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토마스 金範禹 通譯官 기념일 - 9월 14일
9월 14일은, 명동대성당 터 집주인 순교자 토마스 金範禹 通譯官이, 1785년 을사년 늦봄, 한국 최초의 천주교 박해로 형조판서 김화진의 형리들에게 체포되어 형조에서 많은 매를 맞고, 유배지 경남 밀양군 丹場面 丹場里, 法歸里, 河洞 (현 삼랑진 지역) 지역으로 귀양 가서 약 2년간 매맞은 상처가 썩는 고통을 당하다가 정미년, 즉 1787년 음력 7월 23일(양력 9월 14일)에 한 목숨을 바쳐 순교하신 날이다. 천주교 신앙 때문에 고문을 당하고, 유배형을 받아 유배생활을 하다가 유배지에서 목숨을 바친, 한국에서는, 문중박해로 집안에서 순교하신 이벽 성조 다음으로 두번째 순교자가 되셨다.
1779년을 전후하여 정식으로 출발한 천진암 강학회는 젊은 청소년 선비들을 중심으로 하여 큰 단체로까지 발전하였으며, 마침내 북경천주교회로 몇차례 연락을 취하려고 동료들을 보내기 시작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여 결실이 없었다.
1783년 늦가을에 24세로 成均進士(오늘날의 博士 학위에 해당)에 오른 이승훈 성현이 한국천주교회 신도들의 대표 겸, 이벽 성조의 대리자로 북경 천주교회에 파견되어, 1784년 봄 27세의 이승훈 성현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귀국한 후, 광암 이벽성조께서는 1784년 음력 4월 중순, 집회장소를 천진암에서 서울 수표동 자신의 한양 자택으로 옮겨 전도활동을 하였으나, 광암 이벽성조의 자택이 경주이씨 양반의 집이라서 주로 양반들만이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몇달 후, 1785년 이른 봄부터는 오늘의 명동대성당 터 아래 있던 中人 계급의 김범우 通譯官 집으로 집회소를 옮겼다. 그러자 兩班 常民, 男女 老少가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어, 많은 新入敎友들이 모여들고 쉽게 왕래하여, 500여명의 입교자와 신입 영세자를 내었다.
당시 刑曹判書 김화진은 포졸들을 보내어, 명례방의 천주교 집회를 해산시키고, 권철신, 권일신, 이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 양반집 자제들은 강제로 귀가조치하였으나, 중인 계급의 집주인 김범우 통역관은 체포하여 형조에 구속, 감금하고, 모진 형벌을 하고, 경남 밀양군 丹場面 丹場里, 法歸里, 河洞 지역으로 (오늘의 삼량진) 유배 보내었는데, 매맞은 상처가 썩어들어가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앓다가, 1787년 9월 14일(음력 7월 23일, 혹 다른 기록에는 7월 16일), 귀양살이 시작한지 2년만에 천주경을 큰 소리로 바치며 마침내 세상을 떠나 천주께 목숨을 거룩히 바쳤다.
明禮坊의 김범우 통역관의 자택 자리는 지금의 서울대교구청이 있는 곳이고, 지금의 명동성당 터는 그 당시 鐘峴이라고 부르는 작는 산봉우리였다. 임진왜란 때, 서울에 입성한 중국의 참전 지원부대가 쇠북(鐘)을 매달아놓고 치던 낮은 봉우리에서 鐘峴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당시 김범우 통역관 8형제(범우, 이우, 성우, 명우, 관우, 적우, 현우, 등)는 지금의 소공동(조선호텔, 미도파 자리), 명동(백병원, 로이알호텔 자리)에서 살았고, 정약용도 1783년부터 1800년까지 17년간이나 전세집을 얻어 그 부근 명례방에서 살았다.
明禮坊 集會
광암 이벽성조께서는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한국 천주교회 초대 신도들이 모여 집회를 할 때 벽을 등지고 푸른 도포를 입고 좌정한 둘레에는 권철신, 권일신, 권상학, 권상문,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 양반 교우들이 손에 기도서를 들고 무뤂을 꿇고 이벽성조를 모시고 둘러 앉아 기도하였으며, 광암 공의 설교를 들었다. 교리를 문답할 때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는 이들은 엄히 꾸짖고 야단을 쳐, 儒敎의 師弟之間보다 더 엄하였다.
1785년 乙巳年 봄에 일어난 한국천주교회 역사상 최초의 박해로 양반교우들은 각자 자기 집으로 강제 귀가시켰으나, 중인계급의 김범우 토마스는 체포, 구속되어 곤장을 혹심하게 맞았으니, 刑吏들은 양반 학자들을 때리지 못하는 분풀이를 만만한 중인계급의 김범우 통역관에게 추가하였다. 김범우 순교자는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로 다른 신도들을 대신하여 심한 매를 맞았다. 우리는 천주교회 입교한 후, 다른 신자들을 대신하여 매를 맞아본 적이 있는지 반성해보자.
金範禹 通譯官의 墓地 發見:
1980년대초까지만해도 한국천주교회는 김범우 순교자가 귀양간 곳은 忠北 丹陽이고, 거기서 죽었다고만 알고 있었으니, 프랑스 선교사 샤를르 달레 신부의 역사서에만 의존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충북 단양팔경을 매우 아름다워, 한양에서 귀빈들, 특히, 세자 간택을 받지 못한 형제 대군들이 종종 유람하러 오는 곳으로, 유배지로 사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거의 없었기에, 김범우 순교자의 충분 단양 유배설은 매우 의아하였다.
1981년 10월 14일, 필자가 아녜스 한현 양의 노력과 주선으로 함께 기적적으로 김범우 순교자의 직계 6대후손인 김동환 옹을 만나고 家門의 族譜와 후손들 친필로 작성되어 사용하던 家乘과, 장생보록, 선조들의 기일록, 등을 접하면서, 유배지는 慶南 密陽郡 丹場面 丹場里이고, 묘소도 거기 있으며, 김범우 순교자의 아들들 仁考와 信考가 流配地에까지 아버지 김범우 토마스 역관을 따라가서 모시고 있었고, 딸들도 그곳까지 내려가서, 오늘의 삼량진 하동에 사는 張氏에게 출가하였었음이 밝혀졌다.
순교자 토마스 김범우 정지(김범우 순교자의 어릴 적 이름) 통역관의 묘를 찾고, 후손들을 찾고, 족보와 가승과, 가문의 장생보록, 등을 입수하는 등, 김범우 순교자에 관한 모든 발견은 1980년대 초부터 필자를 도와 무료봉사에 헌신하던 아녜스 한현 (당시, 천진암 성지의 각종 문헌 편집 담당 부장)양의 업적이고, 공로다.
당시 필자는 천진암 성지 개척을 시작한 초기에다가, 주교회의 한국교회200주년기념위원회 초대 사무국장으로 임명되어, 작은 신장본당 주임도 겸하고 있으면서, 파도처럼 폭주하는 모든 업무가, 특히 처음 새로 시작하는 것들이라서 정신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아녜스 한현 양은 서강대학교 설립 초기 제2회 졸업생으로서, 저명한 역사학자 이광린 교수의 수제자로, 천진암 성지에서는 유일하게 역사학을 정식으로 배운 수재였다. (필자의 기억에 졸업 때 서강대학교 전교생들 중에 2등 성적으로 졸업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또 가문이 당시 국회부의장 한근조 의원이 조부여서, 항상 예의가 단정하고, 근면하며, 겸손하였다.)
천진암 성지 자료집 137권 중에 제6권에 수록된 김범우 순교자에 관한 자료수집과 정리 기록은 모두 한아녜스 양의 업적이다. 또한 1981년부터 2권에 달하는 날마다 기록한 나의 활동에 관한 일지는 항상 동행하면서 현장에서 기록한 것들이기문에 주교회의 업무수행, 특히, 103위 순교복자 시성추진과 200주년 기념사업 추진의 현장 기록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다는 것을 필자가 보증하고 싶다. 김범우 순교자에 관한 다른 여러 사학인들의 기록은 한현 아녜스 양의 노고로 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훨씬 후대에 저술한 것이다. 한국천주교회 대도약의 분수령이 되는 200주년기념과 103위 순교복자 시성과 교회 창립성조들의 묘소 찾기와 천진암 성지 개척 및 창립성조들 시복시성 추진을 준비하는 이 격동의 시기에, 실무자들이 필자를 따라다니며, 현장에서 기록하고 정리한 것으로, 후학들에게 적지않은 도움을 주는 자료들이라고 확신한다.
보다 자세한 기록은, [천진암 성지 자료집] 제6권 503면~628면까지와, 월보 [천진암] 통권 제21호(1982. 9. 1.발행)의 화보 등을 참조하기 바란다. [천진암 성지 자료집]은 현재 제1권~제137권까지 <각 권마다 평균 국판4X6 배판의 400페이지씩> 편찬되어, 국회도서관, 국립도서관, 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 서강대학교 도서관, 전국 각 대신학교 도서관, 미국 콜럼비아대학교 도서관, 미국 죠지 타운대학교 도서관, 등 국내외 주요 도서관 복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위의 각 도서관에 가서, [천진암 성지], 혹은, [변기영 신부]를 입력하면 즉시 읽을 수가 있다.
천진암 성지의 저 방대한 자료집의 거의 대부분을 정리한 편찬업무는, 천진암 성지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과 천진암박물관의 편찬실장으로 약 7년가까이 거의 무료로 봉사한 데레사 최현순 교수가 로마 그레고리안대학교로 유학가기 전에 이룩한 큰 업적이다. Msgr. Byon
김범우 선생 후손 김동환씨와 변기영 신부, 한현 양(1981.1.15) Il Rev. Byon Ki-Young e Han-Hyun hanno incontrato Kim Dong-Hwan, un discendente dell’interprete Tommaso Kim Beom-Woo(1751~1787), che era il padrone di Myeong-Rye-Bang, dove, oggi, è costruita la cattedarale della arcidiocesi di Seoul, Il 15 gen.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