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신자들이 피땀으로 지은 구산공소 성당건물에서 마지막 미사를 드리고나서,>
마지막 미사
2016. 6. 6. 김 학렬(약망) 신부.
어제(2016. 6. 5. 17시) 추억이 서린 고향(구산) 성당에서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던 정겨운 분들이 많이 참석하여 성당 밖까지 가득 메웠고, 변기영 몬시뇰께서 본당설립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억지킴이’(Memory Guard)를 이루어가자 하시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한국천주교회창립 기억지킴이’와 결부시켜 구산성당의 '기억지킴이'를 역설하셨다.(구산성지의 신앙은 천진암성지의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나의 세례문서는 백동(혜화동) 성당에 있고, 첫영성체는 신당동 성당 공소(구산)에서 하였고, 견진성사와 소신학교 입학문서는 천호동 성당에 있고, 수원교구가 분리된 이후 나의 교적은 경안(광주) 성당으로 이전되어, 천호동보다 더 먼 50리 길의 경안성당으로 다니다가, 신장 성당 출신으로 신품성사를 받았다. 혼배성사와 병자성사는 자격이 없어서 받지 못하였으나, 이렇게 모든 성사를 “떠돌이 공소”에서 살며, 매번 바뀌는 본당에서 받았다.
고향 공소(본당)는 이제까지 변함이 없건만, 본당은 도시화에 밀려 저절로 분가가 되면서 10 번이나 바뀌어 갔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구산의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은 누리골(종로5가 효제초등학교 인근)에 집회장소를 마련하여 신부님들을 모셨고, 신앙의 자유를 맞아 선조들은 명동성당 터닦기 공사에 주력하였고, 다음에는 약현성당(문밖 성당) 소속이었다가, 백동(혜화동), 신당동, 천호동 성당의 신축 때마다 노력 동원(부역) 역할을 다하였다. 교구가 분리되면서도 이 노력은 계속 이어져, 경안성당에 이어 신장본당의 분리 신축 때도 주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이렇게 서울 중심부에서 시골 변두리로, 새 본당이 분리될 때마다 소속이 바뀌는 동안, 구산공소는 그대로 공소였다. 옮겨간 소속 본당이 누리골, 마장안, 명동, 약현, 백동, 신당동, 천호동, 경안, 신장, 구산 성당으로 10 곳이었다. 1979년 6월 29일에 변기영 신부에 의하여 구산 본당이 출범하게 되어, 그 때부터는 ‘떠돌이 공소’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1830년경부터 이선생(훈장)에 의하여 시작된 구산 공소는 유 파치피코 신부에게 보례를 받기(1834) 시작하여, 마장안에서 모방신부님을 모셨고(1836), 구산 공소가 설립되어(1836년 5월) 모방신부와 앵베르 주교와 후대 선교사들이 방문하는 공소겸 언어교육의 장소였다.(성인의 조카 김 막달레나의 증언) 1950년 6.25 사변 중에는 윤공희 신부, 장금구 신부, 최민순 신부와 이계항, 김창린, 김덕제 신학생 등이 피신하여 신앙과 고통을 나누었고, 휴전 후에는 서울의 많은 본당들의 주일학교 여름신앙학교 터였다.
나의 기억으로는 지금의 성당에서 구산으로 가는 우측 중간에 초가 공소(강당)가 있었다. 그러다가 6.25 전쟁 후 모두가 먹고 살기도 힘든 때에, 순교에 버금가는 신심으로 40여 가구가 힘을 모아 새 공소를 고딕식으로 아담하게 지었다(1956년). 지금도 노기남 대주교님께서 하사하신 (명동성당을 짓고 남은) 목재로 상량식을 거행하던 장면이 뇌리에 생생하다.
앞강의 깨끗한 모래와 돌을 날라 와 지극한 정성으로 지어서 그러한지, 철근 하나도 넣지 않았지만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금 하나 가지 않은, 아름답고 소박한 성전이다. 그러나 박해 중에도 소중히 간직했던 신앙의 중심이 세파에 밀려서는 어쩔 수 없이 철거를 당하고, 본당도 이전.신축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보금자리 주택지로 지정되면서 미사-강변지구 개발로 모든 것이 철거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허망하게 185년 동안 응축되었던 신앙의 중심이 허물어지고 말아야 하는가?! 똑똑한 세상의 경제 논리로는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하였다.
그러나 우리 신앙 순교자들의 전구를 들으신 하느님의 섭리는 세상의 생각과는 달랐다. 우리 교구장 주교님께서 똑똑한 세상 경제의 논리를 바보같은 순교신앙의 논리로 바꾸는 용단을 내리게 해 주시어, 신앙의 유산인 공소 건물이 통째로 이전.유지되게 하셨다.(이는 세상 이재에 밝은 공무원들의 실리 챙기기에 역행하는 처사여서, 법에 저촉되지나 않는지 눈치를 보아야 할 것 같다.) 35평정도 되는 성당 건물을 새롭게 짓는 비용이 더 싸게 먹힐 수 있으나, 비용이 더들어가더라도 선조들의 피땀이 배어든 신앙의 유산을 통째로 이전하려는 것이다.(용인대리구장 시절에 백암본당의 천막 성전을 신자들이 모두 힘을 모아 기둥파이프를 저마다 잡고 그대로 이전하는 것을 목격하였었다.)
구산 본당이 11번째로 장소를 옮겨 새 성전을 짓기 전에, 신앙의 유산을 우리 나름의 문화재로 여겨, 통째로 옮기는 것이다.(현대의 기술은 여기까지 발전하여 있단다.) 이는 대대로 이어져 오는 신앙유산을, ‘기억지킴이’를 위하여, 통째로 대물림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하늘에 계신 구산의 순교자 선조들이 이 모습을 굽어보시며, 대견해 하시고, 감탄하고 흐뭇해하시며, 모든 일이 서로 잘 작용하여 좋은 결과가 맺어지도록 전구하여 주실 것을 확신한다. 구산 성당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기도와 협력을 바라마지 않는다. 끝.
. <이상은 천진산메아리에서 퍼온 김학렬 신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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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구산본당 설정 당시 신장본당 주임신부였던 변기영 신부의 회고문 일부입니다>
1979년 6월 29일, 구산 본당 신설 설정첫 미사는 산수갓(복자 김안당 묘지 270평)에서, 초대주임 길홍균 신부와 함께 구산 구교우들 약 20여명과 신장본당 회장들 5,6명이 참석한 가운데 드렸다. 미사 강론과 새 신부 소개는 교구청에서 아무도 오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신장본당 주임(필자)이 하였다.
2016년 6월 5일 주일 저녁에 구 성당에서의 마지막 미사를 드려 달라는 요청을 받고, 구산 출신 김학렬 신부와 함께 가보니, 예상 외로 많은 신자들이 모였고, 38년 전 신자들도 꽤 많이 보였다. 백발이 성성한 모습들이었다. 옛 일의 이 회상을 누를 길이 없다. 모두가 반대하였던 구산본당 신설이었기 때문이다. 구산공소 회장들은 신부님 한분 생활비를 바칠 수 없다고 반대 ! 신장본당 회장들은 구산공소가 본당으로 독립하면, 신장본당 자체도 절대 운영 불가능하다고 반대 !, 교구장 주교님은 교구 사제들 중에 지원자가 전무하며, 구산공소의 본당신설을 모두가 절대 반대하고 있으니, 교구장으로서도 반대할 수 밖에 없다고 반대의 공식 말씀을 하시며, 국내 대학원 공부에나 열중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마치 조선교구 설정 때 부르기에르 소주교의 경우처럼, 우리 동창들 중에 성인신부로 알려진 길홍균 신부가 살레시오회에서 나와, 받아주는 교구가 없다기에, 구산본당 주임을 맡으라 하였더니, 둘러보고나서, 작고 가난하지만 순교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라고 자원하였고, 어렵게 교구장님의 억지 승인을 얻어, 드디어 구산 본당이 설정되었읍니다. 길홍균 신부는 가난으로 정말 고생 많이 하면서, 구산 본당에서 교우들과 함께 [대건회] 사제지망 신학생들을 키웠읍니다. 그리하여, 교구 내에서 가장 작고 가장 가난한 구산본당은 사제양성을 위한 대건회의 산실이 되었고, 여기서,김길민 신부, 고태훈 신부, 등 7,8명의 사제들도 탄생하였읍니다.! 구산 땅을 밟으며 살았던 성직자들, 주문모 신부, 여항덕 신부, 모방 신부,김대건 신부 장금구 신부, 최민순 신부,윤공희 신부, 김창린 신부, 이계항 신부,등, 천상과 지상에서의 기도와 보살핌이 없을 수가 없읍니다.!
1976년 3월 4일, 2번 째 교구청 근무를 마치고, 신장 본당에 부임해보니, 신장 동네에는 외짝 교우집 5세대 뿐이고, 구산공소를 포함한 신장 본당 신자 수는 약 400여명, 1년 예산은 1,140여만원, 구산 공소 신자들이 연말에 바치는 교무금 쌀 33가마 내외로 신장본당을 운영하느라, 교구에서는 매월 쌀 3말값 3천원씩을 보조하던 시절, 전임자 김정원 신부는 혹심한 가난 속에서, 사제관 텃밭에 교우들과 함께 열무를 심어서, 몇 다발씩 팔아서, 생활비에 보태며 고생을 하였고, 매월 사제관비는 사제가 재주껏 살다가, 연말 성탄 전후, 구산 공소 시자들이 바치는 그 해 교구금 쌀이 들어와야, 여름내내 살아온 생활비 외상 장부를 결산하던 시절이었읍니다.
현 교육원의 전신인, [한국농촌사회지도자교육원] 창설과 교구내 98개가 넘는 공소활성화와 준본당화를 위하여, 평신도지도자 교육 3개년 계획의 입안과 시행 추진, 등으로, 일부 선배신부님들의 오해를 받아 눈에 밖에 났던 필자는 2번째로 교구청에 불려들어 갔다가, 박사과정 5년 중 2년차중에, "좋아하는 공부를 더 잘 하도록, 작은 신장 본당으로 보낸다"는 핑게(?)로, 완전 타의에 의하여, 신장본당으로 인사이동이 되었으니, 당시 서울의 일부 말꾼들이 비아냥거리며, 下剋上 기미가 전무하고 불가능한데, 전투 중인 부하를 살해하는 上剋下가 아니냐고 수근거렸지만, 목수들이 내버리는 모퉁이 돌도 주님의 큰 집에는 쓰일데가 없지 않았다고 확신됩니다.
上下左右의 합동 연합작전으로 火刑式 후 Arno 냇갈 다리 위에서 흐르는 냇물에 재가 되어 뿌려지던 Savona Rolla 신부나, 火刑場 Jeanne d'Arc의 행운의 부러운 특은을 받기는 그리 쉽지 않으니,주님의 안배와 섭리의 손길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시작하지 않은 일, 남이 하는 일, 자신이 못하는 일, 전에 없던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그러한 일에 대안없는 반대나 방해나 비협조라도 베풀기가 얼마나 쉬운지 !!!
구산 공소의 가난한 구교우들은 그 때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나를 반기는 모습에서 사도시대 성모님 주변의 신도들을 연상케 합니다. 구산본당 설정, 남한산성 성지 개발, 신자가 전무한 퇴촌 공소, 산북 공소 신설, 전교회장 파견, 서부면 공소 신설, 천진암 성지 개척, 이벽 성조 묘 발견, 이장, 등과 이미 번역출판한 칼 라너 신부의 저서 수정판, 신애론 발행, 주교회의 한국교회 200주년 기념 계획 입안, 시행 추진, 103 순교복자시성운동, 창립선조 시복시성 추진,등, 실로 모두가 돈도 꽤 들어가야만 추진되는 교회 일들을 가난한 구산 공소 신자들의 기도와 참여와 협력을 굳게 신뢰하며, 앞서가시는 주님의 십자가 뒷 그림자만을 밟으며, 온갖 불합리하고, 부당한 비난과 반대와 방해와 최대의 비협조와, 시기 질투를 무릅쓰고,,, 뒤돌아다보면 실로 오늘의 우리가 겁이 나는, 과분한, 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 터 확보와 터닦기 공사와 착공에, 구산공소 신자들이 지상과 천상에서 기도하며 함께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주님의 교회 일은, 돈 있는 신자들이 많이 있는 본당이나 교구가 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식하고 유력한 저명인사들이 무시하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자라난 다윗과 예수님과 함께하는 신도들의 神通力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결실을 냅니다(당시 주한교황대사 Luigi Dossena 대주교가 필자에게 하던 덕담 ?> .
신도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영광을 받고, 인정을 받으며, 명성을 날리려는 허황되고 단견의 불쌍한 사람들이 돈과 감투병에 환장한 나머지, 주님 교회의 聖業을 얼마나 가로막고 장애하며, 괴롭히며 더럽히고 있는가!! 구산 공소 신자들의 신덕은 우리의 거울이고 교과서라고 느껴집니다! 주님의 섭리와 안배는 교회 내 못나고 무능하고 게으른 우리 성직자들의 사목적 직무유기(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조선교구 설정 당시, Brughiere 蘇主敎에게 보낸 편지 첫 머리 말씀)를 보완해주십니다.
옛 구산 공소 성당 건립 60주년이 되는 금년, 현 성당에서 300m 떨어진 서울쪽, 거북산(龜山)의 오른 쪽 뒷 발등에 신축부지 900여평이 마련되었다니, 성당터로 말하면, 지금의 자리보다 더 좋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6.25. 사변 후 그 어렵던시절, 교우들의 피땀으로 세운 구산 공소 성당 건립 60주년을 맞아, 건물을 해체하지 않고, 그대로 옮기도록 시도하게 하신다는 교구장님의 고마운 마음을 따라, 오늘의 자료는 내일의 유물 이므로, 아무쪼록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원형보전 현 상태로 이전이 완료되기를 다 함께 기도합시다. 선조들의 말없는 신앙생활 교과서를 !
다만 건물 이전 공사기간에, 구산본당 신자들의 미사봉헌 임시 대체성당이 없어, [산수갓 김안당 묘소]에 지은 성지 성당을 본당 신자들이 임시로 사용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아, 특히 사용료가 너무 비싸(?)서, 본당 주임 신부가 걱정이 적지 않다니 !!!!.그러나,복자 김안당 순교자 묘소는 그나마 교우들이 봉헌한 땅 270평 뿐이었으나, 1977년 김안당 순교기념비 건립 후, 장차, 명동 대성당(427평) 규모으의 1,500여명 수용하는 성당을, 한강을 낀 서울의 상류(구산)와 하류(절두산)에 세우도록 바둑돌을 놓고자, 구산 공소 신자 3일간의 피정을 마치고나서, 구산 성당 건립 준비로 구산 신자들(15명 내외 ?)로 부터, 교우들의 여러 조각 땅들을 봉헌받아(예, 박건순 신부네 500여평, 김학렬 신부네 200여평, 김진식 회장네 500 여평, 등,,,) 지금의 구산 성지 터 4,500여평 확보는 완전히 구산 신자들의 봉헌으로 장차 구산 성지 성당 건립을 위하여 마련되었읍니다.
훗날 지금의 성지 성당 건립에도 구산 신자들은 정성을 바쳤으며, 특히, 구산 순교자들의 신덕과 묘를, 200여년간이나 (1810~2016) 박해시대에도 지키며,오늘의 구산 성지를 조성하고, 꾸미고, 아끼고, 가꾸고 사랑하는 구산성지의 주인공은, 구산 본당 신자들이니, 이들에게만은, 성지 성당 임시사용을 좀 무료로 할 수 없을까!!? 구산성지 5천여평 확보 당시의 책임 본당신부로서 교우들과 함께하였던 필자는 가장 확실한 증인이며, 모든 문서는 천진암자료집에 이미 수록 편찬되어 있읍니다.
사실 성지관리는 본당 사목자가 겸직함이 Canon의 정신이고, 규정으로 보입니다(Canon 526. art.2; 517 art. 1 ; Unus parrochus, aut unus moderator sit, etc.,,,; 수원교구 성지관리 조례 제4조 1항~7항, 참조). 사실 연구소나 박물관이나 각종 위원회는 학문 연구나 여타의 주요목적이 상이하므로, 연구소 운영의 수익원이나 수익사업에 도움이 되는 성지관리나 성지운영은 피하는 것이 더 합당하며, 성지순례나 성지 관리는 본당사목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하겠읍니다.
전 세계 대학과 성지에 있는 연구소나 유사 기관(각종 위원회,박물관, 출판사, 등)은 꼭 성지 내에 있어야 할 이유가 적어서, 숙직 직원 외에, 연구소장, 직원 사제, 등은 자택에서 출퇴근하는 경우가 거의 전부입니다. 맟춤형 운영 면에서, 수원교구 교회사 연구소는 수원 교구청이나 왕림대신학교 부근에 자리잡도록 함이, 연구소의 발전과 활용을 위하여 더 바람직하게 보이며, 교구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젊은 보좌신부들의 교육을 위해서나, 늙은 사제들의 요양도, 규정의 [맞춤형 적용]이 사목적이라고 하겠읍니다. -Msgr. Byon-
구산성당 마지막 미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구산성당 마지막 미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구산성당 마지막 미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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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성당 마지막 미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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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성당 마지막 미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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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성당 마지막 미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구산성당 마지막 미사 후 구산성당에서 마련한 조촐한 저녁식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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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성당 마지막 미사 후 구산성당에서 마련한 조촐한 저녁식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구산성당 마지막 미사 후 구산성당에서 마련한 조촐한 저녁식사(2016.06.05.주일 오후 5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