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의 北堂성당 = 西什庫성당 방문 미사 2013. 3. 5 10:30
*이승훈 베드로의 세례 (2013 - 1783 = 230 주년)를 기념하는 동판을(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동판은 천진암소장) 북당성당에 설치하기로 허락을 받았다. cf.전화 66175198
북당 성당은 북경주교좌성당이다. 본래는 호수 서안의 간지구(canchikou)에 있었다. 그 장소는 청 황제 강희제가 준 땅으로 “万有眞原” 이란 이름으로 불리었다. 1703. 12. 9.에 개막식(봉헌)을 거행하면서 “구세주 성당”이라 명하였다.(이승훈이 세례받은 성당이다)
그러나 도광 황제 재위 7년인 1827년에, 황제는 지은 지 124년이나 된 이 건물을 헐어 버리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1860년에 (Xianfeng 황제 10년) 정부는 교회에 터를 되돌려 주어, 6년 후에 새 성당을 짓게 되었는데, 45만 은량을 주어 서십고(Xishiku)로 옮겨 확장하게 되면서, 당시 주교관과 수도원과 병원도 지었다. 새 성당은 이승훈이 세례 받은 이전 성당보다 더 넓고 길게 건축되었고,
1900년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북당은 북경 가톨릭 성직자들의 활동에 항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왔다. 1860년부터 1958년까지 북경 주교좌 역할을 하였고, 1990년에는 반년동안 수리를 하였다. 북당은 북경의 문화유산으로서 역사적 종교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북경 교구에서 가장 큰 성당이다.
<미사 주례중 김학렬 신부 강론 내용 요약>
마태오 릿치 신부님(1552- 1610)은 중국에서 28년을 선교사로 열정을 다하며 사시다가 북경에서 선종하였고, 신자 2,500명과 자신의 회고록인 Fonti Ricciane 를 남겼다. 선종하신 5월 11일에 맞추어 금년도에 시복될 가능성이 있다.(Macerata의 Claudio Giuliodori 주교님 말씀 2013. 2. 11. )
릿치 신부님은 북경에 1601년에 입성하여, 1602. 9. 21. 자신의 본명 축일에 첫 세례식을 거행하였는데, 이 세례식에는 이응시 바오로가 참여하였고, 이 바오로의 영세 서약서가 전해지고 있다. 이응시는 李如松 장군 휘하에서 500인 대장, 참모, 참군 등을 지내면서 우리나라를 도와 임진왜란에 참가하였던 군인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소나무 그늘로 피하라는 속설에 따라 송전, 송악 등지로 몰려들었다는 변기영 몬시뇰의 말씀도 있다.)
세례식 후 신부님은 칠극의 저자 판토하와 함께 영세자의 집에서 14살 난 그 아들이 복사를 서는 가운데 미사를 지내기도 하였다.(FR 693-695) 릿치 신부님은 그밖에도 여러 편지에서 Corea 를 언급하면서 한국에 관심을 지니셨던 것으로 보아, 이응시 바오로로부터 한국에 대한 소식을 듣고, 처음부터 한국을 염두에 두면서 천주실의 등 여러 저술들을 남겼다고 본다.
릿치 신부님은 포루투갈 선교 보호권(Patronatum) 하에서 중국에 진출하였다. 이보다 앞서 프란치스코 사비엘 성인이 같은 방법으로 일본에 진출하였었다. 성인은 1549. 8. 15.에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입국하였다.(1281. 8. 15에는 몽골의 15만 대군이 하카타 만을 강타한 태풍으로 수장되어, 일본에서는 이를 두고 神風 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인은 동양선교의 중심이 중국에 있음을 알고 중국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홍콩 옆 상천도에서 입국을 기다리다가 1552년에 선종하였다. 바로 그해에 릿치 신부님은 이태리 중동부 지방의
Macerata에서 태어나 선배의 뜻을 계승하여 성공적으로 선교에 임하게 된다. 이들의 선교신학은
바오로 사도와 같은 적응주의였다. (adapter와 같은 의미의 Adaptationism 보유론 )
이승훈 성현이 북당에서 세례를 받은 것은 유효하나 부당한(validum sed illicitum)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회의 적응주의를 두고 중국에서는 이미 제례논쟁이 일어났고, 영화 Mission 과 같은 배경에서 권력층의 미움을 샀던 예수회는 1773년에 해산되었다.(그러나 나폴레옹의 실각이후 예수회는 1814년에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
그런데 10년 전에 해산된 예수회의 신부인 그라몽 신부가 북당에 식객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주변 신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승훈에게 그냥 세례를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승훈은 제사금령도 알지 못한 채 2월 22일(베드로 사도좌 축일)에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제사 금령을 본격적으로 시행한 사람은 뒤늦게 1785년에 북경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온 구베아 주교였다. 그는 포르투갈 출신의 프란치스코 회원으로서 수학자였다. 그는 예수회가 해산된 후에도,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과학과 수학, 천문학과 역학 등으로 큰 성과를 얻은 것을 알았기에, 후임 선교사들과 함께 이같은 방법으로 선교를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베아 주교는 이승훈에 관하여 이야기 할 때마다 수학에 관한 사항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이승훈에게 부당한 세례를 주었다고 생각한 주교는 그라몽 신부를 바로 추방하였고, 다시 북경에 돌아올 수 없었던 그는 마카오에서 선종하게 된다. 이승훈은 미리 준비되어 북경에 파견되어 갔고, 결국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황사영 백서에; <이승훈은 이벽이 기특히 여기던 선비로서(布衣李檗大奇之) 이벽이 비밀히 부탁하며 가로되(李檗密托曰),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고(北京有天主堂), 거기에는 서양 전교자들이 있으니(堂中有西士傳敎者), 기도서를 구해오고 더불어 영세를 청하게(求信經一部 幷請領洗), 절대로 빈손으로 돌아와서는 안되네(必勿空還) > 하였다. 같은 내용이 이만수가 쓴 토사주문(討邪奏文)에도, 정약종이 진술한 내용으로 들어있다.
벽위편을 지은 이기경의 상소문에도; <계묘년 1783 겨울에 승훈이 중국에 들어갈 때에 신이 또한 전별차 나아갔는데 승훈이 말하기를 ‘내가 서양 서적을 구입하려고 하는데, 재력이 부족하니 혹 서로 도울 길이 없겠는가?’ 신이 대답하기를 ‘내가 무슨 재력이 있겠는가’ 하고 돌아와 생각하기를, 중국에 들어가 책을 구입한다면 좋은 책이 많을 터인데 하필이면 서양책인가 하였습니다. --- 이승훈의 벽이문은 참으로 천학을 위하여 깃발을 세운 것은 보겠으나, 배척한 것은 볼 수 없습니다.> 하였다.(김시준 역, 153 - 156)
모방 신부가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첨부)
한국 선교사 모방 신부가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교장 랑글로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 양지에서 1838년 12월 3일.
[금년에 우리는 조선에 그리스도교의 設立에 관하여, 손으로 기록한 備忘錄을 비밀히 관리하도록 받을 수가 있었는데, 口頭로 듣던 바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1720년, 중국 年號로 저 유명한 康熙 58년에, 북경에 다녀온 使臣 李公(李頤命)이 서양 선교사들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책들을 구해 읽은 광이라는 사람(曠菴 李檗)은 후에 요한이라는 교명을 가진 분입니다. 이 사람이 천주교 교리에 同感하고 深醉한 나머지, 천주교를 全心으로 받아들였고, 몇몇 다른 改宗者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1783년에 또 다른 가문 출신의 같은 성을 가진 이(승훈)를, 이 거룩한 종교에 관하여 더 많이 알아오도록, 또 다른 代理者로 北京(프랑스 선교사들)에 파견하였습니다. 이(승훈)은 1784년 2월에 베드로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고 오게 되었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여 보면, 이벽은 10여년 이상 천진암 독서처(옥수동의 독서당 참조)에 머물며 전문적으로 천학을 연구하여, 1779년에 천진암 강학을 주도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한국 천주교회가 이미 창립된 상태에서, 중국에 있는 서양선교사들의 교회와 연계를 모색하기 위하여, 이승훈을 대표자로 파견하여 세례를 받고 돌아오게 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3번째 신부님들이 배운 말레이시아 Penang 신학교 역사교과서 참조).
북경 성당의 십자가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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