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세자 요한 광암 덕조 이벽 성조를 한국천주교회 創立者로 明示하는 근거문헌 발췌 정리.
① 李檗은 새로 改宗者들(proselytes)과 힘을 합쳐서, 조선신도 공동체의 代表者(delegue)로 1783년 가을에 李承薰을 북경에 파견하였다. -모방 (St. Maubant) 신부-
“1720년 경에 북경에 다녀간 사신 李公(李?命)이 서양선교사들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갔는데, 이 책들을 구해 읽은 광이라는 사람(曠菴 )은 후에 요한이라는 敎名을 가진 분이고, 이 사람이 천주교 교리에 同感하고 心醉하여, 천주교를 全心으로 받아들였고,(embrassa la religion chretien)[…]광이라는(曠菴) 이 사람은 이 새 종교에 합류한 몇몇 改宗者들(proselytes)과 함께 힘을 합하여(de concert) 1783년에 자기들의 또 다른 代表者(autre delegue) 한 사람을 북경에 파견하였는데, 이 대표자는 1784년 2월에 베드로라는 敎名으로 세례를 받고 오게 되었다”
② 李檗은 그의 위대한 講學으로 조선 천주교회를 창립하였다. -다불뤼 (St. Davely) 주교-
“조선왕국에 처음으로 천주교의 始動을 걸어, 천주교회 출발을 시작하기 위하여 천주께서 간택하여 쓰신 道具는 李檗이라는 사람인데, 이름을 덕조라고 부르고, 호는 광암이었으며, 경주이씨 가문이었다.”
“L'instrument dont Dieu se servit pour donner le premier branle a la religion dans ce royaum de Coree fut Ni Pieki appelle Tektso et surnomme par luimeme [Koang am]. Pieki descendait de la famille des Ni de Kieng Tsiou.”
“眞正한 意味의 조선천주교회의 歷史는 李檗의 講學에서, 李檗의 저 위대한 講學에서 시작되었다”
L'histoire proprement dite commence aux conferences de Ni Pieki. Les grandes conferences de Ni Pieki”
“이벽은 조선에 천주교회를 創立하기 위하여 암브로시오 권철신을 선택하여 주초로 삼았다.
“Kouen Ambroise, T'siel sini etait l'aine de la famille des Kouen que Ni Pieki choisit pour en faire le fondement de la religion dans ce pays”
③ “李檗은 朝鮮天主敎의 始祖다” -李晩菜의 闢衛編-
<李晩菜, 闢衛編 辛酉治邪(1801년), 悅話堂, 1971, 289면>
“요사스러운 전 水使 李晳의 兄 李檗은 저 邪惡한 천주교를 가장 먼저 시작한 우두머리로서 천주교인들의 始祖(一世)라는 것을 萬人이 다 알고 있는 바(共知)로다.”
“水使李晳卽一物怪人妖也,[…]其兄李檗之最先溺邪一世之耶共知也”
④ 맨 처음 李檗이 首領이 되어 天主敎를 전파할 때, 權哲身의 동생 權日身은 熱心으로 李檗을 추종하였다. - 丁若鏞의 鹿菴 權哲身 墓誌銘 -
“맨 처음에 李檗이 首領이 되어 天主敎를 전파하고 다닐 때, 추종자들이 벌써 무리(衆)를 이루게 되었는데, 그 때 녹암 權哲身의 동생 權日身은 熱心으로 李檗을 추종하였다.”
始李檗首宣西敎從者旣衆,,,公之弟日身熱心從檗 ”
⑤ 大聖賢 李檗이 저에게 天主敎를 가르쳐주셨습니다.” - 李承薰
이벽성조에 의해 파견되어 1784년 봄에 북경에서 領洗하고 온 이승훈 선생은, 1789년에 북경 선교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간을 보냈다.
“제 일생에 聖賢을 한분 만났사온데, 이 어른은 우리 종교에 관한 책을 이미 가지고 계셨고, 그 책 내용에 대하여 아주 여러 해 동안 전념하며 자신을 거기에 적응시켰습니다. 이 어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니, 우리 종교의 여러 가지 점들, 특히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점들에 대해서까지도 아주 잘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종교에 대한 이 어른의 信德과 열성은 교리지식보다 훨씬 더 대단한 수준이었습니다. 바로 이 어른이 저를 가르쳐주신 스승이시고, 저에게 魂을 넣어주신 분이십니다. 저는 이 어른을 모시고 함께 천주를 섬기는데 있어 상부상조하였습니다”
* 이 서한은 1789년에 李承薰 先生이 북경의 宣敎師들, 즉 그라몽신부나, 알렉산델 구베아 주교 등,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인데 漢文原本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다만 佛語 譯本만이 전해진다: 聖賢(un savant)은 李檗聖祖를 指稱하고 있다.
“Dans ma course j'ai rencontre un savant qui avoit trouve un livre de notre Religion, auquell il s' etoit applique pendant plusieurs annees. Son travail n'avoit pas ete inutile, il avoit des connoissances sur les points de la Religion les plus difficiles a comprendre; mais sa foy et sa ferveur surpassoit encore ses connoissances. C'est lui qui m'instruit et m'anime, nous nous sommes aides mutuellement a servir Dieu[…]”( L'ERECTION DU PREMIER VICARIAT APOSTOLIQUE ET LES ORIGINES DU CATHOLICISME EN COREE. Par Andreas Choi, 1961 Nouvelle Revue de Science Missionaire Suisse. Schoneck-Beckenried. Switzerland. P.91, APPENDICES.
⑥ 1783년 李檗 성조께서 이승훈 進士를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하면서 훈계하는 말씀을, 이승훈 진사는, “大道師(Maitre)"의 命으로 받아들였다고 기록하였다. -다불뤼 주교-
“‘자네가 北京에 가게 되었음은 天主께서 우리나라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하고자 하심을 나타내는 標識일세. 북경에 도착하거든 바로 天主堂을 찾아가 서양 선비들과 상의하여, 모든 것에 대해 물어보고, 그들과 함께 교리를 깊이 연구하여 천주교 실천에 대한 모든 것을 상세히 알아오며, 필요한 책들을 가지고 오게. 우리민족의 生死가 걸린 일일세. 즉 來世에 관한 莫重之事가 자네 손에 달려 있으니, 가서도 가벼이 행동해서는 아니 되네.’ 이승훈은 가슴 깊이 파고드는 이러한 말을 열심히 새겨들었고, 이를 大道師, 스승의 말씀(la parole du Maitre)처럼 받아들였으며, 자신도 같은 생각이었으므로 相互共同의 신념인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을 굳게 약속하였다.”
ibid. 10면:“Seng houni ecouta d'un air soumis ces paroles de Pieki qui le penetraient profondement et les recevant comme la parole du Maitre, il promit de faire tous ses efforts pour realiser leurs communs desirs.”
⑦ “李承薰, 丁若鏞 3兄弟, 權日身 父子, 等이 모두 李檗을 스승으로 모시고 앉아서”명례방 김범우 통역관의 집에서 집회를 하였다. - 闢衛編 -
1784년 이승훈 선생이 북경에서 영세귀국한 지 1년 후에 일어난 1785년 乙巳迫害에 관한 闢衛編의 기록에도 광암 이벽성조와 당대의 다른 학자들과의 관계를 쉽게 엿볼 수 있는 표현들이 있다.,
“乙巳년(1785년) 봄에 掌禮院 앞에 있는 金範禹의 집에 李檗이라는 사람이 설교를 했었는데, 푸른 수건으로 머리와 어깨를 가리고 벽을 기대어 좌정하고 앉아 있었으며, 그 앞에는 李承薰, 丁若銓, 丁若鍾, 丁若鏞 3형제와 權日身 父子가 책을 손에 들고 李檗을 모시고 무릎을 꿇고 둘러앉아서 이벽의 설법을 듣고 있었으며, 모두가 스스로 다 자기들은 이벽의 제자들이라고 부르더라. 李檗이 저들을 가르치고 꾸짖고 하는 기품이 얼마나 엄격한지, 우리 儒敎에서 스승이 제자들에게 하는 禮儀보다도 훨씬 더 엄하게 하고 있었다.”
李晩菜 闢衛編 乙巳秋曺摘發, 1785년, 1면: "乙巳春李承薰與丁若銓若鏞等說法於掌禮院前中人金範禹家有李檗者以靑巾覆頭垂肩主壁而坐承薰及若銓若鍾若鏞三兄弟及權日身父子皆稱弟子挾冊侍坐檗說法敎誨比之吾儒師弟之禮尤嚴"
⑧ “天學 硏究에 탁월한 李檗博士가 李承薰을 北京에”- 金大建 神學生
김대건 신부가 사제로 서품되기 전 神學生 시절, 1845년에 썼던 朝鮮天主敎會 略史 報告書 첫 머리에서도 광암 이벽성조의 업적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한다.
“조선에는 많은 哲人들(philosophantes)이 자발적으로 우주만물의 창조주요 주재자이신 참 天主가 계시다는 것(naturali lumine […] verum Deum […])을 자발적으로 연구하여 인식하고 섬기었는데, 그들 중에 뛰어나게 가장 유명한(inter eos celebrior) 사람은 李檗이라는 분이었습니다. 이분은 아주 깊히 연구하여 참되신 천주를 공경하고자 노력한 나머지, 당시 북경에는 천주공경이 번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을 북경에 보내어 천주교서적을 가져오게 하려고 작정하고, 마침내 이승훈은 李檗 博士(doctor I Pieki)에게 가서 자신이 아버지 李東郁을 따라 北京에 간다고 하였으며, 이벽은 이승훈에게 북경에 가거든 서양 사람들을 찾아가 천주교 서적을 얻어오라고 하였습니다.”
金大建神父의, “新生 韓國天主敎會 略史 槪觀-Generalis notitia super nascentem Ecclesiam Coreanam”, 1845 :
“ Inter eos celebrior fuit vir nomine I Pieki(nomen baptismi Joannes Baptista). Hic magno studio veri Dei cultum inquirens, cum audivisset religiopnem Domini caeli nuncpatam in Pekino florere,statuit homines mittere, qui illius religionis libros afferrent. Transacto demum aliquod temporis spatio, quumque legati proficiscerentur versus Pekinum; filius tertii legati I Senghugni dictus, adiit doctorem I Pieki eique se in Sinas profecturum affirmavit.”
⑨원래 천주교 책을 제일 먼저 구해서 읽고 믿은 李檗이 이승훈을 변장(變裝)시켜 그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서 서양선비들을 만나고 책들을 가지고 오게 하였습니다.
-丁若鍾의 문초록, - 朝鮮王“朝實錄, 辛酉年 記錄 -
“丁若鍾을 문초한 결과, “원래 처음으로 西洋學(天主敎)을 듣고 알게 된 것은 李檗이었고, 李檗은 이승훈을 몰래 變裝시켜 꾸며서 아버지 이동욱 公을 따라 북경에 가도록 보내었읍니다”
朝鮮王朝實錄 47권 410면 : 若鍾供原初李檗聞有西洋學裝送李承薰隨其父東郁貢使之行入往洋人所居之堂與洋人結識購得洋書以歸與李檗及伊之兄弟若銓若鏞李家煥等同與講讀師法遂乃棄父母結徒黨[…]”
(10) 朝鮮 天主學의 始祖 李檗이 魁首다.” -
朝鮮王朝實錄 47권 374면 辛酉년 항목
“李檗은 사특한 무리들의 가장 큰 괴수이니, 우선 그 형 李格이 아직 벼슬에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매우 서글프고 안타까운 일이니, 그 형제들은 즉시 벌을 주어 내 쫓아야 한다“사특한 무리들의 가장 큰 괴수로 말한다면 그것은 李檗이다.”
朝鮮王朝實錄47권, (1801년), 374면, :“正言李毅采疏略曰憶彼李檗者最是邪黨中巨魁諸賊之?狼籍無餘以其罪塊誅之先加雖관家煥輩之同律而李格以邪魁之同氣尙在宿위之列[…]邪魁李檗之兄李格宜先施放逐之典[…]”朝鮮王朝實錄 47권(1801년), 375면 : “執義柳?疏略曰若論邪黨之巨魁厠李檗是已檗之兄格尙厠朝籍[…]”
(11) “北京 天主堂에 가서 祈禱書를 求하고 領洗를 請하게.”- 黃嗣永 帛書
또한 李檗이 李承薰을 북경에 보내어 세례를 받아오게 하였음을, 앞에서 인용하였던 다블뤼주교의 서한, 丁若鍾의 증언,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편지 등에서 이미 보았는데, 黃嗣英(1775~1801) 進士는 이를 자신의 帛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승훈은, 벼슬하지 않고 깨끗이 살던 道人 선비 李檗이 기특히 여기며 크게 믿음직하게 여겨 기대하던(大奇之) 선비였다. 계묘년(1783년)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갈 때, 李檗이 이승훈에게 가로사대(曰), 북경에 가면 天主堂이 있고, 천주당에는 傳敎者인 서양선비가 있을 터이니, 가서 信經 祈禱書를 求하고, 아울러 領洗하기를 청하도록 하게(幷請領洗). 그러면 서양선비 傳敎者가 자네를 무척 사랑할 걸세. 그리고 여러 聖物을 많이 얻어가지고 와야지, 결코 빈손으로는 돌아오지 않도록 하게. 이승훈은 李檗의 이 말씀대로(承薰 如其言) 북경 천주당에 도착하여 洗禮받기를 청하였다.[…]”
黃嗣永 帛書, 1801년 : “李承薰 伯多祿 布衣李檗大奇之[…]癸卯隨父入燕 李檗 密托 曰 北京有天主堂 堂中有西士傳敎者 子往見之 求信經一部 幷請領洗 則西士必大愛之[…]李承薰如其言 到堂請洗.”
결론: 조선 천주교회 창립에 있어, 講學과, 이승훈 북경 파견과, 이가환, 이기양과의 공개적인 교리토론회 승리, 권철신 형제들의 입교 주선, 등 최초의 복음선포 활동을 통하여 그 위업을 수행한 광암 이벽 성조께서는, 다불뤼 주교, 모방 신부, 정약용 선생, 김대건 신부, 이승훈 성현, 벽위편, 조선왕조실록, 등, 교회 내외에서, 특히 당시 정부의 기록문서와 박해자들의 기록에서도 異口同聲으로 밝히고 있듯이, “한국천주교회 창립자”이다.
이제 한국천주교회 창립자 광암 이벽 성조의 天學 道場이며 敎理硏究와 信仰實踐의 本據地, 즉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 관계된 문헌 기록을 살펴본다.
II. 천진암을 한국천주교 發祥地로 明示하는 근거 문헌
(1). 천진암은 이벽 광암 성조의 天學道場인 讀書處가 있던 곳이다.
-丁若鏞, 丁巳年의 詩
端午日陪二兄游天眞菴記 (단오날 두 형들과 천진암에 와서 노닐며 보니,)
天眞菴엔 아직도 李檗의 讀書處가 그저 그대로 있는데.”- 丁若鏞
李檗讀書猶有處(이벽독서유유처) 이벽의 讀書處는 아직도 저기 그저 그대로 있는데
苑公棲跡杳難尋(원공서적묘난심) 苑公이 깃들던 발자취는 아득히 다시 찾기 어렵도다.
風流文采須靈境(풍류문채수영경) 風流와 文采는 모름지기 神靈한 境地에서라야 하리니,
半日行?半日吟(반일행배반일음) 그시절 그리며 한나절내 술마시고 한나절내 시를 읊노라.
이 詩는 丁若鏞 선생이 1797년 丁巳年에 쓴 것으로서, 이벽성조께서 1785年 殉敎하신지 12년 후이고, 天眞菴에서 講學會가 개최되었다고 거론되는 첫번째 해(1777년)부터는 20년 후다. 이 詩는 광암공이 天眞菴에서 讀書할 때 茶山이 이미 수차례 왔었거나 아니면 함께 거하며 讀書를 함께 하였었다는 것을 전제하고서만 쓸 수 있는 내용의 詩文이다.
이 시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이 讀書處라는 말인데, 조선시대에는 고위관리의 특수 전문연구기관이었던 讀書堂이 있었으나, 재야에서는 선비들이 심산궁곡 같은 곳에 들어가서, 소박하고 검소한 草屋이나 작은 處所에서 3년 독서, 7년 독서, 등, 장기간 하는 것으로, 讀書라는 말은, 단순히 글을 읽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의 대학원에서의 연구를 포함한 수덕적 차원을 의미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벽성조의 讀書處가 천진암에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자의 道場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이 시에서 사용하고 있는 苑公이란 말은 苑風之人으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으면서 뒤흔들고 가버린 큰 회오리바람같은 巨人을 뜻하는 것으로 이벽성조를 가리키고 있다. 혹자는 “원공(苑公)”을 어떤 스님을 지칭한다고 말하지만, 당시 언어문화 관습상, 스님들에게, “公”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四溟大師니, 元曉大師니, 하듯이 大師라는 표현은 쓸 수 있으나, 스님들에 대해서 公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2) 천진암에 도우(道友)가 중도(衆徒)하여, 李檗聖祖를 웃어른으로 삼으니(爲上), 그 문하생(門下生)들에게 聖敎要旨를 下筆하시였다.
丁學術의 李檗傳
“戊戌(1778)년 이벽성조께서는 25세 되던 해에 星湖 李瀷先生을 따르는 제자들과 어진 벗들과 어진 선비들, 丁氏 李氏네 자제분들과 함께 학문에 힘쓰셨다. 북경에 사절로 갔던 武官 洪軍士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한 상자 받으시고 밤낮으로 열중하여 읽으신 후, 깊히 묵상하고 연구하므로써 의심나는 점을 터득하시고는 山水가 좋은 곳을 노닐으시며 다니시다가, 일단 廣州에 이르러 鴛鴦山 寺, (一名 鶯子山) 천진암에 隱居하시매, 道를 닦는 벗들(道友)이 叢林(衆徒,僧團, 곧 修道的 團體, 衆徒,準修道者團)을 이루게 되자, 이들에게 聖敎要旨를 지어 부르시어, 받아 쓰게 하시었다”.
여기서 道를 닦는 벗들(道友)이란 이벽성조께서 강의하는 천주교 도리를 듣고 따르는 이들, 곧 천주교로 입교한 이들이다. 지금의 종교라는 말을 당시에는 道라 하였고, 지금의 敎友라는 말도 道友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衆徒란 말은 衆生과 좀 달리 승려 지망자들을 말하는데, 당시에는 修士 혹은 修道者들, 共同體, 등의 현대적인 천주교 용어가 아직 없을 때였다.
결국 당시에 천진암에서는 마치 예수의 제자들이나 東學 초기의 水雲 崔濟愚의 門徒들처럼 修道的이며 勉學的인 젊은 少年 信徒 弟子들이 단체로까지 形成되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단체가 바로 聖 모방 신부의 문헌에 나오는, “李檗이 改宗者들(proselytes)과 一心團合(de concert)하여 또 다른 代表者(delegue)를 북경에 파견하던” 主體일 수밖에 없다. 『니벽전』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소상히 적고 있다.
“己亥(1779)년 이벽 선생이 26세 되시던 해에는 어진 벗들과 學文에 힘쓰는 제자들이 웃어른으로 삼고 모시며(爲上), 제자들이 무리를 지어 山寺에 모여들게 되었다. 이 때 광암 이벽 선생은 기묘한 學文에 아주 博識하여 天文學과 地理學 醫學과 卜術, 인간의 품성과 운명에 관한 학문에도 達通하였으며,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서 자세히 풀어서 답변하는데 있어서 흐르는 물처럼 막히는 데가 없었고(如流水), 젊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그 門下에는 叢林(=僧團)을 이루었으며, 그 名聲이 世間에 자자하여 널리 전해지고 있었다.” -丁學術의 李檗傳-
3) 日月五行과 함께 한국에서 최초로 요일(曜日)을 가르치며, 主日을 지키던 天眞菴의 李檗 성조와 그 叢林들에 관한 기록. -丁若鏞, 다불뤼 주교, 등의 기록.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갖춘 李檗은 7요일이 차례로 번갈아 바뀐다고 하는데, 草木도 해마다 다시 번복되어 생장하고 있지 않은가” 정약용의 “贈李檗” 獻詩에서.
정약용 선생은 1777년 15세로 결혼하던 해에, 당시 23세의 李檗 曠菴 先生을 가리켜,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함께 골고루 갖추셨으며(賢豪氣相投)”, 또 “ 어려서 일찍부터 德을 힘써 닦으신 어른(令德勉早修)으로” 完德의 標本이라고 여기면서, 李檗聖祖를 존경하였다. 이때 지었던 “贈 李檗”이라는 詩의 일부를 발췌하여 읽어보자.
七曜迭舒卷 (칠요불서권) 日月五行과 일곱 요일은 날짜와는 달리 번갈아 바뀌는 것이로다.
貴達安所羨 (귀달안소선) 부귀와 영달 같은 것을 뭐 그리 부러워하시리오.
賢豪氣相投 (현호기상투) 曠菴公은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다 갖추시었고,
令德勉早修 (령덕면조수) 어려서부터 일찍이 학문과 덕행을 힘써 닦으시니,,,. -
특히, 우리나라에서 요일(曜日)을 최초로 알리고, 천주님의 날, 主日을 처음으로 지키며 가르친 분은 광암 이벽성조였다. 더욱이 10여세 전 후(早)부터 修德에 힘썼음은 일반 가정에서가 아니고, 심산궁곡의 道場에 투신하였었음을 뜻한다.
1770년 경 광암 이벽성조께서는 16세 때 천진암에 讀書處를 정하고 天學을 연구하며 실천하자, 예를 들어 그의 사돈들인 12세의 정약전, 10세의 정약종, 8세의 정약용 등은 어린 나이에도 자주 천진암의 李檗 讀書處 道場에 와서, 勉學 修道하던 “이벽성조를 존경하고 추종하면서, 月曆과 數學, 幾何原本, 등, 아주 심오한 것까지 듣고 배웠다”고 정약용선생은 기록하고 있다.
또한 가을 단풍이야 다산의 고향 마재의 뒷동산과 앞의 검단산, 및 가까운 용문산 단풍도 훌륭한데, 1786년 天眞菴 단풍을 시로 읊었다. 조정에서 현직으로 분망한 중에도 정약용은 이하에서 보겠지만 마치 母校를 찾듯 天眞菴을 자주 찾는다. 또 종종 天眞菴의 “菴”字없이, ‘天眞’이라고만 부르기도 한다.
天眞菴 賞楓
買酒花郞坊裏(매주화랑방리) 화랑방 동네에 들어가 술을 사가지고,
停車?子峰陰(정차앵자봉음) 앵자봉 그늘에서 수레를 멈추니,
一夜纖纖白雨(일야섬섬백우) 하룻밤 부슬부슬 내린 실 이슬비에
雨厓??紅林(우안섭섭홍림) 양쪽 산 더욱 붉고 싱싱하게 물들었네.
또 정약용 자신이 얼마나 광암공을 따랐었는지는, 다산이 지은 녹암 權哲身 公의 묘지명 중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다산 자신은“李檗을 추종하였고(從 李檗), 자기 형 丁若銓은 일찍이 어려서부터 李檗을 추종하였으며(嘗從李檗), 李檗이 제일 먼저 수령(首領)이 되어 天主敎를 宣傳하고 다닐 때 權日身은 熱誠的으로 李檗을 추종하였다(李檗 首宣西敎 日身熱心從檗).”
鹿菴 權哲身의 墓地銘을 쓰면서 다산이 밝힌 이와 같은 내용을 보충하는 의미로, 順庵 安鼎福의 글을 살펴보자.
順庵 安鼎福은 權哲身과 權日身 두분 성현들에게 꽤 여러 편의 서간들을 보냈는데, 그 중에 曠菴 李檗聖祖께서, 首領이 되어 天主敎를 처음 宣布하고 다녔음을 傍證하는 내용이 있다. 順庵 安鼎福이 1784년에 權旣明(=權哲身)에게 보낸 書簡 중에,
“諸君들이 평소에는 佛敎를 배척하였었는데, 이제는 天主學에 빠져서 속수무책으로 꼼짝달삭을 못하는 것을 보면 그 天主學에 무슨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군.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을 그렇게 감동을 시킬 수 있으리오. 그래서 내가 지난 번 편지에서 그 천주학 책들을 내게 좀 가져오라고 부탁을 했던 것일세. 그런데 최근에 李德操(=李檗)가 多少間의 몇몇 天主學 책들을 품에 안고 다니면서, 자네들한테도 전도하러 찾아 갔었던 모양인데, 그 사람이 여기를 지나가면서 왜 나한테는 들리지 않았는지 그 연고를 모르겠네그려[…].”
여기서 權哲身은 權旣明으로, 權日身은 權省悟로, 李檗은 李德操로 부르고 있으며, 德操는 본래 德祖를 茶山과 順庵이 당시 그렇게 불렀었으니, 비록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지니셨으나(賢豪氣相投), 고집이 세고(다블뤼의 朝鮮殉敎史 備忘記), 또 志操가 굳세어(豪傑의 氣魄), 德祖를 自他가 德操로 불렀다. 즉 德操는, 修德을 貞操를 지키듯 志操를 가지고 마음을 잡고 계속하여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1770년 17세를 전후하여 讀書에 열중하던 광암공은 당시 관습으로 15세 전후에 결혼을 하는데, 학문 연구와 修德에 열중하기 위하여 가정의 결혼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천진암 산 속에서 天學硏究에 전념하며 천주교 계명을 실천하는데 열중하였기에, 외아들 李顯模가 태어나는 것이 1784년이니, 꼬마신랑시대의 早婚 풍습이 있던 당시로서는 양반 집에서, 더구나 병조판서 대감 權??의 딸과 결혼하였다면, 병판감의 딸을 30이 넘도록 출가를 시키지 않았을 리도 없거니와, 茶山公이, 이벽성조께서는 “일찍 어려서부터 남달리 德을 닦으셨도다(令德勉早修)”하신 것을 보면, “일찍 어려서(早)부터”의 “早”라는 漢字의 용법이 당시 10세 전후를 가르키는 것이므로(예, 早失父母),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가족들과 살면서가 아니라, 남달리 특수하게 덕을 닦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이 詩는 丁若鏞선생이 15세 때 결혼하던 해에 당시 23세의 광암공에게 지어드린 獻詩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李檗聖祖의 부인 柳閑堂 권씨가 일찍 사망하는 것도, 사위 이벽이 天主學에 미쳐서 20여세의 젊은 자기 딸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마치 생과부처럼 한맺힌 고통을 주어 생사람 죽였다하여, 장인 權??은, 1785년 乙巳迫害 때부터 천주교 박해에 적극 앞장섰던 것이다. 죽은 딸의 한을 생각하며, 사위 李檗과 天學에 대한 증오심이 가중된 것이었다.
4) 天眞菴의 李檗讀書處와 講學堂은 젊은 선비들의 天學道場이었다
1770년 경 광암 이벽성조께서는 16세 때 천진암에 讀書處를 정하고 天學을 연구하며 실천하자, 예를 들어 그의 사돈들인 12세의 정약전, 10세의 정약종, 8세의 정약용 등은 어린 나이에도 자주 천진암의 李檗 讀書處 道場에 와서, 勉學 修道하던 “이벽성조를 존경하고 추종하면서, 月曆과 數學, 幾何原本, 등, 아주 심오한 것까지 듣고 배웠다”고 정약용선생은 기록하고 있다.
이때 정약전은 12살, 정약종은 10살, 정약용은 8세였다. 이들은 10여년간 천진암의 李檗讀書處에 자주 다니며, 天學道場의 기능을 겸하던 거기서 한 때 함께 修學하였음을 알리는 詩들을 지었다.
즉, 훗날(1827년) 65세의 老人이 된 정약용 선생은 옛날 어린 시절 天眞菴에서 함께 修學하던 벗들, 곧 玄谿 令公과 石泉 翁과 季林과 聖九와 規伯 및 3 가정의 아들들과 함께 폐허가 된 천진암을 찾아왔다. 스님들은 모두 떠난 지 오래되어 아무도 없었기에, 이들은 아랫 마을 伊蒲의 안내로 3일을 머물렀다. 이때 丁若鏞 일행은 40餘首의 詩를 지어 天眞消搖集을 남겼는데, 그 중에 몇 줄을 뽑아서 현대감각으로 의역하여 읽어보자.
石徑細如線 천진암에 오르는 바윗돌 사이로 실처럼 가늘게 난 이 오솔길은,
昔我童時游 그 옛날 어린 시절 내가 와서 거닐며 노닐던 그 길인데,
重來愴客心 이제는 나그네로 다시 찾아오니 내 마음 한없이 슬프기만 하도다.
紅葉題詩處 일찍이 “붉은 잎”을 題目으로 받아 詩를 짖던 이곳을,
豪士昔講讀 이곳은 호걸(豪傑)과 명사(名士)들이 일찌기 講學하며 讀書하던 곳이지,
尙書此燒鍊 우리는 여기서 尙書를 한권씩 외운 후 불살라 물에 타서 마시며 익혔었지.
寅緣慙講德 이제 전처럼 새벽부터 德目 외우기는 부끄러워 차마 못해도(三德誦),
書帙見隨陰 산그늘따라 마음놓고 책(祈禱書,等)만은 전처럼 읽어본다오(晩課)[…]
前?凄迷不可求 옛날처럼 그대로 여기서 다시 살아볼 수 없으니, 애닲으고나.
破瓦耕?壘壘丘 집터도 耕作하려나 기와 조각은 모아다가 수북수북히 쌓았는데,
禪房無處舊人求 그 때 함께 勉學하던 禪房親舊들은 어디서도 다시는 구해올 곳이 없네.
樓前寮舍半墟丘 우리가 공부하던 누각 앞의 기숙사들은 절반이 모두 문허져 빈 터인데,
三十年來重到客 삼십년만에 지금 내가 나그네 신세가 되어 다시 찾아오니,
猶然苦海一孤舟 나는 아직도 괴로운 바다에 뜬 외로운 배 한 척의 신세로세.
嚴冬雪寒에도 天眞菴에서 10여일씩 講學會를 열던 젊은 先覺者들
1777년과 1778년 1779년에 당시 10代의 少年 선비들은 천진암에서 겨울에도 講學을 하였다. 당시에는 宗敎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天主敎도 天學이라고 불렀다. 기록자들에 따라 天眞菴에서의 겨울 講學會 개최년도를 다블뤼 주교는 丁酉年(1777년)이라 하고, 다산 丁若鏞은 己亥年(1779년)이라 하고, 丁學術의 李檗傳에서는 戊戌年(1778년)과 己亥年(1779년)이라고 적고 있는데, 결국 천진암에서의 講學會는 수차례 자주 개최되었음이 분명하다.
丁酉年을 놓고 보면 당시 정약용 15세, 정약종 17세, 정약전 19세, 이총억 14세, 이벽성조 23세, 이승훈선생 21세, 등이었다. 산너머 41세의 권철신 대학자도 관여하여,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부터 온종일 저녁까지 글을 읽고 토론을 하였으며 朱子의 性理書 76권에 나오는 敬齊箴 四勿箴 등의 글을 講學 자세 紀綱을 위하여 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강학은 練修會 성격을 띤 講學會였다.
“일찍이 기해년(1779년) 겨울에 天眞菴에서 講學이 있었을 때, 주어사는 雪中인데도 李檗이 밤중에 천진암에 이르러 촛불을 키고 經書를 談論하였다. 그후 7년(1785년), 이를 비방하는 소리가 일어나서, 다시는 그러한 강학을 더 이상 할 수 없었으니, 이른 바, 성대한 잔치는 다시 하기 어렵다는 말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그 후 7년은 명례방에 한국 최초의 천주교 박해, 즉 1785乙巳年의 秋曹摘發事件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천진암 강학”을 비방하는 소리가 생겨서 그 후 7년부터는 다시는 못했다함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7년까지는 종종 천진암 모임이 있었다는 뜻과, 그 천진암 강학, 즉 그 모임이 허구 많은 유교적인 모임이 아니라, 생소한 天學에 관한 것임을 말하고 있으니, 안산, 여주, 양근, 등에서 儒林들이 개최하는 유교적인 강학이나 모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嚴冬雪寒 深夜에 廣州山脈을 넘던 李檗聖祖의 天眞菴 講學會 參席熱誠
- 聖다블뤼 주교의 『朝鮮殉敎史 備忘記』
천진암 강학회를 기록하고 있는 또다른 역사 기록은 바로 다블뤼 주교의『朝鮮殉敎史 備忘記』인데, 그 번역원문을 직접 읽어보자.
“때는 1777년(丁酉年), 유명한 학자 權哲身이 丁若銓과 학문을 사랑하는 다른 여러 학구적인 양반들과 함께 심오한 학문연구를 위하여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거기에만 몰두하고자 어떤 절(pagode)에 들어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李檗은 기쁨으로 가득찼고, 그 뛰어난 사람들의 가르침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꺼워하며 즉시 그들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그는 밤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 무렵에 한 절(pagode)에 다다랐다. 그러나 자신이 절(pagode)을 잘못 찾아왔고, 산너머 반대편으로 가야함을 알았을 때 그가 얼마나 낙담했겠는가! 하지만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밤중에 넘어야 할 산은 거대한 산이었고, 눈더미에 덮여있었으며, 수많은 호랑이가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檗은 다른 스님들을 깨워 자신과 동행하게 하였다. 맹수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손에는 쇠를 박은 몽둥이를 들고 길을 계속하여, 짙은 어둠을 뚫고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곳에 도착하였다. 이토록 奇異한 도착은 첩첩 산 중의 한 중심(dans le sein des montagnes)에 외따로 떨어져 있으면서(isole) 폐허가 되어 못쓰는(perdu) 건물(edifice.:譯註 天眞菴을 말함)에 居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연유로 이렇게 많은 손님들이 때아닌 시각에 찾아왔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모든 것이 밝혀지자 기쁨과 환희가 두려움의 뒤를 이었으며, 그토록 즐거운 만남으로 인해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이미 날이 새고 있는 것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 모임은 열흘이 넘게 계속되었는데, 하늘과 세상과 人間本性 등에 관한 모든 문제들이 깊이 다루어졌고, 모든 의문점들과 先賢들의 의견이 논의되었다. 그들은 聖敎의 모든 戒律을 즉시 실천에 옮기기를 바랐겠지만, 당시 가지고 있던 책들이 그들을 지도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으므로, 매일 아침 저녁 엎드려 ?想에 잠기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7일마다 하루씩 天主께 바쳐진 날 主日이 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보아 알게 되자, 매달 음력으로 7일, 14일, 21일, 28일에 모든 세상일을 중단하고, 靈魂 修練에 대해 생각하면서 小齋 즉 禁肉齋를 지켰다.”
여기서 ‘l'edifice isole et perdu’란 외따로 동떨어져 있고, 폐허가 되어 쓰지 않는 凶家나 廢家屋을 의미하는데, 茶山 丁若鏞 先生은 그후 天眞菴을 찾아와 지은 詩에서, “寺破無舊觀, 즉 천진암 절간은 그나마 다 무너져서 옛 모습이 없구나!”라고 하고 있다. 또, 당시에 저술된 洪敬謨(1774~1851)의 『南漢志』에서도, “天眞菴은 鶯子山에 있는 오래된 헌 절인데 지금은 製紙工場이 있어 司饔院에서 관리하고 있다(天眞菴在鶯子山 爲古寺 造紙物 今屬司饔院)”라고 말하고 있다. 거의 동시대에 茶山도, 다블뤼 주교도, 洪敬謨도 모두 天眞菴은 폐허가 된 옛 헌 절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講學 당시 天眞菴은 鶯子山 서북쪽 한 중심 계곡에 하나뿐인 거의 쓰지 않아 폐허가 되어가는 시설물이었다.
정약용이 기록한 기해년(1779년)의 講學會나, 다블뤼주교가 기록한 정유년(1777년)의 講學會나 모두 한겨울에 폭설이 덮힌 앵자산을 이벽성조께서 힘들게 넘으셨다는 것을 보면, 講學은 폭설이 내리기 전에 시작했던 것이고, 또 폭설로 기간이 더 길어졌을 수도 있다. 또, 광암공이 道場을 차리고 있는 天眞菴에 曠菴이 으레 있으리라 믿고 모두 모였을 수도 있었겠으나, 광암공이 뜻밖에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기 보다는 이왕에 왔으니, 講學은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녹암 권철신에게 공부할 겸 무슨 가르침을 들으러 정약전 이승훈 등이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權哲身 嘗於冬月 寓居走魚寺 […] 執贄請敎於鹿菴之門[…]) 曠菴公은 權哲身이 잠시 寓居하던 주어사로 갔다가 허탕을 치고, 다시 앵자산을 넘어 천진암으로 왔던 것이다. 당시 권철신의 명망으로 봐서도, 또 장유유서상 녹암 권철신이 와 있다는데 광암은 첫 번째 도착한 절간에 그냥 누어서 잘 수가 없는 것이다. 天學 공부와 天主敎 신앙의 열성으로 嚴冬雪寒에 숨박꼭질을 하면서 廣州山脈을 넘나들던 젊은 선비 광암공의 열의와 노력에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李檗聖祖께서는 1770년부터 1783년까지 산속 隱遁處에서 天學 硏究와 實踐에 專念
-풀로피낭 대신학교 역사 교과서 "Compendium Historiae Ecclesiae"-
천진암 강학회에 대한 기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자료에서도 발견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인 1885년 Pullo-Pinang의 『天主敎大神學校 歷史 敎科書』와 1911년에 英國 Longford 교수가 집필하여 발행한 『The Story of Korea(鷄林八道誌)』이다. 曠菴 李檗聖祖를 중심으로하는 自發的인 天主敎 硏究와 講學會 개최 및 信仰實踐 試圖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Pullo-Pinang의 교과서는 李檗, 丁若銓, 權哲身, 등의 天學 硏究期間을, 1770년부터 10년간으로 밝히고 있다,
“그 당시 조선의 일부 博士들은 조용한 산골에서 隱遁생활을 하면서 哲學 연구에 몰두하였고, 그 중에 널리 알려진 가장 저명한 학자 중에는 李檗이라고 부르던 李德祖와 權哲身, 丁氏네 형제들, 특히 丁若銓과 丁若鏞, 등이 있었다. 이들은 人間本性과 하늘과 땅에 대한 갖가지 의문을 던지고 답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서적들을 섭렵하기 시작하였다. 사람의 영혼과 德行과 惡習과 神의 攝理에 대한 천주교 교리가 매우 합리적이고 훌륭하다고 판단하고 나서, 즉시 자신들의 생활관습까지도 십계명 같은 하느님의 계명에 맞게 일치시켜 살아나가도록 결정하고 실천하였으니, 이는 1770년경부터였다.”
Longford 교수는 李檗 丁若銓 등이 隱遁處에서 天學硏究와 修練에 몰두하였던 기간은 1770년부터 1783년까지 ‘13년’간으로 斷定하여 記述하고 있다.
“1720년에 朝鮮 使臣이 北京에 와서 선교사들과 많은 對話와 討議를 하였고[…] 그들이 사가지고 간 책들을 50년간 조선의 양반 학자들이 단체별로 읽고 토론하게 되었으며, 그들 중에는 남은 일생을 그 교리대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이들도 있었고, 그 중에 훌륭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조상대대로 벼슬에까지 올랐던 집안의 한 젊은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李檗이라는 분이고, 별명이 “돌로 된 담벼락”이라고 하였다. 李檗은 1783년 이승훈을 北京에 파견할 때까지 13년간 천주교 교리를 깊이 연구하며 실천하여 거기에 아주 깊이 深醉되어 있었다.“
광암 이벽성조를 주축으로 이렇게 천주교 신앙실천운동을 하던 천진암의 공동체가 세례를 받아오도록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다블뤼주교의 기록, 모방신부의 편지 등에서 보았었다. 특히, 이 파견은 단 한번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조선천주교회역사의 독특한 특징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즉, 다블뤼 주교는 “李檗이 여러 해동안 갖가지 시도와 노력을 하였으나, 모두 虛事였고([…]plusieres annees[…]infructuoses[…]), 李承薰先生 파견의 경우 성공을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聖 모방신부도 “또 다른 代表者(un autre delegue)로 이승훈을 보냈다”는 말, 특히 [다른 代表者]라는 문장의 앞뒤에서 “[…]autre(다른)[…]autre(또 다른)[…]autre(또 다른)를 3번씩이나 이어서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여러번 사람들이 왕래하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代理者(representant)”가 아니라, 한 組織的인 團體의 “代表者(delegue)”라는 말은 외국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天主敎信仰人들의 共同體가 있어서 이를 代表하는 資格을 주어 보내었다는 뜻이다. 이는 교회창립 면에서의 독특성과 함께, 세계 宗敎史에 없는 실로 감탄할만한 역사이다.
韓國天主敎 發祥地 天眞菴의 來歷
그러면 광암이벽성조의 讀書處가 있었고, 젊은 선비들이 자주 모여서 약 10여년 간 修學하고 講學을 하던 天眞菴에 관하여 살펴보자.
천진암은 本來 檀君影幀 天眞을 모시고 山祭祀, 堂山祭, 山神祭 등을 올리던 天眞閣 혹은 天眞堂이라는 작은 草家 堂집이 오랜 세월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며, 훗날 天眞菴이 되어, 1779년을 전후하여 廢刹이 되어가고 있었으니, 丁若鏞 선생의 글에, “天眞菴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없다(寺破無舊觀)”하였고, 1797년 丁巳年 당시 洪敬謨의 南漢志에서는, “天眞菴은 오래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司饔院에서 관리하고 있다(天眞菴爲古寺造紙物今屬寺饔院)”고, 사찰로서의 기능을 言及하지 않고 있으며, 聖다블뤼 主敎는 젊은 선비들과 함께 李檗선생이 講學을 하던 곳은, 쓰지 않는 廢家이었다(isole et perdu)고 1850년경에 기술하였다.
1779년 당시 李檗 聖祖 25세, 丁若鏞 17세, 丁若鍾 19세, 丁若銓 21세, 李承薰 23세, 李寵億 15세, 權哲身 43세, 등 주로 10代와 20代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당시 아주 생소하고 특이한 天主敎 책을 읽고 실천하는 일을, 일반 儒敎 書堂에서나 正常的인 사찰에서, 또는 일반 가정에서는 하기 어려우므로, 다블뤼 주교의 기록대로, 폐허가 되어가는 天眞菴에서는 여럿이 모여 함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pour s'y livrer ensemble a des etudes profondes), 天主敎眞理를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었으니, 天眞菴은 바로 儒?佛?天이 合流한 곳이고, 朝鮮天主敎會가 시작된 韓國天主敎 發祥地이다. 그런데 丁若鏞 선생은 종종 [天眞菴]에서 [菴]子를 빼고 그냥 “天眞”이라고만 부르기도 하였으니, “共詣天眞” 또는 “天眞之遊”, “天眞消搖集” 등에서도 볼 수 있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자이신 曠菴 李檗 聖祖께서 천진암을 根據地로 활동하신 바가, 丁若鏞 선생의 글에도 보이는데, “己亥年(1779년)에 天眞菴에서 講學을 할 때(己亥冬講學于天眞菴), 李檗이 밤중에 와서 여럿이 촛불들을 밝히고 經書를 談論하였으며(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
그후 “丁巳年(1797) 端午날에 둘째 형님(丁若銓)과 天眞菴에 와보니, 李檗의 讀書處, 곧 이벽의 修學 道場 건물이 아직도 그저 있구나(端午日陪二兄遊天眞菴 李檗讀書猶有處)”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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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년 65세로 천진암을 찾은 茶山은,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갖춘 李檗 聖祖께서 講學하시고 讀書하시던 天眞菴의 講學堂, 讀書處, 寄宿舍 등이 암자와 함께 폐허가 되어 이미 농경지화함을 못내 서글퍼하였다
(賢豪氣相投/豪士昔講讀/尙書此燒鍊/樓前寮舍半處丘/寮院無逾?/荒寮草色深/破瓦耕?疊疊丘).
이렇게 천진암 1770년부터 1784년초까지, 약 15년간 젊은 선비들이 자주 모여서 독서와 강마(講磨)에 열중하던 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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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한국천주교회 創立史에 관한 역대 로마 교황님들의 문헌.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사에 관계된 역대 로마 교황님들의 언급을 경청하기 전에 먼저 교황님의 위치에 대한 상식이 필요합니다.
로마 교황은 지상에 있는 전 세계 약 12억만명 신자들과 40여만명 성직자들의 代表者가 아니라,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의 地上 代理者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로마 교황께서 敎皇座에서 敎義나 敎理와 倫理에 관하여 선언하시는 바는 無謬性(infallibilitas)을 지니고 있어서, 천주교 신자들은 이에 承服해야 한다. 또한 敎理와 倫理가 신자생활에 직접 관련되고 반영되는 司牧的인 말씀이나 言及에 대하여도 順從할 의무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황의 유권적 교도권에 대하여는, 비록 교황좌에서 말하지 않을 때에도, 특별한 이유로 의지와 지성의 이 종교적 순종을 드러내어야 합니다.(Lumen Gentium 25항).
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에 관한 로마 교황의 말씀을 最近의 언급부터 시작하여 과거로 돌아가면서 몇가지만 추려보기로 합니다.
(1) 1993년 9월 2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친필 서명 문장.
로마 요한 바오로2세께서는 천진암 성지에 건립되는 새 성당 건립을 위한 머릿돌에 교황 강복문을 손수 작성하시어 친필 서명하시어, 당시 주한 교황대서 죠반니 블라이티스 대주교를 통하여 보내셨습니다.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의 새 성전 머릿돌에 교황 강복을 베부노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온 겨레가 영구히 화목하기를 비노라.
1993년 9월 21일, 교황요한바오로 2세.
원문:PRIMARIO NOVAE AEDIS LAPIDI
IN URBE CHON-JIN-AM
ECCLESIAE SACRO NATALI LOCO IN COREA
APOSTOLICAM IMPERTIMUS BENEDICTIONEM
GREGI ILLI CONCILIATRICEM PERRENNIS DEI FAVORIS.
XXI SEPT. MCMXCIII
Joannes Paulus II <친필 서명>
한국을 다녀가시고 나서 10여년 후, 한국천주교회사를 잘 아시고 하신 말씀이다.
즉 천진암 성지를 한국천주교 발상지로 공인하시며 강복하신 말씀입니다.
(2) 1984년10월14일,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로마 베드로대성당 공식강론.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 첫 축일 교황 주례 이 대미사는 한국의 김수환 추기경님을 비롯한 모든 한국 주교님들과 대부분의 프랑스 주교님들의 공동 미사 중이었습니다. 다음은 요한바오로2세의 공식 강론 첫머리 발췌 부분입니다.
여러 교황님들 중에 가장 최근의 대교황 요한바오로2세의 말씀이 장소와 연도에 이르기까지 가장 정확하여 이를 소개하고, 다른 교황님들의 대동소이한 언급은 책자에서 보다 상세히 첨부하기로 합니다.
“1. “하늘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마태22장 2절). 이 특별한 잔치에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는 땅 위에 있는 모든 겨레와 나라들을 초대하십니다.
한국 민족은 2세기 전에, 여기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지난 5월에, 본인은 한국에 가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제를 거행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한국 민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 신비로운 잔치 초대에 비상한 관심과 최선의 건설적인 노력으로 응답하였으며, 그 상급으로 한국교회 신자 공동체의 오늘과 같은 찬란한 꽃을 피울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국에 천주교 신앙이 시작된 것은 세계 교회 역사상 유일한 경우로서,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된 것입니다. 신앙을 향한 한국인들의 줄기찬 노력은 정말 고맙게도 몇몇 평신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민족 구원의 이러한 역사는, 바로 진리탐구로 향하는 인간 이성의 본성적인 열망이 영원한 구원을 얻는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실상 진리 탐구에 충실한 한국의 저 평신도들 -즉, 한국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모임인 한 단체는- 중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당시 북경천주교회와의 접촉을 과감히 시도하였고, 특히 새로운 교리서적들을 읽고, 그들 스스로가 알기 시작한 생소한 신앙에 관하여, 자기들을 밝혀줄 수 있을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남녀 이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fondatori)」이라고 해야 하며,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 없이 -비록 2명의 중국인 사제들이 잠시 있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1836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이하 생략).“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1984년 10월 14일 주일에,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한국, 프랑스 주교들 및 2만여명의 전 세계 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하신 한국 순교성인 103위 시성 경축 미사 때 하신 강론 첫머리이다. (L'Osservatore Romano 紙 1984년 10월 15일자 1면 참조.) 교황강론 전문은 이태리어와 불어로 당일 게재한 L'Osservatore Romano 紙 1984년 10월 15일자의 내용이 한국어와 함께『천진암』제 24호에 실려 있습니다.
(3) 1968년 10월 7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한국순교자 24위 시복식 중에 교황 바오로6세 성하의 공식 강론 내용과 1925년 7월 5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조선 순교자 79위 시복식 중에 비오11세 교황께서 하신 두 강론은 모두, 시복되는 79위와 24위에 관해서보다도, 선교사없이 성직자 없이 천주교회를 세운, 조선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眞理探究 精神과 眞理傳播의 熱誠, 및 眞理守護를 위한 용감한 殉敎精神을 격찬하는 내용이 강론의 첫 머리부터 시종일관 충만하여 있습니다.
특히, 1925년 7월 5일의 79위 시복식을 계기로 당시 L'Osservatore Romano紙의 제 1면 중앙에서 강조하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 특히 이벽성조의 강학회를 통한 복음선포를 특별히 강조하여 크게 알리고 있음은 로마 교회가 교구설정이전부터 한국천주교회의 기묘한 출발에 대하여 그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1831년 조선교구 설정에 있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조선교구 설정문에서는 “확실한 지식과 심사숙고한 후에,,,” 조선왕국에 교구를 설정한다는 내용을 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Motu igitur proprio atque ex certa scientia et matura deliberatione Nostris, deque apostolicae potestatis plenitudine, vi praesentium literarum apostolicarum, Coreanum regnum in novum vicariatum apostolicum nunc pro tunc erigimus, et in vicarium aposolicum constituendum ab episcopo Pekinensi omnino independentem declaramus,,,,(Ad perpeuam rei memoriam. Gregorius PP.XVI. 1831. die 9. Septembris)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사에 관하여 로마 교황님들의 정확한 지식과 확신은 최근 요한바오로2세에 이르러 보다 구체적으로, 장소와 연도에까지 공인하여 선언해주시게 된 것으로 하루 아침에 돌발적으로 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추가:
“發祥地(locus natalis”라는 단어의 본 뜻은 祥瑞로운 氣運이 발하기 시작한 곳임을 의미하는 단어로, 일단 탄생된 아기가 자라는 이른 바 “요람(搖籃)”보다는 先行하는 의미의 개념입니다. 초대교회 때, 처음으로 “그리스도 신자들(christiani)"이라고 불리어지던 안티오키아를 ”그리스도교의 요람(Berceau de l'Eglise Chretienne)"이라고 하였는데, 그곳이 요르단 강가나 예루살렘처럼, 그리스도교의 발상지는 아니었듯이, 처음으로 천주교신자들이 많이 생긴 마을이었던 양근이나 마재를 한국천주교회의 요람 중 하나로 부를 수는 있어도, 發祥地라고 함은 맞지 않는 것입니다.
“深山窮谷 한 복판의 외딸고 동떨어진 곳에 있던 폐허가 된 건물”(L'edifice isole perdu dans le sein des montages), 즉 天眞菴 庵子에서 李檗의 저 위대한 講學이 있었음을 다불뤼 주교는 밝히고 있고, 정약용 선생의 여러 詩文集과 정학술의 李檗傳에서는 아주 보다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재나 양근은 이러한 장소 설명에 맞지 않을뿐더러, 실제로 讀書處 겸 勉學 道場이 장기간 자리잡기에는 여러 여건이 안 맞는 어려운 곳들입니다.
지금까지 발굴, 수집, 확인된 자료들을 종합 정리하여보면, 이벽 광암 공은 15세 되던 해, 즉 1770년에 이미 天眞菴에 入山하여 讀書를 시작하였고, 이 道場에서 7년 후 쯤부터는 친지들에게도 알려지면서 소년 선비들이 출입하기 시작하여, 1778년 경부터는 때로 저명한 권철신 같은 대학자까지 참석하는 講學會도 있었으며, 특히 丁氏, 李氏네 자제들을 비롯하여 道友가 衆徒를 이루어 曠菴 공을 웃어른으로 삼고(爲上), 勉學 修己하던 [少林], 혹은 [叢林]이 형성되어, [聖敎要旨] 등을 下筆하였으며, 천진암에서의 天學 운동은 1784년 초까지 계속되었다. 천진암은 祥瑞로운 기운이 發한, 한국천주교회의 발상지입니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에 관하여, 특히 이벽성조와 천진암 성지에 관하여는 천진암 성지에서 발행된, [간추린 우리나라천주교회 창립사]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역사적 현상이나 사실은 갑자기 돌출하는 것이 아니라, 先後, 左右, 上下, 內外의 모든 요소들이 서로 상호보완적인 기능을 하면서 이루어내게 되어 있기에, 역사학도는 항상 종합적으로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끝Msgr. Byon
등록일 : 2007-11-14 (1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