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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루까 정원진 신부님 - 한국천주교회창립 제238주년 기념제 교황대사 경축사

글 :  천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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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원진 루까 신부님(1900~1976), 천진암 성지 최초 답사
우리 수원교구가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를 개척하기 시작한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금년이 50주년(1963~2013)이라고 할만합니다. 천진암을 답사한 최초의 사제는 故 루까 정원진 신부님이신데, 1960년경부터 故 프란치스꼬 남상철(1891~1978) 회장님과 함께, 박학하셨던 故 바오로 주재용 신부님(1894~1975)의 지도를 받아, 서울에서 100여리 미만의 부근에 있는 옛 사찰들중에 天眞菴과 走魚寺와 鶯子山을 찾아 물어물어 가며 2,3년 헤매다가 드디어 찾게 되어, 답사한 후, 당시 경향잡지에는 1962년 12월호에 게재를 시작하여,1963년 1월호에 발표가 됩니다.
 
그래서 금년 2013년은 1963년의  공의회 50주년이고, 수원교구 50주년이고, 천진암 이름이 공식으로 한국 천주교 요람지로 교회공식기관지 경향잡지에 처음 발표된지 50주년입니다.
 
1770년부터  이벽성조의 입산 은수가 시작되고, 당시 10세 전후의 정약용네 3형제 어린이들이 종종 출입하며 天學 공부까지 하게 되었고, 약 7년 공부가 마칠 무렵,
 
1777년 경부터는 저명한 학자들도 참석하는 강학이 개최되고,天學叢林이 형성되었으며,
 
1784년 늦봄에 서울 수표동 이벽 성조 자택으로 본거지가 이전됩니다.
 
1785년 을사년 늦봄 이벽성조께서 당시 사회와 문중과 가정의 탄압과 박해로 인하여 餓死罰로 10여일을 굶기셔도 죽지 않자, 측근 선비들에 의하여 飮毒 당하시고, 그래도 운명하지 않으시자 이불로 겹겹이 멍석말듯 몸을 감싸고 말아서 양쪽을 막아 숨이 막히어 窒息死로(Daveluy 주교의 문헌 기록) 순교하시는데,
 
1786년 늦가을  정약용은 자신의 어린 시절 母校 천진암을 찾아와서 天眞菴賞楓 시를 짓습니다.
  
1797년 정약용 승지가 형들과 와서 2일간 머물며 20수의 시문을 짓고,
 
1827년 정약용이 65세의 나이로 옛 동료들과 함께 와서 3일씩이나 머물며 詩文을 짓고,
 
1850년경 정약용의 아들 學淵이 천진암을 출입하고, 집회 장소로 언급하며 서찰을 보내었고,
 
1880년말부터 1890년대 초까지, 춘천교구 최초 복음선포자 말딩 엄주언 형제들이 가족들과 함께 와서 3년간 머물며 교리공부하고, 프랑스 신부님이 와서 유아영세식을 거행하였고,
 
1960년대 초에  정원진 신부님, 남상철 회장님이 함께 주에 마을에 2박 3일간 머물며, 朴氏 노인의 안내를 받아 답사한 후, 주어사 터 쪽에서 천진암 터 쪽으로 앵자현을 넘었는데, 발표를 강력 반대하는 史家 신부님이 있었으나, 당시 서울대학교 역사과 교수였던 유홍렬 박사의 지지와 주선으로
 
1963년 1월에 경향잡지에 공식 발표하였고,
 
1973년 봄, 정원진 신부님이 혼자서 용인본당으로 변기영 신부를 찾아와 3일간 머무시며, 손수 공책장에다가 그린 앵자산과 8개소의 옛 사찰 터 지도를 주시며, 천진암 주어사 답사기를 자세히 알려주시고, 앵자산에 있던 천진암, 주어사, 번어사, 일출암, 봉태암, 석이암, 소암, 새절 터 약도를 주며, 무슨 기념사업이라도 하도록 신신당부하셨으며, 얼마 후 주재용 신부님이 정원진 신부님과 용인본당을 주일에 방문하시고, 한국 천주교 요람지에 기념사업을 반드시 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당시 33의 새 신부였던 변기영 신부는 예의상 예, 예 하였을 뿐, 마음은 신비신학 번역에 가 있었고, 몸은 농촌사회지도자 교육원 설립(현재의 수원교구 교육원 전신)에 몰두할 때였으나 그 다음, 3년 후에 주재용 신부님이 돌아가시고(1975), 1년 후 정원진 신부님도 돌아가시고(1976), 또 2년 후에는 남상철 회장님도 돌아가셨는데(1978),
 
1975년 11월에 변기영 신부가 김정원 신부의 안내를 받으며 故 선종완 신부님과 함께 처음 천진암을 답사하였으니, 바로 주재용 신부님이 선종하시던 해 초겨울이고,
 
1976년 봄 신장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변기영 신부가 천진암에 교회 땅이 한평도 없던 시절, 당시
차부제품을 받은 본당 대신학생 김학렬 차부제와(지금 성지 주임) 동생 김학무 신학생을 데리고 천진암을 몇차례 답사하였으니, 바로 정원진 신부님이 선종하시던 해 여름 방학 때였고,
 
1978년에 와서 변기영 신부가 천진암 터 15필지 3천평을 매입하게 되는데, 이 해는 바로 남상철 회장님이 돌아가시던 해 가을이었습니다. 분명히 천상과 지상의 선후배 신앙인들의 기도와 상호 후원하는 힘이 있는것 같습니다.
 
1979년 1월 이벽성조의 묘를 기적적으로 찾아, 주교님들, 학자들, 후손들과 함께 이장하였으며,
 
1980년 6월 24일에는 교구장 김남수 주교님이 교황대사 루치아노 안젤로니 대주교님과 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님과 함께 한국천주교회창립기념일 제정 선포행사를 하였는데, 행사준비와 진행은 당시 신장본당 보좌 이용훈 신부님(지금 수원 교구장님)이 맡아서 하였으니, 창립선조 시복도 현 교구장 이용훈 주교님 시대에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공교롭게도 우연이라고만 하기에는 어딘가 좀 신묘한 안배의 손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재용 신부님은 천재적인 학자로서 대구교구장, 전주교구장, 대구 유스띠노 신학교 교장,등을 하신 석학이셨고, 정원진 신부님은 이천 단내의 순교자 정은 베드로의 후손이며, 남상철 회장님은 순교자 남종삼 성인의 직계 손자이십니다. 지금 직계 현손 남기춘 변호사가 천진암 위원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고, 구산 성지의 김성우 안또니오 순교성인 형제들의 8대손 김학렬 신부가 천진암 성지 2대 주임을 맡게 된 것이, 모두 천상에 계신 선열들의 희망과 안배 같습니다.
정원진 신부님이 직접 그려주신 지도는 찾는대로 여기 첨가할 것입니다.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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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진 신부님이 남상철 회장님과 함께 1960년대 초 주어말에 3일간 머물면서, 그 마을에서 가장 대대로 오래 살고 있는 최고령의 건강한 박씨 노인의 안내를 받으며, 앵자산을 3일간 답사한 후 앵자봉 지역 답사 약도를 그려서 용인성당 주임 변기영 신부에게  넘겨준 것( 1978. 10. 25. 오기선 신부님과 재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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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광주부윤이 조정에 보고한 廣州邑誌에 표시된 천진암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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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성조께서 1770년 소년시절부터 1784년까지 讀書하시며, 젊은 선비들과 講學도 하시고 修道하던 天學道場 讀書處址(天眞菴, 豪士昔講讀/尙書此燒練/紅葉題詩處/昔在己亥冬講學于天眞菴/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丁若鏞-천진암은 일찍이 호걸들과 선비들이 강학하며 독서하던 곳이다/상서는 여기서 소련했고/붉은 잎을 제목으로 시를 짓던 곳이다. 1779년 겨울, 천진암에서 강학할 때, 설중에 이벽이 밤중에 와서, 모두 촛불을 켜들고, 경서를 담론하였다) 사진은 왼쪽부터 변기영 신부, 박지환 신부, 정덕진 신부, 이 마리아 자매, 1978. 10. 10.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의 李檗聖祖 讀書處止(1978. 10.10)
 
 
 
<교황 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님의 천진암 성지 미사 메시지>
 
2017. 6.24.
(홍지영 신부 번역)
 
우선 수원교구 교구장이신 이용훈 마티아 주교님과 천진암 성지 주임 신부님 김동원 비오 신부님, 그리고 이 미사를 공동 집전하시는 다른 신부님들과 미사에 참여하시는 수도자들과 평신도 형제자매님들께 인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624일은 복음의 선포자이자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셨던 세례자 요한의 축일입니다. 그리고 또한 오늘은 천진암성지에 모셔진 이벽과 동료들, 한국 교회의 설립 선조들께서 시복, 시성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승리와 그들의 증언은 하느님의 사랑의 힘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 안에서 지금도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이벽과 동료들의 희생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주신 은혜를 기억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선조들의 신앙과 사랑의 유산을 물려 받았으니 그 보물을 잘 보존해야 합니다. 특별히 이 미사에 참여하시는 순교자들의 후손들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순교의 순간은 한국교회에게 기억과 증언,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억입니다. 우리는 한국 교회의 특별한 시초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그리고 순교자들의 피로 시작 되었습니다. 우리는 1984년 시성되신 103위의 순교 성인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2014년 교황님께서 복자로 선포하신 124위의 순교자들을 통해 영적인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순교에 대한 기억이 또한 지금 진행 중인 이벽과 동료들의 시복 시성 절차가 행복한 마침표를 찍을 수 있도록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증언입니다. 한국 주교님들은 자주 한국 사회가 기술적인 발전과 함께 겪고 있는 물질주의와 세속화에 대한 사목적인 걱정을 표현 하셨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자주 애덕의 가치관, 이웃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 가난한 이들, 병자들과 노인들에 대한 배려가 우선시 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특별히 청년들이 절망과 포기에 빠져있는 모습도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우리는 신앙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한국에 있는 모든 이들이 평화의 은총을 통한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증언은 항상 신앙을 통한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희망입니다. 꼭 미래에 대한 막막한 희망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의 영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평화와 사랑으로 항상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고 우리들의 노력입니다.
한국 순교자들의 생애가 우리 모두가 더 훌륭한 인간이, 그리고 더 훌륭한 신자가 될 수 있게 도와주시도록, 그리고 우리 모두의 생애가 교회와 예수님을 위한 봉사가 될 수 있게 만들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MESSAGE
 
                                                                          June 24, Mass at ChonJinam

I wish to greet the Bishop of Suwon, Most Rev. Matthias Ri Iong-hoon, Rev.Fr.Pius Kim dong-Won, priest responsible for the Shrine at Chon Jinam, the priests, sisters and lay people. Today, June 24, Feast of John the Baptist – first evangelizer and last prophet of the Old Testament. We offer this Holy Mass with prayers that the Founders of the Church in Korea, Yi Byeok and companions, who died for the faith and whose relics are buried here at Chon Jinam, as we hope, will one day be elevated to the altars.
 
The victory of the martyrs and their witness to the power of God’s love, continue to bear fruit today in Korea, in the Church. The sacrifices of Yi Byeok and companions remind us of the great things which God has wrought to the Church. We are asked to treasure the legacy of faith and charity entrusted to you by your forebears. I want to greet those here who are descendants of the martyrs at Chon Jinam.
Pope Francis asks us that the events of martyrdom are a moment of MEMORY, WITNESS AND HOPE for the Church in Korea.
 
MEMORY – We cannot forget the peculiar origins of the Church in Korea, by the grace of the Holy Spirt, and nurtured by the blood of the martyrs. We have the memory of the 103 korean saints, canonized in 1984. We are spiritually comforted also by the beatification of 124 Korean martyrs by Pope Francis in 2014. We hope that this memory will also be consolidated with our prayer that the new causes for beatification, among them Yi Byeok and companions will soon reach its happy conclusion
 
WITNESS: The Bishops of Korea have often expressed the pastoral concern – about increasing secularism and materialism in technological advancements of Korea. Often times, in our competitive modern society, the values of charity, respect for the dignity of others, care for the poor, and the sick and aged, are placed on a secondary level. In a society of competition, there is the trend to set aside the weaker side of society. There is the tendency for despair and discouragement, especially in the youth. Also needing a witness of faith is our desire of peace in the Korean Peninsula: In every Korean soul, there is that inner desire for the grace of peace and reunification in the divided peninsula. Witness can also entail personal sacrifices for the faith.
 
HOPE: is not something that is merely futuristic, but rather the efforts that we all do, inspired by our faith, that the Message of Jesus Christ, of peace and love will always prevail.
May the lives of the martyrs of Korea encourage us to be better persons and better catholics, in the service of Jesus Christ and his Church.. AMEN.
 
Seoul, 24 June 2017
+Osvaldo Padilla
Apostolic Nuncio
입력 : 2017.07.14 오전 10:5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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