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월 21일, 일명, [124사 부대의 김신조 청와대 목표, 서울 침투 사건] - 휴전 중 전투 실전기 -
휴전 후, 청와대 기습 시도한 북한 124 특수부대원들(김신조 외 31명)의 몰살(1968년 1월 21일)기록,일명, 김신조 부대의 청와대 목표,서울 침투사건.
46년 전 오늘, 무장공비는 청와대로!
경찰이 맨몸으로 무장한 공비에 수갑을 채우다! - 입력 : 2014.01.21 오후 3:49:19 / 조회수 : 1362 -
내일, 1월21일은 한국 現代史(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1968년 1월21일 밤 북한군 특수부대의 청와대 기습 사건 46주년이다. 김일성은 6.25 남침에 이은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다. 南侵(남침)으로 韓美동맹이 만들어지고, 거대한 국군이 생겨났으며, 朴正熙(박정희)가 현역으로 복귀, 권력을 잡는 길을 걷는다. 남침이 없었더라면 한국은 월남식으로 적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21 사태는 경제개발에 주력하던 박정희 대통령을 자극, 자주국방력 건설로 내몰았다. 예비군이 창설되고 무기를 만들기 위한 기초 산업으로서 중화학공업 건설이 시작되었다. 중화학공업 건설은 안보적 요구에서 출발하였지만 한국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오늘날의 경제大國(대국)으로 키우는 결정적 계기였다. 김일성의 나쁜 짓이 대한민국을 생존투쟁의 길로 내몰아 超人的(초인적) 노력을 하도록 강박한 것이다. 역사는 예측대로 진행하지 않는다는 좋은 사례이다. 대한민국은 惡(악)을 惡으로 갚지 않고 萬人(만인) 앞에서 善(선)을 행하는 방법으로 惡을 이겨가는 중이다.
이 사건을 취재한 기록(朴正熙 傳記 수록)을 다시 읽어내려가면 당시 한국인들의 反共(반공)정신과 투지에 놀라게 된다. 형사가 특수부대원과 맞서고, 시민이 무장한 공비와 격투를 벌이고, 경찰서장은 31명의 공비들의 앞길을 막고 당당하게 호령하다가 총격을 받고 순직한다. 막강한 공권력의 칼을 갖고도 非무장 종북세력에 끌려다니는 요사이 한국 정부와 비교하면 "아, 우리에게 이런 시절도 있었구나. 우리가 이스라엘 식으로 살았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북한정권과 하수인들을 대할 때는 그때처럼 눈에서 殺氣(살기)가 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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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 18일 오전 5시, 은밀 침투로 법원리 뒷산에 도착한 북한 124군 부대 31명의 무장 공비들은 지쳐 있어 이날 밤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공비들은 假眠(가면) 상태로 휴식하고 있었고, 5명이 교대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무장 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해 들어온 시각에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순시에 여념이 없었다. 1월 18일에는 외무부, 문교부, 공보부에 들러 1968년도 시정 방침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1월 19일, 여야 총무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국회가 2월 중순까지 공전이 확실시되는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은 법무, 국무, 교통 3개 부처를 순시했다. 그는 국군 장병의 처우 개선, 호남선 복선화 계획 촉진 및 호남지방 고속도로 계획을 수립할 것을 관계 부처에 지시하고 있었다. 이때가 오후 2시경.
바로 그 시각, 파주군 초리골에 살던 禹聖濟(우성제)를 포함한 네 형제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벼랑 아래에 숨어 있던 공비들의 경계병과 마주쳤다.
“국군 대위 한 명, 소위 한 명, 그리고 사병 계급장을 단 3명 등 모두 5명이었죠. 우리 국군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신발은 검은 농구화였고, 총은 개머리판을 접을 수 있는 AK 소총이었어요. 한눈에 공비라고 알아보았지만 도망가기엔 너무 때가 늦었습니다.”
禹 씨 형제를 본 공비들은 태연을 가장하고 불러 세워 담배를 권하더니 갑자기 기관총으로 등을 밀며 벼랑 쪽으로 몰았다. 우 씨 형제들이 벼랑 밑으로 와보니 일개 소대 병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겁을 집어먹은 禹 씨 형제들에게 “너, 우리가 어떤 사람들 같아?”라고 물었다. “군인 같은데요”라고 하자 공비들 중 한 명이 “우린 혁명당이야”라며 참깨 섞인 엿과 오징어를 주고 말을 붙였다.
“너, 쌀밥 일 년에 얼마나 먹어봤어?”
“밥은 하루에 세 번 먹잖아요.”
“……”
31명의 공비들은 禹 씨 형제들에게 지서의 위치와 문산, 동두천, 의정부로 가는 방향을 묻기도 하는 등 이런저런 말을 붙여왔다.
김신조(현 충남 예산군 성결교회 목사)의 증언.
“원칙으로는 작전 도중 만나는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무조건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대원들 중 일부가 ‘죽이면 오히려 문제가 생기지 않겠냐’며 반대를 했습니다. 투표를 했는데 역시 살려두자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禹 씨 형제는 벼랑 아래 덤불 속에서 네 시간여 동안 공비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말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공비들 중엔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둔 손목시계를 꺼내 선물로 주면서 “만약 비밀을 지키지 않고 경찰에 신고하면 우리 후속 부대가 내려와서 너희 마을과 가족들을 몰살시켜 버릴 거야”라고 위협했다.
禹 씨 형제들은 빈 지게를 지고 돌아 나오면서 자꾸만 뒤가 꺼림칙했다고 한다.
“혹시 쏘지나 않을까 겁이 났지요. 우리가 한참 걸어 나오다가 흘낏 돌아보니 깜깜한데 뭔가 움직임이 느껴졌어요. 이동 중이란 걸 알았습니다.”
형제들은 마을 입구 가로등 밑에서 미행이 없는지 살핀 뒤 언제 신고하느냐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이들은 단양 禹 씨 종갓집으로 달려가 어른들과 함께 파주군 법원리 창현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이때가 1월 19일 밤 9시경.
시속 10km의 중무장 산악 질주
국가 간의 전투력은 전장에서 비로소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1·21 사태는 6·25 이후 15년 만에 남북한 전투력을 비교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김신조를 포함한 중무장한 인민군 1개 소대 병력은 휴전선을 넘어 임진강을 건널 때까지 국군 초계병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나무꾼 禹 씨 형제와 우연히 부딪친 것을 제외하면 전방 거주 주민들에게 거동 수상자들로 몰려 신고된 적도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대간첩 작전 능력도 6·25 이후 별로 개선된 적이 없는 상태였다. 통신 계통은 특히 전근대적이었다.
김신조와 30명의 무장 공비 목격 사건은 우 씨 4형제에 의해 1월 19일 밤 9시경 파출소에 신고 접수가 되었지만, 인근 군부대에 전달된 시각은 9시 30분경이었다. 대간첩 작전 대책본부가 설치될 합동참모본부에는 세 시간이 지난 자정 무렵에 이 정보가 도착했다.
김신조 목사의 회고.
“자만심 같은 게 있었어요. 훈련을 받을 때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악구보를 매일같이 하면서 교관들은 우리에게 ‘동무들은 세계 최강의 용사다. 국방군들이 동무들을 비행기로도 못 쫓아오게 만들어 주겠다’며 혹독한 훈련을 시켰거든요.”
1월 19일 오후 8시경 禹 씨 형제들을 살려 보낸 뒤 거의 동시에 김신조 일당은 법원리 뒷산을 출발, 서울을 향해 급속 산악 행군을 시작했다. 급속 행군이란, 중무장한 약 30kg의 짐을 진 군인이 시간당 10km를 주파하는 구보이다. 당시 한국군의 경우 급속 행군은 산악이 아닌 오직 도로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한국군의 군사적 상식으로는 야간 산악 행군일 경우 시간당 4km를 넘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김신조 일당은 시간당 평균 10km씩 주파하면서 법원리-미타산-앵무봉-노고산-진관사-북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달리고 있었다.
비슷한 시각, 중앙정보부 康仁德 과장은 이날도 자신의 분석이 들어맞지 않아 실망한 채 관사로 퇴근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북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1월 20일 토요일 새벽 2시경, 전화벨 소리에 선잠에 빠졌던 강 과장이 전화를 받았다.
“예, 강인덕 과장입니다.”
“과장님, 새까맣게 들어왔습니다.”
“몇 명이나 돼?”
“잘 모르겠지만 30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康仁德 과장은 ‘게릴라전이 시작됐다. 이젠 정치가 아닌 군사력이 대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며 출근 준비를 했다.
이때 김신조 일당은 앵무봉을 지나 경기도 구파발 부근의 노고산 능선을 타고 있었다. 새벽 4시경엔 노고산을 주파한 뒤 서울의 경계선이자 북한산으로 접어드는 길목인 진관사를 통과해서 오전 6시경엔 북한산 비봉에 도착했다. 10시간 동안 거의 휴식 없이 전력 질주를 해낸 것이다.
1월 20일 토요일 오전 9시, 김성은 국방부 장관은 청사로 출근해서야 이 사실을 보고받았다. 오전 9시 30분경, 김 장관은 차를 타고 청와대로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박정희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어디로 들어왔소?”라고 물었다.
“임진강 상류 고량포 쪽입니다. 얼음이 얼면 도보로 건널 수 있는 곳이지요.”
“그놈들이 뭣 하러 들어왔을까?”
“각하, 지난해 놈들은 이미 우리나라의 각종 기간 시설을 파괴하는 활동을 해오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주한 미군의 주둔지 시설 파괴나 테러일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군 부대나 주요 시설도 목표가 될 것 같습니다.”
휴전 후 연간 최다 도발 횟수인 170회를 기록한 1967년 한 해 동안 전방 지역에서는 전쟁에 준하는 북한의 군사 도발이 한국군과 주한 미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감행됐다.
1967년 1월 19일에는 동해 휴전선 근해에서 순찰 중이던 한국 해군 56함 당진호가 두 척의 북한 砲艦(포함)으로부터 피격받아 침몰했고, 4월 12일에는 중부 산악지대 휴전선을 북한군 90여 명이 침범해 들어와 국군 7사단과 교전을 했다. 이때 7사단의 3개 포병대대가 북한 지역에 휴전 후 최초로 585발의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
4월 22일에는 북한군들이 서부전선으로 침투해 미군 막사를 폭파, 두 명의 미군이 숨지고 19명이 부상하는 사건도 있었고, 5월 27일에는 북한 경비정이 연평도 근해에서 작업 중이던 한국 어선단에 포격을 가해 한국 해군이 25분간 엄호 사격을 하기도 했다.
8월 7일에는 침투한 북한군이 판문점 남방 대성동 자유의 마을 앞에서 미군 트럭을 습격해 3명의 미군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했다.
사흘 뒤엔 서부전선에서 한국군 트럭이 습격당해 아군 3명이 사망했다. 8월 28일, 북한군은 판문점 동남쪽 30여m에 위치한 미군 막사를 기습, 미군 3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했다.
9월 5일에는 경원선 열차 폭파사건이, 13일에는 경의선 열차 폭파사건이 있었고 동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을 여러 차례 납치하는 등 진행 속도가 완만할 뿐 전쟁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던 김성은 국방장관은 그 순간까지도 침투한 무장 공비들이 지난해와 유사한 작전을 펼칠 것으로 짐작했을 뿐 청와대가 목표인 것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이날 오전 김성은 장관은 李世鎬(이세호) 6군단장을 전화로 불러내 예비사단까지 동원해서 서울 외곽에 집중 배치토록 지시했다.
6·25 당시 해병 전투단장(여단장)으로 한국군 1사단 지역이던 문산 지역에서 미 해병대와 연합 작전을 수행했던 김성은 장관은 김신조 일당이 침투해 들어오는 해당 지역의 지리를 손바닥 보듯 꿰고 있었다.
김 전 장관은 당시 자신의 추론이 어긋나 있었음을 시인하면서 이렇게 회고했다.
“김신조 일당이 나무꾼들을 풀어준 지점에서 서울 진관외동의 진관사까지 산악 코스로 행군을 하면 해병대도 이틀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진관사를 거쳐 북한산 비봉의 승가사 아래까지 도착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기겁했지요. 중무장하고 야간 산악 행군으로 북한산까지 올 수 있다는 건 제 군대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때늦은 防禦線 구축
1968년 1월 20일 토요일 오전,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주변의 병력 배치 상황을 보기 위해 金聖恩 장관과 朴鐘圭 경호실장을 대동하고 청와대 정문까지 내려왔다. 이틀 후 월남을 방문하기 위해 전날 청와대에 들러 박 대통령에게 보고차 인사를 했던 崔宇根(최우근·육사3기) 수경사 사령관이 청와대로 달려왔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양복 차림의 박 대통령이 정문에 서서 수경사 30대대 병력들이 배치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오후부터 박 대통령은 감기를 앓아야 했다. 최 사령관의 인사를 받은 박 대통령의 얼굴엔 긴장감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곁에 섰던 박종규 경호실장이 “정보부장보다 빨리 오네?”하며 농담을 했다.
오후 2시경, 6군단 예하 3개 사단과 김재규 중장의 6관구 병력이 동원되어 전방에서부터 서울 외곽에 이르는 수십 겹의 방어선이 구축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장 공비들이 이미 통과한 다음 병력을 배치한 것이었다. 공비들은 자신들이 놓아준 禹 씨 형제들의 신고보다 빨리 포위망을 벗어난 셈이었다.
이날 청와대에서 김성은 장관은 이세호 6군단장에게 “주간에는 정밀 수색을 실시해 흔적을 찾고 야간에는 매복을 하라”고 지시했다. 박 대통령은 김성은 장관과 점심을 함께 들며 “임진강이 겨울에도 얼지 않으면 좋을 텐데 말이오”라며 아쉬워했다.
金 장관은 오후 2시경, 수색대로부터 보고를 접했다. 받아 보니 북한산 북쪽 자락의 경기도 송추 유원지 부근에서 무장 공비들의 것으로 보이는 실탄과 탄창 및 흘린 듯한 음식물 약간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설마 거기까지 들어왔을까, 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철통 같은 방어선을 펼쳤는데 하루 만에 그 지역을 통과하면서 유실물 흔적을 남겨 두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박 대통령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보 분석을 함께 하고 있었지요.”
이때 김성은 장관은 결과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결정을 내렸다.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 대통령 집무실에서 전화로 蔡元植(채원식) 치안국장을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서울 지역에 갑종 비상을 걸도록 하고 세검정에서 정릉과 창동에 이르는 축선에 경찰 병력을 배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월 6일 ‘원주 회의’에서 결정된 비상경계령을 처음 적용한 것이었다. 갑종 경계령이 내려진 서울에서는 경찰들이 비상근무에 들어갔다. 이 무렵 무장 간첩들은 북한산 승가사 아래 기슭에 모여 휴식에 들어갔다. 계획대로라면 이날 오후에는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까지 가 있어야 했다.
김신조 목사의 증언.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4일 동안 강행군했기 때문에 지쳐버렸던 것이죠. 원래 루트는 다음날인 21일 오후까지 북악산을 지나 밤 8시경에는 세검정 쪽으로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북악산을 타려면 공격 시간에 제대로 도착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허리까지 눈이 쌓여 발이 푹푹 빠지고 발밑은 미끄럽고 더 이상 산을 타는 것은 무리였다고 판단해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이들은 마지막 남은 산 하나를 둔 채 휴식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비봉에서 세검정 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날 밤 김성은 국방부 장관은 저녁 늦게까지 朴 대통령과 환담했다. 박 대통령은 감기가 조금 심해지는 듯 밤이 깊을수록 기침을 자주 했다고 한다. 金 장관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한남동 공관으로 돌아왔다.
1월 21일 일요일 오전, 김성은 국방장관은 청와대로 곧바로 출근해 任忠植 합참본부장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박 대통령은 지도를 펴놓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김형욱 정보부장이 드나들었지만 對간첩 작전권이 국방부로 이첩되고 사건 성질상 자신이 개입할 만한 것이 아니어서 별 말이 없었다는 것이 김성은 전 국방장관의 증언이다.
자하문 임시 검문소: “우리는 방첩대다!”
1968년 1월 21일 밤 8시경, 박정희 대통령은 기침을 심하게 하고 있었다. 강한 체질이어서 감기에 잘 걸리지 않았던 박 대통령은 저녁식사 후 드물게 감기약을 먹고 밤 9시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 시각, 북한산 비봉 밑에서 마지막 공격 캠프를 차린 김신조와 무장 공비 30명은 조용히 개인 장구류를 챙긴 뒤 눈 덮인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각자 기관단총, 소련제 TT 권총, 수류탄 10발 및 대전차 수류탄 2발, 실탄 300발 그리고 대검을 착용하고 있었다. 방한모 차림에 한국군 군복이었으나 소련군식 장외투에 검은 농구화여서 어딘지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추위와 어둠이 이를 가려주었다.
밤 9시 30분, 이들은 산길을 내려와 내리막길인 일반 도로로 접어들었다. 접철식 AK 소총과 수류탄을 숨긴 외투가 밖으로 불룩했다. 이들은 행군하는 군인처럼 2열 종대를 갖추고 침묵 속에 움직였다. 반짝이는 것은 눈동자뿐.
김신조 목사의 회고.
“생각해 보세요. 1개 소대가 휴전선을 넘어 4일 동안 한 번도 걸리지 않고 서울까지 온 겁니다. 중간에 나무꾼을 살려두어 경계령이 펴진 것을 알게 되었지만 우리는 남한의 경찰이나 군인들을 한 번도 겁낸 적이 없었습니다. 지난 4일간의 경험도 우리가 그들을 비웃는 계기가 되었지요. 검문을 당한다 해도 해치워버리면 그만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영화라고 해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대범함 뒤에는 한국군의 약한 전력이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비봉에 숨어 있는 동안 이들은 세부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침투·습격·탈출조 등 3개조로 나누어 3∼4분 만에 끝낼 계획이었다고 한다.
침투조가 청와대 보초를 제거하고 경계를 펴는 동안 습격조는 청와대 내부를 공격하고 철수하면 그동안 탈출조는 청와대 경내의 차량을 탈취해 시동을 걸어놓고 있다가 임무를 마친 동료들을 싣고 문산 쪽으로 도주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습격조는 목표에 따라 네 개조로 세분되었고 제1조는 청와대 2층을 습격하여 박 대통령을 살해하고, 2조는 청와대 1층, 3조는 경호실, 4조는 비서실에 침입하여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전원 살해한 다음 도피 및 탈출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청와대 1층 습격을 맡은 2조 조장이 김신조 인민군 소위였다. 이들이 세검정 길을 2열 종대로 걸어갈 무렵 서울 시내는 갑종 비상이 걸린 상태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무척 뜸해 있었다. 이 괴한들을 처음 확인한 사람은 李珏鉉(이각현) 서대문경찰서장이었다. 그는 정제불명의 괴한들이 나타났다는 무전 보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했다.
李 서장은 구평동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세검정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는 괴한들을 목격하고 즉시 세검정 파출소에 들어가 서울 시경에 보고했다. 그 직후 李 서장은 스리쿼터에 6명의 형사를 태우고 괴한들을 쫓아가 대열 선두에 차를 세웠다.
“당신들 뭡니까?”
“우리는 CIC 방첩대다. 훈련 끝내고 돌아가는 길인데 참견 말라.”
고압적인 자세로 나오자 李 서장은 차를 타고 뒤쫓아 갈 수밖에 없었다. 밤 10시경, 자하문 고갯길로 방향을 돌린 괴한들은 누각이 있는 언덕까지 올라와 청와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고개 아래 30여m쯤엔 당시 종로구 청운동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있었고, 그 담을 끼고 종로경찰서 관할의 자하문 임시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날 검문소에서 근무하던 종로경찰서 수사2계 朴泰安(박태안), 鄭鍾壽(정종수) 형사가 언덕길을 내려오는 괴한들을 발견하고 검문소 밖으로 나왔다. 괴한들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연락을 받은 바 없었다.
“당신들 뭐요.”
“너는 뭐냐?”
“종로서 형사다.”
“우리는 CIC 방첩대원들인데 특수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서장에게 알렸는데 아직 아무 얘기도 못 들었나. 우리는 너희와 상대할 사람들이 아니다. 알려거든 너희 서장에게 물어보라.”
공비들은 조금 전 서대문경찰서장을 따돌린 것과 같은 방법을 썼다. 함경도 억양이 묻어 나왔다. 공비들은 긴장해서 과장된 행동을 하는 바람에 외투 속에 감추어 둔 총구가 드러나는지도 몰랐다. 박 형사는 살짝 드러난 총구를 순간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는 이들이 경기도 북쪽에서 신고된 공비들이란 걸 직감했다. 곁에 섰던 정 형사가 박 형사의 눈치를 보고 예삿일이 아니란 느낌을 받았다. 두 형사는 서로 거리를 좁혀 이들과 맞섰다. 그러자 공비들은 이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대열이 옆으로 지나가는 동안 두 형사는 崔圭植(최규식) 종로경찰서장에게 ‘불심검문에 응하지 않는 괴한들이 나타났다’고 무전 보고를 한 뒤 저만큼 가고 있는 이들의 앞을 달려가 가로막았다.
“거, 신분증 좀 봅시다.”
“신분증 같은 거 없어.”
“우리나 당신들이나 비슷한 수사기관에 있는데 피차 고생하는 처지에 서로 신분을 밝히는 게 좋지 않습니까.”
“우리 신분을 알려면 계속 따라오면 될 것 아니야.”
자하문을 내려가 효자동에 이르면 육군 방첩대 본부가 위치하고 있어 딱히 이들의 말이 거짓말임을 발견해내기는 어려웠다. 그만큼 지리를 확실하게 익히고 들어온 공비들이었다. 그러나 형사들은 직감을 믿었다.
두 형사는 공비들과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고 자신들은 권총 한 정 없는 상태여서 진땀이 흘렀다. 다시 공비들의 대열이 움직였다. 두 형사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기 위해 대열 맨 뒤에 따라가는 공비에게 말을 걸면서 자하문 고갯길을 함께 내려가기 시작했다.
崔圭植 종로경찰서장, 권총을 꺼내다
1968년 1월 21일 밤 10시 5분경, 청와대가 지척인 자하문 내리막길에서 두 형사는 무장 공비의 대열 맨 뒤에 걸어가던 부대장 격인 金春植(김춘식)과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김춘식은 박 형사에게 “당신 경상도 말씬데, 고향이 어디요?” 하고 물었다. 박 형사가 “대구인데요”라고 대답하자 그는 “우리 친척집도 대구인데…”라며 말을 흐렸다.
박 형사는 이들과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시간을 끌어보려 했으나 기다리던 증원 부대는 오지 않았다. 입 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괴한들은 자하문 고개를 넘어 오는 원효여객 60번 버스를 세웠다.
박태안 씨의 회고.
“무장 공비가 분명한데 그 자리에서 놓칠 수 없었습니다. ‘한 명이라도 못 잡으면 우리는 죽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공비들은 이미 7∼8명이 버스에 올라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극성스럽게 저지하기 시작하자 대장인 듯한 자가 부하들에게 내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두 명이 이들을 다 상대할 수는 없고, 미치겠더라고요. 하지만 그때까지 공비들의 목표가 청와대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버스에서의 시비가 끝나자 대열은 다시 움직였다. 경복고등학교 후문을 지나 청와대로 꺾어지는 커브쯤에서 맨 뒤에 가던 김춘식에게 박 형사가 끈질기게 말을 붙이는 바람에 김춘식은 어느 새 대열과 7∼8m 떨어지게 되었다. 박 형사는 속으로 ‘이놈 한 놈만이라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밤 10시 10분.
박 형사는 길이 꺾어지는 쪽으로 공비들이 빠지면 연락을 받고 달려올 증원 부대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장 공비들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이르자 정 형사와 함께 승강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헤드라이트 불빛이 길 아래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프차는 괴한들의 대열 앞에 멈춰 섰다. 전진하던 대열도 멈칫했다. 헤드라이트가 이들의 몰골을 기괴하게 비추고 있는 동안 차에서 당당한 체구의 사나이가 내렸다. 崔圭植(최규식) 종로경찰서 서장이었다.
“나는 종로경찰서장이오. 소속을 밝혀야지요. 외투 안에는 뭐가 들었소?”
“아무 것도 아니오. 우리는 CIC 사령부가 있는 효자동으로 가는 길이오.”
“여기는 내 담당 구역입니다. 신분을 밝히지 않고는 아무도 못 지나가오.”
2조 조장 김신조는 대열 중간에 서 있다가 지프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추는 가운데 최규식 서장이 권총을 뽑아들고 저지하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남침 후 처음으로 당황했다고 한다. 공비들의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을 때 최규식 서장 뒤로 시내버스 한 대가 올라오다 길을 가로막은 지프차 뒤로 멈춰 섰다. 공비들은 버스를 국군의 지원 병력인 줄로 착각했다.
잠시 후 또 한 대의 버스가 커브를 돌아 나오다 앞 차량이 멈춰 서 있자 급정거를 했다. 공비들은 연이어 두 대의 차량이 도착한 것을 목격하고는 외투 속의 총과 수류탄을 더듬었다.
그 순간 최규식 서장과 시비가 붙었던 공비가 외투 속에서 총을 꺼내 최 서장의 가슴을 향해 연발 사격을 가했다.
“드르륵, 드르륵.”
“국방군 출동이닷!”
1·21 사태의 첫 희생자가 된 당시 36세의 최규식 서장은 가슴에 세 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밤 10시 15분경이었다.
총성이 나기 무섭게 공비들이 일제히 버스를 향해 사격을 가하면서 세 발의 수류탄이 작렬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청운중학교 3학년 金亨基(김형기·17) 군과 회사원 洪裕敬(홍유경·29) 씨가 수류탄 파편을 맞아 그 자리에서 숨지고 버스 차장 金貞子(김정자·18세) 양은 오른팔에 관통상을 입었다. 버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뛰어 내렸다. 어둠 속에서 공비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국군인 줄 알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대열 뒤에서 부대장 김춘식과 말을 걸었던 두 형사가 김춘식을 쓰러뜨렸다. 박 형사는 오른손으로 김춘식의 목을 죄면서 왼손으로는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을 들고 머리를 내려쳤다. 졸지에 돌멩이로 머리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의식을 잃은 김춘식을 박 형사는 손목에 수갑을 채워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멀리서 동료가 경찰에 의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공비들은 도망가면서 두 형사를 향해 총을 쏘았다. 정종수 형사가 쓰러졌고 박태안 형사는 왼쪽 귀 위로 총알이 스쳐 지나갔다(정 형사는 며칠 후 병원에서 숨졌다). 경복고 후문 일대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총성이 퍼지자 청와대 외곽을 경비하던 수경사 30대대(대대장 전두환 중령) 병력들이 즉시 달려오기 시작했다.
김신조 목사의 회고.
“한 명이 쓰러지는 걸 보고는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휘부가 무너졌다고 판단하는 순간 휴전선에서 청와대까지 내려왔다는 자부심이고 뭐고 다 없어졌고 동료들이 순식간에 흩어지는 겁니다. 청와대고 작전이고 없었어요. 불과 5분 정도 교전한 것 같은데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던 겁니다. 일부는 오던 길을 거슬러 세검정 쪽으로 튀었고 일부는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을 탔고, 저는 경복고등학교 뒷담을 넘었지요. 인왕산을 타고 북으로 가려고 말입니다.”
인민군 소위 김신조는 동료들이 많이 택하지 않은 루트를 골랐다. 자하문을 넘어 세검정 쪽으로 도망가려던 공비들은 뒤따라 내려오던 시내버스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그러나 승객들이 미리 대피한 상태여서 피해는 없었다. 이들은 세검정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두 대의 버스에도 수류탄과 기총소사를 해대며 도망쳤다. 밤 10시 30분경이었다.
야간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심장부 부근까지 침투한 것은 성공했지만, 무고한 양민을 학살해가며 유격전을 벌인 것만큼 어리석은 비정규전 사례도 없을 것이다.
밤 10시 40분경 세검정 길과 북악산 일대는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30대대 병력들이 투입되어 총격전으로 이어졌다. 30대대 병력이 현장에 투입될 무렵, 경복궁 옆에 주둔하던 30대대 연병장에서는 대대장 전두환 중령과 작전주임 張世東(장세동) 소령의 지휘하에 81mm박격포 10여 문에서 조명탄이 날아올랐다. 조명탄은 밤새도록 세검정과 북악산 일대를 대낮같이 밝혔다.
“고약한 놈들, 결국 여기까지 쳐들어 왔구먼”
1968년 1월 21일 밤 10시 15분부터 30분 사이 총성이 여러 차례 울린 시각, 박정희 대통령은 감기약을 먹고 잠을 자다 깨어났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제일 먼저 달려왔고, 최우근 수경사 사령관이 그 뒤를 따라 들어와 상황을 보고했다.
비슷한 시각, 김성은 국방부 장관도 총성을 듣고 국방부에 비상전화를 걸었다. 청와대 부근에서 교전 중이란 보고를 받은 김 장관은 즉시 차를 타고 청와대로 달려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점퍼 차림으로 집무실로 내려와 있었다. 김 장관이 보니 박 대통령은 경황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김 장관, 내가 감기에 걸려 약을 먹고 자다가 일어났는데 말이야. 거 참, 이놈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올 줄 누가 생각이라도 했겠소? 고약한 놈들, 뭐 못하는 짓이 없구먼. 그렇게 파괴하더니 결국 여기까지 쳐들어왔구먼.”
“저도 놀랐습니다, 각하. 괴뢰군 놈들이 신이 아닌 이상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여기까지 오겠습니까.”
두 사람은 전쟁을 겪은 군인 출신이어서 그런지 수행하던 경호원들이 보아도 무척 대담했다고 한다. 청와대 밖 하늘은 수경사 30대대에서 쏘아올린 조명탄으로 훤하게 밝아 있었다. 尹必鏞(윤필용) 방첩대장은 김성은 국방부 장관에게 戰果(전과)와 피해 상황을 수시로 보고했다. 자하문에서 최초 총격전이 벌어져 종로경찰서장이 피격당해 순직했으며, 한 명은 생포했고 현재 청와대 외곽으로 몰아내며 추적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최규식 총경이?” 하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최규식 총경은 연세대학교 정치학과 재학 중 6·25를 만나 육군종합학교 31기생으로 임관했다. 5·16 당시 소령으로 복무 중 혁명정부로부터 충청북도 경찰서 정보과장으로 발령받아 경찰에 투신하게 되었고, 능력을 인정받아 부산 시경 정보과장을 거쳐 1966년 8월 용산경찰서 서장으로 승진했다. 1년 뒤인 1967년 10월 27일 종로경찰서장으로 발령받아 근무 중 참변을 당했다.
최규식 총경의 순직을 가슴 아파한 또 한 사람은 2층 부속실에서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 앉아 있던 육영수 여사였다. 이날 밤, 경호실에서 등화관제를 요구해 제2부속실의 홍정자(육영수의 조카) 비서관은 불도 켜지 않은 2층 복도를 오가며 육 여사의 심부름을 했다. 총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육영수는 극도의 침착성을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5·16 혁명하던 날 이모님 인상과 참 비슷했어요. 총성이 나자 어느 새 옷(한복)을 갈아입고 서재 겸 집무실이던 방으로 가셔서 촛불을 켰지요. 경호관들이 오가면서 소식을 전해주었는데 최규식 총경이 순직했다는 말을 들었던 겁니다.”
최규식 총경이 용산경찰서장에서 종로경찰서장으로 1년 만에 부임하게 된 것은 육영수 여사의 칭찬이 주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실했던 최 총경은 부산 시경 정보과장으로 근무하면서 동아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부산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던 중 용산서장으로 발령받아 상경했다.
육영수 여사는 해외 순방이나 큰 행사 때마다 깔끔한 복장에 절도 있는 행동으로 일선 경찰들을 지휘하는 최 총경의 모습을 눈여겨 보았다고 한다. 그 후 관내에 청와대가 포함된 종로경찰서장으로 발령받게 하는 데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미망인 劉貞和(유정화) 씨에 따르면 남편 최 총경은 서울 용산으로 올라와서도 공부를 계속했고, 종로경찰서 서장으로 발령받은 뒤로는 너무 바빠 부산대학교 교수들이 상경해서 논문 지도를 했다고 한다. 1968년 1월 12일 최규식 총경은 부산대학교로부터 논문이 최종 통과되어 석사학위를 받게 되었다는 축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9일 뒤 자하문 언덕에서 무장 공비가 쏜 총탄에 숨을 거두었다. 미망인 유 여사는 그해 2월 26일 부산대학교 총장의 초청으로 남편을 대신해 졸업식장에 참석, 학위를 받았다.
육 여사의 조카 홍정자 비서관의 회고.
“그날 밤 이모님은 눈물을 참 많이 흘렸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최 총경의 죽음이 마치 자기로 인해 벌어진 것은 아닌지 자책하는 듯이 슬퍼했지요. 새벽 2시쯤 되자 ‘전화를 해야겠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라며 수화기에 손을 얹고 몇 번이나 주저하다가 종로경찰서에 전화를 하셨어요. 그리고 유가족들에게 애도를 표한다는 말씀을 꼭 전해달라고 하시면서 울먹이셨지요.”
밤 12시가 가까워지자 청와대로 속속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청와대 쪽에서는 이후락 비서실장, 金詩珍(김시진) 정보비서관 등이, 정부 쪽에서는 정일권 국무총리, 洪鍾哲(홍종철) 공보부 장관, 신직수 검찰총장, 김현옥 서울시장, 李洛善(이낙선) 국세청장 등이 달려왔다. 각료들은 박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던 중 “총성이 난 이상 시민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진상 발표를 신속히 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다음날 아침 6시에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난 박 대통령은 라디오를 켰으나 사건은 여전히 보도되지 않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申範植(신범직) 청와대 대변인을 불러 “왜 방송이 늦어지고 있나”면서 “중계방송 하다시피 소상하게 보도해서 국민의 불안을 덜어주고 간첩 수색에 국민의 협조를 얻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보도관제는 22일 오전 7시를 기해 해제됐다.
공비 爆死
자하문 부근에서 교전이 있기 직전인 1월 21일 오후 10시 10분경, 蔡元植(채원식) 치안국장실 무전기로 긴급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세검정 고갯길에서 이상한 옷차림의 군인 30여 명이 술에 취해 청운동 쪽으로 내려가고 있음.’
채 국장이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교전이 끝난 뒤였고 도로에는 수류탄으로 반파된 버스가 팽개쳐져 있었다. 길바닥엔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의 시체와 아직 숨이 붙은 정종수 형사가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박태안 형사는 생포한 김춘식을 지키고 있었다. 채 국장은 박 형사와 생포 공비를 차에 태워 근처 효자동 파출소로 데려 갔다가 다시 채 국장 차로 치안국으로 이동했다. 시간은 21일 밤 11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뒤로 젖힌 양손에 수갑이 채워진 김춘식은 머리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소매 없는 등산용 조끼를 입고 양 옆구리에도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조끼 앞가슴엔 작은 주머니 같은 것을 만들어 위아래 두 줄로 네 발씩 모두 여덟 개의 수류탄을 넣고 흔들리지 않게 실로 누벼놓았다.
채원식 국장은 김의 허리에 찬 권총을 뽑아내고 양 옆구리의 주머니에서 휴대용 식량과 주머니칼을 찾아냈다. 채 국장은 칼날에 쓰인 글을 보더니 곁에 서 있던 박 형사에게 보여주었다. ‘Made in Japan’이라고 씌어 있었다. 직원들은 채 국장의 무장해제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박 형사도 채 국장을 돕기 위해 김이 입은 조끼 양옆의 매듭을 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채 국장이 소리쳤다.
“엎드려!”
몇 초 후 ‘꽝!’하는 폭음과 함께 김춘식의 복부는 산산조각이 나고 치안국 복도는 피범벅으로 변했다.
박태안 씨의 회고.
“그때 채 국장은 조끼 윗줄의 수류탄 네 발을 모두 제거하고 아래쪽의 수류탄 세 번째 것을 제거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수류탄은 낚싯줄같이 가는 선으로 네 번째 수류탄 안전핀을 물고 있었던 것을 몰랐던 겁니다. 채 국장이 세 번째 수류탄을 제거하는 순간 네 번째 수류탄 안전핀이 뽑혀 올라온 것이죠.”
채 국장은 안전핀이 뽑힌 채 조끼에 달려 있는 수류탄을 보면서 공비를 복도 한쪽으로 힘껏 밀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 때문에 무장해제를 지켜보던 직원들과 박 형사는 파편상도 입지 않았다. 대신 복도와 수사과장실 유리창이 박살나면서 벽면 전체가 피범벅이 됐다. 생포된 간첩이 爆死(폭사)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채 국장은 차를 타고 나와 종로경찰서를 들러 직원들을 격려하고 치안국 감찰계장 金德中(김덕중) 총경을 임시 종로경찰서장으로 임명했다. 자정 무렵 채원식 치안국장은 청와대 정문을 지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정일권 국무총리, 李澔(이호) 내무부 장관 등과 군 장성들이 속속 청와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늘에선 수경사 30대대에서 쏘아 올린 조명탄이 누런 연기를 흘리며 빛을 발하는 가운데 화약 냄새가 청와대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채 국장은 청와대를 지나 세검정 쪽으로 차를 몰게 했다.
경찰과 공비들의 격전이 있은 직후 신문·통신·방송사 기자들도 취재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한 시간여가 지나는 동안 사방으로 튀어 달아난 공비들로부터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자정 무렵 각 언론사는 현장 취재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기자들을 철수시켰다.
곳곳에 군인과 경찰들이 검문을 하는 중에 중앙일보 孫石柱(손석주) 사회부 기자와 張洪根(장홍근) 사진부 기자는 만하장(現 올림피아 호텔) 부근에 신문사 깃발을 단 지프차를 세워 두고 검문소 통과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지프에 무전기가 없어 본사로부터 철수 지시를 받지 못한 채 현장에 남아 있던 중이었다. 군인들은 검문소를 통과하려는 손·홍 두 기자에게 “죽고 싶으냐”며 위협해 시비가 일었다.
채원식 치안국장은 순찰 중 무전을 통해 파주 부근에서 교전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출발을 서두르는 순간에 군인들과 시비가 붙은 두 기자를 발견했다. 채원식 국장은 현장을 기록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들을 불렀다.
“어이! 기자. 이리 와!”
“아, 채 국장님 아니십니까. 중앙일보 사회부 손석주 기잡니다.”
“당신, 나하고 파주에 갈 수 있겠어? 교전 중이라는데도?”
“당연히 가야죠.”
타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두 기자는 차에 오를 준비부터 했다. 이들을 태운 채 국장의 차가 구파발을 지나 경기도 벽제 부근에 도착했을 때 채 국장의 차량 무전기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한 놈 잡았습니다. 홍제동 파출소로 연행 중입니다.”
즉시 서울로 차를 돌렸다. 당시 홍제동 파출소는 30사단(사단장 허준 준장)의 임시 작전 지휘본부가 설치된 곳이었다. 시간은 22일 새벽 3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채 국장과 두 기자가 파출소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30사단 군인들이 민가 부근에서 생포한 공비 한 명을 파출소로 끌고 들어왔다. 여러 사람이 공비의 허리춤과 윗옷을 잡고 있었기에 국방색 군복 상의는 몇 군데 단추가 떨어져 나가고 검은 목면 바지는 앞 단추가 열린 채 무릎까지 흘러내린 상태였다. 사진부 장 기자가 플래시를 터뜨리며 몇 장을 찍은 뒤 밖으로 튀어 나갔다. 군에 의한 보도관제가 심한 때여서 언제 필름을 빼앗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몇 평 안 되는 파출소는 일순간 사람들로 붐볐다. 소속을 알 수 없는 군인, 경찰, 중정 요원들로 복작거렸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상황에서 손 기자가 공비에게 고압적인 자세로 말을 걸었다.
―너, 이름이 뭐야. 나이는?
“김신조다. 스물일곱 살이다.”
―주소와 계급은?
“군관(장교)이고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 청암동 3반에 가족이 살고 있다.”
―남파 목적이 뭐야?
“청와대를 까러 왔다. 21일 밤 8시에 공격을 개시해 5분 만에 끝낸 후 청와대 차를 뺏어 타고 문산 방면으로 도망하기로 했다. 이것이 잘 안되면 비봉 쪽으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지휘자의 잘못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몇 명이 왔어?
“31명이 국군 복장을 하고 왔는데, 1명은 대위, 2명은 중위, 3명은 소위 계급장을 달고 나머지는 사병 복장을 하고 넘어왔다.”
―넘어 온 게 언제야?
“16일 평양에서 출발했다.”
―무기는?
“수류탄, 장총, 권총이다. 1인당 수류탄 열 개와 탄알 300개씩을 가져왔다. 우리는 결사대 훈련을 받았으며 모두 군관(장교)이다.”
―현재 기분은?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젠 겁도 안 난다.”
손 기자는 김신조의 윗옷 윗주머니에서 ‘지식인들이여 언론 출판의 활동을 위해 싸우라’는 내용의 삐라를 발견했다. 잠시 후 김신조는 앰뷸런스에 실려 방첩대로 끌려갔다.
전쟁 준비에 돌입!
김신조가 체포된 곳은 자하문 밖 인왕산 기슭에서였다. 1월 22일 새벽 1시 30분경, 자하문 밖 세검정 부근에서 잠복 근무를 하던 30사단 공병대 소속 車章錫(차장석) 이병은 세검천 위쪽 인왕산 기슭에서 계곡 쪽으로 살금살금 기어 내려오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M1 소총 자물쇠를 푼 차 이병은 검은 그림자를 조준하려 애썼다. 야간 사격은 총열 끝에 붙은 가늠쇠도 잘 보이지 않아 빗나가기 일쑤다. 차 이병의 사격도 빗나갔다. 괴한은 세검천 변 외딴 집 옆에 있는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두 시간 반 전에 경복고등학교 담장을 넘어 도망쳤던 인민군 소위 김신조였다.
“한 놈 나타났다!”
소대장 朴源造(박원조) 소위와 소대원들이 달려와 포위망을 쳤다. 박 소위가 플래시로 바위 쪽을 비춰보니 짚단 더미 사이로 사람 그림자 비슷한 것이 보였다. 誰何(수하)를 위한 암구호를 외쳤다.
“피아노.”
“……”
“피아노”
“……”
대꾸가 없자 병사들이 바위 주변에 위협 사격을 가했다. 순찰 중이던 周喜俊(주희준) 소령이 트럭을 끌고 와 헤드라이트로 괴한이 숨은 바위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괴한은 그때서야 짚더미를 헤치고 어정쩡하게 두 손을 들고 일어났다.
“두 손을 높이 들어! 안 그러면 쏜다!”
괴한은 주먹 쥔 왼손 안에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땅에 떨어뜨렸다. 안전핀이 빠진 채 땅바닥을 구르던 수류탄은 군인들과 괴한을 초긴장 속으로 몰았다. 그런데 몇 초가 지나도 수류탄이 터지지 않았다. 불발탄임을 감지한 한 병사가 뛰어나가 수류탄을 차버리고 괴한을 생포했다. 현장에서 몸수색을 한 결과 괴한의 소지품이 쏟아져 나왔다. 참깨 섞은 엿 두 개, 말린 오징어 한 마리, 아스피린, 소화제, 페니실린, 각성제 등의 약품과 30cm짜리 파이프를 가지고 있었다. 물이나 흙 속에 몸을 은폐할 때 숨을 쉬기 위한 호흡용 파이프였다.
나머지 공비들 중 일부는 세검정 부근 민가 쪽으로 튀었다. 21일 밤 11시경 홍제동 쪽으로 달아나던 공비 한 명은 지붕을 타고 도망가다 지붕이 내려앉아 그 집 부엌으로 떨어졌다. 잠을 자던 李翔來(이상래·당시 65세)씨와 아들 容瑄(용선·당시 31세) 씨 등 가족 5명이 “도둑이야”라고 소리치며 뛰어나가 몽둥이로 괴한에게 달려들었다. 이들이 괴한과 몸싸움을 하던 도중 괴한의 몸에서 수류탄이 떨어져 나와 가족들은 비로소 무장 공비임을 알게 됐다.
李씨 가족 중 한 명이 30여m 떨어진 홍제동 파출소에 신고했으나 경찰이 늑장 출동을 하는 바람에 공비와 격투를 벌이던 아들 용선 씨는 공비가 쏜 권총에 복부를 맞아 숨졌다. 신고를 받고도 즉시 출동하지 않은 홍제동 파출소장은 며칠 뒤 파면됐다.
자하문 경복고등학교 후문 부근에서 첫 교전을 벌이고 학교 담을 뛰어넘은 공비는 김신조뿐 아니라 5명가량이 더 있었다. 이들은 몰려다니며 교장 사택으로 뛰어들어 마당에 수류탄을 던지는 바람에 집안의 유리창이 박살났다. 폭음소리에 놀라 달려 나온 수위 鄭四永(정사영·당시 45세) 씨에게 수류탄을 던져 살해했다.
밤 11시 30분경에는 홍제동 파출소 앞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여자가 유탄에 맞아 숨지는 등 이날 밤 우리 측은 최규식 서장과 민간인 6명 등 모두 7명이 사망했고, 박태안 형사 등 3명의 경찰관과 민간인 한 명이 부상했다.
공비를 쫓던 수경사 30대대는 22일 오전 8시경 북악산에서 3명, 오전 11시쯤 다시 한 명의 공비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22일 오전까지 첫 교전에서 김춘식을 포함한 다섯 명의 공비를 사살하고 한 명(김신조)을 생포했다.
1월 23일 오후 1시쯤 북한산에서 한 명의 공비가 사살된 이후 공비들은 서울 외곽으로 완전히 빠져나갔다. 이 무렵 생포된 김신조를 심문했던 방첩대에서는 ‘124군 부대’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김신조에게 북한 전역에 걸친 부대 위치와 김신조 자신이 훈련받은 부대의 위치 및 건물 요도를 그리게 했다. 김성은 당시 국방장관은 이 그림을 들고 본스틸 유엔군 사령관을 만났다. 첩보기를 띄워 항공 촬영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김 전 장관의 증언.
“오산비행장에서 첩보기 SR-71이 이륙하더니 서해안에서 곧바로 북상하다가 평양 부근에 이르러 우회전하더군요. 그리고 원산까지 통과하는 데 정확히 3분이 걸립디다. 이렇게 해서 얻은 항공사진으로 김신조가 그린 건물과 비교를 해 봤는데 정확했습니다.”
방첩대의 조사와는 별도로 공비 소탕에 나선 군경합동수색대는 1월 30일까지 31명의 공비 중 27명을 사살하고(자폭 포함) 김신조 한 명을 생포했으나, 우리 측도 민간인 7명이 사망했고, 이익수 대령 이하 23명의 장병이 전사했으며 부상자만도 52명이나 되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행방이 묘연해진 공비 세 명 중 한 명은 2월 중순 경기도 양주군에서 시체로 발견됐고, 나머지 두 명은 월북한 것으로 판단해 작전을 종결지었다.
북한의 동계 침투 작전이 청와대 앞에서 좌절된 이틀 뒤인 1월 23일 새벽(미국 시각 1월 22일)에는 한반도를 또 다른 긴장 속으로 몰아넣는 사건이 터졌다. 북한은 원산 앞 공해상에서 전파 감청 활동을 하던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4척의 무장 초계정과 2대의 미그 전투기를 동원해 원산항으로 납치하는 데 성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1·21 사태의 위기 국면을 극복하고 반격을 가하려던 한국의 입장을 잠시 유보시켰다. 공동의 피해자가 생겼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월 23일 미국은 일본에서 월남으로 남진하던 핵 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3척의 구축함을 동해로 회항시켜 원산만에 대기토록 명령했다. 1월 24일 딘 러스크 미 국무장관은 상원외교위원회에서 “일종의 전쟁 행위로 규정지을 수 있다”고 발언했다.
이날 본스틸 유엔군 사령관 겸 주한 미군 사령관은 김성은 국방장관을 만나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우리 미국은 이번엔 가만 안 있겠다. 지금까지 북한이 한국에서 숱한 도발을 해 오고 우리 미군도 피해를 보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참을 수 없다. 이것은 미국의 방침인데, 원산항을 포함한 몇 개의 군사 시설에 폭격을 가할 계획이다.”
김 국방장관은 한편으로는 기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면전이 일어날 가능성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미국은 월남전에 깊이 개입해 있었고 힘겨워했습니다. 과연 미국이 월남전과 한국전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을까를 먼저 따져봐야 했지요.”
이날 오후 김성은 국방장관은 청와대로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같은 사실을 전했다. 귀를 기울이고 듣던 박정희는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아! 기분 좋-다. 이거 한 번 때려 부셔야 한다. 좋-다. 김 장관, 우리도 준비합시다.”
全軍에 비상이 걸렸다. 휴가 군인들은 즉시 부대로 귀대하라는 방송이 나갔고, 영외 거주자들은 영내 대기를 했다. 군 행정 사무실과 여타 근무지에서도 즉시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완전군장을 상시 비치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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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를 죽이려다가 北을 죽게 만든 김일성
1.21 청와대 기습 사건 45주년을 맞아.
趙甲濟
오는 1월21일은 김일성이 보낸 124군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기습한 사건의 45주년이 되는 날이다.
1968년 1월21일 밤,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은 1950년 6월25일의 남침에 이은 김일성의 결정적 敗着이었다. 6.25 남침이 없었더라면 韓美동맹도, 박정희 대통령의 등장도 없었을 것이고, 1960년대엔 월남식으로 공산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21 사건은 경제개발에 집중하던 박정희 대통령을 자극, 전면적인 대응책을 불렀다. 자주국방력 건설, 중화학 공업 건설, 예비군 창설, 새마을 운동이 북한 위협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추진된 정책이고 모두 대성공하였다. 국산무기를 만들기 위하여선 중화학 공업이라는 기반이 있어야 하고, 농민들 사이로 공산주의가 침투하지 못하게 하려면 새마을 운동으로 소득을 높여야 하며, 공비들의 후방 침투는 향토예비군으로 막는다는 전략을 밀고 나간 것이다.
朴 대통령은 "한 손에 망치 들고 다른 손에 총 들고,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운다"는 구호 아래 경제개발 우선 정책으로 소홀히 하였던 군사력 건설에도 매진함으로써 1970년대 중반에 가면 남한의 군사력 지출이 북한을 능가하고, 중동건설 시장 붐을 타고 1인당 국민소득도 북한을 추월한다. 김일성의 모험주의가 잠자던 사자를 깨운 셈이다.
북한은 1960년대에 군사력 건설 제1주의를 밀고 나아간 끝에 경제가 망가졌고, 남한은 1960년대에 키운 경제력을 바탕으로 70년대에 자주국방력 건설에 나섬으로써 北을 압도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시작한 중화학공업이 커져 오늘날 한국인들이 먹고 사는 기반이 되었다. 김일성의 惡行이 결과적으론 善行이 되었다. 이게 역사의 오묘한 섭리이리라.
1980년대에 들어가면 재래식 군사력에서 밀리기 시작한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이게 결국 아들뿐 아니라 손자 정권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역사의 복수는 이런 식으로 이뤄지는 모양이다.
김일성이 박정희를 죽이려 한 청와대 기습 사건은 박정희의 逆轉勝(역전승)으로 끝난 셈이다. 김일성의 파괴적 도발에 박정희는 건설과 생산으로 대응하여 이긴 것이다. 좌익은 늘 자충수로 망한다. 惡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조갑제 닷컴에서 퍼온 글 - Msgr. Byon>[ 2014-01-20, 16:57 ]
<글 퍼온 이의 추가: 그 후,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에 가서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 김일성은 북한의 6.25.남침과 북한군 124 특수부대의 1.21.(속칭, 김신조 부대) 청와대 기습 침투 시도에 대하여, 북한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한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것"이라고 하였다는 글을 필자가 어디선가(이후락씨 회고 인터뷰 기사?),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입력 : 2014.01.21 오후 3:49:19 / 조회수 : 1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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