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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처참 형으로 순교하신 황사영 진사의 묘 참배 !

글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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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순교자 황사영 진사의 몸을 다섯 조각으로 찢어서 바친 신유년 말의 최후 제물!
1801년(辛酉年),음력 정월 초부터 무서운 대박해가 시작되었다. 신유년의 대박해로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 대부분이 마지막으로 목숨을 바치는 장렬한 순교의 해다.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황사영, 주문모 신부, 강완숙, 이가환, 이존창 등. 우리가 차마 잊을 수 없는, 신유년 대박해에 순교하시고, 수난하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천진암 성지에서는 매년 양력 2월 10일을 기념일로 정하여, 30여 년 째 미사를 올리고, 강론과 다과를 한다. 박해 중에 순교한 몇 분의 시성이나 시복만으론 부족하다. 천주교 신앙 때문에 수난하신 저 많은 선조들, 하느님 백성의 피 묻은 선조들을 어찌 잊어야 한단 말인가?
황사영 알렉시오가 16세 때, 진사시험에 합격하자, 정조 임금이 감탄하여, 손목을 잡고, “지금 나이가 너무 어려서, 벼슬을 내리기가 어려우나, 스무 살이 되거든 꼭 내게 오너라, 네게 벼슬자리를 주리라." 하여, 상감마마가 잡았던 손목을 남들이 잡지 못하게, 비단 한 폭으로 감고, 10여 년간 살았으며, 배론에서 체포될 때도, 그 손목은 포졸들이 잡지 못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1980년 9월 1일, 당시 주교회의 200주년위원회 사무국장 겸 시복시성 추진부장으로 있던 필자가 종친회 황용호 교수, 가톨릭신문사 고국상 기자, 등과 함께 장흥면 부곡리 홍복산 끝자락의 옛날 옹기촌 독막골 선영에 있던 황진사 묘를 처음 발굴할 때, 작은 조선 백자함에 그 비단폭은 잘 개켜지고 접혀서 삭아 있었다. 조국과 임금에 대한 황진사의 존경심과 충성심은, 상감이 잡았던 손목을 비단으로 늘 감고 체포될 때까지 10년을 변치 않았으니, 그 정신과 의지와 생활자세로 증명되고도 남는다. 친인척 주위 사람들도 이를 공인하듯, 무덤 속에까지 이를 함께 묻었다. 스무 살이 넘어도, 벼슬을 받기 위하여 대궐을 찾지 않고, 교회 일에 전념하던 황진사는, 권력이나 명예나 벼슬을 탐하지 않는 선비임을 말해준다.
조선의 개국공신 후예로 대석학 권일신, 권철신 등을 타살하고, 이승훈, 정약종, 등, 서소문을 피의 제단으로 만들며, 심지어 함경도 무산, 전라도 강진, 흑산도, 신지도, 경산도, 진해, 마산, 밀양, 충남 예산, 등, 8도 강산을 유배지로 하여, 천주교 신앙인들을 죽이고, 가산을 몰수하고, 유배를 보내던 그 시절, 국제감각을 가진 황진사의 政見대로, 만일 당시 프랑스해군력에라도 의지하여, 조선을 개혁하였더라면, 한일합방도 없었을 것이다.
일본 근대화의 계기로 보는 1860년대 초 일본의 明治維新보다 60여년 앞서서 우리는 西歐的 文明에 진입하였을 것이니, 당시 프랑스는 쟌 쟉 루소를 비롯한 啓蒙主義(illuminati) 자들의 바람이 불면서, 1790년대 말부터 1800년 초에 이르는 현대화 작업이 일어나 우리로 말하면 만민공동회가 개최되기도 할 때였다. 황진사는 실로 선견지명이 있던 천재였다. 당시 쟈코뱅파니, 룻쏘파니, 하면서, 세계 최초로, 右翼과 左翼이라는 정치용어가 탄생하던 시절, 우리나라에 황진사같은 선견지명이 있고, 권세욕이 없는, 또 조국과 임금에 대한 존경과 충성이 극진한 젊은 선비가 있었다. 만일 그 때 황진사의 정견대로 우리가 西歐化에 진입했더라면, 영국이나 일본처럼 立憲君主制로의 개혁이 가능하고, 불가피했을 것이다.
1801년 신유년 박해를 마치는 최종 제물이 그 해말 서소문에서 능지처참형을 당한 황진사의 순교다. 십자가상 우리 주님보다 더 참혹한 처형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양반 지위에서 노비의 종 신분으로 바뀌어, 어머니는 거제도로, 3살 아들 경헌이는 추자도로, 부인 정명연 마리아(당시 28세)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읍으로 귀양을 가서 40년을 귀양살이를 하였다. 신유년 말 능지처참형으로 제물이 된 위대한 순교자요, 애국자이신 알렉시오 황사영 진사의 시복과 시성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고, 조속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Msgr. Byon

황사영 진사 묘(黃嗣永 進士 墓)


장흥(長興)면 부곡리 선영의 황사영(黃嗣永) 진사(進士) 묘(석제(石製) 십자가 및 항아리 발견돼)


주문모 신부로부터 Alexius로 세례를 받았던 황사영은 신부와 거처를 같이 하며 전교에 힘쓰다 제천 산골 배론 토굴로 몸을 숨기고는 북경 주교 앞으로 보내는 백서(帛書)를 썼다. 그러나 도중에 밀사였던 황심(黃沁)이 잡히면서 황사영도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능지처참형으로 처형되어 선영인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가마골(홍복산 밑)에 묻혔는데, 1980년 9월 1일 그의 17대손 황용호(黃龍浩, 동국대, 경상대)교수가 발굴묘에서 석제 십자가와 비단대(帶)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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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묘 발굴시 발견된 항아리를 변기영(신장 본당)신부가 들어내고 있다. 곁에 있는 황두희씨는 판윤공파(判尹公派) 종친회 회장으로 황사영의 직계손이다. 신유박해 당시 황사영의 외아들 경헌이 추자도로 유배되자, 황씨 문중에서는 황사영의 사촌인 병직(秉直)을 양자로 들여 손(孫)을 잇게 했었다.(1980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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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마골 홍복산 아래 있는 황사영 진사의 묘를 발굴후 재 손질한 모습(1980.09.20일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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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골 홍복산 아래 있는 황사영 진사의 묘를 발굴하기 전 답사 확인(1980년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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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성지, 변기영 몬시뇰과 성지 회장단들 황사영 묘 참배(2009.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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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성지, 변기영 몬시뇰과 성지 회장단들 황사영 묘 참배(2009.12.04)


송추, 가막골, 홍복산 끝자락에 있는,
순교자  황사영 진사 묘,
 
송추, 가막골, 홍복산 끝자락에 있는, 순교자  황사영 진사 묘, 호텔 뒤란으로 허락을 받고 들어가 참배, 변기영 몬시뇰 외 천진암 성지 직원3(2013.06.29)


송추, 가막골, 홍복산 끝자락에 있는, 순교자  황사영 진사 묘,  호텔 뒤란으로 허락을 받고 들어가 참배, 변기영 몬시뇰 외 천진암 성지 직원3(2013.06.29)


송추, 가막골, 홍복산 끝자락에 있는, 순교자  황사영 진사 묘, 호텔 뒤란으로 허락을 받고 들어가 참배, 변기영 몬시뇰 외 천진암 성지 직원3(2013.06.29)


송추, 가막골, 홍복산 끝자락에 있는, 순교자  황사영 진사 묘,  호텔 뒤란으로 허락을 받고 들어가 참배, 변기영 몬시뇰 외 천진암 성지 직원3(2013.06.29)


송추, 가막골, 홍복산 끝자락에 있는, 순교자  황사영 진사 묘, 호텔 뒤란으로 허락을 받고 들어가 참배, 변기영 몬시뇰 외 천진암 성지 직원3(2013.06.29)


송추, 가막골, 홍복산 끝자락에 있는, 순교자  황사영 진사 묘, 호텔 뒤란으로 허락을 받고 들어가 참배, 변기영 몬시뇰 외 천진암 성지 직원3(2013.06.29)


송추, 가막골, 홍복산 끝자락에 있는, 순교자  황사영 진사 묘,  호텔 뒤란으로 허락을 받고 들어가 참배할 수 있다., 변기영 몬시뇰 외 천진암 성지 직원3(2013.06.29)
장흥(長興)면 부곡리 선영의 황사영(黃嗣永) 진사(進士) 묘(석제(石製) 십자가 및 항아리 발견돼)
주문모 신부로부터 Alexius 본명으로 세례를 받은 황사영 진사는 주신부님과 거처를 같이 하며 전교에 힘쓰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제천 산골 배론 토굴에 몸을 숨기고는 북경 주교 앞으로 보내는 백서(帛書)를 썼다.
그러나 도중에 밀사였던 황심(黃沁)이 잡히면서 황사영도 체포되어,서울로 압송된 후, 달포 남짓하게 온갖 고문을 당한 후, 12월 초에 서소문 네거리에서, 양 팔과 양 다리와 목에 밧줄을 감고 사방에서 말 4필이 동시에 달리게 하여, 온 몸을 여섯으로 찢어죽이는 능지처참형의 육시를 당하여 순교하였다(26세). 한국의 순교자들 중 가장 잔인하고 처참한 형벌로 순교하였다.천주교 때문에, 천주교 신앙 때문에, 천주님 때문에, 한국 교회사에 가장 무서운 박해와 고통을 받고 처참하게 죽은 순교자 황진사와 그 가정은 1801년  신유박해를 마감하는 수난의 순교가정이었다.
 
순교자 황진사보다 3살 위의 부인 丁命淵 마리아는 文度公 요한 丁若鏞 承旨의 친 조카딸이며, 광암 이벽 성조의 친 외조카딸인데, 1801년 제주도 모슬포 대정읍으로 유배되어, 39년간 官奴로 종살이하다가 68세에 세상을 떠났고, 아들 黃慶憲은  1801년 3살 때, 제주도로 유배가는 어머니와 함께 가다가, 추자도에 강제로 떨어뜨려, 마음착한 어부 吳씨가 거두어 길러서, 추자도에서 죽을 때까지, 제주도에서 귀양생활하는 어머니를 한번도 뵙지 못하고, 추자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순교자 황진사의 어머니 전주 이씨는 1801년 거제도로 유배되어, 문전걸식하는 걸인으로 지내다가 굶어서 핍진하여 세상을 떠났다.
 
순교자 황진사가 능지처참형으로 처형되어 온 몸이 찢어져 사방에 흩어진 살덩이와 의복 조각들을 그 벗들이 모아, 창원황씨 종종산 선영인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가마골(홍복산 밑)에 묻혔는데, 1980년 여름, 종친회의 17대손 황용호(黃龍浩, 동국대, 경상대)교수와 당시 대구대교구에서 발행하던 가톨릭시보사의 고상국 기자가  자료를 추적하며 변기영 신부(당시 주교회의 200주년 주교특별위원회 사무국장 겸 순교자 시복시성추진부장)에 알려주어, 7월 초에 1차 답사하고, 9월 1일에 묘를 발굴하면서, 무덤 속에서 십자가형으로 놓은 돌들과와 비단대(帶)가 들어 있는 작은 이조백자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가마골 홍복산 아래 있는 황사영 진사의 묘를 발굴하기 전 답사 확인(변기영신부1980년 7월 1일)

순교자 황사영 묘 발굴시 발견된 항아리를 변기영(신장 본당)신부가 들어내고 있다. 곁에 있는 황두희씨는 판윤공파(判尹公派) 종친회 회장으로 황사영 계의 후손이다. 신유박해 당시 황사영의 외아들 경헌이 추자도로 유배되자, 황씨 문중에서는 족보상으로 황사영의 사촌인 병직(秉直)을 양자로 들여 손(孫)을 잇게 했었다.(1980년 9월 1일)



가마골 홍복산 아래 있는 황사영 진사 묘를 발굴후 재 손질한 모습(변기영 신부, 1980.09.20일 경)
     

가마골 홍복산 아래 있는 황사영 진사의 묘를 발굴하기 전 답사 확인(변기영신부1980년 7월 1일)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5.16 광장에서 거행된 한국순교복자 103위의 시성식 광경.당시 언론과 보도기관에서는 100만여명으로 보도하였으나, 필자는 55만명~60여만명으로, 내한한 성청 인사들에게 보고 하였었다(Sua Santità Giovanni Paolo II aveva concelebrato la messa per la canonizzazione dei 103 Beati martiri coreani, con molti Cardinali, Arcivescovi, Vescovi, sacerdoti e fedeli cattolici - circa 500.000 - a Seoul il 6 maggio 1984. Per quella canonizazione, il Rev. Byon, rettore di Chon Jin Am, il luogo natale della Chiesa, aveva servito per 5 anni (1980~1984) come segretario esecutivo generale della commissione episcopale per la canonizzazione dei 103 Beati Martiri core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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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s by Baeck - Nam-Shick).
순교자 알렉시오 황사영 진사께서는 천상에서, 로마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한국 땅을 밟으시고, 서울에서의 103위 한국 순교성인  시성식 거행에 전국 대표 신도들의 모임을 보시며, 함께하시고,,,,,,!
입력 : 2016.10.29 오후 9:3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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