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직 후의 현장 사진들!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 전후 당시 여러 사진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최초로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고
그로 인하여 일본은 무장 해제되었다.
1945년 폭격으로 페허가 된 오사까
1945년 3월 10일은 단 하루 동안 폭격으로 도꾜는 잿더미가 되었고,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살아 남은 사람들이 시체를 치우는데 25일이 걸렸다.
1945년 봄, 도꾜 시민이 다 허물어진 집 지하에서 밥 해 먹을 준비를 하고 있다.
1945년 5월 29일 폭격으로 페허가 된 요꼬하마 시민들이 시골로 피난 가고 있다.
1945년 한 해에만 1백만 명이 폭격에 희생되었다.
1945년 5월 고베에서 폭격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짐을 챙겨 피난길에 나섰다.
B-29 폭격으로 쑥대밭이 된 도꾜산업지역 도꾜는 53.8% 가 파괴되었고,
6백7십만 인구가 2백4십만으로 줄어 들었습니다.
원폭으로 완전 파괴된 나가사끼
오끼나와에 있던 일본군들 12명이 투항하는 모습입니다. 일본은 전쟁에서 죽는
것은 영광이라고 선전하면서 '항복은 있을 수 없다' 라고 교육했습니다. 프로파 간다는 일본군의 자살을 막기 위하여 삐라를 뿌리며 노력한 결과 쾀을 점령한지 10개월 만에 산속 동굴에 있던 일본군 35명이 투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패전이 짙어가고 미군에
투항해도 죽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투항은 늘어나기 시작 했습니다. 오끼나와에서 9,498명, 이오지마에서 1,038명, 싸이판에서 2,161명, 쾀에서 524명,
타라와 150명 등 수없이 많 은 수없이 많은 일본군들이 투항해 왔습니다.
일본에게 항복절차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마닐라에서 개최했습니다. 8월 19일 마닐라에 도착한 맥아더 장군이 공항에서 군악대의 환영연주를 듣고 있습니다. 내가 들어본 연주 중에 가장 감명 깊은 순간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회의장으로 갔습니다.
맥아더장군의 명령에 따라 일본대표는 군용기를 흰색으로 바꿔 칠하고 녹십자를
그려 붙인 비행기를 타고 19일 12시 44분 이에시마섬에 착륙했습니다. 중장 도
라 도라시로 가와베와 그 일행이 12명이었습니다. 미국측 준장 찰스 윌로비가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과 회의를 하기 위하여 미군 비행기로 갈아
타고 마닐라로 갔습니다. 일본 대표들은 갖고 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파인애
풀 주스를 마셨습니다. 식사 후 미국담배와 군표(군인들이 사용하는 돈)을 권
했으나 거절했습니다.
장 윌로비의 안내를 받아 작은키의 가와베 중장이 키 큰 미군과 회의장에 들어
서고 있습니다.
마닐라 회의광경입니다. 19시간 만에 떠나는 일본 대표단의 가방속에는 항복문서
와 절차, 맥아더장군이 일본총독이 된다는 문서가 담겨져 있습니다.
1945년 9월 2일 도꾜만에 정박해있는 미함대 미조리함에서 항복식이 거행되었
습니다. 천황을 살려준다는 조건하에 일본은 무조건 항복에 싸인했습니다.
맥아더장군의 서명
일본 마지막 외무대신 마모루 시게미수가 천황을 대신해서 서명하고 있습니다.
일본군 중장 우메주가 서명을 하고 있고 그 뒤에 서있는 부관이 눈물을 닦고 있
습니다.
항복문서에는 그 외에 중국, 영국, 쏘련, 오스트리아,카나다,프랑스, 네델란드, 뉴질랜드 대표가 서명했습니다. 아침부터 날이 흐려 우중충했었는데 모두 서명을 끝내자 도꾜만에는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늘 위로는 400대의 B-29 가 떠있고 그 밑으로 1,500대의 전투기가 편대를 지어 미조리함 위를 날았습니다. 드라마틱한 순간이었고 마지막 승리에 대한 경의였습니다.
미조리함을 떠나기전 일본대표단의 굳은 표정입니다. 항복문서는 미국이 한 장, 일본이 한 장씩 보유하기로 하였습니다. 미국은 5,000명의 가미가제가 존재한 일본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항복했다고 해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11월 1일 1차로 6군을 규슈에 상 륙시켰습니다. 에어분 특수 본 특수부대가 먼저 도꾜에 들어가 기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뜻밖에도 일본인 들이 적대시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1946년 봄에 8군과 10군을 도꾜에 상륙시켰습니다.
원폭 피해자들입니다.
전쟁통에 헤어진 가족들을 찾기 위한 광고문들입니다. 새로 이사간 집 주소를
적어놓고 있습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오사까 성입니다.
日王이 맥아더장군을 예방하겠다고 해서 장군이 미 대사관에서 일왕을 만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천황을 신으로 모시고 있었지만, 맥아더 장군은 히로히토
를 맥아더장군은 히로히토를 인간으로 만나는 자리라 넥타이를 안 매고 만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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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는 교토와 고쿠라 대신 원폭을 맞았다. <趙甲濟>
헨리 루이스 스팀슨은 2차 세계대전 때 미국 전쟁성 장관이었다. 그는 그는 공화당원이었으나 민주당인 루즈벨트와 트루먼 정부下에서 요직을 맡았다. 國益(국익)만 생각하는 불편부당한 자세 덕분이었다. 1945년에 그가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할 때 나이는 78세였다. 미국 지도부 인사들 중 최연장자였고, 公職(공직)경력이 가장 화려했다. 이런 권위로 해서 대통령도 그를 존중했다. 1893년에 그는 마벨 웰링턴 화이트와 결혼했다. 신혼여행을 일본 교토로 갔다. 스팀슨은 교토의 아름다움에 취했다. 일본인들의 정직과 예절에 반했다.
1945년 미국 전쟁성은 개발에 성공한 원자폭탄을 투하할 후보지를 논의하고 있었다. 1차 후보지로 추천된 곳은 히로시마, 교토, 니가타, 고쿠라였다. 이들 도시는 그때까지 폭격을 당하지 않았으며 軍 시설이 있었다. 스팀슨은 교토를 제외시켰다. 신혼여행 때의 좋은 인상이 한 이유였다. 물론 일본의 정신이 담긴 이 도시를 파괴하면 민심이 흉흉해져 戰後(전후) 관리가 어렵다는 것이 공식적인 이유였다. 원폭 투하지 선정위원회는 제외된 교토 대신에 나가사키를 집어넣었다.
1945년 8월6일 새벽 사이판 옆에 있는 티니안섬을 출발한 미군의 B-29 폭격기는 오전 8시15분 히로시마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했다. 우라늄彈(탄)이었는데 리틀 보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570m 상공에서 폭탄이 터졌다. 7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후유증으로 더 많이 죽었다.
8월9일 새벽, 소련이 對日(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를 침공하였다. 이날 오전 티니안을 이륙한 미군 B-29는 요코하마 상공에서 호위 전투기와 합류한 뒤 목표지인 北 규슈 고쿠라 상공에 도착했다. 고쿠라의 하늘은 안개와 연기에 덮여 있었다. B-29는 몇 번 상공을 선회했으나 투하 목표물을 肉眼(육안)으로 볼 수가 없었다. 기름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機長(기장)은 B-29를 대체 목표지인 나가사키로 돌렸다. 나가사키도 구름에 덮여 있었다. B-29가 마지막으로 상공을 선회하는데 구름이 갈라지면서 아래로 미쓰비시 중공업 공장이 보였다. 거기를 향해서 팻맨이란 별명을 가진 플루토늄탄을 투하했다. 약 500m 상공에서 터졌다. 오전 11시가 지난 시점이었다. 이 플루토늄탄은 폭발력이 TNT 기준으로 2만t이었다. 히로시마 原爆(원폭)보다 40% 더 강한 것이었으나 나가사키에 산이 많아 피해는 덜했다.
스팀슨의 교토 偏愛(편애)로 해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이 나가사키인 셈이다. 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나가사키엔 한국인들도 많았다. 미국인 포로 수용소도 있었다. 이 수용소에 있던 미군포로 수백 명도 죽었다. 한 국가 지도자가 외국의 한 도시에 대하여 깊은 애착을 가졌다는 것이 수십만 명을 살리고 수십만 명을 죽인 셈이다. 스팀슨 장관은 일본이 항복한 뒤 天皇制(천황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아름다움이 가장 큰 설득력일 때가 있다. 전란, 쿠데타 등을 거치면서도 오래 살아남은 역사적 건축물들의 공통점은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아름답기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외가 있는데 金泳三(김영삼) 정부가 부수어버린 옛 중앙청 건물이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무대였던 건물이었지만 그 아름다움과 역사성을 알아보지 못한 대통령에게는 설득력이 없었다. 無識(무식)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만약 미국이 원자폭탄을 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군은 1945년 말에 일본에 상륙할 예정이었고, 소련군은 8월9일에 만주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원폭 투하가 없었더라면 일본의 항복이 늦어져 한반도 전체가 남하하는 소련군에 점령되어 공산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原爆은 일본의 早期(조기) 항복을 불러 38선 以南(이남)을 자유지역으로 확보하도록 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1945년 미국 전쟁성은 개발에 성공한 원자폭탄을 투하할 후보지를 논의하고 있었다. 1차 후보지로 추천된 곳은 히로시마, 교토, 니가타, 고쿠라였다. 이들 도시는 그때까지 폭격을 당하지 않았으며 軍 시설이 있었다. 스팀슨은 교토를 제외시켰다. 신혼여행 때의 좋은 인상이 한 이유였다. 물론 일본의 정신이 담긴 이 도시를 파괴하면 민심이 흉흉해져 戰後(전후) 관리가 어렵다는 것이 공식적인 이유였다. 원폭 투하지 선정위원회는 제외된 교토 대신에 나가사키를 집어넣었다.
1945년 8월6일 새벽 사이판 옆에 있는 티니안섬을 출발한 미군의 B-29 폭격기는 오전 8시15분 히로시마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했다. 우라늄彈(탄)이었는데 리틀 보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570m 상공에서 폭탄이 터졌다. 7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후유증으로 더 많이 죽었다.
8월9일 새벽, 소련이 對日(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를 침공하였다. 이날 오전 티니안을 이륙한 미군 B-29는 요코하마 상공에서 호위 전투기와 합류한 뒤 목표지인 北 규슈 고쿠라 상공에 도착했다. 고쿠라의 하늘은 안개와 연기에 덮여 있었다. B-29는 몇 번 상공을 선회했으나 투하 목표물을 肉眼(육안)으로 볼 수가 없었다. 기름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機長(기장)은 B-29를 대체 목표지인 나가사키로 돌렸다. 나가사키도 구름에 덮여 있었다. B-29가 마지막으로 상공을 선회하는데 구름이 갈라지면서 아래로 미쓰비시 중공업 공장이 보였다. 거기를 향해서 팻맨이란 별명을 가진 플루토늄탄을 투하했다. 약 500m 상공에서 터졌다. 오전 11시가 지난 시점이었다. 이 플루토늄탄은 폭발력이 TNT 기준으로 2만t이었다. 히로시마 原爆(원폭)보다 40% 더 강한 것이었으나 나가사키에 산이 많아 피해는 덜했다.
스팀슨의 교토 偏愛(편애)로 해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이 나가사키인 셈이다. 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나가사키엔 한국인들도 많았다. 미국인 포로 수용소도 있었다. 이 수용소에 있던 미군포로 수백 명도 죽었다. 한 국가 지도자가 외국의 한 도시에 대하여 깊은 애착을 가졌다는 것이 수십만 명을 살리고 수십만 명을 죽인 셈이다. 스팀슨 장관은 일본이 항복한 뒤 天皇制(천황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아름다움이 가장 큰 설득력일 때가 있다. 전란, 쿠데타 등을 거치면서도 오래 살아남은 역사적 건축물들의 공통점은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아름답기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외가 있는데 金泳三(김영삼) 정부가 부수어버린 옛 중앙청 건물이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무대였던 건물이었지만 그 아름다움과 역사성을 알아보지 못한 대통령에게는 설득력이 없었다. 無識(무식)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만약 미국이 원자폭탄을 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군은 1945년 말에 일본에 상륙할 예정이었고, 소련군은 8월9일에 만주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원폭 투하가 없었더라면 일본의 항복이 늦어져 한반도 전체가 남하하는 소련군에 점령되어 공산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原爆은 일본의 早期(조기) 항복을 불러 38선 以南(이남)을 자유지역으로 확보하도록 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위 사진과 글은 조갑제 기자 닷컴 에서 퍼온 것입니다.[2015-08-06, 1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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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일본 일부 정객들이 기억 상실증에 걸렸는지, 하도 혼이 나서 아직도 제 정신을 못 차리고!!! 어디 일본인들뿐인가? 우리 한국인들도 훨씬 더 제정신을 못 차리고, 아니, 전 세계 인류가 아직도 제 정신을 못 차리고, 천벌을 무서워하지 않는데, 천주님을 두려워해야지요 !
만일에라도, 불행히도, 만일에라도, 또다시 제2의 대동아전쟁이 난
다면, 오늘의 평양과 서울, 오늘의 북경과 동경이, 개전 직후, 바로 70년 전 위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사진들보다 100배 이상 더 참혹
한 잿더미가 되지 않을까? 생각만해도 끔찍합니다!!
천주대전에 우리 모두 무릎 꿇고 기도합시다 ! - Msgr. By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