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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콜베 신부님과 우리 순교자들

글 :  김학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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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와 우리 순교자들
 
참조; Raffaele De Muro 콘벤뚜알 수도회 신부(로마 세라피쿰의 콜베 성당 주임이며 <원죄없으신 성모 기사회>의 국제 담당관)와의 인터뷰.
 
1. 성모승천 전날인 8월 14일은 콜베 신부님의 순교축일이다.(2014년은 순교 73주기)
신부님은 폴랜드 출신의 프란치스코 꼰벤뚜알 수도회원으로서, 2차 세계대전중에 나치 당원들이 크라코비아에서 51 km 떨어진 Oswiecim 근교에 건립한, 악명 높은 학살의 현장인 아우스비츠 수용소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47세였고 5월 28일에 체포되어 수인번호 16670를 달고 있다가, 지극한 사랑의 실천으로 아사형 벙커에 들어가야 할 어느 가장 대신에 순교하였다. 콜베 신부님은 1941. 8. 14.에 아사벌에 이은 독살로 순교하였다. 언론인과 가정의 수호성인이요, 수감자와 독살된 이들의 수호성인이고, 부당하게 고통 받는 이들과 마리아론 신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서, 우리 모두의 수호성인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2. 10. 10.에 시성하였는데, 32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그저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라고 부른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교회의 맏아들로 살아온 그의 이름 앞에 성인이라는 칭호는 피상적일 뿐, 그의 지상생활의 여정 전체가 성인다웠기 때문이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사랑의 순교자]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고난의 시대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시성식 강론에서, ‘콜베 신부님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파괴하기 위하여 세워진 장소에서, 사랑과 신앙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였다.
콜베 성인은 1941년에 일어난 사랑의 실천만 가지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영웅적인 선택은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일상생활의 결론이었다. 특히 그가 1917년에 창립한 ‘원죄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란 마리아 신심운동은, 우리들이 어떤 처지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인도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그는 47년 동안 모든 유혹을 물리치며,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았다. 항상 힘든 병고에 시달렸으나, 선교사로서 여행하기 힘들었던 시대에도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항상 전방에 나섰고, 복음의 빛을 발산하였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보편적인 성인이 되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처럼 폴랜드인으로서, 그는 중부의 Zdunska Wola에서 1894. 1. 8.에 태어나, 바로 Raimondo 란 세례명을 받고 영세하였다. 가난하지만 매우 신심깊은 가정에서 Giulio Kolbe 와 Maria Dabrowska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5명의 자녀 중에서 둘은 낳자마자 죽었고, Francesco, Raimondo, 요셉만이 살아 남았다. 가난하여 첫째만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라이문도는 한 사제의 도움으로 읽고 쓰기를 배울 수 있었고, 그의 지능이 뛰어남을 안 어느 약사가 사교육을 받게 도와주었다. 13세가 되자 Leopoli의 프란치스코회 신학교에 형과 함께 들어가게 되었다. 부모님은 이런 결정을 아주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무신론 막시즘이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어렵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학교에서 차츰차츰 성소가 싹트기 시작하여, 1910년에는 프란치스코회의 수도복을 입었고, 청원기를 거쳐 서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수도회의 전통대로 세속의 이름을 버리고 이때부터 막시밀리아노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이미 10세 때에 성소를 느꼈다. 어머니께 쓴 편지에서 라이문도는 신비로운 영상을 보았다고 하였는데, 마리아께서 흰색과 붉은 색의 화관을 내밀어 주시자, 소년은 두 개를 모두 다 받았다고 한다. 지금 그의 삶과 환시의 의미를 살펴보면, 흰색의 화관은 가난과 순명, 정결로 봉헌된 삶이었고, 붉은 색 화관은 순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수도회에 입회한 후 위기도 있었다. 집에 돌아가 가난한 어머니를 도우며 살려는 유혹이 있었으나, 너그럽고 열정적인 성격으로 더 큰 이상을 실현하려는 의지로 이를 극복하였다. 당시 폴랜드의 모든 소년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조국을 구하고자하는 열의로 차 있었다. 조국이 3지역으로 분할되어, 러시아와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분할하여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모님께 봉헌된 영적 군대의 창립자인 라이문도가 조국을 수호하는 군대에서 싸우기를 꿈꾸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라이문도는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어머니는 영원불멸의 신앙이 조국애보다 더 위대하며, 모든이의 구원이 더 큰 유익이 된다고 일러주었고, 라이문도는 이를 알아듣고 더 이상 동요하지 않았다. 장차 순교자의 어머니가 될 이 여인은 과부로서 어렵게 살면서도 아들들을 위해 제 3회에 가입하여 거룩하게 생활하였고, 사제가 된 라이문도와 깊은 영적 교감을 이루며 살았다.
콜베 신부의 한 동급생이 술회하기를, 프란치스코회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초기부터 라이문도는 수학에 몰두하여, 공중을 나는 비행기구와 달에 쏘아 올리는 로켓까지 구상할 만큼 작은 거인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의 쪽지들 속에는 이같은 달 탐사 계획들도 들어있었고, 순교후 전문가들이 검토한 결과 이 소년은 상당한 수준의 수학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같은 재능은 영적인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사제가 되기 전에 이미 장상들은 그의 탁월한 지능을 알아보고 로마로 유학을 보냈고, 6년 동안에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철학과 Seraphicum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18. 4. 28.에 사제품을 받았다.
‘원죄 없으신 마리아의 기사회’를 1917년에 창립했으므로, 그가 사제가 되기 일년 전이었다. 장상들이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를 믿고 이를 허락한 사실도 놀라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교회운동의 창립자들이 연세가 지긋하고 영성의 전문가인데 비하여, 그가 너무도 젊었다는 것은 장상들이 그의 깊은 영성에 신뢰를 보냈다는 것을 뜻한다. 1차 세계대전으로 교회도 수도회도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을 때, 막시밀리아노의 계획을 알아본 장상들은 그 계획의 타당성과 실천 가능성을 알고 신뢰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사회의 기초는 회개였다. 막시밀리아노가 늘 이야기하던 바와 같이, 이 운동의 군인인 자신이 먼저 회개하여야 하며, 자신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다른 이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1917년에 창립된 기사회는 2년 후인 1919년에 교회의 허락을 받았다. 그는 즉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유익하고 신속한 방법으로 인쇄물을 전면에 배치하였다. 1921년에 “원죄없으신 마리아의 기사”를 창간하여 널리 전파하였다. 그리고 폴랜드에서는 “원죄없으신 마리아의 도시”를 여러 가지 언어로 인쇄하여 배포하기 시작하였다. 천명의 수도자들이 발행한 이 이상은 인쇄물을 타고 전 세계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많은 2백만 부가 인쇄되어, 현대적인 방법으로 콜베 신부의 정신이 널리, 그리고 신속히 퍼져나갔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기도 속에 그의 지향이 익어갔고, 자신 안으로 명료화된 생각이 장상들을 각인시켰다. 그 무엇도 그를 막지 못하여, 중국과 인도, 일본에까지 그의 이상을 전파하려던 중, 제 2의 “원죄없으신 마리아의 도시”를 일본에 창립하였다.
‘원죄없으신 마리아의 기사회’가 창립된 1917년은 성모님이 파티마에 발현하신 바로 그해였다. 지역은 포르투갈과 폴랜드로 달랐지만, 교회와 세상을 걱정하시는 성모님의 자애로움으로 연결되었다. 파티마에서는 지옥과 죄인들, 전쟁과 공산주의의 회개를 말씀하셨다. 로마에서는 프리메슨의 젊은이들이 교황을 거슬려 시위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콜베 신부는 군대(기사회)를 생각하게 되었다. 광란의 시위대는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 교황의 집무실 창문 아래에서, ‘성 미카엘 대천사가 루치펠의 발 아래 깔려있는’ 그림을 그린 검은 색 깃발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리고 ‘사탄이 바티칸을 지배할 것이고, 교황은 스위스 근위병처럼 사탄을 섬기게 될 것이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콜베 신부는 이에 큰 충격을 받고, ‘ 프리메슨이 이렇게 활동적인데, 그리스도인은 그늘 밑에 앉아만 있단 말인가?’하며 의문을 갖게 되었고, 동료들에게 이를 말하며, 군대조직의 이상을 품게 되었다. 전쟁은 분열과 적개심을 불러일으키지만, 평화를 위한 투신은 진리를 증거하고 이웃과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임을 성경에서 찾았다. 중세의 기사도정신과 프란치스코의 정신이 부활하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없는 곳에서도 본당 신부들이나 평신도들이 조직을 이끌었다. 아메리카와 유럽, 아프리카 여러 곳에서 이 운동이 일어났고, 라디오를 통해서도 전파되었다. 1930년에 콜베 신부는 중국에도 갔었다. 원죄없으신 마리아의 기사들은 숨어서 또는 공적으로 수백만 명이 이 영적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1939. 9. 1.에 나치당이 폴랜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모든 수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원죄없으신 마리아의 도시”도 폐간되었다. 그러나 3개월 후에 예기치 않게도 수도자들이 석방되었다. 많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활동은 재개되었고, 독일인들은 콜베 신부의 명성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콜베 신부에게 여러 번 독일 시민권을 제안하였으나, 신부는 번번이 거절하였다. 1941년 2월에 4명의 형제들과 함께 다시 체포되었고, 5월 28일에는 그 악명 높은 아우스비츠 수용소로 이감되었다. 사제라고 하여 히브리인들 틈에 쳐 넣었고, 수인번호 16670 을 받았다. 처음에는 시신을 화장장으로 옮기는 일을 해야 했고, 7월 말에는 14 블록으로 이감되어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한 명이 탈옥을 하였고, 준엄한 전통에 따라 10 명이 죽음의 벙커로 들어가게 되었다. 뽑힌 이들 중에는 Francesco Gojowniczek 란 아버지가 자기를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다며 눈물을 흘렸다. 콜베 신부는 대열에서 나와, 대신 죽음의 자리로 들어섰다. 이 교환은 허락되었다. 10 명은 죽음의 벙커에 갇혔고, 이들에게는 음식도 물도 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절망하던 이들이 차츰차츰 콜베 신부의 감화로 인하여, 절망이 충만한 신앙으로 변화되어 갔다. 다른 수감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밤의 침묵 속에서 찬미가와 기도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약해지다가, 2주 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간수들이 8월 14일에 벙커에 들어가 보니, 4명이 아직 살아있었는데, 그중에 콜베 신부도 있었다. 뼈만 남아있는, 그러나 청순한 모습에 간수들은 연민을 느끼고, 청산염 주사를 놓아 독살하였다. 다음날인 성모승천 축일에 이들은 화장되어 뿌려졌다.
2. 1785년 을사년의 천주교 박해는 집회소 주인, 중인계급 김범우 통역관의 유배조치로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조정에서는 양반들을 벌하는 방법이 있었으니, 그것은 당시 사회에서 같은 양반들의 문중세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이 낳은 위대한 성현으로서, 경주이씨 가문의 세례자요한 광암 덕조 이벽 성조의 죽음은, 당시 조선 사회 전체가 그 문중과 그 가정에 무서운 압력을 가함으로써 일어난 결과이므로, 결코 그 가정과 문중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외부 사회의 선비들이 동원되어 윤리적 압력을 가함으로써, 그 가정에서 거부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여론을 불러일으키며, 분위기를 몰고 갔다. 가정과 문중은, 도저히 다른 길로 빠져나갈 수 없도록, 막다른 골목길로 천주교 신봉자들을 몰고 가던 상황이었다.
오죽하면 아버지 이부만이, 대청마루 들보에 밧줄로 목을 매달고, “네가 천주교를 버리지 않으므로 인하여 종친회 문중에서는 우리 집안을 문중 족보에서 빼버린다니, 그렇게 되면, 집안 형제들이 모두 삭탈관직(削奪官職) 되고, 패가망신하게 될 터인데, 그 꼴을 보며 사느니보다, 차라리 네 앞에서 미리 내가 죽는 모습을 네게 보이겠노라”며, 천주교 신앙 포기를 아들 이벽 성조에게 강요할 정도였다. 부인의 만류로 이부만은 자살이 미수에 그쳐, 이벽성조 순교 후 17년을 더 살았으나, 이 때 이벽 성조의 순교는 사실상 가정과 문중의 한계를 넘어, 당시 조선 사회와 조선 정부가 저지른, 최초의 천주교 박해였다. 따라서 문중과 가정만의 책임이라고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달레 상권, p. 320 참조)
조선시대 선비들이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하여, 임금이나 부모에게 의사 표시를 가장 강력하게 할 때에는, 의례 불철주야(不撤晝夜)로 식음전폐(食飮全廢)하며, 의관을 갈아입지 않는 것이 불가피한 관례였다. 이러한 부모자식 간의 갈등이 극심한 경우, 부모가 자녀에 대하여 내리는 최고의 형벌은 먼저 아사벌(餓死罰)로 10 여 일간 단식시키고,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으면, 차마 죽음의 턱을 넘지 못하고 숨이 끊어지지 않는 자식의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 속히 임종하도록 운명을 돕기 위하여 음독(飮毒)시켜 죽게 하는 것이니, 친 자식을 부모가 차마 칼로 죽이거나, 올가미로 목을 매달아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가톨릭의대 해부학교실, 한승호 교수의 검시재확인서 참조)
당시 임금이던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도 영조 임금이 내린 아사벌로, 대궐 안마당에서 뒤주에 갇혀 10여일을 굶어 죽게 하였으며, 몇 년 후, 신유박해 때 경기감사 이익운의 아들 이명호 요한 역시 강제로 독약을 먹여 독살(毒殺)되어 순교하였다.(왕조실록 순조7년(1807) 12. 19;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권 p. 615.) 이와 같이 이벽 성조도 아사벌로 10여일을 단식하게 된 후에도 운명하지 않자, 주위에서 음독시켰고,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두꺼운 이불로 이벽 성조의 몸을 여러 겹으로 멍석말이하듯 몸을 말고 양쪽을 틀어막아, 숨을 못 쉬도록 하여 질식사(窒息死)시켰다.
Daveluy 주교는, 그의 저서에서, 이벽이 열병에 걸려서 10일 가까이 앓게 되자, 땀을 내지 못하도록 이불로 여러 겹 멍석말이하듯 몸을 말아서 양쪽을 막아 숨도 쉴 수 없게 되었고, 마침내 질식하여 죽게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열병에 걸리면, 땀을 내야만 살아나게 마련인데, 땀을 내지 못하도록, 이불로 겹겹이 말아서 숨조차 쉬지 못하게 하여, 질식사시켰다는 것은 아사벌에 이어, 강제로 음독시킨 후, 질식사시킨 살해였다는 말과 같다. 다만 선교사로서 자료부족으로, 가족들이 흘렸을 헛소문만 듣고, 페스트 역병에 걸려 앓다가 죽었다고 하나, 그 해 가족과 친척과 온 나라 안에서 이벽 성조만 전염병인 역병에 걸려서 사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벽 성조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였으니, 순교한 때는 1785년 乙巳년 6월 14일이었다.(慶州李氏 족보, 1813년 木版本.; 달레 상권 p. 321.; 정학술, 니벽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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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8.14 오전 8: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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