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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삼성산성지는 기해박해의 성지이고, 기해박해 기념일은 1월 16일!

글 :  김학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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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삼성산성지는 기해박해의 성지이고, 기해박해 기념일은 1월 16일!
천진암성지에서는 기해박해 기념일을 1월 16일로 지내고 있다. 그러므로 2015년 1월 12일에 삼성산성지를 미리 답사하며 순례하였고, 자료들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면서 기해년 (1839) 박해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三聖山(481m)이 관악산(632m) 자락에 있는 산이지만, 공교롭게도 세분의 프랑스 선교사 성인이 묻혀계셨던 곳이기도 하다.
달레 중, p. 386/ [앵베르 주교 자신이 이 박해의 시초에 일어난 일들을 日記에 자세히 적어 우리에게 전하여 주었는데, 그 일기는 주교 자신의 순교로 중단되고 말았다. 편자 달레는 그 일기를 여기 그대로 옮겨놓을 작정이며, 다만 다블뤼 주교의 주석으로 보충하는 데 그치려 한다.(각주 3 - 앵베르 주교는 박해시초부터(1838. 12. 31.) 자신이 체포되기 3일 전인 1839년 8월 7일까지의 사실을 상세히 이 수기에 기록하였다. 이는 기해일기에도 나온다.).
“내가 서울을 떠나기 며칠 전에 성사를 준 한 열심한 교우에게 조카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 사람은 아주 열광적인 외교인이고 게다가 捕校였다. 1839년 1월16일(양력) 해 떨어질 무렵에 포졸 여러 명을 거느리고 와서 자기 삼촌의 임종을 모셨던 신입교우를 붙잡았고, 일을 더 튼튼히 하기 위하여 세 집안 식구를 전부 잡았다. 그리하여 조 프란치스코, 김베드로, 병자를 돌보고 나를 병자의 집에까지 인도하였던 우리 대리인 권 바오로가 체포되었고, 또 우연히 그의 집에 와 있던 권바오로의 처남(박안드레아)까지도 붙잡혔다. 체포된 사람은 모두남자가 4명, 여자가 6명, 어린이가 7명인데 그 중의 셋은 아직 젖먹이였다. --- 포졸들은 권바오로의 집을 가로채 가지고 반값에 팔았고, 그 다음에는 세 집안의 세간과 옷가지를 팔았다. 그런데 조 프란치스코와 특히 그의 형수는 부자였기 때문에 포졸들은 이렇게 해서 한몫 단단히 보게 되었다.
1월25일, 나는 서울에서 1백리 떨어져 있는 갓등이 공소에서 이 슬픈 소식을 들었다. 나는 서둘러 교우촌 순회를 중단하고 인천으로는 가지 않고 1월 30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 나는 박해가 퍼지기 전에 급히 서둘러 서울에 있는 1천여 명 교우에게 성사를 주고자 하였다. 2월 17일 사순절 주일에 일을 시작하여 성목요일까지 힘차게 밀고 나갔다. 나는 여러 공소에서 550명에게 고백성사를 주었다. -- 지방에서도 박해가 역시 위협적인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3월 21일, 서울에서 40리 떨어진 광주 고을 구산에서 김씨 형제가 붙잡혔다. 첫 번째는 돈을 약간 집어주고 놓여 나올 수 있었으나, 얼마 후에 다시 체포되었다.(p. 390)
달레중 p. 423/ 앵베르주교는 자기가 서울에 있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지방으로 내려가 너그러운 몇몇 신입교우들이 그를 위하여 마련한 집에 숨었다. 이 탈출을 꾸민 사람은 손경서 안드레아였는데 ---오랫동안 수소문한 끝에 묘하게 자리잡은 장소를 하나 발견하여 이내 그 집을 샀다. 이 작은 마을은 수원 고을의 상게(샹귀=Siang-koi)라는 곳으로 바다 쪽으로 꽤 깊숙이 뻗어나간 가느다란 반도의 끝에 있다. --- 그래서 6월 3일에 떠나 배로 강을 내려간 다음 해안을 따라 조선반도 근해에 널려 있는 수많은 섬 사이를 거쳐 3백리 가량을 항해하여, 그 피난처에 이르러 피로한 육체의 휴식을 좀 취하고, 걱정이 가득 찬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게 되었다. ---극단의 경우를 당하여 주교는 그의 두 선교사를 불러 의논해야 되겠다고 판단하였다. 용감하게 주교를 모시고 있던 집 주인 손 안드레아는 자기 배로 선교사들을 모셔 오는 일을 맡았다. 7월 24일 자정에 그는 사스탕 신부와 함께 돌아왔다. --- 모방 신부도 7월 29일 밤에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모방 신부의 편지를 보면, 주교는 두 신부를 바다로 해서 중국으로 도로 보내고, 자기 혼자 남아서 박해의 희생이 되려고 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포기하게 되었다. 이튿날 7월 30일이 되자 그들은 헤어졌는데, ---배반자 김여상(순성)의 책략에 속아 넘어간 정화경 안드레아를 만난 주교는, “내아들아, 너는 마귀에게 속아 넘어갔다”고 하였다. 이것은 거룩한 주교의 주보성인 라우렌시오 성인축일인 8월 10일 밤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날 아침 주교는 마지막으로 미사를 드리고, --- 지나가는 길에 모여 있던 20명쯤 되는 사람들에게 천주의 말씀을 전하였다. 포교들은 그를 서울로 압송하였다. (p. 436)
<일의 결말을 보고서 정화경 안드레아는 자신의 단순함을 후회하였고, 순교하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돌담거리(Tol-tam-keri) 주막까지 주교님을 따라갔습니다.>(증인 29, 오바실리오 증언, 김형래역, 시성자료POSITIO p. 67 - 참고로 돌담거리는 현재 수원가톨릭 대학에서 발안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갈담초등학교 인근지역으로서, 수원의 샹귀(Siang-koi)는 남양 쪽이 아니라, 발안 쪽임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달레중, p. 461/ 주교와 신부들은 사형선고가 내리기에 앞서 각기 치도곤 70대를 맞았다. 사형집행일은 8월14일로 정하여 졌는데, 그해에는 이날이 9월 21일 성 마태오 축일에 해당하였다. --- 순교자들의 시체는 3일간 효시를 당한 후 강변(새남터) 모래에 함께 매장되었다. 사형이 집행된지 4일째 되는 날 3명의 신자들이 시체를 거두다가 그중 한 사람이 붙잡혀 옥에 갇혔다. 그래서 더 오래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약 20일 후에 7,8명의 신자들이 죽을 각오까지 하고 다시 한 번 시험하여 시체를 훔치는데 성공하였다. 시체들을 큰 궤에 담아 서울에서 30리 가량 떨어진 노구산에 매장하였는데, 좀 더 적당한 자리에 옮길만한 상황이 이르지 않았으므로 지금도 아직 그곳에 그대로 있다.
김대건 신부의 편지 1843. 3. 5일자 서한/ 조선에 파견된 주교 두 분 가운데 한 분은 입국하지도 못하고 국경에서 돌아가시고(1835. 10. 20에 마가자에서 병사한 브뤼기에를 소주교), 또 한 분은 입국하여 20개월 이상을 살지 못하였습니다.(1838년 초 - 1839. 9. 21)
증인 29, 오바실리오의 증언, 김형래역, 시성자료POSITIO p. 78 - 신치관이 제게 해준 이야기로, 세분 머리는 별도의 구덩이에 들어있었고, 몸통 셋은 역시 큰 구덩이 속에 따로 따로 놓여 있었는데, 시신들이 이미 많이 상해있어서 알아보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합니다. 당시 교인들이 자주 찾아가곤 하였으므로, 회장들이 위험을 염려하여 유해를 다른 곳으로 옮겨 모셨습니다.
증인 31 김프란치스코의 증언, 김형래역 p. 80 - 삼사년이 지난 뒤, 세분의 시신을 그렇게 놓아두었다가, 장소를 잊을까 염려한 교우들이 노구산에 가서 뼈밖에 안 남은 시신들을 꺼내어, 남대문밖에 있던 노치명의 집으로 옮긴 다음, 세 분 유골을 비단에 잘 싸서 한 관에 넣었습니다. 교인들은 평범한 장례를 치르는 것처럼 그 집을 출발하여, 과천에 있는 관악산 남쪽 기슭으로 가서 유골을 묻었습니다. 이렇게 이장할 때 저도 참여했었습니다. 나중에 이 유골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표시를 남기기 위하여, 판 위에 석회를 덮고, 석회 위에 제가 직접 이렇게 글씨를 써 넣었습니다. “주교님과 두 신부님의 묘”. 그리고 나서 글씨를 숫가루로 채웠으므로, 오늘날에도 만약 이 묘에 대해 의심을 가진다면, 파보기만 하면 확실해질 것입니다. 묘는 신여실의 집안 묘 가까운 데 있습니다. 당시 그곳에 오륙십 명 교우들이 횃불을 들고 갔었습니다.
박순집 증언록 해제 p. 18 - 박바오로는 복잡한 서울 근교에 안장한 성직자의 묘가(노고산) 안심이 안 되어, 1843년 박씨 집안의 선산인 삼성산(현 관악구 신림동 57-1)으로 이장하여, 사기그릇에 순교년월일과 이름을 먹으로 써서 묘에 묻고, 후일 찾기 쉽게 표적을 해 놓았다. 그리고 그곳으로 아들 박순집을 데리고 가, ‘후일 성교회에서 성직자의 무덤을 찾을 때, 네가 잘 보아 두었다가 가르쳐 드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부자의 행동은 후일 이들 성직자들의 유해를 찾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김대건 부제,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서울 1845. 3/4월, P. 269 - 8명의 신자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밤중에 그곳에(새남터) 갔는데, 만일 포졸이 다가오면 그들을 포박하고 무덤을 파기로 의논하였습니다. 시체들은 서로 구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뼈만 남아 있었고, 더구나 밤중이어서 아무것도 잘 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개들이 무덤을 파고 대부분을 뜯어먹었습니다. 그러나 가능한 대로 뼈들을 주워 모아서 노고산에(주;서강대 뒷산) 매장하였습니다. 약 7개월 후에 무덤을 이장하였습니다. 거의 3년 동안이나 걸려 신자들이 더 잘 준비하여 관악산에 묘지를 만들고, 뼈에서 떨어져 나간 파편들을 모아 함께 묻었습니다.(주; 1843년에 관악산 줄기의 일명 三聖山 으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1901. 11. 2일에 다시 명동 성당 지하묘지로 이장되었다.)
한편 김대건 부제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45. 4. 7일자 열두번째 편지에서는, ‘신부님께 조선 종이 20장들이 봉투, 신부님들의 유해, 조선지도, 돗자리 등을 보내드립니다.’고 적고 있다.
입력 : 2015.01.13 오후 10:4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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