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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9월 9일은, 조선교구 설정일, 1831년의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성 정하상 성 유진길, 부르기에르 소주교, 등을 기억합시다.

글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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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381, 9월 9일은 1831년, 조선교구설정, 전국 교회 경축일입니다 . 조선 교구 설정의 주역들,1831년의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성 정하상 성 유진길, 부르기에르 소주교, 등을 기억합시다.

한국천주교회 신앙의 선조들의 피로 물든 9월 중, 우리 후대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주요 역사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가) 1785년(을사년) 한국 최초의 박해, 을사년 박해로,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주동역활을 한, 하느님의 종, 광암 이벽 성조께서는 형조판서 김화진이 주도하는 박해로,가문과 가정의 이해와 협조로, 집안에 연금되고, 당시 왕궁이나 양반가에서 종종 있었던 아사벌로 10여일 굶주린 후, 음독벌로 아직 운명하지 않자,두꺼운 이불로 여러번 겹겹이 멍석말이하듯 몸을 말아, 질식사 당하여, 한국교회 역사상 첫번째로, 1785년 음력 6월 14일(정학술의 니벽전에 의거한 운명일로, 경주이씨 문중에서 1873년에 편찬한 계유보를 토대로, 1934년에 문중에서 보완 편찬한 갑술보에서는, 당시 조선 총독부 경무국 수사과에서,독립운동, 특히, 북간도 지역에서 경주이씨 출신의 이시영, 이휘영, 등이 함께하는 신흥무관학교에 관한 수사와 관련하여,이벽 성조의 운명일을 7월 5일로 기록하였다)련, 전국 경주이씨에 관한 족보를 가장 세밀히 조사 수집한 갑술보에서는 이벽 성조(1754~1785)의 운명일을 1785년 7월 5일로 기록하였으며, 첫째 부인 안동권씨가 무육(아기 낳지 못함), 둘째 부인 해주정씨도 무육(아기 낳지 못함)으로 사망하여, 3합장 하였으며, 기일은 5월 10일로 기재하고 있는데, 아들 현모(1784~1847)가 이벽성조의 양자로 계승되는 것은 이벽 성조 사후에, 후대에 가정과 종친회에 의하여 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나) 1787년(정미년) 음력 7월 17일(양력 9월 14일) 서울 명례방 집주인 토마스 김범우 순교자가 유배지 경남, 밀양군 단장면 단장리(현재의 삼랑진 근처)에서 한국교회에서는 두번째로 천주께 목숨을 바친 날이다.

다) 1831년(신묘년) 9월 9일은 조선에 교황청 관리 대목구(교구의 전신)가 그레고리오 교황에 의하여 설정된 날이다.

라) 1846년(병오년) 9월 16일은 한국교회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날이다.

마) 1839년(기해년) 9월 22일은 조선교구 설립의 주동역활을 한, 성 정하상 회장이, 아버지 정약종 성현이 1801년 봄에 순교한 서울 서소문 밖 같은 장소에서 45세로 순교하신 날이다.

바) 그 외에도 9월은 수많은 신도들이 순교하였기에, 1925년 한국 주교회의는 9월을 [순교복자 성월]로 정하여 전국 교회가 거룩히 지내고 있다.

No. 381
9월 9일은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조선교구설정, 전국 교회 경축일입니다. 몬시뇰 2015-09-09. 조회 1423
9월 9일, 오늘은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조선교구설정 교서가 발표된, 전국 교구의 경축일입니다!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께서는, 교서, "Ex debito pastoralis officii superna Dei,,,"를 발표하여,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갈망하던 사제들이 조선에 입국하여 신자들을 돌보는 조선교구(DIAECESIS COREAE)가 설정되었습니다.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조선교구 설정 교서>
 
 
Gregorius XVI세 교황은 지금의 로마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전신, 포교성(Propaganda Fidei) 차관 대주교 시절부터, 조선 교우들이 보내는 편지를 읽고, 선교사가 한 명도 들어가지 않은 아시아 동쪽 끝 먼 나라에서 신자들이 교회를 세우고, 사제를 보내달라고 하므로,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하며, 몇년 후, 교황이 되자마자, 적지 않은 반대와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선교구를 설정합니다.
 
[하느님의 至上命令에 대하여 교회가 사목적 직무수행을 소홀히 한 빚을 지고 있는, 부채 덩이를 實感하는 마음으로(Ex debito pastoralis officii superna Dei,,,)],,,)]라는 표현으로 시작한 교황 교서는, 교회가 그 동안 조선 신자들이 성직자 없이,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피를 뿌리며 신앙을 지키고, 목숨을 바치며 살아남아서 간청하는 조선 신도들이 급박한 위기상황에서 구조요청(perpendere necessitas)하는 바를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조선교회 신자들의 애절한 청원(Nos perpensis Coreanorum  christianorum necessitatibus,,)을 깊이 숙고한 나머지, 북경교구에서 독립시켜, 조선교구를 설정한다는 교서의 내용은,  우리나라 평신도들의 간청에 의해서 교구를 설정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모든 교구 설정은 기존 교구장의 요청으로 이루어지므로, 조선교구는 평신도들 간청의 꾸준한 노력으로 설정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현 교황님의 Memory Guard 말씀을 상기합시다.).                   
 
본래 교구명은 민족주의나 국수주의 예방을 겸하여, 국가명을 쓰지 않고, 대부분 편의상 중심 도시명을 따르게 되어 있으니, 일본 교구나 미국 교구라는 교구명 설정은 없으며, 동경 교구, 뉴욕 교구라는 표현을 쓰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서울]이나 [한양]이라는 지명이 유럽에 알려져 있지 않았고, 북경이나 마카오를 경유하여 어쩌다가 있는 로마와의 서신 연락에도, [高麗] 때부터 국제적으로 종종 유럽에 알려진 왕국명을 따라서, COREA 라고 불렀는데, 사실은 조선 전국을 포함한, 특히, 오늘의 [서울 교구] 설정 명칭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서울 교구의 생일이며, 동시에 전국 교회의 큰 축일입니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께서 조선교구 설정 교서 발표와 동시에,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 발도로메오 부르기에르(Bartholomaeo Brugueire) 蘇 주교에게 보내신 친서>
 
 
천주교회의 교구(Diocesis ← dioecesis)라는 말은 본래 로마 대제국 때  3세기 경, Diocletianus 황제가 시작하여  Constantinus 황제, 등이 제국을 4관할 구역으로 나누어 부르던 행정구역 단위 호칭이었으며, 천주교회는 사도시대부터, 신자들의 모임이나 공동체를 교회(Ecclesia) 라고 불렀고, 차차 발전하여, 13세기 경에 와서는 오늘과 같은 교구 제도가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생활 근거지 중심으로 부르던, 교구와 같은 의미의 본당(Parraechia → parroechia →  parrochia)이 이 때부터 아주 차별하여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9월 9일은 우리나라 전국 교구가 다같이 기억하고, 감사하며, 경축해야 할 축일입니다. 천진암 성지에서는 매년 9월 9일, 조선교구 설정기념일에, 조선교구 설립의 주역 성 정하상 유진길 성현들의 묘를 참배하며, 12시에 감사미사를 드리고, 간소한 다과를 나누기도 합니다. 전에는 서울 교구에서도 매년 9월 9일에는 신도들이 마포 산등성이에 있는 서울교구 용산 성직자 묘지에 모셔진 초대 교구장 발도로메오  부르기에르 소주교님의 묘를 참배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발도로메오 부르기에르 蘇 주교님은 프랑스 남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작은    도시 Carcasson에서 태어나셨는데, 필자가 1984년 8월 말 방문하였을 때는, 무궁화꽃이 마을 주변과 특별히 카르카쏭의 古城, 성벽 둘레와 마을 골목 여기저기 울타리마다 매우 아름답게 만발하여 있어서, 마치 한국 땅을 찾아온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무궁화는, 동양 최초의 책이라는 중국의 山海經에 나오는 대로, 당시의 대부분 사람들이 옷을 못 입고 살던 시절, 君子의 나라에 사는 東夷族 들(韓民族)은 옷을 입고, 허리띠를 띠고, 칼을 차고, 관을 썼으며, 아침 일찍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早開暮死) 무궁화(中國 古語로는 薰華草)를 가꾼다고 기록함으로써, 이미 문헌상으로도 약 4천년 전부터 배달겨레가 민족적이며 종교적인 의미로 자기네 마을의 표지나 거처의 표지로 심어서 가꾸던 韓民族의 民族花입니다.
 
    <인류 역사상, 民族花나 國花 제정의 梟示的인 관습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삼국시대 말기에, 唐나라 유학에서 귀국한 최치원이 신라국왕의 명으로 작성하여 唐에 보낸 國書에서는, 신라를 槿花鄕 이라고 新羅 自國 소개를 하고있는데, 당시, 후백제, 후고구려, 발해, 등의 우후죽순처럼 출현하려는 세력들 중에 오직 신라만이  본래의 東夷族, 즉, 韓民族 국가라는 의미를 부각시키는 표현으로 볼 수 있읍니다. 이러한 문화는 무궁화가 고려의 국화로 자리잡게 하였고, 이성계 장군이 조선을 開國하면서, 오얏나무 꽃, 즉  李花 를 궁궐화로 바꾸어 정하면서, 대궐에서 쫓겨난 꽃 無宮花로 선비들이 부르던 것을, 조선시대 말기에 열강들의 침략을 염두에 두고, 근대 우리 선각자들은 을 다함이 없다는  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선사시대를 전후하여서부터, 이렇게 우리겨레가 살고 있는 마을이나 주막집들의 표지였던 무궁화가, 고대 몽골족의 일부인 프랑군족이 水陸 양면으로 서쪽으로도 이동할 당시, 지중해 연안까지 화초로 무궁화가 묻어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蘇 주교님은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사제가 된 후, 극동선교를 자원하여 동남아(샴)에서 선교하시다가, 당시 아프리카보다도 덜 알려지고 더 멀리 있어서, 아무도 자원하지 않는 조선 선교를 자원하신 분으로,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자, 즉시 조선 임지로 출발하였으나, 천신만고 끝에 북경의 북동쪽에 있는 펠리구 마을까지 와서, 路毒과 과로로 인한 병을 얻어, 조선 땅을 밟아보지조차도  못하고, 1835년 10월 19일, 43세에 선종하셨습니다.
 
중국의 시골 공동묘지 잡초가 우거진 가운데 묻혀져 있던 소주교님의 묘는 그동안 중국 내의 박해와 전란이 계속되어, 찾아가는 이들도 없고, 또 찾기가 극난하여, 사실상 잃어버리다시피하고 있었습니다.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뮈뗄 민대주교님의 정성과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의 노력으로, 초대교구장 소주교님이 임종하신 중국 시골 동네를 수소문하여 찾아 가서, 계속하여 수소문하여 묘를 찾고, 마침내 장례식 때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세웠던 돌비석과함께 유골을 발굴하여,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 모셨습니다. 토마스 안중근 의사 묘를 관리 못하고 잃어버린 데 비하면, 얼마나 큰 다행입니까?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소주교님의 묘를 찾아 옮겨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들에게, 한국 모든 교우들은 대대로  감사를 드립시다. !
 
 -Msgr. Byon- 
 
오늘 9월 9일은 1831년, 조선교구설정, 전국 교회 경축일입니다 . 조선 교구 설정의 주역들,1831년의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성 정하상 성 유진길, 부르기에르 소주교, 등을 기억합시다. 한국천주교회 신앙의 선조들의 피로 물든 9월 중, 우리 후대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주요 역사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가) 1785년(을사년) 한국 최초의 박해, 을사년 박해로, 한국천주교회 창립자, 하느님의 종, 광암 이벽 성조께서는 형조판서 김화진이 주도하는 박해로,가문과 가정의 이해와 협조로, 집안에 연금되고, 당시 왕궁이나 양반가에서 종종 있었던 아사벌로 10여일 굶주린 후, 음독벌로도 아직도 운명하지 않자,두꺼운 이불로 다시 여러번 더욱 겹겹이 멍석말이하듯 몸을 말아, 질식사 당하여, 한국교회 역사상 첫번째로, 1785년 음력 6월 14일(또는, 7월 5일) 순교하셨다.
그 후, 한국 교회 역사상 두번 째로,
 
나) 1787년(정미년) 음력 7월 17일(양력 9월 14일) 서울 명례방 집주인 토마스 김범우 순교자가  유배지 경남, 밀양군 단장면 단장리(현재의 삼랑진 근처)에서 한국교회에서는 두번째로 천주께 목숨을 바친 날이다.유배지로 떠나기 전에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과 거듭된 고문으로 다리가 부러졌으며, 유배지에 도착한 후에는 상처가 썩어가기 시작하여 2년 후, 천주께 목숨을 바쳤으니, 유배 형을 받아, 순교하신 것이다.  
 
다) 1831년(신묘년) 9월 9일은 조선에 교황청 관리 대목구(교구의 전신)가 그레고리오 교황에 의하여 설정된 날이다.
 
라) 1846년(병오년) 9월 16일은 한국교회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날이다.
 
마) 1839년 (기해년) 9월 22일은 조선교구 설립자 성 정하상  회장이, 1801년 봄에 아버지 정약종 성현이 순교한 서울 서소문 밖 같은 장소에서 45세로 순교하신 날이다. 
 
바) 그 외에도 9월은 수많은 신도들이 순교하였기에, 1925년 7월 5일, 79위 시복식 이후, 한국 주교회의는 9월을, [순교복자 성월]로 정하여 전국 교회가 거룩히 지내게 하고 있다. 
 
 9월 9일은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조선교구설정, 전국 교회 경축일이다.  
 2015-09-09.   조회 1423
 
 
No. 381,  9월 9일은 1831년, 조선교구설정, 전국 교회 경축일입니다 .
조선 교구 설정의 주역들,1831년의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성 정하상 성 유진길, 부르기에르 소주교, 등을 기억합시다. 한국천주교회 신앙의 선조들의 피로 물든 9월 중, 우리 후대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주요 역사를 한두가지 더 상기시키고자 한다.
 
 1785년(을사년) 봄, 한국 최초의 박해, 을사년 박해로,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주동역활을 한, 하느님의 종, 광암 이벽 성조께서는 형조판서 김화진이 주도하는 박해로,가문과 가정의 부득이한 이해와 협조로, 집안에 연금되고, 당시 왕궁이나 양반가에서 종종 있었던 아사벌로 10여일 굶주린 후, 음독벌로도 아직 운명하지 않자,두꺼운 이불로 여러번 겹겹이 멍석말이하듯 몸을 말아, 질식사 당하였다.
 
 한국교회 역사상 첫번째로 순교한 잉벽 성조의 순교 운명일은 1785년 음력 6월 14일로 기록하였는데, 이는 정학술의 니벽전에 의거한 운명 기록일이다.
 
 그러나, 경주이씨 문중에서 1873년에 편찬한 계유보를 토대로, 1934년에 문중에서 보완 편찬한 갑술보에서는, 당시 조선 총독부 경무국 수사과에서,독립운동, 특히, 북간도 지역에서 경주이씨 출신의 이시영, 이휘영, 등, 조선독립운동가들이 함께하는 신흥무관학교에 관한 수사 자료와 관련하여, 전국에 산재한 경주이씨 문중의 무관 가문 후예들 족보 기록 중에 이벽 성조의 운명일을 7월 5일로 기록하였다. 
 
  당시 최초의 금속활자본 족보 로서, 전국 경주이씨에 관한 족보를 가장 세밀히 조사 수집한 갑술보에서는 이벽 성조(1754~1785)의 운명일을 1785년 7월 5일로 기록하였으며, 첫째 부인 안동권씨가 무육(無育, 아기 낳지 못함), 둘째 부인 해주정씨도 무육(無育, 아기 낳지 못함)으로 사망하여, 3 합장 하였다고 기로하였으며, 합동 기일은 5월 10일로 기재하고 있는데, 아들 현모(1784~1847)가 이벽 성조의 양자로 계승되는 것은 이벽 성조 사후, 훨씬 후대에 가정과 종친회에 의하여 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1848년의 경주이씨 무신년 족보의 이벽 성조 난에는 안동권씨 병조판서 권엄의 딸과 결혼한 것과 묘소가 화현리 있는 것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873년 계유보에서는 안동권씨가 무육(無育=无育)으로 기록되어 있고, 계유보를 토대로, 1934년의 최초 금속활자본 갑술보에서는 해주정씨도 무육(아기를 낳지 못함)으로 기록되었으며, 3합장과 기일이 5월 10일로 밝혔고, 이벽 성조의 운명일은 1785년 7월 5일로 적고 있다. 다만, 7월 5일이 음력으로인지, 혹은 최초의 금속활자본을 내면서, 음력 6월 14일을 태양력으로 환산한 것인지, 또는, 춘천 마족산 아래 샘밭 천전리와 포천의 내촌면 화현리 새터 말(신기리, 갓등산 낮은 봉 아래)에 있던 이부만공 주변 노복들의 무슨 가승 가승문서 같은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근거로 한 것인지는  좀 더 연구해보아야 하겠. 적어도, 1934년에 나온 갑술보가 최초의 금속 활자본인데, 족보 중에 가장 세밀하고 정확하게 다양한 내용을 수록한 거만은 사실이다.(현재 국립도서관 소장).
 
 그동안 조사하여본 바로서, 필자의 견해로는 [니벽전]의 집필자인 정약용, 혹은, 정학술이 시대적으로 이벽성조와 동시대의 매우 밀접한 관계인들이므로, 100 여년 후대의, 문중이나 가문이나 관공서의 기록보다 훨씬 더 신빙할만하다고 확신하므로,
이벽성조의 최종 운명일은 1785년 음력 6월 14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 하겠다. 


1801년 신유년 박해의 최종 순교자 알렉시오 황사영 진사와 가족들, 정명연 마리아와 아들 황경헌의 유배생활.  
-Msgr. Byon-


묘 진입로가 토지 소유자에 의하여 출입금지되어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일행이들어갈 수가 없다. 더군다나 묘 진입로가 토지 소유자에 의하여 출입금지되어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일행이들어갈 수가 없다. 더군다나 묘 진입로가 토지 소유자에 의하여 출입금지되어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일행이들어갈 수가 없다. 더군다나 묘 진입로가 토지 소유자에 의하여 출입금지되어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일행이들어갈 수가 없다. 더군다나 묘 진입로가 토지 소유자에 의하여 출입금지되어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일행이들어갈 수가 없다. 더군다나 묘 진입로가 토지 소유자에 의하여 출입금지되어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일행이들어갈 수가 없다. 더군다나 묘 진입로가 토지 소유자에 의하여 출입금지되어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일행이들어갈 수가 없다. 더군다나 묘 진입로가 토지 소유자에 의하여 출입금지되어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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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추, 가막골, 홍복산 끝자락에 있는, 순교자  황사영 진사 묘, 러브 호텔 뒤란으로 허락을 받고 들어가 참배, 
변기영 몬시뇰 외 천진암 성지 직원3(2013.06.29)


송추, 가막골, 홍복산 끝자락에 있는, 순교자  황사영 진사 묘, 러브 호텔 뒤란으로 허락을 받고 들어가 참배, 
변기영 몬시뇰 외 천진암 성지 직원3(2013.06.29)


송추, 가막골, 홍복산 끝자락에 있는, 순교자  황사영 진사 묘, 러브 호텔 뒤란으로 허락을 받고 들어가 참배, 
변기영 몬시뇰 외 천진암 성지 직원3(2013.06.29)


송추, 가막골, 홍복산 끝자락에 있는, 순교자  황사영 진사 묘, 러브 호텔 뒤란으로 허락을 받고 들어가 참배, 
변기영 몬시뇰 외 천진암 성지 직원3(2013.06.29)


송추, 가막골, 홍복산 끝자락에 있는, 순교자  황사영 진사 묘, 러브 호텔 뒤란으로 허락을 받고 들어가 참배, 변기영 몬시뇰 외 천진암 성지 직원3(2013.06.29)


송추, 가막골, 홍복산 끝자락에 있는, 순교자  황사영 진사 묘, 러부 호텔 뒤란으로 허락을 받고 들어가 참배, 
변기영 몬시뇰 외 천진암 성지 직원3(2013.06.29)


송추, 가막골, 홍복산 끝자락에 있는, 순교자  황사영 진사 묘, 러브 호텔 뒤란으로 허락을 받고 들어가 
참배할 수 있다., 변기영 몬시뇰 외 천진암 성지 직원3(2013.06.29)

장흥(長興)면 부곡리 가막골 선영의 순교자 황사영(黃嗣永) 진사(進士) 묘(석제(石製)에서 십자가 형 돌 배치 및 소형 백자 항아리 발견돼) 

주문모 신부로부터 Alexius 본명으로 세례를 받은 황사영 진사는 주신부님과 거처를 같이 하며 전교에 힘쓰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제천 산골 배론 토굴에 몸을 숨기고는 북경 주교 앞으로 보내는 백서(帛書)를 썼다.

그러나 도중에 밀사였던 황심(黃沁)이 잡히면서 황사영도 체포되어,서울로 압송된 후, 달포 남짓하게 온갖 고문을 당한 후, 12월 초에 서소문 네거리에서,양 팔과 양 다리와 목에 밧줄을 감고 사방에서 말 4필이 동시에 달리게 하여,온 몸을 여섯으로 찢어죽이는 능지처참형의 육시를 당하여 순교하였다(26세).한국의 순교자들 중 가장 잔인하고 처참한 형벌로 순교하였다.천주교 때문에, 천주교 신앙 때문에, 천주님 때문에, 한국 교회사에 가장 무서운 박해와 고통을 받고 처참하게 죽은 순교자 황진사와 그 가정은 1801년 신유박해를 마감하는 수난의 순교가정이었다.
 
순교자 황진사보다 3살 위의 부인 丁命淵 마리아는 文度公 요한 丁若鏞 承旨의 친 조카딸이며, 광암 이벽 성조의 친 외조카 딸인데, 1801년 제주도 모슬포 대정읍으로 유배되어, 39년간 官奴로 종살이 하다가 68세에 세상을 떠났고, 아들 黃慶憲은 1801년 3살 때, 제주도로 유배가는 어머니와 함께 가다가, 추자도에 강제로 떨어뜨려, 마음착한 어부 吳씨가 거두어 길러서, 추자도에서 죽을 때까지,제주도에서 유배생활하는 어머니를 한번도 뵙지 못하고,아들 경헌이도 추자도에서 세상을  떠났다.순교자 황진사의 어머니 전주 이씨는 1801년 거제도로 유배되어, 문전걸식하는 걸인으로 지내다가 굶어서 거제도에서 핍진하여 세상을 떠났다.
 
순교자 황진사가 능지처참형으로 처형되어 온 몸이 찢어져 사방에 흩어진 살덩이와 의복 조각들을 그 벗들이 모아, 창원황씨 종종산 선영인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가마골(홍복산 밑)에 묻혔는데,1980년 여름, 종친회의 17대손 황용호(黃龍浩, 동국대, 경상대)교수와 당시 대구대교구에서 발행하던 가톨릭시보사의 고상국 기자가 자료를 추적하며 변기영 신부(당시 주교회의 200주년 주교특별위원회 사무국장 겸 순교자 시복시성추진부장)에 알려주어, 7월 초에 1차 답사하고, 9월 1일에 묘를 발굴하면서, 무덤 속에서 십자가형으로 놓은 돌들과 황사영 진사의 손목에 감고 다니던 비단대(帶)가 들어 있는 작은 이조백자 항아리가 발견되었다.황진사는 16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정조 임금이 감탄하며, 황진사의 손목을 잡고 격찬하였는데,상감이 잡았던 손목에 항상 비단 한 폭을 감고 다녔다고 전하고 있다. 
 

가마골 홍복산 아래 있는 순교자 황사영 진사의 묘를 발굴하기 전,대구 가톨릭신문사 고국상 기자의 안내로 성직자로서는 최초로 답사 확인한 변기영 신부, (당시 한국주교회의 200주년주교특별위원회 사무국장 겸, 한국순교자시복시성추진부장,1980년 7월 1일)

순교자 황사영 묘 발굴시 발견된 항아리를 변기영(신장 본당)신부가 들어내고 있다. 곁에 있는 황두희씨는 판윤공파(判尹公派) 종친회 회장으로 황사영 계의 후손이다. 신유박해 당시 황사영의 외아들 경헌이 추자도로 유배되자, 황씨 문중에서는 족보상으로 황사영의 사촌인 병직(秉直)을 양자로 들여 손(孫)을 잇게 했었다.(1980년 9월 1일)



가마골 홍복산 아래 있는 황사영 진사 묘를 발굴후 재 손질한 모습(변기영 신부, 1980.09.20일 경)
     

가마골 홍복산 아래 있는 황사영 진사의 묘를 발굴하기 전 답사 확인(변기영신부1980년 7월 1일) 
입력 : 2013.06.30 오전 10:4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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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묘 발굴 당시 발견된 항아리를 변기영 신부가 들어내고 있다. 곁에 있는 황두희씨는 판윤공파(判尹公派) 종친회 회장으로 황사영의 직계손이다. 신유박해 당시 황사영의 외아들 경헌이 추자도로 유배되자, 황씨 문중에서는 황사영의 사촌인 병직(秉直)을 양자로 들여 손(孫)을 잇게 했었다.(1980년 9월 1일)


가마골 홍복산 아래 있는 황사영 진사의 묘를 발굴후 재 손질한 모습(1980년 09월 20일)


가마골 홍복산 아래 있는 황사영 진사의 묘를 발굴하기 전 답사 확인(1980년 7월 1일)


변기영 몬시뇰과 천진암 성지 회장들의 황사영 묘 참배(2009.12.04)


변기영 몬시뇰과 천진암 성지 직원들과 천진회 회장들의 황사영 묘 참배(2009.12.04)
 

천진암 성지 주임 김학렬 신부 황사영 묘 참배(2012.09.06)

 

제주도 모슬포 대정읍 정명연 마리아(황사영 진사의 부인)의 묘(수원교구, 성지 신부들 피정, 
변기영 몬시뇰과 제주교구 동창 허승조 신부님)2008.12.10



제주도 모슬포 대정읍 정명연 마리아(황사영 진사의 부인)의 묘(수원교구, 성지 신부들 피정, 
변기영 몬시뇰과 제주교구 동창 이태수 신부님)2008.12.10



제주도 모슬포 대정읍 정명연 마리아(황사영 진사의 부인)의 묘(수원교구, 성지 신부들 피정,
 2008.12.10



제주도 모슬포 대정읍 정명연 마리아(황사영 진사의 부인)의 묘(수원교구, 성지 신부들 피정, )
2008.12.10



제주도 모슬포 대정읍 정명연 마리아(황사영 진사의 부인)의 묘(수원교구, 성지 신부들 피정, )
2008.12.10



제주도 모슬포 대정읍 정명연 마리아(황사영 진사의 부인)의 묘(수원교구, 성지 신부들 피정, 
변기영 몬시뇰과 제주교구 동창 이태수 신부님)2008.12.10



천진암 성지, 등너머에 있는 5위성현 묘 가족묘에 모셔진 경주이씨 묘(정명연 마리아의 어머니이며, 
이벽성조의 누이)



추자도에 있는 황경헌(황사영 진사의 아들)의 묘(수원교구 성지신부님들 제주도에 피정, 2008.12.10)



추자도에 있는 황경헌(황사영 진사의 아들)의 묘(수원교구 성지신부님들 제주도에 피정, 2008.12.10)



추자도에 있는 황경헌(황사영 진사의 아들)이 3살때 귀양가서 떨구어졌던, 황새바위
(표시된 곳에 3살배기를 놓아두었던 자리)(수원교구 성지신부님들 제주도에 피정, 2008.12.10)



추자도에 있는 황경헌(황사영 진사의 아들)이 3살때 귀양가서 떨구어졌던 황새바위
(수원교구 성지신부님들 제주도에 피정, 2008.12.10)



추자도에 있는 황경헌(황사영 진사의 아들)이 3살때 귀양가서 떨구어졌던 멀리서 보이는 황새바위
(수원교구 성지신부님들 제주도에 피정, 2008.12.10)


입력 : 2017.09.18 오후 8:26:51
입력 : 2017.09.05 오전 2: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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