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잎 족속 같은 인생이어라.
잎은 바람에 불리어 땅에 떨어지고,
봄이 오면 나무는 또 다시 새 움을 틔우나니,
인생도 이와 같아 누구는 태어나고, 또 누구는 죽느니라.] -비르질리우스 원작, 최민순 신부 번역 - 단떼신곡 참조.
늦가을의 名詩, ‘나뭇잎 족속 같은 인생이어라’ - Virgilius 원작- 최민순 신부 역시.잎은 바람에 불리어 땅에 떨어지고,
봄이 오면 나무는 또 다시 새 움을 틔우나니,
인생도 이와 같아 누구는 태어나고, 또 누구는 죽느니라.] -비르질리우스 원작, 최민순 신부 번역 - 단떼신곡 참조.
[나무 잎 족속 같은 인생이어라.
잎은 바람에 불리어 땅에 떨어지고,
봄이 오면 나무는 또 다시 새 움을 틔우나니,
인생도 이와 같아 누구는 태어나고, 또 누구는 죽느니라.]
古典 名詩를 즐기는 이들 중에는 오늘이 바로 기원 전 1세기경 로마대제국의 유명한 시인 비르질리우스(Virgilius Publius Maro)의 탄생 일(,Oct. 15, 70 B.C.)임을 기억하는 이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의 탄생일처럼, 늦가을 단풍지는 이 시기에 인생철학적인 이 名詩는 오늘날, 특히 그의 생일인 오늘 음미해볼만 하다. 서양문학사의 창시적 연혁에 남아 있는 문학가로만 흔히들 알고 있는듯 말하지만, 그보다는 당시에 그리 많지 않던 철학자였다.
늦가을은 우리 모두가 자기 인생의 중간 결산서를 작성해 보아야 하는 때다.
아마 어떤 이들에게는 최종 결산서가 되기도 할 것이다. 남의 일로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천 이백 여만 명이 서울을 가득 채우고 살고 있지만, 앞으로 100 여년 후에는 오늘의 우리가 이름도, 고향도 전혀 모르는 새로운 인간들이 태어나서, 이 서울을 점령하고 채우며 아귀다툼하며 살 것이다. 마치 100 여 년 전에 서울을 차지하고 살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거리와 집에서 100여년 후 오늘을 살며 지나가는 우리를 전혀 알 수도 없었고, 생각지도 못하며 살고 갔듯이! 그래서 옛 시인은 읊었다.
고인(古人)도 날 못 보았고, 나도 고인은 못 뵈었네.
내가 고인은 못 뵈었어도, 고인이 살아가던 그 옛날 길 맨 앞에서 나는 가고 있네 그려.
지금 내가 고인이 살아가던 예던 길 앞에 가고 있다면, 나역시 어찌 옛날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랴 !
Virgilius는 시골 농촌에서 태어나서 로마와 밀라노, 아테네와 나폴리, 등을 옮겨 다니며, 문학, 철학, 등 학문을 닦으며, Augustus를 비롯한 당대 많은 名人名士들과 交分을 나누며, 한 때 잠시나마 Caesar의 군대에도 입대한 적이 있던 名詩人으로서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철학적인 牧歌도 써서 남겼다. 시성이라고까지 부르던 단떼는 비르질리우스의 시를 몹씨 사랑하여서인지, 그의 신곡 지옥편의 첫 마디를 위의 시문으로 시작하였다.
구태여 聖書를 뒤적이지 않더라도, 50억 만 명을 넘는 인류는, 종합적인 진화론자, Teilhard de Chardin S.J. 신부의 대표적 著書 표제처럼, 지구상에 나타난, ‘人間群像(Le Phenomenon Humain)’이다. 매초마다 3명 정도 태어나고 2명 정도가 죽는다니, 우리도 그 중에 들어 있고, 그 속에 끼어 있는 현상의 一點일 뿐이다. 그러니, 아우성치며 野壇法席을 떨지만, 모두가 蝸牛角狀에 競爭長短에 不過하지 아니하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스페인의 大데레사 聖女의 가르침과 그 삶을 따라서, 오로지 天主님만을 섬기는 일에 모두 남김없이 바쳐야 하겠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살기 힘들어 하시는 주님의 居處는, 돈이 많은 교회기관들, 본당이나, 수도원으로, 참고 견디다 못하시어, 마침내 떠나가시게 되는 것을, 오늘 유롭 교회의 여러 현실에서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교회도 같은 길로 들어서서 달리고 있지 않는지, 걱정할 때가 되었다. 우리 주님도 살 수 없어서 떠나시는 곳에, 너무나 많은 이들이 거기 가서 거처하며 살고 싶어하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아닌 바보들의 신분증 소지자들이 아닐까?
지금 내가 고인이 살아가던 예던 길 앞에 가고 있다면, 나역시 어찌 옛날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랴 !
Virgilius는 시골 농촌에서 태어나서 로마와 밀라노, 아테네와 나폴리, 등을 옮겨 다니며, 문학, 철학, 등 학문을 닦으며, Augustus를 비롯한 당대 많은 名人名士들과 交分을 나누며, 한 때 잠시나마 Caesar의 군대에도 입대한 적이 있던 名詩人으로서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철학적인 牧歌도 써서 남겼다. 시성이라고까지 부르던 단떼는 비르질리우스의 시를 몹씨 사랑하여서인지, 그의 신곡 지옥편의 첫 마디를 위의 시문으로 시작하였다.
구태여 聖書를 뒤적이지 않더라도, 50억 만 명을 넘는 인류는, 종합적인 진화론자, Teilhard de Chardin S.J. 신부의 대표적 著書 표제처럼, 지구상에 나타난, ‘人間群像(Le Phenomenon Humain)’이다. 매초마다 3명 정도 태어나고 2명 정도가 죽는다니, 우리도 그 중에 들어 있고, 그 속에 끼어 있는 현상의 一點일 뿐이다. 그러니, 아우성치며 野壇法席을 떨지만, 모두가 蝸牛角狀에 競爭長短에 不過하지 아니하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스페인의 大데레사 聖女의 가르침과 그 삶을 따라서, 오로지 天主님만을 섬기는 일에 모두 남김없이 바쳐야 하겠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살기 힘들어 하시는 주님의 居處는, 돈이 많은 교회기관들, 본당이나, 수도원으로, 참고 견디다 못하시어, 마침내 떠나가시게 되는 것을, 오늘 유롭 교회의 여러 현실에서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교회도 같은 길로 들어서서 달리고 있지 않는지, 걱정할 때가 되었다. 우리 주님도 살 수 없어서 떠나시는 곳에, 너무나 많은 이들이 거기 가서 거처하며 살고 싶어하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아닌 바보들의 신분증 소지자들이 아닐까?
돈 많은 교회 기관이나 단체에는 높은 직책과 지위의 유능하고 훌륭한 분들이 앉는 큰 의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거기에는 존경과 찬사와 영광과 풍요와 온갖 귀중물 증정의 화려함에 환장한 사람들이 밀고 제치고 붐비기가 일수로, 전화도 예약도 무기한 밀리고 넘치는 남대문 시장의 확장 신규 마트와도 같아지니, 그런데 종종 그런 곳 중에는 바쁘신 주님이 이미 떠나신지 오래되어, 거기서는 주님의 발자취도, 흔적도 남긴 것이 별로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찾는 이들 중에 반드시 만나뵈올 수 있는 곳은 베들레헴 주막집 마구간의 말구유나, 이스라엘 점령군 사령관 빌라도 총독 관저의 현관 회랑 중앙의 빌라도 의자 앞에 서서 사형언도를 기다리던 주님이 서 계시던 자리에서나, 예루살렘 골고타 동산, 주님의 처형장 십자가가 세워졌던 자리에서가 아니랴 ? 거기서 우리 주님은 밤새도록 두들겨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로 쪼그리고 앉아서, 우리네 죄인들이 관광차 유원지로 달려가는 길에 시행착오로라도 혹시 그 흔한 작은 물병이라도 들고 지나가다가 들리기를 무한정 기다리시는 침묵으로 인내와 희망을 버리거나 잃지 아니하시는 의리의 님이 아니신가 ?!
Msgr. Byon
***************************************오늘의 추가 묵상 자료*******************************
우리 중에 장애자가 아닌 사람이 그 누구랴 ?
오늘 주일에도 천진암 성지를 찾아온 1,000여명의 순례자들 중에는 서울과 일산, 충북 진천, 안양 산본,서울 천호동과 일원동 등 각처에서 각계각층의 신자와 비신자들이 함께 왔는데, 특히 인천교구 장애자들 165명을 인솔하고 온 인천교구 사회복지 담당신부와 소경들, 그리고 각종 불구자들이 우리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천진암 성지 주변에 살고 있는교우들 중에 천진회원들이 성금을 거두고 음식을 만들어 따뜻한 점심을 무료로 하게 하였다. 매년 6월 24일에 거행되는 한국천주교회창립기념행사에 오는 장애자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만 성지에서 점심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번 10월 12일 주일에는 좀 예외였다. 지난 달의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모두들 매우 기뻐하였다.
앞을 못보거나 말을 못하거나 일어서지를 못하여 휠체어를 타고 온 장애자 형제들을 대하면서 이들의 순수하고 진솔하고 소박한 마음씨와 깨끗한 정신과 착하고 정직한 그 성격에 고개숙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악한 세상에도 이처럼 착하고 담박한 인격자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럽고 기쁜 일인가?
온 몸이 성하여 자유자재로 걸어다니고 말하며 생활하는, 이른 바 정상적으로 건강한 우리들은 정신과 마음과 영혼과 인격면에서 장애자들이 아닌 자들이 얼마나 될까? 육체적인 장애자들보다 정신적인 장애자들이 더 불행한 장애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특히 돈이나 세력이나 지식이 좀 있다고 하여 뻐기고, 뽑내고, 으시대며,우쭐거리면서,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을,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서글프게 하는 인격 장애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더우기 자신의 장애내용을 알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이들은 육체적인 겸손하고 정직한 장애자들만도 못하지 않은가?
심각한 장애상태의 위급한 문제 속에 처해 있으면서, 철저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 사람들한테서 치료적인 장애문제 해결책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진리의 목소리를 못 알아듣거나 알아듣고도 외면하며,진실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거나 억지로 못본체하는 정신적인 장애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기와 질투,과욕과 사기, 중상모략과 증오심, 복수심 등으로 끓고타는 이들 중에는 불치의 장애자들이 적지 않음을 서글퍼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종교, 군사, 과학, 등 많은 분야에서 정신적 장애자들이 꼴값을 떨며, 연극을 펼치는 무대같이만 느껴지는 것자체도 장애현상이 아닐까? 온전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정신적으로 과도한 장애를 겪으며 우리는 이 짧은 인생을 이 험한 세상에서 이 빠른 세월을 타고 살고 가는 반짝 인생,여름 밤 초저녁을 날아가며 사라지는 반딋불 인생이 아닌가?
온전하고 완전한 육체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랴? 그러나 우리는 모두 육체적으로 우선 각가지 많은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이보다도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는, 훨씬 더 심각하고 중차대한 장애인들이 아닌지, 스스로 검진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