è un pericolo, c’è una tentazione che viene nei momenti di prosperità: è il pericolo che la comunità cristiana si “socializzi”, cioè che perda quella dimensione mistica, che perda la capacità di celebrare il Mistero e si trasformi in una organizzazione spirituale, cristiana, con valori cristiani, ma senza lievito profetico. Lì si è persa la funzione che hanno i poveri nella Chiesa. Questa è una tentazione della quale le Chiese particolari, le comunità cristiane hanno sofferto tanto, nella storia. E questo fino al punto di trasformarsi in una comunità di classe media, nella quale i poveri arrivano a provare anche vergogna: hanno vergogna di entrare. E’ la tentazione del benessere spirituale, del benessere pastorale. Non è una Chiesa povera per i poveri, ma una Chiesa ricca per i ricchi, o una Chiesa di classe media per i benestanti. E questo non è cosa nuova: questo cominciò all’inizio. Paolo deve rimproverare i Corinzi, nella Prima Lettera, capitolo XI, versetto 17; e l’apostolo Giacomo più forte ancora, e più esplicito, nel suo capitolo II, versetti da 1 a 7: deve rimproverare queste comunità benestanti, queste Chiese benestanti per i benestanti. Non si cacciano via i poveri ma si vive in modo tale che loro non osino entrare, non si sentano a casa loro. Questa è una tentazione della prosperità. Io non vi rimprovero, perché so che voi lavorate bene. Ma come fratello che deve confermare nella fede i suoi fratelli, vi dico: state attenti, perché la vostra è una Chiesa in prosperità, è una grande Chiesa missionaria, è una grande Chiesa. Il diavolo non semini questa zizzania, questa tentazione di togliere i poveri dalla struttura profetica stessa della Chiesa, e vi faccia diventare una Chiesa benestante per i benestanti, una Chiesa del benessere… non dico fino ad arrivare alla ‘teologia della prosperità’, no, ma nella mediocrità.
Cari fratelli, una profetica testimonianza evangelica presenta alcune sfide particolari per la Chiesa in Corea, dal momento che essa vive ed opera nel mezzo di una società prospera ma sempre più secolarizzata e materialistica. In tali circostanze gli operatori pastorali sono tentati di adottare non solo efficaci modelli di gestione, programmazione e organizzazione tratti dal mondo degli affari, ma anche uno stile di vita e una mentalità guidati più da criteri mondani di successo e persino di potere che dai criteri enunciati da Gesù nel Vangelo. Guai a noi se la Croce viene svuotata del suo potere di giudicare la saggezza di questo mondo! (cfr 1 Cor 1,17). Esorto voi e i vostri fratelli sacerdoti a respingere questa tentazione in tutte le sue forme. Voglia il Cielo che possiamo salvarci da quella mondanità spirituale e pastorale che soffoca lo Spirito, sostituisce la conversione con la compiacenza e finisce per dissipare ogni fervore missionario! (cfr Esort. ap. Evangelii gaudium, 93-97).
Cari fratelli Vescovi, grazie di tutto quello che voi fate: grazie. E con queste riflessioni sulla vostra missione come custodi della memoria e della speranza, ho voluto incoraggiarvi nei vostri sforzi per incrementare l’unità, la santità e lo zelo dei fedeli in Corea. La memoria e la speranza ci ispirano e ci guidano verso il futuro. Vi ricordo tutti nelle mie preghiere e vi esorto sempre a confidare nella forza della grazia di Dio. Non dimenticatevi: “Il Signore è fedele”. Noi non siamo fedeli, ma Lui è fedele. “Egli vi confermerà e vi custodirà dal Maligno” (2 Ts 3,3). Possano le preghiere di Maria, Madre della Chiesa, portare a piena fioritura in questa terra i semi sparsi dai martiri, irrorati da generazioni di fedeli cattolici e trasmessi a voi come promessa per il futuro del Paese e del mondo. A voi e a tutti coloro che si sono affidati alla vostra cura pastorale e alla vostra custodia, imparto di cuore la mia Benedizione, e vi chiedo, per favore, di pregare per me. Grazie.
<한국교회를 사목 방문하시고나서도 계속 여러나라를 방문하시고 날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전 세계 각처에서 모이는 로마 순례단들을 접견하시었는데, 로마로 돌아가신 후, 1년 후에, 로마를 정례 예방하는 한국 주교들에게, 교황님께서는 또 다시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사에 대한,[기억 지킴이] 같은 노선에서, 아래 요지의 말씀을 이어가셨읍니다. 전국 주교들을 통하여 우리 전국 교우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사도좌를 방문한(Ad Limina)
한국 주교님들에게 하신 말씀.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2015. 03. 12.)사도좌를 방문한 한국 주교들에게 하신 연설에서, 최초의 한국 천주교 신자들, 즉 이벽,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등 신앙의 1세대 신앙공동체가 세례, 견진, 성체, 등의 성사를 받기 전부터, 마치 사도시대에서처럼, 이미 얼마나 거룩한 신앙생활과 신앙활동을 하였으며, 마침내는 목숨까지 바쳤는지를 강조하셨다. -Msgr. Byon->
<이하 2015. 03. 12. 바티칸에서 로마의 사도좌를 방문한(Ad Limina)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 한국 주교들에게 하신 말씀의 한국어 번역문과 이태리어 원문>
 
사랑하는 형제주교 여러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의 묘소를 참배하고 우리를 일치시키는 우의와 친교의 결속을 강화하고자 사도좌를 방문하신 여러분을 맞이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이 날들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한 여러분의 봉사에 은총과 쇄신의 기회가 되기를 빕니다.
저는 여러분과 한국과 몽골 교회 전체를 대표하여 따뜻한 인사 말씀을 해 주신 김희중 대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여러분을 뵙게 되니 지난번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좋은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저는 그때 저를 매우 따뜻하게 맞이하고 자신의 삶의 기쁨과 슬픔을 저와 함께 나눈 한국인들의 선함을 직접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나라를 방문한 일은 보편 교회를 위한 저의 직무에 언제나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한국방문 기간에 우리는 한국의 교회생활, 특히 하느님의 백성과 사회에 봉사하는 우리의 주교직무에 관하여 성찰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저의 한국 방문의 세 측면을 강조하면서 오늘 그 성찰을 여러분과 함께 이어나가고자 합니다. 그 세측면은 기억과 젊은이, 그리고 우리 형제자매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주는 사명입니다. 저는 이 성찰을 몽골 교회와도 나누고 싶습니다. 비록 광활한 지역 안에 있는 작은 공동체이지만 이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약속하는 작은 겨자씨와 같습니다(마태 13,31-32 참조). 이러한 성찰이 그 씨앗을 계속 키우고 몽골사람들의 신앙의 비옥한 토양에 자양분이 되기를 빕니다.
 
저의 한국 방문 때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 가운데 하나는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이었습니다. 그분들을 복자품에 올리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한국 교회의 태동기에 내려 주신 셀 수 없는 은총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러한 하느님의 은사에 대한 충실한 응답에도 감사하였습니다.
 한국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교회의 성사생활로 온전히 나타내기 전부터 이미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이루어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계급과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예수님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며 주님의 첫 제자들처럼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습니다(사도 4,32 참조).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것도 ……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들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미사 강론, 2014.8.16.).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궁극적인 행동으로 완성되어 그들의 피가 교회 못자리의 물이 되었습니다.
 
그 첫 공동체는 여러분과 교회 전체에 그리스도인 삶의 아름다운 증언을 남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를 찾는 올곧은 마음, 그들이 신봉하고자 선택한 종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그들이 증언한 애덕과 모든이를 향한 연대성”(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미사 강론, 2014.8.16.)입니다. 그들의 모범은 우리를 만남과 자선과 희생으로 초대하여 더욱 충실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만들 수 있는 학교입니다. 그들이 가르쳐 준 교훈은, 기술과 통신에서 이루어진 많은 발전에도 개인들이 더욱 고립되고 공동체가 무기력해지는 우리 시대에 특별히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교구의 신부와 수도자와 평신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본당과 학교와 사도직 시설들을 참다운 만남의 자리로 만드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는 우리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시고 모든 인간의 존엄에 눈을 뜨도록 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만나게 해주십니다. 또한 이는 다른 이들과 만남, 특히 가난한 이, 노인, 우리 가운데 잊힌 이들과 만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우리에 대한 그분의 자비를 체험하면 우리는 그분의 구원의 힘을 더욱 더 확신하는 증인이 됩니다. 곧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우리가 받은 은사를 더욱 잘 나누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안에서 하느님과 서로에게 바치는 산 제물이 될 것입니다(로마12,1.9-10 참조).
저는 이제 여러분 조상들의 유산을 계속 이어가려는 위대한 열정을 지닌 젊은이들을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은 삶을 시작하는 단계에 있으면서 희망과 기대와 가능성으로 충만합니다. 아시아 청년 대회를 위하여 한국과 아시아 전역에서 모인 젊은이들과 함께하고 그들이 하느님과 서로에게 열려 있음을 경험한 것은 제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증언이 우리가 서로를 돌볼 것을 촉구하듯이 바로 우리 젊은이들도 우리가 서로에게 귀를 기울일 것을 요청합니다. 저는 주교님들이 자기 교구와 본당과 단체에 젊은이들을 참여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안의 우리 신앙과 삶의 부요를 나누려고 젊은이들이 목소리를 내고 그들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젊은이들과 이야기할 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분명하고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누어 주기를 요청합니다. 또한 젊은이들은 우리 자신의 신앙과 충성의 진실성을 시험합니다. 우리가 우리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고 하느님 백성의 모범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1베드 5,3 참조). 우리의 삶이 우리의 신앙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에 젊은이들은 곧바로 우리와 교회를 비난할 것입니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솔직함은 신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도록 돕고자 노력하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기 교구의 생활을 돌이켜 보고, 사목 계획을 수립하고 수정할 때에 여러분이 섬기는 젊은이들을 앞세우도록 하십시오. “더 거룩하고 더 선교적이고 겸손한 교회, 또한 가난한 이들, 외로운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을 찾아 섬기는가운데 하느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는 하나인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제6회 아시아 청년 대회 폐막 미사 강론, 2014.8.17.) 데에 젊은이들을 동반자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젊은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여러분이 그들에게 관심이 있고 그들의 필요를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이러한 친근함이 교회 단체와 공동체를 강화시켜 줄 뿐 아니라 그들과 그들 가족이 사회의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을 여러분이 이해하시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복음이 가톨릭 공동체와 사회 전체의 삶에 더욱 깊숙이 스며들게 될 것입니다. 젊은이들을 위한 여러분의 봉사를 통하여 교회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신 대로 세상의 누룩이 될 것입니다(마태 13,33 참조).
이제 여러분이 지역 교회로 돌아가실 준비를 하시는 데에, 여러분의직무를 격려하고 여러분의 사명을 굳건히 하면서 저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섬김을 받으시려고가 아니라 섬기러 오신 것처럼 여러분도종이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마태 20,28 참조).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영혼에게 예외없이 거저 주는 봉사의 삶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백성을 위하여 여러분이 실천하시는 관대하고 헌신적인 직무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날마다 새롭게 하는 자기 증여에서 특별히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를선포한다는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이 단순히 마땅하고 옳은 일일 뿐아니라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의미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삶을 새로운 빛과 깊은 기쁨으로 채울 수 있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 (「복음의 기쁨」, 167항).
이러한 봉사의 정신으로 여러분이 서로를 돌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협력과 형제적 지원으로 여러분은 한국과 몽골의 교회를 강화하고 그리스도를 더욱 효과적으로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부들과도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을 훈계하고 바로잡아 줄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들의 어려움과 기쁨에 함께 하는 참다운 아버지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많은 수도자들과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이들의 봉헌은 나날이 교회생활을 부요하게 해 주고 도움이 됩니다. 이들이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가시적인 표징을 사회에 보여주기 때문입니다(묵시 21,1-2참조). 주님의 포도밭에서 실천하는 이러한 헌신적인 노력을 통하여 여러분이 모든 평신도와 함께 여러분 선조의 유산을 바탕으로 삼고 한국과 몽골에서 교회의 친교와 사명을 깊이하기 위한 주님께 맞갖은 제물을 바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몽골의 가톨릭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 건설에 노력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특별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이 신앙의 열정을 계속 간직하며 성령의 성화하는 힘이 선교하는 제자인 그들의 활동에 함께 한다는 것을 늘 확신하기 바랍니다(「복음의 기쁨」, 119항 참조).
사랑하는 형제 주교 여러분, 한국과 몽골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지속적인 증언에 다시 한 번 감사 드리며 제가 여러분을 위하여 계속 기도하고 영적으로 가까이 있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여러분 모두를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전구에 맡겨 드리며 여러분과 여러분의 보호에 맡겨진 모든 이에게 저의 진심 어린 교황 강복을 보내 드립니다.
<이하, 이태리어 원문>
 
DISCORSO DEL SANTO PADRE FRANCESCO
AGLI ECC.MI PRESULI DELLA CONFERENZA EPISCOPALE
DI COREA, IN VISITA "AD LIMINA APOSTOLORUM"
Sala del Concistoro / Giovedì, 12 marzo 2015
 
Cari Fratelli Vescovi,
È una grande gioia per me darvi il benvenuto mentre realizzate la vostra visita ad Limina Apostolorum per pregare sulle tombe dei Santi Pietro e Paolo e per rafforzare i vincoli di amicizia e di comunione che ci uniscono. Prego perché questi giorni siano un’occasione di grazia e di rinnovamento nel vostro servizio a Cristo e alla sua Chiesa.
Ringrazio l’Arcivescovo Kim per le calorose parole di saluto che ha pronunciato a nome vostro e di tutta la Chiesa in Corea e in Mongolia. La vostra presenza, oggi, riporta alla mente i lieti ricordi della mia recente visita in Corea, dove ho sperimentato di persona la bontà del popolo coreano, che mi ha accolto con tanta generosità e ha condiviso con me le gioie e le tristezze della sua vita. La visita nel vostro Paese continuerà a essere per me un incoraggiamento duraturo nel mio ministero per la Chiesa Universale.
Nel corso della mia visita abbiamo avuto l’opportunità di riflettere sulla vita della Chiesa in Corea e, in particolare, sul nostro ministero episcopale al servizio del popolo di Dio e della società. Desidero continuare quella riflessione con voi oggi, evidenziando tre aspetti della mia visita: la memoria, i giovani e la missione di confermare i nostri fratelli e le nostre sorelle nella fede. Vorrei anche condividere queste riflessioni con la Chiesa in Mongolia. Pur essendo una piccola comunità in un territorio vasto, essa è come il granello di senape che è la promessa della pienezza del Regno di Dio (cfr. Mt 13, 31-32). Possano queste riflessioni incoraggiare la crescita costante di quel granello e nutrire il ricco suolo della fede del popolo della Mongolia.
Per me, uno dei momenti più belli della visita in Corea è stata la beatificazione dei martiri Paul Yun Ji-chung e compagni. Annoverandoli tra i beati, abbiamo lodato Dio per le innumerevoli grazie che ha riversato sulla Chiesa in Corea nella sua infanzia, e anche reso grazie per la risposta fedele data a questi doni di Dio.
Già prima che la loro fede trovasse piena espressione nella vita sacramentale della Chiesa, questi primi cristiani coreani non solo avevano alimentato la loro relazione personale con Gesù, ma lo avevano anche portato ad altri, a prescindere dalla classe o dalla posizione sociale, e avevano dimorato in una comunità di fede e di carità come i primi discepoli del Signore (cfr. At 4, 32). «Erano disposti a grandi sacrifici e a lasciarsi spogliare di quanto li potesse allontanare da Cristo [...]: solo Cristo era il loro vero tesoro» (Omelia a Seoul, 16 agosto 2014). Il loro amore di Dio e del prossimo si è compiuto nell’atto finale di dare la propria vita, irrigando con il loro sangue il semenzaio della Chiesa.
Quella prima comunità ha lasciato a voi e a tutta la Chiesa una bella testimonianza di vita cristiana: «la loro rettitudine nella ricerca della verità, la loro fedeltà ai sommi principi della religione che hanno scelto di abbracciare, nonché la loro testimonianza di carità e di solidarietà verso tutti» (Ibidem). Il loro esempio è una scuola che può fare di noi testimoni cristiani sempre più fedeli, chiamandoci all’incontro, alla carità e al sacrificio. Le lezioni che hanno impartito possono essere applicate in modo particolare ai nostri tempi in cui, malgrado i numerosi progressi compiuti nella tecnologia e nella comunicazione, gli individui sono sempre più isolati e le comunità indebolite. Quanto è importante, dunque, che lavoriate insieme con i sacerdoti, i religiosi e le religiose e i leader laici delle vostre diocesi per assicurare che le parrocchie, le scuole e i centri di apostolato siano autentici luoghi d’incontro: incontro con il Signore, che c’insegna come amare e che apre i nostri occhi alla dignità di ogni persona, e incontro gli uni con gli altri, specialmente con i poveri, gli anziani, le persone dimenticate in mezzo a noi. Quando incontriamo Gesù e sperimentiamo la sua compassione per noi, diventiamo testimoni sempre più convincenti del suo potere salvifico; condividiamo più facilmente il nostro amore per lui e i doni con i quali siamo stati benedetti. Diventiamo un sacrificio vivente, dediti a Dio e agli altri nell’amore (cfr. Rm 12, 1, 9-10).
Il mio pensiero va ora ai vostri giovani, che desiderano fortemente portare avanti l’eredità dei vostri antenati. Sono agli inizi della loro vita e pieni di speranza, promessa e possibilità. È stata una gioia per me stare con i giovani della Corea e di tutta l’Asia che si sono riuniti per la Giornata della Gioventù asiatica, e di sperimentare la loro apertura a Dio e agli altri. Proprio come la testimonianza dei primi cristiani ci invita a prenderci cura gli uni degli altri, così i nostri giovani ci sfidano ad ascoltarci gli uni gli altri. So che nelle vostre diocesi, parrocchie e istituzioni state cercando nuovi modi per coinvolgere i giovani, affinché possano avere una voce ed essere ascoltati, al fine di condividere la ricchezza della vostra fede e della vita nella Chiesa. Quando parliamo con i giovani, essi ci sfidano a condividere la verità di Gesù Cristo con chiarezza e in un modo che possano comprendere. Mettono anche alla prova l’autenticità della nostra fede e fedeltà. Sebbene predichiamo Cristo e non noi stessi, siamo chiamati a essere d’esempio al popolo di Dio (cfr. 1 Pt 5, 3) al fine di attirare le persone a lui. I giovani richiameranno subito noi e la Chiesa all’ordine se la nostra vita non rispecchierà la nostra fede. La loro onestà a questo riguardo può esserci di aiuto, proprio mentre cerchiamo di assistere i fedeli nel manifestare la fede nella loro vita quotidiana.
Mentre riflettete sulla vita delle vostre diocesi, mentre formulate e rivedete i vostri piani pastorali, vi esorto a tenere presenti i giovani che servite. Vedeteli come partner nell’«edificare una Chiesa più santa, più missionaria e umile [...] una Chiesa che ama e adora Dio, cercando di servire i poveri, le persone sole, i malati e gli emarginati” (Omelia al Castello di Haemi, 17 agosto 2014). Siate loro vicini e mostrate che vi preoccupate di loro e comprendete i loro bisogni. Questa vicinanza non solo rafforzerà le istituzioni e le comunità della Chiesa, ma vi aiuterà anche a comprendere le difficoltà che loro e le loro famiglie sperimentano nella vita quotidiana nella società. In questo modo, il Vangelo penetrerà sempre più profondamente nella vita sia della comunità cattolica sia della società nel suo insieme. Attraverso il vostro servizio ai giovani, la Chiesa diventerà quel lievito nel mondo che il Signore ci chiama a essere (cfr. Mt 13, 33).
Mentre vi preparate a ritornare alle vostre Chiese locali, oltre che a incoraggiarvi nel vostro ministero e a confermarvi nella vostra missione, vi chiedo, soprattutto, di essere servitori proprio come Cristo è venuto per servire e non per essere servito (cfr. Mt 20, 28). La nostra è una vita di servizio, donata liberamente, per ogni anima affidata alle nostre cure, senza eccezioni. Ho constatato ciò nel vostro servizio generoso e altruistico alla vostra gente, che trova una particolare espressione nel vostro annuncio di Gesù Cristo e nel dono di voi stessi che rinnovate ogni giorno. «Annunciare Cristo significa mostrare che credere in Lui e seguirlo non è solamente una cosa vera e giusta, ma anche bella, capace di colmare la vita di un nuovo splendore e di una gioia profonda, anche in mezzo alle prove» (Evangelii gaudium, n. 167).
In questo spirito di servizio, possiate essere solleciti gli uni verso gli altri. Attraverso la vostra collaborazione e il vostro sostegno fraterno, rafforzerete la Chiesa in Corea e in Mongolia e diventerete sempre più efficaci nel proclamare Cristo. Possiate anche essere vicini ai vostri sacerdoti: siate veri padri, che cercano non solo di esortare e di correggere, ma ancor più di accompagnarli nelle loro difficoltà e nelle loro gioie. Avvicinatevi anche ai tanti religiosi e alle religiose, la cui consacrazione arricchisce e sostiene ogni giorno la vita della Chiesa, poiché essi offrono alla società un segno visibile del nuovo cielo e della nuova terra (cfr. Ap 21, 1-2). Con questi operai impegnati nella vigna del Signore, insieme con tutti i fedeli laici, possiate edificare sull’eredità dei vostri avi e offrire al Signore un degno sacrificio per rendere più profonde la comunione e la missione della Chiesa in Corea e in Mongolia.
Desidero esprimere il mio apprezzamento in modo particolare alla comunità cattolica in Mongolia, per i suoi sforzi nell’edificare il Regno di Dio. Possa essa rimanere fervente nella fede, sempre fiduciosa che la forza santificatrice dello Spirito Santo è all’opera in lei come discepola missionaria (cfr. Evangelii gaudium, n. 119).
Cari fratelli Vescovi, con rinnovata gratitudine per la testimonianza duratura delle comunità cristiane in Corea e in Mongolia, vi assicuro delle mie costanti preghiere e della mia vicinanza spirituale. Affido tutti voi all’intercessione di Maria, Madre della Chiesa e imparto volentieri la mia Benedizione Apostolica a voi e a tutti coloro che sono affidati alle vostre cure.
 
한국 주교님들과 만남 -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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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 8. 14. 서울, 주교회의 주교님들과 교황 프란치스꼬 성하. <사진, 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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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12.03 오후 10:4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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