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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 교황님 말씀 중에

Holy Father's Speech

한국 주교들을 만나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첫 강론 말씀 주제, [기억 지킴이, Memory Guard].

글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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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에 관한 현대 로마 교황님들의 공식 문헌 .1) Gregorius XVI 교황의 조선대목구 설정문과 동시에 새로 임명된 초대 교구장 Brugiere, M.E.P. 소주교에게 보낸 교황의 공식서한.

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에 관한 현대 로마 교황님들의 공식 문헌

-1-<조선교구(교황청 관리 대목구) 설정문과 동시에 초대교구장 소주교(Brugiere, M.E.P)에게 발송된 교황의 공식 서한문>.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조선교구설정문과 동시에 새로 임명된 초대 조선교구장 소주교(Brughiere)에게 보내신 서간문. 이 서간문에서 교황은 성직자없이 평신도들이 간청하는 애절한 처지를 밝히시면서, 그동안 교회는 조선교우들이 순교하는 동안 제대로 돌보지 못함을 직무유기로 언급할 정도였으며, 전 세계 모든 교구설정은 기존 교구장의 추천이나 동의가 전제되는데, 조선교구 설정은 평신도들의 간청에 의한 것임을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경우다.

No. 381 9월 9일은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조선교구설정, 전국 교회 경축일입니다. 몬시뇰 2015-09-09. 조회 1423

9월 9일, 오늘은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조선교구설정 교서가 발표된, 전국 교구의 경축일입니다!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께서는, 교서, "Ex debito pastoralis officii superna Dei,,,"를 발표하여,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갈망하던 사제들이 조선에 입국하여 신자들을 돌보는 조선교구(DIAECESIS COREAE)가 설정되었습니다.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조선교구 설정 교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조선교구설정문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조선교구설정문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조선교구설정문과 동시에 새로 임명된 초대 조선교구장 소주교(Brughiere)에게 보내신 서간문. 이 서간문에서 교황은 성직자없이 평신도들이 간청하는 애절한 처지를 밝히시면서, 그동안 교회는 조선교우들이 순교하는 동안 제대로 돌보지 못함을 직무유기로 언급할 정도였으며, 전 세계 모든 교구설정은 기존 교구장의 추천이나 동의가 전제되는데, 조선교구 설정은 평신도들의 간청에 의한 것임을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경우다.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께서는, 교서, "Ex debito pastoralis officii superna Dei,,,"를 발표하여,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갈망하던 사제들이 조선에 입국하여 신자들을 돌보는 조선교구(DIAECESIS COREAE)가 설정되었습니다.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조선교구 설정 교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께서 조선교구 설정 교서 발표와 동시에,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 발도로메오 부르기에르(Bartholomaeo Brugueire) 蘇 주교에게 보내신 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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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주교들을 만나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첫 강론 말씀 주제, [기억 지킴이, Memory Guard]. 

서울,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강당에서.  2014년 8월 14일, 목요일

 

강우일 베드로 주교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으로 해 주신 형제적인 환영 말씀에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 교회의 활기찬 삶을 직접 보게 된 것은 저에게 커다란 복입니다. 목자로서 여러분은 주님의 양 떼를 지키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이루시는 놀라운 일들을 지키는 분들입니다. 지키는 것은 특별히 주교에게 맡겨진 임무의 하나로, 곧 하느님의 백성을 돌보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형제 주교 여러분과 함께 이 나라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지키는 임무의 두 가지 중심 측면을 성찰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 그리고 희망의 지킴이가 되는 것입니다.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들의 시복은 순교자들이 뿌린 씨앗으로 이 땅에서 은총의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기회입니다. 여러분은 순교자들의 후손이고, 그리스도 신앙을 영웅적으로 증언한 그 증거의 상속자들입니다. 또한 평신도들에게서 시작되어 여러 세대에 걸친 그들의 충실성과 끊임없는 노고로 크게 자라난, 매우 비범한 전통의 상속자들입니다. 그들은 성직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평신도였고, 그들 스스로 개척해 나갔습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가 하느님의 말씀과 직접 만나 시작되었다는 것은 뜻이 깊습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에는 아름다움과 진실성이 있어서, 복음과 복음의 요구, 곧 회개, 내적 쇄신, 사랑의 삶에 대한 요구가 이벽과 첫 세대의 양반 원로들을  감동시켰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바로 그 메시지에, 그 순수함에, 거울을 보듯이 자신을 비추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한국 땅에 뿌려진 복음의 비옥함과 여러분의 신앙 선조들이 물려준 위대한 유산은, 오늘날 활기찬 본당 사목구와 교회 단체들의 번창에서, 탄탄한 교리교육 과정에서, 젊은이들과 가톨릭 학교, 신학교와 대학교에 대한 사목적 관심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국가의 정신적 문화적 생활에 대한 역할과 선교에 관한 힘찬 열정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선교지였던 한국은 이제 선교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보편 교회는 여러분이 세계에 파견한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은 과거의 은총을 기억하고 고이 간직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 기억으로부터 영적인 자산을 꺼내어, 앞을 내다보는 지혜와 결단으로 미래의 희망과 약속과 도전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잘 아시듯이, 한국 교회의 삶과 사명은 궁극적으로 외적, 양적, 제도적인 잣대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분명한 복음의 빛과 그 부르심에 비추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라는 회개의 촉구에 따라 판단하여야 합니다.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이란, 성장시켜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1코린 3,6 참조) 깨닫고, 동시에 성장은 과거처럼 현재에도 고난을 이겨내며 끊임없이 일하는 그러한 노고의 열매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순교자들과 지난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기억은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이상화되거나 “승리에 도취”된 기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지 않고 과거만 바라본다면, 우리가 앞으로 길을 나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적 진전을 가로막거나 실제로 멈추게 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여러분은 또한 희망의 지킴이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복음이 가져다주는 희망, 순교자들을 감격시킨 그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세상에 선포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물질적인 번영 속에서도 어떤 다른 것, 어떤 더 큰 것, 어떤 진정하고 충만한 것을 찾고 있는 세상에 이 희망을 선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형제 사제들은 여러분의 성화 직무를 통하여 이 희망을 제시하십시오. 이 성화 직무는 신자들을 전례와 성사 안에 있는 은총의 샘으로 이끌어 줄 뿐만 아니라,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라는(필리 3,14 참조)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행동하도록 끊임없이 재촉합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친교 안에서 성덕의 불꽃, 형제적 사랑의 불꽃, 선교 열정의 불꽃이 타오르게 함으로써 이 희망을 지킵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여러분이 언제나 여러분의 사제들 곁에 머무르도록 부탁합니다. 날마다 일하고 성덕을 추구하며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그들 곁에서 용기를 북돋아 주십시오. 하느님의 백성을 섬기는 그들의 아낌없는 봉사에 감사를 드린다고, 저의 사랑에 넘치는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사제들 곁에 머무르십시오. 당부합니다. 사제들 곁에 가까이 머무르십시오. 사제들이 주교를 자주 만날 수 있게 하십시오. 형제로서 또한 아버지로서 주교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 사제들은 사목 생활의 많은 순간에 그것을 필요로 합니다. 주교가 사제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사제들을 멀리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가슴 아픕니다. 저의 고향에서 몇몇 사제들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주교님께 전화해서 면담 신청을 했고, 석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답이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형제 주교님, 만일 오늘 한 사제가 주교님께 면담 신청을 하는 전화를 했다면, 오늘이나 내일 곧장 그 사제에게 전화하십시오. 만약 만나 줄 시간이 없다면, 이렇게 말하십시오. “지금은 이러이러한 일 때문에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저를 마음껏 이용하십시오.” 그렇지만 아버지의 대답을 즉시 들려주십시오. 제발, 여러분의 사제들에게서 멀어지지 마십시오.

 

선교하는 교회, 세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 교회, 특히 이 시대 사회의 변두리로 나아가는 교회가 되라는 도전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를 받아들이고 그 지체 하나 하나와 동화되는 데에 “영적인 맛”을 들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268항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공동체는 어린이들과 노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노인들의 기억과 지혜와 경험, 그리고 젊은이들의 열망을 외면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희망의 지킴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를 위하여 젊은이들의 교육을 특별히 배려하여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대학교도 중요하지만 대학교만이 아니라 초등학교를 비롯하여 모든 단계의 가톨릭 학교가 지닌 근본 사명의 수행을 뒷받침해 주십시오. 거기에서 젊은이들의 정신과 마음이 하느님과 그분의 교회에 대한 사랑 안에서 자라나고, 또 좋은 것, 참된 것, 아름다운 것 안에서 자라나서, 그들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정직한 시민이 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희망의 지킴이가 된다는 것은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으며, 특히 난민들과 이민들, 사회의 변두리에서 사는 사람들과 연대를 실행하여, 한국 교회의 예언자적 증거가 끊임없이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심은 구체적인 자선 활동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 그것도 필요한 것이지만 ― 사회, 직업, 교육 수준의 개선을 위한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사업적인 차원으로만 축소시키고, 모든 사람이 반드시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 한 인간으로 성장할 권리 - 자신의 인격과 창의력과 문화를 존엄하게 표현하여야 할 필요성을 잊어버리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는 복음의 중심에 있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 요소로 여겨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는 교회의 풍요한 유산인 사회 교리를 바탕으로 한 강론과 교리 교육을 통하여 신자들의 정신과 마음에 스며들어야 하며, 교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 반영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사도 시대의 이상은 여러분 나라의 첫 신앙 공동체에서 그 생생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상이 미래를 향해 순례하는 한국 교회가 걸어갈 길에 계속 귀감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얼굴이 그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의 얼굴일 때에, 당신 신비체의 친교 안에서 언제나 거룩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예수님의 마음에 늘 더 많은 젊은이들이 이끌려 올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중심에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또한 복음의 시작과 끝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셨다고) 나자렛 회당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마지막 날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우리 모두가 심판 받을 때 적용될 “규범”을 알려주십니다. 거기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번영의 시기에 오는 위험, 유혹이 있습니다. 위험이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한갓 “사교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곧 신비적 측면을 잃고 하느님의 신비를 거행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그러한 공동체는 영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인 가치를 지닌 조직이지만, 예언자적인 누룩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난한 이들이 교회에서 할 일은 없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역사 안에서 개별 교회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이 수없이 겪어 온 유혹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중산층의 공동체가 되어, 가난한 이들이 교회 안에서 수치심을 느끼고 그 안에 들어가기를 부끄러워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또한 정신적 웰빙, 사목적 웰빙에 대한 유혹입니다. 곧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 또는 잘사는 자들을 위한 중산층의 교회가 되려는 유혹입니다. 이는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맨 처음부터 시작되었던 일입니다.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을 꾸짖어야만 하였고(1코린 11,17), 야고보 사도는 더욱 강하고 더욱 분명하게 그들 부유한 공동체들,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들을 꾸짖어야만 하였습니다(야고 2,1-7).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쫓아내지는 않지만, 가난한 이들이 감히 교회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게, 또 제 집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도 없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번영에 대한 유혹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일을 잘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을 꾸짖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믿음 안에서 제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야 할 형제로서 여러분에게 말씀 드립니다.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의 교회는 번영하는 교회이고, 선교하는 훌륭한 교회이고, 커다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가라지를 심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바로 교회의 예언자적 구조에서 가난한 이들을 제거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마십시오.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 하나의 웰빙 교회 …… 그런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번영의 신학”에 이르렀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안 됩니다. 그저 그런 쓸모없는 교회가 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예언자적인 복음의 증거는 한국 교회에 특별한 도전들을 제기합니다. 한국 교회가, 번영하였으나 또한 매우 세속화되고 물질주의적인 사회의 한가운데에서 살고 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목자들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준보다도 기업 사회에서 비롯된 능률적인 운영, 기획, 조직의 모델들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성공과 권력이라는 세속적 기준을 따르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까지도 받아들이려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이 세상의 지혜를 판단할 수 있는 힘을 잃어 헛되게 된다면, 우리는 불행할 것입니다! (1코린 1,17 참조) 여러분과 여러분의 형제 사제들에게 권고합니다. 그러한 온갖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성령을 질식시키고, 회개를 무사안일로 대체하고, 마침내 모든 선교 열정을 소멸시켜 버리는 그러한 정신적 사목적 세속성에서 하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빕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93-97항 참조).

 

사랑하는 형제 주교 여러분,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감사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기억과 희망의 지킴이가 되는 여러분의 사명에 관한 이러한 묵상으로, 저는 한국 신자들의 일치와 성덕과 열정을 증진하려고 노력하시는 여러분에게 용기를 북돋아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기억과 희망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미래를 향해 이끌어 갑니다. 제 기도 안에서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겠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은총의 힘에 의지하십시오. “주님은 성실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성실하지 않더라도, 주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고 여러분을 악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2테살 3,3). 순교자들이 씨앗을 뿌리고 가톨릭 신자들이 대대로 물을 주어, 이 나라와 세상의 미래를 위한 약속으로서 여러분에게 전해진 신앙이,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기도로 이 땅에서 활짝 피어나기를 빕니다. 여러분에게, 그리고 여러분의 사목과 보호에 맡겨진 모든 이들에게 마음을 다하여 저의 강복을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부탁 드립니다. 부디,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INCONTRO CON I VESCOVI DELLA COREA 

DISCORSO DEL SANTO PADRE FRANCESCO 

Conferenza Episcopale Coreana (Seoul), Giovedì, 14 agosto 2014

 

Ringrazio il Vescovo Peter U-il Kang per le sue fraterne parole di benvenuto a nome vostro. È una benedizione per me essere qui e conoscere di persona la vita dinamica della Chiesa in Corea. A voi, come Pastori, spetta il compito di custodire il gregge del Signore. Siete i custodi delle meraviglie che Egli compie nel suo popolo. Custodire è uno dei compiti specificamente affidati al Vescovo: prendersi cura del popolo di Dio. Oggi vorrei riflettere con voi come fratello nell’episcopato su due aspetti centrali di tale custodia del popolo di Dio in questo Paese: essere custodi della memoria e essere custodi della speranza. 

[T] 

Essere custodi della memoria. La beatificazione di Paul Yun Ji-chung e dei suoi compagni è un’occasione per ringraziare il Signore che, dai semi sparsi dai martiri, ha fatto scaturire un abbondante raccolto di grazia in questa terra. Voi siete i discendenti dei martiri, eredi della loro eroica testimonianza di fede in Cristo. Siete inoltre eredi di una straordinaria tradizione che iniziò e crebbe largamente grazie alla fedeltà, alla perseveranza e al lavoro di generazioni di laici. Questi non avevano la tentazione del clericalismo: erano laici, andavano avanti da soli! È significativo che la storia della Chiesa in Corea abbia avuto inizio da un incontro diretto con la Parola di Dio. È stata la bellezza intrinseca e l’integrità del messaggio cristiano – il Vangelo e il suo appello alla conversione, al rinnovamento interiore e a una vita di carità – ad impressionare Yi Byeok e i nobili anziani della prima generazione ; ed è a quel messaggio, alla sua purezza, che la Chiesa in Corea guarda come in uno specchio, per scoprire autenticamente sé stessa.

 

La fecondità del Vangelo in terra coreana e la grande eredità tramandata dai vostri antenati nella fede, oggi si possono riconoscere nel fiorire di parrocchie attive e di movimenti ecclesiali, in solidi programmi di catechesi, nell’attenzione pastorale verso i giovani e nelle scuole cattoliche, nei seminari e nelle università. La Chiesa in Corea è stimata per il suo ruolo nella vita spirituale e culturale della nazione e per il suo forte impulso missionario. Da terra di missione, la Corea è diventata oggi una terra di missionari; e la Chiesa universale continua a trarre beneficio dai tanti sacerdoti e religiosi che avete inviato nel mondo. 

[T] 

Essere custodi della memoria significa qualcosa di più che ricordare e fare tesoro delle grazie del passato. Significa anche trarne le risorse spirituali per affrontare con lungimiranza e determinazione le speranze, le promesse e le sfide del futuro. Come voi stessi avete notato, la vita e la missione della Chiesa in Corea non si misurano in definitiva in termini esteriori, quantitativi e istituzionali; piuttosto esse devono essere giudicate nella chiara luce del Vangelo e della sua chiamata ad una conversione alla persona di Gesù Cristo. Essere custodi della memoria significa rendersi conto che la crescita viene da Dio (cfr 1 Cor 3,6) e al tempo stesso è il frutto di un paziente e perseverante lavoro, nel passato come nel presente. La nostra memoria dei martiri e delle generazioni passate di cristiani deve essere realistica, non idealizzata o e non “trionfalistica”. Guardare al passato senza ascoltare la chiamata di Dio alla conversione nel presente non ci aiuterà a proseguire il cammino; al contrario frenerà o addirittura arresterà il nostro progresso spirituale. 

[T] 

Oltre ad essere custodi della memoria, cari fratelli, voi siete anche chiamati ad essere custodi della speranza: quella speranza offerta dal Vangelo della grazia e della misericordia di Dio in Gesù Cristo, quella speranza che ha ispirato i martiri. È questa speranza che siamo invitati a proclamare ad un mondo che, malgrado la sua prosperità materiale, cerca qualcosa di più, qualcosa di più grande, qualcosa di autentico e che dà pienezza. Voi e i vostri fratelli sacerdoti offrite questa speranza con il vostro ministero di santificazione, che non solo conduce i fedeli alle sorgenti della grazia nella liturgia e nei sacramenti, ma costantemente li spinge ad agire in risposta alla chiamata di Dio a tendere alla meta (cfr Fil 3,14). Voi custodite questa speranza mantenendo viva la fiamma della santità, della carità fraterna e dello zelo missionario nella comunione ecclesiale. Per questa ragione vi chiedo di rimanere sempre vicini ai vostri sacerdoti, incoraggiandoli nel loro lavoro quotidiano, nella loro ricerca di santità e nella proclamazione del Vangelo di salvezza. Vi chiedo di trasmettere loro il mio affettuoso saluto e la mia gratitudine per il generoso servizio in favore del popolo di Dio. Vicini ai vostri sacerdoti, mi raccomando, vicinanza, vicinanza ai sacerdoti. Che loro possano incontrare il vescovo. Questa vicinanza fraterna del vescovo, e anche paterna: ne hanno bisogno in tanti momenti della loro vita pastorale. Non vescovi lontani o, peggio, che si allontanano dai loro preti. Con dolore lo dico. Nella mia terra, tante volte ho sentito qualche sacerdote che mi diceva: “Ho chiamato il vescovo, ho chiesto udienza; sono passati tre mesi, ancora non ho risposta”. Ma senti, fratello, se un sacerdote oggi ti chiama per chiederti udienza, richiamalo subito, oggi o domani. Se tu non hai tempo per riceverlo, diglielo: “Non posso perché ho questo, questo, questo. Ma io volevo sentirti e sono a tua disposizione”. Ma che sentano la risposta del padre, subito. Per favore, non allontanatevi dai vostri sacerdoti. 

[T] 

Se noi accettiamo la sfida di essere una Chiesa missionaria, una Chiesa costantemente in uscita verso il mondo e in particolare verso le periferie della società contemporanea, avremo bisogno di sviluppare quel “gusto spirituale” che ci rende capaci di accogliere e di identificarci con ogni membro del Corpo di Cristo (cfr Esort. ap. Evangelii gaudium, 268). In questo senso una particolare sollecitudine chiede di essere mostrata nelle nostre comunità nei confronti dei bambini e dei più anziani. Come possiamo essere custodi di speranza se trascuriamo la memoria, la saggezza e l’esperienza degli anziani e le aspirazioni dei giovani? A questo proposito vorrei chiedervi di prendervi cura in modo speciale dell’educazione dei giovani, sostenendo nella loro indispensabile missione non solo le università, che sono importanti, ma anche le scuole cattoliche di ogni grado, a partire da quelle elementari, dove le giovani menti e i cuori vengono formati all’amore di Dio e della sua Chiesa, al bene, al vero e al bello, ad essere buoni cristiani e onesti cittadini. 

[T] 

Essere custodi di speranza implica anche garantire che la testimonianza profetica della Chiesa in Corea continui ad esprimersi nella sua sollecitudine per i poveri e nei suoi programmi di solidarietà, soprattutto per i rifugiati e i migranti e per coloro che vivono ai margini della società. Questa sollecitudine dovrebbe manifestarsi non solo attraverso concrete iniziative di carità – che sono necessarie – ma anche nel costante lavoro di promozione a livello sociale, occupazionale ed educativo. Possiamo correre il rischio di ridurre il nostro impegno con i bisognosi alla sola dimensione assistenziale, dimenticando la necessità di ognuno di crescere come persona – il diritto che ha di crescere come persona – e di poter esprimere con dignità la propria personalità, creatività e cultura. La solidarietà con i poveri è al centro del Vangelo; va considerata come un elemento essenziale della vita cristiana; mediante la predicazione e la catechesi, fondate sul ricco patrimonio della dottrina sociale della Chiesa, essa deve permeare i cuori e le menti dei fedeli e riflettersi in ogni aspetto della vita ecclesiale. L’ideale apostolico di una Chiesa dei poveri e per i poveri, una Chiesa povera per i poveri, ha trovato espressione eloquente nelle prime comunità cristiane della vostra nazione. Auspico che questo ideale continui a modellare il cammino della Chiesa in Corea nel suo pellegrinaggio verso il futuro. Sono convinto che se il volto della Chiesa è in primo luogo il volto dell’amore, sempre più giovani saranno attratti verso il cuore di Gesù sempre infiammato di amore divino nella comunione del suo mistico Corpo.

 

Ho detto che i poveri sono al centro del Vangelo; sono anche all’inizio e alla fine. Gesù, nella sinagoga di Nazareth, parla chiaro, all’inizio della sua vita apostolica. E quando parla dell’ultimo giorno e ci fa conoscere quel “protocollo” sul quale tutti noi saremo giudicati – Matteo 25 –, anche lì ci sono i poveri. C’è un pericolo, c’è una tentazione che viene nei momenti di prosperità: è il pericolo che la comunità cristiana si “socializzi”, cioè che perda quella dimensione mistica, che perda la capacità di celebrare il Mistero e si trasformi in una organizzazione spirituale, cristiana, con valori cristiani, ma senza lievito profetico. Lì si è persa la funzione che hanno i poveri nella Chiesa. Questa è una tentazione della quale le Chiese particolari, le comunità cristiane hanno sofferto tanto, nella storia. E questo fino al punto di trasformarsi in una comunità di classe media, nella quale i poveri arrivano a provare anche vergogna: hanno vergogna di entrare. E’ la tentazione del benessere spirituale, del benessere pastorale. Non è una Chiesa povera per i poveri, ma una Chiesa ricca per i ricchi, o una Chiesa di classe media per i benestanti. E questo non è cosa nuova: questo cominciò all’inizio. Paolo deve rimproverare i Corinzi, nella Prima Lettera, capitolo XI, versetto 17; e l’apostolo Giacomo più forte ancora, e più esplicito, nel suo capitolo II, versetti da 1 a 7: deve rimproverare queste comunità benestanti, queste Chiese benestanti per i benestanti. Non si cacciano via i poveri ma si vive in modo tale che loro non osino entrare, non si sentano a casa loro. Questa è una tentazione della prosperità. Io non vi rimprovero, perché so che voi lavorate bene. Ma come fratello che deve confermare nella fede i suoi fratelli, vi dico: state attenti, perché la vostra è una Chiesa in prosperità, è una grande Chiesa missionaria, è una grande Chiesa. Il diavolo non semini questa zizzania, questa tentazione di togliere i poveri dalla struttura profetica stessa della Chiesa, e vi faccia diventare una Chiesa benestante per i benestanti, una Chiesa del benessere… non dico fino ad arrivare alla ‘teologia della prosperità’, no, ma nella mediocrità.

[T] 

Cari fratelli, una profetica testimonianza evangelica presenta alcune sfide particolari per la Chiesa in Corea, dal momento che essa vive ed opera nel mezzo di una società prospera ma sempre più secolarizzata e materialistica. In tali circostanze gli operatori pastorali sono tentati di adottare non solo efficaci modelli di gestione, programmazione e organizzazione tratti dal mondo degli affari, ma anche uno stile di vita e una mentalità guidati più da criteri mondani di successo e persino di potere che dai criteri enunciati da Gesù nel Vangelo. Guai a noi se la Croce viene svuotata del suo potere di giudicare la saggezza di questo mondo! (cfr 1 Cor 1,17). Esorto voi e i vostri fratelli sacerdoti a respingere questa tentazione in tutte le sue forme. Voglia il Cielo che possiamo salvarci da quella mondanità spirituale e pastorale che soffoca lo Spirito, sostituisce la conversione con la compiacenza e finisce per dissipare ogni fervore missionario! (cfr Esort. ap. Evangelii gaudium, 9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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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i fratelli Vescovi, grazie di tutto quello che voi fate: grazie. E con queste riflessioni sulla vostra missione come custodi della memoria e della speranza, ho voluto incoraggiarvi nei vostri sforzi per incrementare l’unità, la santità e lo zelo dei fedeli in Corea. La memoria e la speranza ci ispirano e ci guidano verso il futuro. Vi ricordo tutti nelle mie preghiere e vi esorto sempre a confidare nella forza della grazia di Dio. Non dimenticatevi: “Il Signore è fedele”. Noi non siamo fedeli, ma Lui è fedele. “Egli vi confermerà e vi custodirà dal Maligno” (2 Ts 3,3). Possano le preghiere di Maria, Madre della Chiesa, portare a piena fioritura in questa terra i semi sparsi dai martiri, irrorati da generazioni di fedeli cattolici e trasmessi a voi come promessa per il futuro del Paese e del mondo. A voi e a tutti coloro che si sono affidati alla vostra cura pastorale e alla vostra custodia, imparto di cuore la mia Benedizione, e vi chiedo, per favore, di pregare per me. Grazie.

입력 : 2018.08.01 오전 10: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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