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겨레 天主 信仰史와 大韓天主敎會 史記 評傳
- 연재 -
들어가는 말 -
뿌리없는 나무가 어디 있으며, 또 어떻게 자랄 수 있으랴? 터가 없는 집이 어떻게 세워지며, 또 어떻게 계속 서 있으랴? 지금까지 대부분의 한국 천주교회사는,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의 문헌과 Daveluy 주교의 실로 고마운 기록, 특히, 비록 종종 유문이 없지는 않지만, 훗날에 와서 책으로 내놓은 Dallet 신부의 한국 천주교회 역사서를 비롯하여, 국내외 대부분의 저자들의 힘들여 집필한 연구서들을 통하여, 그래도 우리 선배님들의 지대한 공헌으로 사라져가던 고귀한 우리나라 창립사가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선인들이 살고 가신 수난과 격랑의 시대에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었던 부분들이 적지 않으므로, 필자는 여기서 되도록 가능한 한 이를 보충하면서 새로이 적어보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써서 밝혔던 사실들을 수정보완해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읽고 생각하며 되새겨보는 내용들을 추려서 일부씩이라도 관심있는 이들에게 미리 전하고자 아래 글부터 소개해 나가고자 한다. 마치 연재하듯, 계속 여러 부분들을 이어나갈 것이다. -卞基榮 몬시뇰-
이제 우리 모두 聖誕하자.
<이제 우리 모두 聖誕하자! 너와 나의 영원하고 무한한 성탄을 위하여 !>
성탄절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세계에 성탄하셨다.
대궐 안방도 아닌 주막집 마구간 말구유에 聖誕하셨다.
가정마다 직장마다 마을마다
나의 성탄을 요청하며 기다리는 마구간 말구유가 비어있다.
성탄하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는 마을이 곧 베들레헴이고,
성탄하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는 가정이 곧 주막집 마구간이고,
성탄하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는 곳에 바로 아기 예수가 계실 것이며,
그리스도의 평화가 깃들 것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한 때이다.
구세주의 역할을 하는 아기 예수가 나시는
마구간 말구유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좋은 안방 높은 자릴랑 바라보지도 말아라.
그런 곳에는 아무나, 아무나 앉을 수 있다.
마구간 말구유에는 아무나 누을 수가 없다.
성탄은 2000년 전 한번 일어났던 1회성 성탄이 아니다.
너와 나의 성탄은 매일매일 영원한 성탄이며, 무한한 성탄이다.
성탄하는 신앙인, 성탄하는 생활, 성탄하는 인생,
성탄신앙이 내 안에 성탄하는 성탄절이 되게 하자.
2003/12/23/천진암 성지 변기영신부
Writer : 천진암 Date : 2003-12-23 23:33 Hit. 13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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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며 다시 읽어 보는 -
배달겨레 天主 信仰史와 [大韓天主敎會 史記] 評傳 -1-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5위 평신도 순교자들의 자발적인 신앙사 약전>
들어가는 말
1. 교황 聖 요한바오로 2세는 1984년 봄 한국을 방문하시어, 5월 6일에 서울에서 103위 한국 순교복자들을 시성하셨고, 같은 해 10월 14일 주일에는 로마 사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한국 순교 성인 103위 첫 번째 축일 대미사 강론을 통하여, "한국인들은 선교사가 한국에 오기 전에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신앙을 실천하여 교회를 세웠으니, 이는 세계 교회사에 유일한 경우"라고 말씀하신 후, 한국의 남녀 저 평신도들을,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로 여겨야 한다고 언명하셨다.
2. 그 후 1989년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시어 국제 성체대회를 집전하시고 가신 후, 1993년 9월 21일, 천진암 성지 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정초식에 당시 주한 교황대사 죤 블라이티스 대주교를 통하여 보내주신 교황의 공식 문서의 머릿돌 교황 강복문에서, ‘천진암 성지를 한국천주교회 탄생지(발상지)’라고 언명하셨다. 그런데 전 세계에 순교 성지는 많지만, 천주교회 발상지가 있는 나라는, 베들레헴 성지가 있는 이스라엘과, 천진암 성지가 있는 대한민국, 두 나라 뿐이다.
天上으로부터 천주 성자의 강생으로 인류구원의 천주교회가 시작된 聖地 이스라엘과, 이와는 달리, 우리나라는 地上에서, 한국인들이 천주교 신자가 되기 전에 非信者들의 신분으로, 마치 동방박사들처럼, 아니, 동방박사들 보다도, 한 단계 앞선 자세로서, 자발적으로 진리의 빛을 찾아 천주교회 교리를 연구하여 알고 신봉하기 시작하여 신도단체를 이룩하고, 발전시켜 마침내 '한국천주교회를 창립'하였음을 자각하며, 천주께 감사를 드렸다.
한국천주교회의 자발적인 창립사를 최초로 깨닫고, 천주께 감사드리며, 글로 적어서, 천주교회의 공식 사목자인 북경 교구장 주교에게 보고한 순교자이며 신앙적인 선각자는 1801년의 순교자 젊은 황사영 진사이며, 저 유명한 帛書에서, 이를 최초로 밝히고 있음은 실로 감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1801년에 쓰여진 황사영 진사의 백서에서 밝힌 표현 의미와 내용은, 1984년에 聖 요한바오로 2세 교황께서, 처음으로 아주 명확히, "선교사들이 들어가기 전에 자발적으로 천주교 진리를 탐구하고, 신자 공동체를 결성한 한국의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자들(Fondatori della Chiesa in Corea)'이라고 해야 한다고 공식 강론에서 천명하셨고, 이번 프란치스코 현 교황께서는, 2014년 서울에서 한국주교단에 하신 공식 강론을 통하여, 또, 2015년 로마에서, 사도좌를 공식 방문한 한국 주교들 전원이 교황을 예방하는(Ad Limina) 기회에, 역시 공식 강론에서 같은 문맥을 인용하시듯, "이벽과 한국천주교회 창립초기의 신앙인들은 마치 사도시대의 신앙인들처럼, 聖事생활을 시작하기 전부터, 순수하고 뜨거운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였음을 교의적으로 더욱 명확히 하셨다(이하 원문과 번역문 참조). 참으로 감탄할 역사의 신비요, 신앙의 진리가 더욱더 밝혀지는 시대다. 진리는 살아 있음이 분명하다!
이제, 자발적인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에 관한 황사영 백서의 관계문맥과 주요 단어 몇개를 현대어로 더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다만, 황사영 백서를 우리 한글로 처음(?) 아주 잘 번역하여, 이미 1959년, [가톨릭 청년]에 연재하였던 金益鎭 선생은 吳経熊 著, [東西의 彼岸]을 번역하여 낸 漢文學에 매우 박학다식한 학자로서, 1976년, 영남 천주교회 史學의 선구자 金九鼎 선생이 쓴, [한국순교사화] 제4권에도 [帛書] 번역 전문을 그대로 실었다. 다만, 70 여년이 지난 옛 번역 당시의 우리 국어가 지금은 많이 변하였으므로, 오늘의 독자들이 보다 쉽게 이해하도록, 이하에 필자가 의역 추가였으므로, 원문에 보다 충실한 번역을 보고자 하는 이는 위의 서적들을 참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대의를 역술한 다음 주요 漢字語 몇개는 그 참된 의미를 깨닫도록, 좀 더 풀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 동쪽 나라 조선에 있어서는, 다른 나라에서 보통으로 찾아볼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차원이라고 가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나라에 일찌기 어떤 선교사도 들어온 적이 없었던 시절에, 처음에는 주님께서 특별히 이 진리의 도를 직접 우리 선조들에게 높이 들어보이셨고, 또 친히 두손으로 마주 붙들어주며 계속 함께하여 주셨고, 계속하여 성사 줄 사람까지 미리 마련하여 주셨으니, 가지가지 우리에게 주신 이 여러 특별한 은혜를 세어보기에는 손가락 수가 모자란다고 하겠습니다."
(主恩之於東國, 可謂廻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而主特擧斯道, 而親舁之繼, 又以授聖事者預之, 種種特恩指不勝屈,,,罪人等 以此自慰而慰人,忍死延生,,,황사영 진사의 백서).주은지어동국, 가위회월심상, 초미상유전교자래, 이 주특거사도, 이친여지계, 우이수성사자예지, 종종특은 지불승굴,,, .
주해 - 가)
주님께서 우리 동쪽 나라 조선에 베풀어주신 은총 (主恩之於東國)은,
보통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찾아볼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차원이였다고 가히 말할 수 있겠아오니(可謂廻越尋常),
일찌기 우리 나라에는 어떤 선교사가 들어온 적이 없을 때 처음으로(初未嘗有傳敎者來),
주님께서는 천주교회의 이 眞理의 道를 특별히 우리 선조들에게 높이 들어 보이셨고(主特擧斯道),
또 주님 친히 몸소 직접 두 손으로 이 진리의 도를 마주잡고 붙들어 주며, 함께하여 주시고, 인도하셨으며(而親舁之繼),
계속하여, 장차 성사 줄 사람까지 미리 마련하여 주셨으니(又以授聖事者預之),
주님께서 우리나라에 베풀어주신 가지가지 특별한 이 여러 은총들(種種特恩)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하나하나 세어 보려고 해도 손가락 수가 모자란다(指不勝屈)고 하겠습니다.
<1801년, 黃嗣英 帛書>.
위 문장에서, 可謂廻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主特擧斯道, 而親舁之繼,又以授聖事者預之, 등은 매우경탄할 문장이다.특히 親舁의 [舁 ]라는 글자는 주님께서 친히 몸소 손수 양손으로 천주교의 진리의 도를 붙들어 주시며,배우고 익히고 실행하도록 함께 거들어 주셨음을 표현한 것으로서, 자발적인 강학부터 신유박해까지 주님께서 함께하여 주셨음을 밝히는 황사영 진사의 신덕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① 可謂廻越尋常, 같은 예를 찾아볼 수 있는 수준을 초월한다고 가히 말할 수 있다.
② 初未嘗有傳敎者來 일찌기 처음부터 선교사가 전혀 들어오기 전에
③ 主特擧斯道 주님께서 이 眞理의 道를 들어높혀 알게 하셨고(천주교의 도리를 다른 종교들 교리보다 더 높이 들어보이시고,
④ 而親舁之繼 몸소 친히 두 손으로 계속 이 眞理의 道를 붙들어 주시며 인도해주셨고,(마치 교제상이나 절구를 양손으로 마주 잡아주듯) ,
⑤ 又以授聖事者預之 성사은총을 베풀어줄 사람까지 미리 마련해 주셨으니,
⑥ 種種特恩指不勝屈 그 여러가지 특은을 세어보기에는 손가락 수가 모자랄 정도입니다.
⑦ ,,,忍死延生,,,,이제 혹독한 박해 속에서, 죽어가는 고통을 참고 견디는 순간으로 삶을 연장하고 있읍니다.
(主恩之於東國, 可謂廻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而主特擧斯道, 而親舁之繼, 又以授聖事者預之, 種種特恩指不勝屈,,,罪人等 以此自慰而慰人,忍死延生,,,황사영 진사의 백서).주은지어동국, 가위회월심상, 초미상유전교자래, 이 주특거사도, 이친여지계, 우이수성사자예지, 종종특은 지불승굴,,, .
주해 -나)
① 可謂廻越尋常 - 다른 나라의 전교 역사를 두루두루 둘러보아도, 조선 전교의 시작처럼 자발적인 경우는,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수준을 초월하는 유일한 경우라는 뜻이다.
② 初未嘗有傳敎者來 - 처음에는 일찌기 어떤 선교사도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조선의 복음화가 조선인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황사영 진사가 문자화한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③ 主特擧斯道 -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천주교 도리를 아주 특별히 높히 들어 보여 주셨으니, 유교나 불교나 모든 민속 종교의 도리보다 높히 들어 보여 주시므로써, 우리 선조들이 이 도를 깨닫게 하셨다는 의미다.
④ 而親舁之繼 - 그리고, 주님은 우리 선조들이 이 천주교 도릴를 배우고 익히고 실행하도록 우리한테만 맡겨 놓지 않으시고, 마치 음식 차림 큰 교제상을 마주 들듯이, 또는, 절구질을 바르게 잘하도록,손수 양손으로 절구를 잘 붙들어 주듯, 주님 친히 몸소 이 도리를 양손으로 우리와 마주잡고 우리가 잘 배우도록 도와주셨음을 말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벽과 한국천주교회 신앙의 1세대 양반 학자들이 천주님의 말씀을 직접 만나서,,, " 등으로 표현하셨다(2014. 8.14. 서울에서 한국 주교회에 하신 강론, 과 이듬해 2015. 3. 7. 로마 교황궁에서, Ad Limina에 오신 한국 주교단에 하신 강론 참조)
⑤ 又以授聖事者預之 - 또 세례 성사 줄 사람도 미리 대기시켜 준비하여 주셨다는 대목은 큰 의미가 있다. 이벽 성조께서 이승훈 진사를 북경 교회로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백서에도 잘 나온다. 벽이 가로사대,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되면 천주당이라는 집이 있을테니, 찾아가게. 거기에는 서양에서 온 선비들이 있을 것이니, 서양 사람 아무한테나 말하지 말고, 천주교를 전하는 자가 누구냐고 물어서 만나보게 되거든, 천주교 기도서를 한권 사러 왔다고 말하고, 아울러 세례성사도 받게 해달라고 청하도록 하게,,,절대로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도록 하게,,,".-檗曰 北京有天主堂, 天주堂有西洋西士傳敎者, 求信經一部, 幷請領洗 必勿空還 !,,,)-
이승훈 진사의 세례는 그 당시 북경 북당에 식객 손님 신부로 와서 머물던 프랑스 남부 Chateau de Grammont 출신의 예수회원 Joseph de Grammont 신부가 집전하였는데, 예수회가 교황님의 명으로 해산되어, 본당 사목권이 없는 손님 신부였다. 또한 당시 본당신부는 이승훈 진사에게 세례를 주면 안된다고 반대하였으니, 북경에서 세례만 받고 조선으로 돌아가면, 조선에는 사제가 없어서, 주일미사 참례도 못하고, 또, 왕족이오 양반이므로 소실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혼배조당에 걸리게 되므로, 어떤 선교사 신부가 조선에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세례를 주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라몽 신부는 이승훈 진사에게 불법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성사 집행의 사목권이 없는 사제가 거행하는 이러한 성사 거행은, 교회법상 유효하지만 부당한 성사거행이었다(Validum sed illicitum), 그 댓가로, 1년 후, 젊은 수학박사, Allexander de Gouvea 주교가 북경 교구장으로 부임하면서, Joseph de Grammont 신부를 즉시 북경 교구 밖으로 추방하여, 마카오로 거처를 옮겨야 했고, 마카오에서 죽을 때까지, 다시는 북경 교구 내를 들어갈 수 없었다.
조선도 북경교구 관활이므로, 자신이 세례를 준 조선의 이승훈 진사를 따라, 조선 입국을 열망하였지만, 끝끝내 그라몽 신부는 조선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30여년 세월이 흐른 후에, 1831년 그레고리오 16세 새 교황은 북경 교구장으로부터 푸대접을 받던 프랑스 출신의 선교사, Brughier 신부를 조선 교황청 대목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조선교구(교황 대목구)를 설정하면서, 프랑스에서 몬시뇰 Pallu 를 비롯한 순수하고 열심한 사제들이 파리 외방선교회를 세우자, 교황께서는 중국 전례논쟁과 동양 선교 정책에 관여했던 수도회들이나 폴투갈 등의 강대국 정권과 좀 무관하고 초탈한 프랑스 파리의 순수하고 신흥 선교회 외방전교회 사제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으나, 그 때는 이미 Joseph Grammont 신부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북경의 새 교구장 구베아 주교는 본래 폴투갈의 Coimbra 대학에서 30대 초반에 수학박사 학위를 받은 교구소속 사제였으나, 북경 교구장으로 직무수행하는데 좀 더 수월하도록, 프란치스코 제3회원으로 입회하였으니, 당시 북경 교구 관활 내에는 프란치스코회원들이 적잖이 있었기 떼믄이다. 또한 수학이 전공이라서, 수학적인 사고방식이 사목정책에도 영향이 없지 않아서, 조선 신도들의 '임시 준 성직자단' 결성과 성사 거행에 크게 놀라서 즉시 중단하라고 명하는 동시에, 부모 봉제사도 금지시키므로써, 조선의 1791년 신해년 박해와 1795년 을묘년 박해, 또 1801년 신유년 박해, 등의 발단에 큰 원인 제공도 하게 되었다.
⑥ 種種特恩指不勝屈 -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부신 가지가지 특별한 은총을 하나하나 세어본다면 손가락 수가 모자랄 정도입니다. 이 뜻은 단순히, 한두가지 큰 사건만 가지고 볼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께서는 이 대목을, "무수한 은총,,"(le innumeravoli grazie che ha riversato sulla Chiesa in Corea nella sua infanzia )"이라는 표현을 쓰셨다(Homilia, 2015. 3. 7. Ad limina). 손가락 꼽아가며 일일히 이루 셀 수 없는 갖가지 특은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 26세의 젊은 황사영 진사의 신학 지식과 조선천주교회 창립사에 대한 歷史觀과 판별력과 신덕은 오늘의 일부 우리 성직자들보댜 훨씬 더 뛰어난다고 믿으며,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⑦ ,,,忍死延生,,, -죽음을 견디는 것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 이벽 성조 중심의 자발적인 천진암 강학(1770~1783)과 천학총림 결성, 이승훈 진사 북경 파견, 그라몽 신부한테 영세, 귀국(1783~1784), 천진암에서 수표동으로 천학본부 이전, 명례방 집회와 을사년 박해(1785), 권일신 사우거사 중심의 자발적인 용문산 피정신공 및 임시 준 성직단 구성, 전국 전도구역 담당(1785~1787), 신해년 박해(1791), 을묘년 박해(1795), 등을 여두에 두고 읽어야 그 참 뜻의 맛을 느낄 수 있다.
It is significant that the history of the Church in Korea began with a direct encounter with the word of God. It was the intrinsic beauty and integrity of the Christian message – the Gospel and its summons to conversion, interior renewal and a life of charity – that spoke to Yi Byeok and the noble elders of the first generation; and it is to that message, in its purity, that the Church in Korea looks, as if in a mirror, to find her truest self. <ADDRESS OF the POPE FRANCIS, to Korean Episcopal Conference, in Seoul, 14 August 2014>
Annoverandoli tra i beati, abbiamo lodato Dio per le innumerevoli grazie che ha riversato sulla Chiesa in Corea nella sua infanzia, e anche reso grazie per la risposta fedele data a questi doni di Dio. Già prima che la loro fede trovasse piena espressione nella vita sacramentale della Chiesa, questi primi cristiani coreani non solo avevano alimentato la loro relazione personale con Gesù, ma lo avevano anche portato ad altri, a prescindere dalla classe o dalla posizione sociale, e avevano dimorato in una comunità di fede e di carità come i primi discepoli del Signore (cfr. At 4, 32).
«Erano disposti a grandi sacrifici e a lasciarsi spogliare di quanto li potesse allontanare da Cristo [...]: solo Cristo era il loro vero tesoro» (Omelia a Seoul, 16 agosto 2014). Il loro amore di Dio e del prossimo si è compiuto nell’atto finale di dare la propria vita, irrigando con il loro sangue il semenzaio della Chiesa. Quella prima comunità ha lasciato a voi e a tutta la Chiesa una bella testimonianza di vita cristiana: «la loro rettitudine nella ricerca della verità, la loro fedeltà ai sommi principi della religione che hanno scelto di abbracciare, nonché la loro testimonianza di carità e di solidarietà verso tutti»
<ADDRESS OF POPE FRANCIS, to Korean Episcopal Conference, Vatican, 7 March 2015>
(主恩之於東國, 可謂廻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而, 主特擧斯道, 而親舁之繼, 又以授聖事者預之, 種種特恩指不勝屈,,,罪人等 以此自慰而慰人, 忍死延生,,,)
3. 한국 천주교회의 자발적인 이 특이한 교회 창립사와 신앙정신은 오늘날에까지 계승되어, 한국 교회 발전의 뿌리와 줄기와 힘이 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천주교회의 품 안에 들어와,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우리나라 천주교회 발전을 위해서뿐 아니라, 전 세계 교회의 발전에도 힘껏 이바지하기 위하여, 그 옛날의 한국교회 창립선조들처럼, 아직 복음이 충분히 보급되지 않은 나라의 비신자 형제들을 위하여, 한국천주교회 창립사를 바르게 알고 실행하며 지키고, 가꾸어 나가야 하며, 또한 이 은총의 교회역사를 온 세계 만민들에게 알려서, 저들 모두가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을 본보기로 삼도록 힘써야 하겠다.
<Quella prima comunità ha lasciato a voi e a tutta la Chiesa una bella testimonianza di vita cristiana: «la loro rettitudine nella ricerca della verità, la loro fedeltà ai sommi principi della religione che hanno scelto di abbracciare, nonché la loro testimonianza di carità e di solidarietà verso tutti»>
4. 세계 만민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섭리가 우리 한민족을 천주의 진리로 비추어 주시고, 구원의 교회로 인도하여 주신, 그 기묘한 내력을 우리 모두가 보다 폭넓고 깊히 있게 이해하며, 하느님께서 우리 선조들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리고, 또 나아가 우리 신앙선조들의 그 정신과 덕행과 교훈과 모범을 본받아, 우리 모두가 신앙의 선조들을 닮아가며 몸받기 위하여, 간결하게나마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5위 평신도 순교자 신앙선조들의 약사를 추려서 함께 알아 보고자 한다.
5.그런데 한국천주교회의 기묘한 창립이 우연히, 갑자기 돌출된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으로, 머나먼 옛날부터 하느님께서 우리 선조들에게 베풀어주신 종교적 자질과 신앙문화의 터전을 되돌아보므로 인하여, 진리의 움을 틔우고, 신앙의 싹이 돋아 자라게 한, 우리 민족의 정신적 바탕을 먼저 이해하고 염두에 두면서,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창립사를 읽어 나가야만 우리가 이를 보다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6. 세계 모든 민족들이 선사시대부터 모두 각기 자기들 나름의 종교적 문화나 관습을 가지고 있었듯이, 우리겨레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우리 겨레가 머나먼 옛날부터 다른 민족들의 종교 신앙사와 좀 다르다고 할만한 독특하고 월등한 종교적 대상을 신앙하는, 천주 사상을 가지고 살아 나온 흔적과 체취가 한국 상고사를 연구한 비신자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이미 많이 밝혀져 왔고, 또 오늘에까지 우리의 생활과 정신문화 속에 전승되고 있어서, 이를 먼저 이해하기 위하여, 아주 간결하게라도 우리 겨레의 내력을 살펴보고 들어가기로 하자.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일반 신도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들은 되도록 줄이고, 아직까지 많은 이들이 자세히 모르고 있던, 우리 겨레 정신문화의 고대사와, 200여년 전의 우리 문화 관습과 여러 가지 사정을 되도록 해설하여 보태고자 하였다.
1. 한민족(韓民族)의 유래와 天主恭敬 사상(思想)의 내력(來歷)
7. 우리 배달겨레에 대한 천주님의 섭리와 우리 민족의 천주공경 사상의 내력을 먼저 살펴보면, 천주님은 우리 배달겨레에게 천주신앙의 정신적인 남다른 자질을 특은으로 주셨으니, 우리겨레는 예로부터 자신들을, 밝은 겨레, 배달겨레, 밝달 민족, 빛의 아들들, 힌옷을 즐겨 입는 민족, 白衣民族, 天神族, 혹은 天孫族. 등으로 부르면서, 자신들을, ‘하느님의 겨레’, '천주님의 백성'으로 알고, 믿고, 하느님께 天祭를 올리며 살아왔다. 그리하여 먼 옛날부터 늘 하느님을 최고의 유일신으로 위하며 모시고 살아왔고, 또 하느님께서는 우리겨레와 늘 함께 계신다는 신념을 가졌으며, 늘 우리겨레를 보살펴주신다는 굳은 신앙을 가지고, 기도하고 제사를 올리며 오늘날까지 오랜 세월을 살아 내려왔으니, 사실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의 겨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8. 이러한 신념은 신구약 성경의 말씀이며 가르침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아들들아, 너희는 주님께 영광과 권능을 바치거라"(시편 28장). 베드로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을 시작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읍니다"(사도행전 10장 34절)
9. 일찌기 먼 옛날, 우리겨레는 세계의 지붕이라고 부르는 파미르 고원과 우랄알타이 산맥과 天山 산맥이 걸쳐 있고 天池라고 부르는 호수가 있고, 만년설이 덮혀있는 높고 크고 신비스러운 여러 대소 산맥 봉우리들 중에, 한문자(漢文字)가 생겨서 표기되기 그 이전부터 오랜 세월을 두고 그 지역 사람들이 불러왔고, 지금도 부르고 있는, 배달봉(倍達峰), 박달봉(博達峰), 박격달봉(博格達峰), 등으로 불리는 天山 산맥 자락에서 살던 부족이었다.
그래서 자기 부족들의 이름을, '배달산 부족', '박달 종족', 등으로 불렀으니, 이는 우리나라 姓氏들의 本貫과 같다. 배달, 박달, 등의 뜻은, 밝은, 빛이 있는, 하얀, 등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여러 부족들 중에서 배달봉 아래 살던 이 부족들은 먼 옛날 해 돋는 나라 동쪽을 향하여 반만년이상 일만년 내외의 오랜 세월을 두고 이곳 한반도까지 민족이동을 하여 왔다.
그 걸어온 길을 따라, 조상들의 무덤을 찾는 후손들의 효성과 종교적인 발걸음이 가고 오던 길은, 오늘날도 설날과 추석날을 앞두고, 고속도로가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민족 대이동의 발걸음의 근원이었으며, 훗날 ‘비단길’이라고 이름하는, silk road 가 되어, 생존과 상업의 무역로가 되었으니, 지금의 베드로 대성당이 있는 로마의 공동묘지 바티칸과 라인강 가의 숲속이었던 꾈른 대성당 지역과, 갈대 숲이 우거졌던 뉴욕의 성 패트릭 대성당을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우리나라 서울의 명동역시, 명동대성당(옛날 이름은 鐘峴聖堂)이 들어서기 전에는 한양성의 南山 자락, 서울의 남산골 변두리였었다. 종교적 시설물이 자리잡으면, 선천적으로 종교심을 타고난 우리겨레는 자주 그러한 성스러운 곳을 찾으며 모이게 되기 마련이었다.
10. 지금 한반도 각처에서 발견되는 고인돌과 구석기(舊石器), 신석기(新石器), 청동기(靑銅器) 시대 유적을 보면 적어도 1만 5천년 전 후부터 이미 이 곳에는 불을 피우며 석기(石器)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단체로 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겨례가 오랜 세월 살고 있는 이땅에서 태고(太古) 적에 지구상에 처음 발생한, 발원지는 아니니, 우리 한반도가 몽고족에 속하는 우리겨레의 발원지가 아니라는 사실에는 모든 학자들이 일치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한반도에서 아시아 대륙을 횡단하며 우랄알타이 산맥을 넘어, 유롭으로 뻣어나갔다고도 주장하지만, 적어도 지구상의 인류는 항상 민족이동을 계속하며 생존하고 발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디에선가 이리로 이동하여 온 것은 분명하므로, 우리 민족의 상고사(上古史)가 밝혀주는 문화 흔적들을 되짚어 아시아 대륙을 동에서 서로 횡단하며 찾아가다 보면, 우리 겨레는 먼 옛날 지금의 천산산맥(天山山脈) 자락에서 살다가 아시아 대륙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면서 오랜 세월을 두고 이리로 이동하여 온 것이 확실하다.
11. 지형상으로도 세계의 지붕이라고 부르며 古代 인류의 발상지로 여기는 파미르 공원과 천산 산맥에서 보면 西北쪽은 모두 우랄산맥과 알타이 산맥, 남쪽은 곤륜산맥과 히말라야 산맥, 북쪽은 천산산맥과 태산준령, 등으로 파밀 고원에 연결되어 막혀 있으나, 동쪽으로만은 중국의 한 복판을 西에서 東으로 가로 트여 있다. 마치 原始 인류의 조상들이 동쪽으로 해돋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라는 지형적 알림과 안내와도 같이.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황하문명의 평야지대를 관통하며 한반도에까지 이르도록, 험산준령으로 좀 덜 막혀 있고, 드넓게 극동까지 열려 있는 아시아 대륙을 관통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12. 홍산문화(紅山文化)라고도 부르며, 근대에 와서 활발히 발굴 확인되고 있는 오늘의 中國과 북쪽 내몽고 지역 赤峰山 주변의 上古時代 紅山文明이나, 요동 지역의 遼河文明은 나일강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에집트 문명이나 유프라테스 강가의 페르시아 문화보다 수천년이 훨씬 앞서며 오래동안 꽃피웠던 上古時代 文明으로서, 모두 오랜 세월 중국 漢字語 기록에서 東夷族으로 부르며 기록되어온, 우리 배달겨레 韓民族이 극동의 한반도에 오기 전에 이룩하였던 문명의 발자취들이었다. 칼과 활같은 兵器로 발달한 문명이 아니라, 천주신앙으로, 天祭敎 문화를 이룩한 天孫族들의 평화롭고 거룩한 문명이었다. 天帝 공경의 정신으로 해돋는 나라, 빛고을을 향하여 꾸준히 수천년에 걸쳐 서서히 이동하며 大同思想으로 마을을 이루고, 나라를 세우며, 꽃피운 종교문화 민족의 이동이었다. 이스라엘 민족 이동사에 뒤지지 않는, 아니, 그 이상가는 연면히 이어오는 줄기찬 천주 사상을 지닌 한민족의 고대사를 우리는 오늘의 우리에게 젖어있고, 배어 있는 체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大韓天主敎會 史記] 자체가 이를 증언하고 있다.
13. 그런데 장구한 세월에 걸친 우리겨레의 민족이동의 이유와 동기와 목적과 방법과 힘과 그 과정에 대한 고찰에 흔히 소홀하면서, 다만 그 현실과 현상과 결과에만 시선을 빼앗기기 쉽지만, 우리겨례의 민족이동 이유는, 주로 사냥을 하며 살던 先史時代부터 수렵하기 쉬운 곳을 찾아 나선 경제적인 목적만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른 민족들이 사는 곳을 점령하고 정복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도 아니었으며, 오로지 하늘에 떠서 지나가는 해를, 하느님의 얼굴,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으로 믿고, 모시고, 섬기며, 햇님이 거하며 다스리는 저 높은 하늘도 우러러 위하면서, 날마다 해가 떠오르는 동쪽으로 가면, 햇님의 나라, 맑고 밝은 ‘빛의 나라’, ‘빛 고을’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4. 우리 민족이 수 천년 내지 일만년 이상에 걸쳐 아시아 대륙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면서, 깊고 넓은 많은 강물을 건느며, 높고 다소 험준한 큰 산맥들을 넘고 돌면서, 마을과 고을을 이루고, 크고 작은 부족 국가와 나라를 세우면서, 수십년 수백년씩 부족의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며, 민족이동을 하여 왔음을 되새겨볼 때,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출발하여(출애급기), 사하라 사막과 홍해를 건느고 시나이 산맥을 돌면서 약 40여년에 걸쳐 지금의 예루살렘 지역으로 돌아왔던 사실은, 한민족이 줄잡아도 고조선 건국 이전 4,5 천년에 걸쳐 이어온 悠久한 민족이동에 비할 바가 아니다.
15. 따라서 우리 겨레는 밝은 빛을 숭상하며, 흰옷을 즐겨 입던 겨레였다. 저 멀리 만년설로 덮여 있던 선조들의 고향 천산 산맥을 뒤로하며 떠나온 우리겨레는 부족의 경사나 큰 날에는 자기네 종족을 표시하는 흰옷을 입었으며, 부모님들의 장례 때도 모두 힌 옷을 입어, 최근에까지 이를 소복(素服)한다고 하였다. 1919년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서거하였을 때는 온 나라의 2천만 동포들이 몇 달 동안 모두가 힌옷으로 소복하였으므로, 온 나라가, 특히 서울 장안은 힌옷 입은 사람들의 물결이 차고 넘치듯 하여, 당시 서양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古代 중국의 史記에서까지 종종 우리겨레를 白衣民族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16, 또한 마을마다 거의가 다 흔히 작고 큰 거룩한 동산을 등지고 살면서, 山을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로 여기며, 山들을 신성한 곳으로 믿고, 조상이 죽으면 쉽게 하늘에 오르도록 산에다 묘를 쓰기도 하였다. 한국학의 선구자들, 특히, [아시조선(兒時朝鮮)], 등을 저술한 육당 최남선(1890~1957) 선생을 비롯한 조선 考古學의 선구자들은 우리겨레의 上古史에 관하여 연구하고 나서, 우리겨례의 선조들은 자신들을 '天神族'으로 神聖視하는 믿음이 있었음을 거룩한 史話로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17. 그리하여 지금부터 대략 적어도 일 만년을 전후하여 우리 선조들은 자신들을, '밝은 겨레', '배달겨레', '빛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며, '빛의 나라', '빛 고을'을 찾아서 극동지방과 지금의 한반도에까지 오게 되었고, 자기들이 자리잡는 마을 이름도 '빛고을'(광주:光州), '별고을'(성주:星州), '볕고을'(양성:陽城), '밝은 고을'(명주:明州), '흰 고을'(백성:白城), '맑은 고을'(청주:淸州), '빛나는 고을'(화성:華城),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를 즐겨하였으며, 자기네 고을 주변에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거룩한 산이 있어서, '힌 뫼', '밝은 뫼,' 등을 뜻하는, 白頭山, 長白山, 太白山, 小白山, 白山, 白石山, 등으로 불렀으니, 만년설이 없고, 힌 돌이나 힌 바위가 없는 남부지방의 名山들 중에도 白山으로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는 한마디로 고대인들의 언어 표현으로는, ‘聖山’이라는 뜻이다.
18. 따라서 선사시대부터 다른 민족들처럼, 우리겨레도 부족에 따라서는 호랑이, 곰, 독수리 같은 동물을 위하는 지파들도 있었지만, 산이나 강, 바다나 별, 달이나 해나 하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부족들이 많았고, 특히 해(日)와 하늘(天)에 대한 정성은 큰 나무나 동물이나 지상의 산이나 강물 공경과는 한 차원 높은 부족 신앙의 대상으로서 至高至上의 신적 존재로 받들었다. 특별히 햇님은 선사인들에게 가장 고마운 신비의 존재였으니, 선사인들이 날마다 겪으며 가장 두려워하는 밤의 어두움을 매일 아침 사라지게 하며, 온 누리를 밝혀주고, 겨울철 추위 속에서도 따뜻한 햇살을 내려주는 햇님은 쌓인 눈과 어름을 녹이며 새 봄을 주는 신적인 존재로 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南向東門을 가장 좋은 집터로 여기고 있는 것은 햇님을 숭상하는 정신에서 기인한 것이다.
19.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렵생활을 위주로 하던 우리겨레가 농경문화로 서서히 생활을 바꾸면서, 일조량이 많아 농사하기에 더 적합한, 따뜻한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정착하면서, 하느님을 공경하는 그 정신은 더욱 정리되고 발전되어, 거룩하고 아름답게, 특히 순수하고 소박하고 진솔하고 경건하게 계승되고 발전되어 내려왔으며, 수렵에 주로 의존하던 생활에서 가내 목축업으로 발전시키고, 마침내 농경문화로까지 정착하면서는, 간장, 된장, 김장 김치, 같은 발효식품 발명 등으로 급속도로 부족별 식사문화도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20. 아시아 대륙의 내륙에서는 주로 귀한 돌 소금,石塩에 의존하다가 3면이 바다로 되어 있는 한반도에 이르러서는 天日塩 개발이 수월하였고, 풍성한 농산물과 각가지 광물자원 발견과 활용으로 상공업의 발전도 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갈래의 크고 작은 부족국가를 이루면서 같은 종족 간의 충돌도 적지 않았지만, 종교적인 신앙면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하고 일맥상통하는 특징이 있었으니, 마침내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天主님을 공경하는 천제교(天祭敎) 종교신앙 생활시대의 문화를 다같이 꽃피우게 하였다.
21. 그리하여 지금부터 약 반만년 전쯤, 단군조선 시대를 전후하여서는 하늘 공경과 어른 공경, 족장 공경이나 나라님 공경이 어느 정도 제도화되고 풍습화할 정도로 발달하여, 하늘에 제사 드리는 예식이 극동의 한민족 거주지에서는 지역을 따라 여기저기 찬란하게 발전하였다. 특히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관습은 보편적이며 오랜 전통으로 이어오던 신앙으로서, 우리겨레의 자연스럽고 순수하며 진솔한 한울님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고, 현대에 와서까지도,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하는 민족신앙이 애국가에서도 불려지고 있듯이, 우리겨레의 마음 속에는 늘 하느님의 얼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국가 건립과 계승의 근거를 하느님께 두어, 古朝鮮과 三韓時代를 전후하여서는 지역마다 시대마다 명칭과 형식만이 조금씩 다르던 동일한 의미의 天祭敎 문화의 경축일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음력 10월에 있었으며, 근대에 와서 열강들의 침략이 극심해지자, 開天節 이라는 명절로 통일하여, 민족기원의 최대 기념일로 제정하고 지금까지 경축하고 있다.
22. 이렇게 우리겨레는 선사시대부터 반만년 전, 유사이래로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하느님 공경에 특별한 정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렵생활 시대에서나 농경생활 시대에서나 지역마다 대소간의 부족 국가를 세우면서도, 하느님 공경에 있어서만은 거의 대동소이한 방법과 정도였지만, 공통된 특별한 정성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민족의 이러한 종교 정신과 문화는 지금까지도 온 국민의 마음과 생활 속에 깃들어 있으니, 예를 들어, 매년 음력 10월 3일에 경축하는 개천절, 즉, ‘하늘이 열린 날', '하늘을 열은 날’은 그 의미와 성격이 다른 나라나 다른 민족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축일이다.
23. 지금은 태양력을 따르지만,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최근까지도 본래의 전통을 따라 음력으로 10월 3일을 개천절로 지내었다. 이는 음력 8월 15일 한가위,추석과 음력 1월 1일 설날을 지금도 음력으로 지내고 있듯이, 개천절도 음력으로 따져서 지내는 것이 역사와 전통문화 계승 발전에 더 합당하다고 하겠다. 이스라엘 민족과 2천년의 역사를 가진 천주교회에서 예수부활 대축일과 성신강림대축일을 태양력으로 일정한 날에 기념하지 않고, 음력을 따라 매년 다른 이동축일로 지내고 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24.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개천절이 들어 있는 음력 10월에는 매년 마을마다 고을마다 대동소이하게 함께 마련하고 함께 참여하여 올리는 천제를 올리면서, 대대로 전해 오는 조상님들의 묘를 찾아 성묘하며 時祭를 올리므로, 10월은 모든 달 중에 가장 먼저 위에 두는 크고 ‘높은 달’, 즉, ‘上月’, ‘상달’이라 부르며, 하느님 공경과 조상님 공경에만 집중하는 ‘聖月’로 지내었으니, 마치, 오늘날 우리 천주교회의 5월, 성모 성월이나, 한국교회의 9월, 순교자 성월, 사순절이나 대림절처럼, 이슬람의 라마단 기간과도 유사하게, 특별한 신심과 정성의 달이 음력 10월이었다.
25, 심지어, 1950년 6. 25 사변 전까지만 해도, 구걸하는 걸인들의 각설이 타령에는, “10월이라 상달이니, 상제(上帝)님께 제사하세. 10월이라 상달이니, 조상님께 시제하세” 라는 내용의 노래 귀절이 있어서, 아무리 흉년이 들고, 살기가 어려워도, 마을마다 고을마다 상제 하느님께 제사하고, 자자손손 집집마다 조상님께 제사하라는 걸인들의 교훈적 외침이었다. 그래야 제사에 바쳤던 떡이나 술이나 고기를 걸인들도 좀 얻어 먹고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애국가에서 부르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말과 개천절의 내력은 적어도 반만년 이상 오래된, 우리 민족의 천주 사상과 정성을 밝히 전승해 주고 있는 민족 정신문화의 거룩한 유산이다.대한제국이 선포될 때, 최초로 지어부른 애국가는 우리겨레가 임그님과 함께 온 백성이 이러한 천주신앙민족임을 밝혀주고 있다.
대한제국 최초의 애국가
上帝保佑, 皇帝聖上 (상제보우,황제성상)-상제 하느님,우리 황제님을 보호하시고 도와주소서. !
聖壽無疆, 海屋籌山 (성수무강,해옥주산)-만수무강하시어, 영구불변의 바다 가운제 늘푸른 왕대나무 숲처럼!
威權瀛廣, 于千萬歲 (위권영광,우천만세)-국권과 황권이 천만세에 이르게 하여 주소서!
威權瀛廣, 于千萬歲 (위권영광,우천만세)-국권과 황권이 천만세에 이르게 하여 주소서!
上帝保佑, 皇帝聖上 (상제보우,황제성상)-상제 하느님,우리 황제님을 보호하시고 도와주소서. !
26, 따라서 우리나라에는 아주 멀고 먼 옛날 고대로부터 지역마다 시대마다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종교가 적지 않았었는데, 대부분이 하느님 공경 정신을 터전으로, 바탕으로, 윤리적 근거로 하고 있으며, 불교나 도교나 유교나 천주교나 기독교 같은 외래 종교들까지도 우리 민족이 쉽게 이해하고 수용하여 보완하면서 우리 것처럼 지키고 아끼고 가꾸기 위하여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까지 바쳐가며 발전시킬 수 있었던 이유도, 우리 민족은 모든 종교가 지닌 행선피악과 상선벌악의 공통점을 이미 알고 있고, 믿고 있었기에, 이에 공감하며 실천할 수 있는 토대가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종교적 정신문화 속에 선천적으로 뿌리내려져 성장하여 왔기 때문이다.
27, 그러므로, 한국천주교회가 다른 나라들처럼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 선조들이 자발적으로 천주교회를 창립하는데 가장 지대한 영향을 주어 가능하게 하였던 요인과 바탕은 바로 우리 민족의 선천적인 종교적 자질을, 마치 하느님이 미리 마련해 주신 역사적인 터전처럼 결정적 요소가 되었음을 인정해야 하며, 그 외의 학업이나 생업 같은 조건은 시대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일시적인 성격을 띤 時事的이 부수적 조건으로 보아야 한다. 한마디로, 한국천주교회의 기묘한 창립사는 갑자기, 우연히, 한 때, 우발적으로 돌출된 사건이 아니라, 먼 옛날부터 준비되어 온(causa remota praeparata) 요인들을 바탕으로 하여, 합당하고 적절한 계기를 당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28. 예를 들어,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정약종 등, 우리 신앙 선조들이 당시 사회의 관습대로, 소년시절부터 千字文으로부터 시작하여 사서삼경, 등 유학을 배웠는데, 그렇다고 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유학자들이 세웠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부족하고 잘못된 부당한 표현이다. 사실 당시 유학자들은 처음 출발하는 천주교회를 극심하고 잔인하게 박해하였을 뿐이다.
29. 선사시대로부터 유사이래로, 삼국시대와 조선시대 뿐 아니라 현대에 와서도 적지 않은 신흥 민족 종교가 탄생하였는데, 이 역시 어느 특정 종교나 특정 학문의 영향이라기보다도, 한민족의 선천적인 종교적 자질과 역량을 터전으로 삼아, 적절한 계기가 주어지면 새 종교들이 적지 않게 탄생하여 내려온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회 외에도 유학이 들어오기 전 우리 고대 사회나, 혹은 유학을 수학하지 않은 후대 일부 지역에서도 여러 가지 토착적인 종교가 출발하였었는데, 모두가 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이었으니, 유학자들이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민족은 토속적인 고유한 여러가지 종교들을 자생시키는 종교적 바탕을 선척적으로 타고 났다는 사실을 참고삼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산업화와 과학과 경제의 발전으로 유롭의 여러나라에서는 탈교회 현상이 심각한 편인데 반하여, 한국에서는 경제발전에 정비례하여 종교도 발전하고 있음은 우리겨례의 선천적인 종교적 자질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0. 弘益人間 정신을 비롯한 우리겨례의 정신문화는 우라겨레의 여러 가지 民族宗敎의 출발과 발전의 터전이 되고, 근거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건국과 국가발전의 힘이 되었으니, 대륙 세력과 해양세력의 끊임없는 침공을 당하면서도, 지금 이처럼 위대한 대한민국을 세워 세계적인 힘있는 큰 나라로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우리겨레의 역사와 철학이 민족종교 탄생과 발전의 원천이 되었음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외래 종교들을 수용하고 소화하며 융합하여 우리것으로 발전시키는 역량도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사에서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사실이다. 사실, 새로운 외래 종교에 대한 박해는 조금 먼저 들어온 외래종교나 철학 사상에 의해서 여러 가지 계기로 일어난 所致였다. 현대사에 있어 100여년간(1785~1885)에 걸친 천주교 박해도 주로 儒林들에 의해서 저질러졌으며, 특히 2차대전 후(1945~1955) 150여명의 천주교 성직자들이 처형된 것도 소련의 영향으로 유물론과 무신론 공산주의 사상에 의한 북한 인민군에 해서였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고유한 정신문화는 종교와 사상을 초월하는 愛國愛族의 역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31. 또한 우리 민족은 대부분의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행선피악의 정신을 선천적인 천주 사상으로 폭넓게 수용하고 종합하여, 이미 반만년 전에는 대부족국가로 통합하던 단군조선을 세울 때,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치도의를 건국이념으로 삼았는데, 이는 경천애인의 天主 공경 사상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천주 신앙의 터전 위에서, 계시의 씨앗이 어렵지 않게 진리의 움을 티우고, 신앙의 싹이 돋아나게 하여,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로 성장, 발전하기까지, 이와 관련된 중요 인물과 장소와 역사적 사건들을 우선 몇가지 만이라도 추려서, 간결하게 요약하여 되돌아 보고자 한다.
3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한국에 오셔서, 1839년과 1846년 그리고 1866년,3차례 대박해 중에 순교한 103위 순교복자들을 시성하였다. 그러나 사실, 1839년 이전에 이미 조선에서는, 1785년 을사년 박해, 1791년 신해년 박해, 1795년 을묘년 박해, 1801년 신유년 박해, 1815년 을해년 박해, 1827년 정해년 박해, 이렇게 6 차례에 걸쳐 큰 박해가 전국 각처에서 있었다. 수 많은 한국신자들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오기도 전에 그리스도교 구원의 진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였고, 이 새로운 종교를 전파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던 상황에서, 특히 다섯 분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은 열정적으로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웠고, 마침내는 자신들의 생명까지 천주와 교회를 위하여 용감하게 영웅적으로 봉헌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피로써 증거하였다. 한마디로 배달겨례 스스로 싹틔운 교회가 피를 뿌리며 자라났으며, 목숨을 바치며 살아나온 것이다. 이 거룩한 하느님의 역사가 지금까지 역사 자료 소실과 연구미비로 일부 잘못 전하여 왔음을 조금이라도 바로 잡아 온 세계에 알리고, 후대인들에게 전해야만 하겠다.
33. 따라서 거의 한 세기(1785-1885)에 걸쳐 있었던 한국천주교회의 참혹한 박해의 최초 시발점으로서 그 뿌리와 줄기가 되는 것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5위 평신도 순교자들의 자발적인 신앙사였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위대한 신앙선조들의 생애와 정신과 덕행과 업적과 교훈을 간결히 추려서 이하에서 알아보는데 있어서, 그동안 거듭되던 박해로 인하여 역사 자료 보전이나 전승이 극난하여 잘못 알려진 부분들을 바로잡고,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소간의 설명을 필요로 하는 곳이 적지 않다. 이제 전 세계 교회가 놀라운 역사로 인정하고 감탄하며 격찬하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있어서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함께 모으며, 거룩한 순교 선혈로 그리스도의 길을 함께 걸어간 우리 신앙의 선조들 중에, 우선 5위 성현들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34.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으로 순교하신 위대한 스승이며 대학자였던 세례자 요한 광암 이벽(1754-1785) 성조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에 온 힘을 기울이다가 마침내 생명을 바친, 베드로 이승훈 베드로(1756-1801) 진사와, 당시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권일신 (1742-1792 대학자, 그의 형 암브로시오 권철신(1736-1801) 대학자, 또 새로 탄생한 한국천주교회 내의 최초 전도단체였던 明道會 초대 회장 아우구스띠노 정약종(1760-1801) 호교론가의 신앙과 활동과 순교사를 요약하여 살펴보기 위하여, 먼저 우리 신앙선조들, 특히 교회 창립의 주역이었던 광암 이벽 성조의 가문과 그 집안 선조들의 내력을 간단하게라도 두루 살펴보는 것은 매우 필요한 공부가 아닐 수 없다. 마치 뿌리없는 나무가 없고, 터 없는 집이 없듯이, 갑자기 우연히, 제절로 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새로운 종교의 출발은 교리나 조직이나 서적이나 지식이나 권력이나 재력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된 장소와 시대와 인물과 문화의 上下, 先後, 左右, 內外의 환경과 여건의 요소가 구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분들에 대한 호칭도, 200 여년 전 우리의 문화와 관습을 따라, 가능한 한 당시 어려서부터 자타가 부르던 관습부터 시작하여 써 나가므로써 보다 역사성을 살려보고자 한다.
2.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 특히 이벽 성조의 집안 내력
35. 우리나라 천주교회 창립의 주동역활을 한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의 이름은 세자요한 광암 이벽 덕조(1754~1785)다. 1784년 늦은 봄, 천주교회에서 받은 세례명은 세자 요한이고, 1770년 경에 스스로 지은 号는 광암(曠菴)이며, 문중의 족보에 올린 관명은 檗이고, 어려서 부모가 지어서 집에서 부르던 兒名은 字가 덕조(德祖)인데, 후에 정약용과 안정복, 등 남들이 修道와 修德에 志操가 변함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德操라고 쓰거나 부르기도 하였다. 이벽 성조는 1754년 경주이씨 집안에서 아버지 이부만과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포천현의 안골 꽃마루 새터말(內村面 花峴里 新基洞)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빼어나서 집안과 이웃이 모두 범상한 아기로 여겼다고, 정학술의 李檗傳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어려서부터 이목구비가 선인도골(仙人道骨) 형으로 출중하게 수려하고, 자라면서 기골이 장대한 체격을 지니고 있어, 집안에서는 물론 마을과 친지들을 감탄케 하였으며, 총명하고 예의범절이 너무나 근엄하면서도 온화하여, 장차 위대한 큰 인물이 되어, 집안과 가문을 크게 빛낼 것이라고 아버지는 믿고 있었다. 아버지 이부만은 늘, 우리 둘째 아들 덕조가 크면, 반드시 우리나라와 우리 가문에 큰 영광이 될 것이라고 자주 말하며, 끔찍이 사랑하고 아끼던 소년이었다.
36. 이벽 성조는 고려 때 몽고족대란 중에 세워진 元 나라의 침략과 통치 150여년 간에몇몇 고려 왕들, 특히 忠宣王을 모시던 명재상 익제 이제현의 직계 15대손이고, 조선시대 倭敵의 임진왜란 7년 중 宣祖 임금을 모시고 救國 外交에 공헌한 명재상 지퇴당 이정형의 직계 10대손이며, 만주족이 세우던 靑 나라 초기 병자호란 9년 동안 昭顯世子를 모시고 심양을 거쳐 북경에 가서 Adam Schall 신부와 교분을 맺으며 조선인 시종관 중에 3명의 수행원을 영세시켜 귀국한 서장관 黙菴 이경상의 직계 5대손이다. 즉 이벽 성조는 가문의 전통으로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외국 문물을 현장에 가서 다년간씩 접촉하며 견학하여 박학다식한 재상들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난 천재적인 영특한 후예였다.
37. 우리가 지금 부르는 세자 요한 광암 이벽 성조에 관하여 좀더 다시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으니, 이벽 성조는, 경주이씨 양반 집안 출신으로 1754년에 아버지 이부만과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르던 兒名은 덕조(德祖)였으나, 족보상의 이름은 檗이라고 하였으니, 그 당시 족보상의 이름은 평소에 자타가 사용하지 않고, 공식적인 경우에나 쓰였다. 15 세 전후 1770년 경, 천진암에 입산 수도를 시작하던 때부터는 남들이, 특히 정약용의 글에 덕조(德操)라고 쓰기도 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자신이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 号는 광암(曠菴)이었다. 1784년 늦은 봄, 이승훈 진사가 북경에서 돌아온 후, 영세할 때 자신이 선택한 세례명은 세자 요한이다.
38. 그의 조상들은 6 가야 시대를 전후하여 月城李氏로서 신라 건국에도 크게 이바지한 씨족이었다. 慶州李氏 가문에서는 이미 고려와 조선, 두 왕조를 거치면서 나라의 임금들을 측근에서 모시는 중요하고 높은 관직을 맡았었다. 예를 들어, 고려 때 익제 이제현은 13세에 당시 고려의 성균관 시험에 1등 합격하고, 이어서 15세에 과거 시험에 바로 합격하여, 어려서부터 관직에 오르기 시작한 英材였다. 그는 훗날 조선 천주교회를 세우는데 중심 역할을 한 이벽 성조의 15대 직계 조상으로서, 고려가 몽고족 元 나라 침략으로 국난을 당하자 조정의 재상이자 위대한 학자로서 볼모로 북경에 머물면서, 볼모로 함께 끌려온 고려 왕을 모셨으며, 고려에서는 처음으로 性理學 같은 철학을 체계화하고 확립하였으며. 몽고족이 세운 元 나라의 침략으로 고려의 다른 왕들이 볼모로 북경에 교체되어 가 있을 때도, 여러 왕들을 수행하며 보필하기도 하였다. 이제현이 북경에 머물고 있던 20 여년 동안에는 그 곳에서 고려의, 특히 충선왕과 함께 만권당(萬卷堂)이라는 철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원 나라의 다른 중국인 학자들과 함께 여러 해 동안 古代 선유(先儒)의 儒學을 가르치며, 母國 고려의 젊은 영재들을 원 나라 북경으로 선발하여다가 유학시켜, 國權回復 운동을 은밀히 추진하기도 하였다.
39, 또 원 나라 황실에 끈질기게 요청하여 어려운 허락을 받아, 1316년부터 1323년까지 3차에 걸쳐 지금의 티벳 서남부와 위그루 지역, 아시아와 유럽의 접경인 天山 부근과, 특히 서촉(西蜀)의 名山들 중에 아미산까지 가서 제단을 모으고, 고려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致誠을 드리며 하느님과 天地神明께 제사를 바쳤고, 터어키 접경 지역까지, 중앙아시아의 동북부 명승지를 순례하며 천지신명께 치성을 드리고,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정성을 다하여 충선왕을 모시고 聖地를 찾아 함께 애절히 기도하며, 고려의 독립과 함께, 몽고인들로부터 국왕이 하루속히 석방되기를 기원하였다. 사실, 당시 고려인들 중에 이렇게 다년간 가장 머나먼 수만리 순례의 길을 3차례나 다녀온 사람은 익제 이제현 외에는 없었고, 門下侍中 이제현이 유일한 학자였다.
40. 그 중 첫 번째 순례 때는 충선왕을 모시고 함께 순례하였다. 다만 당시 고려인들은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하느님과 동일한 개념의 천주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반만년 전부터 하늘과 땅의 주인으로 유일신 하느님을 인식하고 섬기는 종교정신을 지니고 있는 민족이었기에, 당시 고려의 문하시중(현재의 국무총리에 해당) 이제현은 7 년 동안이나 걸리는 장기간의 3 차례에 걸친 머나먼 수만리 길의 이 순례를 통해서, 이미 그 주변에 많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일부 들어와 있던 그리스도교 문화를 조금씩 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41. 그리고 고려로 돌아오면서는 다양한 학문 영역의 적지 않은 외국 책들을 가지고 들어와서 후학들의 교육에도 집중하여 크나큰 성과를 내었다. 원 나라의 국운 융성과 원나라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순례라고 핑계를 대었지만, 사실은 고려의 국권회복을 上帝 天主 하느님께 기원하면서, 원나라와 싸우며 적대관계에 있던 서쪽 끝 지금의 동 유롭 서양나라 들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순례였다. 그래서, 이제현 문하시중이 요청하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순례길에는 원 나라 황실에서 눈치를 챘는지, 충선왕은 함께 가지 못하게 하고, 이제현 일행만이 치성드리고 오라는 허락을 그나마 가까스로 받았으며, 충선왕은 오히려 甘肅省 지역으로 더 고통스러운 머나먼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고려의 일반 백성들도 救國의 마음만으로 애타하던 시절, 고려의 조정 대신들이 유람이나 관광을 다니는 수준은 아니었다.
42. 또 이제현의 직계 5대 후손이 되는 지퇴당 이 정형은 광암 이벽 성조의 직계 10대조로서, 1593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조선의 임금 선조가 신의주까지 피난하는 국난을 겪을 때, 측근에서 왕을 보필하였고, 조선으로서는 역부족이었던 왜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중국 明 나라의 지원군 파병을 요청하라는 왕명을 받아, 명 나라 북경에 파견되어, 이를 성사시키기도 하였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그는 그의 제자이며 14년 아래 후배였던 芝峯 이수광과 함께 서양 문화에 관한 많은 책들을 가지고 귀국했고, 이 책들 가운데에는 유럽선교사들이 번역했거나 저술했던 천주교에 대한 책들, 天主實義, 職方外記, 등도 들어있었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후, 이정형과 이수광 두 사람들은 교대로 지금의 天眞菴이 속해 있는 廣州郡의 현감을 역임하면서, 광주 지역에 학문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특히 서양문물을 소개하며 광주실학(廣州實學)을 싹틔우기 시작하였다.
43. 7년간의 임진왜란 이후, 즉 1637년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仁祖 임금이 항복하게 되자, 광암 이벽 성조의 직계 6대조 이경상 또한 조선의 이 국난 중에 조정에서 왕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중요한 직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경상은 인조 임금의 명으로 靑 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昭顯世子를 8년간이나 수행하는 서장관 직무를 받아 성실히 수행하였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소현 세자와 이경상은 당시 북경에 머물면서, 거기서 선교 활동하고 있던 독일인 Adam Schall 예수회 신부와 친분을 맺고, 소현 세자의 허락을 받아, 이경상은 자신이 데리고 간 그의 조선인 시종 3명으로 하여금 아담 샬 신부한테서 1645년 봄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아담 샬 신부와 정신적으로 친해진 서장관 이경상과 소현세자도 입교 영세하였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불분명하다. 귀국 후, 국내 政敵들은 아직도 親明派와 親靑派와 親父王派, 등으로 정국이 불안하던 중이라서, 자신들의 생소한 서양 종교인 천주교 입교나 영세는 감추거나 밝히지 말아야 하는 것이 지혜롭게 여길 때였다. 적어도, 소현세자가 귀국 후 두 달도 채 되기 전에 독살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의문을 낳게 한다.
44. 8년간의 볼모생활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올 때에는 아담 샬 신부의 배려와 주선으로, 아담 샬 신부가 세례를 베풀어준 5명의 중국인 영세 신자들도 함께 데리고 조선으로 귀국하였으니, Adam Schal 신부의 주선으로 모두 8명의 영세신자들로 구성된 마치 평신도 선교단과도 같이 교회 서적들과 성물들을 구입하여 가지고, 소현세자와 이경상 서장관과 함께, 지금의 해외 성지 순례를 다녀오는 신자들처럼, 희망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45. 그러나 1645년 봄 귀국하자마자 2 개월 후, 소현 세자는 갑자기 독살로 죽음을 당하였다. 9년간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과 장례는 독살로 밖에는 달리 설명이 안되는 죽음의 현상이 궁중기록으로 알려졌으니, 갑자기 죽은 소현세자의 시신은 머리의 두 눈, 코, 귀, 입, 7곱 구멍과 하체 두 곳, 모두 전신 9개 구멍에서 출혈이 쏟아지고, 온 몸은 진흙덩이처럼 상해 있었고, 시신 입관 때도 참관자들을 극히 통제하며, 극비리에 궁중 내관 몇몇이 하였다는 기록으로 독살임이 증명되고 있다.
46.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천주교 사제 Adam Schall 서양 선교사와 접촉하면서 청 나라에 9 년 가까이 있으면서, 명 나라를 멸망시키는 청 나라 군대의 북경 함락에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청 나라의 지지를 받으므로, 국내에서는 아직도 중국의 구정권인 명 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우는 대신들의 증오심과, 남한산성 함락으로 삼전도에 끌려나와 靑 나라 장군 한테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던 仁祖 임금의 증오심도 소현세자의 독살에 무관하다고 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서양의 이상한 종교를 믿는 신도들을 8명이나 데리고 온 소현세자의 신앙도 문제가 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47. 소현세자가 비운에 세상을 따나자, 북경에서 귀국할 때 데리고 들어온 다섯 명의 중국인 신도들은 즉시 중국으로 다시 귀국조치되었고, 세자의 비서실장(서장관)이었던 이경상 역시 바로 사직당하고 낙향하여, 얼마 후 바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북경에서 Adam Schall 신부한테 세례까지 받고 함께 귀국하였던 3명의 그 시종들에 대해서는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종적이 묘연하여, 아무런 기록도 국내에서는 더 이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훗 날, 북경에서 1784년 2월 24일(?) 이승훈 진사 1 인의 영세보다 139년이 앞서는 1645년 이경상이 부리던 소현세자의 시종관들 3명의 입교 영세와 韓.中 8명의 영세 신자단 귀국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48.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이 벽 성조의 가문은 나라와 임금에 충성하면서, 학문과 천주교 신앙과 접촉과 관계 발전에 당시로서는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회 분위기로서는 서양문물이나 서양 종교에 관한 분야는 돋보일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오로지 왕에 대한 애국심과 충성심으로 매우 유명한 집안이 되었다. 고려 몽고족 대란 때 이벽 성조의 15대조 이제현이 1250년 원나라 서북 쪽 순례 여행 때 천주교 문화와 간접 접촉을 하였고, 조선 임진왜란 때 이벽성조의 10대조 이정형이 1594년 이수광과 더불어 천주교 서적을 들여왔고, 천진암이 있는 경기도 광주(廣州) 부윤으로 재직하면서 서양 지식과 實學 사상을 일깨웠으며, 병자호란 때 이벽성조의 5대조 이경상이 1645년까지 소현세자를 모시고 9년간 심양에 머물다가 북경에 가서 아담 샬 신부와 교분을 맺고, 천주교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49. 그리하여 경주이씨 집안 서가에는 선조들이 수년간씩 머물던 해외에서 들여온 귀한 외국서적들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으므로, 그 후손들은 다른 문중의 후손들에 비해 외국의 새로운 학문에 보다 쉽게 또 넓게 접할 수 있었으며, 남들이 볼 수 없는 해외서적들을 읽은 지식으로 식견이 넓어서, 출세에도 도움이 되었으니, 오성과 한음으로 더 알려진 이항복, 이덕형, 등 경주이씨 문중에서는 훌륭한 명재상들과 중요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추후 계속 > -2013. 7.17. Msgr. By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