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벽 성조의 선조, 백사 이항복의 형 이송복의 묘를 찾다.
1. [이벽전]에, “본시 니덕됴션생(李德祖先生)은 위(諱)를 벽(檗)이라 하옵고, 젼됴(前朝 -고려) 니졔현닉졔(李齊賢益齊) 후(後)이시니, 본을 경쥬(慶州)라 하옵드라. 본조(本朝 -이조) 만력(萬曆) 션죠(宣祖) 령상(領相) 니백샤 항복(李白沙 恒福)의 후(後)이시니, 부(父)는 쟈가 샤연(士淵)이요 휘롤 박만(溥萬 부만)이라 하옵고 ... 갑술(甲戌1754)년 포쳔현 장샤리 승쳔고을 큰바위 틈에서 생하시더라... 니숑복 묘비(李松福墓碑) 재포쳔 니항복(李恒福) 챤병서(撰並書)라. 녕월 쟈규루 샹량문(子規樓 上樑文) 졍조(正祖) 신해(辛亥 1791년) 채제공 챤(撰)하야, 니동욱(이승훈의 父) 셔(書)라.” 하였다.
2. 이 내용을 확인하기 위하여 먼저, 경주이씨 족보를 확인한 결과, 시조 이알평의 17대에서 익제 이제현과 이벽의 선조 이천(李蒨)은 사촌 간으로 갈라져 내려오고 있었다. 이항복의 선조 이과(李薖) 상서공은 4형제중 셋째였고, 이벽의 선조 이천(李蒨) 국당공은 첫째로서, 17대에서 형제간으로 계파가 형성된 경주이씨 문중이었다.
3. 현장답사를 위해 2014. 10. 13. 월요일 정오 미사 후에, 변기영 몬시놀과 고로사 실장과 함께 차를 몰아, 우선 봉선사를 탐방하고 (앞에 춘파대가 있었을 연못도 있었다.), 이어서 광릉수목원을 가로질러 화산서원을 찾았으나, 잠겨 있어 문틈으로 사진만 찍고 나왔다. 다음에 이항복 묘소에 들려, 바로 위로 올라가 그의 셋째 형 이송복의 묘소를 찾기 시작하였다. 도저히 읽어볼 수 없게 마모된 비문들만 있어서 근처에서는 전혀 단서를 찾지 못하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아버지 이몽량의 묘소를 발견하면서, 누대로 내려오는 50대의 관리인을 만나 물어 보았으나, 전혀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하는 수 없이 그 일대의 묘를 차례로 모두 뒤져 가던 중에, 모퉁이를 돌아 새로 난 길 아래에서, 옛 비석은 그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되어있고, 그 옆에 새로 세워진 오석 비문에서 선공감감역관 이공의 비문(繕工監監役官李公之墓)과 함께 비문 뒤에 새겨진 송복(松福)의 이름과 마지막에 계제(작은 형의 동생 =季弟) 항복 撰을 확인하게 되었다. 거의 1시간 반 이상을 헤매다가 수많은 무덤군 중에서, 그냥 지나치려던 참에 겨우 찾아내게 된 것도 도우심의 은총 덕분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를 드리며 귀환하니 저녁 9시 경이였다.
(이항복, 백사집 제2권, 先府君碣陰銘 과 繕工監監役官將仕郞李公墓誌 참조)
4. 이송복은 이항복의 셋째 형으로서 마태오 리치 신부님과 비슷한 1550년에 태어나서 1593년 임진왜란 때 문중을 지키며 왜군에 저항하다가 43세로 익사하였다. 선조를 모시고 몽진을 다니던 막내 이항복이 나중에 형의 시신을 찾아 묘지명을 써서 세운 것이 옛 묘비로 남아 있으나(사진 참조), 400년이 지난 현재, 묘비 앞의 큰 글자도 읽기 어렵거니와 뒤의 묘지명은 전혀 글자라고 볼 수도 없게 밋밋하게 마모되어 있었다. [이벽전]의 원본이 써졌을 1800년대에도 뒤의 묘비명은 200년이 지나 풍화되어 알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송복의 묘비명에 대한 내용은 이벽성조 당대의 가문 사정을 잘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이 확인하여 [이벽전]에 써넣었다고 보아야 한다. 백사집의 묘지명을 찾아 다 읽고 나서도, 포천에 있는 그 묘까지 찾아서 확인을 해도, 알아낼 수 없게 마모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00년대에는 더구나 전혀 알 수 없게 마모된 상태였을 것이다. 근래에 이르러 후손들이 백사집을 번역하고, 오석으로 된 새 묘비를 만들어 세워 놓았기에, 우리가 비로소 찾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5. 봉선사를 방문하여 대담하던 중에 변 몬시뇰이 1979/80년에 수차례 봉선사를 찾다가, 나중에는 의정부에 나가계신 70대의 운허 스님을 찾아 면담을 하게 되었는데, 봉선사는 선대왕 세조(이방원)의 살육으로 죽어간 원혼들을 달래고 세조의 광릉을 위해 지어진 절이라는 것과, 소현세자의 독살 후에는 세자의 남은 유품들이 봉선사로 보내져 보관되고 있었는데, 육.이오 동란 중에 중공군 장교가 귀중품이라 하여 가져가고 또는 불타고 하여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특히 건상곤여도가 있어서 일제시대에도 옛 서울대에 전시한다고 빌려가기도 하였다는데, 그 내용이 일본 신문에나 나올지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벽 성조가 제작한 상천도도 이때에 소실되었을 것이다.
(위의 사실은 옛 일제시대에 봉선사 바로 아래 있는 진접국민학교 교사를 하던 朴 선생이라는 교우가, 나중에 화성지역 남양에서 1980년을 전후하여 분교한 작은 국민학교 교장으로 지내다가 정년 퇴직하고, 신자들과 함께 천진암성지순례에 와서, 변몬시뇰님께 이야기하여 주었다고 한다.)
6. 다블뤼 주교는 현장 답사를 때로는 3일씩이나 찾아 헤메면서 경험하였기에, 이벽이 저 위대한 강학에 참석하기 위하여 먼저 찾아갔던 길이 아주 험하고 힘든 길이었다고 적고 있다. (ardus et difficiles !) 천진암강학이 있었을 때 이벽 성조가 처음 찾아가는 절은 감호(양평)에서 가까운 주어사였기 때문에, 서울에서 광주군과 양평군을 지나 여주군에 있는 주어사를 가는 길이었기에, 아주 험난한 길이었다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도 현장과 일치해야 사실로 증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현장답사를 하지 않은 길 안내자를 따라서 등산을 하게 되면 조난을 당하기 쉽다. 역사의 진실도 현장답사가 병행되어야 한다.
정조 신해1791년에 채제공 찬, 이동욱 서라 쓴, 영월 자규루 상량문
선공감 감역관 이공 (이송복) 지묘
이송복의 묘소 앞마을 길가에 있는 두껍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