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의 뿌리
김학렬/천진암 성지 주임신부
시작하는 글
제1부 강학의 장소는 어디인가?
제2부 강학의 내용과 성격은 무엇인가?
마치는 글
시작하는 글
때가 다 되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오 4,16).
조선의 건국이념이었던 성리학은 주자학으로서 조선의 통치 이념으로 이용하기 편리했던 무신론이었다. 선유(先儒)로부터 전해진 전통대로 조상들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기는 하지만, 혼백산화론에 의하여 영혼의 불멸도 인식하지 않았다. 내세의 상벌론도 인정하지 않는 현세보응론이 지배하여,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하는 현세가 전부였다.
이 때 중국에서 들어오는 서학서들을 읽으며 조선사회는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특히 ‘천학초함’(1629년에 이지조가 편찬)에 들어있는 ‘천주실의’와 ‘칠극’, ‘직방외기’ 등을 읽으면서 유신론을 회복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이제까지 유학의 경전(시, 서, 예, 역) 속에서 어렴풋이 살아계신 하느님을 느끼고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학문적 발전의 자양분을 공급받지 못하자, 기원후 1천년 경에는 실천적인 무신론이 자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학풍은(성리학, 주자학, 양명학) 그대로 조선사회에서 연구되고 실천되어 왔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들은(안정복, 신후담 등) 조선 통치의 이념인 성리학에 묶이어, 자신의 지식 이외에는 모든 것을 이단으로(양명학까지) 여기는 현세중심의 논리로, 천주교를 현세는 버리고 내세의 보상을 바라는 이기주의 라고 비판하였다. 반면에 중국에서 들어온 서학서의 내용들을 신앙의 씨앗으로 받아들인 조선 사람들이 있었다.
마태오 릿치(1552~1610) 신부가 적응주의(Adattamento, Adapt, 보유론)적인 논리로 전개한 책이 ‘천주실의’이다. 그 중요한 내용은 요순시대(기원전 2300년)의 상제(上帝, 하느님) 섬기기를 회복한 유신론이다. 조선후기에 이벽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이런 책으로 스스로 신앙 탐구의 노력을 기울이던 중, 권철신과 그 제자들이 이런 노력과 연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것이 바로 ‘천진암주어사 강학’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천진암주어사 강학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아보자. 아래 사료 B 녹암 권철신 묘지명에 나오는 1779년의 <講學于天眞菴走魚寺 강학우천진암주어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해석과 함께 상반된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ⅰ> 천진암에서 강학이 있었고, 이는 천주교 신앙모임이었다는 주재용과 변기영의 주장이다.
ⅱ> 주어사에서 강학이 열렸고, 천주교 신앙모임이었다는 최석우의 주장이다.
ⅲ> 어느 절에서건 상관없이 천주교 신앙모임이 아니었다는, 박석무를 중심으로 한 일반 사학자들의(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도 동조) 주장이다.
당대의 분위기로 들어가기 위하여 앵자봉 주변의 지도를 앞에 놓고 이를 알아보자.
<이벽이 ‘于천진암주어사’를 방문하기 위해 이동한 경로.
- 1번과 2번(■■■■■)이 변기영의 주장이고, 3번(■■■■■■■)이 최석우의 주장이다.>
제 1 부 강학의 년도와 장소는 어디인가?
가. 강학에 관한 사료
▣ 사료 A <선중씨(정약전) 묘지명, 여유당전집 제1집, 시문집 권 15 = 1816년에 기록 >
旣又執贄請敎於鹿菴之門(權哲身) 嘗於冬月寓居走魚寺 講學會者 金源星 權相學 李寵億 等 數人 鹿菴自授規程 令晨起掬氷泉盥漱 誦夙夜箴 日出誦敬齊箴 正午誦四勿箴 日入誦西銘 莊嚴恪恭 不失規度
<(정약전이) 얼마 뒤에는 다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門下)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언젠가 겨울에 주어사(走魚寺)에 임시로 머물면서 학문을 강습하였는데, 그때 그곳에 모인 사람은 김원성·권상학(權相學)·이총억(李寵億) 등 몇몇 사람이었다. 녹암이 직접 규정(規程)을 정하여 새벽에 일어나서 냉수로 세수한 다음 숙야잠(夙夜箴)을 외고, 해 뜰 무렵에는 경재잠(敬齋箴)을 외고, 정오(正午)에는 사물잠(四勿箴)을 외고, 해질녘에는 서명(西銘)을 외게 하였는데, 장엄(莊嚴)하고 각공(恪恭)하여 법도를 잃지 않았다.> (고전번역원)
▣ 사료 B <녹암 권철신 묘지명, 여유당전집 제1집, 시문집 권 15 = 1822년에 기록>
先兄若全執贄以事公 昔在己亥冬講學于天眞菴走魚寺 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 其後七年而謗生 此所謂盛莚難再也.
<선형(先兄) 약전(若銓)이 공(권철신)을 스승으로 섬겨 지난 기해년 겨울 천진암(天眞菴)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講學)할 적에 이벽(李檗)이 눈오는 밤에 찾아오자 촛불을 밝혀 놓고 경(經)을 담론(談論)하였는데, 그 7년 뒤에 비방이 생겼으니, 성대한 자리는 두 번 다시 열리기 어렵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고전번역원)
▣ 사료 C <모방 신부의 1838년 편지>
Extrait d’une lettre de Mr Maubant miss. Ap. en Corée à Mr Langlois Superieur du Seminaire des Missions Etrangères Yangtchi 3 Xbre 1838.<자료수집 확인 : 최승룡 신부> :
“[…]Nous avons pu cette année nous procurer secrètement des notes manuscrites sur l’établissement de la Religion Chretienne en Corée. Elles diffèrents peu de celles que j’avais composèes d’après la tradition orale,,,,,En 1720 la 58e annèe du fameux Kanghi, un autre ambassadeur Corèen nommé Y eut une entrevue avec les Missres. de Pekin et reçut d’eux des livres Chretienne qu‘il emporta en Corée. Un nommé Koang, qui reçut le surnom de Jean, ayant lu ces livres, eut le bonneur de sentir et de gouter les verités qu’ils renfermaient. Il embrassa la religion Chretinne et de concert avec quelques autres prosélytes il envoya en 1783 à Peking un autre délégué égalemant nommé Y, mais d’une autre famille, pour prendre de plus amples informations sur cette religion sainte. Y s’adressa aux Missres. français et en fevrier 1784 fut baptisé, sous le nom de Pierre[…]”
한국 선교사 모방 신부가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교장 랑글로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 양지에서 1838년 12월 3일.
[금년에 우리는 조선에 그리스도교의 設立에 관하여, 손으로 기록한 備忘錄을 비밀히 관리하도록 받을 수가 있었는데, 口頭로 듣던 바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1720년, 중국 年號로 저 유명한 康熙 58년에, 북경에 다녀온 使臣 李公(李頤命)이 서양 선교사들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책들을 구해 읽은 광이라는 사람(曠菴 李檗)은 후에 요한이라는 교명을 가진 분입니다. 이 사람이 천주교 교리에 同感하고 深醉한 나머지, 천주교를 全心으로 받아들였고, 몇몇 다른 改宗者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1783년에 또 다른 가문 출신의 같은 성을 가진 이(승훈)를, 이 거룩한 종교에 관하여 더 많이 알아오도록, 또 다른 代理者로 北京(프랑스 선교사들)에 파견하였습니다. 이(승훈)은 1784년 2월에 베드로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고 오게 되었습니다.”]
▣ 사료 D <Daveluy 주교의 「조선순교자 비망기」>
C’était en l’année 1777(ting iou). Le fameux docteur Kouén T’siel sini accompagné de Tieng Jak Tsieni et plusieurs autres nobles studieux et amateurs de la science se rendit dans une pagode pour s’y liver ensemble à des études profondes.
Ni Pieki l’ayant appis en fut rempli de joie et heureux de pouvoir profiter des leçons de ces hommes remarquables il prend de suite son parti d’aller les trouver. C’était l’hiver. La neige couvrait partout les routes et la distance était de plus de cent lys: mais de pareils obstacles étaient loin de pouvoir arrêter ce coeur ardent et si avide de la science et de la sagesse, Il part de suite à travers ces chemins difficiles et ardus il ne sent pas la fatigue. Le jour tombant ne peut le déterminer à retarder la réalisation de ses désirs et continuant sa route de nuit il parvint enfin à une pagode vers minuit. Quel n’est pas son désappontement en apprenant qu’il s’est trompé de pagode et qu’il fallait aller de l’autre côté de la montagne. Sans se décourager il pousse sa pointe. C’est une énorme montagne qu’il faut franchir de nuit. Elle est couverte de monceaux de neige et des tigres nombreux en défendant les abords. N’importe! Pieke fait lever tous les bonzes et se fait accompagner par eux. A la main il prend un bâton ferré pour se défendre des attaques des sauvages ennemis et poursuivant sa route à travers les épaisses ténèbres. Il arriva enfin au lieu si désiré. Une arrivée si éteange répandit la frayeur parmi les habitants de cet édifice isolé et perdu dans le sein des montagnes. On ne pouvait se figurer quel motif amenait a une heure si indue des hotes si nombroux: mais bientot tout s’etant eclairci la joie le bonheur succederent a la crainte et dans les epanchements suggeres par une rencontre si heureuse on s’appercut a peine que dejia le jour avait point.
때는 1777년(정유), 유명한 학자 권철신이 정약전과 그밖에 학문을 좋아하고 학구적인 여러 양반들을 데리고 함께 깊은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한 절로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이 기쁨에 넘쳤고, 또 그 유명한 사람들의 강의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며 즉시 그들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하였다. 때는 겨울이었다. 눈이 곳곳의 길을 덮었고, 거리도 100여 리나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들이 그렇게도 학문과 지혜를 열망하고 탐내는 그의 마음을 저지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즉시 떠났고, 길들이 힘들고 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칠 줄을 몰랐다. 또 해가 저문 것도 그의 욕망의 실현을 지연시키게 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는 밤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 무렵에 한 절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절이 틀렸고, 또 그 산의 다른 편으로 가야 함을 알았을 때, 그의 실망은 어떠하였을까. 그러나 그는 길을 단호히 계속하였다. 그가 밤에 넘어야 할 산은 거대한 산으로, 눈더미로 덮여 있었고, 많은 호랑이들이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상관없다! 벽은 모든 스님들을 깨워 자기와 동행하게 하였다. 맹수의 습격을 막아내기 위해 그는 손에 쇠방망이를 들고 캄캄한 밤중에 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그렇게 바라던 장소에 도착하였다. 이처럼 이상한 도착은 산속에 외따로 파묻혀 있는 그 건물의 거주자들에게 두려움을 퍼뜨렸다. 무슨 이유가 이렇듯 많은 손님들을 때 아닌 이런 시각에 오게 하였는지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모든 것이 밝혀져, 공포가 기쁨과 행복으로 변했고, 이렇듯 다행한 만남으로 인한 심정을 토로하는 가운데, 벌써 날이 샌 것도 미처 모르고 있었다.
▣ 사료 E <Dallet 신부의 「韓國天主敎會史」>
En I’année tieng-iou(1777), le célèbre docteur Kouen Tsiel-sin-i, accompagné de Tieng Iak-tsien-i et de plusieurs autres nobles désireux d’acquérir la science, s’était rendu dans une pagode isolée pour s’y livrer avec eux, sans obstable, à des études approfondies. Piek-i, l’ayant appris, en fut rempli de joie, et forma aussitôt résolution d’aller se joindre à plus de cent lys de distance. Mais ces difficultés ne pouvaient arrèter un coeur aussi ardent. Il part à I’instant même, il s’avance résolûment par des chemins impraticables. La nuit le surprend à une petite distance du but de son voyage. Il ne peut se déterminer à attendre plus longtemps, et continuant sa route, arrive enfin vers minuit à une pagode. Quel n’est pas, alors, son désappointement en apprenant qu’il s’est trompé de chemin, et que la pagode qu’il cherche est située sur le versant opposé de la montagne! Cette montagne est élevée, elle est couverte de neige, et des tigres nombreux y ont leur repaire. N’importe, Piek-i fait lever les bonzes et se fait accompagner par eux. Il prend un bâton ferré pour se défendre des attaques des bêtes féroces, et poursuivant sa route au milieu de ténèbres, arrive enfin au lieu désiré. L’arrive de Pieki et de ses compagnons repandit d’abord la frayer par mi les habitants de cette demeure isolee, et perdue au milieu des montagnes.
정유(1777)년에, 유명한 학자 권철신은 정약전과, 학식을 얻기를 원하는 그 밖의 학자들과 함께, 방해를 받지 않고 깊은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외딴 절로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은 크게 기뻐하며 자기도 그들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때는 겨울이라 길마다 눈이 덮여 있었고, 절까지는 백 여리나 되었다. 그러나 그런 곤란이 그렇게도 열렬한 그의 마음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즉시 출발하여,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길을 용감하게 걸어갔다. 그의 여행 목적지까지 얼마 안 되는 거리에 갔을 때 밤이 되었다. 그는 더 오래 기다릴 수가 없어서, 내쳐 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께 어떤 절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과 자기가 찾아가는 절은 그 산 뒤쪽 산허리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실망은 어떠하였겠는가. 그 산은 높고 눈이 쌓이고 호랑이 굴이 많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이)벽은 스님들을 깨워 자기와 동행케 하였다. 그는 맹수의 습격을 막아 내기 위하여 쇠꼬창이가 달린 몽둥이를 짚고서 캄캄한 밤중에 길을 계속하여 희망하던 목적지에 도달하였다. (이)벽과 그 일행의 도착은 산 속에 파묻힌 고적한 그 곳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한국천주교회사」상, 300~301면)
▣ 사료 F <권철신 간찰>
甲(午)年 元月 二十一日, <金郞源星遠來讀書 文學比前多進 >
丙(申)年 五月 二十四日, <士興亦無事 其子方來學鄙所耳 存昌者亦隨來 做古風製才 頗有之可喜 --- 此亦書室來學者 十許童 才氣無過 甲壽者 愼勤師之>
나. 사료 분석
사료 E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사료 D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를 원본으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역사의 원칙에 따라서, 같은 내용을 지닌 달레의 기록은 여기서 참고 사료로 활용이 가능하나, 조금이라도 다른 내용이나 단어가 나올 때에는 다블뤼의 비망기 기록이 우선한다. 왜냐하면, 역사의 진실성을 밝히는데 있어서는, 시간과 공간상으로 더 가까운 것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위의 6가지 사료중, 다산의 2가지 앞선 기록은 2차원의 성격을 지닌 글로서 이 자료들을 종합할 때 강학장소를 확인하는데 유용하다. 다블뤼의 기록을 근거로 한 뒤의 2가지 자료는 삼차원적인 성격으로서, 그 동선(動線)을 확인하며 이벽이 참가한 최종 목적지를 확인할 수가 있다. 달레의 기록은 다블뤼의 비망기를 거의 다 그대로 옮겨 놓으면서 몇 가지 단어들만 바꾸어 놓은 상황이므로, 앞의 역사원칙에 의하여 생략하여도 무방하기에, 사료를 5가지로 압축하여도 된다.
<도표1 강학 당시의 상황>
사료명 |
년도 |
강학장소 |
강학회자 |
환경 |
강학내용 |
비고 |
A.
선중씨
정약전 묘지명 |
嘗於冬月
일찍이(嘗)
(정유년?) |
주어사 |
권철신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수인 |
冬月:겨울 |
誦
숙야잠,
경재잠,
사물잠,
서명 |
100리 길 |
B.
권철신
묘지명 |
己亥冬
(1779년) |
천진암
주어사 |
권철신,
정약전,
이벽 |
雪中夜
눈오는 밤 |
張燭談經
경을 담론 |
|
D.
다블뤼
비망기 |
정유년
(1777년) |
두 절
(천진암
주어사) |
권철신,
정약전,
이벽 |
눈길
자정 |
철학서
종교서 |
100리 길
10일 동안 |
F.
권철신
간찰
(홍유한
에게) |
갑년
(1774년)
병년
(1776년) |
권철신
서실 |
김원성
이총억
이존창
갑수
등 10명 |
한적한 곳 |
착한 아우 (권일신)과 함께 |
위의 도표1을 퍼즐처럼 생각하면서 조각들을 맞추어 갈 때, 사료 A와 B는 그 모양이 전혀 맞지를 않는다. 강학의 년도와 장소, 강학회자와 강학내용 등 맞는 곳이 한 곳도 없다. 이는 곧 A 선중씨 묘지명에 나오는 주어사 강학과 B 권철신 묘지명에 나오는 천진암주어사 강학이 서로 다른 강학이었음을 나타내고 있으나, 많은 연구자들이 이 두 강학을 하나의 같은 강학으로 착각하는 데서 오해가 시작되고 있다.
반면에 사료 B와 D는 강학 년도 외에는 모든 것이 일치한다. 이는 최석우의 논증 복수 제시의 원칙에 부합하므로 같은 천진암주어사 강학이다. 강학장소와 강학회자, 그리고 한 밤중의 눈길 등이 정확히 다 들어맞는다. 이는 곧 D 다블뤼의 기록이 B 권철신 묘지명의 강학 기록을 다 알고 썼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A 주어사 강학에서 표현된 嘗(일찍이)은 언제인가?
A 주어사 강학회자들의 이름은 F 권철신 간찰에 나오기 시작한다. 권철신은 1774년에 김원성을 제자로 삼았고, 1776년에는 이기양(사흥)의 아들인 이총억과 그의 친구 이존창, 갑수 등 10여 명을 제자로 맞아들였다. 홍낙민도 1776년에 당숙인 홍유한의 소개로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이런 사실은 1776년을 전후하여 이루어진 ‘녹암계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녹암계의 인물로 이승훈과 이윤하, 윤유일과 이벽, 정약용과 권상학 등이 있다. 그중 이승훈과 정약전, 이윤하 같은 경우에는 서로 석교(石交)를 맺고 1779년 이전부터 권철신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결국 녹암계의 이런 인물들이 천주교 수용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권철신도 1776년을 전후로 서학에 관하여 집중하기 시작하였고, 이미 천주교 교리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바로 이 무렵에 정약전도 녹암계에 합류하였으리라고 여겨진다. 이벽 또한 이때에 이미 천진암에서 천주학을 공부하고 있었으므로, 결혼 인사차 이벽을 찾아온 정약용은 1777년에 증이벽이란 시를 남기고 있다.
그러므로 1777년을 전후로 하여 권철신이 자기 집에서 오기 편리한 주어사에서 강학이 열릴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 이 주어사 강학이 있던 때를 다산은 그냥 일찍이(嘗)라고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A 주어사 강학은 D 다블뤼가 서두에 적은 정유년에 있었다고 보는데 큰 무리가 없다. 부족한 부분은 추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나, 부족한 부분은 퍼즐 속에 무리 없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A 주어사 강학은 D 다블뤼가 간지로 기록한 정유년에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필자의 견해는, 다블뤼가 A 선중씨 묘지명도 B 권철신 묘지명도 다 알았다고 보는데, 이 두 묘지명의 내용을 기술하던 중, A 주어사에서 있었던 강학을 1777년으로 시작하고 나서, 그 소식을 듣고 난 다음에 이벽이 찾아가는 1779년의 B 천진암주어사 강학의 년도를 잠시 잊고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다산이 그냥 일찍이라고 표현한 A 주어사 강학은 1777년(정유)에 있었고, 이 강학을 알고 기술하는 다블뤼는 정유년에 강학이 있었다는 것부터 시작하고 나서, B 천진암주어사 강학을 기술하는 가운데 강학년도의 기입을 잠시 잊고 생략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결국 A 주어사 강학은 1777년에 있었고, 1779년에 이르러 또 다시 강학이 시작된다는 소식을 뒤 늦게 전해들은 이벽이 밤늦게 찾아간 것이 바로 B 천진암주어사 강학이다. 그러므로 A와 B의 두 강학은 같은 해에 열렸던 단 한 번의 같은 강학이 아니었다. 따라서 기존의 연구자들이 다산의 A와 B 두 묘지명에 나오는 강학을 1회의 같은 강학으로 보는 데서 단추를 잘못 끼우기 시작하여, B 천진암주어사 강학의 장소까지 곡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 천진암주어사 강학 장소
천진암주어사 강학에 대하여 가장 자세하게 기술한 D 다블뤼의 비망기를 따라 가면서 보자 : <때는 정유년(1777), 유명한 학자 권철신이 정약전과 그밖에 학문을 좋아하고 학구적인 여러 양반들을 데리고 함께 깊은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한 절로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이 기쁨에 넘쳤고, 또 그 유명한 사람들의 강의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며 즉시 그들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하였다. 때는 겨울이었다. 눈이 곳곳의 길을 덮었고, 거리도 100여 리나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들이 그렇게도 학문과 지혜를 열망하고 탐내는 그의 마음을 저지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즉시 떠났고, 길들이 힘들고 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칠 줄을 몰랐다. 또 해가 저문 것도 그의 욕망의 실현을 지연시키게 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는 밤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 무렵에 한 절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절이 틀렸고, 또 그 산의 다른 편으로 가야함을 알았을 때, 그의 실망은 어떠하였을까. 그러나 그는 길을 단호히 계속하였다. 그가 밤에 넘어야 할 산은 거대한 산으로, 눈 더미로 덮여 있었고, 많은 호랑이들이 사람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상관없다! 벽은 모든 스님들을 깨워 자기와 동행하게 하였다. 맹수의 습격을 막아내기 위해 그는 손에 쇠방망이를 들고 캄캄한 밤중에 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그렇게 바라던 장소에 도착하였다.
이와 같이 자료를 종합하여 결론을 내리면, 권철신과 정약전이 강학을 한다는 소식을 이벽이 듣고, 먼저 주어사를 향하여 떠났다가 밤중에 주어사에 도착하였으나, 강학 장소가 산 너머에 있는 천진암이라는 것을 주어사에 도착해서야 깨닫고, 스님들을 대동하고 천진암에 당도하였다. 그러므로 1779년에 천진암주어사 강학에 참석하기 위해 이벽이 먼저 찾아간 절은 주어사였고, 사실상 본 강학에 참석한 절은 천진암이었다.
| 그 까닭을 구체적으로 한 가지씩 정리하여 보자. |
1> 특별한 연구회가 열린 강학의 장소는 묘지명에 ‘于천진암주어사’로 표현되었다.
한문의 특성은 전체적인 문맥에서 알아들어야 하는데, 사료 B <권철신 묘지명>에는 띄어쓰기가 없으므로, 직접적으로 어조사 于 에 해당되는 장소는 천진암이다. 장소를 가리키는 전치사에 가까이 있는 천진암을 빼놓고, 그 뒤에 있는 주어사에서만 강학이 열렸다고 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 문맥이 모호한 상황에서는 두 절을 오가며 열렸다고 보는 것이 문자상으로는 올바른 해석이다. 자구적으로 볼때 전치사 于에 확실하게 가까이 붙어있는 천진암을 제쳐놓고, 전치사에 연결되었는지 혹은 떨어져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뒤에 나오는) 주어사에서만 강학이 열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비약이다.
2> 정약전은 녹암지문에 들어가, 나이가 많은 스승 권철신이 강학하던 주어사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사료 A <정약전 묘지명>에 나오는 주어사에서의 강학에 관하여, 년도와 회수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료 F 권철신 간찰로 미루어 볼 때 일찍(嘗, 1777년경)부터 강학이 있었다고 앞에서 살펴보았다. 주어사 강학이 1779년의 천진암주어사 강학을 하기에 앞서 이미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저명한 스승을 따라서, 주변에서 살던 학동들이 가르침을 청하여, 모여서 공부하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이다. 주어사 강학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은,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나중에는 동생 이방억도 참가) 외에, 윤유일과 이존창, 갑수 등으로 파악된다. 예전에 권철신 역시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순암 안정복, 하빈 신후담, 소남 윤동규, 농은 홍유한 등의 제자와 그의 아들 맹휴, 조카 용휴. 병휴, 종손 철환, 삼환, 가환 등과 함께 공부하였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정약전의 사돈이 되는 이벽은 정약전이 공부하고 있는 절이 주어사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소식을 들은 이벽은, 곧 유교적인 강학에서 천주교적인 강학으로 강학의 내용이 달라진다는 소식을 들었거나, 이 강학을 천주교적인 강학으로 내용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주어사로 찾아 나선 것이다.
따라서 이벽이 먼저 찾아간 절은 당연히 주어사일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많은 스승 권철신이 머무는 주어사 절을 먼저 찾아가는 것이 아래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예의인 까닭이다.
3> 다블뤼의 기록대로, 이벽은 주어사로 가는 더 험하고 힘든 길을 먼저 택하였다.
달레는 길을 혼동하여 잘못 간 것처럼 글을 바꾸어 썼으나, 본래 다블뤼는 절을 잘못 알고 간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래서 힘들게 찾아간 것으로 묘사하였다. 그런데 곧바로 천진암으로 가는 길은 계곡을 따라 서서히 올라가는 비교적 쉬운 길이고, 주어사로 가는 길은 군 경계를(광주, 양평, 여주) 이루는 산맥을 돌고 넘어가는 길이어서 더 멀고 험하다. 그러므로 다블뤼의 기록대로라면 주어사를 먼저 찾은 것이 확실하다.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이벽은 주어사를 먼저 찾아 갔다. 나이 많은 권철신이 주어사에 머무르려니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힘들고 험해도 마다하지 않고 주어사를 먼저 찾아 나섰던 것이다.
| 소결론 |
권철신의 문하에서는 일찍부터 10여 명의 학동들이 함께 모여 공부하고 있었고, 1777년에 이르러서는 스승의 집 감호에 비교적 가까운 주어사에서 정약전이 참석하는 가운데 강학이 열리게 되었다. 해마다 이런 강학이 반복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1779년에 이르러 강학의 소식을 들은 이벽이 반가운 마음에 눈길을 헤치며 주어사를 먼저 찾아 나섰다. 그러나 자정 무렵에서야 힘들게 도착한 주어사에서는 강학이 열리고 있지 않았다. 산 너머 천진암에서 강학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이벽은 스님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한 밤중에 천진암에 도착하였다.
결론으로, 이벽은 이미 열리고 있는 강학에 관한 소문을 듣고 나서, 정약전과 권철신이 평소에 머물던 주어사를 힘들게 먼저 찾았다가, 아니니까, 한 밤중에 스님과 함께 산 너머에 있는 천진암을 최종적으로 찾아 도착하였다. 그러므로 이상의 여러 정황으로 보아, 주재용과 변기영의 첫 번째 주장이 합리성을 갖는다. 이 천진암 강학은 10여 일 동안 진행되었다. 천진암 강학에서 다룬 내용을 이제부터 알아보자
제 2 부 강학의 내용과 성격은 무엇인가?
가. 기초 자료
1) 자료 I <정약전 묘지명>
<얼마 뒤에는 다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門下)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언젠가 겨울에 주어사(走魚寺)에 임시로 머물면서 학문을 강습하였는데, 그때 그곳에 모인 사람은 김원성·권상학(權相學)·이총억(李寵億) 등 몇몇 사람이었다. 녹암이 직접 규정(規程)을 정하여 새벽에 일어나서 냉수로 세수한 다음 숙야잠(夙夜箴)을 외고, 해 뜰 무렵에는 경재잠(敬齋箴)을 외고, 정오(正午)에는 사물잠(四勿箴)을 외고, 해질녘에는 서명(西銘)을 외게 하였는데, 장엄(莊嚴)하고 각공(恪恭)하여 법도를 잃지 않았다. 이때 이승훈도 자신을 가다듬고 노력하였으므로 공은 이와 함께 서교(西郊)로 나아가 심유(沈浟)를 빈(賓)으로 불러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니, 모인 사람 백여 명이 모두, “삼대(三代)의 의문(儀文)이 찬란하게 다시 밝혀졌다.” 하였으며,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 또한 많았다.
계묘년(1783) 가을에 경의(經義)로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과거(科擧)에 뜻을 두지 않고, “대과(大科)는 나의 뜻이 아니다.” 하였다. 일찍이 이벽(李檗)과 종유(從遊)하여 역수(曆數)의 설을 듣고는 기하(幾何)의 근본을 연구하고 심오한 이치를 분석하였는데, 마침내 서교(西敎)의 설을 듣고는 매우 좋아하였으나 몸소 믿지는 않았다.>
<지난 무술년(1778) 겨울 아버님께서 화순 현감(和順縣監)으로 계실 때 나는 손암(巽菴)과 함께 동림사(東林寺)에서 독서(讀書)하여 40일 만에 《맹자(孟子)》 한 질(秩)을 다 마쳤는데,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을 공에게서 적잖이 인가(印可)받았다. 공은 찬물로 양치질하고 눈 내리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매양 임금과 백성을 요순(堯舜) 시대의 군민(君民)으로 만들 뜻이 있음을 말하였다.
임인년(1782) 가을에 우리 형제는 윤모(尹某)와 함께 봉은사(奉恩寺)에서 경의과(經義科)를 익히고 15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듬해(1783) 봄 백중계(伯仲季) 삼형제가 함께 감시(監試)에 합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는 나만이 급제하였다.
갑진년(1784) 4월 15일에 맏형수의 기제(忌祭)를 지내고 나서 우리 형제와 이덕조(李德操)가 한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내려올 적에 배 안에서 덕조에게 천지(天地) 조화(造化)의 시작(始作)과 육신과 영혼의 생사(生死)에 대한 이치를 듣고는 정신이 어리둥절하여 마치 하한(河漢)이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서울에 와서 또 덕조를 찾아가 《실의(實義)》와 《칠극(七克)》 등 몇 권의 책을 보고는 비로소 마음이 흔연히 서교(西敎)에 쏠렸으나 이때는 제사지내지 않는다는 말은 없었다.
신해년(1791) 겨울부터 나라에서 더욱 서교를 엄금하자, 공은 드디어 서교와 결별하였다. 그러나 맺은 것은 풀기 어려운 것이어서 화(禍)가 닥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으나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 골육(骨肉)을 서로 해쳐가면서까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어찌 그 화를 받아들여 천륜(天倫)에 부끄럼없이 하는 것만 하겠는가. 후세에 반드시 공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해(1801) 가을에 역적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어 도천(滔天)의 흉계(凶計)가 담긴 황심(黃沁)의 백서(帛書)가 발견되자, 홍희운(洪羲運)·이기경(李基慶) 등이 모의하기를, “봄에 있었던 옥사(獄事) 때에 비록 많은 사람을 죽였으나 정약용 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죽어 장사지낼 곳도 없게 될 것이다.” 하고는, 자신들이 직접 대계(臺啓)를 올리기도 하고, 혹은 당로자(當路者)를 공동(恐動 위험한 말로 겁주는 것)하여 상소·발계(發啓)하게 하여, 약전과 약용을 다시 잡아들여 국문하고, 이치훈(李致薰)·이학규(李學逵)·이관기(李寬基)·신여권(申與權)도 함께 잡아들이기를 청하였으니, 그 뜻은 오로지 나를 죽이는 데 있었다. (고전 번역원)
2) 자료 II <권철신 묘지명>
<서서(西書)가 나오자 녹암의 동생 일신(日身)이 처음으로 화에 걸려 임자년(1792, 정조 16) 봄에 죽음을 당하였고 온 집안이 모두 서교(西敎)를 믿는다는 지목(指目)을 받았으나 녹암이 능히 금하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녹암 역시 신유년 봄에 죽음을 당하여 드디어 학맥(學脈)이 단절되어 성호의 문하에 다시 학맥을 이을 만한 이가 없게 되었으니, 이는 녹암 한 집안의 비운(悲運)일 뿐 아니라 일세의 비운이었다. 공의 휘는 철신, 자는 기명(旣明)이며, 자호(自號)는 녹암이고 재호(齋號)는 감호(鑑湖)이니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
과거 이벽(李檗)이 처음으로 서교(西敎)를 선교(宣敎)할 때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벽은, “감호(鑑湖)는 사류(士類)가 우러러보는 사람이니, 감호가 교에 들어오면 들어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하고, 드디어 감호를 방문하여 10여 일을 묵은 뒤에 돌아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공의 동생 일신(日身)이 열심히 이벽을 따랐다.
신유년(1801) 봄 공이 체포되어 옥에 갇혀 국문(鞠問)을 받았으나 증거가 나타나지 않자, 어떤 자가, “을묘년(1795)에 죽은 윤유일(尹有一)이 본시 그의 제자였으니, 그 비밀스런 속사정을 알지 못한 바가 없었을 것이다.”하니, 드리어 이 자의 말에 의하여 공의 사형(死刑)을 결정하였다.
선형(先兄) 약전(若銓)이 공을 스승으로 섬겨 지난 기해년(1779) 겨울 천진암(天眞菴)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講學)할 적에 이벽(李檗)이 눈오는 밤에 찾아오자 촛불을 밝혀 놓고 경(經)을 담론(談論)하였는데, 그 7년 뒤에 비방이 생겼으니, 성대한 자리는 두 번 다시 열리기 어렵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고전번역원)
3) 자료 III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정유(1777)년에, 유명한 학자 권철신은 정약전과, 학식을 얻기를 원하는 그 밖의 학자들과 함께, 방해를 받지 않고 깊은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외딴 절로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은 크게 기뻐하며 자기도 그들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때는 겨울이라 길마다 눈이 덮여 있었고, 절까지는 백여 리나 되었다.
연구회는 10여일 걸렸다. 그 동안 하늘, 세상, 인성 등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탐구하였다. 예전 학자들의 모든 의견을 끌어내어 한 점 한 점 토의하였다. 그 다음에는 성현들의 윤리서들을 연구하였다. 끝으로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지은 철학, 수학, 종교에 관한 책들을 검토하고, 그 깊은 뜻을 해득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온 주의를 집중시켰다. 이 책들은 조선 사절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북경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실은 당시 조선의 많은 학자들이 그러한 책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니, 그 까닭은 연례적인 사신 행차 때에 조선 선비들이 따라가서 서양의 과학과 종교에 대해 중국인과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과학 서적 중에는 종교의 초보적 개론도 몇 가지 들어 있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 영혼의 신령성과 불멸성 및 칠죄종을 그와 반대되는 덕행으로 극복함으로써 행실을 닦는 방법 따위를 다룬 책들이었다. 중국 서적들의 어둡고 흔히는 모순된 학설에 익숙한 그들은 정직하고 진리를 알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인지라, 천주교 도리에는 아름답고 이치에 맞는 위대한 무엇이 있음을 이내 어렴풋이 느꼈었다. 완전한 지식을 얻기 에는 설명이 부족하였으나, 그들이 읽은 것만으로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그들의 정신을 비추기에 넉넉하였다. 즉시로 그들은 새 종교에 대하여 아는 것은 전부 실천하기 시작하여, 매일 아침 저녁으로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이벽의 마음속에 보배로운 씨앗이 이렇게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그는 종교에 대한 이 초보적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고 있었으므로, 그의 온 정신은 자기 교양을 보완하는데 필요한 더 많고 더 상세한 서적이 있을 북경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책들을 장만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여러 해 동안 시험하여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기회 있을 때마다 천주교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토론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초대 천주교인들이 쓴 이야기를 보면, 그의 누이의 1주기를 기회로 마재 정씨 집에서 얼마동안 머무른 다음, 1783년 초여름 4월 15일에 벽은 정약전, 약용 형제와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향하였다. 길을 가는 동안 그들의 이야기의 주제는 역시 그들이 늘 하고 있는 철학 연구였다. 하느님의 존재와 유일성, 천지창조, 영혼의 신령성과 불멸성, 후세의 상선벌악 등 문제를 차례차례로 검토하고 해석하였다. 승객들은 그렇게 아름답고 위로되는 진리를 처음 듣고 놀라고 황홀해졌다. 이런 연구회가 자주 반복되었을 것은 매우 있음직한 일이지만, 그 자세한 내용이 우리에게까지 전하여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한국천주교회사」상, 300~303면)
4) 자료 IV <벽위편>
5) 자료 V <만천유고와 니벽전>
나. 자료의 분석
1> 이상의 5가지 자료들을 두고 강학의 내용과 성격을 규명함에 있어, 비교적 진실성과 객관성을 지니고 있는 자료는 III 달레의 자료 이다. 왜냐하면 역사학의 원칙에 의거하면, 자기를 방어하고 미화하기 위하여 쓴 회고록 종류인 다산의 자료 I과 II는 숨기고 변명하기에 급급하므로 내용면에서 진실성과 객관성이 떨어진다. 오히려 다산을 죽이려는 반대자들의 글(주장)이 사실에 더 가까우며, 그 다음이 교회측의 자료인 달레의 글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교회측의 자료인 달레의 기록이, 천주교적인 흔적을 감추기에 급급한 다산의 기록보다는, 내용면에서 더 충실한(신학적, 철학적) 객관적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강학의 내용을 알 수 있기 위해서는 반대자의 자료 IV 벽위편과 신앙자의 자료 V 만천유고와 니벽전이 아주 유용하다.
최석우의 주장대로 다산의 묘지명은 정치적 동기에서 서술된 자기 방어적인 회고록 종류이다. <다산의 글은 천주교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고, 천주교 때문에 신서파(信西派)들이 공서파(攻西派)나 정부 당국으로부터 공연히 공격과 박해를 받게 되었고, 그것도 서학서를 보았을 뿐 믿은 적이 없고, 또 믿었다 해도 잠시였을 뿐, 오히려 천주교인들을 괴롭히기까지 했는데도 무함과 배척을 당했으니, 억울하기 그지없다는 내용이다.> 정적들이 쳐 놓은 죽음의 올무에서 벗어나기 위한 배교자의 몸부림이란 한 편과, 교회에 관해 최소한의 기록을 남기기 위한 참회자로서의 양심의 한 편이, 갈등을 빚어낸 글이 바로 다산의 기록들인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모두 다 천주교와 연결 지을 수는 없겠지만, 다산이 지은 ‘경세유표’를 100여년 후에 정리 발표하는 ‘방례초본서’에서, 이건방(1861~1939)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런데 선생의 말은 완곡하면서도 정당하고, 정밀한 중에 칼날 같은 날카로움이 가끔 노출되어 지극히 이치가 있다. 이따금 문장을 대하면, 여러 번 탄식하면서 감히 말을 다하지 못했는바, 이것은 선생이 만났던 시기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 이점에서 나라가 선생의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 나는 거듭 슬퍼하고, 동서양이 서로 비교되지 않음을 깊이 한탄하는 바이다. --- 무신년(1908). 4월 1일 후학 이건방은 삼가 서문한다.
정치적 모략에 휘말리기를 두려워함과 동시에, 배교자로서 이제까지 겨우 목숨을 부지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늦은 회심의 마음으로 진실을 적어 넣게 될 때, 천주교 때문에 또다시 집안이 망하게 되고 후손들이 겪을 불행을 염려하였다고 본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다산이 진정한 참회자라면 ‘나는 천주교인으로 이렇게 했으니 잡아갈테면 잡아가시오’라고 이실직고하고 나서 바로 순교자가 되는 글을 남겼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으니, 이는 당시의 상황을 지금의 안이한 생각으로 대하는 소치라 하겠다. 참회자로서의 신앙과 죽음의 고뇌 앞에서 노심초사하는 그의 심경을 조금이라도 감안하며, 당대의 분위기로 돌아가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역사가의 바른 자세다.
또한 달레의 기록은 외국의 것이라며 무시한 채, 정약용과 이승훈이 사실대로 모두 다 기록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런 사실들이 후대에 전해지지 않아 후손들인 김대건의 보고서 등에도 강학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천주교적인 강학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또 달레의 기록을 모두 선교사들, 특히 프랑스 선교사들의 기록으로 돌리고, 따라서 그것을 옹호하려는 사람을 무조건 선교사들의 종교적인 식민주의적 교회사관의 옹호자로 단죄하려는 역사관을 지닌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다산 정약용의 기록을 제일의 자료로 삼아, 이를 근거로 강학의 성격을 규정하려는 것은 역사의 원칙을 모르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교회사란 학문은 호교론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지나친 반감에서 출발해서도 안 된다. 균형 잡힌 객관적인 연구가 되기 위하여서는, 자료에 대한 올바른 수집과 선별, 그리고 당시의 분위기에 따른 해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 강학의 내용
1> 정약용이 전하고 있는 자료 I과 II의 묘지명은 사실을 확인하는 최소한의 기록이라고 보아야 하고, 강학의 천주교적 내용면에서는 자기 방어를 위해 숨기기에 급급하므로 그 편린만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강학의 내용에 대하여 종합할 수 있고, 비교적 풍부히 전하는 자료는 III 달레의 기록이다.
<그 과학 서적 중에는 종교의 초보적 개론도 몇 가지 들어 있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 영혼의 신령성과 불멸성 및 칠죄종을 그와 반대되는 덕행으로 극복함으로써 행실을 닦는 방법 따위를 다룬 책들이었다. --- 즉시로 그들은 새 종교에 대하여 아는 것은 전부 실천하기 시작하여, 매일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최석우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 강학에서는 천주실의와 칠극의 내용이 주로 다루어 졌다. 그런데 마태오 릿치 신부가 지은 천주실의의 주된 내용은, 중국에서 현재 실천되고 있는 무신론으로부터 (先儒)선유의 유신론으로 되돌아 갈 수 있도록, (중국 옛 전통인 선유의 천주 사상을 수용할 수 있도록), 이성의 빛을 밝히기 위해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과 신학 내용을 접목시킨 것이었다. 사실 천주실의에서는 성 토마스 사상의 백미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의 주요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천주실의 상권의 내용은 신학대전 1부의 신론과 영혼론 부분이고, 하권에서는 신학대전 2부의 행복론과 사후 세계, 윤리론과 은총론 등이 전개 되면서, 마지막 8편에서 신학대전 3부의 육화 강생론과 그리스도론이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신학대전 1부의 신의 본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스콜라 시대의 용어로 실체와 우유(천주실의에선 자립체 Substantia = 실체, 의뢰체 Accidens = 우유; 이 이론에 의하여 성체성사의 실체변화 Transubstantia 가 나온다)란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천학초함에 들어있는 필방제의 작품 ‘靈言蠡勺’(영언려작)에서는 성 토마스의 형이상학과 논리학, 윤리학을 넘나드는 내용들이 실려 있다.
이 밖에도 마태오 릿치가 지은 ‘25언’이나 ‘교우론’ 등은(修身格言)수신격언의 윤리서이다. 따라서 달레의 기록과 비교하여 보면, 천학초함의 리편(Metaphysica 형이상학)에 들어 있는 모든 내용들이 천진암주어사 강학에서 논의 되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인지한 이벽이 이승훈을 파견하면서 한 말은, <서양의 천주공경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는데, 그 도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산 시문집 천진소요집을 보면, 이벽이 일찍부터 천진암에서 서학을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정씨네 어린 사돈들이 보고 배웠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벽은 천지창조, 남북극의 원리와 천체의 규칙적 운행, 천사와 악신의 구별, 세상의 시작과 종말, 영혼과 육신의 결합, 천주 성자의 강생, 상선벌악과 천당 지옥 등에 관하여 이미 알고 있었고 이런 내용들은 천학초함에 들어 있는 것이기에, 이벽이 참여하는 천진암주어사 강학에서 이런 내용들이 모두 다루어졌던 것이다. 천학초함은 당시의 학자들도 자주 보던 책이었다는 것이 다음에 살펴볼 벽위편에 잘 기록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달레가 전하는 강학의 내용은 한마디로 무신론에서 유신론으로의 대 전환이었다. 요순시대(先儒)의 천주사상과 상제께 천제를 드리던 유신론은 계속하여 사상적 발전의 영양분을 공급 받지 못하자,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무신론으로(理氣의 이론과 물질적인 天) 변질되고 말았다. 척불숭유 정책을 편 조선의 유교사회에서는 기도행위를 여인들의 유약한 행위로 보았고, 유림들은 남자답게 내세걱정을 하지 않고 자력으로 수신(修身)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이런 때 천진암주어사 강학에서는 비록 자세하게 격식과 예법은 몰랐을망정, 정성을 다하여 상제(上主, 天主)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3번째 계명을 지키려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려 노력하였다.
2> 성호학파의 비조인 이익은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저술한 서학서들을 두루 연구한 결과 서학에 대해 깊고 넓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1724년 1월에 신후담이 안산으로 이익을 찾아왔을 때, 서학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주며 서학에 관심을 갖도록 계몽하였다. 또한 안정복이 1746년에 스승 이익을 안산으로 찾아왔을 때도 서학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익의 제자였던 농은 홍유한의 글을 보아도 직방외기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서종태는 이익이 제자들과 함께 서학에 대해 논의한 사례를 성호집에서 조사하여 정리한 표를 발표하였다. 그러므로 권철신의 제자들이 천주교 수용과정에서 열람한 천주실의 등의 천주교 서적에는, 도덕적 실천을 강력히 뒷받침할 수 있는 주재적이고 인격적인 천주설이 들어 있었다. 이들 천주교 서적에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주재하며 안양하는 천주는 선진유학에서 말하는 상제와 같다는 것을, 유교 경전의 내용을 근거로 자세히 규명하고 있다. 따라서 권철신은 천주교를 수용하는데 필요한 사상적 토대를 구축함으로써 천주교 수용 및 전파에 큰 공헌을 했다.
3> 자료 IV 벽위편을 보면, 천진암주어사 강학이 있기 60여 년 전에 이미, 성호 우파인 순암계에서 천주교의 교리를 거의 다 알고 배격하고 있다.
벽위편 권일의 <西敎東來顚末 - 서교가 동방으로 전하여 온 전말> 에서는, 순암계의 여러 사람들이 천주교에 관하여 소개하고 비판하는 글을 남기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하빈 신후담(1701~1761)은 조선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에 묶여서, 자신이 아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을 이단으로(양명학까지) 판단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비판하는 내용을 보면, 천주교 교리의 대부분을 알고 있었는데, 이는 천학초함을 읽은 결과이다. 그의 저술 ‘서학변’가운데, 1724년에 지은 영언려작 부분에서는 천주존재와 영혼불멸에 관하여 비판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느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당신에게로 향하게 만드셨으므로, 만복으로 만족하다 할 수 없고, 당신을 얻지 못한다면 평안할 수 없을 것이다.>는 고백록의 내용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천주실의에 대한 비판(1724)은 물론, 직방외기에 대한 비판(갑진년 1724)에서는 신대륙을 발견한 Columbus 와 Magellan 의 업적을 축소시키면서, <저 서양 선비들이 비록 멀리 항해를 잘하였다고 하나, 천지의 사방 끝까지는 못 갔을 것이며, --- 오만하게 스스로 천하를 이미 다 본 듯이 생각하니, 어쩌면 소견이 그렇게 작은가?> 하며, 중국을 천하의 중심이라 여기는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모세의 십계, 소돔과 롯에 관한 이야기 중 남색에 관하여, 다윗과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관하여, 유다 베들레헴에 강생하신 성자 예수에 대하여, 미사와 첨례에 관하여, 죄를 처음 씻는 세례(拔地斯摩之禮 발지사마지례 <=Sacramentum Baptismatis)와 죄를 거듭 풀어주는 고해성사(恭棐桑之禮 공비상지례 <=Sacramentum Confessionis) 등 천주교의 전례까지 알고 이를 비판하고 있다.
천주교를 이단으로 부정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열심히 읽고 공부하며 반대하는 글을 남겼다면, 수용론자들은(녹암계) 천진암주어사강학에서 얼마나 더 깊이 연구하고 그 결과물을 남겼을 것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실제로 성교요지 부기에도 천학초함을 읽은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다산의 글에서도 그 흔적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렇듯이 천주교를 이단으로 비판하는 측에서 모든 것을 공부하여 다 알고 있었는데, 천주교를 적극적으로 배우고 수용하려는 이벽이 이런 내용을 전혀 모르고 강학에 참여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천학초함’이란 책을 읽어서 이미 교리의 대부분을 다 알고, 천주 성자 예수의 강생을 알아서 믿고 실천한 강학회자들은 세례는 아직 받지 못했으나, 에디오피아 여왕의 재정 관리 같은 (사도행전 8,26-38) 그리스도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선배 신앙인들의 모범과 성직자가 주례하는 성사만 없었을 뿐, (예비)신자들의 기도하는 모임인 교회가 여기 이 천진암주어사 강학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4> 강학의 성격은 그 후 7년 만에 문제(비방)가 된 을사추조 적발사건(1785)과 정미반회사건
(1787)의 내용을 유추해 볼 때 명확하게 드러난다.
권철신 묘지명 : <선형(先兄) 약전(若銓)이 공을 스승으로 섬겨 지난 기해년(1779) 겨울 천진암(天眞菴)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講學)할 적에 이벽(李檗)이 눈오는 밤에 찾아오자 촛불을 밝혀 놓고 경(經)을 담론(談論)하였는데, 그 7년 뒤에 비방이 생겼으니, 성대한 자리는 두 번 다시 열리기 어렵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벽위편 : <1785년 乙巳년에 명례방 김범우 통역관 집에서는 이미 여러 달째 권일신, 권상문,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승훈, 등이 모여 책을 손에 들고 무릎을 꿇고 이벽을 모시고 앉아서, 자신들은 모두 이벽의 弟子라고 자칭하였는데, 이벽이 저들을 가르치고 꾸짖고 하는 것이 유교(儒敎)의 사제지간(師弟之間)보다 더 엄격하였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면, 천진암주어사 강학이 천주교 신앙에 대한 연구모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양반들의 일반적인 서학 독서 분위기에서 진일보한 특별한 성격의 신앙적 분위기가 나타난 것이다. 곧 성리학적인 무신론에서, 천주교 신앙의 유신론으로 바뀌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천진암주어사 강학이었던 것이다.
정미 1787년의 반회사건도 양반들의 일반적인 서학서에 대한 독서 분위기가 이상하여 문제를 삼은 것은 아니었다. 벽위편에서 : <정미년(1787) 겨울에 이승훈과 정약용 등이 반촌 사람 김석태의 집에 모여 사교의 서적을 강습하고 젊은이들을 유혹하여 끌어들여 설법하였다. 그 학문의 십계에는 임금 섬기는 일이 없고,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이 넷째 차례에 가서 있으니, 결코 선비가 볼 만한 것이 못된다.>고 하였다. 이런 내용으로 보면, 직접적으로 천주교 신앙에 대하여 공부하고 실천하는 것을 반대파에서는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 정리해 보면, 천진암주어사 강학에서 연구 논의되고 실천한 내용은‘천학초함’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강학에서 논의된 내용은 주로 ‘천학초함’에서 왔다.
이수광의 ‘지봉유설’로(1614년 편찬) 서양의 과학이 발달했다는 사실이 조선에 처음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또 여기서 ‘천주실의’를 소개하여 천주교라는 종교가 있다는 사실도 전해졌다. 이후 천진암주어사 강학이 있을 무렵에는 서학이 양반사회의 풍류가 될 정도였다. 예를 들면, 정조가 승문원정자 이가환을 불러 여러 경서의 내용을 질의하던 중, 마태오 릿치와 아담 샬의 역법에 대해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정도로 조선시대에 서학은 비밀이 아니었다. 성호 이익도 천학실의 발문을 지었고, 성호사설 11권에서 칠극을 논하였으며, 장헌세자(뒤주대감)도 칠극을 읽을 정도가 되었고, 남인계의 수장 채제공 역시(반대파 이기경도) 천주실의를 읽어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벽위편에서는 이르기를 : <서양서적은 선조 말년에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고관이나 학자들 중에 보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그들은 제자나 도교 또는 불교의 서적과 같이 여기고, 서재에 비치해 두고서 가끔 (玩賞)완상하였다.>하고, <대저 그 책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벌써 수백년으로서 ‘지봉유설’에도 평론한 말이 있으며, 홍문관의 장서각에도 또한 있었으므로, 근래 서울과 시골에 유행하여 전파된 것을 억지로 이승훈이 가지고 와서 전파시켰다고만 밀어댈 수 없다.>고 그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1797년에 정약용은 동부승지를 사직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은 이른바, 서양 사설(邪說 천주교를 가리킴)에 대하여 일찍이 그 책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책을 본 것이 어찌 바로 죄가 되겠습니까. 말을 박절하게 할 수 없어 책을 보았다고 했지, 진실로 책만 보고 말았다면 어찌 바로 죄가 되겠습니까. 대개 일찍이 마음속으로 좋아하여 사모했고, 또 일찍이 이를 거론하여 남에게 자랑하였습니다. --- 신이 이 책을 본 것은 대개 약관(弱冠) 초기였는데, 이때에 원래 일종의 풍조가 있어, 능히 천문(天文)의 역상가(曆象家)와 농정(農政)의 수리기(水利器)와 측량(測量)의 추험법(推驗法)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세속에서 서로 전하면서 이를 가리켜 해박(該博)하다 하였는데, 신은 그때 어렸으므로 그윽이 혼자서 이것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러하기에 정약용은 술지(시문집 1권, 述志 ; 주재용, 선유의 천주사상과 제사문제 참조))에서 1782년 이전에 이미 서학에 관하여 많은 것을 읽어 알고 있었으므로, 현재의 어려움을 고쳐줄 만리 밖의 성현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정약전 역시 천주실의에서 말하는 요순시대의 삶을 이상적인 삶으로 천주교와 결부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순암계의 학자들이 성리학을 정학으로 여기면서 여타의 모든 학설은 사학으로 취급하는 맹목적 사대주의에 잡혀있었다면, 녹암계의 학자들은 창조적인 혁신주의로서 중국의 사조에 매이지 않고, 실사구시와 유신론의 신앙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6> 천진암주어사 강학의 결과물이 바로 만천유고와 니벽전에 들어 있다.
천주교를 반대했던 순암계의 학자들이 천학초함을 읽고 이를 비판하는 글을 남겼듯이, 녹암계의 천주교 학자들 역시 천함초함을 읽고 이를 수용하는 글을 남겼음은 당연한 것이다. 서지학적 연구가 더 자세하게 이루어져야 하겠으나, 천주교적 강학에서 생겨난 결과물로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책은 자료 V 만천유고와 니벽전이다. 이는 강학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의 모임이었는지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만천유고’는 그 문헌 자체로 입증력을 지니고 있는 자료이다. ‘성교요지’의 해박한 한문 구사능력과 광범위한 천주교 교리지식으로 볼 때, 독서처64)에서 연구한 이벽 말고서는 이런 글을 지을 사람이 강학 시대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 만천유고 끝에 나오는 발문의 <上主之意也. 無極觀人>은 정약용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벽의 글을 포함한 글의 수집능력과 다산의 수시로 거듭된 ‘三十餘星霜’이란 표현으로 보아서도 그렇다. 만천유고에 수집된 십계명가, 천주공경가, 성교요지 등의 내용이 이미 천진암주어사 강학에서 논의되고 실천되었다.
| 소결론 |
1777년의 앞 선 강학에서 논의된 내용은 처음에 유교의 경전에서 출발하였으나, 이벽이 참여하는 1779년의 뒤이은 강학에서는 천학초함에 나오는 천주실의와 칠극 등이 주요 연구대상이었다. 이벽은 그 밖에도 자신이 천진암에서 일찍부터 공부하며 알았던 내용을 천진암 강학회자들에게 가르쳐 주었고, 이 천주교적 강학의 결과적인 내용들을 성교요지, 천주공경가, 십계명가 등에 수록하였다.
그들은 대략적으로 천주교의 교리를 모두 깨달아 알고 나서는 곧바로 신앙을 실천하게 된다. 교회의 전례와 다양한 격식은 아직 모르지만,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드러나듯이, 이들은 엎드려서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주일을 지키게 되었다. 이는 성리학적 사대주의에 의한 맹목적 무신론에서 선유의 천주사상이란 원천으로 돌아가는 복고주의임과 동시에 독창적인 천주교의 신앙 활동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한국천주교회는, 바로 여기에서(hic et nunc) 시작되었다.
마치는 글
녹암 권철신의 제자들 가운데 김원성은 1774년부터 권철신에게 와서 글을 읽었고, 이총억과 이존창은 1776년부터 와서 글을 읽었는데, 서실에 모인 학동들이 모두 10여 명이었다. 이 무렵에 녹암계가 형성되었는데, 1777 정유년에 이들은 주어사에서 강학을 하게 되었고, 이때 여기에 정약전이 참여하게 되었다.
1779 기해년에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이 강학에 참여하기 위하여 이들을 찾아 나섰는데, 이벽은 사돈 정약전이 권철신 문하에서 강학하던 주어사를 향하여 먼저 출발하였다. 그러나 자정에 도착한 주어사에서는 강학이 열리고 있지 않았고, 그제야 산 너머 천진암에서 열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밤중에 스님들을 깨워 눈길을 헤치고 찾아가 천진암 강학에 참여하였다.
강학에서 논의된 내용은 유교(先儒)의 경전에서 출발하였으나, 천학초함에 나오는 천주실의와 칠극 등이 주요 연구대상이었다. 이벽은 그밖에도 자신이 천진암에서 일찍이 공부하며 알았던 내용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고, 강학의 결과물을 성교요지, 천주공경가, 십계명가 등에 수록하였다.
그들은 대략적으로 천주교의 교리를 깨달아 알고 나서, 격식과 전례는 모르지만 엎드려서 기도하기 시작하였으며, 주일을 지키게 되었다. 이는 성리학적 사대주의에 의한 맹목적 무신론에서 선유의 천주사상이란 원천으로 돌아가는 복고주의임과 동시에 독창적인 천주교의 신앙 활동이었다. 현존하는 한국천주교회는 평신도 학자들의 자발적인 탐구 노력에 의하여 여기 이 천진암 강학에서 시작되었다.
한문 자료는 일반적으로 명확하지 않아서 그 분위기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앞뒤의 문맥을 아주 넓게 살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초기 한국 교회사에서는 많은 부분을 정약용의 글에 의존하고 있으나, 그 속뜻의 자세한 내용을 알아내기에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정약용은 아직도 박해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부작용을 염려하면서, 숨겨진 언어(隱語)로 수수께끼처럼 기술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산 정약용의 글에서는 보물찾기를 하듯이,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시대의 잣대로가 아니라, 당시대의 분위기로 들어가서 알아들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상의 자료들을 기초로 여러 가지 학설을 제시할 수 있으나, 지상의 교회가 神人의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듯이 연구자 역시 현실적인 장점과 더불어 한계성도 지니고 있기에, 자신의 의견 또한 절대적인 진실성을 지닐 수 없다고 보아, 계속해서 수정 보완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Ecclesia semper reformanda), 결론적인 판단은 독자들 각자에게 맡겨야 한다. 그러나 교회 내적인 문제에(예 ; 한국천주교회의 창립과 기념제 행사 등) 대한 판단은, 교회사가 역사와 신학의 종합이므로, 정확한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교회가(교도권, 지역 관할 주교)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