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집 제2권, 묘지(墓誌)
繕工監監役官將仕郞李公墓誌 a_062_202d
嗚呼。我先大夫姓李氏。諱某。在嘉靖年間。歷事三朝。厥有茂績。卒官議政府右參贊。畜德趾美。垂光于後。有子四人。第三曰某。字某。生於嘉靖二十九年庚戌。其季曰吾。先大夫歿。鞠於先夫人崔氏之門。少相嬉戱。兄溫良端雅。奉母訓惟謹。弟朴愚而無所知識。惟超跳墻屋。竊隣舍棗栗爲事。及母夫人亡。兄年甫弱冠。自持典訓。一於禮不違。弟始成童。悔前之爲。乃折節讀書。兄弟二人。自以爲知己友。同室而居。未嘗一日睽違不覿。弟多疾病。兄差康健。養其弟如嬰兒。壬062_203a辰之亂。車駕將西狩。兄束裝謂弟曰。旣委質事君。義無貴賤。吾從王乎。弟曰。先人遺體。獨吾兄弟在。吾近臣。偸生爲恥。苟全嗣續。其在兄乎。不唯李氏血屬是爲。將先人之祀是托。兄全家世。弟死國難。其可也。俱滅無爲也。兄曰諾。及城門不守。兄負木主。匍匐竄山谷。弟執羈紲從上幸義州。有趙太醫奔詣行在。謂其弟曰。嘗見仲氏於加平郡栢屯村。其言曰。見世之士夫一見賊。便拜跪乞哀以苟免。其人方且以爲得計。而人之視之。猶犬彘也。間有一不偶而反磔裂以死者多矣。豈不愚甚矣乎。無寧卽自决。062_203b無爲鋒刃所汚也耶。其言如此。因相與噓嚱。居無何。宗人附書至。果以是年十月十一日。猝遇賊竟溺水死。時年四十有三。明年春。弟走人六百里。以衾與裳。收其遺骸。權於郡地。又明年甲午。葬於抱川縣先大夫墓左。兄凡三娶。初娶士人權大純女。再娶士人崔漢澍女。三娶宗室銀溪守女。生一女。遭亂死道中。嗚呼。兄以溫良之性。屢試一不中。奇窮孤苦。晩乃以蔭補繕工監監役官。官不過一命。壽不及知命。而弟以朴愚之資。弱冠登第。歷職顯要。名忝相府。形圖麟閣。卽乃兄溺死之年也。天於兄弟之間。若偏有062_203c厚薄者。若是則天可恃耶。孰謂賢者無命。卒沈埋不振。而愚者乘時。反勃興而貴顯耶。健者夭而病者久。能襄其事而誌其葬。天不可恃也如是夫。嘻。
선공감 감역관(繕工監監役官) 장사랑(將仕郞) 이공(李公)의 묘지
아, 우리 선대부(先大夫)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는 모(某)인데, 가정(嘉靖) 연간에 세 조정을 내리섬기어 훌륭한 업적이 있었고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마치었는데, 훌륭한 덕을 쌓아서 후손에게 광영을 남기었다.
아들 4인을 두었는데, 그 셋째 아들의 이름은 모(某)이고 자는 모이며 가정 29년(1550,명종5)에 태어났고, 그 막내는 바로 나이다. 선대부가 작고하자 우리들은 선부인(先夫人) 최씨(崔氏)의 집에서 자랐다. 우리는 어려서 서로 즐겁게 장난을 하며 노닐었는데, 형은 온량(溫良)하고 단아(端雅)하여 오직 삼가서 어머니의 훈계를 받들었고, 아우인 나는 어리석고 아는 것이 없어 오직 장옥(墻屋)을 뛰어넘어 다니면서 이웃집 대추ㆍ밤이나 훔쳐 따먹는 것을 일삼았었다.
그러다가 모부인(母夫人)이 작고함에 미쳐서는 형의 나이는 겨우 약관(弱冠)이었으나 스스로 전훈(典訓)을 지키어 일체 예(禮)를 어기지 않았고, 아우인 나는 비로소 성동(成童)의 나이가 되어 이전의 행위들을 뉘우치고 이에 마음을 잡고 글을 읽었다. 그래서 형제 2인이 스스로 지기(知己)의 친구로 여기어 한 집에서 살았고 일찍이 하루도 떨어져 있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우인 나는 질병이 많았고 형은 조금 건강하였으므로, 아우를 마치 어린애처럼 길러주었다.
그러다가 임진년 난리를 만나서 거가(車駕)가 장차 서쪽으로 몽진하려고 할 적에, 형이 행장을 꾸려 가지고 아우에게 이르기를,
“이미 예물(禮物)을 바치고 임금을 섬겼으면 의리상 귀천이 없는 것이니, 나는 임금을 따라가겠다.”
하므로, 아우가 말하기를,
“선인(先人)의 유체(遺體)로는 다만 우리 형제가 남았을 뿐인데, 나는 근신(近臣)이므로 구차히 살기를 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니, 다만 후사(後嗣)를 보전하는 일은 형에게 있습니다. 형은 이씨의 혈속(血屬)이 될 뿐만 아니라 선인의 제사가 의탁하는 곳이니, 형은 가세(家世)를 보전하고 아우는 국난(國難)에 죽는 것이 옳습니다. 형제가 다 죽는 것은 의의가 없습니다.”
하니, 형이 승낙하였다.
그 후 도성(都城)을 지키지 못함에 미쳐, 형은 목주(木主)를 등에 지고 엉금엉금 기어서 산골짜기에 들어가 숨고, 아우인 나는 굴레와 고삐를 잡고 상(上)을 따라 의주(義州)에 갔는데, 조 태의(趙太醫)가 행재소(行在所)에 달려와서 그 아우인 나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가평군(加平郡) 백둔촌(栢屯村)에서 중씨(仲氏)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보건대, 세상의 사부(士夫)라는 사람들이 한번 적을 만나면 대번에 무릎을 꿇고 절하며 애걸하여 구차하게 죽음을 면하는데, 그 사람은 또 스스로 계책을 얻었다고 생각하지만, 남이 그들을 볼 적에는 마치 개ㆍ돼지처럼 취급해 버린다. 그리고 간혹은 한번 불운을 당하면 도리어 적에게 찢겨 죽는 자도 많은데, 이것이 어찌 매우 어리석은 탓이 아니겠는가. 차라리 그 즉시 자결(自決)하여 적의 칼날에 더럽힌 바가 되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하였다. 그 말이 이러하였으므로, 인하여 서로 감탄하였다.
그런데 그 후 얼마 안 되어 종인(宗人)이 편지를 부쳐와서 보니, 과연 이 해 10월 11일에 갑자기 적을 만나서 끝내 물에 빠져 자결하였으니, 나이는 43세였다. 그 명년 봄에 아우인 내가 6백 리 길에 사람을 달려보내어 이불[衾]과 의상(衣裳)으로 유해(遺骸)를 거두어 와서 군지(郡地)에 임시로 안치해 두었다가, 또 그 명년 갑오에 포천현(抱川縣)의 선대부(先大夫) 묘의 왼쪽에 장사 지냈다.
형은 모두 세 번 장가를 들었으니, 초취는 사인(士人) 권대순(權大純)의 딸이고, 재취는 사인 최한주(崔漢㴻)의 딸이며, 삼취는 종실(宗室) 은계수(銀溪守)의 딸로 1녀를 낳았는데, 난리를 만나 도중(道中)에서 죽었다.
아, 형은 온화하고 선량한 성품으로 누차 시험을 치렀으나 한 번도 합격하지 못하여, 기구하고 곤궁하고 외롭고 고생스럽게 지내다가, 늦게야 음보(蔭補)로 선공감 감역관이 되었으니, 벼슬은 고작 일명(一命)에 지나지 않았고, 수명은 50세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그런데 아우인 나는 우둔한 자질로 약관에 등제(登第)하여 현요직(顯要職)을 두루 역임하고 나서, 이름은 상부(相府)에 오르고 초상(肖像)은 기린각(麒麟閣)에 그려졌으니, 바로 우리 형이 물에 빠져 자결하던 해에 있었던 일이다.
하늘이 우리 형제의 사이에 대해서는 마치 치우치게 후박(厚薄)을 적용한 것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하늘을 믿을 수 있겠는가. 어진 이는 운명을 못 타고나서 끝내 묻혀져 떨치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는 시기를 타서 도리어 갑자기 일어나 귀현(貴顯)하게 될 줄을 누가 헤아렸겠는가. 건강한 사람은 일찍 죽고 병든 사람이 오래 살아서 능히 그 장사를 치르고 그 묘에 지문(誌文)을 쓰니, 하늘을 믿을 수 없는 것이 이러하구나. 아!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