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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이벽 성조의 <성교요지> 관련 용어

글 :  김학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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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요지> 관련용어에 대한 발표 요약
I. 서론.
1. 중국에서는 상고시대부터 상제 하느님을 알고 제사를 지내왔다. 그리스도교로서는 처음으로 네스토리오의 경교가 중국에 들어왔고, 경교景敎가 당나라의 수도 長安(오늘의 西安)에 나타난 것은 635년(唐 태종 貞觀 9년)이었다. 阿羅本Alopen(아브라함 rabban수사의 준말?)과 동료 선교사들 일행 21명이 동방(파사국, 페르시아)으로부터 중국에 와서, 황제 대신 방현령으로부터 빈례로 궁중의 영접을 받아 성당(大秦寺, 波斯寺)과 수도원을 세웠다. 서안에서 1625년에 발견된 경교비는, ‘唐 建中 2년 1월 7일 (양력 781년 2월 4일) 일요일 아침에 곽(郭)자(子)의(儀)가 새긴’ 것으로,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7-8세기 경교의 상황을 전하고 있으며, 70여명의 서양 선교사들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 번역 용어를 보면 하느님을 천존, 세존이라고 부르는 등,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또한 중국에 잘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분은 24성인이 전해준 구약의 율법을 따르셨고-圓二四聖有設之舊法, 유대국을 다스리시어-理家國於大猷(=유대를 잘못 쓴 것), 말없이 성령으로 삼위일체의 새 종교를 세우셨도다 -設 三一淨風無言之新敎.>
항해 기술의 발달로 신대륙이 발견되고, 이어서 마젤란의 세계일주의 결과로 포르투갈의 선교보호권 속에서 예수회원들이 중국에까지 진출하여, 복음을 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6세기 예수회 신부들의 적응주의저술활동으로 그리스도교는 한자 문화권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초기 예수회 신부들의 활발한 저술을 통한 선교활동은 알아듣기 쉬운 용어를 만들어내면서 중국에 잘 적응하였고, 번역용어가 적절하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문자>, 곧 서양문자를 그대로 중국어로 음역(가차假借문자)하는 경우도 있게 되었다. 이렇게 중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저술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18세기 초부터는 본격적인 중국어 성경번역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천주교의 성경번역은 이단을 우려하는 교회당국의 염려로 출판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하지만 성경 번역에서 생성된 천주교 용어가 뒤이어 들어온 개신교의 성경번역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성경을 인쇄하여 출판해 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던 개신교에서는 인쇄 출판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고, 대량의 인쇄본들이 천주교에까지 역으로 영향을 끼침과 동시에,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에도 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중국의 그리스도교 문헌이 개신교의 성경출판과 함께 우리나라 성경번역과 [성교요지] 필사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친 과정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2. 프란치스코회의 몬테 코르비노 주교는 1300년대에 위그르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하였고, 소년들을 시켜 시편과 성무일도, 성가를 필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소년들이 첫째 성당과 둘 째 성당에서 신부 대신 성무일도를 바치게 하였다. 58세가 된 그는 달단어(薘靼語:타타르어)와 문학을 배웠고, 달단어로 신약성서 전권과 구약의 시편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성경들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음 16-17세기에 진출하는 예수회 신부들의 글들은 많이 남아 있다.
3. 초기 예수회 신부들의 저술.
3-1. 조전천주십계와 천주성교실록.
가. 루지에리(Michele Ruggieri(1543-1607), 耶穌會 羅明堅) 신부는 1579년 7월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가 저술한 [천주십계]의 전파 경로를 보면, 현재로 이어지는 천주십계는 1584. 11월 이전에 출판되었다.(FR N. 248.) 많은 중국인들이 마태오 리치 일행 신부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물어오므로 중국어로 [祖傳天主十誡]를 출판하게 되었다. 이는 루지에리 신부의 [天主實錄]보다 앞선 것이었다. 처음 책으로 출간한 루지에리 신부의 <천주성교실록, 1584. 8. 18.>(만력갑신 세추팔월망후삼일)에서, 중요한 교리용어가 이미 확립되었다. 예를 들면, 天主, 십계, 영혼, 승천당, 유일천주제작 건곤인물, 천지만물지주(1) 등이다.
또한 그 내용을 보면, 세상에 대난이 올 것을 예지한 낙액은 거함을 지어 처자부녀팔인과 금수의 종류들을 함중에 싣자, 하늘에서 사십일 동안 홍수를 내려 세계의 사람과 모든 것이 몰락하였다.(是以諾阨預知 卽造一巨艦 將妻子婦女八人 及其禽獸之類 俱載于艦中 後果天降洪水四十日 世界人物 一切淪沒). 락덕(롯)과 두 딸들은 명령에 따라 도피하였다.(25 -落德同二女逃出全命). 매슬(每瑟=모세) 성인이 천주십계를 받았으니( 26, 32), 앞의 3조는 천주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는 것이요, 후의 7조는 자기처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였다.(前有愛天主萬有之上三條 後有愛人如己七條名曰十誡). 석판 양면 가운데, 제 일면에 3조의 내용으로 천주를 공경함이요(故立碑二面 第一面之碑文 有三條之事 奉敬天主), 제 2면의 7가지 조항은 세상 사람들이 화목하라는 것이다.(第二面之碑文 有七條之事 和睦世人).( 한국가톨릭대사전 7권, 1999 분도출판사 간행본에서, ‘그 내용에서 인용하고 있는 구약성서가 과연 조선에 전래되었는지가 의문이라’며 <만천유고>에 있는 [성교요지]의 사료적 가치를 문제 삼고 있다.; 또한 모 신부의 주장은, [그뿐 아니라 ‘성교요지’의 본문을 살펴보더라도 △초기 천주교나 박해 시대 천주교 신자들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구약성경 혹은 적어도 구약의 창세기가 번역된 이후에나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들이 나온다고 한다.]고 하였으나, 이후에 밝히는 여러 글에서도 구약성경의 이야기가 많고 자세하게 나오고 있다.).
3-2. 교우론 (De Amicitia, 交友論)
가. 마태오 리치(1552- 1610)는 1582년 8월에 중국 마카오에 도착한 이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엘이 선종할 때까지 염원했던 대로, 동방문화의 중심인 북경으로 진출하고자 줄곧 노력하였다.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외국인으로서 간첩혐의로 의심받는 가운데서도, 부단히 북경을 향하여 진출하던 리치 신부는 1595년 8월에 南昌에 도착하여, 두 왕족을 만나 교류하게 되었다.( FR N 478 이하 참조.) 건안왕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면서부터 간접적인 선교를 위하여, 리치 신부는 최초의 漢字 작품으로서 [교우론]을 저술하게 되었다. 이 저술은 중국에서 마태오 리치의 최종 목적인 중국선교에 다가가기 위해 채택한, 적응주의적 방법 (adattamento, adaptationism) 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중국 주변국가에 효과적으로 선교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문서선교란 새로운 선교방법을 채택하게 됨을 의미했다.
제 34 장 시간
璣衡驗山 기형험산 시간 재도 세월 가니
怱遽躇躊 총거저주 영복 찾기 주저 말라
璣衡, 璇璣玉衡,/ 이 璇璣玉衡은 천문을 관측하는 고대의 기구이므로, 남인의 이벽이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천문학을 매개로 노론 홍대용의 북학파와 교류하였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cf. 정약용, 증이벽 참조 - 이의수불개 7요질서권.). 박제가의 사도시- ‘이벽을 추모함’에서도 이와 똑 같이, “크나큰 온 宇宙, 天上天下를 가슴 속에 모두 품고 함께 보며, 胸中大璣衡 흉중대기형.” 하며 읊고 있다.
또한 [성교요지]는 그 서술 방법에 있어 [교우론]과 같은 방식을 취한 것이어서, 그 문장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하여, [교우론]의 56장처럼 작은 글자체로 부기를 하고 있고, [교우론]의 98, 99, 100장에서와 같이 가차(假借)문자로 쓴 서양말 등, 어려운 내용을 설명하는 순서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교요지]는 그 형식과 방법에 있어서 [교우론]을 많이 반영한 작품으로 보인다.
3-3. 방(龐)적(迪)아(我) 저(著), [방(龐)자(子)유(遺)전(詮)] 1610년(Diego de Pantoja, 1571-1618, )
1610년 전에 친히 강진세하시어 성덕동모 마리아씨(성교요지 5장의 모씨슬처와 비교하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에게서 여덕아에 탄생하셨다.(24) 천주강생인의 하권 제 13장에서도, 공자를 공씨로 칭하듯, 당시의 “-씨”란 표현이 지금의 ‘이보게! 차씨, 윤씨!’ 등과 같이 비하하는 표현이 아니라, 존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3-4. 陽瑪諾 역, [성경직해],1636년.
성경직해 잡사지목록에는 천주, 천주삼위일체, 천주성부로부터 사후, 심판, 천당, 지옥까지 145개 항목의 천주교 용어가 정리되어 있다. 입야소성명첨례에서, 할손지례를 언급함과 동시에, 잠에서는 할례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어, 이 문헌에서 할손과 할례라는 신조어가 처음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한문 문화권에서 이 용어들은 가톨릭교회의 고유한 용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할례의 용어는 만물시원에서도 계속된다.
3-5. 艾儒略, [四字經文].
알레니(Giulio Aleni, 1582-1649, 艾儒略) 신부는 [四字經文]에서, <성교요지>와 <천주공경가>와 같은 4언절구의 형식으로, 성경과 교리를 요약하여 노래하듯 읊고 있다. 특히 한문본 <성교요지>를 풀어 놓은 듯하다.
3-6. 애유략艾儒略 찬, 천주(天主)강생(降生)인(引)의(義), 1640/ 하권 13장에서, 공자를 공씨로 칭함.
3-7. <萬物始元 만물시원>.
낙액은 상주의 총애를 받아 주님의 예시로 홍수가 발생할 때를 대비하여 일독 즉 대방주를 지으라는 명을 받았다(諾厄氏饔?寵於上主 主預示之以將發洪水浮天下之意命造一櫝方舟.
(낙액造一櫝方舟에 대하여, 성교요지 제2장을 참고. 방주도 천주교회의 창안 용어이다).
III. <우리 문자화>된 중국어식 표현 방법의 수정과 변화 가능성.
가차문자의 결정판은 [미살제의]이다. 제10 보미살경문 서지에서(p. 25하), 덕(德)의(依)O아(亞)덕(德)옹(翁)(Ad Deum) 고(古)의(依)(qui) 륵(勒)제(弟)비(非)가(加)득(得)(laetificat) 여(余)교(交)도(都)등(登)(juventutem) 묵(黙)앙(盎)(meam). 묵(黙)O고이아 도 액사 도사 복이저도탁 묵앙 과륵 묵 륵포리사지 액득 과륵 지리사지사 인즉탁 동 아비리서득 묵의니미고사 하며, 미사를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미사경문은 라틴어를 발음 그대로 가차문자화 하였다.(앵베르 주교의 22번째 서한, 2011 수원교구, p. 343, 349.- ‘저의 두 번째 걱정거리는 매일 기도와 주일 미사경문의 조선말 번역입니다. 천주교가 들어온 시초에 조선신자들은 -한문으로 된 기도문을 그 뜻까지 번역하지는 않고, 뜻은 모르는 채 발음만 조선식으로 하여, 바쳤습니다. 그러니 중국 사람도(12년을 중국에 거주한 앵베르도) 책을 보지 않고 말만 들으면 전혀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 신자들은 기도를 바칠 때 한자발음을 사용하였습니다.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말로 기도하였다는 말이 더 맞을 것입니다.’).
완벽한 중국어 미사경본은 [미(彌)살(撒)경(經)전(典)]으로, 바오로 5세 교황이 허락하여 예수회의 루도비코 불리오 신부가 1670년에 북경에서 편집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출판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성경이 중국어로 번역되었어도 출판되지 못한 것과 같다.
IV. 중국어 성경 번역과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
북경에 진출한 마태오 리치와 예수회 선교사들은 주로 교리서(성전)들을 지었으나, 성경도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Robert Morrison(1782-1834) 목사는 London Missionary Socoiety(런던선교사회) 소속으로서, 영국에서 중국선교를 준비하고 있을 때인 1805년에, 우연히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바쎄 신부의 중국어 번역본, [四史修編(耶蘇)耶穌基利斯督福音之會編 Evangelia quatuor Sinicae]이라는 표제의 문서를 발견하였다.(모리슨은 1807.1.1.에 영국을 떠나 미국을 경유하여 중국 Canton에 1807.9.4.에 도착하였다. 그가 왕립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 가운데는 로마 가톨릭에서 작성한 [ Latin-Chinese MS-사전 ]도 있었다.(Thor Strandenaes, p.22-각주 1,3참조). 그는 영국 장로교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중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였다.) 그는 그의 중국어 교사였던 용삼덕(容三德, Yong Sam-tak)과 함께 이 문서를 필사하였고, 이는 모리슨이 개신교 성경을 중국어로 역출함에 있어서 그 출발이 되었던 것이다. 침례회 선교사 Josua Marshman(1768-1834)도 역시 바쎄 신부와 Johan Xu의 사본에 의지하여 번역하게 된다. 이렇게 Robert Morrison과 Josua Marshman의 두 번역본은 Sloane 사본의 텍스트를 글자 하나하나마다 아주 가깝게 옮긴 것에 불과하다.
[진교4패]가 보급되던 이 시기(1907)를 전후로 필사 되었을, <성교요지>나 <이벽전> 등에서 개신교의 용어가 나타난다고 하여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중국어에 정통하였던 베르뇌 주교1856년에 입국할 때에, 불가타본 이외의 다른 성경번역으로는 이단이 염려되는 상황이어서 교황청의 인가가 나지 않아 천주교의 인쇄된 성경책이 없었으므로, 개신교의 인쇄된 성경 1852년 신약과 1854년 구약 대표본을 참고서로 지참하여 조선에 전파하거나, 이 성경이 Petitnicolas와 Pourthie 신부가 있는 배론의 성 요셉신학교에도 전해져, 이를 바탕으로 신학생들이 성경을 참고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하다.(달레 하 p. 325참조).
V. 천주교 중요 용어의 선택과 변화과정.
하느님 天主 호칭의 선택과정을 살펴보면(FR 236-각주1), ‘하늘의 주님’이라는 뜻의 天主라는 호칭은 천주교 신자들의 하느님 Deus의 한자화 된 이름이다. 중국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1704년 11월 20일에 교황 Clemens XI의 훈령(추기경회의에서 중국의례문제를 다룬 후)에 따라, 上帝나 天이라는 용어를 버리고, 天主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판토하 신부가 방자유전(1610년) 1권에서 제일 먼저, 하느님을 陡斯(두사, dou si, Deus)라고 음차하였다. 이어서 임마누엘 주니올 디아스(Emmanuel Junior Dias, 陽瑪諾 1574-1659)신부가 지은 <성경직해 제일권> 극서야소회사 양마낙역의 천주야소계리사독주세주일성경직해(텬쥬 여수 ㅅ긔리스두 쥬일셩경)에서, ‘天主는 서양 원문으로 陡斯(두사, dou si, 한글필사본=데우스/ Louis de Poirot(가청태)의 고신성경에서도 두사陡斯라고 하였다.(사도행전 3, 13. /아파랍함무적두사) 하며, 천지만물의 주인이시다.’
耶穌(여수, FR N 174- 각주 7참조 / ‘네스토리오인들이 처음 중국어로 쓴 “예수”라는 음 이서(移鼠637년)과 예수(예(翳)수(數) 641년), 마니교인들은 이수(이(夷)수(數) 900년경)라 하였다. 쿠빌라이 칸 왕실에서는 애(愛)설(薛)이라 하였다. (원사, c.134). 예수회 선교사들은 1584년부터 루지에리의 천주실록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탈리아어 Gesu'를 음역한 것으로 열소(구(口)열(熱)소(所) )로 썼다.(ARSI, Jap.-Sin., 1, 189, f. 28a). 조금 후 리치의 교리대화에서도 구(口)열(熱)구(口)소(所)와 같은 음차문자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수년 후(몇년?) 야(耶)소(穌)라고 옆에 표기하였고, 1603년(천주실의)에는 야소를 우선하게 된다.(1595년 경부터였을 것이다.) 열자와 소자 모두의 왼쪽에 입구(구(口)) 변을 넣고 있는 것은 음차역이라는 의미로서, 음차문자의 시초가 아닌가 한다. 따라서 성교요지 19장의 법리새의 글자마다 앞에 입구자를 넣는 것도 천주교에서 시작된 것이다.; 김혜경, 리치원전 V, <부산교회사보> 89, p. 89의 각주 참조. ; 사학징의 말미에서 여수 녀수라 하였다.; 한글 필사본에서는 여수와 아믄이라 하였으나, 감목 민와스딩 감쥰, 셩경직ㅣ권칠, 1893 계 신판에 이르러, ‘네 아 우리쥬 예수 그리스도 - 아멘’ 하고 있다.)에 대하여 [성경직해]에서는; 천주강생후지명이며, 譯言하면 救世者(셰상을 구하는 쟈)이시요, 元祖가 지은 原罪천주대발자비(天主大發慈悲。是위救世자。)하여 강생하신 구세주로 야소라 칭한다고 하였다.(성호전집 제 55권, 천주실의발에서도 ‘於是天主大發慈悲。親來救世。’라 하였다.) 耶穌에 대해서 중국에서는 루지에리 신부 이후 처음부터 지금까지 耶穌를 변함없이 쓰고 있으나, 일본의 세속의 영향 하에서는 耶穌라고 쓰지 않고 耶蘇라고 쓴다. [성교요지]에서도 耶穌를 쓰고 있으므로, 이 문서는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개신교의 모든 글은 물론 한국의 국어사전(고전번역원과 가톨릭 대사전까지)도 일본의 영향을 받아 耶蘇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만천유고에 실려 있는 성교요지는 적어도 일제의 영향을 받지 않던 1900년 이전의 필사본으로 볼 수 있는 근거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중국에서 耶穌로 쓰고 있으나, 언제부터인지 한국개신교 측에서부터 풀 艹가 들어간 耶蘇라고 쓰기 시작하여, 우리말 사전과 천주교에서 마저 耶蘇, 耶蘇敎, 耶蘇會 등으로 쓰고 있다. 日製 식민사관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계리사독契利斯督(ㅅ긔리스두)에 대하여 성경직해는; 吾主 여수의 別名號이며, 譯言受油傳也(셩유로 바을 밧다말), 古禮에 새로 왕을 세우거나 及聖敎宗主를 세울 때 그 頂(니마의 바르나니), 여수는 만물의 주인이시며 聖敎의 大主이시다. 契利斯督이란 표현에 있어서, 契利斯督이라고 천주성교실록에서 쓰기 시작하여 판토하의 방자유전에서도 費略耶穌契利斯督(1권 16)이라 하였다. 알레니의 천주강생언행기략의 천신강유영적첩견에서도 契利斯督(1권 9)이라 하였으며, 디아즈의 성경직해 1권에서도 天主耶穌契利斯督이라 하였으나, 성신강림후제 24주일의 마태 24장(8권 40)의 성경풀이에서 暗弟利斯督기리사독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10권의 성모시태첨례지리에서 마태 1장을 시작하며 耶穌基利斯督으로 정착하고 있다(1636년경). 불리오 신부(Ludovico Buglio 1608-1682)는 <萬物始元> 제 26장에서부터 基斯督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p.128과 223, 235에서는 基斯督이라고 하였다.
이후 파리 외방전교회의 장 바쎄 신부는 영국 Cambridge 대학본(화합본) 2장에서 천사(使)들이 전하는 말씀으로, 救世基利斯督主者의 탄생의 福音을 알리고 있고, 이후 Cambridge 대학본 복음서에서는 모두 基利斯督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 21절부터 시작하여(2,36절의 메시아와 4,10절과 15, 26절에서는 아직 기리사독이라 함, 1704년경), 로마본에서는 모두다 그리스도를 基督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로마본 루가 2, 11에서 救世基督이라고 하였다. 마태 1.1, 16, 17; 16. 16, 20; 23. 10; 24. 5, 23, 24 등). 로마본 요한 복음서 제목을 아예 [若翰修編耶穌基督福音]이라 하고 있다.
예수회 출신의 쁘아로 신부는 아직도 主基利斯督이라고 하고 있다.(聖徒瑪竇紀的萬日畧). 그러나 <耶穌會士 陸安德 述, 善生福終正路, 1794 主敎 亞立山 湯 准> (1852년 重刊 司牧 趙方濟 准)의 글에서(P. 22)는 아직도 費畧耶穌 契利斯督으로 표현하고 있다.( <선생복종정로> 하권에서, 梅瑟聖人 在錫乃山(p. 5)이라고 하였다. <만물시원>에서는 西迺山이라 하였다.).
基利斯督에 대한 개신교의 번역을 보면, 모리슨 목사가 최초로 바쎄신부의 영국저본을 이용하면서, 마태오 1장 18절에서 耶穌基利督으로 士자만 바꾸어 표현하고 있으며, 사도행전 2장 31절부터(11,17;로마1,4.6.7.8절등) 기독으로 변화되는 것도 바쎄신부의 영국본과 같다.( Marshman1822본도 모리슨과 똑같이 변화를 주어, 기독으로 변환되는 것도 사도행전 2,31 이후이다. 2,31에서 모리슨은 기독지부활(마쉬만은 기리사독), 2,36에서 모리슨은 미세아(마쉬만은 영국본을 따라 기리사독), 2,38에서 영국본을 따라 야소지명으로 똑 같이 기독을 생략하고 있다. 이후로는 모리슨이 4, 10에서 기리사독이라고 다시 쓰고 있으나, 모리슨과 마쉬만은 모두 바쎄 신부의 영국본을 따라 기독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개신교의 대표본 성경(1853년본)부터는 아무 설명도 없이 모두 基督으로 적고 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의 ‘그리스도인’을 영국본에서는 基當이라 하였고, 로마본에서는 基[斯]當이라고 하였다. 모리슨은 基利사(士)當이라 하였다. 바르나바를 巴納伯으로, 사울을 埽琭(sao lu)에서 保琭으로(행13,9) 바꾸고 있다.
上主의 칭호는 [만천유고]의 발문에서 상주의 칭호를 2회 사용하고 있고, 성교요지의 각주에서도 여러 번 사용하고 있는 용어이다. 천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기 위한 避諱피휘의 뜻이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송강호, 중국어 성경번역사, p. 222 참조. - ‘어떤 성경 번역본은 상제(上帝)를 음역하여 아(雅)위(威)(야훼)야(耶)화(和)화(華)(여호와)로 번역하였다. 세계성서공회 연합회의 1975년 현대중문역본에서는 옛날 사람들이 상제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피휘하는 관습을 따라서, 상제를 상주로 번역하였다. 구약에서 ‘그의 이름은’으로 나오는 부분은 모두 야화화(여호와)로 번역하였다. 주나 상주가 동시에 나오는 경우에는 ‘지고적상주’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로서 박해를 피하기 위한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황사영 백서에서는 주로 主와 天主(66행)의 칭호를 사용하나, 때로는 上主(4행의 上主赤子)의 칭호도 사용하고 있다. 정하상의 상재상서에서도, 천주와 상제, 상주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상주의 표현은 천주교에서 자주 쓰고 있으나, 개신교에서는 잘 쓰지 않는 표현으로서, [만천유고]의 발문과 [성교요지]에서도 자주 쓰이고 있으므로, 이 [만천유고]등의 필사 문서를 천주교 신자가 쓴 글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아직도 박해의 위험이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발각될 경우를 대비하여, 박해자들이 알아보기 힘든 새로운 용어(박해자들이 쉽게 볼 수 없는 상주)로 바꾸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VI. 조선에 천주교 전파와 가차문자의 한글 표기.
<종합결론>. [성교요지]에서 문제가 된다는 용어는 모두 가차문자이다. 천주교의 기초 교리용어들이 예수회의 문서들 안에 이미 다 마련되어 있는 상황에서, [바쎄역본] 성경이 1700 년경에 나왔고, 이를 저본으로 한 [모리슨역본]은 가차문자를 영어식으로 바꾼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모리슨역]을 근거로 [대표역본]들이 이어져 나왔고, 인쇄된 성경이 없었던 한국 천주교의 베르뇌 주교 등이 인쇄된 [대표역본]을 지참하여 들여와 사용하였을 개연성이 크다. 이 같은 사실은 한기근 신부가 번역하여 출판하는 [진교사패]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가톨릭 청년>지에 기고하는 신부들의 글도 [대표역본]을 참고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그 때 이벽은 비밀리에 성서를 읽고 있었는데, 이승훈은 이를 몰랐습니다. 계묘년1783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게 되자, 이벽이 그에게 은근히 부탁하여 말하기를(時李檗密看聖書 而承薰不知 癸卯隨父入燕 李檗密托曰)’ 하며 적고 있다. <송강호의 지적; 당시 양반 가문에서는 중국어뿐만 아니라 (만주어와 일본어를 상식처럼) 익히고 있었으므로, 앞서 밝힌 것처럼 바쎄역 성경 필사본이나, 쁘아로 신부의 만주어 필사본 등도 구해서 읽을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이벽과 천진암성지에 관한 발자취는, 황사영의 백서 101-102행에서 다음과 같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동방의 우리나라에서 주님의 은혜는 다른 나라보다 월등하게 컸습니다. 일찍이 전교자가 온 일도 없이, 주님께서 친히 특별하게 성교교리를 가르쳐 손을 맞잡아 이끌어주셨고, 이어서 성사자를 보내어 주시는 등, 내리신 갖가지 특은을 손가락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101/主恩之於東國 可謂逈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而 主特擧斯道而親 /102/여(舁)之繼 又以授聖事者予之 種種特恩 指不勝屈.) 이러한 표현은, 서양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평신도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직접 하느님나라의 진리에 도달한 천진암강학을, 황사영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cf. 2014. 8.14.과 2015. 3.12.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주교단에게 하신 말씀 참조).
이 [성교요지]를 필사하게 된 1900년대 전후의 교회내외 사정도, 언론의 자유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1791. 10. 8일에 형조 판서 김상집은 상계하기를, ‘사학을 뿌리채 뽑는 길은 그 책을 아주 금하는 것만 한 것이 없겠습니다. 신의 뜻으로는 방방곡곡을 두루 수색하여, 물과 불에다 던져 버리고 -엄하게 훈계하자’고 하였다. 1791. 10. 30.에 홍낙안의 問啓에서는, 천주교 서적이 인쇄되었거나 등사되었는지를 세밀히 조사를 받게 되었고, 1785년에 이승훈도 형조에 끌려가 변명을 해야 했고 책은 불살라지는 상황이었으므로, 신자들은 창립초기의 관한 모든 글을 이미 깊숙이 파묻거나 감추게 되었다. 그 이후로 계속하여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 [만천유고]와 같은 글이 쉽게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는 1900년대 전후에 이르러서는 박해의 상황이 외형상 호의적으로 바뀌었으나, 이벽과 이승훈을 모두 다 배교자로 몰아가는 경향이 강한 교회 내부의 상황에 직면하여, 정규하 신부처럼 남긴 글을 필사하면서, (니벽전의 경우) 정학술을 가명으로 쓰면서 정하상 성인을 연상한 것은 아닐지 생각하여 본다. 필사 당시는 물론 최근까지도, 아니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선조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강하여, 창립선조들의 신앙을 배교로 몰아가는 상황에서, 누가 이렇게 새롭고 긍정적인 글을 꾸며내 제시하였는지, 반대자들은 자세하게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모 신부는 <쟁점연구> p. 302-303에서, ‘1908년 발행의 보감과 청구학회의 논문들이 1925년 시복식을 계기로 관심이 고조되어 있었고, 이러한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고 하나, 당시의 어떤 글에서 [만천유고]와 [니벽전]에 나오는 상세한 정보를 밝혀내었는지, 추정이 아닌 근거로 밝혀야 할 것이다.)
행위는 그 존재의 본성에서 나온다(Agere sequitur esse!/@콩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고 하였다. 무엇이나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존재의 능력이나 양상에 따라 받아들여진다는 공리이다. 품은 생각이 말이 되고, 곧 이어 행동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좋은 글에는 저자의 심성이 담겨 있고, 좋은 글이 위작이 될 수는 없다. 좋은 심성으로, 좋은 글을 남기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성교요지]에는 선교사와 같이 희생과 고통을 가리지 않으려는 이벽의 열정과 심성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성교요지] 같은 좋은 글을 쓴 사람이나, 혹은 필사하는 사람이 위작을 만들어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학문을 갖춘 한학자들의 판단으로는, [만천유고]가 위작일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즉 하느님에 대한 호칭, 보유론적인 태도, 형식상의 근거를 통해 볼 때, [성교요지]의 저자는 본문에 기록된 대로 이벽임이 분명하다.( 김정수, 성교요지의 교리교육학적 고찰, <한국교회사연구논문선집>, 한국교회사연구소.; 이대근, 조선후기 천주교수용 연구, 255 참조.) 이상과 같이 필자는 [성교요지]의 저자가 이벽일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그 반대로 이벽이 아닐 가능성은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사도 바오로가 열정과 적응주의로 이방인 선교에 나섰던 것처럼, 마태오 리치와 예수회의 선교사들은 중국에 와서, 열심히 연구하고 동양을 존중하는 적응주의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제대로 공부도 하지 않은 채, 서구우월주의와 이기적인 수도회간의 경쟁심으로 무장한 후발 주자들은, 번역된 성경도 인쇄.출판하지 못하게 하며 제례논쟁을 일으켰고, 예수회마저 해산시켜, 동양의 선교를 망쳐놓았다.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선조들도 예수회의 문헌을 공부한 끝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신앙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바오로 사도와 같은 열정을 지니고 신앙을 전파하다가 순교로 증거하며, 민족 구원의 터전을 마련해 놓았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연구자들의 객관적이고도 진솔한 연구와 각성을 바란다.
* PS. 천진암성지의 홈페이지 역사자료실을 방문하시어, 필자의 논고도 읽어보시면서, 창립선조들의 천진암강학과 위대한 순교 사실을 확인하시기 바라며, 천진암성지를 순례하고 답사하시면서, 역사적인 사실을 확증하기 바랍니다. 우리 신앙의 뿌리를 찾고 확인하는 노력은 우리 후손들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끝.
입력 : 2016.06.16 오후 10: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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