闢異詩
이승훈 진사의 벽이시 <변기영 번역>
天彛地紀限西東, (천이지기한서동)-천상의 법도와 지상의 윤리 기강은 서양과 동양이 서로 다를 뿐이로다,
暮壑虹橋唵靄中, (모확홍교암애중)-해질녁 하늘 가리는 땅의 어두움 안개는 무지개 사다리가 마셔버리고 있도다.
一炷心香書共火, (일주심향서공화)-오로지 하나뿐인 심지의 마음이 지닌 정성은 책들과 함께 불에 타고 있으니,
遙瞻潮廟祭文公. (요첨조묘제문공)-저 멀리 바다건너 조나라 바라보며 문공 한유의 사당에 제사 올릴 따름일세.
註;
1) 天彛는 천상 국가의 법도를 말함이고, 地紀는 지상 국가의 윤리기강을 뜻하며, 限西東은 흔히 東西라고 말하는 우리 동양의 언어관습과
달리, 西東이라고 하여, 서양을 먼저 거론하면서, 서양과 동양의 한계를 달리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2) 暮壑은 해가 지고나면 하늘을 볼 수 없도록 가리는 땅의 어둠으로 가득한, 하늘과 땅 사이의 어두운 공간(구렁=壑)을 말함이고, 虹橋는 무지개 사다리처럼 아름답고 찬란한 천주교 도리를 말함이며, 唵靄中이란, 맑고 밝게 빛나는 아름다운 무지개 사다리, 즉, 천주교가 해가 진 후 어둠의 안개를 마치 입으로 흡입하여 마셔버리듯(唵靄) 하며, 땅에서 어둠을 뚫고, 하늘에 오르게 하는 포교 중이라는 사실을 말함이며,
3) 一炷는 초의 심지가 하나 뿐이듯, 이승훈 진사의 신앙심은 오로지 하나뿐으로서, 그 신앙심의 정성, 즉, 心香, 곧 마음의 향기는, 이승훈 진사의 천주교 신앙심을 말함이며, 書共火는, 1785년, 을사년에 아버지, 이동욱 공이 집안의 대소가 어른들을 불러 모으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기 집에서는 천주교를 믿지 않음을 공언하기 위하여, 아들 이승훈 진사가 북경에서 귀국할 때 사서 가지고 들어와서 소중히 아끼며, 읽고, 실행하던 천주교 책들을 한데 모아놓고 불을 질러, 모두 불타 버리는 광경을 표현한 것이다. 얼마나 어이없는 가문의 폭력에 이승훈 진사의 심정이 오죽하였으랴?
4) 遙瞻이라는 표현은 그냥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노발대발하시며, 천주교 책들을 모두 뺏어다가 한데 모아놓고는 불을 지르는 일을 강행하시는 일을 당하여, 아들 이승훈 진사는 왔다갔다하며 노닐면서 수수방관할 수 밖에 없음을 표현한 것이고, 潮廟 는, 지금도 현존하는 중국의 옛 남송, 즉 潮 나라 사당(廟)을, 인천 만수동 자택에서 멀리 서해 바다건너로 바라보면서, 이른 바, 현대 중국 문학의 시조라고 부르는 文公 한유를 추모하는 그의 사당 앞에서 제사를 올릴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文公 한유는 儷文을 창안하여 처음으로 썼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이승훈 진사와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가 儷文을 즐겨하하며 이에 해박하여, 이승훈 진사와 정약용 승지의 시문에는 儷文 체로 쓴 문장들이 많이 눈에 띤다. 그래서 만천유고발문에서 정약용 승지는 만천공의 행적에는 儷文으로 쓴 글들도 많이 있었으나, 모두 불에 타서 소실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뜻밖의 가문과 사회의 박해를 당한 이승훈 진사는 세례받고 온 북경의 천주당과 서양 주교님을 회상하고 그리워하며, 지은 시문으로, 어디에도 천주교 신앙을 배반한다는 의미는 전혀 없고, 다만, 신앙의 대화가 통하지 않는 아주 캄캄한 어둠 속 같은 가문의 어른들 앞에서, 정신을 잃고 격분한 상태로, 특히, 그 귀한 천주교 성서들을 불사르는 아버지 앞에서, "그래도 저는 천주교 신앙을 지키겠읍니다"하고, 정면 충돌하며, 부자가 고성으로 싸우는 집안이 아니라, 당시 장관 급의 학식과 품위가 넘치는 가정에서 일어난 일에 당사자인 아들 이승훈 진사는 불효한 아들이 아니라, 儷文에도 유식한 시문학의 젊은 대학자 아들로서, 당시의 심정을 아주 고차원의 시문으로, 지극히 고상한 시문으로 표현한 것이다.
Msgr. Byon 입력 : 2012.08.03 오전 11:20:36 / 조회 2442 / 천진암 성지 홈
天學은 孔孟之學과 다르다는 大學者 權日身 聖賢의 正論 理解
1791년 신해년 연말에 고문과 문초에 시달리던 대학자 권일신 성현은 마지막 결론으로, “天主敎는 孔孟의 儒敎와 다르다”는 정답을 하였으나, 박해자들 편에 서 있던 당시의 문초하던 수사관들은 천주교에 관한 잘못된 선입관으로, 妖誕不正이라는 말과, "늘어(於)"라는 어조사를 한 글자 더 넣어야 쓰겠다고 강요하여, 달포간이 넘도록 심한 고문에 시달려서 지칠대로 지친 권일신 대학자는, 자네들 마음대로, 하고싶은대 로 하라고 하여, ‘於’라는 글자를 한 글자 더 붙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漢文의 文章을 좀 읽은 識者들이라면, 무식한 수사관들의 肉頭文字 같은 첨가어임을 즉시 깨닫게 된다.
즉, 우선, 天學은 孔孟之學과 다르다는 말의 수식어로 妖誕不正, 즉 요망하고 바르지 못한 것이라는 말은 문법상으로나, 문리상으로나 맞지 않는, 억지 첨가 단어임이 분명하다. [天學은 異 孔孟之學], 즉, 천주교는 유교와 다르다는 말 다음에는, 예컨대, 그러므로, “이해하기 어렵다”든가, 또는, “오해하기 쉽다”든가, 혹은, “더 잘 깊히 연구하며 비교해보아야만 한다”든가, 하는 표현의 단어라야지, “요망하고 못된 道”라고 하려면, 아예, 처음부터, 天學大抵妖誕不正이라고 해야만 識者의 漢文 文章이 자연스레 합리적으로 또 文理的으로 성립되기 때문이다. 결국 日省錄에 나오는 이 문장은 其學大抵異於孔孟之學으로 끝난 문장이었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이 겪는 최초의 박해 중에, 처음 부딫히는 천주교 신앙인 학자들과 유교 사상을 어설프게 배운 박해자들 간의 충돌에 있어서, 서양의 천주교는 동양의 유교와 다를 뿐이지, 나쁘고 틀린 종교가 아니다라는 점을, 우리 선조들은 목이 터져라고 외치셨음을 알 수 있다.
1791년 신해년 음력 11월 중의日省錄에 나오는 이러한 사실 기록은 이미 그보다 7년 전, 즉 1785년 을사년 봄 평창이씨 집안의 문중박해가 심할 때, 이승훈 진사의 詩文에서도 잘 들어난다. 이를 종종 闢異詩라고 하여, 천주교를 배척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으나, 자세히 읽어보면, 어디에도 이승훈 진사의 詩는 첫 줄부터가, 서양의 천주교는 동양의 유교 관습과 다르다는 점을 밝히며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天彛地紀限西東). 그렇기 때문에 따라서 이어지는 문맥에는 천주교를 포기한다는 뜻이 없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풀이하기 위해서는 문학적인 文理 離脫의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한다.(暮壑虹橋唵靄中 一炷心香書共火 遙瞻潮廟祭文公).
1785년 乙巳 迫害 때, 李承薰 進士의 天彛地紀限西東과, 1791년 辛亥 迫害 때의 權日身 大學者의 其學大抵異於孔孟之學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만 하는 문장이다. 文度公 若望 丁若鏞 承旨의 탄생 250주년(1762~2012) 기념일(8월5일)에 제막 축성되는 紀念詩碑 원고 초안을 다듬으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후학들의 오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필자 졸역의 闢異詩를 다시 한번 더 첨부하고자 한다. <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