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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9월을 보내며,방랑시인 김삿갓의 [九月山] 詩 한 수 음미를 !

글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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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9월을 보내며,

방랑시인 김삿갓의 [九月山] 詩 한 수를 음미해 보자.


9월은 한국 순교자들의 피로 붉게 물든 [순교자 성월]이다. 9월 중에 있었던 교회 초기부터의 주요 은총의 역사들을 간추려 보면서, 전 세계가 불안해 하는 위험한 핵 전쟁 검은 구름 아래서 성모님의 보호를 다시 한번 간청하자.

우선 우리나라 천주교회 초기 100 여년 간 천주께서 베풀어주신 특은들을 되새겨보며, [오늘의 우리들 현주소]가 어디 있는지 냉엄하게 확인해 보아야 하겠다. 날마다 감사기도를 잊지 말자 !

1770년부터 1784년까지, 약 15년간 우리 한국교회 창립선조들은 한국 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를 본거지로 삼아,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신앙 단체를 결성하여, 한국교회를 창립하고, 이웃 북경 교회에 이승훈 진사를 파견하고, 1984년 봄에는 교회 본부를 서울 수표동 이벽 성조 자택으로 옮기고, 이벽 성조께서 이기양과 이가환 대학자들과의 천주교와 유교에 관한 공개토론회에서 대승을 거두시면서, 몇 달 후에는 명례방의 순교자 토마스 김범우 역관의 집으로 다시 옮겼고, 거기서 1785년 을사년 봄에는 [천주교회가 한국에서 최초의  박해]를 당하였다.

1785년 을사년의 최초박해 후에도,박해는 계속되고, 점점 확대되어, 

1791년 신해년 박해와, 

1795년 을묘년 박해

1801년 신유년 박해

1815년 을해년 박해

1827년 정해년 박해, 

1839년 기해년 박해

1846년 병오년 박해

1866년 병인년 박해를 당하면서도,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목숨을 바쳐가며 살아] 남았고, 

죽음을 견디는 희생으로 생명을 연장하였다(忍死延生-黃嗣永 帛書 末尾).


그 동안 9월 중에는,


1787년 9월 14일, (음력 7월 17일), 김범우 토마스 밀양 단장(삼랑진)순교.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리오16세 조선교구(대목구) 설정.

1839년 9월 20일, 정하상, 아버지 정약종이 참수된 서소문에서 순교.

18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 사제 된지 13 개월 만에 새남터에서 순교.

1925년 , 9월 26일을 순교복자 대축일로 제정, 등. (7월 5일 복자79위 시복 후),

그 후 [9월을 순교복자 성월] 로 정하여 순교 선조들 공경의 달로 하였다.

1983년 9월 27일, 103위 한국순교복자들의 역사적인 시성이 최종 확정선포되었다.


1801년, 정약용, 황사영, 정약종, 권철신, 이가환, 등, 위대한 인물들까지 처형되는 신유년 박해 후 10여년이 지나자, 1811년 홍경래 반란이 일어났다. 천주교도들이 그 동안 받아온 잔인한 박해가 당시 국가와 사회의 불의와 부정을 바로잡으려는 깃발을 들고 나온 홍경래 반란군들에게 정신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홍경래 반란군에게 항복하였던 선천부사 김익순이 반란 평정 후, 3족까지 멸하는 반역죄인으로 처형될 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훗날의 김삿갓(본래 이름은 金炳然)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한평생 40 여년을 삿갓을 쓰고 걸인으로 구걸하며 전국을 누비는 동안, 천주교 신도들의 피로 물든 강산을 방랑시인으로서 주목하면서, 그러나 묵묵히 돌아다니며, 비운의 시대사회 비판의 저항 시를 읊었다. 마치, 근대 서구사회의 민주주의 개창의 시조라고도 부르는 쟌 쟈-크 룻쏘(Jean Jacque Russo)가 시골 읍내를 떠돌며 떠들던 무명의 가설극단 시나리오 각본을 써내려 갔듯이!.

40 여 년간 걸인 시인으로 주유천하 하였던 방랑시인 김삿갓이 천주교 신도들의 피 바람을 쐬지 않고, 모를리가 없었을텐데,,,,! 그러나 그의 해학적인 시문에는 천주교 체취를 찾아볼 수가 없다. 혹시 앞으로 어디선가 좀 나올라는지 ? 순교자 성월 9월을 보내면서, 박해시절 방랑시인 김삿갓의 [9월산]시 몇 귀절을 음미해 본다. 황홀한 9월 단풍으로 어느 황제보다도 위엄과 온화를 겸한  황제복  해마다 9월이면 변함없이 걸치고, 태산의 무게로 좌정하여 방랑시인 김삿갓을 대하며 기다리던 9월의 9월산 경관은 방랑시인 김입, 김병연에게 비할데 없는 유아독존의 소리없는 호소(虎嘯) 였으리라. 

황해도는 우리나라에서 인심이 가장 좋은 고장으로 유명하다. 황해도 지역에는 넓은 평야가 많고, 대부분 토질이 태백산맥 암석 대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서, 땅이 비옥하며, 해안선과 도서들이 많아서, 농작물과 해산물이 매우 풍성하여, 주민들 삶이 윤택하였으며, 심지어, 마을에 누구네 집에나 손님이 오면 돼지를 잡는다는 말이 전해오는 곳이다. 

흉년에는 당연히 허기진 걸인들이 자주 모여드는 지역이었다. 배고픈 방랑시인 김삿갓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주  찾아간다고 싫어하며 눈총을 줄 사람도 없는 황해도를 가면서, 소박하고 황홀하며, 순수하고 우람한, 9월의 단풍이 만발한 9월 산 경관은 빼놓을 수 없는 관광이었고, 시 한 수를 남기는 것역시, 김삿갓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누구도 못 말리는 본업이었다. 그래서 삿갓과 함께 재산목록 제1호에 속하는 지필묵을 꺼내어 일필휘지하였다.  


昨年九月 過九月 (작년구월 과구월)-지난 해 9월에도 九月山에 왔었는데,

今年九月 過九月 (금년구월 과구월)-금년 9월에도 또 九月山에 오게 되었네!

年年九月 過九月 (년년구월 과구월)-해마다 9월에 九月山에 와서 보니,

九月山光 長九月 (구월산광 장구월)- 구월산은 언제나 구월 빛을 발하고 있네 그려 !


지금은 김사갓이 황해도에 간다하더라도, 9월산 단풍 구경을 맘껏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말년에 그는 전라도 동복을지나면서, 쓰고다니던 삿갓을 몇 번이나 바꾸었는지, 40평생을 머리에 

쓰고 다니면서 고마움을 적어서 남기기도 하였다. 삿갓은 유일한 벗이오, 의관이며, 자랑이오, 

호신도구이며, 심리적 의지였다.


浮浮我笠等虛船 (부부아립등허선) 부웅 떠 있는 내 삿갓이 텅 빈 배처럼 보이지만,

一着平生四十秋 (일착평생사십추) 평생에 한번 쓰고나서 가을이 40번 지났네 그려.

識者衣冠皆外飾 (식자의관개외식) 식자들의 의관이란 모두가 겉꾸미는 것이지만,

滿天風雨獨無愁 (만천풍우독무수) 하늘에 가득찬 비바람에 삿갓으로 홀로 근심이 없다네.


그러나, 몸은 늙고 병들고, 걸인 생활 40 여년에 마침내, 전라도 동복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죽하면 발길을 돌리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그냥 서서 머뭇거리기도 어렵다는 심정을 시문으로 표하였다.


幾蹈蒼山幾渡船, (기도창산기도선) 그동산 청산을 밟고 넘기 몇번이며,배타고 물건느긴 몇번인가?

兮亦難躇亦難, (귀혜역난저역난)집으로 되돌아가기도 어렵고, 머뭇거리며 서서 머물기도 어렵도다.


"집으로 되돌아가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그냥 서서 머뭇거리며 있을 수도 어렵기에!" 돈푼이나 좀 있다고,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조석변하는 숨결에 시들어가는 건강을 믿으며, 으시대고, 뻐기며, 뽑내고, 우쭐대며, 껏쩡거리고, 얼굴내고, 이름내며, 초상집에 가서 장사 술 가지고, 친구 사귀듯하는, 실로, 浮生이 空自忙하고 있는, 분주한, 政治人, 臆論人, 司法人, 宗敎人, 知識人, 등,오늘의 한국사회인들 우리 모두는, 방랑시인 김삿갓이 아니랴?

"幾蹈蒼山幾渡船,兮亦難躇亦難(기도창산기도선,귀혜역난저역난)- 그동안 청산을 넘고넘기가 몇번이며,배를 얻어타고 강과 하천은 몇번이나 건넜던가? 이제는집으로 되돌아가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머뭇거리며 그냥 서서 있을 수만은 없는", 우리 모두 [정신적인 방랑자들] 신세임을 깨달았다 하여도, 이미 때는 늦지 않았으랴 !?" - Msgr. Byon

www.변기영몬시뇰사랑방.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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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기수(全基洙) 그레고리오 신학생


전기수 신학생은 나주군 나주면 보산리 125번지에서 1922년 12월 29일 출생하였다. 서울 가톨릭 대학에 진학하여 1950년 5월 28일 시종직 4품을 받고 수학을 하던 중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나자 신학교는 휴교하고 신학생을 귀가 조치 시켰다. 전기수 신학생과 고광규 신학생은 1950년 9월 25일 전주에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공산군에게 학살당했는데 (김창문·정재선, 『한국 가톨릭 어제와 오늘』, 317-318쪽들.)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 함께 전주까지 같이 피난 왔던 동창생 김정용 신부의 증언 (천주교 광주대교구, 『광주대교구50년사』, 135쪽.) 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우리 세 사람이 전주에 도착한 것은 9월 20일 경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곧 나의 매형 주선으로 전주 전동 골방에 피신처를 정했습니다. 나는 전주에 도착하여 5일째인 9월 25일 바로 다음날은(26일) 추석명절이요, 우리 79위 복자의 축일이므로 이날을 좀 더 뜻있게 지내보려는 심정에서 혼자 피신처를 나왔습니다. 나는 추석 준비를 해보겠다고 나왔으나 어수선한 거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경솔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느꼈으며, 주위 사람들도 만류하여 시내에 들어가지 않고 교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10시경 끔찍하고 무서운 소식이 나의 처소에 날아 왔습니다. 두 동료가 모두 체포되어 예수 병원자리 소위 정치보위부에 압송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제관 주방 담당 아가씨에게 들은 그들의 체포 경위를 말하겠습니다.

9월 25일 오후 전기수 신학생은 서울에서 20여일이나 많은 신세를 지고 왔던 ‘만념상회’의 송경섭(루가)씨 댁 소식을 그 댁의 처제되는 성심여중에 근무하는 최 수녀님(대구교구 소속인 최봉도 신부의 고모)께 전하고자 피신처를 나와 최 수녀의 은신처로 찾아가던 중 그만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정치보위부에 끌려가서 온갖 신문과 고문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고 베드로도 체포를 당한 것은 물론입니다.

이 두 신학생 보다 앞서 체포되어 이들과 함께 감방생활을 하였던 강 수녀(살트르 성 바오로 회 수녀로 당시 전동본당에서 활동)는 당시 이들의 수감 모습과 거동을 나에게 다음과 같이 전해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식사를 받자 전기수 신학생은 열심히 식전 축문을 외우고 성호를 그으며 이 음식을 먹고 순교할 각오를 하자고 신덕(信德)에 불타는 열변으로 고요히 말하고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태연했습니다.’

27일 오후 5시경, 전주 형무소의 문이 개방되고 공산군이 도주한다는 희소식이 전해지고, 28일 유엔군의 진주를 환영한다고 전주 시내가 야단이었습니다. 이때 나는 나에게 가장 급한 문제가 두 동료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먼저 형무소로 가서 찾아보았으나 두 신학생이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여러 곳을 찾아 헤매다 희망을 걸고 예수병원 자리로 가보았습니다. 이 곳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온 산을 다 찾아본 결과 산언덕 방공호 속에 학살된 시체가 무수히 많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시체들을 헤쳐 보았더니 참혹하게도 줄줄이 묶은 시체 중 맨 첫 번째에 전기수 그리고 두 번째에 고광규 두 신학생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시체가 부패했어도 고광규 신학생은 곧 알아볼 수 있었으나 전기수 신학생은 알아볼 수 없었는데, 내가 전해준 바지를 입고 있었기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두 분의 시체는 부패하였으나 온 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머리가 상한 것으로 보아 타살된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 두 신학생은 부주교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 신부의 주례로 연미사를 봉헌하고 수많은 신자들이 뒤를 따르는 애도와 눈물 속에 치명자 이 누갈다의 무덤 아래 고이 안장했습니다.』


1950년 9월 26일 전주 예수병원 방공호의 굴에서 28세의 나이로 순교한 전기수 신학생은 전주 성직자 묘 아래 1차로 모셔졌다가, 현재는 담양 성직자 묘지에 안장 (천주교광주대교구평신도사도직협의회, 『만번을 죽어도 하느님을 믿겠습니다.』(광주: 아름다운 세상, 2006. 1. 31), 214쪽.) 되었다.


  • 고광규(高光圭) 베드로 신학생

 

고광규 신학생은 1925년 7월10일 목포시 양동 125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서울 가톨릭 대학에 진학하여 삭발례 품을 받고 신학생으로 수학을 하던 중 한국 전쟁의 발발로 전주로 피난하였다가 1950년 9월 25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과정은 위의 전기수 신학생의 내용과 같다. 1950년 9월 26일 전주 예수병원 방공호의 굴에서 28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전주 성직자 묘 아래 1차로 안장되었다가 목포 연산동을 거쳐 현재는 담양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입력 : 2017.09.30 오후 11: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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