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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WIND BELL

바벨 탑과 에펠 탑, 사라진 세계무역회관 쌍동이 빌딩과 롯테 현 서울 탑, 인도 보디 가야 成佛塔 등의 건축 철학 觀想 !

글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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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의 옛 바벨 탑과 파리 현 에펠 탑뉴욕의 사라진, 전의 세계무역회관 쌍동이 빌딩과  

롯테 현 서울 탑인도 보디 가야 成佛塔, 등 觀想 !>
思想家 不在 時代에 생각하는 여유를 생각해 보며 !!!

바벨 탑의 철학은 무엇이었나? 하늘에까지 올라가 보자 !?

   이라크 바그다드 부근에서 최근에도 독일계 고고학자들이 옛 바벨 탑 터전의 고고학적 발굴을 하면서 발표하는 보도를 보면, 동서 사방 91m 넓이에  91m 높이의 4 각 구조물이었다니, 탑이라기보다도, 대제국의 대규모 황제 대궐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같다. 그런데, 기원전 15세기 전후의 것으로 보이는 현재의 이런 규모의 바벨탑 흔적보다, 1, 2천년 그 이전에 2 차례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건립 도중에 중단된 초기 옛 바벨 탑의 터전 규모는, 사방 150 여 m 이상의 구조물이었다니,,,! 오죽하면 하느님이 언어교란을 일으켜 공사를 훼방하여 중단시켰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스라엘 민족사에 전설 그 이상의 의미로 기록되어, 창세기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선사시대를 전후하여, 인류의 거의 모든 민족들은, 天命, 天子, 天意, 天皇, 天帝, 天祭, 天聽, 天國, 天使, 天神, 天君,天王, 등, 하늘을 등에 업거나 앞에 모시고 내세우며 祭政一致의 부족 통치를 해야 했다. 그래서, 유별란 관광자원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 바벨 탑 건립의 이유와 목적과 동기와 철학이 무엇이었는지 사람들은 곰곰히 따져보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다. 사실 옛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 등의 대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바벨 탑 건립 동기는, 하늘까지 연결하며 하늘의 위엄을 갖는 황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선사시대 이후, 모든 민족들은 제정일치의 사상으로, 천명이니, 대국 천자니, 천의니, 하며, 마치 현대에 와서, 걸핏하면, 국민의 뜻이니, 국민이 원하므로, 국민을 위하여, 하면서, 좋게 말하면 고상한 신념으로, 좀 혹평하면, 하늘이나 국민을 핑게삼아 독재하기 위해서 하늘이나 국민을 이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구약 성경에까지 기록되어 전해지는 바벨 탑은 인간들이 하늘까지 오르기 위해서, 벌렸던 대규모 공사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인간들은 적어도 하늘까지 올라가서, 모두가 하느님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바벨탑 건축에 동원되었던 여러 부족들이나 이웃 종족들과 싸워서 이겨 잡아온 포로들의 언어와 특히 건축용어를 활용한 반대운동으로 하늘에 오르려는 바벨 탑의 건축은 완성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인도 보디가야(成道地), 불탑 건립과 수호에 정성을 모으던 신앙인들의 철학은 ?!

  그런데, 인도의 보디 가야는 흔히, '부다 가야'라고 발음하는 이들이 많은데, 부처님을 연상하는 발음으로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보디 가야'보다, '부다 가야'라는, 그곳 옛 고대어(?)  발음이 더 정겹게 느껴진다. 아쇼카 왕조 때 건립되었다는 이 成道地의  불탑은 40 여 m 내외의 높게 쌓은 큰 석조 탑으로 내부에는 우리나라 석굴암처럼 훌륭한, 아주 큰 불상이 모셔져 있다. 무굴(몽골) 제국 군대와, 아랍 이슬람 군대, 등의 외부세력의 침략, 등으로 주변 지방의 백성들이 모두 피난을 가기 전에 총 동원하여, 이 불탑을 감추고 보호하기 위하여, 흙을 퍼서 이고 지고 하며 날라다가 불탑을 파묻어 버렸다고 하는데, 부근에 있는 연못들이 흙을 퍼가느라고, 그 때 생겼다고도 하며, 침략군들이 사라진 후에도 수세기가 지난 후, 백성들은 모두 역사의 망각 속에서 살아왔고, 먼 훗날 어느 농부가 밭을 갈다가 석조물 봉우리 조각 일부가 들어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이 큰 불탑이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고, 그 대로 수백년간 지하 흙 속에서 보전되었었다니, 당시 그 지역 불자들의 정성은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유사한 예가 일본 우라가미 성당의 불상 뒤에 숨겼던 성모상 신심이나, 이슬람 점령시절, 스페인의 농가 헛간의 곡식에 감추여 있던 성모상 공경 유적에서, 옛 신앙인들의 정성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 탑 건립의 동기와 정성은 국가와 민족과 국민을 위하여 ?!  

   프랑스 파리의 에펠 탑은 잘 알려진 대로, 알프스 산맥의 큰 철광산에 큰 돈을 벌어었던 에펠이 세계 제일차 만국 박람회를 계기로, 프랑스와 파리를 세계에 알리고 빛내기 위하여, 모파상을 비롯한 일부 논객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마침내 완공한 명물로서, 석조문화 시대에서 철기문화 시대로 진입하는 인류 문명 발전의 분수령으로 말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에펠 탑의 건립 동기와 이유와 목적 추진의도에는 분명히 애국심과 민족정신, 등이 깃들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사실 100 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뉴욕의 세계 무역회관 건축 용도와 목적과 동기는 ? 경제력과 무력을 위하여 ?

사실 뉴욕의 세계적이며 인류문화사적인 쌍동이 빌딩은 북미 대륙의 경제와 재정, 무역과 국력의 상징처럼, 상업적인 용도와 국제 정치적인 용도를 감안하여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슬람 종교 이념과 현대 서방세계인들과의 사상적 갈등, 특히, 중동 아랍지역의 에너지 자원을 둘러싼 세계대전 이후의 강대국들간의 이해관계와 세력들간의 충돌이 아랍지역 민족들의 종교적 갈등과 함께 마침내 자랑스러웠던 쌍동이 빌딩은 세계 만민이 보는 가운데 불과 한두시간만에 자살폭파 공격기에 의하여 붕괴되었다. 사실 이 건물은 세계 무역과 재정과 금융의 행정 관활을 위한 사무용 건물이었다고 보는 것이 이해가 더 쉽다. 분명 바벨탑이나 에펠탑처럼 부다가야의 석가 탑처럼 그 건립 동기나 목적이 제정일치 시대의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이지는 않았다. 인류의 소유물이나 수익물을 관리하고 지키는 그릇처럼 사용되는 실로 드높은 현대적인 탑이었다.

서울과 홍콩, 중동 하늘에 치솟는 빌딩의 건립 의도와 목적과 용도와 철학은 ?!

우리가 학생 때 시작된, 서울의 조흥은행 본점 건물과 검은 삼일 빌딩이 높히 치솟기 시작한 다음으로, 여의도의 63 빌딩, 최근 롯테 서울 탑, 등 드높은 빌딩들의 건립의 용도와 목적과 이유와 동기에는 합당한 철학이 결여되지 않았는지 !? 높은 산에 등산가서 봉우리에 올라 내려다보기 위해서나, 높은 데서 앉아서 마시고 먹고 하기 위해서나, 건물 내로 바다를 축소하여 옮겨다 놓고, 바다물고기들의 헤엄치는 모습을 관망하기 위해서 구경꾼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줄을 서서 오르내린다. 천문학적 재정을 투입하여 우리가 현대에 와서 경쟁하며 건립하는 아시아와 중동의 여러 나라들, 미국의 세계무역회관의 붕괴를 보면서, 건축물의 용도와 가치와 교훈과 정신적 의미를 되새겨 보는 철학적 명상의 시간적 여유가 아쉽다.

우리들 자신은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들을 위한 우리 자신임을 발견하는 자각과 확신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겠다. 
서울의 讀書堂 옛 터전은 조선시대 약 300여년간 최고의 수재들을 뽑아, 국가의 최고급 인력을 양성하던 국립 연구소 터인데, 지금은 옥수동 대형 아파트단지가 되어 있다. 세종, 성종 때에 賜暇讀書제도를 국립연구원으로 발전시켰다고나 할까, 적어도 조선 시대의 인재들 중에는 독서당 출신들이 상당히 있었다. 이율곡 선생과 이 퇴게, 이항복, 박지연,등 저명한 인재들이 독서당 출신들이었다. 그런데,이러한 학문연구의 국가적 기관의 터전을 일반 주택지화한 것은 아쉬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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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12월 2일 인도, 네팔 지역의 불교 성지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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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思想家 不在 時代에 생각하는 여유를 생각해 보며, !!! -추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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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9월을 보내며,

방랑시인 김삿갓의 [九月山] 詩 한 수를 음미해 보자.

 

9월은 한국 순교자들의 피로 붉게 물든 순교자 성월이다. 9월 중에 있었던 교회 초기부터의 주요 은총의 역사들을 간추려 보면서, 전 세계가 불안해 하는 위험한 핵 전쟁 검은 구름 아래서 성모님의 보호를 다시 한번 간청하자.

 

우선 우리나라 천주교회 초기 100 여년 간 천주께서 베풀어주신 특은들을 되새겨보며, 오늘의 우리들 현주소가 어디 있는지 냉엄하게 확인해 보아야 하겠다. 날마다 감사기도를 잊지 말자 !

 

1770년부터 1784년까지, 약 15년간 우리 한국교회 창립선조들은 한국 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를 본거지로 삼아,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신앙 단체를 결성하여, 한국교회를 창립하고, 이웃 북경 교회에 이승훈 진사를 파견하고, 1984년 봄에는 교회 본부를 서울 수표동 이벽 성조 자택으로 옮기고, 이벽 성조께서 이기양과 이가환 대학자들과의 천주교와 유교에 관한 공개토론회에서 대승을 거두시면서, 몇 달 후에는 명례방의 순교자 토마스 김범우 역관의 집으로 다시 옮겼고, 거기서 1785년 을사년 봄에는 최초의 천주교 박해를 당하였다.

 

박해는 계속되고, 점점 확대되어, 1791년 신해년 박해와, 1795년 을묘년 박해, 1801년 신유년 박해, 1815년 을해년 박해, 1827년 정해년 박해, 1839년 기해년 박해, 1846년 병오년 박해, 1866년 병인년 박해를 당하여,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목숨을 바쳐가며 살아 남았고, 죽음을 견디는 희생으로 생명을 연장하였다(忍死延生-黃嗣永 帛書 末尾).

 

1787년 9월 14일, (음력 7월 17일),김범우 토마스 밀양 단장(삼랑진)순교.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리오16세 조선교구(대목구) 설정.

1839년 9월 20일, 정하상, 아버지 정약종이 참수된 서소문에서 순교.

18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 사제된지 13개월만에 새남터에서 순교.

1925년 7월 5일 복자79위 시복 후, 9월 26일을 순교복자 대축일로 제정.

 

1801년, 정약용, 황사영, 정약종, 권철신, 이가환, 등, 위대한 인물들까지 처형되는 신유년 박해 후 10여년이 지나자, 1811년 홍경래 반란이 일어났다. 천주교도들이 그 동안 받아온 잔인한 박해가 당시 국가와 사회의 불의와 부정을 바로잡으려는 깃발을 들고 나온 홍경래 반란군들에게 정신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홍경래 반란군에게 항복하였던 선천부사 김익순이 반란 평정 후, 3족까지 멸하는 반역죄인으로 처형될 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훗날의 김삿갓(본래 이름은 金炳然)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평생 40 여년을 삿갓을 쓰고 걸인으로 구걸하며 전국을 누비는 동안, 천주교 신도들의 피로 물든 강산을 방랑시인으로, 주목하면서, 그러나 묵묵히 돌아다니며, 비운의 시대사회 비판의 저항 시를 읊었다. 마치, 근대 서구사회의 민주주의 개창의 시조라고도 부르는 쟌 쟈-크 룻쏘(Jean Jacque Russo)가 무명의 시골 읍내를 돌며 떠들던 가설극장의 시나리오 각본을 써내려 갔듯이.

 

40 여 년간 걸인 시인으로 주유천하 하였던 방랑시인 김삿갓이 천주교 신도들의 피 바람을 쐬지 않고, 모를리가 없었을텐데,,,,! 그러나 그의 해학적인 시문에는 천주교 체취를 찾아볼 수가 없다. 혹시 앞으로 어디선가 좀 나올라는지 ?

 

순교자 성월 9월을 보내면서, 박해시절 방랑시인 김삿갓의 [9월산]시 몇 귀절을 음미해 본다. 황홀한 9월 단풍으로 어느 황제보다도 위엄과 온화를 겸한  황제복을  변함없이 걸치고, 태산의 무게로 좌정해 보이는 9월의 9월산 경관은 방랑시인 김입, 김병연에게 비할데 없는 유아독존의 소리없는 호소(虎嘯) 였으리라. 

 

황해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심이 좋은 고장으로 유명하다. 황해도 지역은 넓은 평야가 많고, 대부분 토질이 태백산맥 암석 대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서, 땅이 비옥하며, 해안선과 도서들이 많아서, 농작물과 해산물이 매우 풍성하여, 주민들 삶이 윤택하였으며, 심지어, 마을에 손님이 오면 돼지를 잡는다는 말이 전해오는 곳이다.

 

흉년에는 걸인들이 자주 모여드는 지역이었다. 배고픈 방랑시인 김삿갓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주  찾아간다고 눈총을 줄 사람도 없는 선량한 마음씨의 백성들이 많은 황해도를 가면서, 소박하고 황홀하며, 순수하고 우람한, 9월의 단풍이 만발한 9월 산 경관은 빼놓을 수 없는 관광이었고, 시 한 수를 남기는 것역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누구도 못 말리는 본업이었다.그래서 재산목록 제1호가 되는 지필묵을 꺼내 들었다.   

 

昨年九月 過九月 (작년구월 과구월) 지난 해 9월에도 九月山을 지나갔었는데,

今年九月 過九月 (금년구월 과구월) 금년 9월에도 또 九月山을 지나게 되었구나!

年年九月 過九月 (년년구월 과구월) 해마다 9월에 九月山을 지나며 보니,

九月山光 長九月 (구월산광 장구월) 구월산 경치는 늘 구월일세 그려 !

 

지금은 김사갓이 황해도에 가도, 9월산 단풍 구경을 맘껏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말년에 전라도 동복을 지나면서, 쓰고 다니던 삿갓을 몇 번이나 바꾸었는지, 40평생을 머리에 쓰고 다니면서 고마움을 적어서 남기기도 하였다. 삿갓은 유일한 벗이오, 의관이며, 자랑이오, 단벌 신사 제1호의 심리적 의지였다.

 

浮浮我笠等虛船 (부부아립등허선) 부웅 떠 있는 내 삿갓이 텅 빈 배처럼 보이지만,

一着平生四十秋 (일착평생사십추) 평생에 한번 쓰고나서 가을이 40번 지났네 그려.

識者衣冠皆外飾 (식자의관개외식) 식자들의 의관이란 모두가 겉꾸미는 것이지만,

滿天風雨獨無愁 (만천풍우독무수) 하늘에 가득찬 비바람에 삿갓으로 홀로 근심이 없다네.

 

그러나, 몸은 늙고 병들고, 걸인 생활 40 여년에 마침내, 전라도 동복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죽하면 발길을 돌리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그냥 서서 머뭇거리기도 어렵다는 심정을 시문으로 표하였다. 歸兮亦難躇亦難 (귀혜역난저역난)

 

"집으로 되돌아가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그냥 서서 머뭇거리며 있을 수도 어렵기에! 돈푼이나 좀 있다고,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조석변하는 숨결에 시들어가는 건강을 믿으며, 으시대고, 뻐기며, 뽑내고, 우쭐대며, 껏쩡거리고, 얼굴내고, 이름내며, 초상집에 가서 장사 술 가지고, 친구 사귀느라 분주한, 정치인, 사법인, 종교인, 지식인, 우리 모두, 방랑시인 김삿갓의, "歸兮亦難躇亦難 (귀혜역난저역난)-집으로 되돌아가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그냥 서서 머뭇거리며 있을 수도 없는" 신세들임을 깨달아 보아야, 이미 늦지 않았으랴 !?"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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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7.29 오전 10:3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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