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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 특히 이벽 성조의 집안 내력. - 배달겨례 천주교회 창립사 발췌 연재 (2)

글 :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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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 특히 이벽 성조의 집안 내력
 
우리나라 천주교회 창립의 주동역활을 한 한국천주교회 創立聖祖의 이름은 세자요한 광암 이벽 덕조(1754~1785)다. 1784년 늦은 봄, 천주교회에서 받은 세례명은 洗者 요한이고, 1770년 경에 스스로 지은 号는 曠菴이며, 문중의 족보에 올린 冠名은 檗이고, 어려서 부모가 지어서 집에서 부르던 兒名은 字가 德祖인데, 후에 정약용과 안정복, 등 남들이 德操라고 쓰거나 부르기도 하였다.
 
이벽 성조는 慶州李氏 집안에서 아버지 이부만과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포천현의 안골 꽃마루 새터말(內村面 花峴里 新基洞)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용모와 耳目口鼻가 仙人道骨 形으로 출중하게 秀麗하고, 氣骨이 壯大한 체격을 지니고 있어, 집안에서는 물론 마을과 親知들을 감탄케 하였으며, 총명하고 예의범절이 너무나 근엄하면서도 온화하여, 장차 위대한 큰 인물이 되어, 집안과 가문을 크게 빛낼 것이라고 믿었다. 아버지 이부만은 늘, 우리 둘째 아들 덕조가 크면, 반드시 우리나라와 우리 가문에 큰 영광이 될 것이라고 자주 말하며, 끔찍이 사랑하고 아끼던 소년이었다.
 
이벽 성조는 高麗 때 蒙古族大亂 중에 세워진 元 나라의 침략과 토치 150여년 간의 忠宣王을 모시던 名宰相 익제 이제현의 직계 15대손이고, 朝鮮시대 왜적의 壬辰倭亂 7년중 宣祖를 모시고 救國外交에 공헌한 名宰相 지퇴당 이정형의 직계 10대손이며, 만주족이 세우던 靑나라 초기 丙子胡亂 9년 동안 昭顯世子를 모시고 심양을 거쳐 북경에 가서 Adam Schall 신부와 교분을 맺으며 조선인 시종관 중에 3명의 수행을 영세시켜 귀국한 서장관 黙庵 이경상의 직계 5대손이다. 즉 李檗聖祖는 가문의 전통으로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걸쳐 외국문물을 현장에 가서 다년간씩 접촉하며 견학하여 博學多識한 재상들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천재적인 영특한 후예다.
 
우리가 지금 부르는 세자 요한 曠菴 李檗 聖祖는, 경주이씨(慶州李氏) 양반 집안 출신으로 1754년에 아버지 이부만과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르던 兒名은 덕조(德祖)였으나, 족보상의 이름은 檗이라고 하였으니, 그 당시 족보상의 이름은 평소에 자타가 사용하지 않았다. 15 세 전후 1770년 경, 천진암에 입산 수도를 시작하던 때부터는 남들이, 특히 정약용의 글에 덕조(德操)라고 쓰기도 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자신이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 号는 曠菴이었다. 1784년 늦은 봄, 이승훈 진사가 북경에서 돌아온 후, 영세할 때 자신이 선택한 세례명은 세자 요한이다.
 
그의 조상들은 6 伽倻 시대를 전후하여 月城李氏로서 新羅 건국에도 크게 이바지한 씨족이었다. 경주이씨 가문에서는 이미 高麗와 朝鮮, 두 왕조를 거치면서 나라의 임금들을 측근에서 모시는 중요하고 높은 관직을 맡았었다. 예를 들어, 고려 때 익제 이제현은 13세에 당시 고려의 성균관 시험에 1등 합격하고, 이어서 15세에 과거 시험에 바로 합격하여, 어려서부터 관직에 오르기 시작한 천재였다.
 
그는 훗날 조선 천주교회를 세우는데 중심 역할을 한 이벽 성조의 15대 직계 조상으로서, 고려가 몽고족 원나라 침략으로 국난을 당하자 조정의 재상이자 위대한 학자로서 볼모로 북경에 머무는 고려 왕을 모셨고, 고려에서는 처음으로 性理學 같은 철학을 체계화하고 확립하였으며. 몽고족이 세운 나라의 침략으로 고려의 다른 왕들이 볼모로 북경에 교체되어 가 있을 때도, 여러 왕들을 수행하며 보필하기도 하였다. 이제현이 북경에 머물고 있던 20 여년 동안에는 그 곳에서 고려의 특히 충선왕과 함께 만권당(萬卷堂)이라는 철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원나라의 다른 중국인 학자들과 함께 여러 해 동안 古代 선유(先儒)의 유학(儒學)을 가르치며, 母國 고려의 젊은 영재들을 원나라 북경으로 선발하여다가 유학시켜, 국권회복 운동을 은밀히 추진하기도 하였다.
 
또 원 나라 황실에 끈질기게 요청하여 어려운 허락을 받아, 1316년부터 1323년까지는 3차에 걸쳐 티벳 서남부와 위그루, 아시아와 유럽의 접경인 天山 부근과, 특히 서촉(西蜀)의 名山들 주에 아미산(峨眉山)까지 가서 祭壇을 모으고, 고려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致誠을 드리며 하느님과 천지신명께 제사를 바쳤고, 터어키 접경 지역까지, 중앙아시아의 동북부 명승지를 순례하며 天地神明께 치성을 드리고, 조국의 해방을 위해 정성을 다하여 충선왕을 모시고 성지를 찾아 함께 애절히 기도하며, 고려의 독립과 함께, 몽고인들로부터 국왕이 하루속히 석방되기를 기원하였다. 사실, 당시 고려인들 중에 이렇게 다년간 가장 머나먼 수만리 순례의 길을 3차례나 다녀온 사람은 없었고, 문하시중 이제현이 유일한 학자였다.
 
그 중 첫 번째 순례 때는 충선왕을 모시고 함께 순례하였다. 다만 당시 고려인들은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하느님과 동일한 개념의 天主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반만년 전부터 하늘과 땅의 주인으로 唯一神 하느님을 인식하고 섬기는 종교정신을 지니고 있는 민족이었기에, 당시 고려의 門下侍中(현재의 국무총리에 해당) 이제현은 7 년 동안이나 걸리는 장기간의 3 차례에 걸친 머나먼 수만리 길의 이 순례를 통해서, 이미 그 주변에 많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일부 들어와 있던 그리스도교 문화를 조금씩 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후, 고려로 돌아오면서는 다양한 학문 영역의 적지 않은 외국 책들을 가지고 들어와서 후학들의 교육에도 집중하여 크나큰 성과를 내었다. 元 나라의 국운 융성과 원나라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순례라고 핑계를 대었지만, 사실은 고려의 국권회복을 上帝 天主 하느님께 기원하면서, 원나라와 싸우며 적대관계에 있던 서쪽 끝 지금의 동 유롭 서양나라 들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순례였다. 그래서, 이제현 문하시중이 요청하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순례길에는 원 나라 황실에서 눈치를 챘는지, 충선왕은 함께 가지 못하게 하고, 이제현 일행만이 치성드리고 오라는 허락을 그나마 가까스로 받았으며, 충선왕은 오히려 감숙성(甘肅省)지역으로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고려의 일반 백성들도 救國의 마음으로 충만하던 때, 고려의 조정 대신들이 유람이나 관광을 다니는 수준은 아니었다.
 
또 이제현의 직계 5대 후손이 되는 이 정형은 광암 이벽 성조의 직계 10대조로서, 1593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조선의 임금 선조가 신의주까지 피난하는 국난을 겪을 때, 측근에서 왕을 보필하였고, 조선으로서는 역부족이었던 왜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중국 明 나라의 지원군 파병을 요청하라는 왕명을 받아, 明 나라 북경에 파견되어, 이를 성사시키기도 하였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그는 그의 제자이며 후배였던 지봉 이수광과 함께 서양 문화에 관한 많은 책들을 가지고 귀국했고, 이 책들 가운데에는 유럽선교사들이 번역했거나 저술했던 천주교에 대한 책들, 天主實義, 職方外記, 등도 들어있었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후, 이정형과 이수광 두 사람들은 교대로 지금의 천진암이 속해 있는 광주군의 현감을 역임하면서, 광주 지역에 학문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특히 서양문물을 소개하며 광주실학(廣州實學)을 싹틔우기 시작하였다.
 
7년간의 임진왜란 이후, 즉 1637년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인조 임금이 항복하자, 광암 이벽 성조의 직계 6대조 이경상 또한 조선의 이 국난 중에 조정에서 왕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중요한 직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경상은 인조 임금의 명으로 靑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 세자를 8년간이나 수행하는 서장관 직무를 받아 성실히 수행하였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소현 세자와 이경상은 당시 북경에 머물면서, 거기서 선교 활동하고 있던 독일인 Adam Schall 예수회 신부와 친분을 맺고, 소현 세자의 허락을 받아, 이경상은 자신이 데리고 간 그의 조선인 시종 3명으로 하여금 아담 샬 신부한테서 1645년 봄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서장관 이경상과 소현세자도 입교 영세하였는지는 불분하다.
 
9년간의 볼모생활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올 때에는 아담 샬 신부의 배려와 주선으로, 아담 샬 신부가 세례를 베풀어준 5명의 중국인 영세 신자들도 함께 데리고 조선으로 귀국하였으니, 모두 8명의 영세신자들로 구성된 마치 평신도 선교단과도 같이 교회 서적들과 성물들을 구입하여 가지고, 지금의 해외 성지 순례를 다녀오는 신자들처럼 귀국하였다.
 
그러나 1645년 봄 귀국하자마자 2 개월 후, 소현 세자는 갑자기 독살로 죽음을 당하였다. 9년간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과 장례는 독살로 밖에는 달리 설명이 안되는 죽음의 현장이 기록으로 알려졌으니, 갑자기 죽은 소현세자의 시신은 머리의 두 눈, 코, 귀, 입, 7곱 구멍과 하체 두 곳, 모두 전신 9개 구멍에서 출혈이 쏟아지고, 온 몸은 진흙덩이처럼 상해 있었고, 시신 入棺 때도 참관자들을 극히 통제하였다는 기록으로 독살임이 증명되고 있다.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천주교 사제 Adam Schall 서양 선교사와 접촉하면서 靑 나라에 9 년이나 있으면서, 明 나라를 멸망시키는 靑 나라 군대의 북경 함락에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靑 나라의 지지를 받으므로, 국내에서는 아직도 중국의 구정권인 明 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우는 대신들의 증오심과, 남한산성 함락으로 삼전도에 끌려나와 靑 라 장군 한테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던 仁祖 임금의 증오심도 소현세자의 독살에 무관하다고 불 수는 없었다.
 
소현세자가 비운에 세상을 따나자, 북경에서 귀국할 때 데리고 들어온 다섯 명의 중국인 신도들은 즉시 중국으로 다시 귀국조치되었고, 세자의 비서실장(서장관)이었던 이경상 역시 바로 사직당하고 낙향하여,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북경에서 Adam Schall 신부한테 세례까지 받고 함께 귀국하였던 3명의 그 시종들에 대해서는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종적이 묘연하여, 아무런 기록도 국내에서는 더 이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훗 날, 북경에서 1784년 2월 24일(?) 이승훈 진사 1 인의 영세보다 139년이 앞서는 1645년 이경상이 부리던 소현세자의 시종관들 3명의 입교 영세와 韓中 8명의 영세 信者團 귀국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이 벽 성조의 가문은 나라와 임금에 충성하면서, 학문과 천주교 신앙과 접촉과 관계 발전에 당시로서는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회 분위기로서는 서양문물이나 서양 종교에 관한 분야는 돋보일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오로지 왕에 대한 애국심과 충성심으로 매우 유명한 집안이 되었다.
 
고려 몽고족 대란 때 이벽 성조의 15대조 이제현이 1316년부터 원나라 서북 쪽 순례 여행 때 천주교 문화와 간접 접촉을 하였고, 조선 임진왜란 때 이벽성조의 10대조 이정형이 1593년부터 이수광과 더불어 천주교 서적을 들여왔고, 천진암이 있는 경기도 廣州 부윤으로 재직하면서 서양 지식과 實學 사상을 일깨웠으며, 병자호란 때 이벽성조의 5대조 이경상이 1645년까지 소현세자를 모시고 9년간 심양에 머물다가 북경에 가서 아담 샬 신부와 교분을 맺고, 천주교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그리하여 경주이씨 집안 서가에는 선조들이 수년간씩 머물던 해외에서 들여온 귀한 외국서적들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으므로, 그 후손들은 다른 문중의 후손들에 비해 외국의 새로운 학문에 보다 쉽게 또 넓게 접할 수 있었으며, 남들이 볼 수 없는 해외서적들을 읽은 지식으로 식견이 넓어서, 출세에도 도움이 되었으니, 오성과 한음으로 더 알려진 이항복, 이덕형, 등 경주이씨 문중에서는 훌륭한 名宰相들과 중요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계속>
입력 : 2013.01.24 오전 1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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