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漢文 原文과 해석
여기서 西洋學이란 天主敎를 말한다. 朝鮮王朝實錄 47권 410면 : “若鍾供原初李檗聞有西洋學裝送李承薰隨其父東郁貢使之行入往洋人所居之堂與洋人結識購得洋書以歸與李檗及伊之兄弟若銓若鏞李家煥等同與講讀師法遂乃棄父母結徒黨[…]”
朝鮮王朝實錄47권, (1801년), 374면, :“正言李毅采疏略曰憶彼李檗者最是邪黨中巨魁諸賊之?狼籍無餘以其罪塊誅之先加雖관家煥輩之同律而李格以邪魁之同氣尙在宿위之列[…]邪魁李檗之兄李格宜先施放逐之典[…]”
朝鮮王朝實錄 47권(1801년), 375면 : “執義柳?疏略曰若論邪黨之巨魁厠李檗是已檗之兄格尙厠朝籍[…]”
李晩菜, 闢衛編 辛酉治邪(1801년), 悅話堂, 1971, 289면 : “水使李晳卽一物怪人妖也,[…]其兄李檗之最先溺邪一世之耶共知也”
黃嗣永 帛書, 1801년 : “李承薰 伯多祿 布衣李檗大奇之[…]癸卯隨父入燕 李檗 密托 曰 北京有天主堂 堂中有西士傳敎者 子往見之 求信經一部 幷請領洗 則西士必大愛之…必勿空還,,,]李承薰如其言 到堂請洗.”
李晩菜 闢衛編 乙巳秋曺摘發, 1785년, 1면: "乙巳春李承薰與丁若銓若鏞等說法於掌禮院前中人金範禹家有李檗者以靑巾覆頭垂肩主壁而坐承薰及若銓若鍾若鏞三兄弟及權日身父子皆稱弟子挾冊侍坐檗說法敎誨比之吾儒師弟之禮尤嚴"
安鼎福, 順庵全集, 1권 民族文化推進會, 1996년, 125面, :"諸君平日常斥佛而, 今束手於此, 則必有別般文字, 可以動人者而然也, 是故前書之請有以也, 今聞德操抱多少書而進去, 今者過此不見, 未知其故也[…]"
朱子, 性理書, 76권, "令晨起?氷泉?水, 誦夙夜箴, 日出 誦敬齊箴, 正午 誦四勿箴, 日入 誦西銘"
丁若鏞, “鹿菴 墓地銘”, 324면:“昔在己亥冬講學于天眞菴走魚寺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其後七年而謗生此所謂盛筵難再也”
天彛地紀限西東暮壑虹橋唵靄中(천이지기한서동모학홍교암애중)
一炷心香書共火遙瞻潮廟祭文公(일주심향서공화요첨조묘제문공)
蔓川遺稿, 韓國天主敎會創立史硏究院, 1997(영인본), 56면 : “蔓川公之行蹟儷文不少矣然不幸於燒失一稿不得見千萬意外詩稿雜錄片書有之故劣筆於秒記曰蔓川遺稿東風解凍枯木逢春芽葉蘇生之格此亦上主廣大無邊攝理也 -無極觀人-”.
韓國學文獻硏究所 編, 推案及鞫案 25권 純祖一年 20면. 亞細亞文化社 1978년 발행: “乙巳春 矣父聚會宗族 悉焚其書”(義禁府 記錄), “乙巳年……矣父聚會族人 火其書于庭 矣父又作 焚書之七律貳首[…]”
漢譯: 巫峽中峰之勢死入重泉 (무 협 중 봉 지 세 사 입 중 천)
銀河列宿之月現 錦還天國 (은 하 열 숙 지 년 금 환 천 국)
襟懷灑落光風霽月之無邊 (금회쇄락광풍제월지무변)仙鶴下人間(선학하인간) 신선나라 학이 인간세계에 내려오시니
軒然見風神(헌연견풍신) 그 모습에서 우리는 흔연히 神의 풍채를 보았도다.
羽?皎如雪(우핵교여설) 날개와 깃털은 희기가 눈과 같았으니,
鷄鶩生嫌嗔(계목생혐진) 닭과 오리떼들이 샘을 내고 골을 부리며 미워하였도다.
鳴聲動九宵(명성동구소) 그 학의 울음소리는 아홉하늘까지 진동시켰고,
?亮出風塵(료량출풍진) 그 학의 울부짖음은 풍진세상에 뛰어났었도다.
乘秋忽飛去(승추홀비거) 때가 되니 가을을 타시고 훌쩍 훨훨 날아가버리시니,
??空勞人(초창공로인)
思慮淸明長天秋水之相暎 (사려청명장천추수지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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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若鏞先生 領洗, 李承薰 進士가 確認 證言!.
정약용에게 내가 세례를 주었습니다 !- 이승훈 진사.
丁若鏞先生 領洗, 李承薰 進士가 確認 證言錄 原文 !.
정약용 선생이 이승훈 진사한테서 천주교 세례를 받았음을 명확히 증명하는 기록문이 [추안급국안]에 明記되어 있음을 아래 원문과 필자의 初譯을 소개 한다.
최근 정약용선생이 천주교 신자였느냐, 아니었느냐를 가지고 학자들 간에 논쟁이 분분하다. 그러나 [추안급 국안(推案及鞫案)]을 보면, 천주교 세례를 받았음이 명기되어 있고, 본명이 요한이었음도 뒤에 나온다. 이는 다불뤼 주교의 기록에서도 그의 본명이 요한이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丁若鏞 先生의 領洗에 관한 李承薰 聖賢의 確認 證言錄 原文.
<推案及鞫案 純祖1년 음력 2월 13일자 鞫案記錄 번역문. 제25권 68면.>
,,,,同日罪人李承薰崔昌賢面質今是白乎矣承薰向昌顯曰汝知我乎昌顯曰我豈不知李承薰乎承薰曰汝於何處見我乎昌顯曰甲辰年於李檗家相見而汝豈不爲我領洗而爲我神父乎承薰曰今始覺得則果然矣問曰丁若鏞招內以矣身爲仇讐而渠家之沈溺皆是矣身之慫惠云矣身何以發明乎供曰若鏞之供如此則矣身亦有可言者矣曾於甲辰年間與若鏞會於李檗家而若鏞潛惑於此術請受領洗於矣身故矣身爲之矣今若鏞以矣身爲仇讐則矣身亦以渠爲仇讐矣此外無他 ,,,.
,,,같은 날 죄인 이승훈 최창현을 대면질의한 바 이제 밝히 알려졌다. 이승훈이 최창현을 보고 가로되, “네가 나를 아느냐 ” 하니, 최창현이 이르기를,“내가 어찌 이승훈을 모른단 말이오?” 하였다. 승훈이 가로되,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다는 말이냐?” 하니, 창현이 가로되, “갑진년(1784) 이벽의 집에서 우리가 서로 만나보았고, 또 당신이 내게 어찌 세례를 주지 않았다는 말이오?, 더구나 나를 신부를 하게하고 그렇게 부르게 하지 않았단 말이오?” 하자, 이승훈이 가로되, “내 지금 비로서 너한테 들어 알게 되는 바이니, 과연 그렇단 말이냐?” 하였다. 정약용의 문초 중에 나온 말에 대하여 이승훈에게 물어보니, 이승훈이 가로되, “내가 정약용 집안을 모두 천주교에 빠지게 하고, 천주교에 호의를 베풀게 권하였다고 하며, 정약용은 지금 나를 아주 원수로 여기고 있으니, 내가 어찌 이를 일일이 다 밝혀 답변할 수 있겠습니까. 문초 중에 정약용의 답변이 이러한즉, 나역시 한마디 말할 수 있는 것은, 일찍이 갑년년(1784) 동안에 정약용과 더불어 이벽의 집에서 회동하였는데, 그 때 정약용은 천주교에 흠뻑 빠져서, 자기도 세례를 받게 하여 달라고 나에게 간청하므로, 나는 정약용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정약용이 지금 나를 원수로 삼고 있은 즉, 그렇다면 나역시 그를 원수로 여기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외에는 더 이상 다른 할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위 원문은 1801년 2월 13일, 많은 조정 대신들의 참석과 입회 하에 실시된 국문 기록에 명확히 들어 있다. 여기서 보면 정약용은 천주교 신앙을 후회하며 이승훈 진사를 원망하고, 이승훈 진사에게 책임을 돌리며 고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승훈 진사는 정약용이 정영 그렇게 말한다면 자기도 이제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필요가 없으므로, 천주교 신앙과 자신과의 관계를 발설하는 정약용에 대하여 더이상 침묵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을 보아, 이승훈 진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정약용과 다른 신앙인들의 천주교 신앙에 관하여 요새 표현으로 묵비권을 행사하며 일체 발설하지 않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들이다.
1801년 음력 2월 13일에 이승훈 진사와 최창현, 정약용 등을 대면시켜 문초한 기록 앞에는 이 심문 현장에 입회 참석한 자들의 직책과 명단은 다음과 같이 나온다.
영중추부사 이병모
의정부 영의정 심환지
의정부 좌의정 이시수
의정부 우의정 서용보
겸 판의금부사 서수정
겸 지의금부사 이서구
겸 동지의금부사 윤동만
겸 동지의금부사 한용탁
승정원 의부승지 서의수
사간원 대사간 신봉조
사헌부 장령 이경삼
별문사 낭청
홍문관 부수찬 오한원
통례원 좌통례 정래백
사복사정 이안묵
성균관 사 성 유하원
홍문관 부교리 이기원
부 사 과 임후상
별형방
도 사 윤수정 진
도 사 이흥운 진
문서색
도 사 이희연 진
도 사 이지겸 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해설: 최창현 회장에게 세례를 주고, 임시 준 성직자 역할까지 맡겼던 이승훈 성현이 최창현을 대면하여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다른 신자들을 더 알리지 말라는 뜻으로 최창현을 위해서, 다른 신도들을 위해서 하는 말일 수 밖에 없다. 또한 처남인 정약용이 배교하며 변명하는 과정에서, 자기네 정씨 형제들이 천주교를 신앙하게 된 것은 모두 매형이 되는 이승훈 성현 때문이라고까지 말하자, 비로서 이승훈 성현은 만일 처남인 정약용이 후회막심해하며 자신을 매형으로보다 원수로 여긴다고 한다면, 이승훈 성현 자신도 정약용 같은 저런 사람을 처남으로 두었고, 세례까지 주게 된 것을 후회하는 동시에, 역시 배교하는 원수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훈 진사의 고매한 성품과 열렬한 신덕이 밝게 들어나는 대목이다. 이 문초 후, 이승훈 진사(*당시 進士는 오늘의 博士 학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는 몇차례 더 고문과 혹심한 매를 맞고, 10여일 후, 정약종 등과 함께 서소문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천진암 성지 卞基榮 몬시뇰 抄譯- <등록일 : 2008-08-16 (11:17)>
*알아듣기 쉽게 한 귀절 풀이.
<丁若鏞 先生의 領洗에 관한 李承薰 聖賢의 確認 證言錄 原文.
<推案及鞫案 純祖1년 음력 2월 13일자 鞫案記錄 번역문. 제25권 68면.>
同日(같은 날)
罪人李承薰崔昌賢面質(죄인 이승훈과 최창현을 대면시키니)
今是白乎矣(이제 이것을 밝히 고백하였다)
承薰向昌顯曰(승훈이 창현을 향하여 이르되)
汝知我乎(네가 나를 아느냐?하니,)
昌顯曰(창현이 이르되)
我豈不知李承薰乎(내가 어찌 이승훈을 모른단 말이오? 하였다.)
承薰曰(승훈이 이르되)
汝於何處見我乎(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단 말이냐? 하니,)
昌顯曰(창현이 이르되)
甲辰年於李檗家相見而(갑진년 이벽의 집에서 우리가 서로 만나보았으며)
汝豈不爲我領洗而(당신이 내게 어찌 세례를 받게 하지 않았으며)
爲我神父乎(내가 신부를 하게 하지 않았단 말이오?하니)
承薰曰(승훈이 이르되)
今始覺得則果然矣(내지금 비로서 네게서 들어알 뿐이니 과연 그렇단 말인가?)하였다.
問曰丁若鏞招內以(정약용을 문초하는 중에 물었는데)
矣身爲仇讐而(정약용이 나를 원수로 삼아)
渠家之沈溺皆是(내가 처갓집을 모두 천주교에 빠지게 하여)
矣身之慫惠云(내가 권고하여 거기에 따르게 하였다니)
矣身何以發明乎(내가 어떻게 하나하나 따져가며 밝히리오?하며)
供曰(문초에서 답하며 승훈이 이르되)
若鏞之供如此則(약용이 문초에서 대답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면)
矣身亦有可言者矣(나역시 한마디만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曾於甲辰年間(일찌기 갑진년(1784) 동안에)
與若鏞會於李檗家而(내가 약용과 더불어 이벽의 집에서 회동할 때)
若鏞潛惑於此術(약용은 이 천주교에 흠뻑 빠져서)
請受領洗於矣身(세례를 받도록 하여 달라고 내게 간청하였으므로)
故矣身爲之矣(내가 그에게 세례를 베풀어주었으니)
今若鏞以(이제 와서 약용이 이러한 일을 가지고 후회하며)
矣身爲仇讐則(나를 원수로 삼고자 한다면)
矣身亦以(나역시 이런 일을 가지고서)
渠爲仇讐矣(어찌 약용을 원수로 여기지 않으리오?)
此外無他(그러니 이 이상 더 다른 할 말이 없도다. 하였다)
1816년 정약용 선생이 55세 때 流配地 강진에서 지은 형 丁若銓 墓誌銘에,
甲辰四月之望旣祭丘嫂之忌余兄弟與李德操同舟順流舟中聞天地造化之始形神生死之理창황驚疑若河漢之無極入京又從德操見實義七極等數卷始欣然傾嚮而此時無廢祭之說.하였다.-
1784년 갑진년 4월 보름 날 큰 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나는 우리 형제들과함께 이벽과 더불어 같은 배를 타고, 물 흐르는 대로 내려오면서, 배 위에서 천지조화의 시작과 육신과 영혼(형체와 정신), 생사의 이치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아주 황홀하고 놀라우며 의아하여, 하한의 무극에 들어간듯 어느덧 벌써 서울에 들어왔고, 또 이덕조를 따라가서 천주실의와 칠극 등 여러 권의 책을 보고 이 때 바야흐로 기뻐하였으며, 아주 거기에 기울어 푹 빠지게 되었었는데, 이 때는 아직 제사를 폐지해야 한다는 말이 없을 때였다. -변기영 신부 역-
그런데 정약용 선생는 1822년 61세 회갑하던 해, 고향 마재에서 지은 鹿菴 權哲身 墓誌銘에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甲辰夏從李檗舟下斗尾峽始聞西敎見一卷書.
*즉,1784년 갑진년 여름에 이벽을 따라 배를 타고 두미 여울을 내려가며 천주교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였고 책도 한권 보았다.-변기영 신부 역-
② 講學于天眞菴 走魚寺雪中 李檗夜至
昔在己亥冬講學于天眞菴走魚寺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其後七年而謗生此所謂盛筵難再也-鹿菴 權哲身 墓誌銘-1822년 61세 回甲 때 丁若鏞 作-
*즉,기해년 겨울 천진암에서 강학이 있었는데 주어사가 설중인데도 이벽이 밤중에 천진암까지 와서 촛불을 밝히고 경서를 담론하였다. 는 뜻이다.
또한 정약용 선생이 1816년 55세 때,先仲氏(丁若銓)墓誌銘에서,
執贄請敎於鹿菴之門嘗於冬月寓居走魚寺講學會者金源星權相學李寵億等數人,하였는데,
*그 뜻인즉,녹암이 잠시 주어사에 우거할 때 강학이 있었는데, 모인 사람들은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여러 명이었다는 등의 뜻이다. 走魚寺가 있던 같은 鶯子山에는 樊魚寺, 日出庵, 石伊庵, 天眞菴, 小庵, 鳳泰庵, 샛절, 이렇게 8개소 암자가 같은 산의 가까운 거리(300m ~ 500m, 좀 거리가 떠러진 곳은 1 km 정도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40대의 나이 많은 어른이오 스승 격인 권철신이 寓居 走魚寺하던 때이므로, 10대후반 20대 전후의 젊은 이들은 주변 가까운 거리의 암자에서 강학을 받을 수가 있었다. 역사적 사건 기록 문헌은 현장을 정밀답사하지 않고는 올바른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公諱哲身字旣明自號曰鹿菴名其所居曰鑑湖安東之權也 하였는데,
*그 뜻인즉, 公은 諱가 哲身이고, 字는 旣明이며, 스스로(自) 號를 지었으니, 가로되(曰) 鹿菴이라 하였고, 이름난 곳(名其所)에 居하였으니, 가로되(曰) 鑑湖라는 곳이며, 安東之權씨였다(也)이다.
또한, 始李檗首宣西敎 從者旣衆曰鑑湖士流之望鑑湖從而靡不從矣遂駕至鑑湖旬而後反於是公之弟日身熱心從檗하였는데,
*여기서, 鑑湖의 士流는 楊根面 五賓里 한강가에 있던 鑑湖亭에 자주 모이던 선비들, 특히 權哲身과 權日身을 따르던 제자 선비들을 말한다. 마치,[명동 청년들],[광주 학생들], 하듯.감호정은 세종, 성종 때부터 이미 있었던 정자로서, 거울같이 물맑은 양평 앞 葛山里,楊根里, 五賓里의 漢江浦를 감호(鑑湖)라고 말하였다.
더구나, 公作虞祭義一篇以明祭祀之義出辛亥冬湖南獄起睦萬中洪樂安指告日身日身始抵死不屈 配濟州旣 上諭之誨之日身自獄中作悔悟文上之宥配禮山出獄未幾而死自玆門徒皆絶公杜門銜哀足跡不出乎山門者十年辛酉春逮入獄.하였는데,
*여기서 [杜門銜哀足跡不出乎山門者十年]은 녹암 공이 살던 마을 입구가 山門을 이루고 있는 곳, 지금의 葛山里(현재 양평 읍사무소, 양평 도서관, 양평 중고등학교 터 일대)를 말한다. 전에는 똬리처럼 동산으로 둘러 쌓인 마을 입구가 葛山津(현재도 나루터) 옆으로만 조금 열려 있어, 목책으로 山門을 이루고 있었다.
權哲身 당시의 走魚寺의 용도와 의미
1. 走魚寺라는 단어는 丁若鏞의 權哲身 墓誌銘과 丁若銓 墓誌銘에서 꼭 한번씩 나오는 것이 전부로서, 현재까지 문헌상 기록은 丁若鏞의 글에서 2번 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다른 어떤 관변 기록에도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서종태).
2. 그런데, 더구나 走魚寺에서 講學이 있었다는 기록은 위의 거기에도, 또 어디에도 없으며, 다만, 鹿菴이 [寓居走魚寺할 때] 講學이 있었다는 문장 하나를 가지고 확대해석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權哲身의 이름이 거론되는 簡札이나 墓誌銘 등에 나타나는 1768년 겨울, 1770년 여름, 1773년 겨울, 1777년 겨울1779년 겨울의 강학을 모두 走魚寺에 가져다가 붙이는 것 뿐입니다. 권철신의 生長鄕이며, 書堂이 있던 楊根 葛山里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모두 엉뚱하게 走魚寺에 끌어다가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2. 寓居라는 말은, 隱居나, 蟄居나, 同居나, 獨居나, 別居, 등에서 보듯이, [잠시 거한다]는 뜻으로, 居하는 기간과 시기를 표현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 기간은 짧게는 몇 시간이나(여름 소나기 올 때 원두막에 寓居한 후), 몇일 간, 길어야 한 달 미만을 뜻하는데, 결국 녹암 공이 주어사에 寓居하던 시기를 말 할 뿐으로, 그 시기에 講學이 있었다고하여, 강학도 우거하던 주어사에서 하였다는 해석은 확대오류의 큰 잘못입니다. 녹암 공이 주어사에 잠시 거하던 시절에 강학은 天眞菴이나 鳳泰庵이나 楊根 鑑湖나 葛山, 등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3. 모든 기록은 현장 대조와 일치해야 하는데, 주어사 터의 비좁은 地形으로 보아, 장기적인 모임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곳임을 三尺童子라도 알만한 곳입니다. 특히, 氷泉은 북향계곡에만 있는 것으로, 走魚寺 터처럼 동남향 계곡에는 없는 것입니다(최석우 신부님과의 논쟁사 참고). 즉, 走魚寺에서는 적지 않은 선비들이 老少가 한데 모여서 講學할만한 장소도, 거처도, 식수도, 모두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곳입니다.
4. 茶山은 천진암에서의 讀書處(오늘의 硏究所)나 豪士昔講讀, 등에서 보듯이, 아주 많은 기록을 남기며, 자신들의 母校처럼, 수차례 늙어서까지도 찾아가 머물며, 추억의 詩文을 많이 남기고 있으나, 走魚寺에 대하여는 녹암이 우거하던 시기가 고작입니다. 천진암 반대하기 위해서 출발한 주어사 의미 부여나 중요시함은 매우 허탈한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5. 楊根 葛山이나 鑑湖가 走魚寺보다는 비할 수 없이 더 의미있는 곳으로, 嶺南(洪儒漢 子弟 洪樂質, 등)과 湖南, 등에서, 즉 전국에서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勉學하던 학문의 전당으로, 매우 의미있는 곳이고, 1785년, 1791년, 1795년, 1801년의 박해 현장이기도 합니다.
6. 서종태 박사의 글을 보니, 이미 30여년 전, 논쟁하던 때의 최석우 신부님의 주장과 별다른 발전이 없는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丁若鏞 선생이 15세로 결혼하던 丁酉年(1777년)에 천진암에 와서 스승이신 이벽 광암공에게 결혼 인사차 지어 드린 詩文(다산전집 제1권 첫머리)부터 65세의 노구를 이끌고 丁亥年(1827년)에 와서 며칠씩 머물며 지은 저 많은 詩文들을 아직 다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7. 결론. 走魚寺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면에서나, 실학운동사 면에서나 그리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丁若鏞 선생도, 유배생활 전이나 후나, 주어사를 찾은 적이 전혀 없습니다. 남긴 기록도 전무합니다. 다만 천진암 성역화 위원회의 碩學들과 몇차례 의논한 적이 있었는데, 모두가 雪中李檗夜至 張燭談經의 광암 공 열성을 되새기는 순례자들을 위한 標石을 세우고자 한 적이 있습니다.
-천진암 성지 변기영 몬시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