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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마재 성지 본당 주임 최민호 신부님, 순교자 황사영 진사 시복 대비차, 곡수리공소 사우거사기념서재 방문 (2018.08.02)-
글쓴이 Msgr. Byon   / 등록일 : 2018-08-05    (조회 : 2740)

마재 성지 본당 주임 최민호 신부님의 곡수리공소 사우거사기념서재 방문 (2018.08.02)-순교자 황사영 진사 시복 대비차-



마재 성지 본당 주임 최민호 신부님의 곡수리공소 사우거사기념서재 방문 (2018.08.02)-순교자 황사영 진사 시복 대비차-



마재 성지 본당 주임 최민호 신부님의 곡수리공소 사우거사기념서재 방문 (2018.08.02)-순교자 황사영 진사 시복 대비차-


     마재 성지 본당 주임 최민호 신부님이, 하느님의 종  순교자 황사영 진사 시복 대비차,곡수리공소 沙右居士紀念書齎로 변기영 몬시뇰  방문 (2018.08.02)-. 변기영 몬시뇰은 순교자 황사영 진사 묘  최초 발굴시 당시 가톨릭신문사 고국상 기자와 동국대 황용호 교수 등과 함께, 당시 주교회의 순교자시복시성추진위원회 총무 자격으로  황진사 묘를 확인차 발굴 경비를 전담하여 준비한 후, 현장 독막골 마을 이장을 비롯한 원주민 농민들 약간명과 함께 각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첫 발굴을  지휘하였다. <사진은  며칠전, 2018년 7월 11일, 로마에서 보내온, 새 시성부장관 베츄 추기경의 고마운 답신을 함께 보며,,,>


10월 29일 월요일은 위대한 순교자 알렉시오 황사영 진사(黃嗣永 進士)의 기념일입니다.

 
낮 12시에 천진암 성지 광암성당에서 기념미사가 봉헌되고, 미사후에는 간소한 다과도 있습니다.
황사영 진사1775~1801)는 1801년 辛酉年 迫害 때 북경 교구장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帛書)를 쓰고 체포된 후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서소문에서 가장 잔인한 사형방법인 능지처참(陵遲處斬)으로 온 몸이 머리와 양 다리와 양 팔을 각각 밧줄로 묶어, 각각 말 다섯 필에 매달고. 동시에 말을 사방으로 몰아서, 몸을 다섯으로 찢어 죽이는, 형벌을 받아 26세에 순교하였습니다.


황진사의 가족은 모두 왕명에 의하여 신분을 양반에서 종의 신분으로 떨어트려 어머니 全州李氏는 신분을 양반에서 종으로 낮추어, 거제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고, 황진사의 부인 정명연(丁命連) 마리아는 이벽성조의 외조카 딸이며 정약용 승지의 친 조카 딸인데, 신유년 박해 당시 28세로 제주도 모슬포 대정읍에 관노(官奴)로 유배되어, 남은 한 평생 38년간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838년에 그곳에서 선종하였습니다.


황진사의 어린 아들 황경헌(黃敬憲)은 1801년 당시 3세의 어린 아이로서, 역시 왕명에 의하여 신분이 양반에서 종으로 되어, 어머니 품에 안겨 함께 제주도로 유배가다가, 왕명을 따라, 배에서 추자도(楸子島) 부두가에 내려져서, 어부 오씨가 데려다가 길러서, 한 평생을 추자도에서 외롭고, 괴롭게 고아로 자라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선조들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는 얼마나 안전하고 풍요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반성하며, 우리도 순교정신으로 기념 미사에 참석하도록 합시다!
 
위대한 순교자 알렉시오 황사영 진사(1775~1801)의 묘를 1980년 여름, 처음 발견하여 확인하였을때는 수풀에 우거진 상태였다. 당시 가톨릭신문사 고국상 기자의 수고로 황진사 종중 후손들, 특히 황용호 교수의 도움을 받으며, 천주교회에서 잊혀져 있던 묘 앞에서 가슴이 무거웠다(변기영 신부).


장흥(長興)면 부곡리 선영의 황사영(黃嗣永) 진사(進士) 묘를 발굴하였을 때, 십자가형으로 놓여진 돌덩이들과 작은 백자 항아리 발견되었는데, 그 속에는 황진사가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험에 급제하였을 때,정조 임금이 감탄하며 잡았다는 손목에 감고 다니던 비단으로 추정되는 다 삭은 천이 개켜져 썩어 있었다.


주문모 신부로부터 Alexi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던 황사영은 신부와 거처를 같이 하며 전교에 힘쓰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제천 산골 배론 토굴로 몸을 숨기고는 북경 주교 앞으로 보내는 백서(帛書)를 썼다. 그러나 밀사였던 황심(黃沁)이 도중에 잡히면서 황사영도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약 한달 동안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서소문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능지처참형으로 처형되어 선영인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가마골(홍복산 밑) 기슭에 묻혔는데, 1980년 9월 1일 묘지 발굴 당시, 종친회 편에서는 창원황씨 17대손 황용호(黃龍浩, 동국대학교, 경상대)교수가 입회하였고, 천주교회 편에서는, 당시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 시복시성추진부장을 겸하던 주교회의 200주년위원회 사무국장 변기영 신부, 필자가 주관하였다.
 

황사영 묘 발굴 당시 발견된 항아리를 변기영 신부가 들어내고 있다. 곁에 있는 황두희씨는 판윤공파(判尹公派) 종친회 회장으로 황사영의 직계손이다. 신유박해 당시 황사영의 외아들 경헌이 추자도로 유배되자, 황씨 문중에서는 황사영의 사촌인 병직(秉直)을 양자로 들여 손(孫)을 잇게 했었다.
위 사진은 1980년 9월 1일, 묘지 확인차 첫 발굴 사진. 황사영 진사가 16세 되던 해 진사 고시에 1등 합격하던  현장에서, 상감님 정조가 황진사의 손목을 잡아주며, 격찬한 후부터, 상감이 잡았던 손목을 비단으로 감고 다녔다고 전하던 차에, 그의  묘 발굴시에 광중에서 묘지석이 있기를 바랐던 필자는, 뜻밖에도 단정하게 접어서 넣은  작은 비단 뭉치가 200여년 세월 속에 썩어서 삭아 있는 작은 백자함을 담은 소형 항아리가 나오자, 필자는 이를 묘지석보다 더 확실한 표석으로 확신하였고, 아직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 황용호 교수에게 내력을 설명하자 즉시, 동감하였다.

발굴 작업을 맡아 하던 마을 이장에게 묘지 앞의 밭이 얼마나 가는지 묻자, 당시는 토지 매매가 없어서, 1평에 2만 5천원 내외라기에, 3천여평만 매입하게 부탁하자, 즉시 내일이라도 매매계약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날 저녁 집에 와서 자주 뵙고 시복시성을 상의하던 김다두 신부님(당시 한국 신부들 중에 영어를 가장 정확하고 능숙하게 말하고 통역하던 김창석 신부님)에게 알리며, 3천여평만 우선 매입하여 서울 교구 사제명의로 소유권 등기를 해주겠노라고 하였으나, 그곳이 서울교구 관활이니, 아무리 주교회의에서 일하는 신부라도  우리 서울 교구에서, 먼저 확인 회의, 예산 수립, 등을 거쳐야  할테니, 이제는 손대지 말라고 하여, 토지 매입 시도는 중지되였다. 3년 후에 가보니, 각종 호텔들이 3,4개가  들어섰고, 토지 싯가는 평당 5,6백만원을 호가한다고 하였다. 

유사한 일은 마재 성지 매입시도역시 1990년대 10여간에 걸쳐 2차례나 시도하였으나, 중단되었다.1980년대 후반부터 필자가 안성출신 이해구 경기도지사의 공식 위촉을 받아, 당시 정신문화연구원장 이숭녕박사, 서울 문리대 역사학과 주인 유홍렬 박사, 홍익대학교 총장 이항령 박사, 라주정씨 종친회 정회장 등과 함께, 남양주 군청에서 경기도의 지원으로 정약용 선생 기념관 거립을 자문하던 시절, 마재에 3천여평 매입을 시도하다가 교구관활 문제로 중단되었다. 천진암 성지는 교회 땅 1평도 없던 계곡에 275필지의 조각 땅들 38만여평을 확보하였는데, 지금 같으면, 또 타 교구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만사가 제 때가 있는 법이다. -Msgr. Byon

가마골 홍복산 아래 있는 황사영 진사의 묘를 발굴후 재 손질한 모습(1980년 09월 20일)


가마골 홍복산 아래 있는 황사영 진사의 묘를 발굴하기 전 답사 확인(최초 답사 확인 1980년 7월 1일)

 최민호 신부는 의정부 교구 소속으로 마재 성지와 성지본당 주임을 겸하면서, 의정부교구의 성지들과 순교자시복시성 업무를 관여하며, 이미 로마 그레고리안대학교에서 교회역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시성부에서 주관하는 시복시성 행정에 관한 연수과정을 이수하고, diploma를 받았다. 


  최민호 신부는 본래 미리내본당 고초골 공소 구교우 가정을 외가댁으로 순교정신을 전승하는 집안 출신의 사제로서, 마재 성지 주변의 작은 군부대 병사들을 위하여 매주 예비신자 병사들도 10 여명씩 가르치며 입교 영세시키고 있다. 지금처럼, 우리 한국천주교회가 사회로부터 매력을 잃어서 대인 입교자가 적다기보다도, 기존 영세 신자들조차 적잖이 냉담하는 시기에, 큰 성지 마재 성지 사목도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은 터라, 교구와 본당의 경계를 초월하여, 전국 모든 교우들이 순교는 못할 망정, 순교자의 묘를 지키는데 관심과 정성을 필요로하고 있는 마재 성지  주임 최민호 마르코 신부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며 거들어주시기 바랍니다.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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