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내일은 이벽성조께서, 殉敎 後, 195년(1785~1979) 만에 천진암 옛 天學堂 터에 돌아오신 날 !

글 :  몬시뇰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하기
  • 스크랩

내일, 6월 24일은 세자요한 광암 이벽성조께서(1754~1785),

殉敎 死後, 195년(1785~1979) 만에 천진암 옛 天學堂 터에 돌아오신 날이다 !

 

1770년 15세로 천진암에 入山하시어, 天學을 연구, 실천하시며, 天眞菴 서당에서 학동들을 가르치시면서 그 출중함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점점 더 많은 학동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였고, 특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 어린 사돈들을 비롯하여, 친척 양반집 자제들도 모여들었고, 7년이 지나면서 모임은 더욱 발전하였다.

1777년부터는 10대 후반의 천재적인 청소년들이 모여, 天學에 관한 講學에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1778년과 1779년에는 마재와 양근, 등 부근의 젊은 선비들이 천학총림(天學叢林), 즉 천주교를 탐구하며 실천하는 젊은 이들의 단체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이벽 광암 선생을 웃어른으로 추대하고(爲上), 따르게 되었고(從李檗), 강학회 모임에는 저명한 학자들도 참석하기에 이르렀다.

1783년 가을, 이벽 성조께서는 자신의 대리자(Delegate)로 이승훈 진사를 북경 천주교회에 파견하였다.

1784년 2월 중순(24일?), 이승훈 진사가 영세하고 3월 말 경에 귀국하자, 천진암을 본거지로 하던 천학총림은 우선 서울 수표동의 광암 공 서울 집으로 집회소 본부를 옮겼으나, 경주이씨 양반의 집에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자유집회가 불편하여, 그 해 말(?)부터, 명례방 중인계급의 김범우 토마스 역관의 집으로 집회소를 다시 옮겨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이 모든 입교자들이 자유로이 모일 수 있어, 불과 몇 달 안되는 단기간에 500여명의 새 입교자들을 얻는 복음전파의 대성황을 이루어, 밖으로 들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마침내 최초의 공식 박해를 겪게 되었다. 

1785년 봄, 이곳 오늘의 명동대성당 터에서 한국 최초의 천주교 박해, 즉 을사년 박해가 일어나, 이벽 성조께서는 아버지 집에 불려가서, 약 두달 가량 가족과 친척과 사회 저명인사 벗들한테 배교를 강요당하며 시달리며 들볶이다가, 집안의 후원 별당에 가내 연금되어, 당시 종종 있었던 관습대로,  사도세자처럼 , 餓死罰로  10여일을 禁食당한 후, 최후로 飮毒까지 당한 후에, 두꺼운 이불로 몸을 여러 겹 멍석처럼 말아서 양쪽을 막아, 窒息死 당하시어, 장렬히 순교하시니, 그해 음력 6월 14일이었다.

1979년 6월 21일에 이벽 성조의 묘를 발굴하여, 24일 주일, 세자요한 대축일에, 한국인 최초의 주교 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와 김수환, 최초의 한국인 추기경 공동 집전으로, 명동대성당 제단  앞에 이벽 성조의 유해를 모시고, 이장 미사를 드린 후, 당일로 천진암 터에 모셨다. 천진암을 떠나신지 195년 만에 돌아오셨다.

이벽성조께서는 실로 하느님의 섭리로, 자신의 본명축일에  천진암에 돌아오셨다. 앞으로, 시복시성되신 후, 한국천주교회창립기념 축일이 혹시 바뀌더라도, 이벽성조께서 천진암에 돌아오신 6월 24일은, 영구히 천진암 성지의 축일이 되어야 하겠다. 이벽 성조의 묘가 천진암으로 이장되면서 국내외 순례자들이 급증하자 정부는 국도에서 천진암까지 15 km의 도로를 확장 포장하였고, 몹씨 가난하던 퇴촌면 경제발전의 기폭제와 구심점이 되었다.

이벽 성조 묘 찾기와 이장 및 천진암 터 확보와 성지화에 잔 심부름을 하던 필자역시, 이벽 성조의 덕으로, 공교롭게도 2005년 6월 23일, 사제품 후 35년 만에 세자요한 축일 전야제 날에 교황 직속 사제(Monsignor)로 임명되었다. 그래서 해마다 6월23일, 천진암의 큰 행사 전날은 행사준비로 한달 전부터 고생한 직원들과 교우들과 함께 막걸리를 한잔씩 같이하며 저녁을 하는데, 필자는 속으로 몬시뇰 임명 은총을 감사드린다.  본명축일에 관한 말이 났으니, 필자는 사제생활 45년 간 본명축일 축하를 늘 사양하였다. 필자의 스승, 故 최민순 신부님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미신자들은 생일날을 기억하며, 늙어서까지 생신날이라고 축하를 받는다. 세상에 태어나 이름을 받게 된 날이다.

천주교 신자들은 영세일을 생일보다 더 중요시하고 축하해야 한다.

사제는 생일이나 영세일보다 사제된 서품일 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기억해야 한다.

주교는 주교 임명받은 날이 가장 중요한 기념일이다.

교황은 교황 즉위일이 가장 큰 기념 축일이 된다.

각 나라의 대통령이나 국가 원수들은 대통령 취임일에 각국에 나가있는 대사관에서 축하예절을 한다.

 

천사적인 두뇌를 타고나서 13개국어를 유창하게 말하였다는 교황 비오12세(1939년 즉위, 1958년 선종)는 400여년만의 로마 교구 출신 교황으로서,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교회를 돌보신 위대한 목자였다. 1948년 대한민국이 정부수립 직후, 48대 6으로 U.N.의 승인을 받도록 적극 지원하셨고, 1년 후에 발발한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3년간의 6.25 한국 동난 중에 우리나라의 구호를 위하여 크게 힘써주셨다.

비오 12세 교황은 영세 때부터 받은 이름이 모두 가문의 姓氏까지 5개나 되는데, 서양에서는 종종 유아세례 때, 첫 영성체 때, 견진성사 받을 때. 등 여러 본명을 가진 분들이 있다. 교황 비오 12세는, 에우제니오 마리아 쥬셉베 죠반니 빠첼리(Eugenio Maria Giuseppe Giovanni Paccelli) 라는 좀 긴 이름을 가진 분으로 교황이 되신 후에는 Pius XII세라고 불렀다.

이제 교우들은 생일보다 영세일을 더 기념하도록 하고, 사제들은 본명축일보다 서품축일을 더 기억하도록 함이 합당하리라고 본다.

-Msgr. Byon-

입력 : 2015.06.23 오전 4:41:49
Copyright ⓒ 변기영 몬시뇰 사랑방 Servant Hall of Msgr. Byo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