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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한국천주교회 創立史를 보다 올바르게 연구하려는 史學人들을 위하여.

글 :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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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천주교회 창립사(創立史) 개요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연구에 관심 있는 史學人들이 한번쯤 먼저 읽어 두기를 권하는 글>  

I. 들어가는 말   

수원교구의 교구설정 전사(前史) 중에 한국천주교회의 뿌리인, 한국교회 창립사(創立史) 부분은 수원교구 뿐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 모든 교구의 공통된 각 교구 설정 前史로서, 가장 먼저 제대로 잘 알아야만 하고, 또 이를 거론하기 전에 반드시 염두(念頭)에 두어야 할 사전 기초지식으로서는, 천주교회라는 천주교 신앙인들의 단체가 무엇인지, 그 의미와 그 출발, 즉 탄생과 창립에 대한 우리 말 용어의 의미와 동시에 우리나라 천주교회 창립 사관(史觀)을 간결이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 천주교회 창립사에 관한 논란이 적지 않았다. 한국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외국인 선교사의 史書에 주로 의존하여 쓰여진 종래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새로이 발굴, 확인된 자료에 따라 보완하느라, 불가피하게 기존의 내용들 설명은 좀 축소하면서,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들을 거론하고 밝히는데 지면을 더 쓰고자 하였다.

  

ⓐ 천주교회에 대한 이해:


천주교는 천주께서 친히 세우신 참 종교로서, 이 천주교를 믿는 신자들의 단체가 바로 천주교회다. 천주교회는 가시적(可視的)으로, ①하나이오, ②거룩하며, ③보편적이고, ④사도들로부터 2천년을 두고 전승되어 온다. 이 4 가지 특징은 천주교회에만 있다. 천주교회의 이러한 의미를 밝히며 가르쳐 준 트리덴티노 공의회의 문답식 교리서는 지난 400여년 이상 전 세계 천주교회가 사용한 기본 교리서이며, 오늘의 교회를 키운 교의서(敎義書)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의헌장(敎義憲章), Lumen Gentium에서 신자들의 단체인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하느님의 백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인 천주교회가 각 지역에 존재할 때 지역 교회(Local Church)라고 부른다. 이러한 지역 교회의 사목을 관장하는 교회 행정 조직의 단위가 일반적으로 교구, 본당 등이다.


ⓑ 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에 관한 용어


: 한국교회의 출발에 관한 표현이 비록 대동소이하지만, 대표적인 두 가지를 추려서 소개한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천주교회의 誕生(il natale della Chiesa in Corea), 한국천주교회의 創立者들(fondatori della Chiesa in Corea)”이라고 교황의 공식 강론이나 문헌에서 사용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그의 보고서에서, “새로 탄생한 한국천주교회(Generalis notitia super nascentem Ecclesiam Coreanam)”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처럼, 한국 교회의 출발을 탄생이나 창립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과는 달리, 조선 천주교회사를 프랑스어로 편찬한 파리외방전교회 Charle Dallet, M.E.P. 신부와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원 Juan Medina, S. J. 신부는 한국교회 출발을, 한국교회의 기원(起源, origin)”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국내의 일부 敎會史家들은, 한국 복음 傳來史, 혹은 한국 교회 창설(創設,establishment) 등의 대동소이한 좀 다른 용어를 쓰기도 하였는데, 여기서는 주로 創立이라는 단어를 쓰기로 한다. 그 이유로, 起源은 단체 결성과 의미가 좀 다를 뿐더러, 기원이라고 하면, 廣義로는 사도시대와 아브라함 시대까지도 해당될 수 있고, 또 起源보다는 創立이 신앙공동체 결성과 탄생으로 인한 지역 교회(local Church) 출발 의미 표현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創立과 創設은 그 의미와 용도가 대동소이 하면서도 그 용도와 의미가 조금 相異한 말들이니, 예컨대, 定立, 確立, 立身, 對立, 孤立, 獨立, 創立, 등의 낱말들과, 특수부대 創設, 특정 기구 設置, 假設, 設或, 設令, 設使, 등의 낱말에서 보듯이, 立은 세우다 서다의 뜻이고, 設은 늘어놓다, 設置하다,의 뜻이고, 때로는, “임시로, 가정(假定)”의 의미로까지 전제되어 많이 쓰이듯이, 지속적인 성격을 띤 어떤 종교단체가 처음 시작되어, 신도 공동체가 결성되는 역사에는, 창립이 창설보다 국어 상식에 더 맞는 말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창립이란 말은 우리나라 국어상 많은 사회 단체 결성에 대하여도 온 국민이 사용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 한국천주교회 창립 동기와 사관(史觀)


 한국천주교회 創立史가 서양 열강들의 西勢東漸史 결과나 그 영향, 즉 外勢의 정치 군사적 관계에 힘입어서 이루어진 사실로 보려는 이들도 있고, 國內 정치 세력이나 학파들간의 당쟁에 의한 결과나 그 영향에 중점을 두어 논하려는 이들도 없지 않으며, 또 부귀공명과 입신양명을 지향하는 과거시험 준비과정에 있는 선비들이나, 혹은 과학, 수학, 의학, 문학, 같은 학문 연구 중 우연한 계기에 종교에 이르게 된 것으로 생각하려는 이들도 있으며, 또는 사업이나 상업이나 해외 무역이나 해외 관광 같은 현세적이며 일반적인 우연한(accidentalis) 계기에 된 것처럼 서술하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한국 안에서 한국인들의 종교적인 자발성과 자생적인 노력에 의한 점을 더 중요시하여 이해하고 설명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절대 다수 역사가들과 최고 사목자 교황의 확고한 결론이다. 사실 天主敎會 뿐 아니라, 대부분 모든 종교의 출발은 진리탐구 노력이나 절대자 神에 대한 초자연적 차원의 영감이나 得道로 출발하게 마련이며, 더구나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은 선교사 없이 한국인들 자신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진리 탐구를 위한 講學에서 자생적인 교회 창립의 근거를 찾아, 이해하며 설명해야 하는 것이, 오늘의 우리 한국 史學人들이 나아가야 할, 특징적이며 자랑스러운 길이 아닐 수 없다.

 

ⓓ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의 기질


 전 세계 교회사 학자들이 공인하고, 로마 교황이 공식으로 언급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한국천주교회 창립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우리겨레가 선사시대부터 先天的(apriori)이라고 할만큼 타고난 敬天愛人의 종교적 정신과 열성과 역사적 과정을 부정할 수가 없다. 한국의 모든 종교 創始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 겨레가 선천적(apriori)으로 타고난 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경우, 韓民族의 출중한 젊은 英才 성현들이 성령의 感導(inspiration)와 천주님의 초자연적 은총의 도우심에 힙입어, 순수하고, 진솔하고, 소박하고, 겸손하고, 열성적인, 실로 종교적 자세로, 우주만물의 진리를 탐구하고, 조물주 천주를 찾으며, 나아가, 儒.佛.仙, 등 여러 종교의 道理를 비교 연구하면서, 천주교 교리의 최고 우월성을 터득하고 믿으며 실천함으로써, 아직 천주교신자도 아닌 未信者 상태에 있던 젊은 선비들이 선교사 없이, 성직자나 기존 신자들의 참여나 도움 없이 자발적으로 한국천주교회를 창립하였음이 우리나라 천주교회 창립사의 위대한 특징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와 우리 선조들의 특출난 자질을 가장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

 

ⓔ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논술의 방향과 자세


 聖 Antoine Daveluy 주교가 조선 순교자 비망록 서문 첫머리에서 밝히는 것처럼, 또, 신구약 성서 기록자들이 중점시하며 취하고 있는 집필 자세처럼, 천주님의 섭리와 은총의 도우심에 대하여 한국교회 창립선조들의 순응성과 희생적인 노력 위주로 교회 창립사를 거론하며 서술함음 매우 마땅한 일이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남긴 당사자들의 문헌 기록들의 내용을, 천주교회 최고 권위를 지니고 있는 로마 교황의 공식 가르침과 공의회가 선언한 교의를 거울로 삼아 재조명해야 하며, 따라서 로마 교황의 공식 문헌역시 최우선 근거자료로 삼아야 하며, 적어도 근래에 와서 발견된 역사자료들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를 논해야 할 것이다.

 

ⓕ 한국천주교회의 創立史와 창립 후의 發展史 구분


 한 나라의 건국사(建國史) 자체와 건국 후의 국가 발전사(發展史)가 구분되듯, 예수 아기의 탄생과 탄생 후의 양육(養育)이 구분되듯, 한국천주교회의 탄생, 즉 창립과 그 후의 발전은 비록 연결선상에서라도 구분하여 설명해야 한다. 한국천주교회의 탄생, 즉 창립사는 세계 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것이다. 그러나 전교와 박해와 순교의 발전사는 다른 모든 나라 교회 역사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고, 흔히 볼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선은 創立史의 가장 중요한 본질적 요소와 내용이 되는 우리 신앙선조들의 자발적인 진리 탐구 노력과 신앙 공동체 탄생을 이룩한 창립성조들의 인물과, 교회 탄생과 신앙공동체 결성 과정이 되는 천진암 강학에 대하여 알아보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며, 이어서, 관계된 장소 천진암에 대해서뿐 아니라, 특히, 관련 주동 인물, 즉, 중심적인 창립 主役, 즉 광암 이벽 성조에 대하여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벽 성조를 모르고, 천진암 강학을 모르면서, 한국 교회 창립사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일반 관례와 국어 상식의 표현


  우리 국어에서 가문이나 종교나 학문이나 思想을 처음 개척한 선구자들에 대하여, 始祖, 中始祖, 婢祖, 등, 先祖의 표현을 쓴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을 聖祖로, 안또니오 가우디를 현대건축학의 始祖로, 民約論을 쓴 루쏘를 민주주의 이론의 현대적 始祖로 부른다. 특히 종교의 경우는 존경어를 더하여 부르는 것이 관례다. 고대의 샤카무니 꿔타마 싣다르다를, “부다”, “부처님”(Budha, 佛陀, 大覺者, 先生, 聖賢, 등의 의미)으로 존칭어를 명칭처럼 부르며 사용하듯, 또, 東學의 始祖 崔濟愚는 大神師로 호칭하며 예우하듯,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주도적인 지도자로, 광암 이벽 선생을 賢友賢士들이 爲上하였다는 - 니벽전의 표현이나, 대 스승이었던 광암 이벽, 큰 스승(‘Maitre’다불뤼 주교의 표현)을, 이벽 선생이라는 단순하고 흔한 말보다는, 한국천주교회의 先驅的인 새 종교적 분야의 개척자에 대한 경칭으로, 한국교회의 始祖(一世 - 王朝實錄의 표현), 즉, 聖祖’라고 호칭함이 당연한 상식이라고 하겠으며, 이에 관하여는 후에 좀 더 논하는 기회가 올 것이다.

 

II. 외국 선교사들의 다양한 한국 복음화시도와 활동:

 

해외 선교사들의 다양한 시도와 활동은 한국교회 창립 연도에 대한 상이하고 다양한 여러 주장들과 표현을 하게 하였다. 즉, 한국천주교회는 누가, 어디서, 언제,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가에 관하여 역사가에 따라 상이한 주장이나 견해를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므로, 그 중 대표적인 의견들을 몇가지 추려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겠기에, 이를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특히, 한국천주교회가 언제 시작되었느냐 하는 창립연도 문제는 그 연도에 수반된, 관련 장소와 인물들과 업적을 들어내게 마련이고, 교회 歷史學은 司牧神學 분야에 속하듯, 창립선조들과 연고지에 대한 후대인들의 신심과 본분이 기념사업과 현양사업으로 거론되고 전승되기 때문이며, 한국천주교회 창립연도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나 주장을 미리 훑어보는 것은, 바른 史觀 定立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① 1593년. 임진왜란 때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Cespedes 신부가 일본인 修士 2명의 군종활동

 

세스페데스 신부와 일본 수사들이 침략군의 군종신부로 일본군 부대와 함께 한국 남해안 진해에 上陸하여 곰내(熊川)에 주둔한 일본군 軍營에 몇 달간 머물면서, 조선인 포로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포로가 되어 세례받았다는 국내의 천주교 신앙인들 포로들도 모두 일본으로 끌려가 사라져서, 그 후, 186년간이나 국내에는 천주교 신자 공백기를 지나서야, 1779년에 절정을 이루었던 천진암 강학으로 피어난 오늘의 한국천주교회 창립사가 시작되었다. 즉, 1593년의 선교사 활동이 오늘의 국내 교회사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는 한 때, 일본 군종신부들의 軍宗活動史나, 스페인 예수회원의 宣敎活動史로서 매우 고맙고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는 있으나, 오늘의 한국천주교회 창립사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1593년, 임진왜란 때의 일본군 조선 침략과 잔인무도했던 조선 백성들 집단 살육을 일삼으며, 남해안을 점령하고 진해에 선교사들이 왜적과 함께 상륙한 연도를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연도라고 주장한다면, 당시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세스페데스 신부와 일본인 수사 2명을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이라고 부르며 존경해야 하며,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에게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일본군 주둔지 군진영(軍陣營)을 한국천주교회 발상지나 창립지로 삼아, 한국천주교회의 출발지로 인정하고, 기념해야 하며, 성역화 사업도 피할 수 없게 되지 않을까? 스페인 해군들의 남미 침략과 원주민 대량 학살, 스페인 천주교 선교사 신부들의 남미 선교 당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인 평신도들이 자발적인 진리 탐구의 강학으로 출발하여 세웠다는 거룩한 역사는 무시되고, 묻혀지고, 거부되어, 망각될 것이다.

 

지난 1993년 12월 30일, 로마에서는, 예수회 주관으로, 한국천주교회 탄생 (il Natale della Chiesa coreana…. 400 anni….) 400주년 기념<1593~1993) 경축행사가 대규모로 거행되었다.(1993. 12. 31. L'Osservatore Romano, 교황청 日刊紙의 한국천주교회 탄생 400주년 기념행사 보도 기사, 및 Juan Ruiz de MEDINA, S. J. Origenes de la I glesia Catolica Coreana des de 1566 hasta 1784, Roma, 1986,. 특히, 스페인 선교사 세스페데스 신부가 일본군과 함께 조선 진해에 상륙한, 선교사 도착 자체를 한국천주교회의 탄생으로 기념하려는 견해도 있었다. 선교사들의 열성과 희생에 대하여 우리는 존경하며 감사해야 하지만, 오늘의 한국교회의 탄생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② 1645년.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이경상과 Adam Schall 신부의 활동.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서장관 묵암 이경상(광암 이벽 성조의 직계 6대조)의 주선으로 북경 남당 성당 주임 독일인 예수회원 Adam Schall 신부를 찾아가 예방하고, 교분을 맺고, 조선인 시종관 3명이 소현세자와 서장관(비서실장) 이경상의 허락으로 아담 샬 신부한테 영세하였다. 그런데 이미 영세한 중국인 신자 5명과 함께, 영세 신자 8명이 모두 소현세자와 서장관 이경상을 따라, 조선 국내로 귀국하도록, 아담 샬 신부(한국명, 湯若望)가 주선하여, 사실상 조선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으로 귀국하게 하였고, 왕궁으로까지 들어가 머물 수가 있었다.

 

그러나 1637년 남한산성 함락 당시 송파 삼전도에서 靑 나라 장군한테 온갖 모욕을 당하며 항복한 당시 조선 임금 仁祖는 볼모로 붙들려 갔다가 1645년 봄 8년 만에 귀국하는 소현세자가 너무나 親靑派가 되었다는 이유, 등으로 세자를 증오하던 정적 신하들에 의하여, 세자는 귀국한 후 달포가 지나자 즉시 독살되었고, 중국인 신자 5명은 본국 중국으로 추방되었으며, 조선인 영세자 시종관 3명은 어떻게 조치되었는지, 지금까지 그 행방이 묘연하여 종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역시 독일인 출신 위대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신부의 宣敎活動史나, 조선 使臣團員들의 천주교 해외 入敎史로서, 그 의미와 가치가 매우 고맙고 거룩하지만, 소현세자 독살과 동시에 낙향하게 된 서장관 이경상의 急死로 끝났기 때문에, 그 후, 135년 동안 천주교 신자 不在의 공백기를 지나서야 1779년에 절정을 이루어 시작된 오늘의 한국천주교회 창립사로 연결되지는 않고 있다.

 

만일 1645년,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이경상이 볼모로 붙들려 갔던 시기에 소현세자, 이경상 등이 아담 샬 신부를 만나 신앙을 담론하던 해를 한국천주교회 창립연도라고 주장한다면, 독일 출신의 예수회원, 아담 샬 신부를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로 인정해야 하는 동시에, 중국 북경의 남당천주교회를 한국천주교회 창립 성지로 삼게 되며, 역시 한국교회는 그곳을 가꾸고 꾸미며, 성지로 삼아, 한국 신도들은 그곳을 모른 체할 수 없으며, 순례하러 다녀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인 평신도들이 자발적인 진리탐구의 강학으로 출발하여 마침내 교회를 세웠다는 史實은 무시되고, 묻혀지고, 거부되어, 망각될 것이다.

 

③  1674년 로마 교황이 Gregorio Lopez 나문조(羅文藻), 南京 교구장을 高麗 代牧區長으로 임명.

 

남경 교구장 임명에 있어서, 교황 클레멘스 10세는 1674년에 중국인 최초의 신부였던 Gregorio Lopez 나문조(羅文藻) 신부를 남경교구장 주교로 임명함과 동시에 高麗의 교황청 관리 대목구장(Administrator Apostolicus)으로 겸임 임명하므로서, 사실상 高麗 代牧區가 설정되고, 대목구장이 임명된 것이다. 즉, 아직 천주교 신자가 전무한 조선이 대목구로 설정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교구 설정사에 한 페이지가 될 수는 있어도, 그 후 105년간 공백기를 지나서 1779년 시작된 오늘의 한국교회 창립사로 연결되지는 않는 것이다.

 

만일, 1674년 남경 교구장으로 중국인 최초의 사제요, 최초의 주교였던 羅文藻 주교 임명을 한국천주교회 창립으로 인정한다면, 중국인 나문조 주교를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로 인정해야 하고, 남경의 주교좌 대성당을 한국천주교회 창립 성지로 삼아야 하며, 역시 한국교회는 그곳을 가꾸고 꾸미며, 성지로 삼아, 한국 신도들은 그곳을 모른체할 수 없고, 순례하러 다녀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인 평신도들이 자발적인 강학으로 시작하여 세웠다는 史實은 무시되고, 묻혀지고, 거부되어, 망각될 것이다.

 

④ 1779년. 천진암에서 이벽 성조의 자발적인 강학과 신앙 공동체 구성.

 

천진암에서 이벽 성조를 중심으로 젊은 20대 전후의 선비들이 개최하던 講學이 절정에 오르던 시절, 당대 저명한 학자 권철신도 참석하던 강학을 통하여, 유교와 불교와 도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의 도리를 비교 검토한 후, 마침내 천주교의 탁월성을 발견하고 믿고 실천하므로써, 天學叢林, 즉 천주교 신앙단체가 결성되고, 십계명을 지키고, 천주교회 법규를 실천하며, 이벽 성조는 天主恭敬歌를 지어 부르게 하며, 기도하고, 심지어 양력과 요일이 아직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않던 당시에 음력으로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을 주일로 제정하여 지키며, 신구약 성경의 대의를 요약한 詩文,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지어, 천주교회 교리 교과서처럼, 부르는 대로 제자들이 받아서 적게 하고, 배우게 하며, 더욱이 성금을 모아 힘을 합쳐, 이승훈 진사를 이벽 성조의 대리자 겸 자신들 공동체의 대표자로 북경 천주교회에 파견하여, 성물구입과 영세까지 하고 돌아오게 함으로써, 오늘의 한국천주교회로 발전하게 하였다. 약 15년간(1770~1784) 계속된 天學 講學과 이벽성조의 활약은 세계 교회사에 유일하게 빛나는 자발적인 진리탐구와 복음선포의 교회창립이었다. 전 세계의 교회 역사가들이 경탄하는 사실이다. 특히 로마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이벽 성조와 젊은 선비들의 자발적인 진리 탐구 강학과 한국천주교회 창립을, 사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전 세계 추기경, 대주교, 주교들과 함께 전 세계에서 모인 2만이 넘는 신도들 앞에서, 한국 103위 순교 성인 첫 기념일 미사를 공동으로 집전하면서 이러한 역사(…. 1779…. questi laici coreani…. fondatori della Chiesa Cattolica in Corea….)를 공식으로 인정하며, 격찬하는 강론으로 선언하였다. 또한 천진암을 한국천주교회 탄생지(Chon Jin Am Locus Natalis Ecclesiae Catholicae in Corea)로 문서로 천명하였다.

 

⑤ 1784년. 이승훈 진사 북경파견과 영세.

 

그런데, 이벽 성조께서 파견한 이승훈 진사가 북경 천주교회에서 프랑스 출신 예수회원 요셉 드 그라몽 신부로부터 영세하고 귀국함으로써, 비로서 한국천주교회가 처음 시작되었다고 기술한 프랑스 선교사 샤를르 달레신부의 저서를 따라, 아직도 이 1784년을 한국교회의 기원으로 알고 말하는 이들이 없지 않으나, 이는 세례성사를 천주교회 탄생의 근거와 출발 시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즉, 지역교회 출발은 천주교신자 공동체의 결성을 말하는 것인데, 세례를 받아야만 천주교신자가 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아야만 천주교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천주교 신자라야만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니, 세례 성사를 집행하기 전에 사제는 세례를 받고자하는 요청자가, 천주교 교리를 믿느냐고 수차 질문하면서, 천주교 신자인지 아닌지를 사제는 최종적으로 재삼재사 질문, 확인해야만 하게 되어 있다. 천주교를 믿지 않는 미신자나 무당이나 무신론 공산당원은 세례를 받지도 않을뿐더러, 받아도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성사 거행으로 교회가 탄생하지 않고, 오히려 세례를 성사로 설정하고, 거행하고, 관리하는 주체가 교회이므로, 교회는 세례 거행보다 先在하고 先行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세례는 일반적으로 水洗와 순교로 받는 血洗와 열성으로 받는 火洗가 있는데,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께서는 화세와 수세와 혈세를 모두 받은 위대한 聖賢들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세계 교회사에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이다.

 

만일, 1784년 북경 북당에서의 이승훈 진사 영세를 한국교회 기원이나 창립으로 본다면, 한국 땅을 밟아보지도 않은 프랑스 선교사 요셉 그라몽 신부를 한국교회 창립자로, 혹은 창립 스승으로 인정하게 되고, 북경 북당을 한국천주교회 탄생지로 인정하며, 우리 한국 신도들은 북경의 북당 성지 순례 뿐 아니라, 기념사업도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는 그곳을 가꾸고 꾸미며, 성지로 삼아, 한국 신도들은 그곳을 모른체 할 수 없고, 순례하러 다녀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한국 땅을 밟아보지도 않은 프랑스 선교사 요셉 드 그라몽 신부의 고향에도 한 조각 돌을 세워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인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세웠다는 빛나는 史實은 무시되고 망각될 것이다.

 

⑥ 1795년, 포르투갈 선교사 북경 교구장 Alexander Gouvea 주교와 중국인 周文謨 신부.

 

포르투갈 선교사로서 북경 교구의 교구장이었던 Alexander Gouvea 주교가 중국인 周文謨 신부를 조선에 최초 주임신부로 파견하므로써 조선에서 성사를 집행하며 교회를 발전시켰는데, 일부 포르투갈 역사가들(토마소 교수, 등)의 주장대로, 이 해를, 중국 북경에 머물며 한국 땅을 밟아보지 못한 포르투갈 선교사, 알렉산델 구베아 주교에 의하여 한국천주교회가 창립된 해로 여긴다면, 포르투갈 선교사 구베아 주교와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로 인정하고 모셔야 하며, 북경의 주교좌 대성당을 한국천주교회 창립 성지로 삼아야 하고, 역시 한국교회는 그곳을 가꾸고 꾸미며, 성지로 삼아, 한국 신도들은 그곳을 모른체할 수 없고, 순례하러 다녀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포르투갈 구베아 주교의 고향, 포르투갈의 코임브라와 중국 주문모 신부의 탄생지, 등에, 한조각 돌이라도 세워, 감사와 존경의 기념사업을 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인 평신도들이 자발적인 강학으로 시작하여 세웠다는 史實은 무시되고, 묻혀지고, 거부되어, 망각될 것이다.

 

⑦ 1831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조선 교구 설정과, Bruguiere 소주교 임명.

 

이 역사는 한국의 敎區設定史이지만, 교구 설정과 교회 창립과는 상이한 것이다. 사도시대에 예루살렘, 에페소, 코린토, 안티오키아, 테살로니카, 등에 교구는 설정되지도 않았고, 교구는 없었지만, 천주교회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듯이, 사도 바오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신자들의 공동체가 있던 고린토, 등의 지역에 교회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교구는 사목상 관할 구역이나 영역을 분할하여 설정되는 것으로, 먼저 설정된 교구 내에 새로운 교구설정으로 신자공동체가 후에 자동적으로 결성되지는 않는다.

 

서양의 선교사들이 아직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아시아 동쪽 끝 동방의 조선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성직자 없이 수차례에 걸쳐 박해를 받으면서도(1785, 1791, 1795, 1801, 1815),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북경 3천리 험로를 오고가면서 성직자 파견을 애타게 간청하던 열성과 신앙심으로 쓰여 진 1820년 대 후반에 정하상, 유진길, 등, 조선 교우들이 보낸 수차의 서한을 읽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던, 교황청 포교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이 1930년 교황이 되어 그레고리오 16세로 즉위하자마자, 각가지 난관을 극복하면서, 즉시 조선 신도들을 돌보는 교구 설정을 서둘러 주선하여, 마침내 1831년 조선교구 설정과 동시에,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부르기에르 소신부를 교구장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이미 1795년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파견되었을 때, 한국교회는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활동으로 4,5천명의 영세신자들이 있었는데, 당시의 통신과 집회와 통계 작성과 보고서 송달이 쉽지 않고 신자들이 숨어 다니던 박해시대 상항을 참고하면, 실제의 영세신자 수는 훨씬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교구 설정과 교구장 주교 임명은 한민족의 구원을 위한 천주님의 크신 은총이다. 그러나 조선에 신도들이 있는 교구가 설정될 수 있도록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킨, 조선 신자들의 신앙심과 순교의 피는 얼마나 거룩한 앞선 희생이었는가? 대목구나 교구, 대교구, 등의 설정은 교회 사목 행정상의 역사로서,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 창립사와는 관점과 차원이 다른 것이다. 새 교구는 기존 교구에서 분리 설정되거나, 관할 구역이 조정되거나, 통합되거나, 때로는 폐지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세계 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한국 천주교회 탄생 과정, 즉 한국인들에 의한 自生的인 교회 창립사와, 다방면에서의 외국인 선교사들의 희생적인 한국선교 활동사는 그 내용과 성격과 차원이 다른 것임을 식별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흔히, 1831년에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고 말하고 쓰지만, 사실은 엄밀히 말해서, 로마 교회의 정식 교구(Diocesis) 설정은 아니었고, 다만, 교황청 관리자 代牧區(Vicariatus Apostolicus)였다. 또한 흔히 “조선교구(Coreae)" 설정이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漢陽 代牧區”, 즉, 지금 쓰는 말로, “서울 代牧區”였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Mexico가 나라 이름이며, 동시에, 수도 서울의 명칭으로 共用하고 있듯이, 당시 로마 교황청 뿐 아니라, 유롭에서는 조선의 首都 한양(서울)을 잘 모르고 있었고, 首都 漢陽도 朝鮮(Corea)이라고 흔히 부르며, 서울의 명칭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나라 이름을 교구 명칭이나 대목구 명칭으로 쓰지 않고, 항상 지방 이름이나 도시 이름을 교구 명칭으로 쓰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로마 교구, 뉴욕 교구, 동경 교구는 있어도, 일본교구, 미국 교구, 프랑스 교구 등은 없듯이, 조선 교구 설정은, 서울 교구 설정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1674년의 고려 대목구(vicariatus) 설정은 1831년에 역시 조선대목구(vicariatus)로 불리었고, 훗날 서울, 대구, 광주, 3개 대교구(archidiocesis) 승격과 동시에 전국의 모든 교구가 정식 독립 교구(diocesis)로 승격되었다.

 

수원교구는 서울교구에서 1963년에 분리 독립되었는데, 이 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된 기념적인 해이며, 천진암 성지의 명칭이 남상철 회장님과 정원진 신부님의 희생과 정성어린 노력으로 최초로 천주교회 홍보 정기간행물인 주교회의 기관지 경향잡지에 오르면서, 한국교회 창립의 특징인 우리 선조들의 자발적인 강학 현장이 소개되고, 천진암 성지 개척의 움이 트고, 싹이 돋기 시작한 역사적인 해이기도 하다. 하느님 섭리의 신묘함이여!

 

III.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자의 천진암 강학회와 천학총림(天學叢林)

 

⓵ 천진암 강학과 천학총림 활동에 대한 로마 교회의 평가.

 

세계 모든 나라의 천주교회가 외국 선교사들, 주로 성직자들에 의하여 전파되었으나, 우리 한국교회만은 선교사 없이, 아직 천주교 신자들이 아니었던, 광암 이벽 성조를 중심으로 조선의 젊은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함께 진리를 탐구하고, 천주를 알아 섬기며,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는 신자 공동체가 결성되어,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아직 양력을 모르던 시절, 음력으로 매월 초이레 날, 열나흗 날, 스무하루 날, 스무여드레 날을 임시 주일로 정하여, 노동을 하지 않고, 기도와 묵상으로 지내며, 10계명을 지키고, 이벽 성조께서는 聖敎要旨를 저술하고, 아직 聖歌가 전혀 없던 시절, 天主恭敬歌를 지어 부르며, 자신의 대리자겸, 자신들 단체의 대표자로 이승훈 진사를 북경 교회에 파견하여, 세례성사까지 받아오게 하고, 귀국 후 7 聖事 중 일부 세례성사를 거행하며, 각 지역을 나누고 담당자들을 정하여 사목하였다.

 

이렇게 전 세계 교회사에 있어서 유일하게 빛나는, 실로 독특한 교회 創立史를 남기었다. 그리하여 국내외의 모든 敎會史家들은 물론, 근래의 로마 교황들께서도 한국인들에 의한 자발적인 교회창립을 언급하며 격찬하였다. 더욱이 聖“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은 103위 순교복자들을 諡聖하시며 한국을 다녀가신 후, 약 6개월 후에, 로마의 사도 성 베드로 대성당 사도좌에서 공식강론을 통하여, 이벽 성조를 비롯한 최초의 한국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자들’이라고 해야 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한국 천주교회 탄생지 천진암 성지와, 5위의 하느님의 종 이벽, 권일신, 이승훈, 정약종, 권철신,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의 묘가 있는 수원교구는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교구로서, 敎區史에서는 물론, 교구민의 신심과 교구 사목에 있어서도, 우리나라 교회의 뿌리와 줄기와 얼굴이 되는 특징적인 창립사를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이며, 전국 모든 교구도 예외는 있을 수 없다. 현재 전 세계의 보편 교회 차원에서도 한국교회 창립선조들을, 전 세계 모든 未信者들의 자발적인 입교를 위하여, 모범과 주보로 삼도록,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시성추진위원회에서는 1979년부터 지금까지 노력하고 있다.

 

특히, 103위 한국순교복자들을 시성하신 성 요한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1984년 10월 14일(주일), 로마 사도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청과 한국의 모든 주교들과 세계 각국에서 모인 추기경, 주교들, 사제들과 함께 2만 5천여 명 신도들이 참석한 103위 한국 순교성인 대축일 첫 기념미사를 집전하시면서, 대미사의 공식 교황 강론을 통하여 한국천주교회 기묘한 창립사를 공식 재확인 발표하셨다.


“….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실상 진리 탐구에 충실한 한국의 저 평신도들 -즉, 한국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모임인 한 단체는 중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당시 북경천주교회와의 접촉을 과감히 시도하였고, 특히 새로운 교리서적들을 읽고, 그들 스스로가 알기 시작한 생소한 신앙에 관하여, 자기들을 밝혀줄 수 있을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남녀 이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fondatori)」이라고 해야 하며,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 없이 -비록 2명의 중국인 사제들이 잠시 있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1836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한국천주교회의 특징이며 자랑이 평신도들에 의한 자발적인 교회창립이라면, 언제, 어디서, 누가, 또 어떠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교회를 창립하였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물론, 특히 史學人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본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주도적인 중심인물로서, 광암 이벽 성조와 자발적인 진리탐구의 천주교 교리 연구와 신앙실천의 천진암 강학회를 모르거나 소홀히 하면서 한국교회 창립사를 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선 이벽 성조에 대하여, 그리고, 천진암에서의 교리 강학에 관하여 알아보자.

 

⓶ 하느님의 종, 요한 세자 광암 이벽 성조의 가문.

 

광암 이벽 성조와 더불어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자발적으로 한국 교회를 창립한 동기와 방법과 희생과 그 과정이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자발적인 진리탐구 강학회였음을 성 안또니오 다불뤼 주교는 그의 ‘한국 순교사 비망록(Notes pour l'histoire de martyrs en Corée.)에서 밝히고 있다.“진정한 의미(proprement)의 조선 천주교회 역사는 이벽의 저 위대한 강학(grande conferences de Ni-Piek)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천주께서는 조선 복음화의 첫 始動(le premier branle)을 걸기 위하여,,, 도구로 선택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경주 李氏 가문의 字는 德祖, 号는 曠菴이라고 하는 李檗이었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자 광암 이벽 성조께서는 1754년 경기도 포천군 內村面 花峴里 新基洞에서, 慶州李氏 李溥萬과 淸州韓氏를 부모로 하여,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이벽 성조의 家門과 선조들은 우리나라 역사상 매우 유명한 救國 忠臣들을 배출한 집안이니, 근세(近世)에 와서 우리나라가 원(元) 나라, 日本, 명(明) 나라와, 청(靑) 나라, 4대 强大國들의 침략으로 國家가 存亡의 기로(岐路)에 처하였을 때, 국제관계를 담당하여 국가와 王權을 수호한 대표적인 학자 출신 충신들을 많이 배출한 家門이다. 특히 이벽 성조에게 영향을 준 직계 先祖들 중에는, 학문과 思想과 德性과 外交와 治世에 있어, 원(元)․ 일본(日本),명(明)․ 청(靑), 3대 강국들의 武力에 맞서서 활약한, 국가 민족을 위하여 忠烈의 저명한 명인(名人)들이 적지 않다.

 

우선 고려(高麗) 末, 元 나라의 몽고족이 60여 년간 高麗를 長期 침략하였을 때의 益齊 李齊賢(1287~1367)과, 壬辰倭亂 7년 전란 때의 知退堂 李廷馨(1549~1607), 丙子胡亂으로 昭顯世子의 인질생활 8년간의 黙菴 李慶相(1603~1647), 등은 국가를 위하여 당시 國王보다 더 유능하였고, 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을 직계 先祖로 모신 이벽 성조께서는 정치, 외교 분야에 있어 學者 先祖들의 전통과 영향을 모르쇠 할 수가 없었고, 사상과 종교적 면에서도 당연히, 다분히, 어느 정도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229년부터 반세기 동안 7차에 걸쳐, 元나라가 고려를 침략하여, 거의 57년간이나 고려의 王들이 북경에 인질로 끌려가곤 하였을 때, 益齊 李齊賢의 업적은 방대하고 출중한 것이었지만, 특히 忠宣王과 함께, 북경에서 [萬卷堂]이라는 연구소 書院을 열어, 元나라 北京 학자들 중에, 요수(姚燧), 염복(閻復), 원명선(元明善), 조맹부(趙孟頫), 같은 哲學, 性理學의 大家들과 함께 講學하며, 交分을 두터이 하면서, 國權回復을 위한 高麗의 人才養成에도 힘썼고, 思想的으로도 高麗에 性理學을 定立하였으며, 忠宣王과 함께 머나먼 泗川省 神秘의 名山, 峨眉山에까지 가서, 天地神明께 祖國 高麗의 國權回復을 祈願할 정도로, 宗敎的 性品과 精誠도 갖춘 門下侍中(현 국무총리에 해당)으로서, 익제 이제현은 당시까지만 해도, 高麗人으로서는 최초로 장기간 최장거리 아시아와 동유롭의 세계 탐방과 견문을 쌓았으며, 국권회복에 일생을 바친 학자 출신 政治家였다. 특히 대제국 元 나라는 징기스칸 때부터 국민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어, 多宗敎 국가였으므로, 익제 이제현은 동유롭에서 천주교와 접촉할 수 있었고, 후에 많은 유라시아 서적들을 가지고 귀국한 이제현은 後學 養成에 힘쓰면서, 우리나라에 性理學의 기초를 확고하게 세웠다.

 

1593년 말부터 잔인하게 시작된 7년간의 壬辰倭亂 때는, 위의 익제 이제현의 5대손이 되는, 지퇴당 이정형이 피난 생활의 宣祖 임금을 안전하게 수호하며 수행하였고, 明나라에까지 파견되어 援兵을 요청하여, 왜적을 물리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더욱이 이정형은 자신보다 14세 年下의 지봉 이수광(1563~1628)과 절친한 선배 정치인으로서, 북경을 왕래하면서, 이수광으로 하여금 많은 西洋 서적들, 특히, 天主實義, 職方外記, 七極 같은 天主敎 서적들을 朝鮮에 최초로 들여올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더욱이, 이수광이 그 후 집필한 [芝峯類說]은 우리나라 實學 胎動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그 배후에는 지퇴당 이정형의 공헌을 무시할 수가 없으니, 조국 수호와 韓民族 開化와 祖國 近代化, 및 社會改革에 큰 업적을 남겼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30 여 년이 지난 후, 1637년에 만주족이 병자호란을 일으켜,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仁祖 임금의 항복으로, 소현세자(昭顯世子), 봉림대군(鳳林大君), 등이 볼모로 잡혀 갈 때부터 8년간이나, 묵암(黙菴) 이경상(李慶相, 지퇴당(知退堂) 이정형(李廷馨)의 친 손자)은 볼모살이의 소현세자를 안전하게 모시고 지켰으며, 1645년 봄 귀국하기 전에는, 북경에 머물며, 世子와 함께 당시 南堂 천주교회를 건립하고, 주임으로 있던, 독일인 Adam Schall(中國名, 湯若望) 신부와 소현세자 간의 親分과 友誼를 돈독하게 하였다. 특히, 이경상은, 소현세자의 비서실장으로서 조선인 수행원 중에 시종관 3명이 천주교회에 입교하게 하여, 아담 샬 신부한테 세례성사까지 받게 하였으니, 이는 1784년 2월, 북경에서 李承薰(1756~1801) 進士가 프랑스인 선교사 Grammont 신부한테 領洗한 것보다 135년이나 앞서는 일이다. 소현세자와 이경상은 귀국할 때, 中國人 천주교 領洗信者 5명도 더 대동하여, 모두 8명의 영세 신자들을 데리고 함께 귀국하였다. 그러나 귀국 후, 소현세자가 몇 달 안 되어 毒殺로 急死하자, 중국인 천주교신자 5명은 바로 추방당하여 귀국 조치되고,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함께 귀국한 조선인 시종관 천주교 신자 3명은 그 후 종적이 묘연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벽 성조께서는 바로 묵암 이경상의 직계 6대손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훌륭한 집안에서, 先祖 때부터 내려오는 門中의 많은 國內外 서적들을 접하며, 성장하였다. 또한 이벽 성조의 祖父 이달(李達,1703~1773)도, 武科에 及第하고, 호남(湖南)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부총관(副摠管)의 벼슬을 하였고, 父親 李溥萬(1727~1817)은 死後, 이조(吏曹)판서(判書)를 추증 받았으며, 兄 李格(1748~1812)은 武科에 及第한 후, 別軍職官, 黃海兵馬節度使 副摠管, 左捕將, 등을 하였고, 동생 李晳(1759~1829)역시 武科에 及第한 후, 左捕將, 除南兵使, 등의 벼슬을 하였다. 특히 李恒福(1556~1618), 李德馨(1561~1613), 등과 같이, 경주이씨 문중에서는 天才的인 머리와 드넓은 學識과 忠孝의 정신이 出衆하고, 愛國心과 氣魄이 넘치는, 충신 호걸(충신호걸)의 體質을 타고난 名人名士들이 많았다.

 

⓷ 이벽 성조의 소년 시절과 생애.

 

이러한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神童이라 불리던 李檗 聖祖께서는 다섯 살 때(1759) 이미 철이 들어, 사리판단이 어른다웠고, 일곱 살(1761) 때는 經書를 읽고 이해하였으며, 元老 大學者 星湖 李瀷(1681~1763) 선생은 일찍이 10세 미만의 어린 이벽을 보고, 이 아이는 장차 반드시 아주 큰 그릇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고 丁學術은, [李檗傳]에서 쓰고 있다.

 

열다섯 살(1770)을 전후하여, 병조판서를 지낸 권암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당시 양반대가 자녀들의 학업 관습대로, 입산 수학에 전념하느라, 심산궁곡의 불사(佛舍)나 道場을 찾던 여느 出家僧들과도 같이, 결혼생활이나 가정생활에는 마음도, 겨를도 없는 포의(布衣) 선비였다.

 

더욱이, 소년 이벽 성조께서는 1770년부터, 경기도 廣州山脈 앵자산(鶯子山)(一名, 원앙산(鴛鴦山))에 있는 천진암 도장(道場)에 독서처를 정하고, 은거(隱居)하며, 학업과 修道에 열중하였으니, 천진암은 누님 집이 있는 마현에서 30여리 내외 밖에 안 되는 비교적 멀지 않은 거리의 깊은 산속에 있었다.

 

누이 경주이씨(1750~1780)는, 당시 의금부도사, 화순 군수, 울산군수, 진주목사, 등의 지방 벼슬을 하던 정재원(1730~1792)의 장남 정약현(1751~1821)과 결혼하였는데, 당시로서는 명문대가인 경주이씨 가문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라주정씨 정약현에게는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마재(馬峴)에 있는 누님 댁, 즉, 丁若鉉의 집에 자주 들리게 되었고, 특히, 정약현의 異腹 동생들인, 丁若銓(1756~1816), 丁若鍾(1760~1801), 丁若鏞(1762~1836), 등 어린 사돈들과 친하였다. 사돈간이 되는 정씨네 어린 소년들이 10여세 전후부터, 이벽 성조께서 入山 修道하는 天眞菴에 자주 놀러가게 되면, 이벽 성조께서는 손아래의 영특한 이 사돈들에게, 天文學과 地理學, 性理學과 醫學, 數學과 曆學, 幾何原本과 天學(天主敎), 등, 서양의 신기하고 새로운 新學問과 天主敎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다른 어디서도 듣지 못하는 해외 서적의 신기한 지식을 가르쳐 줌으로써, 어린 정약용, 정약전의 경탄과 존경과 신망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벽성조께서는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1773), 權相福의 文集을 편찬하면서 [天學考]를 지어, 跋文에 붙였으며, [上天道]라는 글을 지어, 花峴里와 馬峴 중간에 있는 奉先寺의 春波臺에 기증하였다고 전한다.

 

스물다섯 살 때(1779), 성호 이익 선생의 學風을 이으려는 선비들 중에, 정약전, 이승훈(1756~1801), 권상문(1755~1801) 등과 함께 학문 연구와 토론에 힘썼으며, 이때 이미 李檗성조께서는 天學 道理를 아주 깊이 깨닫고, 믿으며, 실천하고 있었다. 특히, 西洋學文과 天學에 관한 서적들은 현고조부 이경상이 소현세자를 모시고 중국에 8년간(1637~1645) 있다가 귀국할 때, Adam Schall신부에게서 받아 가지고 온 것들과, 또 당시 선비들 사이에 유행하던 木版本 新刊으로, 李廷馨(1549~1607) 李睟光(1563~1628), 洪大容(1731~1783), 李頤命(1658~1722), 같은 중국 왕래 사신단 편에 輸入되어, 전파된 것들도 있었다.

 

“李檗 성조께서는 키가 8척이요, 한 손으로 무쇠 백근을 들 수 있었으며, 풍채가 당당하고, 마음의 자질과 정신적 재능이 뛰어났고, 특히 言辯은 기세 좋게 흐르는 강물에 비할 수 있었다.”고, 훗날 프랑스 선교사, Daveluy 주교(1818~1866)는 그가 수집한 자료들과 요한 정약용 승지가 쓴 朝鮮聖敎史記(?)를 근거로, 자신이 첨삭하며 프랑스어로 譯述한 韓國天主敎會 殉敎史 첫머리에서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1979년 6월 21일, 이벽 성조의 묘를 발굴할 때, 가톨릭의과대학 권흥식 박사가 유해를 검측한 결과 키는 178cm였다. 失墓 중에 破墓 직전에 기적적으로 찾게 된 이벽성조의 묘는, 직계 후손들도, 교계에서도, 학계에서도, 심지어, 묘가 있던 고향 마을에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100여년 전의 安重根 義士 墓를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면, 200여년 전의 李檗 聖祖의 墓를 失墓 中에, 破墓 危機에서 救出한 것은 天佑神助가 아닐 수 없다.

 

⓸ 이벽 성조의 천진암 강학과 천주교 신앙 공동체 출현.

 

경기도 광주산맥의 명산, 앵자산 계곡에는 불교 사찰이 천진암 뿐이었고, 학문을 하는 청소년 선비들이 수도와 면학하는 곳으로서, 이벽성조께서는 이미 1770년부터 이곳에 독서처를 정하고 찾아드는 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그 중에는 사돈간이며 두뇌가 명석한 정약용, 정약종, 정약전 같은 젊은이들도 있었다. 당시의 관습을 따라 이벽 성조께서도 종종 부모님들의 생신이나 조상님들의 제사 때에는 下山 귀가하는 기회에, 포천, 마재, 양근, 서울, 여주, 내포, 지역 선비들 모임의 본거지를 찾아 며칠씩 주유천하하며, 천진암 독서처를 비우는 일도 없지 않았다.

 

1779년 기해년 섣달에는 감호의 양근 갈산에 사는 저명한 학자 권철신(1736~1801)이, 서울에서 일백여리나 떨어진 심산궁곡의 한 절간에서,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승훈, 정약종, 이총억, 정약용, 등과 함께 강학회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출타 중에 마재 누님 댁에 들렸던 이벽성조께서 들으시고, 주변 지리와 지형과 도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이벽 성조께서는 눈길을 걸어, 권철신이 당시에 우거하고 있다는 여주군 주어사에 밤늦게 도착하였다.

 

주어사는 앵자산 동편 계곡에 의징대사가 칩거하던 비좁은 경사진 계곡에 30여평 내외의 터를 만들고 지은 부엌 한칸 방2개 정도의 거처와 불상을 모신 한두평짜리 작은 불당이 있던 은신처였다. 그런데 강학회는 뜻밖에도, 앵자산 너머 이벽 성조의 독서처 즉 천학도장이 있는 천진암 암자에서 열리고 있음을 들었다. 천진암은 3천여평 대지에 제법 오래된 큰 절이었으나, 조선정부의 억불숭유정책으로퇴락해 가고 있는 고찰이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저명한 학자요, 연장자인 권철신이 오셔서 강의를 한다는 것을 듣고, 예의상으로나 절친한 동료들과의 우정 상으로나, 더욱이 면학에 대한 열성으로도, 엄동설한을 불고하고, 그 길로 눈 덮인 광주 산맥의 앵자산을 넘어, 천진암에 이르러 촛불을 밝히고 학자들과 경서를 談論하였다.

 

사실 이벽이 중심이 되어 10대 후반의 청소년들이 종종 천진암 모여 天學을 연구하고 생소한 천주교라는 종교를 실천까지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특히 자신의 양아들 권상문도 정약전 이승훈 정약용 등과 함께 한다는 소리를 듣고, 당시 儒學의 대가였던 40대의 녹암 권철신 학자가 이들을 만나 이야기도 듣고, 또 타이르기도 할 겸, 正學(儒敎)에나 열중하도록, 주어사에 잠시 머물 때, 일부러 앵자산 너머 천진암을 찾았을 수도 없지 않다고 보는 견해가 합리적이다. 따라서 老少간의 토론은 진솔하면서도 격렬하였으리라고 본다.

 

10여일 가까이. 여러 날 계속된 강학회에서, 학자들은 이벽 성조의 論證으로 천주교 도리를 대강 깨닫고 믿으며, 아는 바를 즉시 실천하였다. 이 때를 전후하여 이벽 성조께서는 [聖敎要旨]를 下筆하시고, [天主恭敬歌]를 지어, 부르게 하셨으며, 丁若鍾은 [十誡命歌]를 지어 불렀다. 더욱이 七日마다 주일 하루는 天主恭敬에 바쳐야 함도 알았으나,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요일이 없었고, 또 요일을 아직 몰랐으므로, 陰曆으로 매월 초이레, 열나흘, 스무하루, 스무여드레를. 日曜日 主日로 삼아, 온종일 大齋와 小齋, 休息과 祈禱, 讀經과 潛心으로 지냈다. 젊은 선비들의 이러한 임시 음력 주일 제정 실천은, 1890년대 말에 와서 고종황제가 요일을 선포하던 때보다 100여년이 앞서는, 조선 사회개혁 운동의 선구적인 特異한 일이였다. 당시를 전후하여 유학의 중심 사상인 부모 봉제사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녹암 권철신은 虞祭義를 저술하고, 이에 대한 답론처럼 禮의 본래 의미는 숭상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벽성조께서는 崇禮義를 저술하였다.

 

이벽 성조께서는 1784년 봄까지, 약 15년간에 걸친 天眞菴에서의 讀書와 講學을 통하여, 天學을 天主敎로, 天主學을 天主敎會로, 즉 學問的 知識을 宗敎的 信仰으로 昇華 發展시켰으며, 주로 젊은 선비들이 천진암에 모여들기 시작하여 僧團 못지않은 단체, 천학 총림(天學叢林)을 이루게 되었다(賢友賢士, 道友衆徒, 聖敎要旨 下筆, 衆集山寺, 其門下如叢林….).

 

1770년 이벽 성조께서 15세 少年으로 天眞菴에 入山 修道를 시작하였을 때는 천진암 아래 마을과 부근 동네의 어린이들과 10세 미만의 정약용을 비롯한 사돈네 兒童들만이 천진암 서당에 자주 놀러 왔으나, 약 7년 후, 1777년 丁酉년 경부터는 청년 선비들이 모여들었고, 1779년 己亥년을 전후하여는 권철신 같은 저명한 학자들도 참석하는 강학이 절정에 이르렀었다.

 

훗날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가 강진에서 유배생활할 때(1816), 흑산도에서 유배생활 중에 세상을 떠난 둘째 형 정약전 묘지명을 기록하면서, 또 고향에 돌아와(1818) 자신의 회갑(1822년)때 지은 자찬 묘지명과 녹암묘지명, 등의 기록에서, 자신과 둘째형 약전은 일찍부터 아주 어려서부터 광암 이벽을 추종하였으며(從李檗, 嘗從李檗) 天文, 地理, 數學, 曆學, 幾何原本, 新敎之說(天主敎)을 배웠다고 적고 있다.

 

그 후, 65세의 문도공(文度公) 요한 정약용 승지가 백발이 성성한 옛 동무들과 아들들을 데리고 마지막으로 천진암을 찾아와 3일간 머물며 지은 詩에서는,“천진암 올라가는 길은 바윗돌 사이로 실처럼 가늘게 난 오솔길인데, 일찍이 내가 어릴 때 와서 놀던 길이지!(石徑細如線, 昔我童時遊)”하였는데, 조선 시대 童時는 10세 이전을 말하는 것이니, 10세 이상은 少年이라 하여, 11세 경부터 장가를 들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15세에 결혼하였다. 특히, 丁亥年(1827)에 천진암 현장에 와서 지은 詩에`는,“저녁 죽 먹으라고 치던 북소리, 해질렼에 같이 놀던 옛 동무 생각나네(粥鼓斜陽念舊游 - 天眞消搖集)”하였다. 한마디로, 정약용은 어려서 천진암 서당에서 광암 이벽 성조한테 공부한 소년으로서, 천진암은 정약용의 모교(母校)였음을 알 수 있다.

 

⓹ 북경 교회로 이승훈 진사 파견과 천진암에서 서울 수표동으로 교회 이전

 

1783년 이벽 성조께서.는 늦가을에, 자신을 대리하여(délégué) 조선 신도회 대표로 이승훈 진사를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하여, 세례도 받고 오게 하였다. 그런데, 이승훈 진사 파견이 첫 번째가 아니었음을 암시하는 표현이 다불뤼 주교의 글에 비치고 있으니, 이승훈 진사 파견 이전에 수차에 걸친 시도가 결실이 없었다고 하였다(plusier fois, infructuose). 황사영 진사는 1801년 그의 백서에서 이벽 성조의 이승훈 진사 파견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승훈은 대도사 이벽 선생이 기특히 여기던 사람이다. 이벽이 이승훈에게 가로사대, 북경에는 천주당이라는 집이 있고, 거기에는 서양 선비들과 교를 전하는 자가 있으니, 찾아가서 기도서를 한권 구하러 왔다고 하고, 영세도 아울러 청하게. 그리고, 결코 빈손으로 돌아오지 말게(李承薰 布衣 李檗大奇之 檗曰 北京有天主堂 天主堂有西洋西士 傳敎者 求信經一部 幷請領洗,,,必勿空還,,,李承薰如其言,,,,) 이승훈 진사가 1784년 봄, (2월 24일 ?) 북경에서 그라몽 신부한테 영세하고 귀국할 때까지, 약 15년간 天學 信仰의 叢林 本據地로 삼았던 天眞菴 讀書處는, 1784년 늦 봄에(음력 4월 중순) 서울 수표동 자택으로 옮기겨, 서울에서의 첫 천주교 집회소로 삼게 되었다.

 

이벽성조께서는 조선 천주교회를 튼튼히 세우기 위하여, 감호지방의 양근 갈산에서 서원을 열어, 많은 젊은 선비들을 가르치고 있는, 당대에 아주 저명한 대학자, 권철신과 권일신 권득신, 권익신, 5형제들을 천주교회에 정식으로 본격적으로 입교시키려고 힘쓰면서, 이들을 교회 창립의 기초와 기둥으로 삼았다. 또한 사돈간이며 젊은 학자들이었던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및 중인 계급의 통역관 김범우,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등도 입교시켰다.

 

이벽 성조와 이승훈 진사와 권일신 대학자, 이 3명의 한국천주교회 창립주역들은 조선 천주교회 창립에 있어서, 재능과 재산과 목숨과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런데 이때까지만 해도 별로 큰 방해나 박해를 받지 않고,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입교자들이 늘어가고, 더욱이, 양반학자들의 입교자가 중심이 되기 시작하자, 당시 유림의 선비들 반대와 지성인들의 비난과 반대가 시작되었고, 급기야는 천주교를 강력히 반대하는 저명한 인사들과의 토론이나 논쟁도 불가피하게 되었다.

 

⓺ 한국 최초의 儒敎와 天主敎 대표하는 이가환, 이기양, 儒學者들과의 공개 토론회.

 

그래서 당시 고명한 학자로 평판이 높았던 금대 이가환이 천주교 전파에 대한 말을 듣고 “이것은 아주 큰일이다. 저 외국 교리가 이치에 어긋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내가 가서, 이벽을 타일러서,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선비들이 모인 가운데 공개토론회 날짜가 정해져 두 학자의 친구들과 관람자들의 무리가 이 굉장한 공개 토론을 참관하려고 수표동 이벽 성조의 집에 모였다. 사흘 동안 계속된 토론회는 마침내, 이가환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갖다 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이같이 말하며, 이가환은 돌아갔고, 그때부터 천주교에 관하여 다시는 입을 열어 비평하거나, 관여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또한 금대 이가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천주교를 믿고 세례도 받도록 말하였으나, 자신은 이를 보류하고 천주교 신봉과 영세와 전파에 앞에 나서기를 훗날로 미루었는데, 사실은 앞으로 자신이 북경에 가게 될 것으로 알고, 장차 때가 오면, 자신은 이승훈 진사처럼, 북경에 가서, 서양 선비(신부)한테 직접 영세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유교와 천주교에 대한 두 번째 공개토론회가 열리게 되었다. 문의현감 복암 이기양과 공개적인 토론을 하게 되었다. 역시 광암 이벽성조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그 때부터 서울 장안의 선비들은 술렁거리며, 천주교회를 창립한 이벽성조께로 쏠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지도층과 조정에서는 더 이상 수수방관하며 방치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약 1년간 500여명의 입교자를 낼 만큼 이벽 성조의 교회 활동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⓻ 1785년 乙巳년, 한국 최초의 천주교 박해와 이벽 성조의 순교.

 

1785년, 을사년 이른 봄, 드디어 최초의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1년간에 걸쳐 약 500명의 입교 영세자를 낸, 이벽 성조의 수제자들이었던 젊은 학자들은, 명례방 김범우 통역관 집에서 매주 정기적인 집회를 열고 있었다. 교회예절 거행을 위하여 청색도포로 정장하신 이벽 성조께서 안 사랑에서 벽을 등지고, 좌정하시고, 학자들은 이벽성조 둘레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에 책을 들고 엄숙한 자세로 모시고 앉아, 강론과 교리해설을 듣고,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1년 전에 북경 천주교회에 파견되었던 이승훈, 대학자이던 사우거사 직암 권일신, 그 아들 권상문, 정약용과 그 형들인 정약종과 정약전, 그 외에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지황, 김범우, 이총억, 등,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기둥과 같은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이 때 추조금리들이 갑자기 들어와, 수색을 하고, 성물과 성서를 몰수해 가는 동시에, 집주인이며, 중인 계급의 통역관 김범우 선생을 체포하여 가고, 다른 이들은 양반 집안의 자제 신분을 가진 학자들이므로, 그대로 집에 돌아가라고 강제로 귀가조치하여 해산시켰다.

 

그런데, 권일신 학자는 몇몇 다른 양반학자들과 함께 추조판서 김화진을 찾아가, 자신도 김범우와 같은 종교를 신봉하고 있으니, 마땅히 같은 벌을 받도록 해달라고 자청하였으나, 추조판서는 이 양반학자들을 잘 달래다시피 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김범우 역관만은 계속하여 모진 매를 때려, 감옥에 가두었다가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 단장리(오늘날의 삼랑진)로 유배를 보냈다. 김범우 역관은 서울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며, 매맞은 상처가 낫지 않고 점점 악화되어, 2년 후 정미년(1787년), 음력 7월 17일(양력 9월 14일)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1785년 을사년의 천주교 박해는 집회소 주인, 중인계급 김범우 통역관의 유배조치로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조정에서는 양반들을 벌하는 방법이 있었으니, 그것은 당시 사회에서 같은 양반들의 문중세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이 낳은 위대한 성현으로서, 경주이씨 가문의 세례자요한 광암 덕조 이벽 성조의 죽음은, 당시 조선 사회 전체가 그 문중과 그 가정에 무서운 압력을 가하므로써 일어난 결과이므로, 결코 그 가정과 문중 만의 책임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외부사회의 선비들이 동원되어 윤리적 압력을 가하므로써, 그 가정에서 거부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분위기를 몰고갔다. 가정과 문중은, 도저히 다른 길로 빠져나갈 수 없도록, 막다른 골목길로 천주교 신봉자들을 몰고 가던 상황이었다.

 

오죽하면 아버지 이부만이, 대청 마루 들보에 밧줄로 목을 매달고,“네가 천주교를 버리지 않으므로 인하여 종친회 문중에서는 우리 집안을 문중 족보에서 빼버린다니, 그렇게 되면, 집안 형제들이 모두 탈관삭직되고, 패가망신하게 될터인데, 그꼴을 보며 사느니보다, 차라리 미리 네 앞에서 내가 죽는 모습을 먼저 네게 보이겠노라”며, 천주교 신앙 포기를 아들 이벽 성조에게 강요할 정도였다. 부인의 만류로 이부만은 자살이 미수에 그쳐, 이벽성조 순교 후 17년을 더 살았으나, 이 때 이벽 성조의 순교는 사실상 가정과 문중의 한계를 넘어, 당시 조선 사회와 조선 정부가 저지른, 최초의 천주교 박해였다. 따라서, 문중과 가정의 책임이라고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하여 임금이나 부모에게 의사 표시를 가장 강력하게 할 때에는 으레히 불철주야로 식음을 전폐하고 의관을 갈아입지 않는 것이 불가피한 관례였다. 이러한 부모자식 간의 갈등이 극심한 경우 부모가 자녀에 대하여 내리는 최고의 형벌은 먼저 아사벌(餓死罰)로 10여일간 단식시키고, 그래도 숨이 끊기지 않으면, 차마 죽음의 턱을 넘지 못하고, 죽지 못해하는 자녀의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 속히 임종하도록 운명을 돕기 위하여 음독(飮毒)시켜 죽게 하는 것이니, 친 자식을 부모가 차마 칼로 죽이거나, 올가미로 목을 매달아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임금이던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영조 임금이 내린 아사벌로 대궐 안마당에서 뒤지에 갇혀 10여일을 굶겨서 죽였으며, 신유박해 때 경기감사 이익운의 아들역시 강제로 독약을 먹여 毒殺하여 순교하였다. 이벽성조께서도 아사벌로 10여일을 단식하게 된 후에도 운명하지 않자, 주위에서 음독시켰고, 그래도 숨이 끊기지 않자, 두꺼운 이불로 이벽 성조의 몸을 여러 겹으로 멍석말이하듯 몸을 말아서 양쪽을 막아 숨을 못 쉬도록 질식사(窒息死)시켰다.

Daveluy 주교는 이벽이 열병에 걸려서 10일가까이 앓게 되자, 땀을 내지 못하도록 이불로 여러 겹 멍석말이하듯 몸을 말아서 양쪽을 막아 숨도 쉴 수 없게 되자 질식하여 죽게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열병에 걸리면, 땀을 내야만 살아나게 마련인데, 땀을 내지 못하도록, 이불로 겹겹이 말아서 숨조차 쉬지 못하게 하여, 질식사시켰다는 것은 아사벌에 이어, 강제로 음독시킨 후, 질식사시킨 살해였다는 말과 같다. 다만 선교사로서 자료부족으로 페스트 역병에 걸려 앓다가 죽었다고 하나, 그 해 가족과 친척과 온 나라 안에서 이벽 성조만 역병에 걸려서 사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벽 성조께서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였으니, 1785년 乙巳년 6월 14일이었다고, 이벽전에서는 적고 있다.

 

이벽성조께서 운명하신 후, 사돈이며 제자이던 정약용 선생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만사(輓詞)를 지었다. “신선 나라 학(鶴)이 인간세상에 내려오사, 신(神)의 풍채를 보이셨네(仙鶴下人間 軒然見風神), 희고 흰 날개와 깃털, 눈같이도 하얗더니, 닭과 오리 떼들 샘내며 골부리고 미워했었네(羽翮皎如雪 鷄鶩生嫌嗔), 울음소리 구중천(九重天)을 진동시키고, 부르짖던 소리는 풍진세상에 출중하셨었지(鳴聲動九霄 嘹亮出風塵), 어느덧 가을되어 문득 날아가시니, 애달파 탄식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乘秋忽飛去 怊悵空勞人).”

 

일찍이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었던 다블뤼 안주교는 그의 「조선순교사비망록(朝鮮殉敎史備忘記)」머리말 첫 페이지에서, “진정한 의미의 조선천주교회 역사는 이벽의 저 위대한 강학에서 시작하였다.”고 기록하면서, 한국천주교회 창립자 이벽성조의 역할과 위치를 강조하였으며, 정약용도, 이벽이 수령이 되어 천주교회를 전파하였다(李檗首先西敎).”고 기록하였고, 김대건 신부도 조선천주교회 창립에 있어 이벽 박사(李檗博士)의 역할을 먼저 다루었다. 벽위편과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벽은 조선천주교회의 始祖라는 것은 만인이 다 알고 있는 바로다(一世之也共知也).”하였다.

 

⓼ 1791년 辛亥年, 한국 천주교회 2번째 박해와 권일신 沙右居士의 순교.

 

2천 년 전 로마에 복음을 선포한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오로께서는 자신들의 순교로 로마교회(신앙의 공동체, 하느님의 백성)를 축성(Ecclesia Romana consecrata est sanguine eorum)하였기에, 교부들은 교황의 首位權과 더불어 로마 교구의 권위를 높이 인정하였던 것처럼, 광암 이벽 성조의 순교는 천진암 강학의 결실이며, 축성이었다. 따라서 한국교회 창립의 동료들이 모두 외국인 어느 선교사한테 가서 천주교 교리를 배운 것이 아니라, 모두 자발적인 천진암 강학을 통하여 이벽성조로부터 배우게 되었고, 받아들인 신앙을 순교로 입증하고 꽃피웠으니, 권일신은 신해년 박해로 1791년 말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매를 맞아, 양력으로는 1792년 초에 유배 가던 첫 주막 밤(용인 관아, 현재의 龍仁市 駒城面 駒邑) 객사에서, 뒤따라온 자객들의 몽둥이로 맞아 순교하였다.(以邪學杖斃).

 

⓽ 1795년 을묘년과 1801년 신유년의 박해와 이승훈, 권철신, 정약종의 순교.

 

순교자 이승훈과 순교자 정약종은 1801년 신유년 박해 때, 서울 서소문 형장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칼에 목이 잘리는 참수(斬首)로 순교하였는데, 특히 이승훈 진사는 동생 이치훈이 서소문 형장까지 울면서 따라가며, 천주교 신앙을 포기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목숨을 보전한다는 끈질긴 요청에,“무슨 소리냐,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달려 있지만, 물은 위로 오르며 역류하면 연못 자체가 마르고 다하리라”는 명시(名詩)를 남겨 후손대대에 집안에 전하고 있다. (月落在天水上池盡).

66세의 老學者 권철신 역시 1801년 신유년 박해 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刑曹에서 몽둥이로 맞아 순교하였으니(以邪學杖斃),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은 자발적인 진리 탐구 강학으로 받은 천주교 신앙으로 자신들이 세운 한국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자신들의 殉敎鮮血로 축성하여 천주께 바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기초와 씨앗과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의 아들, 손자, 증손자, 고손자, 등, 후손들도 선조들의 뒤를 이어, 교회에 헌신하며, 온갖 수난을 당하고, 유배나 순교로써 조상들한테서 물려받은 신앙을 증거하며, 대부분의 후손들이 수난의 일생을 살았다. 다만, 이벽성조 외아들 이현모(李顯謨)나 황사영 순교자의 아들 황경헌(黃敬憲)처럼, 아버지가 순교할 당시 갓난 어린이거나 서너 살 어린이로서, 즉시 신앙인 친지들과 완전히 격리되어, 천주라는 소리를 전혀 들어보지 못하고 격리된 상태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던 경우를 제외하고는,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 신앙의 길을 걸어갔음을 볼 때, 오늘날까지도 우리 한국 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의 신덕은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맺는 말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세자 요한 광암 이벽, 하느님의 종과 그 동료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권일신, 베드로 이승훈, 암브로시오 권철신, 아우구스띠노 정약종, 5위 우리 신앙선조, 하느님의 종들이, 200여년 세월을 두고 살아 생전보다 더 혹독한 박해와 비난과 모욕을, 오히려 교회 내 일부 후대인들로부터 심지어 배교자 운운하는 모욕을 받고, 失墓 상태에까지 방치되어 있다가, 2013년, 수원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이하여, 로마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모두 하느님의 종(Servus Dei)으로 인준되어, 시복절차를 밟고 있다.

 

그동안 한국천주교회 創立史와 創立聖祖들에 관하여 여러가지 相異한 用語와 표현들이 쓰여져 왔으나,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5위 시성위원회에서 국어학자 이숭녕박사와 역사학자 유홍렬 박사 중심으로 다년간 연구, 검토하고, 확정하여, 이미 30여년 이상 사용하고 있는 용어와 史實들을 간결히 추려서, 이하에 다시 한번 밝히는 바이니, 지금부터는 되도록 이를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천주교회는 創立이라고 하며, 創設, 起源, 傳來, 등의 표현은 사용치 않습니다.

-천진암 성지는 한국천주교회 發祥地, 또는 誕生地라고 부릅니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연도는 1779년으로 말하며, 1593년, 1645년, 1674년, 1784년, 1795년, 1831년으로 쓰지 않습니다.

 

-광암 이벽 성조를 위시하여, 하느님의 종(Servus Dei) 5위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에 관하여   잘못 알려진 사항들은 다음과 같이 바로잡았으니, 참고하기 바랍니다.

 

요한세자 李檗 聖祖

慶州李氏입니다. 스스로 지은 号는 曠菴이며, 兒名 字는 德祖이고(德가 아님) 족보상 冠名은 입니다(이 아닙니다). 탄생지는 경기도 포천군 內村面 花峴里(현재는 花峴面) 新基洞에 있던 父母(李溥萬과 淸州韓氏)의 집이고(廣州의 東部面의 팔당 건너편 斗尾 마을이 아닙니다. 윗 배알미리라고도 하는 두미는 이벽 성조의 살림난 집, 혹자의 말대로 별장(?)이 있던 곳입니다. 이벽 성조는 1754년생이며, 순교연도는 1785년이며(1786년이 아닙니다), 최종 순교한 곳은 위 부모의 집에서이며, 순교방법은 당시 사회 유림들의 압력과 문중의 강압과 불가피한 가정의 박해로, 아버지가 내린 餓死罰로 10여일간 굶겨도 운명하지 않자, 회생불능 상태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측근들이 강제로 飮毒시켰으며,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두꺼운 이불로 멍석을 말듯 몸을 여러 겹으로 말아서 양쪽을 막아, 강제로 窒息死를 시켜(다불뤼 주교의 기록) 순교하였으니, 1785년 6월 14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이벽전). 묘는 교계나 학계나 후손들도 모두 전혀 모르고 있었으나, 1979년 봄 고향 신기동의 갓등산 공동묘지에서 失墓 직전에 卞基榮 신부가 기적적으로 찾아서, 후손들과 주교님들, 학자들과 더불어 합심하여, 발굴하고, 1979년 6월 24일 주일에 명동대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노기남 대주교 공동집전으로 이장미사를 드리고, 천진암 성지로 옮겨 모셨습니다.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權日身 聖賢

安東權氏입니다. 스스로 지은 号는 稷菴이고(菴이 아닙니다). 兒名 字는 省悟이며, 족보상의 冠名은 日身이고, 沙右居士라는 聖賢의 다른 이름(別稱)이 있어서, 무덤 속의 棺에까지 크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탄생지는 경기도 양평군 楊根面 葛山里이고(강상면의 大甘마을이 아닙니다), 1742년 생이며, 순교연도는 1791년 신해년 박해 말에(11월 3일) 체포되어 한 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고, 12월 3일, 유배형으로 서울을 떠나, 용인군 구성면 駒邑에 있던 龍仁 官衙의 客舍에서 첫 주막 밤에, 한양에서부터 뒤따라 온 자객에 의해 打殺 당하였습니다(以邪學杖斃). 흔히 양력을 따라, 1792년 봄에 순교한 것으로 발표되고 있지만, 음력 1791년 말, 신해년 박해의 마지막 순교자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베드로 李承薰 進士

平昌李氏입니다. 号는 蔓川이고(蔓이 아닙니다), 兒名 字는 子述이며, 족보상의 冠名은 承薰이고, 당시 모든 선비들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던 成均館 進士로서, 1756년에 서울 서소문 언덕 위의 磐石坊에서 탄생하였읍니다. 1801년 서소문에서 정약종, 등과 함께 같은 날 칼에 목이 잘리는 斬首刑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묘는 어려서 자라던 할아버지 집이 있는 인천 만수동 先塋에 있었는데, 일부 선교사들이 문명의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해하여, 계속 배교자라고 하여, 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서, 사람 키가 넘는 잡초와 덩굴에 덮여 방치되다시피하여 있었으나, 천진암 성지의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시성추진 위원회 주장과 주선으로, 7대 직계 종손 李炳奎 옹과 7대손 며느님 김경숙 가타리나 여회장이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주선하여, 1980년 11월 말 천진암 성지로 옮겨 모셨습니다.

 

암브로시오 權哲身 大學者는

安東權氏입니다. 스스로 지은 号는 鹿菴이고, 兒名 字는 旣明이며, 족보상의 冠名은 哲身입니다. 1736년에 경기도 양평군 楊根面 葛山里에서 탄생하였고(강상면의 大甘마을이 아닙니다), 장남 權哲身과 權濟身, 權日身, 權翼身, 權得身, 5 형제 모두가 葛山里에서 生長하여, 자택과 서당이 있어, 전국에서 많은 선비들이 모여 實學을 연구하였으며, 순교연도는 1801년 신유년 초 박해 때 체포되어 서울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바로 옥중에서 打殺당하여 순교하였읍니다(以邪學杖斃).

 

아우구스띠노 丁若鍾 明道會 회장


文度公 요한 丁若鏞 承旨의 바로 위의 兄으로, 1760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면 馬峴(마재)에서 生長하였고, 후손 중 丁德鎭 神父에 의해, 丁若銓의 本名은 바오로이고, 号는 巽庵이며, 정약종의 号는 選菴이라고 전승되고 있으나, 丁若銓과 丁若鍾, 두 형제 모두가 평소에 号를 거의 사용치 않았다고 전한다. 丁若鍾 회장은 교회 창립을 위하여 많은 활동을 하고, 1801년 辛酉年 박해 때, 이승훈 진사와 함께 서소문 형장에서 같은 날 斬首 致命하였고, 당시 일곱 살 된 아들 丁夏祥 바오로와 부인이 시신을 거두어 고향 강 건너 黔丹山의 윗두미 산 기슭에 묻었으며, 1951년 1.4. 후퇴 이후, 전란으로 서울 주변의 순교자들 遺骸와 묘를 살피고, 지키기 위하여, 당시 후손 丁旭鎭 신부, 丁德鎭 신부,丁樂鎭 회장, 盧基南 주교, 최민순 신부, 장금구 신부, 등이 합심하여, 수원 사사리 마을의 정씨 집성촌 가족 묘지로 정약종 순교자의 묘는 이장하였으나, 이장시에 약간의 검은 흙 한두 삽 정도 외에는 유골이 없었고(정덕진 신부 증언), 1981년 11월 말, 丁德鎭 신부(당시 수원교구 총대리), 丁海星 신부, 김남수 주교(수원교구장), 유홍렬 교수, 등이 합심 주선하여, 천진암 성지의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묘역으로 최종 옮겨 모셨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관계 사진들과 함께, 천진암 성지 자료집 제5권~제6권(국회도서관, 국립도서관, 전국 천주교 대신학교 도서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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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렬, 『한국천주교회사 上卷』, 가톨릭출판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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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Dallet 著 安應烈 崔奭祐 譯 韓國天主敎會史, 韓國敎會史硏究所 1980.

-卞基榮,  韓國天主敎會創立史硏究所,  간추린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2004.

- 卞基榮,  韓國天主敎會創立史硏究所,  천진암 성지 자료집, 제1권~제131권, 각권 평균 400면,1996년     10월~2013년 10월까지 발행, 비매품, <소장처-국립도서관, 국회도서관, 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 서강대학교 도서관, 전국 천주교회 대신학교 도서관, 미국  George Town 대학 도서관, Columbia 대학 도서관등>. 추후 자료집 편찬 발행 계속.

2014. 6. 24. 천진암 성지에서 거행된 제 36회(1979~2014)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1779~2014) 기념행사

韓國天主敎會 創立 제235주년(1779~2014) 紀念祭를 봉헌하며,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이수성 고문의 기념식사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 김문수 경기도 지사의 축사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경기도산림문화연구소에 감사패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이성숙 서예가협회 회장에 감사패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고옥자 천진암 종합사무실장에 50년 장기근속  공로패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 김문수 경기도 도지사에 감사패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

2014년 6월 24일 한국천주교회 탄생지 천진암 성지에서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을 기념하는 교회 창립 제235주년(1779~2014) 기념제를 거룩히 봉헌하였다. 연례 기념행사로서, 제36회(1979~2014) 제전이었다. 수원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와 전 교구장 최덕기 주교, 이성효 주교 및 변기영 몬시뇰과 30여명의 사제들과 150여명의 대신학생들과 많은 교우들이 함께하였다. 이번 기념제에는 이달 말로 도지사 임기 연속 8년을 마치는 김문수 현 경기도지사와 신임 안경필 도지사의 참석으로 더욱 뜻있는 행사가 되었다.

 

특히, 제1부 기념식에서는 모든이가 태극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4절까지 제창, 6.25 전사자들 영혼을 위하여, 동시에 南北平和統一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천진회 창립위원 이수성 고문(前 서울대학교 총장, 前 국무총리)의 紀念式辭와, 8년 임기를 마치는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祝辭가 있었다. 이어서 교회 창립선조 후손들의 先唱으로, “대한민국 만세”, “한국천주교회 만세”,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만세”, “천진암 성지 만세”, 모두 12창을 우렁차게 목청껏 함께 불렀다.

 

이날 기념식에 이어 기념 미사가 봉헌되고, 점심식사 직전, “天主恭敬歌” 기념비석이 제막되었다. 天主恭敬歌는 우리나라 천주교회 최초의 聖歌이며, 1770년부터 1784년까지 천진암 성지에 모이던 靑少年 선비들이 李檗 聖祖를 웃어른으로 모시고(爲上), 新學問 연구와 함께 자발적인 진리탐구의 講學이 절정에 오르던 1779년 겨울을 전후하여, 바로, 한국교회 창립초기에 이벽 성조께서 지어서, 제자들이 부르게 하던 노래로서, 천진암의 天學道場에서 賢友賢士 道友들의 天學叢林歌(其門下如叢林)였으며, 같은 시기에 지으신(下筆), 天學 敎義 敎科書와도 같은 聖敎要旨와 더부러, 심산궁곡에서나마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탄생(natalis)을 알리는, 한국천주교 신앙의 움이 트고, 교회 공동체의 싹이 돋는 呱呱之聲이었다.

 

천주공경가는 다른 나라 敎會史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서,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의 實生活에서 例示를 들어보이며, 천주교 기본 敎義를, 補儒論的이며 護敎論的으로 읊은 복음선포의 함성이었다. 歌詞 외에는, 曲調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우리나라 천주교회 신도들이 세상 끝날까지 자자손손이 부르며, 우리 신앙선조들의 자발적인 신앙을 지키고 아끼며 가꾸어야 할 신앙의 遺産이다.

 

천주공경가와 성교요지는, 235년 전, 천진암의 天學道場을 본거지로 하여, 15년 가까이 당시 10代 후반과 20代 초반의 젊은 청소년 선비들이 주축이 되어,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면서, 한국천주교회를 창립한 기적적인 敎會史를 증명해 주는 천진암 강학의 결실이다.

 

한국천주교회 창립 당시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10대 중반의 청소년들이었음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천진암 강학이 절정으로 이르기 시작하던 1777년~1779년 당시, 이벽 성조 23세, 정약용 15세, 정약종 17세, 정약전 19세, 이승훈 21세, 등이었으니, 지금의 고등학교 2,3학년생들과 대학교 1,2학년생들 나이의 청소년들이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1770년 15세 경 廣州山脈 앵자산 천진암에 入山하여, 1784년 봄까지, 자발적으로 천진암에 찾아드는 젊은 선비들과 더부러, 천주교 교리를 탐구하고 가르치며, 10계명을 준수하고, 한국에서는 아직 양력과 요일을 모르던 그 시절, 음력으로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을 고정된 主日로 제정하여 지키고자, 천주께 기도를 바치고, 휴식하며 금식하였다. 이 때, 聖敎要旨와 十誡命歌를 지어 부르고, 모든 종교의 출발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천진암의 天學道場 靑少年들은 천학총림가(天學叢林歌), 즉 校歌와 같은 團體歌처럼, 李檗 聖祖께서 지어 주신, 天主恭敬歌를 불렀다. 이런 점에서 천주공경가는 한국교회 청소년들의 모든 단체가로 자자손이 부르도록 해야 하겠다

 

대학자 권철신 성현도 참석하던 己亥年 겨울, 천진암 강학에 함께 하기 위하여, 엄동설한 한 밤중에 눈쌓인 경기도 광주산맥 主峰 鶯子峴을 넘던 23세 이벽 성조의 발걸음으로 시작하여, 영세를 받기 위해 북경 3천리 길을 걸어가고 오던 이승훈 진사의 발걸으로, 또, 하느님의 종, 정약종 성현의 아들 성 정하상이 조선교구 설립을 위하여 10여세 소년 시절부터, 순교한 아버지의 친구, 趙東暹, 李基讓, 등의 유배지를 찾아 함경북도까지, 심지어 백두산 아래 茂山 땅까지도 오고가며, 북경 3천리를 10여차례나 왕복하던 발걸음이며, 정하상 성인의 어린 제자들, 즉 15세 전후의 김대건, 최양업, 최과출, 소년들이 사제가 되기 위하여 마카오까지 2만리 길을 걸어가던 같은 맥락의 발걸음이었다.

 

새로운 신앙으로 끓고 타며, 소박하고 순수한 젊은 청소년 선비들은 그리스도의 젊은 제자들처럼, 새로운 종교, 천주교를 힘차게 전파하며, 순교의 피로 목숨을 바쳐 증거하였을 뿐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전승하였으니, 젊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청소년들의 정신과 덕행과 열성의 발걸음은 오늘의 대신학교 지망생들로 계승되고 있다.

특히 금년에는 로마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78세의 年老하심에도 불고하고, 아시아 전역에서 모이는 靑少年들과 자리를 함께하기 위하여, 8월 무더위에 극동 우리나라에까지, 訪韓하신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은총인가! 한국교회를 창립하신 이벽 성조를 비롯한 한국 청소년들의 젊은 신앙을 계승하여, 이 시대의 전 세계 교회는 靑少年 司牧과, 특히 未信者의 자발적인 入敎를 돕는 宣敎 施策의 轉換點을 삼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천진암 성지에 착공된, 한민족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은, 그 옛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심산 궁곡 암자 곁의 이벽 성조 讀書處 비좁은 天學堂에서 불과 10여명 내외의 소년들이 천주공경가를 부르던 때와 달리, 현재 530만 신도 뿐 아니라, 향후 25년 내에 1천만 신도 시대에, 중국과 일본, 인도와 유롭에서 모이는 순례단들, 특히 젊은 청소년들을 위하여, 검소하고 단순하게 건립될 것이다. 유롭의 대성당들처럼, 화려하게 건립할 자금도 없을뿐더러, 이벽 독서처에 모이던 소년들을 생각하며, 소박하고, 순수하며, 검소한 성당이 될 것이다. 유롭 대성당들이 관광을 위한 것이라면, 장차 천진암 대성당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젊은이들이 모여 기도하는, 기도의 큰 집, 하느님의 집이 되도록 세워질 것이다.

한국천주교회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종교는 젊은 청소년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신라의 불교는 이차돈이 17세 때 시작하고, 22세에 순교하였다. 천도교, 東學역시 최제우 대신사가 16세에 家出 修道하기 시작하므로서 출발하였다. 더욱이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아시아 청소년들을 만나는 忠南 內浦 지역은 젊은 愛國 烈士들의 고향이다. 아오내 장터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선하던 15세 소녀 유관순 여사, 청산리 전투에서 왜병들을 물리치던 대한 독립군 중대장 16세의 이범석 장군, 당시 독립군 사령관 19세의 김좌진 장군, 국권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상해로 떠나던 18세의 윤봉길 의사, 및 이청천 장군, 등과 솔뫼 출신의 15세 김대건 소년, 다락골 출신의 15세 최양업 소년, 당진 출신의 14세 최과출 소년, 모두가 內浦의 거룩한 젊은 피가 파도처럼 용솟음치는 듯 하다. -Msgr. Byon-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1779~2014), (제36회)(1779~2014)기념행사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1779~2014), (제36회)(1779~2014)기념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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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1779~2014), (제36회)(1779~2014)기념행사 남경필 신임 경기도 지사 환영 인사와 박수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1779~2014), (제36회)(1779~2014)기념행사
서울 무시카 사크라 합창단의 연주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1779~2014), (제36회)(1779~2014)기념행사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1779~2014), (제36회)(1779~2014)기념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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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1779~2014), (제36회)(1779~2014)기념행사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1779~2014), (제36회)(1779~2014)기념행사 (2014.06.24,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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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主恭敬歌 紀念碑 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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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5.29 오후 11: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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