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ef history of the foundation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
- 이벽 성조의 묘를 찾아서…! -
總務 卞 基 榮 神父 記述 / 1997. 6. 15.~1999. 9. 26.
韓國天主敎會 創立主役 李檗 先生 墓 移葬準備委員會
<배달겨레 종교문화사 개관 -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개요 - 하느님의 종 5위 약전 - 이벽 성조의 족보 - 기타 자료 발췌 ->
<이 글은 1979년, 이벽성조 사후 195년만에 포천 공동묘지에서 이벽성조의 묘를 기적적으로 찾아내어,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으로 이장한, 변기영 신부가 이벽성조의 묘를 찾아 이장하기 까지의 내력을 회고하여 쓴 기록이다. 앞으로 글이 쓰여지는 대로 계속 연재된다.>
2. 나는 그 동안 비교적 남달리 많은 충돌을 무릅쓰고 여러 가지 일에 관여하게 되었었다. 특히 한국천주교회 창립200주년 기념을 위하여 1980년 5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5년간은 주교회의에 가서 200주년 기념 5개년계획 입안을 비롯하여 103위 시성추진에 주력하면서, 동시에 한편으로는 천진암 성지 개발, 특히 100년계획 대성당 건립 착수에 따른 힘에 겨운 일들을 교회 소유의 땅 한평없는 황무지에서 추진하느라 많은 충돌을 피할 수가 없었다.
3. 지금 되돌아다보면 사제로서 사실 다시 생각만 해도 겁이 나는 부동산 확보와 수년간에 걸친 대규모 토목공사 추진과 지휘 등, 質과 量에 있어 내 역량을 초과하는 엄청난 일들을 피할 수 없었던 나로서는 이제 다시 지나간 기억들을 더듬어가며, 일기장에 한두 줄씩 적어놓았던 것을 뒤적거리면서, 내가 해온 이러한 일들에 관해서 앞으로 혹시라도 관심을 갖는 後學들이 있을까하여, 이를 미리 내다보면서, 後輩들을 위하여 이 자료집 머리말에 몇 가지씩 생각나는 대로 밝히고자 한다.
4. 그리고 앞으로 이 글을 읽을 後學들이 내게 대한 오해나 잘못된 先入觀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부득이 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들어가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결코 내 자신에 대한 유치한 제 자랑이나 혹은 다른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은 전혀 아니며, 다만 필요하다고 여기는 단순한 생각으로 이를 쓰고자 할 뿐이다. 물론 이를 읽어가다가 보면 주님의 손길이 하시는 일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이나 의도와 다를 수도 있고, 또 주님께는 그렇게 하실 능력과 자유와 권리가 있으시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서 읽는 이들이 깨닫게 되기도 할 것이다.
5. 이제 내가 지금까지 사제로서 해온 대부분의 일들에 대하여 나는 이렇다 할 특별한 소질도 없으며, 공부한 적도 없고, 전문가도 아니었다는 점을 眞率하게 밝히는 것이 겸손아닌 정직한 자세라고 하겠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전문가들을 제치시고, 왜 지식도 경험도 없는 나를 부르셔서 이러한 일들을 하게 하시는지, 그 섭리에 내 자신이 놀랄 뿐이며, 아마 그 신비의 질문을 수수께끼로 삼아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할 뿐이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學歷이 다르고 實力이 다르며, 經歷이 다르고 能力이 다르며, 地位가 다르고 業績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직업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쓰는 나는 切感하지 않을 수 없다.
6. 본래 나는 歷史에 관한 공부나 성지개발, 또는 聖賢들의 묘를 찾아 移葬하는 일에 대하여 취미도 관심도 지식도 경험도, 또 그러한 일에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전혀 없던 사람이었다. 내가 학창시절에 소질이 있었다면 외국어 분야였고, 대신학생 때 취미를 가지고 공부한 분야는 당시의 神秘神學이었으며, 신부가 된 후 석사학위 과정 3년, 박사학위 과정 5년을 모두 수료하였지만, 과목은 신비신학이었다. 신학생의 신분으로 쓴 논문이나 번역하여 출판한 책들도 聖人傳記라든가 [義人의 영혼 안에 內住하시는 聖三位]에 관한 것 등, 그러한 분야였고, 지도교수 역시 당시 그 분야에 심취해 계시던 국내에서 가장 존경받으시던 최민순 신부님이셨다.
7. 한마디로 나는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과 지금 일하고 있는 이 분야가 내게 선천적인 소질이 있는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다만 이러한 교회의 일들이 내게 닥치므로 이를 외면하지 않고, 천주와 교회를 위하여 닥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였고, 지금도 매일 닥쳐오는 일을 피하지 않고 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또 하지 않을 수도 없지 않은 것이 우리의 처지이다. lfj한 일을 하게하시는 것이 주님의 은총으로 확신하고 있다.
8. 그래서 내가 대신학생 때는 책을 번역하고 글을 쓰는 일에 취미가 있어서, 학생의 신분으로서 이미 여섯권의 책을 내고 있었는데, 당시 옆에서 나를 알고 있던 이들은 장차 내가 글쓰는 학자신부가 될 거라고 여겼었으나, 내 앞에 찾아온 직무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9. 사제가 되자마자, 나는 수원교구청의 주교(윤공희주교)비서 겸 교구 기획관리실장(조원길신부) 보좌로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였던 평신도지도자 교육과 가톨릭쎈타 건립 등의 계획수립과 추진에 불가피하게 관여하게 되었고, 離農人口가 급증하던 당시, 지금 내 기억에 1971년 말을 전후하여 당시 수원교구 신자 45,000여명 중 1년에 8,000여명내외가 離農하여 서울로 移住하고 있었던 때이므로, 나는 불가피하게 농민운동에 뛰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이 일은 교구 내의 일부 선배 신부님들과 교구장님의 시책변경으로 여의치 않게 되었었다.
10. 그래서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석사학위를 받은 이후, 박사과정 공부를 할 겸, 신자 500여명 내외의 당시 시골 본당이었던 신장 성당으로 가게 되었고, 본당 내의 관할구역 안에 있던 구산 김성우 안또니오 순교복자 묘소에 기념 비석 건립과 남한산성 성지 매입 및 천진암 터 확보 등에 손을 대지 않을 수가 없었었으니, 버려지고 있는 성지들을 차마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11. 동시에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기념 준비위원회 초대 사무국장으로 임명받으면서, 역시 신비신학 공부와는 거리가 있는 실제 사목 현장의 기념사업에 약 5년간 매달리게 되었는데, 200주년 기념의 성격과 방향을 설정하고 그 한계를 그어보는 일은 지금 생각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실로 일종의 창의적인 産苦와 함께 적지 않은 반대와 방해를 감수하며 극복해야만 했었다. 마치 새로운 기종(機種) 최신형 대형 비행기를 만들어 이륙시키려는 것과 흡사한 모험이었다.
12. 그런데 이러한 모든 일이 사실 학생 때 내가 즐겨 공부하던 당시 이른 바 神秘神學 분야는 아니었었다. 이처럼 지금도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학창시절부터 3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내가 하고싶어 하던 공부도 아니고 좋아하는 일거리가 아님을 솔직히 밝히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내게 닥쳐오는 일이니 피할 수가 없을 뿐이다. 남들은 내가 개발사업이나 대규모 토목공사 등에 소질이나 취미라도 있는 양 느끼는 모양이고, 또 내가 없는 일이나 없어야 할 일을 만들어서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만들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가진 불가피한 일들로 내게 느껴지기 때문에 손을 대게 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내가하는 일을 내가 종아하는 줄 알지만, 내가 좋아한다기보다도 내가 부지런히 할 따름이다.
13. 이 기회에 천주교 성지에 대한 관심과 순교 선조들에 대해서 내가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내력을 간결히 말해 두고자 한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의 이 방면에 관한 내 자질형성에 다소라도 끼친 영향들을 우선 내 자신이 회상해 보고싶기 때문이며,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배경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14. 1957년 9월 27일에 미리내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나는 영세 대부님과 함께 순교 복자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를 참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만 해도 묘소 주변은 잡풀이 수북한 채 신자들의 공동묘지가 정면과 좌우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이미 나이가 벌써 18살이었고 국민학교 졸업장밖에 없던 소년이었으므로, 혹시 내가 천주교 신부가 되도록 김대건 신부님이 천상에서 나를 이끌어 도와주신다면, 신부가 된 후에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를 깨끗하게 갈 가꾸겠다고 마음을 먹고 아주 소박하고 단순한 생각으로 기도를 바쳤던 기억이 난다.
15. 1년 후에 용인군 이동면 천리 경당에서 12월 8일에 견진 성사를 받았고 1959년에는 미리내 성당에 와서 한국말을 배우고 있던 프란치스꼬회의 배유선 신부님(Justin Bellerose)께 우리말을 가르쳐 드리며, 한 두달 동안 머문 적이 있었는데, 틈틈이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를 찾아 같은 기도를 바쳤던 생각이 난다.
16. 수도생활에도 취미가 있던 나는 복자회와 살레시오회를 거쳐 10여년 후에 내가 사제가 되어 수원교구 주교 비서 겸 기획실 보좌로 있을 때 가끔 내 출신 본당인 미리내 공소(그 당시에는 사제가 머물지 않는 공소로 되어 있었음)에 가서 미사를 드렸는데 그때도 같은 생각이었다.
17. 1972년 여름 7월17일, 중복날 용인 본당 신부로 부임해온 후에 당시 총회장이었던 이 재학 회장과 김영길씨 그리고 다른 일부 회장들로부터 문경 가는 연풍 계곡에 좋은 磐石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돌을 성지 미리내 표석으로 쓰도록 가져오는 계획을 세우기로 하였다. 나는 내 자가용 찝차(당시 우리 수원교구에 자가용 승용차를 가지고 있는 신부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90씨씨짜리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었다)와 운전기사, 그리고 지금 기억에 운반비용 60여만원, 남자회장 3명, 또 운반 중 검문소 통과를 위하여, 용인경찰서로부터 경찰서장의 협력으로 경찰1명, 이렇게 준비하여 10일이나 걸려서 가져온 것이었다.
18. 처음에는 3일이면 된다고 하였으나, 크레인의 붕대가 부러지고, 와이어줄이 끊어지는 등, 차질이 생겨, 서울에서 크레인이 2번이나 새로 연풍까지 내려가야했기 때문인데, 이회장이 나중에 와서 보고하는 말이, 모두들 자연석 무게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여, 처음에는 2톤짜리로 본 돌이 실상은 13톤 이상이나 나가기 때문에 크레인을 5톤짜리, 10톤짜리, 20톤짜리 이렇게 3차례나 바꾸어 들어내느라고 시일이 더 걸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두 개의 돌 중 하나는 미리내 성지에 세웠고, 또 하나는 교구청(화서동 소재 구 교구청) 안마당에 세우게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미리내 성지를 직접 책임맡지도 않은 새파란 젊은 신부가 연풍까지 사람을 보내어 마을사람들에게 다소간의 사례를 하고서 제법 큰 돌을 가져온 것이 성지 가꾸기에 첫 관심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19. 지금 미리내에 세운 그 돌에는, [님은 가시고,,,]로 시작되는 하한주 신부님의 詩가 새겨져 있지만, 본래 그 돌 운반계획을 세워 추진한 나의 운반 목적은, 김대건신부님의 얼굴 모습을 음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돌의 원산지인 연풍에는 음각불상(국보55호?)이 있는데, 그것이 있는 자연 岩山의 바로 아래 계곡의 하천 밑에서 당시 마을사람들의 협력으로 가져온 同質의 水晶鑛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져온 사람과 쓰는 사람이 바뀌니, 용도도 바뀐 경우라 하겠다.
20. 당시 나는 교구 당가신부(현재 관리국장에 해당함)였던 한의수 신부를 설득시켜 미리내 성당 뒤의 산을 매입하도록 하였었는데, 내 기억에 지금 성직자 묘소로 사용되고 있는 산으로 생각하고 있다. 성지 주변의 산은 되도록 넓게 매입하여야 성지가 고요히 보전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21. 용인 본당 신부로 재직하면서, 김대건신부님이 소년시절과 사제된 후에 사시던 집터가 있는 마을로 알려진 현재의 양지성당 골배마실 성지에서 류 봉구 신부님을 모시고 순교자 현양대회를 3개 본당(용인, 양지, 이천)이 공동개최하였는데, 물론 행사준비와 주선은 주로 내 자신이 직접하였고, 류봉구 신부님으로 하여금 주례와 강론을 하시게 하였다. 결과는 매우 좋았다. 교우들이 더욱 열심해지는 것 같아서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자주 순교자현양대회를 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22. 1973년도 말 성탄 전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용인본당 주임신부로 있을 때, 돌아가신 정원진 신부님(1900년에 탄생하시어 1976년에 선종하신 신부님이신데, 그 당시에는 은퇴하여 계셨다)께서 일부러 용인 성당에 오셔서 나에게 “변신부님과 한 3일 같이 좀 머물다 가도 되겠는가?”하시기에 나는 아주 대환영한다고 말씀드리고 “방이 있으니 더 오래 머무셔도 좋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정원진 신부님께서는(혜화동 성당을 건축하신 분) 약 3일 동안 머무시면서, 식사 때는 물론 식사 후에도 계속하여 나에게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인 천진암 주어사 터가 있는 앵자산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고, 가는 길, 즉, 곤지암에서는 하루 한 번 양평을 오고 가는 시외 버-스가 있지만, 시간도 잘 안 지키고 또 오지 않을 때도 적지 않은 그 차를 잡아타기가 힘들므로, 곤지암에서 내려서 걸어가려면 남이고개를 넘어 상품에서 주어말을 찾아가야 하고, 그 동네에 가서 박씨노인을 만나면 잘 설명해 줄 것이라고 하셨다.
23. 정 신부님께서는 주어 말에 가셔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앵자산을 넘어 논이 되어 있는 천진암 터를 거쳐서 절막(우산 2리 마을 옛터)으로 해서 퇴촌으로 걸어서 번내(燔川里)에 와서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을 거쳐 부천 자택으로 돌아가시기까지 이야기를 내게 소상히 다해 주시고, 略圖까지 그려 주셨으며, 천진암 주어사 터가 있는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를 지키고 가꾸는 일은 변신부가 해야만 하겠다고 간곡히 설득하셨다.
24. 그러나 당시 나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있었으므로 솔직히 말하면 귀밖으로 들리는 내용이었고, 은퇴하신 선배 신부님 앞에서 예의상 공손한 체 하면서, “네,네”하면서 대답하는 것을 할아버지 신부님께서는 그나마 아주 흐뭇하게 여기셨었다.
25. 1974년 말에 두 번째로 교구청에 근무하도록 교육원장 겸 사목국장으로 임명된 후 나는 오기선 신부님을 따라서 여주 범골 신학교 터를 처음 답사하였고, 그 후도 오기선 신부님을 모시고 더 갔었다. 그리고 당시 내가 창간하였던 수원교구 사목지에 남한산성 순교지, 범골, 구산 등 교구 내 성지를 매호에 탐방보도 형식으로 몇 차례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 반응은 매우 좋았다. 특히 서울의 일부 선배신부님들로부터 참 잘하는 일이라고 칭찬을 들었다.
26. 그때 나는 용인에서 창설한 가톨릭농촌사회지도자교육원을 김주교님께서 교육원으로 명칭을 바꾸어 수원 교구청으로 이동시키시고, 나로 하여금 교구 사목국장을 겸임하면서 수원에 와서 교육원 운영을 하게 하였으므로, 두 번째로 교구청에 와서 근무하는 동안 농민 운동과 동시에 교구 내 성지들을 자주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미리내 성지의 핵심인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 좌우 정면이 잡풀이 수북한 공동묘지로 둘러쌓인 상태였으니 다른 곳들이야 어떠하였겠는 지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27. 사실은 서품 후 바로 교구 주교 비서로 재직할 때도 몇 차례 윤공희 주교님께서 아침 식사 때, 고 남상철 회장의 편지를 거론하셨는데, 내용인 즉,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인 천진암 주어사 터가 있는 앵자산 일대를 천주교회가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구가 원래 가난하던 시절이었고(지금 내 기억에 1970년도 초, 수원 교구 내 20여개의 본당 중에서 재정자립을 하고 있던 본당들은 불과 4,5개 정도였다), 또 윤공희 주교님께서는 새로운 일거리를 착수하는데, 당시 매우 신중히 하시는 편이어서, 때로는 답답하리만큼 아주 주저하시는 것으로 느껴졌고, 따라서 천진암 주어사 지역에 대한 성지 개발이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28. 그래서 신장성당(당시 신자 500여명) 주임으로 있던 김정원 신부로부터 한두 번 천진암 터가 있는 산골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선종완 신부님이 새로 세운 수녀회의 수련소 자리를 소개하여 달라고 나에게 말씀하셔서, 사실은 천진암 터라는 곳에 수녀원 수련소를 짓게 하여볼까 하는 생각도 있고 해서 한 번 가보기로 하였다. 즉 그 당시만 해도 나는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터의 의미와 가치와 중요성을 사목국장답지 못하게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실정이었고, 더욱이 이러한 성역에 수녀원이 들어가면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지 수녀회들의 생존과 운영에 대하여도 정말 잘 모르는 철부지였다. 그러나 선신부님께서 수녀회를 세우시고 항상 당신이 미사와 고백성사를 주시며 피정까지 시키셨는데, 당신 아닌 다른 신부가 최초로 피정강론을 1주일씩 하도록 하신 것은 내가 처음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피정지도를 한 그러한 관계로 그 수녀회의 수련소 후보지를 찾아볼 겸해서 천진암을 가보기로 한 것이었다.
29. 그래서 1974년 말에 교구청에 간 다음 1975년 11월 하순에(21일 성모 자헌 축일) 처음으로 천진암 터를 방문하였다. 그 후 1976년 봄에 내가 신장성당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구산 성지와, 당시는 구산이나 미리내에 대해서도 성지라는 이름을 거의 쓰지 않고, 그냥, “미리내 복자 김대건 신부님 묘소”, 혹은 “구산 복자 김안당 묘소” 등으로만 부르던 시대였는데, 나는 천진암 터가 있는 퇴촌면 우산리 산골을 가끔 찾으면서 잊혀 진 교회 창립의 연고지에 한 조각돌이라도 세워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막연히 갖고 있었다.
30. 1977년도와 1978년도에 가난한 구산교우들의 성금을 받아 구산에 있는 순교 복자 김 성우 안토니오의 묘소에 비석을 건립하면서 당시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던 나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주역이었던 이 벽 선생에 관해서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31. 1978년 봄에는 천진암이라는 월보를 이웃 본당 신부님들과 함께 발행하게 되는데, 사실 이 월보는 경안본당 주임이었던 유진선 신부님 등이 월보 이름을 [천진암]으로 하도록 나 없이 결정하고 편집을 내게 맡겼으며, 같은 날 거의 같은 시간에 나는 서울에 가서 천진암 강학 기념사업회를 결성하였다. 유진선 신부님이나 이웃본당신부님들과 사전에 무슨 업무계획이나 업무분담이 이야기된 적도 없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정말 동시에 두곳에서 다른 사제들에 의해서 동일한 목적을 향한 두가지 업무가 우연히 시작된 것이다.
32. 나는 박희봉 신부님, 오기선 신부님, 등 선배들과 여름내 모금을 하였으나 당시 20여만원 밖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 돈으로 철간판 하나를 만들어 세울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해 9월에 가서야 천진암 터에 땅을 일부 매입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천진암 강학회를 개최했던 선인들의 묘와, 그분들의 후손 및 저서, 유물 등을 찾고 싶었고, 교회사 연구소를 비롯한 관계 전문학자들에게 몇 차례 문의하였으나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33. 마침내 그해 가을 성지 현장에 관해 가장 많이 알고 계시던 오기선 신부님께서도 이 벽 선생의 묘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몇 차례 내게 말씀하시므로, 당시 30대 후반의 의욕이 넘치는 나는 지금까지 이 벽 선생의 묘를 찾아보려는 노력조차 해본 사람이 없었으니, 못 찾을 때 못 찾더라도 노력이나 한 번 해보겠다는 자세로, 이 벽 선생의 묘를 찾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그러고 보니 어디에선가 그 묘가 내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고, 어느 산기슭에서 김대건 신부님의 묘처럼 잡풀이 수북한 채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 마치, 회상하듯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34. 그때부터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벽선생의 묘를 찾는 일을 화제로 삼았고 듣는 사람들은 나를 미치광이처럼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 벽 선생의 인적 사항을 교회사에서 우선 확인한 결과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며 아버지는 이부만(李簿萬), 형은 이격(李格), 동생은 이석(李晳), 그리고 두 형제는 무관(武官)이었다는 기록이 나왔다.
35. 그 때부터 이벽 선생의 묘를 찾기 위한 생각이 마음과 머리에 가득 차 있었으며, 누군가, 무엇인가가 무섭게 내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는 힘을 나로서는 도저히 뿌리칠 수도 외면할 수도 없을 만큼,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어디에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벽 선생의 묘를 찾으러 떠날 차비를 해야 되는 사람처럼 느껴져 오는 것을 누를 수가 없었다.
36. 그러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경주 이씨 이벽 선생의 족보를 입수하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던 차에 경안본당 주임 유진선 신부님이 하루는 와서 자기가 지난 가을 판공성사때 경주이씨가 많이 살고 있는 마을을 알게 되었다고 귀띔해 주었다. 나는 즉시 유진선 신부님을 내 포니 자동차에 태워드리고 경주 이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경안면 목리(木理) 마을을 찾아갔다.
37. 그날은 1979년 1월 8일이었다. 그날 경주 이씨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을 찾아가서 족보를 보자고 하였더니 시골집 벽장문을 열고 족보가 담긴 나무상자를 꺼내서 내 앞에 내놓았는데, 그 여러 권의 족보를 모두 뒤적거린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돈을 만원(당시 노동자들의 이틀 품값)을 꺼내 그 노인에게 술값으로 드리고 이벽 선생 가족 이름을 적어주며, 즉 이부만, 이격, 이석, 할아버지인 이달(李鐽) 등, 이러한 이름들을 찾거든 바로 알려 달라면서 내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38. 열 하루가 지난 후 즉 1월 19일에 마침내 그 노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적어준 경주이씨 들의 이름이 나오는 족보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길로 목리에 가서 처음으로 왜정때 순 한문으로 미농지(美濃紙)지에 발행된 이벽선생 족보를 보게 되었고, 그것을 광주에 가지고 나와서 전자복사를 뜬 다음 족보는 본인에게 돌려주고 그 족보에 나오는 묘소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39. 이벽 선생의 할아버지 이달과 아버지 이부만 공의 묘는 포천 화현리(花峴里(화현리))에 있는 것으로 나왔고, 이 벽 선생과 이벽 선생의 형인 이격, 그리고 아우인, 이 석, 이 3형제분의 묘소도 같은 곳 화현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40. 나는 즉시 포천에 가서 화현리를 찾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화현면(花峴面)으로 되어 있는 곳이지만 그 당시에는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로 되어 있었다. 화현리에 가서 노인들과, 국민학교, 파출소 책임자들에게 족보 복사본을 나누어주며 200여 년 전 경주 이씨들의 묘소가 있는 곳을 물어보았으나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41. 그래서 약 한 달 가까이, 20일 동안 서너차레 내 자신이 묘를 찾으러 다녔었으나 허사였다. 때로는 현등산과 운등산에서 올무를 놓아 산토끼 등 산짐승을 잡아 포천장에 갖다 팔아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냥꾼을 소개받기도 하였는데, 이 사람이 산에 있는 묘소를 가장 잘 안다고 하였다.
42. 그러나 모두 허사였다. 2월 15일, 몇 차례 허탕을 친 나는 그날도 신장성당에서 아침에 빵과 커피로 간단한 식사를 하고 묘를 찾으러 가서 오후 3시가 되도록 점심을 굶은 채 여기저기 산비탈을 헤매던 중 실망에 차서 일동 만세교 쪽으로 차를 몰고 돌아오는 길에, 한길 가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마당에 눈을 쓸고 멍석을 펴놓고는 시골 남자들이 윷놀이하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가려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볼 마음으로 차를 세우고 그 노인들에게 가서, “이 마을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노인들의 말이 “화현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깜짝 놀라서 “화현리는 저 아래 국민학교와 파출소가 있는 곳이 아닙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노인의 말이 국민학교가 있는 곳은 화현 1리이고, 화현리가 하도 커서 화현 2리, 3리, 4리, 5리까지 있는데, 일동 끝으로 가장 끝에 있는 자기네 마을이 화현 5리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43. 그래서 나는, “이 화현 5리에 200여 년 전 경주 이씨 양반들의 묘가 혹시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노인들 중에서 가장 유식해 보이는 송원배 노인이 불그스레한 얼굴에 흰 수염을 약간 느리우고 마고자를 입은 아주 부유한 옷차림으로 나에게 대답하였다. “경주 이씨 묘는 우리 마을에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없이 돌아서서 내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오는데, 그 노인이 내 뒤통수에 대고 하는 말이, “참, 요새 세상에 기특한 젊은이로군, 조상의 묘를 찾아다니다니, 여보, 젊은이, 선대(先代)에 무슨 벼슬을 했노?”하고 물었다. 즉, 조상이 얼마나 유명한 벼슬을 했길래 조상의 묘를 찾아다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돌아서서 그 노인을 바라보며, “한양에서 좌포장 벼슬을 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즉 내 속마음으로, 이벽 선생은 벼슬이 없었지만 이격 장군은 좌포장 벼슬을 했었으므로 얼떨결에 그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그 송원배 노인이 말하기를, “그러면 이포장의 묘를 찾는다 이거지? ” “그렇습니다. ” “그 이포장의 묘가 저기 있는데!” 나는 깜짝 놀라서 “어디에 있지요? 가보실 수 있습니까?”하였더니, 송원배 노인은 “그런데 이포장은 전주이씨지” 하고 다시 실망시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44. 이벽 선생은 분명히 경주 이씨이므로 그냥 돌아서서 오려다가 얼핏 번갯불처럼 스치는 생각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벼슬이라는 것은 오래가지 못하고 항상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말처럼 바뀌는 것이니, 비록 전주 이씨 이포장의 묘라도 가보면 혹시 그 곳에 비석이라도 있다고 할 때, 그 비석에 전임자나 후임자 중에서 경주 이씨 이포장, 이격 장군에 대한 무슨 단서가 될 만한 기록이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그 묘에 가보자고 하였다. 그런데 송원배 노인의 말이, “이포장네 묘를 흥수네가 관리를 해왔지. 그 흥수가 죽으려고 정신이 까물까물 하는데 아직 안 죽었어”하는 것이었다.
45. 나중에 알아보니 유흥수(柳興洙)라는 노인은 그 마을에서 태어난 송원배 노인과 동년배 죽마고우로서 약 3년 전부터 병석에 누워 몇 번이나 인사불성이 되어 무의식 상태로 며칠씩 있다가 깨어나곤 했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자가용차가 드물던 시절이라서, 어느덧 윷놀이는 중단이 되고 마을의 이장, 반장 등 약 10여명의 어른들이 내 주위에 모였고 나는 송원배 노인을 재촉하여 다 죽어가고 있다는 유흥수 노인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런데 송원배 노인의 말이 “젊은이가 찾는 묘는 경주 이씨 이포장의 묘라면서, 자기 친구인 유흥수네가 관리해 온 묘는 전주이씨 이포장의 묘이니 가볼 필요가 없지 않은가? 뭣하러 가보자는 거야?” 하며 유흥수 노인 방문 면담을 귀찮게 여기는 태도였다.
46. 그러나 내 재촉 때문에 송원배 노인의 집에서 큰 길 건너 서쪽 밭 가운데 있던 유흥수 노인이 사는 집을 찾아갔다. 그 집은 울타리도 대문도 없고 마루도 없이 방 두 개에 부엌 하나인 그야말로 초가삼간이었다. 초가집 지붕은 여러 해 동안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덮지를 않았기 때문에 지붕이 썩어서 여기저기 골짜기가 나 있었고 눈 녹은 물이 골짜기로 처마 밑에 떨어지고 있었으며, 추녀는 내 이마에 닿을 정도였다. 그래서 몸을 구부리고 흙으로 된 봉당을 한 발짝 올라서서 옛날 조선식 창호지를 바른 방문의 무쇠고리를 잡아 열고 들어갔다. 그 방은 윗방이었고, 방바닥은 국민학교 학생들의 공책장을 뜯어서 여기저기 땜질하여 발라놓은 차디찬 냉방이었다.
47. 유흥수 노인은 피골이 상접하여 다 죽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아마 몇 달 동안 세수나 면도도 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덮고 있는 이불은 솜이 여기저기 뭉쳐서 마치 행여 지붕처럼 펄럭펄럭하는 상태였고, 싸늘한 방에, 대소변을 방안에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악취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그 마을의 이장과 다른 몇몇이 같이 들어갔었는데 이장이 들어가면서, “할아버지 서울에서 사람이 왔어요.”하고 소리를 질러도 이 노인은 쳐다볼 기운도 없었다. 아마 죽기전 까지 내 얼굴을 똑똑히 바라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장과 반장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켜 앉혔는데, 그 때 송언배 노인이 “이 사람아, 서울에서 사람이 왔네.” 하였지만 그래도 쳐다보지 않았다. 양쪽에서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은 유흥수 노인은 힘이 없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으로 간신히 가르키는 데는 방 윗목에 약 2미터 거리의 구석에 있는 큼직한 두레박용 깡통을 가리켰다. 소변을 보기 위해서 그것을 달라는 시늉을 했다. 이장이 그것을 가져다가 소변을 보도록 깡통을 기울여서 몸에 갖다가 대니,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몸을 가리울 생각도 없이 다 내놓고 약간의 소변을 본 후 다시 쓰러져 누우려고 했다.
48. 그러자 송언배 노인이, “ 이 사람아, 자네네가 이포장네 묘를 관리해 왔지?” 하고 큰소리를 지르자,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약간 끄덕일 뿐이었다. 이어서 송언배 노인이, “ 그 이포장이 전주 이씨지?” 하고 소리 지르니까, 역시 기운이 없어서 한 마디도 말소리는 내지 못하고 다만, 종전처럼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대신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약간 좌우로 저으면서 그렇지 않다는 표시를 했다. 그래서 내가 옆에서 보고 있다가, “그러면 그 이포장이 무슨 이씨입니까?” 하고 큰 소리로 물었다. 옆에서 부축하고 있던 이장이 내 말을 되받아서 “할아버지 그 이포장이 무슨 이씨에요?”하고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물었는데, 입을 열고 말하는 유흥수 노인의 입에서는, 소리는 나오지 않고, 아래 위 앞니가 다 빠진 상태여서 입만 우물거릴 뿐 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마치 “형주 이씨”하는 듯 했다.
49. 옆에 있던 이장이, “경주 이씨에요?” 하고 묻자 그 말에 고개를 상하로 약간 끄덕이며 “그렇다”는 표시를 했다. 그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무척 기뻤다. ‘아마 이벽 선생의 형인 이격 장군의 묘가 아닌가?’하는 성급한 확신부터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송언배 노인이 옆에서 이제 자기주장과 달라지자, 마치 장기두다가 다투는 시골 노인들처럼, 벌써 자기주장이 옳고 유흥수 노인의 주장이 틀리니, 자기편을 들어달라는 식의 말을 하였다.
50. 즉 그때부터는 나를 젊은이라고 하지 않고 “선상님”이라고 했다. “여보 선상님, 이 흥수 녀석의 말을 믿지 마시오, 2,3년 동안 죽었다가 깨나고 죽었다가 깨나고 해서 정신이 까물까물해요, 지금도 제 정신이 아닙니다. 내가 이 마을에서 16대째 살아왔고 글방 훈장도 젊어서부터 해오던 사람이니 내가 정확히 알지요. 그 묘는 경주 이씨 이포장의 묘가 아니고 전주 이씨 이포장의 묘요”하고 말을 하였는데, “전주 이씨”라는 발음이 나올 적마다 다 죽어가던 유흥수 노인은 마치 기를 쓰고 반대하듯 “아니라”는 표시로 고개를 좌우로 겨우 조금씩 내저으며 부정하는 표시를 강하게 하려고 안간 힘을 쓰는듯하였고, 우리들이 다짐하며 묻는, “경주이씨” 소리가 나오면 “그렇다”는 표시로 고개를 아래위로 조금씩 끄덕거리었다.
51. 그래서 나는, “만일 그 이포장의 묘가 경주 이씨라면 그 묘나, 그 부근에 있는 이 포장의 가족 묘 속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하나라도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 노인의 소리는 들을 수 없었으니 입모양이 마치 “이 적의 묘”라고 하는 듯, 격과 비슷한 입모양을 하면서, 우리가 “누구의 묘요? 그 이름이 뭡니까?”하고 “누구”소리를 몇 번 하자 유흥수 노인은 손으로 방바닥에 천천히 나무목 자(木)를 쓰고 그 오른쪽에 각각 각(各) 자를 써서, 즉 이를 格자, 격을 쓰면서 이포장, 이격 장군의 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52. 그러는 동안 틈만 있으면 송원배 노인은,“저 흥수의 말은 믿지 말라”고 강변하였고, 나는 묘 속에 있는 “그 이포장이 이격이라는 것을 할아버지가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하는 질문을 거듭하였다. 이장도 내 말을 되받아서 유흥수 노인의 귀에 대고 “그 묘가 경주 이씨 이포장, 이격의 묘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유흥수 노인은 우리들에게 시달리며 들볶인 탓인지 혀와 입술이 처음보다는 조금씩 더 알아볼 만큼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들릴까 말까하는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우리에게 밝혀준 내용은 그 경주 이씨 이격 장군의 딸이 자신의 고조 할머니이기 때문에 자기가 모를 수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 고조 할아버지 즉, 이격 장군의 사위가 되는 자기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그 지역의 경주 이씨 가족묘를 관리해왔다는 것이었다.
53. 나는 가지고 온 이벽 선생 족보를 펴서 살펴보았다. 이벽 선생의 형 이격 장군의 딸이 문화 유씨 유명규에게 시집갔다는 기록이 나왔다. 이 유명규가 유흥수 노인의 고조부가 된다는 얘기였다. 다 죽어가는 70노인에게서 내가 들고 온 족보에 기록된 내용과 일치하는 말을 들었을 때 비록 이 벽 선생의 묘를 아직 찾지는 못했어도, 마치 이미 묘를 찾은 듯 기뻤고,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까지 와 있음을 느끼자, 나는 뛸 듯이 기뻤으며, 현장에를 가보자고 재촉했다.
54. 그래서 그 노인에게 약값으로 쓰도록 돈 만원을 드리고 우리는 그 묘가 있는 마을 앞 언덕으로 갔다. 사실 유흥수 노인은 나에게 경주 이씨 이벽 선생가족의 묘군이 있는 곳을 가르쳐 준 후 한 달도 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유흥수 노인이 살던 집은 3년 후에 다 헐리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새마을 주택이 들어서 있다. 그 당시 유흥수 노인은 사위가 죽은 자기 딸의 며느리도 과부가 되어 있었는데, 이 딸의 며느리한테 얹혀서 밥을 얻어먹고 있었다.
55. 나중에 이벽 선생의 묘를 찾아 이장한 후에 내가 그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유흥수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그 마을 노인들의 이야기를 종합한 결과, 이 벽 선생의 묘를 찾아 모시려는 천주교 신부인 나를 만날 때까지 약 3년간 며칠씩 죽었다가 깨어나곤 하기를 수차례 했다는데, 이는 분명히 천상에 계신 이벽 선생께서 내가 도착할 때까지 그 노인의 생명을 연장해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었다.
56. 그날 우리가 약 500미터 떨어진 작은 언덕의 밭둑에 있는 묘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며, 가지고 간 족보에 적혀 있는 묘의 방향을 맞추어 보고 있을 때, 김승호라는 그 일대의 땅 공동묘지 관리인이 나타났다. 그 지역은 함경북도에서 피란해 나온 신창읍 읍민회 공동묘지로 되어 있었고 5만여 평에 달하는 땅을 경주 이씨들로부터 매입하여 신창읍민들의 공동 묘지로 사용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찾아온 묘지 관리인 김승호 씨는 내가 경주 이씨 후손인 줄로 착각하고, 이장공고 시효가 벌써 몇 차례 지났으니, 남아있는 경주 이씨 묘들 약 4, 5기를 빨리 이장해 가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발굴해서 없어져도 자기들은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경주 이씨 후손이 아니라는 점과 천주교 신부라는 점을 밝히고, 지금 찾는 묘가 200년 전 유명한 사람의 묘이므로 이 묘를 찾으면 바로 후손을 찾아 이장해 가겠노라고 대답하였다.
57. 밭둑에 있는 이벽 선생의 묘로 추정한 그 묘 앞에서 나는 기도를 바쳤고, 흐뭇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즉시 오기선 신부님, 박희봉 신부님 류흥렬 박사에게 이벽 선생의 묘를 찾았다는 소식을 전하자 세 분은 뛸 듯이 기뻐하시며 즉시 가보자고 하여 2월 23일 우리는 포천 화현리를 함께 찾았고 묘 앞에서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이격장군과 그 후손들이 살았었다는 큰 조선 개와집 집터를 방문하였으며 그 집은 내가 도착하기 3년 전에 무너져서 허물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집터에서 옛날 조신시대의 돌쩌귀, 문고리, 무쇠 사각못 등을 주어가지고 왔다.
57. 그 후 나는 여러 주교님들에게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이신 광암 이벽선생의 묘를 포천 화현리에서 찾았으며, 이를 이장하여야만 된다는 내용의 편지를 띄었다. 그리고 이벽 선생은 한국 천주교회가 각 교구로 분할되기 전 교회 창립의 주역이시니 모든 주교님들이 함께 이장을 주선하셔야 되겠다는 뜻을 전달하고, 돈이 없던 나는 이장비용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지금 내 기억에 다른 주교님들은 대답도 없으셨고 부산의 최재선 주교님만이 격려 편지와 함께 당시 5만원을 내게 송금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59. 그런데 후손을 찾지 못하면 남의 묘를 함부로 발굴 이장할 수 없었으므로 후손을 찾는 일이 시급한 형편이었다. 그러던 차 다음날 어떤 책장사가 와서 백과사전을 사라고 조르므로 경주 이씨 이벽 선생의 가족이나 종친회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수 없겠느냐고 미친 사람처럼 얘기를 했더니, 그 사람이 서울 약수동 중앙시장에 있는 대창 한약방을 찾아가면 한의사 이종수 씨가 있는데, 그분이 경주 이씨들의 거주지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60. 나는 2월 24일 오후에 바로 약수동 중앙시장에 있는 대창 한약방 이종수씨를 찾아갔다. 서울인데도 골목에 싸리문을 해 달은 안층 행랑채로 기억되는 사랑방에서 한약을 걸고 있었다. 내가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기에 경주 이씨 족보관계로 여쭤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노라 하였더니, 한약을 지으러 온 줄 알고 기뻐하던 그 노인은 별로 좋지 않은 안색을 하며 밖에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내 기억에 무서운 인내를 가지고 약 3시간을 기다렸다. 그 한의사는 손님들을 다 내보낸 후에도 나를 부르지 않았고 저녁을 먹고 나서야 나를 불렀다, 몹시 불쾌하고 화가 났지만 꾹 참으면서 들어갔다. 나는 경주 이씨가 아니고 천주교회의 신부인 변기영 신부이며, 200여 년 전 경주 이씨 중에 아주 저명한 분인 광암 이벽 선생의 묘를 포천 공동묘지에서 발견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어디에 사는 줄을 모르므로, 그 후손들이 어디 사는지 알면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61. 그 한의사는 왜정때 족보를 편찬하면서, 여러 후손들이 족보를 사 가지고 수금이 잘되지 않고 하여 족보관계로 누가 찾아오면 우선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길 뿐더러 매우 부담스러워 하는 처지인 듯하였으며, 내 신분을 알고 난 후에는 너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족보에 나오는 경주 이씨 이 벽, 이격의 후손들은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공근리에 살고 있으니 그곳에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다.
62. 주일을 지내고 나서 2월 21일 화요일, 나는 신장성당 총회장이었던 이원호 교수와 명동성당에서 오랫동안 사진을 찍어온 신봉림씨를 데리고 횡성군 공근면 공근리를 찾아갔다. 눈이 덮인 산골마을을 들어가 보니, 정말 심산궁곡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이벽 선생의 후손들이 서울로 이사간 지 20여년이나 지났다는 것, 그리고 경주 이씨들이 이사간 곳의 주소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실로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떤 천주교 신자 한 사람이 와서 경주 이씨들이 모두 서울로 이사간 것은 아니고, 일부는 횡성군 가담리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63. 그래서 횡성군 가담리를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공근리에서 나왔다. 횡성에서 원주 쪽으로 오다가 첫째 큰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가담리가 보이는데, 길은 좁은 마찻길이었다. 가다보니 어떤 부인이 어린아이를 업고 오바로 들 씌운 다음 다른 작은아이를 손으로 잡고 눈길을 걸어서 앞에 가고 있었는데, 아무리 빵빵 거려도 길을 비켜 주지를 않았다. 그래서 계속해서 클락션을 눌렀더니 그 부인은 비좁은 마찻길의 가장자리로 비키며 유리창으로 나를 들여다보며 하는 말이 “어머, 한국 신부님이네”하였다. 알고 보니 그때까지 횡성 본당은 약 40년 동안 서양 신부님이 맡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신부를 보자 무척 반가운 모양이었다. 그 부인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무척 기뻐서 “신부님 어디에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가담리에요”, “우리 동네에 왜 가세요?” “가담리 사세요?” “그러믄요, 가담리 누구를 찾아가세요?” “그 가담리에 상국씨 상철씨 상만씨, 기형이 덕형이 완형이,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그 부인은 “어머, 우리동네 사람들 이름을 모두 외워가지고 오셨네.”하며 매우 기뻐하였다.
64. 내 차에 그 부인과 애들을 태우고, 가담리에 들어가서 이 상국씨 집을 찾아갔다. 아직 싸리문이었고 문패는 안마루 가운데 기둥에 붙어 있었다. 이상국 씨는 서울에서 사람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마루를 걸어 나왔다. 당시까지 이상국 씨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이 이상국 씨시지요?”하고 묻고 내가 천주교 신부라는 것을 알렸다. 어떻게 자기 이름을 알고 찾아왔느냐고 하길래, “이 상국 선생님의 7대조 조부님 이름을 아십니까?”고 물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하였다. 사실7대조 조부의 이름을 아는이는 드물다.
65. “댁에 족보가 있습니까?” 하였더니, 목침을 놓고 딛고 올라가서 벽장문을 열고 새까맣게 때가 묻은 나무 상자를 꺼내어 족보를 꺼냈다. 나는 갑 3권 33페이지를 보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아니, 남의 족보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선생님이 이상국 씨, 아버지는 성우, 할아버지는 종학, 증조부는 규복, 고조부는 병영씨이고 현고조는 현모, 7대조부가 이벽 선생이 아닙니까?”고 족보를 하나하나 짚으며 알려 주었다. 이상국 씨는 “그렇구먼요”하고 대답하였다. “이벽 선생의 묘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하고 묻자, “모르죠, 저희 4대조 조부께서는 묘가 강원도 땅에 있으나 그 이상 선대의 묘는 어디 있는 지 모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선대에 당쟁으로 인하여 강원도 땅에 낙향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66. 나는 이상국 씨에게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신창읍민 공동 묘지 한 복판에서 이벽 선생의 묘를 찾았다는 것과 이장공고 시효가 지났으므로 묘를 발굴하고 파괴하면 실묘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벽 선생은 한국 천주교회를 창립한 중요한 분이니 묘가 없어지는 것은 후손이나 우리 후대인들이 방관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역설하였다. 이상국 씨는 즉시 모든 것을 알아듣고 조상의 묘를 모르고 있던 후손에게 묘를 찾아주고 알려주고 실묘를 하지 않도록 거들어주시는 것에 감사한다고 예의를 다하여 말하였다.
67. 그러자 성당에 갔던 이상훈 씨(이상국씨의 형)의 부인이 돌아왔다. 나는 그 부인의 안내로 횡성 군청에 양정계장으로 있던 8대종손 이 완형 씨를 만났고 또 성당으로 갔다. 그곳 주임신부님은 부재중이었으므로 주임신부님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뜻밖에도 이벽선생의 천주 공경가와 성교 요지가 얇은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며칠 전에 도착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본당 신부님이 그해 년초부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배워야 한다며 몇 주일 째 이벽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유흥렬 박사의 교회사를 가지고 강의하였는데, 그 이벽 선생이 자신의 7대조 시할아버지가 되시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이상국 씨의 형수 정 율리안나 씨는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였다.
68. 그런데 이상국 씨의 말이 강원도 산골에서는 돈을 만지기가 어려우니, 우선 주먹에 무엇을 쥐고 가야 되므로 우선 장을 좀 본 후에 오는 일요일 (3월 4일)에 신장 성당으로 신부님을 뵈러 가면, 신부님은 자동차를 가지고 계시니, 포천 화현리 7대조 묘에 성묘하도록 해주시겠느냐고 청하였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쾌히 승낙하고 기다리겠노라고 하였다.
69. 1979년 3월 4일 오전에 이상국 씨와 그 아들 이 완형 씨, 이 기형 씨가 신장 성당에 왔고, 미사참례를 한 후에 함께 포천 화현리로 향했다. 의정부쯤에 가서 이상국 씨가 “신부님, 저희는 천주교 신자가 아닙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를 몰라서 “그래서요?” 하고 물었다. “뭣 좀 사 가지고 가서 제사를 올려야 겠는데요.” “좋습니다. 그러시지요.” 의정부에서 북어와 사과 등등을 산 후, 포천군 내촌면 화현5리 신기동 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이상국 씨 등이 미리 적어 가지고 온 제문을 읽으며 제사를 지냈다. 그때 김승호 씨라는 분이 올라왔다. 함경도 신창 읍민회에서는 약 5만평의 땅을 사서 그 일부를 공동묘지로 쓰고 있었는데, 김승호씨는 바로 이 묘지의 관리인이었다. 이상국 씨가 그 동안 묘를 관리해 주어서 고맙다며 약간의 돈을 김승호 씨에게 주었고, 김승호씨는 묘를 빨리 이장해 가라고 하였다.
70.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옛날 양반의 묘이기 때문에 비석이 있을 법도 한데, 비석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니, 왜 비석이 없습니까?” 하고 물의니, 이장의 얘기가 “비석은 해서 뭐합니까?” 하는 것이었다.
“비석이 없으니 이벽선생의 묘인지 이부만 공의 묘인지, 이 묘가 누구의 묘인지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파 보면 알지요! 묘를 파보면 누구의 묘인지 다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묘를 파 가지고 어떻게 압니까?”
“묘를 파보면 묘 속에서 이름이 나오잖아요!”
“묘 속에서 어떻게 이름이 나와요?”
“아 이런 딱한 양반 보게, 이장해 간다면서 그걸 모르세요? 묘를 파면 거기서 지석이 나와요”
“지석이 뭔데요?”
나는 지석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들었던 것이다.
“옛날 묘는 파면, 그 안에 묻힌 사람의 이름을 새긴 흙이나 돌이 나 그릇이 나와요. 그것을 지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이 묘도 파면 나오겠네요?”
“그럼요, 나오지요. 전에 이 부근에 있는 다른 묘들을 팠을 때도 다 나왔어요.”
“그럼 이것도 한 번 파봅시다”
71. 묘를 파보는 날을 언제로 잡을까 의논하다가 4월 11일로 잡았다. 그 날은 그해의 성주간 월요일이었다. 나는 이장에게 사람 아홉 명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못자리를 할 때이고 해서 한 사람 당 4천원씩을 주겠다고 했다(당시 하루 품값은 3천원이었다). 가래와 삽도 준비하고, 쌀 한 말을 담가서 술도 해두라고 부탁했다.
72. 4월 11일 월요일에, 횡성에서 오신 이기형씨와 정 율리안나씨 두 분, 그리고 나와 원호 교수를 비롯한 몇 명이 이벽 선생의 묘를 확인하러 갔는데, 그 동네에서도 이장과 반장 등 꽤 여러 명이 왔기 때문에 현장에는 열 다섯 명 정도가 참가하여, 우리가 한 달 동안 기도하러 다니던, 밭둑에 있는 그 묘를 팠다. 묘의 가운데 부분을 파자 정말 지석이 나왔다. 지석은 흙을 다진 후 한문 글씨를 새긴 후 글씨자리의 흙을 파내고 숯가루를 넣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벽 선생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밀양박씨지묘”라는 여자묘 이름이 나왔다. 모두들 생각도 하지 않던 일인지라 깜짝 놀랐다. 옛날에는 여자들이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지석에도 그냥 “朴氏”, “金氏” 등등, “~氏”라고만 적었고, 남자 묘인 경우에는 지석에 이름이 나오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판 묘는, 남편 묘가 있어서 같이 쓴 것도 아니고 여자 혼자의 묘였던 것이다.
73. 그러자 옆에 있던 송언배 노인이,
“여보 선상님, 그거 보시오, 그 흥수 놈이 3년 전부터 죽으려고 정신이 까물까물하고 며칠씩 죽었다가 깨어나곤 했는데, 그 녀석 말을 왜 믿으시오? 내가 그래도 이 마을에서 16대째 살아오고 수십 년을 훈장 노릇을 한 사람이오, 내가 전주 이씨 묘라고 하지 않았오?”
“그럼, 전주 이씨 지석이 나와야지 왜 밀양 박씨, 여자묘 지석이 나옵니까?”
“전주 이씨가 우리나라 이씨 조선의 왕족이고, 왕족이니까 소실을 많이 두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전주 이씨의 소실 묘이지요. 소실이니까 합장도 못하고 따로 쓰는 거예요”
74. 횡성에서 내려온 이기형씨는(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으므로) 얼굴색이 달라지면서, ‘강원도에서 조용히 잘 살고 있는 우리 후손들에게, 7대조 할아버지 묘가 있다는 둥 해서는, 포천땅 공동묘지까지 와서 여자 묘를 발굴하게 하느냐’며 따졌다(물론 이장 비용은 다 내가 낸 것이었지만). 하여간 나도, 이미 주교님들한테 이벽 선생의 묘를 찾았다고 알려놓은 터인지라 앞이 캄캄했고, 이원호 회장도 특유의 함경도 사투리로 “기거이, 기거이, 참” 하면서 주위를 뺑뺑 돌아다녔다.
75. 그래서 나는 “저 아래 있는 이 격 장군의 묘를 한 번 파봅시다”하며, 언덕 위의 밭둑 옆에 있는, 유흥수 노인이 내게 알려준 이격 장군의 묘를 찾아갔다(이 격 장군의 묘를 알려 준 유흥수 노인은 내게 묘자리를 알려 준 후 바로 돌아가셨다. 그 노인이 나를 만나기 전에 돌아가셨더라면 묘는 영원히 찾지 못했을 것이다). 무덤 가운데를 열자 금방 지석이 나왔는데, 그 지석에는 “청주한씨지묘”라고 쓰여 있었고, 이번에도 또 여자 묘를 판 것이었다. 그러자 이 기형씨는 화가 나서, “천주교 신부님이 사람을 속입니까?” 하였고, 이 원호 총회장은 자기 본당 신부가 개망신을 당하고 있으니까 “신부님, 기거이, 기거이, 참”하고 있었다. 동네의 이장과 반장도 “묘도 모르는 사람이 묘를 찾겠다고 하는구먼”하면서 핀잔을 주었으며, 송언배 노인은 오지도 않았었고, 후손들은 모두 화가 나 있었다. 나로서는 이미 주교님들한테 편지를 띄운 데다가 최재선 주교님은 이장에 쓰라며, 5만원을 보내셨었고, 오기선 신부님은 신자들을 데리고 와서 기도를 하는 등 법석을 떨었는데, 엉뚱한 여자묘지석이 나왔으니, 사기를 친 꼴이 된 것이었다.
76. 그때가 오후 세시쯤이었다. 그곳에는 고총이 여러 개가 있었는데, 나는 이 석 장군의 묘와 방향이 맞는 묘를 파보자고 하였다. 모두들 파나마나 라고 했지만 “품값은 내가 주는 것이니, 갑시다.”하면서, 그곳에서 4,500미터 위쪽 언덕에 이석 장군 묘로 알려진 곳에 올라왔다. 역시 이 묘에도 비석은 없었다. 왜 비석들을 세우지 않느냐고 묻자, 이장과 노인들의 말이, 옛날에는 정변이 일어나면 묘를 다 파버렸기 때문에 알리지 않기 위해서, 상돌만 있지, 비석은 파묻거나 깨뜨려 버린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 묘에 간 나는 묘를 파기 전에, 성모님께 정말로 간절히 기도를 했다. “성모님, 묘속에서 다른 지석이 나오더라도 기적으로 바꾸어서 망신 좀 당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앞으로 다른 일로 망신을 당하는 것은 괜찮지만, ‘변신부가 순교 선조들의 묘를 찾는다고 설치다가, 허탕치고 사기를 쳤다.’고 망신을 당하게 되면, 내 후배들이 다시는 순교 선조들을 위한 일을 하지 않을 테니 이런 망신은 당하지 말게 해주십시오.” 하면서 진짜로 열심히 기도를 드렸다.
77. 고총 위에 자란 굵은 소나무를 베어버린 후 묘를 파자 지석이 나왔다. 거기에는 “總府副將慶州李公晳之墓巽坐”라고 쓰여 있었다. 지석은 조선 강회로 네모 반듯하게 단단하게 만들고 그 위에 한문으로 글씨를 쓴 다음, 글씨를 파내어 그 자리를 숯가루로 메꾼 것이었다.
78. 시간은 벌써 오후 4시쯤 되었고, 나는 성주간 월요일 예절 때문에 신장으로 빨리 돌아와야 했으므로 후손 중의 한 사람인 이 상만 씨에게 묘를 또 하나 파보고 내일 와서 얘기를 해달라고 일렀다. “ 고총이 이 부근에 일곱 개나 있고, 이벽 선생의 동생 묘가 나왔으니 분명히 이벽 선생의 묘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 자동차(당시 250만원 짜리 포니였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2천만원 정도 된다)를 팔아서라도 비용을 댈 테니 고총을 다 파봅시다” 이석 장군의 묘가 확인되자 용기나 난 것이다.
79. 신장에 돌아온 나는 성주간 월요일 미사를 드렸고, 이튿날, 전날 발굴하라고 지시란 고총에 대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 상만 씨 등 후손들이 왔다.
“신부님, 나왔어요.”
“뭐가 나왔어요?”
“<이벽>이라는 이름이 나오긴 했는데, 앞에 ‘通德郞’이라는 말이 붙어서 “通德郞慶州李檗之墓”라고 쓰여 있어요. ‘通德郞’이 뭡니까?”
“通德郞이요? 글세, 나도 잘 모르겠는데요.”
80. 족보에 보니까 通德郞이라는 벼슬을 했다고 나왔다. 나중에 유홍렬 박사의 말을 들어보니, 通德郞이란 先代에 벼슬을 한 이가 있을 때, 그 후손들에게 그냥 내려주던 것이란다. 나는 바로 포천으로 가서 갓등산 꼭대기에 있는 묘를 파보았는데, 조선 강회를 네모반듯하게 다지고 글씨를 새겨 바짝 말린 후에, 글씨를 파내어서 그 자리를 숯가루로 메꾼 지석이 나왔다. 거기에는 “通德郞慶州李檗之墓”라고 쓰여 있었다. 네 번째로 판 묘에서 나온 것이다.
81. 4월 20일 경에 김남수 주교님, 오기선 신부님, 유홍렬 박사, 이기형 씨 등이 지석 확인을 하기 위해서 그곳에 또 갔었고, 4월 18일에는 혜화동에 모여서 이벽 선생 묘 이장 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장은 김남수 주교님, 부위원장은 박희봉 신부님과 이상국씨에게 맡아 달라고 부탁하고 나는 자칭 총무를 하기로 하였다. 유홍렬 박사와 오기선 신부님과 최석우 신부님께는 전화로 고문을 해주실 것을 청했더니 모두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후손들인 이상만 씨, 이상철 씨 등은 이장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때 마침 김대건 신부님의 전기를 쓰신 김구정씨가 대구에서 올라오셔서, 대구교구 대표로 이장위원으로 참석시켰다.
82. 문제는 移葬地를 어디로 할 것인 지였다. 박희봉 신부님께서는 이벽선생의 묘를 서울 절두산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셨는데, 서울에 모셔야 신자들이 자주 참배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나는, 이벽 선생은 천진암 강학회에서 한국 교회를 시작하신 분이니 천진암으로 모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이 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었는데, 대구에서 갑자기 대구에서 오신 김구정 노인이 화를 내면서,
“ 이벽 선생의 묘를 절두산으로 모신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천진암으로 모셔야지요. 이벽 선생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절두산에 왜 모십니까? 그것은 안됩니다.”
83. 그래서 박희봉 신부님이 좀 수그러드셨다. 만약에 수그러드시지 않으면, 나는 ‘묘를 찾은 사람은 나니까, 내 마음대로 할 테다’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또 김구정씨가 오시기 직전에 후손들에게 물어보았을 때 이상국 씨와 이상만 씨 등이, “우리는 변신부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저희가 변신부님 덕택에 조상의 묘를 찾았는데, 우리가 무슨 낯으로 어디로 모시라고 말씀드리겠습니까? 저희는 변신부님 말씀만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했고, 김구정씨가 강력하게 말한 덕택에, 결국 천진암 성지로 모시기로 확정이 되었다. 대신 박희봉 신부님께서, 앞으로 이장하게 되면, 이벽 선생의 시신을 당신이 계신 혜화동 성당에서 하룻밤 묵으시게 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84. 移葬日은 현충일인 6월 6일로 정했는데, 잘 실행되지 못했다. 그해 5월 3일에는 서울교구와 수원교구가 공동으로 최초의 천진암 행사를 주최하여, 옛날의 광주군에 속했던 서울과 수원의 본당신부들, 즉, 천호동의 김병일 신부님, 돌아가신 청담동의 최창정 신부님, 논현동에 계셨던 것으로 기억되는 김덕재 신부님, 그리고 경안 성당의 유진선 신부님 등 모여서 [순교자 현양대회]라는 타이틀로 남한산성에서 거행하였는데 사실은 이름만 두 교구의 공동주최이지 실무는 신장성당에 있던 내가 주로 주선하고 주관하였다.
85. 당시에는 천진암에 오는 교통사정이 나빠서 차가 들어올 수가 없었기 때문에 행사장소를 남한산성으로 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6월 6일에 이벽 선생 묘를 이장하려고 했던 것인데, 돈도 없는데다가 준비가 되지를 않았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86. 6월 8일 10시에 혜화동 성당에서 다시 이장위원회가 열렸는데, 그때 김구정씨가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그리고 신봉림 씨(명동성당 정문 앞에서 사진관을 하고 있는 사람), 유홍렬 박사 등도 참석하였다. 移葬日을 6월 14일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돈도 없는데다가 준비도 될 것 같지가 않아서 6월 24일로 하기로 하였다. 그 날은 이벽 선생의 본명인 요한세자의 축일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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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세례자 요한 이벽,
베드로 이승훈,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권일신,
암브로시오 권철신,
복자 아우구스티노 정약종
약전
Msgr. Byon 2017-05-10 / 조회 680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5.16 광장에서 거행된 한국순교복자 103위의 시성식 광경. 당시 언론과 보도기관에서는 100만여명으로 보도하였으나, 필자(Rev. Peter Byon)는 55만명~60여만명으로, 내한한 성청 인사들에게 보고 하였었다.(Sua Santita Giovanni Paolo II aveva concelebrato la messa per la canonizzazione dei 103 Beati martiri coreani, con molti Cardinali, Arcivescovi, Vescovi, sacerdoti e fedeli cattolici - circa 500.000 - a Seoul il 6 maggio 1984. Per quella canonizazione, il Rev. Byon, rettore di Chon Jin Am, il luogo natale della Chiesa, aveva servito per 5 anni (1980~1984) come segretario esecutivo generale della commissione episcopale per la canonizzazione dei 103 Beati Martiri coreani.>(Photos by Baeck-Nam-Shick).
Canonizzazione dei 103 Beati martiri coreani in Seoul 1984 !
-새로 다시 쓰며 읽어 보는 -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5위,
평신도 순교자들의 자발적인 신앙사 약전
하느님의 종, 세례자 요한 이벽, 베드로 이승훈,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권일신, 암브로시오 권철신,
복자 아우구스티노 정약종
2012년 11월 18일 / 2013년 7월 15일 수정 일부 보완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장 겸 천진암박물관장 변기영 몬시뇰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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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다시 쓰며 읽어 보는 -
韓國天主敎會 創立聖祖 五位
平信徒 殉敎者들의 自發的인 信仰史 略傳
Ioannes Baptista李檗(1754~1785)
Petrus李承薰(1756~1801)
Franciscus Xaverius權日身(1742~1792)
Ambrosius權哲身(1736~1801)
Augustinus丁若鍾(1760~1801)
2012 년 11월 18일
韓國天主敎會 發祥地 天眞菴 聖地
韓國天主敎會創立史硏究院 / 天眞菴博物館
- 새로 다시 써서 읽어 보는 -
배달겨레의 天主 信仰史와 한국천주교회 創立史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5위 평신도 순교자들의 자발적인 신앙사 약전>
들어가는 말
1. 복자, 교황 요한바오로 2세께서는 1984년 봄 한국을 방문하시어, 5월 6일에 서울에서 103위 한국 순교복자들을 시성하셨고, 같은 해 10월 14일 주일에는 로마 사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한국 순교 성인 103위 첫 번째 축일 대미사 강론을 통하여, "한국인들은 선교사가 한국에 오기 전에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신앙을 실천하여 교회를 세웠으니, 이는 세계 교회사에 유일한 경우"라고 말씀하신 후, 한국의 저 평신도들을,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로 여겨야 한다고 언명하셨다.
2. 그 후 1989년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시어 국제 성체대회를 집전하시고 가신 후, 1993년 9월 21일, 천진암 성지 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정초식에 당시 주한 교황대사 죤 블라이티스 대주교를 통하여 보내주신 교황 공식 문헌의 머릿돌 교황 강복문에서, ‘천진암 성지를 한국천주교회 탄생지(발상지)’라고 언명하셨다. 그런데 전 세계에 순교 성지는 많지만, 천주교회 발상지가 있는 나라는, 베들레헴 성지가 있는 이스라엘과, 천진암 성지가 있는 대한민국, 두 나라 뿐이다. 天上으로부터 천주 성자의 강생으로 인류구원의 천주교회가 시작된 聖地 이스라엘과, 이와는 달리, 우리나라는 地上에서, 한국인들이 천주교 신자가 되기 전에 非信者들의 신분으로, 마치 동방박사들처럼, 자발적으로 진리의 빛을 찾아 천주교회를 연구하여 알고 신봉하기 시작하였다.
3. 한국 천주교회의 자발적인 이 특이한 교회 창립사와 신앙정신은 오늘날에까지 계승되어, 한국 교회 발전의 뿌리와 줄기와 힘이 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천주교회의 품 안에 들어와,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우리나라 천주교회 발전을 위해서뿐 아니라, 전 세계 교회의 발전에도 힘껏 이바지하기 위하여, 그 옛날의 한국처럼, 아직 복음이 충분히 보급되지 않은 나라의 비신자 형제들을 위하여, 한국천주교회 창립사를 바르게 알고 지키며 가꾸어 나가야 하며, 또한 이 은총의 교회역사를 온 세계 만민들에게 알려서, 저들에게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이 본보기가 되도록 힘써야 하겠다.
4. 세계 만민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섭리가 우리 한민족을 천주의 진리로 비추어 주시고, 구원의 교회로 인도하여 주신, 그 기묘한 내력을 우리 모두가 보다 폭넓고 깊히 있게 이해하며, 하느님께서 우리 선조들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리고, 또 나아가 우리 신앙선조들의 그 정신과 덕행과 교훈과 모범을 본받아, 우리 모두가 신앙의 선조들을 닮아가며 몸받기 위하여, 간결하게나마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5위 평신도 순교자 신앙인들의 약사를 추려서 함께 알아보고자 한다.
5.그런데 한국천주교회의 기묘한 창립이 우연히, 갑자기 돌출된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으로, 머나먼 옛날부터 하느님께서 우리 선조들에게 베풀어주신 종교적 자질과 신앙문화의 터전을 되돌아보므로 인하여, 진리의 움을 틔우고, 신앙의 싹이 돋아 자라게 한, 우리 민족의 정신적 바탕을 먼저 이해하고 염두에 두면서,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창립사를 읽어야만 우리가 이를 보다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6. 세계 모든 민족들이 선사시대부터 모두 각기 자기들 나름의 종교적 문화나 관습을 가지고 있었듯이, 우리겨레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우리 겨레가 머나먼 옛날부터 다른 민족들의 종교 신앙사와 좀 다르다고 할만한 독특하고 월등한 종교적 대상을 신앙하는, 천주 사상을 가지고 살아나온 흔적과 체취가 한국 상고사를 연구한 비신자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이미 많이 밝혀져 왔고, 또 오늘에까지 우리의 생활과 정신문화 속에 전승되고 있어서, 이를 먼저 이해하기 위하여, 아주 간결하게라도 우리 겨레의 내력을 살펴보고 들어가기로 하자.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일반 신도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들은 되도록 줄이고, 아직까지 많은 이들이 자세히 모르고 있던 200여년 전의 우리 문화 관습과 여러 가지 사정을 되도록 해설하여 보태고자 하였다.
1. 한민족(韓民族)의 유래와 天主恭敬 사상(思想)의 내력(來歷)
7. 우리 배달겨레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와 우리 민족 천주공경 사상의 내력을 먼저 살펴보면, 하느님은 우리 배달겨레에게 천주신앙의 정신적인 남다른 자질을 특은으로 주셨으니, 우리겨레는 예로부터 자신들을, 밝은 겨레, 배달겨레, 밝달 민족, 빛의 아들들, 힌옷을 즐겨 입는 민족, 白衣民族, 天神族, 혹은 天孫族. 등으로 부르면서, 자신들은, ‘하느님의 겨레’로 알고, 믿고, 하느님께 天祭를 올리며 살아왔다. 그리하여 먼 옛날부터 늘 하느님을 최고의 유일신으로 위하며 모시고 살아왔고, 또 하느님께서는 우리겨레와 늘 함께 계신다는 신념을 가졌으며, 늘 우리겨레를 보살펴주신다는 굳은 신앙을 가지고, 기도하고 제사를 올리며 오늘날까지 오랜 세월을 살아 내려왔으니, 사실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의 겨레’다.
8. 이러한 신념은 신구약 성경의 말씀이며 가르침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아들들아, 너희는 주님께 영광과 권능을 바치거라"(시편 28장). 베드로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을 시작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읍니다"(사도행전 10장 34절)
9. 일찌기 먼 옛날, 우리겨레는 세계의 지붕이라고 부르는 파미르 고원과 우랄알타이 산맥과 天山 산맥이 걸쳐 있고 天池라고 부르는 호수가 있고, 만년설이 덮혀있는 높고 크고 신비스러운 여러 대소 산맥 봉우리들 중에, 한문자(漢文字)가 생겨서 표기되기 그 이전부터 오랜 세월을 두고 그 지역 사람들이 불러왔고, 지금도 부르고 있는, 배달봉(倍達峰), 박달봉(博達峰), 박격달봉(博格達峰), 등으로 불리는 天山 산맥 자락에서 살던 부족이었다. 그래서 자기 부족들의 이름을 배달산 부족, 박달 종족, 등으로 불렀으니, 이는 우리나라 姓氏들의 本貫과 같다. 배달, 박달, 등의 뜻은, 밝은, 빛이 있는, 하얀, 등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여러 부족들 중에서 배달봉 아래 살던 이 부족들은 먼 옛날 해 돋는 나라 동쪽을 향하여 반만년이상 일만년 내외의 오랜 세월을 두고 이곳 한반도까지 민족이동을 하여 왔다. 그 걸어온 길을 따라, 조상들의 무덤을 찾는 후손들의 효성과 종교적인 발걸음이 가고 오던 길은, 훗날 ‘비단길’ 즉, silk road 라는 생존과 상업의 무역로가 되었으니, 지금의 베드로 대성당이 있는 로마의 공동묘지 바티칸과 라인강 가의 숲속이었던 꾈른 대성당 지역과, 갈대 숲이 우거졌던 뉴욕의 성 패트릭 대성당을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우리나라 서울의 명동역시, 명동대성당(옛날 이름은 鐘峴聖堂)이 들어서기 전에는 한양성의 南山 자락, 서울의 남산골 변두리 였었다. 종교적 시설물이 자리잡으면, 선천적으로 종교심을 타고난 우리겨레는 자주 찾으며 모이게 되기 마련이다.
10. 지금 한반도 각처에서 발견되는 고인돌과 구석기(舊石器), 신석기(新石器), 청동기(靑銅器) 시대 유적을 보면 적어도 1만 5천년 전 후부터 이미 이 곳에는 불을 피우며 석기(石器)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단체로 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겨례가 오랜 세월 살고 있는 이땅에서 태고(太古) 적에 지구상에 처음 발생한, 발원지는 아니니, 우리 한반도가 몽고족에 속하는 우리겨레의 발원지가 아니라는 사실에는 모든 학자들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디에선가 이리로 이동하여 온 것은 분명하므로, 우리 민족의 상고사(上古史)가 밝혀주는 문화 흔적들을 되짚어 아시아 대륙을 동에서 서로 횡단하며 찾아가다 보면, 우리 겨레는 먼 옛날 지금의 천산산맥(天山山脈) 자락에서 살다가 아시아 대륙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면서 오랜 세월을 두고 이리로 이동하여 온 것이 확실하다.
11. 지형상으로도 세계의 지붕이라고 부르며 古代 인류의 발상지로 여기는 파미르 공원과 천산 산맥에서 보면 西北쪽은 모두 우랄산맥과 알타이 산맥, 남쪽은 곤륜산맥과 히말라야 산맥, 북쪽은 천산산맥과 태산준령, 등으로 파밀 고원에 연결되어 막혀 있으나, 동쪽으로만은 중국의 한 복판을 西에서 東으로 가로 트여 있다. 마치 原始 인류의 조상들이 동쪽으로 해돋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라는 지형적 알림과 안내와도 같이.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황하문명의 평야지대를 관통하며 한반도에까지 이르도록, 험산준령으로 좀 덜 막혀 있고, 드넓게 극동까지 열려 있는 아시아 대륙을 관통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12. 홍산문화(紅山文化)라고도 부르며, 근대에 와서 활발히 발굴 확인되고 있는 오늘의 中國과 북쪽 내몽고 지역 赤峰山 주변의 上古時代 紅山文明이나, 요동 지역의 遼河文明은 나일강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에집트 문명이나 유프라테스 강가의 페르시아 문화보다 수천년이 훨씬 앞서며 오래동안 꽃피웠던 上古時代 文明으로서, 모두 오랜 세월 중국 漢字語 기록에서 東夷族으로 부르며 기록되어온, 우리 배달겨레 韓民族이 극동의 한반도에 오기 전에 이룩하였던 문명의 발자취들이었다. 칼과 활같은 兵器로 발달한 문명이 아니라, 천주신앙으로, 天祭敎 문화를 이룩한 天孫族들의 평화롭고 거룩한 문명이었다. 天帝 공경의 정신으로 해돋는 나라, 빛고을을 향하여 꾸준히 수천년에 걸쳐 서서히 이동하며 大同思想으로 마을을 이루고, 나라를 세우며, 꽃피운 문화 민족의 이동이었다.
13. 다만 우리겨례의 민족이동 이유는, 주로 사냥을 하며 살던 先史時代부터 수렵하기 쉬운 곳을 찾아 나선 경제적인 목적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른 민족들이 사는 곳을 점령하고 정복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도 아니었으며, 오로지 하늘에 떠서 지나가는 해를, 하느님의 얼굴,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으로 믿고, 모시고, 섬기며, 햇님이 거하며 다스리는 저 높은 하늘도 우러러 위하면서, 날마다 해가 떠오르는 동쪽으로 가면, 햇님의 나라, 맑고 밝은 ‘빛의 나라’, ‘빛 고을’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4. 우리 민족이 수 천년 내지 일만년 이상에 걸쳐 아시아 대륙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면서, 깊고 넓은 많은 강물을 건느며, 높고 다소 험준한 큰 산맥들을 넘고 돌면서, 마을과 고을을 이루고, 크고 작은 부족 국가와 나라를 세우면서, 수십년 수백년씩 부족의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며, 민족이동을 하여 왔음을 되새겨볼 때,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출발하여(출애급기), 사하라 사막과 홍해를 건느고 시나이 산맥을 돌면서 약 40여년에 걸쳐 지금의 예루살렘 지역으로 돌아왔던 사실은, 한민족이 줄잡아도 고조선 건국 이전 5천여년에 걸쳐이어온 悠久한 민족이동에 비할 바가 아니다.
15. 따라서 우리 겨레는 밝은 빛을 숭상하며, 흰옷을 즐겨 입던 겨레였다. 저 멀리 만년설로 덮여 있던 선조들의 고향 천산 산맥을 뒤로하며 떠나온 우리겨레는 부족의 경사나 큰 날에는 자기네 종족을 표시하는 흰옷을 입었으며, 부모님들의 장례 때도 모두 힌 옷을 입어, 최근에까지 이를 소복(素服)한다고 하였다. 1919년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서거하였을 때는 온 나라의 2천만 동포들이 몇 달 동안 모두가 힌옷으로 소복하였으므로, 온 나라가, 특히 서울 장안은 힌옷 입은 사람들의 물결이 차고 넘치듯 하여, 당시 서양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古代 중국의 史記에서까지 종종 우리겨레를 白衣民族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16, 또한 마을마다 거의가 다 흔히 작고 큰 거룩한 동산을 등지고 살면서, 山을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로 여기며, 山들을 신성한 곳으로 믿고, 조상이 죽으면 쉽게 하늘에 오르도록 산에다 묘를 쓰기도 하였다. 한국학의 선구자들, 특히 아시조선(兒時朝鮮), 등을 저술한 육당 최남선(1890~1957) 선생을 비롯한 조선 考古學의 선구자들은 우리겨레의 上古史에 관하여 연구하고 나서, 우리겨례의 선조들은 자신들을 天神族으로 神聖視하는 믿음이 있었음을 거룩한 史話로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17. 그리하여 지금부터 대략 적어도 일 만년을 전후하여 우리 선조들은 자신들을 밝은 겨레, 배달겨레, 빛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며, 빛의 나라, 빛 고을을 찾아서 극동지방과 지금의 한반도에까지 오게 되었고, 자기들이 자리잡는 마을 이름도 빛고을(광주:光州), 별고을(성주:星州), 볕고을(양성:陽城), 밝은 고을(명주:明州), 흰 고을(백성:白城), 맑은 고을(청주:淸州), 빛나는 고을(화성:華城),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를 즐겨하였으며, 자기네 고을 주변에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거룩한 산이 있어서, 힌 뫼, 밝은 뫼, 등을 뜻하는, 白頭山, 長白山, 太白山, 小白山, 白山, 白石山, 등으로 불렀으니, 만년설이 없고, 힌 돌이나 힌 바위가 없는 남부지방의 名山들 중에도 白山으로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는 한마디로 고대인들의 언어 표현으로는, ‘聖山’이라는 뜻이다.
18. 따라서 선사시대부터 다른 민족들처럼, 우리겨레도 부족에 따라서는 호랑이, 곰, 독수리 같은 동물을 위하는 지파들도 있었지만, 산이나 강, 바다나 별, 달이나 해나 하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부족들이 많았고, 특히 해(日)와 하늘(天)에 대한 정성은 큰 나무나 동물이나 지상의 산이나 강물 공경과는 한 차원 높은 부족 신앙의 대상으로서 至高至上의 신적 존재로 받들었다. 특별히 햇님은 선사인들에게 가장 고마운 신비의 존재였으니, 선사인들이 날마다 겪으며 가장 두려워하는 밤의 어두움을 매일 아침 사라지게 하며, 온 누리를 밝혀주고, 겨울철 추위 속에서도 따뜻한 햇살을 내려주는 햇님은 쌓인 눈과 어름을 녹이며 새 봄을 주는 신적인 존재로 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남향동문을 가장 좋은 집터로 여기고 있는 것은 햇님을 숭상하는 정신에서 기인한 것이다.
19.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렵생활을 위주로 하던 우리겨레가 농경문화로 서서히 생활을 바꾸면서, 일조량이 많아 농사하기에 더 적합한, 따뜻한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정착하면서, 하느님을 공경하는 그 정신은 더욱 정리되고 발전되어, 거룩하고 아름답게, 특히 순수하고 소박하고 진솔하고 경건하게 계승되고 발전되어 내려왔으며, 수렵에 주로 의존하던 생활에서 가내 목축업으로 발전시키고, 마침내 농경문화로까지 정착하면서는, 간장, 된장, 김장 김치, 같은 발효식품 발명 등으로 급속도로 부족별 발전을 이룩하였다.
20. 아시아 대륙의 내륙에서는 주로 귀한 돌 소금,석염에 의존하다가 3면이 바다로 되어 있는 한반도에 이르러서는 천일염 개발이 수월하였고, 풍성한 농산물과 각가지 광물자원 발견과 활용으로 상공업의 발전도 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갈래의 크고 작은 부족국가를 이루면서 같은 종족 간의 충돌로 적지 않았지만, 종교적인 신앙면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하고 일맥상통하는 특징이 있었으니, 마침내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天主님을 공경하는 천제교(天祭敎) 종교신앙 생활시대의 문화를 다같이 꽃피우게 하였다.
21. 그리하여 지금부터 약 반만년 전쯤, 단군조선 시대를 전후하여서는 하늘 공경과 어른 공경, 족장 공경이나 나라님 공경이 어느 정도 제도화되고 풍습화할 정도로 발달하여, 하늘에 제사 드리는 예식이 극동의 한민족 거주지에서는 지역을 따라 여기저기 찬란하게 발전하였다. 특히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관습은 보편적이며 오랜 전통으로 이어오던 신앙으로서, 우리겨레의 자연스럽고 순수하며 진솔한 한울님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고, 현대에 와서까지도,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하는 민족신앙이 애국가에서도 불려지고 있듯이, 우리겨레의 마음 속에는 늘 하느님의 얼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국가 건립과 계승의 근거를 하느님께 두어, 古朝鮮과 三韓時代를 전후하여서는 지역마다 시대마다 명칭과 형식만이 조금씩 다르던 동일한 의미의 天祭敎 문화의 경축일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음력 10월에 있었는데, 근대에 와서 열강들의 침략이 극심해지자, 開天節 이라는 명절로 통일하여, 민족기원의 최대 기념일로 제정하고 지금까지 경축하고 있다.
22. 이렇게 우리겨레는 선사시대부터 반만년 전, 유사이래로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하느님 공경에 특별한 정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렵생활 시대에서나 농경생활 시대에서나 지역마다 대소간의 부족 국가를 세우면서도, 하느님 공경에 있어서만은 거의 대동소이한 방법과 정도였지만, 공통된 특별한 정성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민족의 이러한 종교 정신과 문화는 지금까지도 온 국민의 마음과 생활 속에 깃들어 있으니, 예를 들어, 매년 음력 10월 3일에 경축하는 개천절, 즉, ‘하늘이 열린 날', '하늘을 열은 날’은 그 의미와 성격이 다른 나라나 다른 민족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축일이다.
23. 지금은 태양력을 따르지만,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최근까지도 본래의 전통을 따라 음력으로 10월 3일을 개천절로 지내었다. 이는 음력 8월 15일 한가위,추석과 음력 1월 1일 설날을 지금도 음력으로 지내고 있듯이, 개천절도 음력으로 따져서 지내는 것이 역사와 전통문화 계승 발전에 더 합당하다고 하겠다. 이스라엘 민족과 2천년의 역사를 가진 천주교회에서 예수부활 대축일을 태양력으로 일정한 날에 기념하지 않고, 음력을 따라 매년 다른 이동축일로 지내고 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24.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개천절이 들어 있는 음력 10월에는 매년 마을마다 고을마다 대동소이하게 함께 마련하고 함께 참여하여 올리는 천제를 올리면서, 대대로 전해 오는 조상님들의 묘를 찾아 성묘하며 時祭를 올리므로, 10월은 모든 달 중에 가장 먼저 위에 두는 크고 ‘높은 달’, 즉, ‘上月’, ‘상달’이라 부르며, 하느님 공경과 조상님 공경에만 집중하는 ‘聖月’로 지내었으니, 마치, 오늘날 우리 천주교회의 5월, 성모 성월이나, 한국교회의 9월, 순교자 성월, 사순절이나 대림절처럼, 이슬람의 라마단 기간과도 유사하게, 특별한 신심과 정성의 달이 음력 10월이었다.
25, 심지어, 1950년 6. 25 사변 전까지만 해도, 구걸하는 걸인들의 각설이 타령에는, “10월이라 상달이니, 상제(上帝)님께 제사하세. 10월이라 상달이니, 조상님께 제사하세” 라는 내용의 노래 귀절이 있어서, 아무리 흉년이 들고, 살기가 어려워도, 마을마다 고을마다 상제 하느님께 제사하고, 자자손손 집집마다 조상님께 제사하라는 걸인들의 교훈적 외침이었다. 그래야 제사에 바쳤던 떡이나 술이나 고기를 걸인들도 좀 얻어 먹고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애국가에서 부르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말과 개천절의 내력은 적어도 반만년 이상 오래된, 우리 민족의 천주 사상과 정성을 밝히 전승해 주고 있는 민족 정신문화의 거룩한 유산이다.
26, 따라서 우리나라에는 아주 멀고 먼 옛날 고대로부터 지역마다 시대마다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종교가 적지 않았었는데, 대부분이 하느님 공경 정신을 터전으로, 바탕으로, 윤리적 근거로 하고 있으며, 불교나 도교나 유교나 천주교나 기독교 같은 외래 종교들까지도 우리 민족이 쉽게 이해하고 수용하여 보완하면서 우리 것처럼 지키고 아끼고 가꾸기 위하여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까지 바쳐가며 발전시킬 수 있었던 이유도, 우리 민족은 모든 종교가 지닌 행선피악과 상선벌악의 공통점을 이미 알고 있고, 믿고 있었기에, 이에 공감하며 실천할 수 있는 토대가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종교적 정신문화 속에 선천적으로 뿌리내려져 성장하여 왔기 때문이다.
27, 그러므로, 한국천주교회가 다른 나라들처럼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 선조들이 자발적으로 천주교회를 창립하는데 가장 지대한 영향을 주어 가능하게 하였던 요인과 바탕은 바로 우리 민족의 선천적인 종교적 자질을, 마치 하느님이 미리 마련해 주신 역사적인 터전처럼 결정적 요소가 되었음을 인정해야 하며, 그 외의 학업이나 생업 같은 조건은 시대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일시적인 성격을 띤 時事的이 부수적 조건으로 보아야 한다. 한마디로, 한국천주교회의 기묘한 창립사는 갑자기, 우연히, 한 때, 우발적으로 돌출된 사건이 아니라, 먼 옛날부터 준비되어 온(remota praeparatio) 요인들을 바탕으로 하여, 합당하고 적절한 계기를 당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28. 예를 들어,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정약종 등, 우리 신앙 선조들이 당시 사회의 관습대로, 소년시절부터 千字文으로부터 시작하여 사서삼경, 등 유학을 배웠는데, 그렇다고 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유학자들이 세웠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부족하고 잘못된 부당한 표현이다. 사실 당시 유학자들은 처음 출발하는 천주교회를 극심하고 잔인하게 박해하였을 뿐이다.
29. 선사시대로부터 유사이래로, 삼국시대와 조선시대 뿐 아니라 현대에 와서도 적지 않은 신흥 민족 종교가 탄생하였는데, 이 역시 어느 특정 종교나 특정 학문의 영향이라기보다도, 한민족의 선천적인 종교적 자질과 역량을 터전으로 삼아, 적절한 계기가 주어지면 새 종교들이 적지 않게 탄생하여 내려온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회 외에도 유학이 들어오기 전 우리 고대 사회나, 혹은 유학을 수학하지 않은 후대 일부 지역에서도 여러 가지 토착적인 종교가 출발하였었는데, 모두가 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이었으니, 유학자들이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민족은 토속적인 고유한 여러가지 종교들을 자생시키는 종교적 바탕을 선척적으로 타고 났다는 사실을 참고삼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산업화와 과학과 경제의 발전으로 유롭의 여러나라에서는 탈교회 현상이 심각한 편인데 반하여, 한국에서는 경제발전에 정비례하여 종교도 발전하고 있음은 우리겨례의 선천적인 종교적 자질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0. 弘益人間 정신을 비롯한 우리겨례의 정신문화는 우라겨레의 여러 가지 民族宗敎의 출발과 발전의 터전이 되고, 근거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건국과 국가발전의 힘이 되었으니, 대륙 세력과 해양세력의 끊임없는 침공을 당하면서도, 지금 이처럼 위대한 대한민국을 세워 세계적인 힘있는 큰 나라로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우리겨레의 역사와 철학이 민족종교 탄생과 발전의 원천이 되었음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외래 종교들을 수용하고 소화하며 융합하여 우리것으로 발전시키는 역량도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사에서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사실이다. 사실, 새로운 외래 종교에 대한 박해는 조금 먼저 들어온 외래종교나 철학 사상에 의해서 여러 가지 계기로 일어난 所致였다. 현대사에 있어 100여년간(1785~1885)에 걸친 천주교 박해도 주로 儒林들에 의해서 저질러졌으며, 특히 2차대전 후(1945~1955) 150여명의 천주교 성직자들이 처형된 것도 소련의 영향으로 유물론과 무신론 공산주의 사상에 의해서였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고유한 정신문화는 종교와 사상을 초월하는 愛國愛族의 역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31. 또한 우리 민족은 대부분의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행선피악의 정신을 선천적인 천주 사상으로 폭넓게 수용하고 종합하여, 이미 반만년 전에는 대부족국가로 통합하던 단군조선을 세울 때,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치도의를 건국이념으로 삼았는데, 이는 경천애인의 天主 공경 사상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천주 신앙의 터전 위에서, 계시의 씨앗이 어렵지 않게 진리의 움을 티우고, 신앙의 싹이 돋아나게 하여,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로 성장, 발전하기까지, 이와 관련된 중요 인물과 장소와 역사적 사건들을 우선 몇가지 만이라도 추려서, 간결하게 요약하여 되돌아 보고자 한다.
3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한국에 오셔서, 1839년과 1846년 2차례 박해 중에 순교한 103위 순교복자들을 시성하였다. 그러나 사실, 1839년 이전에 이미 조선에서는, 1785년 을사년 박해, 1791년 신해년 박해, 1795년 을묘년 박해, 1801년 신유년 박해, 1815년 을해년 박해, 1827년 정해년 박해, 이렇게 6 차례에 걸쳐 큰 박해가 전국 각처에서 있었다. 수 많은 한국신자들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오기도 전에 그리스도교 구원의 진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였고, 이 새로운 종교를 전파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던 상황에서, 특히 다섯 분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은 열정적으로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웠고, 마침내는 자신들의 생명까지 천주와 교회를 위하여 용감하게 영웅적으로 봉헌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피로써 증거하였다. 한마디로 배달겨례 스스로 싹틔운 교회가 피를 뿌리며 자라났으며, 목숨을 바치며 살아나온 것이다. 이 거룩한 하느님의 역사가 지금까지 역사 자료 소실와 연구미비로 일부 잘못 전하여 왔음을 조금이라도 바로 잡아 온 세계에 알리고, 후대인들에게 전해야만 하겠다.
33. 따라서 거의 한 세기(1785-1885)에 걸쳐 있었던 한국천주교회의 참혹한 박해의 최초 시발점으로서 그 뿌리와 줄기가 되는 것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5위 평신도 순교자들의 자발적인 신앙사였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위대한 신앙선조들의 생애와 정신과 덕행과 업적과 교훈을 간결히 추려서 이하에서 알아보는데 있어서, 그동안 거듭되던 박해로 인하여 역사 자료 보전이나 전승이 극난하여 잘못 알려진 부분들을 바로잡고,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소간의 설명을 필요로 하는 곳이 적지 않다. 이제 전 세계 교회가 놀라운 역사로 인정하고 감탄하며 격찬하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있어서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함께 모으며, 거룩한 순교 선혈로 그리스도의 길을 함께 걸어간 우리 신앙의 선조들 중에, 우선 5위 성현들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34.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으로 순교하신 위대한 스승이며 대학자였던 세례자 요한 광암 이벽(1754-1785) 성조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에 온 힘을 기울이다가 마침내 생명을 바친, 베드로 이승훈 베드로(1756-1801) 진사와, 당시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권일신 (1742-1792 대학자, 그의 형 암브로시오 권철신(1736-1801) 대학자, 또 새로 탄생한 한국천주교회 내의 최초 전도단체였던 明道會 초대 회장 아우구스띠노 정약종(1760-1801) 호교론가의 신앙과 활동과 순교사를 요약하여 살펴보기 위하여, 먼저 우리 신앙선조들, 특히 교회 창립의 주역이었던 광암 이벽 성조의 가문과 그 집안 선조들의 내력을 간단하게라도 두루 살펴보는 것은 매우 필요한 공부가 아닐 수 없다. 마치 뿌리없는 나무가 없고, 터 없는 집이 없듯이, 갑자기 우연히, 제절로 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새로운 종교의 출발은 교리나 조직이나 서적이나 지식이나 권력이나 재력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된 장소와 시대와 인물과 문화의 上下, 先後, 左右, 內外의 환경과 여건의 요소가 구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분들에 대한 호칭도, 200 여년 전 우리의 문화와 관습을 따라, 가능한 한 당시 어려서부터 자타가 부르던 관습부터 시작하여 써 나가므로써 보다 역사성을 살려보고자 한다.
2.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 특히 이벽 성조의 집안 내력
35. 우리나라 천주교회 창립의 주동역활을 한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의 이름은 세자요한 광암 이벽 덕조(1754~1785)다. 1784년 늦은 봄, 천주교회에서 받은 세례명은 세자 요한이고, 1770년 경에 스스로 지은 号는 광암(曠菴)이며, 문중의 족보에 올린 관명은 檗이고, 어려서 부모가 지어서 집에서 부르던 兒名은 字가 덕조(德祖)인데, 후에 정약용과 안정복, 등 남들이 修道와 修德에 志操가 변함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德操라고 쓰거나 부르기도 하였다. 이벽 성조는 1754년 경주이씨 집안에서 아버지 이부만과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포천현의 안골 꽃마루 새터말(內村面 花峴里 新基洞)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빼어나서 집안과 이웃이 모두 범상한 아기로 여겼다고, 정학술의 李檗傳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어려서부터 이목구비가 선인도골(仙人道骨) 형으로 출중하게 수려하고, 자라면서 기골이 장대한 체격을 지니고 있어, 집안에서는 물론 마을과 친지들을 감탄케 하였으며, 총명하고 예의범절이 너무나 근엄하면서도 온화하여, 장차 위대한 큰 인물이 되어, 집안과 가문을 크게 빛낼 것이라고 아버지는 믿고 있었다. 아버지 이부만은 늘, 우리 둘째 아들 덕조가 크면, 반드시 우리나라와 우리 가문에 큰 영광이 될 것이라고 자주 말하며, 끔찍이 사랑하고 아끼던 소년이었다.
36. 이벽 성조는 고려 때 몽고족대란 중에 세워진 元 나라의 침략과 통치 150여년 간에몇몇 고려 왕들, 특히 忠宣王을 모시던 명재상 익제 이제현의 직계 15대손이고, 조선시대 倭敵의 임진왜란 7년 중 宣祖 임금을 모시고 救國 外交에 공헌한 명재상 지퇴당 이정형의 직계 10대손이며, 만주족이 세우던 靑 나라 초기 병자호란 9년 동안 昭顯世子를 모시고 심양을 거쳐 북경에 가서 Adam Schall 신부와 교분을 맺으며 조선인 시종관 중에 3명의 수행원을 영세시켜 귀국한 서장관 黙菴 이경상의 직계 5대손이다. 즉 이벽 성조는 가문의 전통으로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외국 문물을 현장에 가서 다년간씩 접촉하며 견학하여 박학다식한 재상들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난 천재적인 영특한 후예였다.
37. 우리가 지금 부르는 세자 요한 광암 이벽 성조에 관하여 좀더 다시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으니, 이벽 성조는, 경주이씨 양반 집안 출신으로 1754년에 아버지 이부만과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르던 兒名은 덕조(德祖)였으나, 족보상의 이름은 檗이라고 하였으니, 그 당시 족보상의 이름은 평소에 자타가 사용하지 않고, 공식적인 경우에나 쓰였다. 15 세 전후 1770년 경, 천진암에 입산 수도를 시작하던 때부터는 남들이, 특히 정약용의 글에 덕조(德操)라고 쓰기도 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자신이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 号는 광암(曠菴)이었다. 1784년 늦은 봄, 이승훈 진사가 북경에서 돌아온 후, 영세할 때 자신이 선택한 세례명은 세자 요한이다.
38. 그의 조상들은 6 가야 시대를 전후하여 月城李氏로서 신라 건국에도 크게 이바지한 씨족이었다. 慶州李氏 가문에서는 이미 고려와 조선, 두 왕조를 거치면서 나라의 임금들을 측근에서 모시는 중요하고 높은 관직을 맡았었다. 예를 들어, 고려 때 익제 이제현은 13세에 당시 고려의 성균관 시험에 1등 합격하고, 이어서 15세에 과거 시험에 바로 합격하여, 어려서부터 관직에 오르기 시작한 英材였다. 그는 훗날 조선 천주교회를 세우는데 중심 역할을 한 이벽 성조의 15대 직계 조상으로서, 고려가 몽고족 元 나라 침략으로 국난을 당하자 조정의 재상이자 위대한 학자로서 볼모로 북경에 머물면서, 볼모로 함께 끌려온 고려 왕을 모셨으며, 고려에서는 처음으로 性理學 같은 철학을 체계화하고 확립하였으며. 몽고족이 세운 元 나라의 침략으로 고려의 다른 왕들이 볼모로 북경에 교체되어 가 있을 때도, 여러 왕들을 수행하며 보필하기도 하였다. 이제현이 북경에 머물고 있던 20 여년 동안에는 그 곳에서 고려의, 특히 충선왕과 함께 만권당(萬卷堂)이라는 철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원 나라의 다른 중국인 학자들과 함께 여러 해 동안 古代 선유(先儒)의 儒學을 가르치며, 母國 고려의 젊은 영재들을 원 나라 북경으로 선발하여다가 유학시켜, 國權回復 운동을 은밀히 추진하기도 하였다.
39, 또 원 나라 황실에 끈질기게 요청하여 어려운 허락을 받아, 1316년부터 1323년까지 3차에 걸쳐 지금의 티벳 서남부와 위그루 지역, 아시아와 유럽의 접경인 天山 부근과, 특히 서촉(西蜀)의 名山들 중에 아미산까지 가서 제단을 모으고, 고려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致誠을 드리며 하느님과 天地神明께 제사를 바쳤고, 터어키 접경 지역까지, 중앙아시아의 동북부 명승지를 순례하며 천지신명께 치성을 드리고,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정성을 다하여 충선왕을 모시고 聖地를 찾아 함께 애절히 기도하며, 고려의 독립과 함께, 몽고인들로부터 국왕이 하루속히 석방되기를 기원하였다. 사실, 당시 고려인들 중에 이렇게 다년간 가장 머나먼 수만리 순례의 길을 3차례나 다녀온 사람은 익제 이제현 외에는 없었고, 門下侍中 이제현이 유일한 학자였다.
40. 그 중 첫 번째 순례 때는 충선왕을 모시고 함께 순례하였다. 다만 당시 고려인들은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하느님과 동일한 개념의 천주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반만년 전부터 하늘과 땅의 주인으로 유일신 하느님을 인식하고 섬기는 종교정신을 지니고 있는 민족이었기에, 당시 고려의 문하시중(현재의 국무총리에 해당) 이제현은 7 년 동안이나 걸리는 장기간의 3 차례에 걸친 머나먼 수만리 길의 이 순례를 통해서, 이미 그 주변에 많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일부 들어와 있던 그리스도교 문화를 조금씩 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41. 그리고 고려로 돌아오면서는 다양한 학문 영역의 적지 않은 외국 책들을 가지고 들어와서 후학들의 교육에도 집중하여 크나큰 성과를 내었다. 원 나라의 국운 융성과 원나라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순례라고 핑계를 대었지만, 사실은 고려의 국권회복을 上帝 天主 하느님께 기원하면서, 원나라와 싸우며 적대관계에 있던 서쪽 끝 지금의 동 유롭 서양나라 들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순례였다. 그래서, 이제현 문하시중이 요청하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순례길에는 원 나라 황실에서 눈치를 챘는지, 충선왕은 함께 가지 못하게 하고, 이제현 일행만이 치성드리고 오라는 허락을 그나마 가까스로 받았으며, 충선왕은 오히려 甘肅省 지역으로 더 고통스러운 머나먼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고려의 일반 백성들도 救國의 마음만으로 애타하던 시절, 고려의 조정 대신들이 유람이나 관광을 다니는 수준은 아니었다.
42. 또 이제현의 직계 5대 후손이 되는 지퇴당 이 정형은 광암 이벽 성조의 직계 10대조로서, 1593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조선의 임금 선조가 신의주까지 피난하는 국난을 겪을 때, 측근에서 왕을 보필하였고, 조선으로서는 역부족이었던 왜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중국 明 나라의 지원군 파병을 요청하라는 왕명을 받아, 명 나라 북경에 파견되어, 이를 성사시키기도 하였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그는 그의 제자이며 14년 아래 후배였던 芝峯 이수광과 함께 서양 문화에 관한 많은 책들을 가지고 귀국했고, 이 책들 가운데에는 유럽선교사들이 번역했거나 저술했던 천주교에 대한 책들, 天主實義, 職方外記, 등도 들어있었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후, 이정형과 이수광 두 사람들은 교대로 지금의 天眞菴이 속해 있는 廣州郡의 현감을 역임하면서, 광주 지역에 학문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특히 서양문물을 소개하며 광주실학(廣州實學)을 싹틔우기 시작하였다.
43. 7년간의 임진왜란 이후, 즉 1637년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仁祖 임금이 항복하게 되자, 광암 이벽 성조의 직계 6대조 이경상 또한 조선의 이 국난 중에 조정에서 왕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중요한 직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경상은 인조 임금의 명으로 靑 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昭顯世子를 8년간이나 수행하는 서장관 직무를 받아 성실히 수행하였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소현 세자와 이경상은 당시 북경에 머물면서, 거기서 선교 활동하고 있던 독일인 Adam Schall 예수회 신부와 친분을 맺고, 소현 세자의 허락을 받아, 이경상은 자신이 데리고 간 그의 조선인 시종 3명으로 하여금 아담 샬 신부한테서 1645년 봄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아담 샬 신부와 정신적으로 친해진 서장관 이경상과 소현세자도 입교 영세하였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불분명하다. 귀국 후, 국내 政敵들은 아직도 親明派와 親淸派와 親父王派, 등으로 정국이 불안하던 중이라서, 자신들의 생소한 서양 종교인 천주교 입교나 영세는 감추거나 밝히지 말아야 하는 것이 지혜롭게 여길 때였다. 적어도, 소현세자가 귀국 후 두 달도 채 되기 전에 독살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의문을 낳게 한다.
44. 8년간의 볼모생활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올 때에는 아담 샬 신부의 배려와 주선으로, 아담 샬 신부가 세례를 베풀어준 5명의 중국인 영세 신자들도 함께 데리고 조선으로 귀국하였으니, Adam Schal 신부의 주선으로 모두 8명의 영세신자들로 구성된 마치 평신도 선교단과도 같이 교회 서적들과 성물들을 구입하여 가지고, 소현세자와 이경상 서장관과 함께, 지금의 해외 성지 순례를 다녀오는 신자들처럼, 희망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45. 그러나 1645년 봄 귀국하자마자 2 개월 후, 소현 세자는 갑자기 독살로 죽음을 당하였다. 9년간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과 장례는 독살로 밖에는 달리 설명이 안되는 죽음의 현상이 궁중기록으로 알려졌으니, 갑자기 죽은 소현세자의 시신은 머리의 두 눈, 코, 귀, 입, 7곱 구멍과 하체 두 곳, 모두 전신 9개 구멍에서 출혈이 쏟아지고, 온 몸은 진흙덩이처럼 상해 있었고, 시신 입관 때도 참관자들을 극히 통제하며, 극비리에 궁중 내관 몇몇이 하였다는 기록으로 독살임이 증명되고 있다.
46.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천주교 사제 Adam Schall 서양 선교사와 접촉하면서 청 나라에 9 년 가까이 있으면서, 명 나라를 멸망시키는 청 나라 군대의 북경 함락에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청 나라의 지지를 받으므로, 국내에서는 아직도 중국의 구정권인 명 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우는 대신들의 증오심과, 남한산성 함락으로 삼전도에 끌려나와 청 라 장군 한테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던 仁祖 임금의 증오심도 소현세자의 독살에 무관하다고 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서양의 이상한 종교를 믿는 신도들을 8명이나 데리고 온 소현세자의 신앙도 문제가 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47. 소현세자가 비운에 세상을 따나자, 북경에서 귀국할 때 데리고 들어온 다섯 명의 중국인 신도들은 즉시 중국으로 다시 귀국조치되었고, 세자의 비서실장(서장관)이었던 이경상 역시 바로 사직당하고 낙향하여,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북경에서 Adam Schall 신부한테 세례까지 받고 함께 귀국하였던 3명의 그 시종들에 대해서는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종적이 묘연하여, 아무런 기록도 국내에서는 더 이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훗 날, 북경에서 1784년 2월 24일(?) 이승훈 진사 1 인의 영세보다 139년이 앞서는 1645년 이경상이 부리던 소현세자의 시종관들 3명의 입교 영세와 韓.中 8명의 영세 신자단 귀국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추후 계속 2013. 7.17. Msgr. Byon>
48.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이 벽 성조의 가문은 나라와 임금에 충성하면서, 학문과 천주교 신앙과 접촉과 관계 발전에 당시로서는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회 분위기로서는 서양문물이나 서양 종교에 관한 분야는 돋보일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오로지 왕에 대한 애국심과 충성심으로 매우 유명한 집안이 되었다. 고려 몽고족 대란 때 이벽 성조의 15대조 이제현이 1250년 원나라 서북 쪽 순례 여행 때 천주교 문화와 간접 접촉을 하였고, 조선 임진왜란 때 이벽성조의 10대조 이정형이 1594년 이수광과 더불어 천주교 서적을 들여왔고, 천진암이 있는 경기도 광주(廣州) 부윤으로 재직하면서 서양 지식과 實學 사상을 일깨웠으며, 병자호란 때 이벽성조의 5대조 이경상이 1645년까지 소현세자를 모시고 9년간 심양에 머물다가 북경에 가서 아담 샬 신부와 교분을 맺고, 천주교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49. 그리하여 경주이씨 집안 서가에는 선조들이 수년간씩 머물던 해외에서 들여온 귀한 외국서적들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으므로, 그 후손들은 다른 문중의 후손들에 비해 외국의 새로운 학문에 보다 쉽게 또 넓게 접할 수 있었으며, 남들이 볼 수 없는 해외서적들을 읽은 지식으로 식견이 넓어서, 출세에도 도움이 되었으니, 오성과 한음으로 더 알려진 이항복, 이덕형, 등 경주이씨 문중에서는 훌륭한 명재상들과 중요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3. 이벽 성조의 천진암 천학당 강학과 한국천주교회의 창립
50. 그런데, 이 경상의 5대 후손으로 태어난 천재적인 소년 이벽 성조는 어려서부터 부귀공명을 위한 현세적 출세와 성공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간곡히 바라며 명하였어도 과거 시험 준비는 하지 않았다. 물론, 이벽 성조 자신도 집안의 서가에 있는 그많은 책들을 읽었겠지만, 젊어서부터 그의 관심은 오직 학문과 진리 탐구에만 집중하는 것이였다. 그러한 학문적 열정으로 인해 그는 儒學을 비롯하여 천문학, 지리학, 수학, 曆學, 의학, 기하원본, 天學 같은 다양한 영역에 대한 깊은 지식과 지혜를 갖출 수 있었다. 특히 天學, 즉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진리에 대한 매력과 갈증은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51. 물론 그 당시 조선에는 그리스도교가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몇몇 학자들이 서양학문을 다루는 책들을 읽었고, 그런 책들 가운데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책도 있기는 하였지만, 이들의 관심은 학문적인 호기심에 그쳤으나, 이벽 성조의 열정은 天學을 알보는데 그치지 않고 실행하는 데까지 힘쓰는 매우 특별한 방향이고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집안에 내려오는 책들 덕분에 일찍부터 그리스도교를 더 쉽게 접하고 알 수가 있었기에, 천주교 진리탐구에 더욱 몰두하면서 이벽 성조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교리의 참된 의미와 깊은 뜻을 이해하는데 전념했다. 그리고 보다 더 효과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조용하고 외딴 곳, 즉 당시 불교의 암자였던 천진암이 있는 앵자산으로 입산하여 은거하며 修道하였다.
52, 본래 우리나라 역사상 훌륭한 청소년 名人들 중에는 삼국시대 전후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15세 전후에 가정을 떠나, 주로 계견성(鷄犬聲) 들리지 않는 심산궁곡(深山窮谷)에 들어가서 움막을 짖거나 혹은 불교 암자나 道敎의 초라한 시설물에 거하면서, 학문연구와 정신수양, 무술연마에 집중한 사람들이 많았고, 고등교육기관이 없던 시대에는 불가피하게 이를 본받아 후학들도 隱居하며 修道에 힘쓰는 관습이 있었다.
53. 예를 들어 신라통일에 기여했던 花郞徒들은 왕족이나 귀족 집안의 子弟로서 15세 경에 入山하여 수도하며 인격을 陶冶한 후, 18세나 20세 경에 화랑이 되어 下山 하였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학문과 종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護國의 名師들이 대부분 그러했다. 무술연마에 있어서뿐 아니라, 종교나 학문에 있어서도 같았다. 원효대사, 의상대사, 이차돈, 혜초, 최제우, 등뿐 아니라, 남이장군, 김덕령 장군, 김유신, 김춘추, 등이 대부분 10대 중반이나 후반의 젊은이들로서 은거하며 수양에 들어갔었으니, 대학이나 대학원, 연구소 같은 제도적인 고등교육기관이 없던 시절에, 젊은 청소년들 자신이 개척하는 자기수양의 길이었다.
54. 훗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후, 독립군의 결성과정에서도, 김좌진, 이범석, 홈범도, 윤봉길, 유관순, 등이 모두가 10대 중반과 20대 미만의 남녀 청소년들이었으니, 모두가 오늘날의 청소년들에 비하여 매우 일찍 위인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우리 한민족의 청소년들이 학문과 수양의 인격도야에 은수자다운 방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던 시대상황과 당시 젊은이들의 자질과 열정을 이해하는 것은, 마치 신약시대에 광야에서 은수하던 세례자 요한이나, 그 후 광야의 안또니오처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55. 천진암에 은거하던 광암 이벽 성조의 이러한 자아수련은 15세를 전후하여 입산한 후 30대까지, 즉,1770년부터 1784년 늦은 봄까지 약 15년 동안 계속되었으니, 이승훈 진사가 북경에 파견되어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에서야 下山하여 서울로 入城하였다. 이벽 성조는 보다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서울 수표동 자택으로 이사하기 까지, 약 15년 정도 지속되었다. 한편, 이벽 성조의 학문, 덕행, 성품 등에 대한 명성이 당시 젊은 학자들 사이에 아주 높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정약용 자신과 그의 두 형제들, 정약전과 정약종, 그리고 이승훈, 권상학, 권상문, 등과, 특히 이 젊은이들이 천주교신앙의 종교적 공동체로 발전하면서 저명한 연장자인 권일신, 권철신 같은 학자들도 훗날 이벽 성조를 열심으로 추종하며 자신들은 이벽 성조의 제자들이라고 자칭하였다고, 벽위편과 정약용의 문헌은 밝히고 있다.
56. 1770년부터 입산수도한지 7년 후, 즉 1777년부터는 이벽 성조를 중심으로 젊은 소년 선비들이 모여들어 종종 학문연구 모임이 앵자산 천진암에서 열렸었는데, 당시 유학자들 사이에서 종종 개최하던 이러한 학문적 연구모임을 당시는 강학(講學)이라고 불렀다. 본래 조선시대의 강학은 특히 궁중에서 정식으로 가장 수준 높게 개최되었었는데, 왕의 아들들을 교육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로서, 세자로 책봉된 동궁(東宮)의 학업을 점검하고 발전시키기도 하여, 이를 전담하는 강학관(講學官)이 있었고, 강학법(講學法)이 있었으며, 강학당(講學堂)이 있던 때도 있었다. 또한 양반 학자들의 문중에서나 지방의 서원(書院)이나 좀 이름난 書堂이나 큰 사찰에서도 개최되어, 박학다식(博學多識)한 젊은 선비들이 학계에 진출(데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강학에는 저명한 대학자들의 참석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강학 후에는 향사례(鄕射禮) 같은 큰 축하행사도 있었다.
57. 그런데 이벽 성조께서 천진암에 입산하던 시기는 1768년 누님이 마재(馬峴)의 정약현과 결혼하던 해를 전후하여, 누님 댁에서 가까운 강건너 두미(斗尾)에 집을 마련하여 거하던 때로서, 몇몇 기록에서는 1770년으로 입산수도의 시작 연도를 말하고 있으니, 천진암에 16세로 입산수도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찾아오는 소년들에게 단순한 한학(漢學)을 가르치던 천진암 서당의 젊은 선생이었으나, 여기서 소년들을 가르치면서 학문에 더욱 깊히 7년 정도 면학(勉學)한 후, 즉 1777년 정유년 경부터는 젊은 소년 선비들끼리 강학을 개최하였었으며, 1779년 기해년 경에는 세간에 소문도 자자하여, 권철신 같은 대학자들도 참석하는 수준높은 학문적 강학이 열리기도 하였다.
58. 언제부터 이벽 성조가 천진암에 은거하며 공부하기 시작했는지 그 정확한 시기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문헌에 몇가지 기록들이 있으니, 1770년과 1776년, 1778년, 1779년, 등이다. 즉, 15세 전후부터 30세가 되던 1784년 늦은 봄 4월 중순까지, 약 15년 정도 천진암을 본거지로 삼고 학문과 수도와 천학 강학과 천주교 신앙수련에 집중하였다., 종종 下山하는 경우는, 부모 생신이나 조상 제사 같은 큰 일이 집안에 있을 때와, 친지들이 알려주는 대학자들의 詩會나 큰 모임이 있을 때였다.
59. 천진암 강학에 관하여 1850년 경 다불뤼 주교는 1777년 강학을 기록하였고, 정학술은 1830년대에 기록한 이벽전에서 1778년 무술년과 1779년 기해년에 이벽선생이 천진암에 은거(隱居)하며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학문을 가르쳐서, 선비들의 단체, 총림을 이루었다고 하였으며, 정약용은 1816년과 1822년 경에 기록한 문헌에서 1779년 겨울에 천진암에서 훌륭한 강학이 개최되었었으나, 그 후 7년(1785) 경에, 천진암 강학을 비방하는 소리가 일어나서, 다시는 그러한 좋은 강학을 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60. 그런데, 정학술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이벽전의 내용이 정약용 아니고는 다른 사람이 쓸 수 없는 것들이 있어서, 이벽전 역시 정약용이 1830년 이후 그의 말년에 정학술에게 하필(下筆)한 것이거나, 혹은 자신이 假名으로 기록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니, 1827년에 천진암을 마지막으로 3일간 다녀가며 정약용이 지은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의 詩文 속에는 假名이나 他人 명의로 자신의 신상에 대한 詩感을 기록한 문장들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정약용 승지의 말년에 쓰여진 문헌을 보면 짐작과 이해가 되는 사안이다. 사실은 문헌과 문맥은 내용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것이고, 작자 명의는 그 다음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박해시대에 쓴 정약용의 기록들이나, 황사영의 백서, 등이다.
61. 이러한 강학회에서는 학문적 연구를 하고 어떤 주제에 대한 토론이 진지하게 진행되었는데, 1777년부터 시작된 천진암 강학회가 1779년을 전후하여 몇 년 동안 절정을 이루었으며, 천진암 강학회에서 젊은 청소년들이 집중적으로 다루고 실천하던 것은 주로 서양의 新學問과 天學이었다. 강학이 본 궤도에 오르던 1777년을 중심으로 참석자들의 나이를 살펴보면, 당시 이벽 성조, 23세, 정약용 15세, 정약종 17세, 정약전 19세, 이승훈 21세, 이총억 14세, 등이었다. 당시 우수한 젊은 선비들이 모이는 이 모임에는 당시 권철신 같은 저명한 학자들이 참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62. 그 시절 양근 갈산리의 대학자, 41세의 권철신 성현도 천진암 강학에 참석하여 젊은 선비들과 호흡을 같이 하던 적이 없지 않았으며, 천진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주 중리의 처갓집에 수개월씩 머물면서 장인어른이 되는 순암 안정복(順菴 安鼎福)을 스승으로 모시고(師事) 배우던 권일신 성현(35세)도 그 형 권철신처럼, 정약용네 형제들과 함께 천학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천학에 빠져들어가는 젊은이들을 타이르러, 牛山莊이라고도 부르던 천진암 天學堂에 안정복 같은 학자도, 강학회에 참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모임을 주도하던 이벽성조를 비롯한 젊은 선비들을 孔孟의 正道로 다시 돌아오도록 권유하기 위하여, 그도 방문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당시 대학자로 명망이 높던 순암 선생이 첩첩 산중이었던 광주산맥 상상봉 밑에 있는 띠풀집 몇채밖에 없던 절막 까지 소미(쇠메, 牛山里, 天眞菴 天學堂)에 다녀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63. 그러나 이벽성조께서는 몇 년 후 이가환이나 이기양 같은 대학자들이 공개토론회에서 질문에 막혀 답변은 못하면서도, 체면상 즉시 천주교에 입교를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저명한 학자들을 찾아가 전교하는 일은 헛수고이며 시간낭비로 여겨 적극적으로 찾지를 않았다. 체면과 위신 때문에 새 종교의 진리를 따르기를 주저하는 저명인사들이 지금이나 그 때마 항상 있게 마련이다. 이 점에서 볼 때, 권철신, 권일신 성현들의 인격과 심성이 얼마나 훌륭한 분들이었는지 잘 들어난다.
64. 그래서, 순암 안정복은 자신의 사위 권일신의 형 권철신에게 보낸 서찰에서, “자네들이 전에는 척불(斥佛)로 불교를 배척하더니, 이제는 천주교에 매혹되어 속수무책이라니, 그 천주교 책을 좀 내게 가지고 오도록 말하여도 이덕조(이벽)가 광주 땅에 와서 거하며, 광주를 종종 들리면서도 내게 다녀가지 않으니, 천주교는 자네들을 그렇게 가르치는가? ”하고 몹시 얺잖은 불쾌감을 표하였다.
65. 여타의 강학회처럼, 천진암에서의 이 강학회에서도 처음에는 유교,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책들의 내용을 다루었다. 그러나 이벽 성조의 주도하에 강학회의 성격이 급속히 천주교 교리 연구와 신앙 실천으로 바뀌어 나가게 되었으니, 학문적 성격의 강학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실천 운동의 단체로 발전한 것이다. 즉, 진리는 진실하게 실제생활에 있어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務實力行의 廣州實學 정신이었다. 훗날 정약용은 이 때 천진암에 모여, 천학을 연구하고 실천하던 선비들의 단체를, 마치 불교의 총림(叢林), 즉 ‘스님들의 단체’와 다름이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其門下如叢林).
66. 이벽 성조께서 순교하시고 5년이 지난 후에, 이승훈 성현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이 시기에 이벽 성조는 천주교 신앙에 대해 이미 매우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열심히 더 많은 것을 실천하고 있었다. 강학회에 참석했던 젊은이들이 처음에는 학문연구에 집중 했지만 후에는 가톨릭 교리 연구와 신앙 실천에 더 열성적이었다. 그리하여 이벽 성조를 웃어른(爲上)으로 모시고 그의 지도를 받는 신앙의 단체를 형성하고 발전시켰다.
67. 그 당시 이분들의 업적 중에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살펴보면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으니, 천주교회에는 천주께 봉헌된 날, 주일이 있음을 알고, 당시 우리나라에 요일이 알려지지 않은 시절임에도 불고하고, 음력으로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을 천주님의 날로 하루를 정하여 주일로 삼고, 하루 종일 노동을 하지 않고 기도하며 묵상하고 단식하면서 그 날을 거룩하게 지냈다. 또한 십계명을 지키고 교회의 규정들을 지키는 데 전념하며, 천주공경가와 십계명가 같은 성가를 지어 부르기도 하였다.
68. 이 때 이벽성조께서는 부모님 생신이나 조상님들 기일같은 날이라야 부득이 下山하여 고향이나 친지들 집에 들리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터득하고 믿고 있는 천주교 천학에 대하여 다른 선비들에게 알리고자, 누님댁이 있던 마재와, 녹암 선생의 제자들이 많이 모이던 양근 葛山의 권철신 서당이나, 작은 아버지 호만 공이 큰 부호로서 많은 선비 식객들이 늘 붐비던 춘천 馬足山아래 샘밭(泉田里) 서당이나, 포천 花峴里 本家나, 성호 이익선생의 서당이 있는 安山이나, 남쪽 연안 바다 건너 충남 내포지방의 온양과 덕산, 삽교 지역의 선비들 모임이나, 경주이씨들이 거주하던 미리내, 등 여러 곳을 바람을 쐴 겸, 세상 선비들의 생각을 깨우쳐줄 겸 종종 찾아가 天學을 설법하며 周遊天下하기도 하였다.
69. 1779년 기해년 강학 때도 이처럼 몇주간이나 달포씩 下山하여 周遊하다가 마재의 누님댁에 들려, 정약전, 정약종, 이승훈, 정약용, 등 몇몇이 함께하는 연구회가 녹암 선생을 모시고 주어사라는 山寺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嚴冬雪寒에 밤중까지 걸어서 찾아갔다가, 그 모임은 앵자산 넘어 천진암에서 하고 있음을 듣고, 그 밤으로 장산을 넘을 수 밖에 없었으니, 그 저명하신 대학자 녹암 권철신 선생 어른께서 와서 계시다는 사실을 듣고도, 비록 엄동에 눈이 많이 쌓인 높은 산 광주산맥 험준한 주봉이라도 넘어가야 예의지, 밤중이라고 그대로 주어사에서 밤을 보낼 수는 없는 것이 당시의 선비들이 지닌 상식적인 예의였다.
70. 사실 대지가 30 여평에 불과한 비좁은 주어사 터에서 학자들의 연구 모임이나 강학은 물리적으로도 사실상 어려운 것이므로, 3 천여평 넓은 대지에 金堂이나 요사체 외에도, 客舍와 書堂과 禪房과 讀書堂 등이 있던 넓직한 천진암 天學堂에 모여서 학문을 토론한다는 소식이 잘못 전해졌었기에, 이벽 성조는 그 밤으로 산을 넘어 천진암에 이르러, 10여일간을 지내며 함께하게 되었다. 당시 가장 나이가 어린 정약용은 41세의 대학자 권철신도 참석했던 이 기해년 강학을 가장 감격하여 훗날, 둘째 형, 정약전 묘지명과 녹암 권철신 묘지명과 자신의 자찬 묘지명, 등에 이 강학을 몇 차례나 기록으로 남겼다. 사실 대학자 권철신의 참석으로 용기백배하게 된 젊은 선비들의 이 강학은 한국천주교회 탄생과 창립의 큰 계기가 되었다.
71. 천진암에서의 이러한 강학회가 1779년 이후로 적어도 7년간은 지속되었는데, 이 모임에서 이벽 성조는 신구약 성서를 요약한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지어 제자들이 받아 써서 익히도록 하필(下筆)하였고, 당시 천학총림(天學叢林)의 단체가(團體歌)처럼, <天主恭敬歌(천주공경가)>를 지어 부르게 하였으니, 마치 東學 초기에 敎徒들이 부르던 呪文이나 초기 東學의 歌詞(가사)처럼, 우리나라에서 시작되는 신흥 종교들이 으레 신앙의 기도 겸 노래를 지어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천주공경가는 天學叢林歌로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천주교 청소년들의 자발적인 自作 聖歌이며, 天學堂의 團體歌였다.
72. 이 강학회에 참석했던 인물 중 정약종 성현은 <십계명가>를 지어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강학회로 시작한 천진암의 천학총림은 사실상 한국가톨릭교회의 최초 신앙 단체였다. 50여년 후, 조선에 입국하여 조선 천주교회 순교사를 조사하여 연구하고 집필한 Daveluy 주교는 그의 저서 첫 페이지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이 강학회의 성격을 정당하게 평가하였다: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천주교회 역사의 시작은 이벽의 이 위대한 강학회에서 시작되었다".
73. 이 강학 공동체, 천학총림은, 이벽 성조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젊은 선비들의 최초 <그리스도교 단체>로서, 진리와 신앙에 대한 열정으로 이벽 성조와 그를 추종하던 젊은 선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출발하였고, 점점 발전하여 갔으며, 선교사나 성직자나 천주교 신자가 없이 자발적으로 소박하고 순수하게 자기들끼리 탄생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갖 태어난 한국천주교회 신앙인들의 이 단체가 드디어 나라 밖으로까지 가서 천주교회의 각종 예절과 생활 규정을 알아보려고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74. 그리하여, 서양선교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북경 교회에, 수차례에 걸쳐 이벽 성조께서는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의 대표자로 광암 이벽 성조 자신을 대신하는 <대리자> 파견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조선과 중국 사이의 왕래가 일년에 한두번 사신들과 몇몇 상인들 외에는 없었고, 일반인들에게는 매우 제한되어 어려웠던 관계로, 그런 시도들은 매번 아무런 결과도 없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우리 신앙선조들의 열망은 마침내 그 결실을 보게 되었으니, 이벽 성조의 제자이자 강학회의 일원이었던 이승훈 진사가 1783년 가을 중국사신으로 가는 그 아버지의 수행원으로 북경에 갈 기회를 얻게 된 것이었다. 이벽 성조는 즉시 이승훈 진사에게 한국신자 공동체의 <대리자> 로서의 임무를 맡기며, 천주교회에 대해 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오고, 아울러 세례도 청하여 받도록 하며, 또한 기도서들을 가지고 돌아올 것을 명하였다.(李承薰 李檗大奇之 檗曰 北京有天主堂 天主堂有西洋西士傳敎者 求信經一部 幷請領洗 必勿空還,,,-黃嗣永 帛書).
75. 이벽 성조는 이승훈 성현이 받은 이 임무가 조선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사명인지를 강조하면서 온 마음과 주의를 기울여 사명을 완수할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이때 이승훈 성현의 태도에 대해 다블뤼 주교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기록하였다: <이승훈은 이벽의 말을 위대한 큰 스승, 대도사(大道師)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Il a recu la parole du Maitre)>고 다불뤼 주교는 기록하였는데, 프랑스어에서, 문장 속에 나오는. ‘스승(matitre)이라는 단어를, 대문자로 시작하는, ’Maitre'라고 하였으니, 이는 보통 ‘스승’들의 말씀이 아니고, 공자, 맹자, 플라톤, 소크라테스, 같은, 인류의 위대한 큰 스승, 大道師, 新興 大宗敎의 敎主님의 말씀처럼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76. 또한 이벽 성조 순교 후 반세기가 지난 1836 봄에 조선에 입국했던 성 Pierre Maubant신부도 파리외방선교회의 신학교 총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 역사적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벽은 그리스도교를 전적으로 전심으로 받아들였고, 몇몇 다른 改宗者들과 함께 마음과 힘을 합하여 이승훈을 자신의 대리자로 1783년 북경에 파견하였다.
77. 이승훈 진사는 주어진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그는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까지 받았는데, 베드로라는 본명은 이승훈 진사가 출국하기 전에 이미 이벽성조께서 미리 정해준 것이었다고 Daveluy 주교는 그의 문헌에서 밝히고 있다. 이승훈 진사는 1784년 2월 24일(?) 북경 북당에서 프랑스 선교사 예수회원 Joseph de Grammont 신부한테서 세례성사를 받고, 천주교 신앙생활과 예절거행에 관한 서적들과 성물들을 가지고, 같은 해 3월 말 경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78. 이 책들을 받고나서 이벽 성조는, 천주교회 신앙생활과 예절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더 깊히 연구하는데 전념하는 동시에 자발적으로 그 신앙을 실천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벽 성조는 자신의 본명을 세례자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정하여 세례를 받았는데, 이는 그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으므로, 세례자 요한에 비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같은 해 대학자로서 제자들이 많았던 권일신 성현은 선교활동의 주보가 되는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의 본명을 정해주었다. 이를 보면 이벽성조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을 위하여 이승훈 북경 파견 이전부터 이미 주도면밀하게 연구하고 사목계획을 수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9. 그 때부터 이벽 성조의 활동은 더욱더 열성적이었고,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가톨릭 신앙의 복음 전파 본부를, 그가 15년 가까이 머물면서, 제자들과 함께 천학 연구와 강의와 기도와 묵상에 열중하며 실천하던 본거지 천진암으로부터 자택이 있던 서울의 수표동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마음 먹고, 1784년 음력 4월 중순에 서울로 들어가서, 수표동에 마련해 두었던 자택을 천주교 집회소로 삼아 포교활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80. 그리하여 서울에 입성한 후에는 아주 공개적으로 천주교회를 전파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당시 서울에서 저명한 학자였던 이가환(훗 날 공조판서)과 이기양(훗날 문의현감)과 같은 당대의 대학자들과 천주교에 대한 공개적인 대 토론회를 열었는데, 천주교 교리와 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운집한 선비들 앞에서 비교하며 토론하는 것이었다. 사실 두차례에 걸친 학문적 이 토론회는 학자들이 먼저 제안한 것이였으니, 광암 이벽이 잘못된 종교를 믿고 퍼뜨리므로 타이르고 가르쳐서 바른 길(孔孟의 正道)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차례의 걸친 공개토론회에서 저명한 이가환, 이기양 같은 대학자들도 이벽성조의 적수는 아니었다. 2 명의 저명한 당대 학자들을 굴복시키며 승리하므로써, 서울 장안에는 새로운 종교, 천주교가 선비들의 화제가 되었고, 적지 않은 젊은 선비들이 입교하게 되었다.
81. 이벽 성조의 공개적인 선교활동과 여러 학자들과의 토론으로 그는 1년 동안 500여명을 천주교회로 입교시킬 수 있었다. 이승훈 진사가 중국에서 돌아온 후였으므로,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여 천주교회를 알고 믿고 있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서로가 세례를 주고 받으며 전도하기에 힘썼다. 새로 탄생된 한국 교회의 창립 초기 신도들은 더욱 힘을 얻어, 이벽 성조와 함께 주님의 복음을 각자의 벗들과 친지들에게, 이웃 사람들에게 알리며, 공개적으로 선전하고 권면하면서 많은 이들을 개종시켰다. 적지 않은 이들이 세례를 받았고, 함께 가톨릭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사실 천진암 강학회와 천학총림에 함께한 젊은 학자들이 서울로 들어와 이벽성조의 자택을 집회소로 삼아 약 1년간 전도하여 입교시킨 사람들은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희생적인 봉헌과 용감한 순교로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주초와 기둥이 되었다.
4. 서울에서의 전도활동과 최초의 박해 및 이벽 성조의 순교
82. 당시의 엄격한 신분제도와 사회 분위기는 남녀가 불평등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새로 갖태어난 천주교회 신도들의 모임과 운영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러므로 당시 조선 백성들에게 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선포하고자 이벽 성조는 사도적 활동의 본거지를 옮길 결심을 하였다. 그 이유는 이벽 성조 주변에는 양반 남자들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中人 계급과 賤民 계급의 사회계층 사람들과 여자들도 적지 않았으므로, 경주이씨 양반의 집안이었던 수표동 이벽 성조의 집에는 양반이 아닌 중인들이나 상민들, 특히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출입하는 것도, 모임을 갖는 것도, 당시로서는 매우 어려웠다. 세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므로, 사회의 흉이 될뿐 아니라, 천주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트집거리였다.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양반과 천민, 남의 남자들과 남의 집 여자들이 같은 집에 함께 출입하며 모여서, 교리강의를 함께 듣거나, 함께 기도를 바치는 것 뿐 아니라, 한 방에서 자리를 같이한다는 것 자체가 큰 흉이며, 망칙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83. 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이벽 성조의 제자 중 하나였던 김범우 통역관이 명례방 장례원 부근에 있던 자신의 집 한 채를 교회가 사용하도록 내놓게 되었으니, 바로 지금의 명동 대성당 자리한 곳이다. 김범우 토마스는 한의사요, 통역관으로서 중인신분의 집안이었으며, 그의 조상 때부터 여러 세대를 통하여 집안에 외국어 학원을 운영하면서, 당시 대부분 통여관들의 관습대로, 한의원이나 약제상을 운영하고 있어서, 그의 집에는 모든 사람들이, 남자건 여자건, 양반이건 천민이건 드나드는 것이 자유로워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수표동에 있던 이벽 성조의 집보다는 많은 이들이 더 편리하고 자유롭게 모일 수가 있었고, 교리강습이나 기도회 같은 전례를 거행하는 집회소로 매우 적합하였다.
84. 더구나 명례방 앞에서부터 남대문에 이르는 거리와 골목은 주로 중국인 사신단의 수행원들이나 중국 상인들이 머무는 여관들과 음식점들과 각종 상품들을 팔고 사는 상가들이 최근까지도 많이 몰려 있어서, 북경에 출입하는 조선인들이나 중국인들과의 접촉이나 연락이 수월한 지역이었다. 그리하여 문도공 정약용 승지도 마재에서 상경하여 처음에는 회현동 산비탈 퇴계로 부근에 방을 얻어 머물다가 조정에 근무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명례방 입구에 집을 마련하여 1800년대까지 10여년가까이 머물렀던 이유는, 중국인들 편에 신간 중국 서적 구입 등이 편리하였기 때문이었다.
85. 이처럼 이벽 성조께서 명례방 장례원(掌隷院) 옆에 있는 토마스 김범우 통역관의 집으로 천주교회 집회소를 정한 것은 새로 입교하는 내국인 신자들의 편의와 당시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외국 천주교회, 즉 북경 천주교회와의 연락이나 접촉이 수월하여, 국내외적으로 매우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통역관 겸 한의사였던 토마스 김범우은 지금의 서울 명동과 소공동 지역에 8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선대부터 역관이었으므로, 통역관들의 경우, 중국어, 몽고어, 왜어, 만주어 같은 외국어 학원과, 한의원이나 한약 재료상을 겸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더욱이 당시 사회가 남녀 차별이나 양반 천민 계급으로 환자들을 진료하는 좀 이름난 의원들의 한의원에는 집 안에 여러 채의 집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양반집 여인들이 천민 집안의 남정네들과 같은 한방에서 진맥을 보며 침을 맞고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86. 그런데 유력한 가정의 젊은 선비들을 많이 제자로 삼아 존경을 받던 이가환, 이기양 같은 대학자들이 공개 토론회에서 광암 이벽 성조한테 굴복한 후, 구름같이 모여 오는 신입교우들로 인하여 명례방은 점점 천주교 신자들이 자주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이벽 성조의 설교와 가르침을 받으며, 모든이가 그를 위대한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는 곳이 되었다.
87. 한편, 한국 초대 신도들의 이러한 가톨릭 신앙 실천 선교활동은, 조선사회의 근대화, 사회계급 타파, 남녀 성차별의 철폐, 등, 사회개혁운동도 은연 중에 수반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이 당시 기득권을 쥐고 잘 살고 있던 양반들에게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볼 때 천주교라는 종교는 세상을 온통 뒤집어 놓는 사회혁명을 조장하는 것으로 매우 위험시하였고, 이런 우려가 사실 한국에서의 천주교회에 대한 최초 박해의 원인을 더욱 가중시켰다.(1785).
88. 그런데 당시의 초대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출발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진 것은 아니었고, 다만 문중과 가족들에 의한 박해로 시작하도록 유도되고 있었으니, 추조판서(秋曹判書) 김화진의 추조금리(秋曹禁吏)들이 도둑이나 도박꾼들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천주교신도들의 집회소였던 명례방 김범우의 집을 급습하여, 남녀가 한 집안에 모여 이상한 종교를 믿는 행위를 한다고, 참석자들을 잡고보니, 대부분 양반집 자제들이므로,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고, 집주인 김범우 통역관만 중인계급이므로 체포하여 감금하고 모진 매를 때렸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양반들은 대역죄가 아니고서는 벌을 줄 수가 없었는데, 교회의 지도자들은 대부분이 모두 양반들이었다.
89. 그런데 추조금리들이 보고하는 당시 급습 현장에 대한 이야기 중에는 흥미로운 현상도 들어 있다. 즉, 1785년, 乙巳年 봄에 명례방 장례원 앞에 있던 김범우의 집에 사람들이 출입하므로 들어가 보니, 이벽이라는 자가 얼굴에 힌 분을 바르고, 푸른 도포자락 같은 큰 수건을 머리에서부터 어깨를 덮으며 내려 쓰고는 아름목 쪽 벽을 등지고 앉아서 설법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앞에는 권철신, 권일신, 권상학, 부자들과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들이 모두 책을 하나씩 손에 들고는 이벽 앞에서 무뤂을 꿇고 모시고 둘러 앉았으며, 모두가 이벽을 스승님이라 부르고, 자신들을 그의 제자라고 자칭하였으며, 이벽이 그들을 엄히 꾸짖고 책망하는데, 너무나 엄격하여, 우리 유교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기강보다 훨씬 더 근엄하였다고 하였다.
90. 이승훈 진사가 북경 성당에서 영세하고 귀국한지 1년 후이고, 나이가 이벽 성조보다 권철신은 18세 위이고, 권일신도 이벽 성조보다 나이가 12세 위의 부모벌 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당시 이벽 성조의 위상을 쉽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얼굴에 분을 바르고 어깨에 푸른 수건을 썼다는 것은 아마 이승훈 진사가 북경에서 북당성당에서 처음 미사에 참석하면서, 녹색 제의를 입은 사제의 제복과, 서양 신부의 얼굴이 너무 힌색이므로, 미사를 올릴 때는 사제가 얼굴에 바르고 하는 줄 알고 전하는 이야기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91. 하여간 계획적이며 조직적이라고 짐작이 가는 추조판서의 禁吏들은 만만한 중인계급의 집주인 김범우 통역관만 붙들어다가 집중 매질을 하였다. 수표동에서 명례방으로 옮겨온 후, 양반과 상민들이 중인 계급의 김범우 집에 모여 함께한다고해도 당시 사회의 계급 타파 운동은 불가능다는 고정관념이 아주 확고한 관리들은 강경한 태도로 김범우를 다루었다. 즉, 중인 계급의 통역관 김범우 주제에, 양반집 나리들과 자제들을 집에 모이게 하여 함께 呪文을 외우면서 기도를 한다고하여, 中人도 양반이 되는 줄로 알지 말아야 한다는 뜻도 강하게 내비치는 매질이었다. 따라서 권철신, 권일신, 권상학,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과 이승훈, 이벽 같은 양반들에게는 매질을 할 수 없으니, 집주인 김범우 역관만이 양반들을 대신하여 매를 맞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천주교회 역사상 어떤 천주교 신도가 다른 신도들 대신 처음으로 혹심한 매를 맞은 첫 박해였다.
92. 김범우는 경상남도 밀양군 丹場面 丹場里(오늘의 삼랑진 부근)로 유배를 보내었고, 이벽 성조를 비롯한 권철신 대학자의 형제들과 자제들, 정약용과 그 형제들, 이승훈, 등 양반 신분의 신자들을 모두 禁吏들의 손에 이끌려 완력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여,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비록 왕의 어명으로 천주교를 금하기 전이라서, 정부 차원의 정책적인 박해로 보기 어렵다고도 하지만, 사실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1785년 乙巳年의 첫 박해부터 官權과 권력에 의해서 계획되고, 개입된 공식 박해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왕의 어명으로도 천주교를 금지할 수 있도록 여론을 일으키고, 상관들에게 보고하여, 빠르게 국무회의에도 알게 하려는 의도가 엿보이기도 하는 첫 박해였다. 이리하여 천주교에 대한 나쁜 선전이 양반 학자들과 선비들의 세계에 신속하게 전달되어, 여론화시키므로써, 서울 장안이 발칵 뒤집어지기라도 하는양 급진전하게 되었다.
93. 다만 양반들은 官에서 직접 손을 대지 않는 반면, 각 가정과 가문을 작극하고 동원하여 문중박해로 유도하였으니,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의 모든 문중에서 들고 일어나서, 각 문중에서는 자녀들이 천주교라는 오랑캐의 道를 못하도록 압력과 박해를 가하게 하였다. 그 모임에 참석한 저명 인사들 문중에서 모두 들고 일어나도록 하여, 권철신의 안동권씨 가문과, 정약용의 라주정씨 가문과 이승훈 진사의 평창이씨 가문에서는 문중의 원로들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94. 그러나 권철신과 권일신의 명망을 넘는 인사들이 고향 양근지역에는 그리 많지도 않아서, 앞에 나서서 천주교를 공격하려는 이들이 거의 없었으며, 정약용 집안에서도 그 아버지 정재원이 의금부 도사, 진주 목사, 화순군수, 등 비교적 큰 벼슬을 하고, 특히 막내 아들 정약용은 조정에서 상감마마를 직접 가깝게 모시는 사이므로, 라주정씨 집안 문중의 친지들 중에도, 앞에 나서서 공격하려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승훈 진사의 평창이씨 문중에서는 학자 층의 원로들 중 일부에서 다소간의 우려 섞인 공격이 있었으나, 아버지 이동욱이 계묘년(1783년)에 동지사로 북경에 갈 때, 아들 이승훈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갔었고, 서양 신부한테 영세까지 하고, 천주교 책들과 성물들을 매입하여 들여온 사실 때문에, 사실 이동욱은 상감한테까지 알려져서 문책이라도 당할까 걱정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우선 북경에서 사가지고 온 천주교 책들을 뺏어다가 안마당에서, 문중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버리며, 아들 이승훈을 야단치는데 그쳤다.
95. 그러나, 이벽 성조의 경주이씨 문중과 가정에서는 가장 극심한 탄압과 박해가 불가피하였으니, 그 이유는, 이벽 성조가 신흥종교 천주교의 중심 敎主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다 잘 알고 있고, 인정하고 있던 터이기 때문이었다. 왕조실록에서까지, “李檗은 邪學의 一世之也 共知也”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천주교를 믿고 전파하는 저자들은 모든 양반문중의 족보에서 이름을 삭제해야만 한다는 通文을 만들어, 천주교 반대 세력의 선비들이 장안의 4대문 안팎으로 돌리며 신속하고 맹렬하게 천주교 신도들을 공격하며 박해를 선동하기에 이르렀다.
96. 특히 이벽 성조의 경주이씨 문중과 집안에서는 정치적으로 반대 세력에 있던 선비들한테서 맹렬한 비난과 공격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초기 천주교 신앙인들뿐 아니라, 교회에 적대적이었던 사람들까지도 이벽 성조를 천주교회의 우두머리요 創始者로 모두가 이미 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뿐 아니라, 이벽 성조의 형제들인 李格, 李晳이 그리 낮지 않은 武官職에 있었기에, 승진 경쟁의 대상자들과 문중에서도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다른 문중이나 다른 가정들보다 박해의 정도가 아주 훨씬 더 심각할 정도로, 당시 사회의 선비들이 집중 공격을 하였다. 천주교를 반대하던 유교 양반 학자들이나 젊은 선비들은 천주교를 믿는 이벽 성조와 그 일당들을 족보에서 하루속히 이름을 삭제하여, 천민이 되게 하라고 야단이었다. 이런 경우, 집안의 家長은 탄압과 공격의 화살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었다. 연일 들어닥치는 선비들마다, 모임마다 이벽 성조와 천주교도들 타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가족들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이벽성조의 아버지 이부만은 차라리 아들 이벽에게 외출 금지를 명할 수 밖에 없었다.
97. 그런데 이벽 성조의 아버지 이부만은, 모든 양반집의 명문대가들과 마찬가지로, 체면과 위신을 아주 소중히 여기며, 성격이 좀 괄괄하고 다혈질적인 무관 기질이 있는 사람으로서, 천주교회에 대해서는 아예 거들떠보거나 관여하고 싶어하지를 않았고, 바로 그 아들의 마음에서 천주교 신앙을 근절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98. 아버지 이부만은 아들 이벽 성조가 천주교회 신앙을 버리도록 아무리 권고하고 달래도 모든 노력이 허사였다. 더욱이, 경주 이씨 문중의 어른들은 이부만이 그 아들의 천주교 신앙을 포기시키지 못한다면 이부만과 그 아들들의 이름을 경주 이씨의 족보에서 삭제할 것이니, 姓氏를 아주 바꾸고, 가문에서 나가라고, 위협하며 무서운 압력을 가혔다. 가정의 존폐가 달렸을 뿐 아니라, 경주이씨 가문 전체가 상감으로부터, 전국 유림들로부터 무시와 배척과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고 더욱 가중된 압력을 조직화시켜, 장안의 온 사회가 들끓었다.
99. 당시에 족보에서 이름이 없어진다는 것은 양반자격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고, 따라서 관직에 있던 아들은 벼슬을 빼앗기고 평민으로 내려와야 했으며, 새로이 벼슬길에 나아가지도 못한다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이미 관직에 있는 아들들도 탈관삭직(脫冠削職)을 면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는 아들 이벽 성조를 집에 감금하고, 종교적 활동 뿐 아니라 아예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든간에 밖에 나가는 것을 금하고, 문중에는 이벽 성조가 더 이상 천주교를 믿지 않는다고 문중회의에 거짓통보를 하였다.
100. 그러나 이벽 성조의 학식과 인품과 기질을 잘 알고 있던 유교의 학자들, 특히 공개토론회에서 패배한 대학자 이가환과 이기양의 일부 제자들 중에 젊은 선비들은 이벽이 천주교를 버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벽 성조는 신앙포기는 안될 말이라며 만민의 아버지 조물주 천주 공경을 만민이 모두 반드시 해야 할 본분임을 굳세게 그러나 공손하면서도 힘있게 반복하여 말할 뿐이었다.
101.아버지 이부만은 아들이 교회활동을 정녕 그만두지 않는다면, 집안이 망하게 되었으므로, 이를 보고 사느니보다는 차라리 자살하겠노라고 아들을 협박하며, 대청마루 들보에 바줄로 목을 매달기까지 하며, 극단적인 행동으로 자살시도를 하였다. 온통 집안은 난가였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도 허사로 돌아가자 이부만은 마침내 이벽 성조를 집안에 완전히 감금한 상태에서,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라고 선언하면서, 밥도 주지 말라고 명하며, 차라리 굶어서 죽기를 바랐으니, 당시 궁중에서나 양반가에서 있었던 餓死罰을 아들에게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벽은 신앙포기를 거부하며, 이른 바, 不撤晝夜로 食飮을 全閉하고 衣冠을 갈아입지 않았다. 사실 아버지가 목을 매달고 난릴를 치는데, 아들은 평소처럼 밥을 먹으며, 여의 때처럼 잠을 자며, 태연할 수는 없는 것이다.
102. 그래서, 餓死罰을 부모가 자녀에게 내리는 것은 마지막 방법이었다. 가정과 가문과 나라의 存亡이 좌우되는 막중한 부모의 명을 거역하는 다 큰 자식을 죽이기까지 해야만 하는 경우에 이르러, 그렇다고 부모가 자식을 차마 칼로 찔러 죽이거나, 또는 가축도살자들이 개를 잡을 때처럼, 자식의 목을 차마 바줄로 묶어서 매달아 죽일 수는 없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독살시켜 죽이거나, 또는 좀 부드럽게(?) 자식을 굶겨서 서서히 죽게 하는 餓死罰이 당시 왕궁에서나 양반 대가에서는 종종 있었던 일이다.
103. 이벽 성조 당시의 임금이던 正祖의 아버지 思悼世子(莊獻世子)도 1762년 그 아버지 英祖의 御命으로, 손자(후에 正祖)가 열 살 되던 해, 아들 세자를 아사벌을 내려 죽게 하였다. 세자 때문에 영조 임금은 몹시 진노하여 대궐 안마당에 나무로 궤짝(뒤주)을 만들어 사도세자를 집어넣고 나무 덮개에 한 자(30cm) 짜리 긴 쇠못을 사방 한 자 간격으로 위에서 아래로 박아, 궤짝 속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고, 부근 둘레를 병졸들이 지켜서 물 한 모금도 궤짝 틈으로 들여보내지 못하게 御命을 내려 10여일가까이 굶겨서 죽게 하였다. 그 후, 신유박해 때는 경기감사 이익운의 아들 이명현 역시, 천주교를 버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버지 이익운이 강제로 아들에게 飮毒시켜 죽였다.
104. 그런데 사회와 문중으로부터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무서운 압력을 받고 있던 이부만 공은, 아사벌로도 31살의 건장한 청년이었던 이벽 성조가 8, 9일이 지나도록, 숨을 거두지 않고 있어서, 모두가 지칠대로 지쳐 있어서, 더 이상의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모두 단념하기에 이르러, 당시 왕궁에서 있었던 사도세자의 경우처럼, 측근들의 강요와 억압에 따라, 기왕에 버린 자식이오, 가는 자식이므로, 아사벌을 내린 지 열흘 후 마침내 아들 이벽 성조가 속히 세상을 떠나게 하려고 강제로라도 음독시키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독을 마신 사람이 운명할 때는 대부분이 본능적으로 눈을 부릅뜬다든가 몸을 비틀며 용을 쓰기 때문에, 곁에 있는 사람들이 차마 보기 힘든 모습이므로, 이불이나 넓은 천으로 덮어서 보이지 않게 하여, 숨이 끊어져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조용히 되기를 기다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벽 성조의 한 맺힌 순교의 운명 순간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측근들은 두꺼운 이불을 여러 겹으로 이벽 성조의 몸을 겹겹이 멍석처럼 말아서, 머리 쪽과 발 부분을 막아서, 아예 숨을 쉬지 못하도록 하여 窒息死 당하였으니, 1785년 을사년 음력 6월 14일이었다(니벽전).
105. Daveluy 주교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 Daveluy 주교의 『조선순교사 비망기』
1786년(병오년) 봄에 이벽은 중국인들이 역병, 혹은 염병이나 열병이라고 하던 흑사병에 걸려서, 8, 9일을 앓은 뒤, 땀을 흘리기 시작하자, 돌보던 사람들이 여러 겹의 이불로, (마치 멍석으로 몸을 말아서 묶듯이 하여), 이벽의 몸을 감싸서 말아 덮고는, 땀도 흘리지 못하고 숨도 쉬지 못하도록 덮고 막아서, 이벽은 무거운 여러 겹의 이불 속에서 숨이 막혀 질식사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 때 나이는 33세였다,
(Au printemps de l'année 1786(Piengo) il fut pris de la peste courante (le Jo ping des Chinois) et après huit ou neuf jours quand la sueur commençait à sortir ceux qui le soignaient l'enveloppèrent de plusieurs couvertures, malgré tous les soins et efforts qui lui furent prodigués, il ne fit qu'étouffer sous ces lourds vêtements et la sueur ne pouvant percer et sortir, il en mourut à l'âge de 33 ans.)
106. 당시 경주이씨 문중의 목판본 족보와, 이벽성조 장례식에 참석한 정약용이 지은 輓詞 詩文에 모두 연도가 1785년 乙巳年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당시 조선에 역병, 즉 흑사병이 돌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런 전염병 사망자도 없었으므로, 60여년 후, 1850년대에 프랑스 선교사 Davluy 주교가 언급한 연도와 역병 기술은 잘못된 소문을 듣고, 기술된 것으로 보인다. 不撤晝夜, 食飮全廢, 및 衣冠을 갈아입지 않았다는 등의 소문이 와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107. 결국 Daveluy 주교는 이벽성조께서 와병 중 질식사하도록 숨을 막아 살해 되셨다는 사실은 알려주고 있는데, 아사(餓死)벌로 굶어 죽었다는 말이나, 독살(毒殺)되셨다는 말이나 땀을 못내게 질식(窒息)시켜 살해했다는 말이나, 모두가 일맥상통하는 비명으로 운명하였음을 의미하는 같은 내용이다.특히 열병에는 땀을 흘려야만 살아나게 마련이고, 이는 당시 조선인들의 상식이다. 그래서 미운 사람에게 저주와 악담을 할 때, ‘염병에 걸려서 땀을 못내고 죽을 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땀을 못내도록 이불로 겹겹이 몸을 말아서 땀을 흘리지 못하게 하고 숨도 쉬지 못하게 하여 질식시켰다는 것이 Daveluy 주교의 역사서 기록이다.
108. 죽음을 앞둔 이벽 성조가 벽에 특필대서하여 써붙이고 면벽 좌정하여 묵상하며 기도했다는 殞命詩는 천주교신앙의 확고하고 장렬한 표현이다.(巫峽中峯之勢死入重泉, 銀河列宿之年錦還天國 !)
영웅호걸들의 운명시는 각양각색이다. 정포은, 전봉준, 예수님이 운명 전 최후로 하신말씀, 등,,,
이벽성조의 순교는 당시 조선사회가 天學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중에 압력을 가하여 불가피하게 초래한 결과다. 결국 이벽 성조는 한민족 구원을 위한 신앙수호를 위해 10여일간굶긴 후 강제로 음독시키고, 여러 겹 이불로 몸을 말아 질식사를 당하여 집안에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제물이 되었다.
109. 당시 완전히 비그리스도교 국가였던 이 땅에서 주님께 바쳐진 한국교회의 첫 번째 제물을 위해서는 이렇게 연결된 三重의 사형 방법이 사용되었으니, 곧, 아사벌 후 강제 음독과 밀폐시켜 窒息死 시키는 처절하고 잔인한 수단이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벽 성조의 죽음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순교였다. 즉, 가톨릭교회를 반대하는 자들이 품고 있던 신앙에 대한 증오심(in odio fidei)으로 당한 순교였고, 두 번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한 효성으로 받아들인 순교였다. 신앙이 아니면 죽지 않을 수 있었고, 부모의 명을 거스르는 불효를 하지 않기 위해서 받아들이는 죽음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동시에, 그의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부모의 명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의 순교는 사회와 문중의 극단적 압력에 의한 것이었으나, 영웅적인 죽음이었고, 사실 그런 압력으로 인해 그는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5. 임시준성직자단 결성과 권일신 성현의 순교
110. 한편, 권일신 성현(1742-1792)은, 한국 가톨릭 교회의 창립에 함께 했고, 1784년 세례를 받을 때, 세례명도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라고 정했을 정도로 복음선포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또 많은 활동을 하였지만, 1785년의 박해 동안에는 많은 탄압을 받지는 않았다. 문중에서 그의 형 권철신 성현 (1736-1801)은 왕세자 문효세자의 스승으로 추대될 만큼 위대한 대 학자였고, 권일신 자신 또한 대학자로 저명했을 뿐 아니라 왕의 총애와 존경을 받고 있었다. 다른 세 명의 형제들 또한 문중에서는 중요한 인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당시 권씨 문중 사람들 중에 앞에 나서서, 이들을 공격하며 박해할만한 이들이 없었다. 그러나 권일신 성현은, 김범우가 체포되어 유배되는 것을 보고서는 자발적으로 관리들에게 나아가 자신 또한 김범우와 같은 종교를 신봉하는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밝히 말하였다. 사실, 그는 이벽 성조보다 8살이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벽 성조가 머리가 되어 처음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다닐 때, 제일 먼저 진심으로 그를 추종하였다.
111. 이벽 성조가 순교한 후, 권일신 성현은, 이승훈 성현, 권철신 성현, 정약종 성현 등 교회의 다른 창립자들과 함께 교회를 이끌어나갔다. 창립주역 이벽 성조를 잃고 가족, 친지, 이웃들의 박해로 고난을 받으면서도, 이들 교회창립선조들은 천주께 대한 신앙으로 좌절하지도, 또 희망을 잃지도 않았다. 크나큰 열정을 가지고 그들은 진리를 전파하는데 전념했고, 도처에 흩어진 신자들을 모으는데 몰두하였다.
112.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의 탁월하고 출중한 주요 활동 중의 하나는 <준성직자단>의 결성이었다. 이승훈 성현은 주교와 사제들로 구성된 교계제도를 북경에서 본 적이 있었다. 또 미사에 참례하였고, 성사를 거행하는 것도 보았었다. 그러므로, 교회창립주역이자 수장인 이벽 성조가 순교한 후에 한국교회에는 무엇보다도 그런 교계제도가 필요해 보였다. 사도적 계승과 교회직무제도에 대해 자세히 몰랐던 이들은, 나이로도 연장자이기는 했지만 무엇보다도 지혜와 덕이 뛰어났던 권일신 성현을 주교로 선임하였고, 이승훈 성현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권철신, 권일신, 등이 사제직무를 맡았다. 이들은 전국을 몇 지역으로 구분하여 맡아서 책임을 지고, 복음을 선포하고 세례와 고백성사, 성체성사를 거행하였다. <선한 의도> 에서 비롯된 그런 활동들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개종자들의 숫자는 전국에서 놀라우리만치 증가했고, 신자들의 활동은 더욱더 열성적이 되었다.
113. 그러나 처음부터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었던 가톨릭 교회 신앙과 전례에 대한 연구로 이들은,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준성직자단 체제에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일단 의심이 들자 이들은 약 2년 정도 지속했던 이 활동을 즉시 중단하였고, 권일신 성현과 이승훈 성현은 북경의 주교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들의 활동이 올바른 것이 묻기로 하였다. 사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신자들 앞에서 자신들의 인간적 권위를 내세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들에게는 오직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 그리고 하느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만이 있었기에, 교회직무를 모욕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수많은 어려움을 뚫고 이 편지를 북경주교에게 보내는데 성공한 이들은 주교의 답장을 받게 된다.
114. 여기서 잠시 당시에 조선인들이 북경에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쨌든, 이들은 주교의 명대로 즉시 <준성직자단>의 활동을 중지하고 대신 신자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일과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이후 교회의 성장이 좀 주춤하는 상황이 되어, 상당히 늦추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창립선조들은 북경 주교의 명에 대하여 즉시, 그리고 겸손하고 진실하게 순종하였다. 이들의 신앙이 얼마나 진실하고 참된 것이었는지, 이들이 <준성직자단>의 체계를 세웠던 그 의도가 얼마나 좋고 정당한 것이었는지를 반증한다.
115. 권일신 성현이 자신의 생명을 주님께 바치는 데에는 이벽 성조의 순교 이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1791년 조선에는 제사문제로 인해 국가적 차원에서의 박해가 일어났다. 제사는 1789년 북경주교가 보낸 편지에 의해 금지되었다. 복음선포에 대한 권일신 성현의 영향과 역할이 온 나라에 결정적이고 중요했기 때문에, 신앙을 증오하는 이들은 그를 교회의 우두머리, 교회의 지도자로 지목하고 고발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는 11월에 체포되었고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는데, 잔인한 고문이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천주께 대한 자신의 굳은 신앙을 변함없이 고백하였다. 그를 매우 존경하며 아끼던 왕은 그의 생명을 구하고자 했고, 그래서 관리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그의 마음을 돌려놓으라고 명했다. 고문, 탄압, 협박은 점점 더 잔혹해졌고, 이에 회유, 유혹까지 더해졌다. 권일신 성현의 마음을 바꾸려는 모든 수단과 방법들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래도 그를 사형에 처하고 싶지는 않았던 왕은 그를 제주도로 귀양을 명하였다.
116. 잔혹한 형벌과 고문, 수많은 태형으로 그의 몸은 유배지로 바로 떠날 수 없을 정도로 상해 있었으므로, 서울에 며칠간 머무르면서 몸을 추스려야 했다. 그 동안, 왕은 권일신을 잃고 싶지 않았으므로, 몇몇 관리들을 보내어 그를 설득하게 하였지만 이번에도 허사였다. 권일신 성현은 반복해서 그 신앙을 고백할 뿐이었다: 즉, 천주교 신앙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과는 다르다는 것이지, 나쁘고, 틀린 것이 아니라는 선언이었다(其學大抵異於孔孟之學妖誕不正 / 西洋之學異(於?)孔孟之學妖誕不正).
117. 권일신 성현은 1791년 음력 11월 3일에 체포되어, 한달동안 모진 고문을 당한 후, 12월 3일에 제주도로 유배령이 확정되었으나, 여늬 유배자들처럼, 유배령과 함께 즉시 유배 길을 떠나지 않고, 年老한 老母의 임종을 볼 수 있도록, 가까운 충남 예산으로 유배지가 바뀌었으며, 고문으로 받은 혹심한 상처를 먼저 치료하고 떠나도록 정조 임금의 배려로, 10일간을 서울 매제 이윤하의 집에서 치료한 후 그는 유배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귀양길 첫날밤에 머문 용인(지금의 신갈 구성면 소재지 駒邑) 관아의 첫 주막에서 머물 때 뒤따라온 자객들에 의하여 타살당하여 1791년 음력 12월 15일(?) 경에 순교하였다. 사실 開國功臣의 후예로서 역대 임금들이 보살피던 대학자였으므로, 권일신 학자는 왕이 다시 그를 언젠가는 불러드릴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시기심과 증오심에 불타던 그의 반대자들이 보낸 자객이 그를 몽둥이로 때려 죽였던 것이다. 1807년 정묘년에 편찬된 안동권씨 목판본 족보에는 권일신 성현이 천주교신앙 때문에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權日身以邪學杖斃”. 이러한 전승은 권오규 변호사(1900-1996)와 그의 동생 권오진 회장역시 집안에 내려오는 말을 증언하고 있다.
6.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의 순교.
118. 권일신 성현의 형 권철신 성현 (1736-1801)은, 남아 있던 교회창립선조들, 즉 이승훈 성현, 정약종 성현과 함께 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창립선조들 가운데 그는 가장 연장자로서, 이벽 성조보다도 나이가 18세나 많았다. 그는 유학에 있어서 대학자였고 그의 명성은 온 나라에 자자했다. 젊은 학도들이 전국에서 그의 가르침을 듣고자 몰려들었다. 사실 바로 이 때문에 광암 이벽 성조가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려고 했을 때, “그가 이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의 명망으로 천주교를 믿기 위하여 그를 따르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하며 권철신 성현을 선택했던 것이다.
119. 이벽 성조의 판단은 옳았다. 전국에서 모여든 그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신자가 되었고 이들이 전국 각 지역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으며 천주교는 전국에 퍼져나갔다. 권철신 성현의 활동이 그의 동생의 활동에 비해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지만, 교회 안에서의 그의 존재 자체가, 그리고 그의 참되고 진실한 삶 자체가 신자들 가운데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심리적 무게중심이 되었으며, 의지가 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복음이 전파되는 데 큰 힘이 되었고, 중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한국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졌다.
120. 따라서 바로 이 때문에 1801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반대자들이 그를 교회의 우두머리로 왕에게 고발했던 것이다. 그를 존경하며 아끼던 왕이 승하한 후, 정치적 권력이 가톨릭을 증오하는 이들의 손에 넘어갔고, 마침내 그 또한 체포되었다. 그는 용감하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이미 65세의 노구는 고문을 견디기에는 너무 쇠약했다. 그의 몸에 가해진 잔혹한 매질은 체포된 지 겨우 두 주일이 지나서 그의 생명을 앗아갔다. 즉 권철신 성현은 1801년 신유년 봄 체포되어 감옥에서 잔혹한 매를 맺고 신앙 때문에 순교하였다. 1807년 발행된 안동권씨의 목판본 족보에는 그의 순교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권철신은 천주교 때문에 신유년에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즉, 권철신은 1801년 음력 2월 11일(양력 3월 24일) 체포되어, 같은 음력 2월 25일 (4월 4일) 심한 고문 후에 감옥에서 打殺당하여 순교하였다.<權哲身辛酉以邪學杖斃>,
한국교회의 창립에 관여했던 다른 인물들, 즉 이승훈 성현과 정약종 성현도 같은 해, 즉 1801년 봄에 순교하였다. 이승훈 성현의 신앙에 대한 탄압은, 이미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 즉 이벽 성조가 순교하게 되는 첫 박해 때부터 시작되었다. 문중의 박해는, 비록 이벽 성조의 집안에서만큼 참혹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집안에서도 극심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가지고 있던 천주교에 대한 모든 책을 압수해 가족과 집안의 친척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랐다. 그에게는 그토록 소중했던 책들이 눈앞에서 불길에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의 고통을 다음의 시로 표현하였다:
“天上의 변함없는 法道와 地上의 인간 사회 윤리와 紀律은 서양과 동양에서 한계가 있어 서로가 다르도다. 일몰 후 하늘과 땅 사이의 어두운 구렁에 찬란한 무지개 교량(橋梁)은 이를 마셔버리는 안개 속에 묻혀 가리워지도다. 오직 한 마음으로 바치던 정성 (香)은 책들이 불에 탈 때, 어찌 함께 아니 타고 마음 편하였으랴. 이제는 하는 수 없이 저 멀리 조묘(潮廟)나 바라보며, 내 처지와 흡사하게 살다간 문공 한유(文公 韓愈)를 추모(追慕) 하며 후배(後輩) 답게 제사를 올리노라. 자신의 굳건하고 항구한 신앙을 그 힘겨운 상황에서 표현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중국의 현자인 潮洲의 문공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天彛地紀限西東 暮壑虹橋唵靄中 一炷心香書共火 遙瞻潮廟祭文公>
이 어려운 온갖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벽 성조의 순교 후에 그는 처갓집 丁氏 집안의 형제들, 곧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과 함께 계속해서 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특히 그는 정약용과 더불어, 준성직자단 결성을 추진하고, 조직하여, 권일신 성현을 주교로, 그리고 그 자신과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 정약용, 최창현 등을 선임하였다. 이 제도가 중단된 후에는 북경주교가 허락했던 활동들만을 계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에 사제들을 보내주기를 수 차례에 걸쳐 북경주교에게 탄원하였다. 사실, 교회 창립자들의 활동으로 인해서, 이 땅에 처음으로 선교사, 즉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들어왔을 때에 조선에는 이미 사제없이 조선 평신도들끼리 세례를 준 영세자가 4000 여명이나 되는 천주교회로 성장하여 있었다(1795).
다른 한편, 이 외국인 사제가 조선에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조선에서는 다시 박해가 일어났(1795)고, 최인길 마지아 역관을 비롯한 몇몇 신자들의 희생으로 주문모 신부는 박해를 피해 다음 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1801) 몇 년 간 사목활동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이승훈 성현은 1795년에도 끌려 다니며 심한 박해를 당하였고, 유배형까지 받았다. 그러나 1801년에는 다시 체포되어 혹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의 신앙이 항구하고 굳건한 것을 보고 박해자들은 조서를 조작하여 이승훈 성현이 배교를 했다는 거짓 소문이 돌게 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이렇게 했던 것은, 학자들과 신자들 사이에 그의 명성과 위치가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이들이 그의 학문적 지혜와 높은 덕을 칭송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박해자들이 보았을 때는, 만약 이승훈 성현이 배교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조선의 다른 선비들과 일반 신자들도 더 이상 그리스도교를 신뢰하지도 더 열정을 가지고 믿고 따르지도 않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승훈은 1801년 음력 2월 11일(양력 3월 24일)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후, 같은 해 음력 2월 26일(양력 4월 8일) 서소문에서, 정약종, 최창현, 주문모, 등과 함께 斬首당하여 순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대한 이승훈 성현의 굳건한 신앙과 영웅적인 용기는 온갖 고문 앞에서도 더욱 더 드러날 뿐이었다. 칼에 목이 떨어지기 전 그가 남긴 시 한편은 이러한 그의 신앙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사형장에 도착한 그의 형제 이 치훈은, 이승훈 성현에게, 왕에게 목숨을 살려달라는 한 마디만 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이승훈 성현은 그를 꾸짖으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달려 있고 물이 솟아올라 위로 역류하면 연못이 다하여 마르느니라(月落在天水上池盡). 다시 말해, 그의 목은 박해자들의 칼 날에 땅에 떨어질 지라도, 천주께 대한 그의 신앙 (달)은 항상 하늘에 달려 있을 것이며, 박해자들의 현세적 권력(물) 이 넘어설 수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물이 위로 역류하면 연못의 물은 마르고 연못은 없어질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굳은 신앙을 고백하면서 이승훈 성현은 1801년 봄 서소문에서 칼에 목이 떨어졌고, 이 땅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장 고귀하게 증거하였다.
같은 날, 정약종 (1760-1801) 도 칼날아래 자신의 생명을 천주께 바쳤다. 그는, 정약전과 정약용의 형제로서, 명석하고 학구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부터 과거를 봐서 관직에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대신 여러 분야의 학문들, 처음에는 유학, 도교, 그리고 특히 이벽 성조의 영향하에 천주교를 연구하는데 전념하였다. 특히 이벽 성조의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했던 것은 그로 하여금 천주교를 실천하는데까지 이르게 하였다. 이승훈 성현이 북경으로부터 돌아온 이후, 그 또한 아우구스티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가톨릭 신자로서의 삶을 사는데 더욱 더 전념하였다.
1785년에 문중 차원에서 일어났던 첫 번째 박해 동안, 그는 그의 아버지가 문중에서 매우 권위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많은 탄압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1791년에 일어난 두 번 째 박해에,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를 심하게 비판하였고 그 아들이 천주교를 신봉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약종 성현은 이 모든 탄압을, 부모에 대한 효심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 실천하면서, 영웅적 인내로 견뎌냈다.
천주교에 대한 책들을 더 깊이 연구하면서 그는 어떠한 교리든지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특히 신자들의 교육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신자들을 만날 때마다, 열심히 교리를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런 열정으로 인해 그는 한국어로 된 교리책을 저술하여 편찬하는데, 그 이름을 <主敎要旨> 라고 하였다. 집필하던 또 다른 책, <聖敎全書>는 그의 순교로 말미암아 끝을 보지 못했다. 당시 한글이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상민의 글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양반이었던 그가, 그것도 유학의 대가였던 그가 한글로 된 교리서를 썼다는 것은 그 자신이,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사상과 사랑을 그 중심으로 삼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편, 이미 1799년, 한 관리가 그를 가톨릭 신자들의 우두머리로 지목하면서 왕에게 고발한 적이 있었다. 사실 그는 신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주문모 신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중국인 신부는 교리에 대한 그의 깊은 지식과 신자들에 대한 열정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그를 가톨릭교리 연구모임이었던 <명도회>의 회장으로 임명하였었다. 그러므로 의심할 나위 없이 그는, 신자들에게 뿐 아니라 천주교를 증오하는 이들에게조차 한국교회의 대표자 중 하나로 여겨졌던 것이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마침내 그는 체포되었고, 박해자들은 그의 모든 저술들 속에서 다음의 교리 문장을 찾아냈다: <가톨릭 신자들은 생명을 얻기 위해 세상과 마귀와 육신에 반대해야 한다>. 여기서 세상이라는 단어를 통치자라고 해석하면서 박해자들은 그를 대역죄로 고발하였고 그는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단두대 앞에서 그는 형 집행자들에게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돌아올 것을 권유하는 동시에 사형을 집행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 사형집행자들이 땅을 보도록 자신의 머리를 눕히려 하자 이를 거부하고 반대로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 눈을 뜨고 하늘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에 놀란 사형 집행자들이 그의 머리를 내리치는데 실수를 하여 머리가 반밖에 잘라지지 않자, 그는 십자표를 그으며 두 번째 칼날을 받기 위해 몸을 처음의 위치대로 움직였다. 이렇게 그는 주님과 교회에 신앙의 최대의 증언인 순교를 바쳤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 다섯 분의 교회창립자들의 순교 후에 (1785-1801), 한국가톨릭 교회는 1886년까지 계속되는 박해 아래 살아갔다. 이 길고 어두운 시기 동안 한국교회는 의기소침하고 축소되는 대신,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계속하여 성장하였다. 예를 들어 1831년에는 조선교구가 설정되었고 1836년에는 조선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방인 사제 양성을 위하여, 정하상이 뽑은 소년들 3명이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 피에르 모방 신부의 추천을 받아 마카오로 보내게 되었다. 세 명의 신학생 후보자들은 김대건, 최양업, 최과출이었다. 이들 중 두 명은 열 다섯 살, 한 명은 열 네 살이었으며 둘은 사제가 되었으니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이며 한 살 어렸던 최과출 프란치스꼬는 서울에서 마카오까지 6개월간이나 걸어서 갔던 여행에서 얻은 병으로 마카오에 도착한지 7개월 만에 숨을 거두었다.
조선에서는 박해가 중단 될 때까지 수 만 명의 신자들이 순교했다. 이 피로 물든, 그러나 영웅적이며 영광스러운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에서, 한국 신자들의 활동은 교회의 삶에 있어서 동맥과 같은 것이었다. 이들은 성령에 의해 인도되어 자신들의 땀과 피로 한국 교회를 발전시키고 성장시켰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간결하게 추려서 본 바와 같이, 이 기적적인 삶과 활동과 순교의 한국천주교회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원천에 한국천주교회의 다섯 분의 창립자들이 있으며 그 중심에 광암 이벽 성조가 계시다. 광암 이벽 성조로부터 권철신 성현, 권일신 성현, 이승훈 성현, 정약종 성현이 천주교를 배우고 신앙을 받았다. 이벽 성조는 서울에서 복음전파의 활동을 하면서 온 나라에 복음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권씨 집안 사람들, 곧, 권철신 성현과 권일신 성현을 선택했다. 권씨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처음에는 권철신 성현과 권일신 성현으로부터 유학을 배우고자 전국에서 몰려들었던 학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이들이 호남과 충남지역에서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으며, 이들 또한 마침내는 천주께 대한 신앙을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바쳤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그리고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는 이존창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존창은 권철신 성현과 권일신 성현의 제자였다. 윤유일은, <준성직자단>의 적법성을 문의하기 위해 북경교구장에게 보내는 편지를 비롯해서, 선교사를 요청하는 편지들을 북경에까지 가지고 갔던 인물인데, 그 또한 권일신 성현의 제자였다.
이렇게 창립선조들의 영적인 자녀들 외에도, 창립자들의 후손들 또한 그 선조들의 신앙과 피의 증언의 모범을 따랐다. 예를 들어 권철신 성현의 아들 권상문은 - 원래 권일신 성형의 아들인데 권철신 성현에게 입양되었다-, 1801년에 순교하였고 그의 손자인 권복과 권석도 그 할아버지의 길을 따랐다. 권복은 참수되었고 권석은 감옥에서 순교한다. 권일신 성현의 아들은 신앙 때문에 유배되었으며 그의 딸 권데레사도 신앙으로 인해 참수되어 1984년에 시성되었다.
정약종 이승훈은 1801년 음력 2월 11일(양력 3월 24일)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후, 같은 해 음력 2월 26일(양력 4월 8일 ?) 서소문에서,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주문모, 등과 함께 斬首당하여 순교하였다.
한편, 정약종 성현은, 신학생이자 목자가 없던 조선천주교회를 이끌었으며 조선교구설정의 주역인 정하상 성인의 아버지다. 정하상은 조선교구설정을 요청하기 위해, 목숨이 위협받는 북경 삼천리 길을 그의 친구와 교대로 22차례에 걸쳐 다녀왔다. 사실, 정약종 성현이 신앙으로 인해 참수되었을 때, 정약종 성현의 맏아들 정 철상이 함께 순교하였으며 (1801), 그로부터 38년 후 1839년 바로 같은 자리에서 그의 아내와 딸 그리고 둘째 아들인 정하상이 순교했던 것이다. 정약종 성현을 제외한 이들 모두는 1984년에 시성되었다.
이승훈 성현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그의 아들들도 순교하거나 유배되었다(1866). 그의 손자 이재의 토마스는 정하상처럼 국내 신학생이었고, 부제품을 받았으며 앵베르주교와 그후임자 페레올 주교의 비서 겸 복사를 하였고, 정하상, 김대건신부, 등 1839년 기해년 박해와 1846년 병오년 박해의 순교자 79위 시복 준비를 위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였다. 피의 증언은 4세대 그리고 5세대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천주교회의 다섯 분의 창립자들은 가톨릭 신앙과 가르침만이 아니라, 신앙의 최대의 증언인 순교정신까지도 그 후손들에게 전해주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100년간 지속된 박해 동안, 적어도 3만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며, 이들 가운데 오직 103명만이, 그것도 창립선조들의 3대, 4대, 5대 후손들만이 교회 안에서 성인의 반열에 드는 영광을 입었다.
불행히도 한국교회는, 200여 년 동안 순교의 피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면서 이 선구자들의 무덤의 자취를 잃어버렸고 최근에 (1979년) 이르러서야 기적적으로 공동묘지에서 그 무덤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이분들이 쓰셨던 편지들과 책들도 몇몇 군데에서 발견되었다. 200여 년 전 이분들이 영원한 진리를 연구하기 모였던 곳, 하느님을 찬미하였던 천진암에 이분들의 묘를 이장하였고, 특히 다섯 분들 가운데 권일신 성현의 유해는 손상되지 않은 채 보존되어 있다. 이제, 수많은 신자들, 미신자들, 한국인들뿐 아니라 외국인들이 이 한국인 평신도 교회 창립자들을 공경하기 위해 이분들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의 신앙, 활동, 순교, 삶에 자극을 받고 용기를 받는 것이다.
사실 한국의 가톨릭 신자 수는 1979년 백만 명에서 현재 5백 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학문적 영역에서는 다섯 분의 한국교회창립자들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파리, 프라이부르그, 타이완 등지에서 6편의 박사학위논문이 나왔다. 전국에서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이분들의 정신, 자발적인 가톨릭 신앙실천 정신을 배우고자 오고 있다. 사실 이분들의 열정, 자발적인 신앙실천운동, 그리고 순교로 마감한 이분들의 삶은 비단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뿐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진리를 찾는 모든 이들의 모범임에 틀림없다. 바로 이 때문에 한국천주교회창립 5위 선조들은 보편교회 안에서 성인으로서 영광을 받으셔야 하며, 미신자들이 진리에로, 즉 그리스도에게도 돌아오게 하는 데에 모델로써 제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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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H. Lonford, The Story of Korea, London 1911, 245.
정약용, <녹암묘지명>, 1822. 여유당전서 1권 324 에 수록.
정학술, 니벽전, 1837년 필사본. 영인본은,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소, 한국천주교회창립사자료집 3권, 1996, 20.
정약용에 따르면 강학회는 1779년에 열렸다. 정약용, <녹암묘지명> (1822), 여유당전서 1권, 경인문화사 1969, 324면 참조. 반면 다블뤼주교는 1777년이라고 쓰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이승훈, 북경주교에게 보낸 서한 (1787). 이 편지는 Andreas Choi, L’érerction du premier vicariat apostolique et les sorgines du catholicisme en Corée, Paris 1961, p. 94 에 게재되었다.
정약용, <녹암묘지명> (1822), 여유당전서1권, 경인문화사 1969, 324면 참조.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vol.IV,manuscrit copies,p.6
김대건, Generalis notitia super nascentem Ecclesiam Coreanam, 1845 ;파리외방전교회신학교 장상 (a Langlois Superiore del Seminario della M.E.p.)에게 모방신부가 양지에서 1838년 12월 3일에 보낸 편지 편지. 이 편지는 Archivium di M.E.P., v. 577, f519 에 있다; 황사영 백서, 1801.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vol.IV,manuscrit copies,p.10.
파리외방전교회신학교 장상 (a Langlois Superiore del Seminario della M.E.p.)에게 모방신부가 양지에서 1838년 12월 3일에 보낸 편지 편지. 이 편지는 Archivium di M.E.P., v. 577, f519 에 있다.
조선왕조실록 47권, 1801, P. p. 374. 375. 410; 이만채, 벽위편, 1801년 천주교신자들에 대한 판결문, P. 1.
당시 조선에서 자녀들이 집안이 망하게 될 위험에 처하게 할 때 그 자녀들에 대한 이런 벌은 전혀 낯선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그러했고 경기감사 이익운의 양아들이 양아버지, 경기감사에 의하여 공개적으로 독살되기도 하였다.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t copies, p.24.독살설은 이벽성조의 묘를 1779년 천진암으로 이장할 때, 전문의사 권흥식박사가 그 치아가 검게 타 있던 것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던 것으로, 중에, 문중에서 장차 멸문시킬 斯文亂賊이므로 음독시겼다는 후손들의 전승을 재확인한 것이다. 당시의 사진과 의학적 소견서자료는 유해와 함께 천진암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정약용, <녹암묘지명> (1822), 여유당전서1권, 경인문화사 1969, 324면 참조.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t copies, p. 42-51.
안동권씨 족보, 1807년 목판본, 12면.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t copies, p. 42-51.
안동권씨 족보, 1807년 목판본, 12면.
이 시는, 추안급국안, 25, 선조원년, 아시아문화사 1978, 20면에서 실려있다. 이 시에 대한 해석은, 변기영, 한민족 조선천주교회 창립사,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 2004, n. 36 <제살과 뼈를 태워 빛이 되어 남을 비추고 천주께 제물이 되는 한 토막의 초와 같이> 를 참조. 이 시에서 조주의 문 공이란 당나라의 한우를 가리키는 말로써 그의 사상에 대한 오해로 고통을 받다가 부당하게 죽은 인물이다.
邪學懲義, 1805. 보람문화사 1977, p. 171을 참조.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자료 전승에 관하여.
그 동안 우리나라 천주교회 창립에 관한 역사는 일찌기 북경의 Alexandel Gouvea 주교가 1797년에, ‘조선의 일곱 순교자들에 관한 이야기’ 라는 제목의 보고서 형식으로, 당시 중국의 교황청 관리자로 겸직하던 泗川省 교구장 Martin Caradra 주교에게 간결하게 기술하여 쓴 것이 처음인데, 이것은 조선을 한번도 방문하여 보지 못한 폴투갈 선교사 주교가 북경 주교로 근무하면서 조선에서 북경에 왔다가는 신자들한테 들은 이야기를 일부 적은 것이라서,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에 관하여, 이벽 성조를 비롯 권철신 권일신 등 창립성조들과 천진암 강학회 등에 관하여는 전혀 기록되지 않고, 북경에 파견되어 영세하고 귀국한 이승훈 진사에 관하여만 언급하고 있다.
그나마, Li라는 사신단의 왕족이 수학공부에 관심이 있어서 북경에 왔다가 수학을 배우고자 선교사들을 찾아와서 세례까지 받고 가서 조선에 전도했다고 적고 있는데, 폴투갈의 Coimbra대학에서 수학박사 학위를 받고 북경 선교사 주교로 온 자신의 수학실력이 조선을 비롯한 극동 중국 선교에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은근히 들어내기 위한 인상을 받는다. 그 이유는 이승훈 진사는 북경에 가기 전이나 갔다온 후나, 수학 공부에 관심이 있었다는 흔적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승훈 진사가 프랑스인 예수회원 Joseph de Grammont 신부한테 세례받은 것도 밝히지 않고, 오히려 그라몽신부는 마카오로 추방하여, 죽을 때까지 북경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여, 마카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구베아 주교의 보고서 편지는 당시 한국 천주교회에 관하여 유롭 언어로 쓰여진 유일한 첫 이야기였으므로, 라틴어, 폴투갈어, 이태리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으로 번역되어, 30여년간 한국으로 오는 유롭 선교사들의 필독서가 되어 있었다.
그 후 1845년에 입국한 프랑스 외방전교회의 Daveluy 주교가 1850년대에 ‘조선 순교자 비망록’이라는 제목으로 기술한 자료를, 조선에 한번도 와본 적이 없는 프랑스인 Dallet 신부가 편집한 것이 1872년에 프랑스어로 발행되어, 한국천주교회의 빛나는 창립사를 유롭 교회에 그래도 제대로 대강 알린 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1785년부터 혹심한 박해를 7 차례나 겪은 뒤에, 더구나 박해 중에 계속 숨어다니면서 호롱불 아래서 다불뤼 주교가 기록한 것이어서, 자료 수집은 물론 집필의 여건이 어렵던 시절, 그나마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의 기록문헌, 朝鮮聖敎史記(?)를 가지고 번역하며 기술한 것인데다가, 다불뤼 주교 자신이 아직 한국의 문화와 관습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질 수 없던 때라서, 사실 파악을 제대로 할 수가 없을 때였다. 그래도, Daveluy 주교의 덕택으로 우리나라 교회 창립사를 이만큼이라고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었으니, 우리 모두가 무한히 감사해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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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冊名만 듣고, 아직 직접 보지 못한 자료들
이벽 성조의
李檗日誌 4권 (1770-1784 기록)
天主密驗記 (1785) 天堂地獄記, 令得敬神記, 險世聞得記, 來世豫言記,
崇禮義 (1779 전 후 기록)
권철신 성현의
虞祭義,(1779 전 후)
* 천진암 강학을 전후 이벽 성조와 논쟁 내용.
정약용 승지의
天眞菴 講學誌 (830년 이후에 마재(馬峴) 자택에서 집필)
朝鮮 聖敎史記 (1836년 운명 전 기술)
정약전의
天眞菴 講學誌 (1816년 이전 牛耳島에서 집필)
이승훈 진사의
燕京 西洋 傳敎者 相面記(1783년 북경에 다녀온 후 1785년 이전 기록)
* 김양선 목사 부인 소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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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변기영 몬시뇰 Date : 2013-10-30 15:02 /
이벽 성조의 慶州李氏世譜 편찬년도
初刊譜, 甲子譜 1684
二刊譜 戊辰譜 1748, 갑자보 후 64년만에.
-1754년 갑술년 이벽 성조 탄생, 1785년 을사년 늦봄에 순교 ---
三刊譜
甲戌譜 1814 ---- 이벽성조 순교 29년 후, 1748 戊辰譜 후 66년만에.
戊申譜 1848 ----이벽성조 순교 후 63년, 갑술보 후 34년만에,
四刊譜
癸酉譜 1873 19권 --- 이벽성조 사후 88년 후, 1814 갑술보 후 59년만에.
甲戌年 1934 54권 --- 그 중 국당공파 계보는 17권>-이벽성조 사후 149년 후에,
1873 계유보 후 61년만에.
이경상 癸卯생 1603년 정해년 1647년 졸 44세 묘 신혈리, 소현 세자 서장관, 묘 신혈리.
준만-무-현영-종주-건용.
李鐽 1703 癸未생-1773 癸巳졸 71세 戊申년 1728 무과 호남병마절도사부총관
李溥萬 1727 丁未생-1817 丁丑졸 91세 추증 이조판서 묘 화현리
李浩萬 1730-庚戌생-1753 癸酉졸 84세
李顯稷 1795 乙卯생 1876년 丙子졸 82세, 한성판윤, 병조판서, 어영대장, 등.
李格 天老 1748 戊辰생-1812 壬申졸 65세 己丑 1769 무과 황해병마절도사부총관 묘화현리
李檗 德祖 1754 甲戌생-1785 乙巳졸 32세, 묘 화현리
李懋 德叟 1758 戊寅생-1793 癸丑졸 36세, 묘 화현리
李晳 大叟 1759 己卯생-1829 己丑졸 71세,庚子년 1780 무과,제남병사,묘 화현리
李懋 德叟 1758 戊寅생-1793 癸丑졸 36세, 癸卯 방어사, 추증병조참판,묘화현리
顯英 景實 1777 丁酉생-1849 己酉졸,72세,금별부총관,병사,묘,화현리(現봉수리경계)
顯謨 景文 1784 甲辰생-1847 丁未졸,64세, 通德郞1848년 戊申보에(이벽顯謨)묘샘밭
顯夔 景一 1790 庚戌생-1838 戊戌졸 49세, 장단부사/ 이석의 (계자) 묘 화현리
秉榮(秉周) 1814 甲戌생-1838 戊戌졸 24세, 현능참봉, 묘 춘천 샘밭
국당공파 경주이씨세보(1848년) 戊申譜 5권에만 繼配가 49명이나 나오지만, 해주정씨는 수록되지 않았다. 특히, 이벽성조의 손자 秉周의 파평윤씨와의 결혼은 수록하였으나, 이벽 성조는 안동권씨 혼인만 나온다. <상세한 설명은 추후에 올림>
주요 자료 표시:<사용법 추후 해설>
➀➁➂➃➄➅➆➇➈➉➊➋➌➍➎➏❼❽❾❿
韓國天主敎會創立先祖
洗者 若翰 曠菴 李檗先生 墓 移葬 秘史
- 이벽 성조의 묘를 찾아서…! -
總務 卞 基 榮 神父 記述 / 1997. 6. 15.~1999. 9. 26.
韓國天主敎會 創立主役 李檗 先生 墓 移葬準備委員會
1. 한국천주교회 창립자 광암 이 벽 성조의 묘를 찾아서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로 이장하여 모신 지도 벌써 18년이라는 그리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이 일은 나에게 지나간 25년간의 사제생활을 통하여 가장 감격스러웠던 사건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벽성조의 묘를 찾고 또 이장하여 모시던 일은 내가 천진암 성지개발에 전적으로 매달리게 되는 출발의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하였다.
2. 나는 그 동안 비교적 남달리 많은 충돌을 무릅쓰고 여러 가지 일에 관여하게 되었었다. 특히 한국천주교회 창립200주년 기념을 위하여 1980년 5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5년간은 주교회의에 가서 200주년 기념 5개년계획 입안을 비롯하여 103위 시성추진에 주력하면서, 동시에 한편으로는 천진암 성지 개발, 특히 100년계획 대성당 건립 착수에 따른 힘에 겨운 일들을 교회 소유의 땅 한평없는 황무지에서 추진하느라 많은 충돌을 피할 수가 없었다.
3. 지금 되돌아다보면 사제로서 사실 다시 생각만 해도 겁이 나는 부동산 확보와 수년간에 걸친 대규모 토목공사 추진과 지휘 등, 質과 量에 있어 내 역량을 초과하는 엄청난 일들을 피할 수 없었던 나로서는 이제 다시 지나간 기억들을 더듬어가며, 일기장에 한두 줄씩 적어놓았던 것을 뒤적거리면서, 내가 해온 이러한 일들에 관해서 앞으로 혹시라도 관심을 갖는 後學들이 있을까하여, 이를 미리 내다보면서, 後輩들을 위하여 이 자료집 머리말에 몇 가지씩 생각나는 대로 밝히고자 한다.
4. 그리고 앞으로 이 글을 읽을 後學들이 내게 대한 오해나 잘못된 先入觀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부득이 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들어가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결코 내 자신에 대한 유치한 제 자랑이나 혹은 다른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은 전혀 아니며, 다만 필요하다고 여기는 단순한 생각으로 이를 쓰고자 할 뿐이다. 물론 이를 읽어가다가 보면 주님의 손길이 하시는 일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이나 의도와 다를 수도 있고, 또 주님께는 그렇게 하실 능력과 자유와 권리가 있으시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서 읽는 이들이 깨닫게 되기도 할 것이다.
5. 이제 내가 지금까지 사제로서 해온 대부분의 일들에 대하여 나는 이렇다 할 특별한 소질도 없으며, 공부한 적도 없고, 전문가도 아니었다는 점을 眞率하게 밝히는 것이 겸손아닌 정직한 자세라고 하겠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전문가들을 제치시고, 왜 지식도 경험도 없는 나를 부르셔서 이러한 일들을 하게 하시는지, 그 섭리에 내 자신이 놀랄 뿐이며, 아마 그 신비의 질문을 수수께끼로 삼아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할 뿐이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學歷이 다르고 實力이 다르며, 經歷이 다르고 能力이 다르며, 地位가 다르고 業績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직업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쓰는 나는 切感하지 않을 수 없다.
6. 본래 나는 歷史에 관한 공부나 성지개발, 또는 聖賢들의 묘를 찾아 移葬하는 일에 대하여 취미도 관심도 지식도 경험도, 또 그러한 일에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전혀 없던 사람이었다. 내가 학창시절에 소질이 있었다면 외국어 분야였고, 대신학생 때 취미를 가지고 공부한 분야는 당시의 神秘神學이었으며, 신부가 된 후 석사학위 과정 3년, 박사학위 과정 5년을 모두 수료하였지만, 과목은 신비신학이었다. 신학생의 신분으로 쓴 논문이나 번역하여 출판한 책들도 聖人傳記라든가 [義人의 영혼 안에 內住하시는 聖三位]에 관한 것 등, 그러한 분야였고, 지도교수 역시 당시 그 분야에 심취해 계시던 국내에서 가장 존경받으시던 최민순 신부님이셨다.
7. 한마디로 나는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과 지금 일하고 있는 이 분야가 내게 선천적인 소질이 있는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다만 이러한 교회의 일들이 내게 닥치므로 이를 외면하지 않고, 천주와 교회를 위하여 닥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였고, 지금도 매일 닥쳐오는 일을 피하지 않고 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또 하지 않을 수도 없지 않은 것이 우리의 처지이다. lfj한 일을 하게하시는 것이 주님의 은총으로 확신하고 있다.
8. 그래서 내가 대신학생 때는 책을 번역하고 글을 쓰는 일에 취미가 있어서, 학생의 신분으로서 이미 여섯권의 책을 내고 있었는데, 당시 옆에서 나를 알고 있던 이들은 장차 내가 글쓰는 학자신부가 될 거라고 여겼었으나, 내 앞에 찾아온 직무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9. 사제가 되자마자, 나는 수원교구청의 주교(윤공희주교)비서 겸 교구 기획관리실장(조원길신부) 보좌로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였던 평신도지도자 교육과 가톨릭쎈타 건립 등의 계획수립과 추진에 불가피하게 관여하게 되었고, 離農人口가 급증하던 당시, 지금 내 기억에 1971년 말을 전후하여 당시 수원교구 신자 45,000여명 중 1년에 8,000여명내외가 離農하여 서울로 移住하고 있었던 때이므로, 나는 불가피하게 농민운동에 뛰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이 일은 교구 내의 일부 선배 신부님들과 교구장님의 시책변경으로 여의치 않게 되었었다.
10. 그래서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석사학위를 받은 이후, 박사과정 공부를 할 겸, 신자 500여명 내외의 당시 시골 본당이었던 신장 성당으로 가게 되었고, 본당 내의 관할구역 안에 있던 구산 김성우 안또니오 순교복자 묘소에 기념 비석 건립과 남한산성 성지 매입 및 천진암 터 확보 등에 손을 대지 않을 수가 없었었으니, 버려지고 있는 성지들을 차마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11. 동시에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기념 준비위원회 초대 사무국장으로 임명받으면서, 역시 신비신학 공부와는 거리가 있는 실제 사목 현장의 기념사업에 약 5년간 매달리게 되었는데, 200주년 기념의 성격과 방향을 설정하고 그 한계를 그어보는 일은 지금 생각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실로 일종의 창의적인 産苦와 함께 적지 않은 반대와 방해를 감수하며 극복해야만 했었다. 마치 새로운 기종(機種) 최신형 대형 비행기를 만들어 이륙시키려는 것과 흡사한 모험이었다.
12. 그런데 이러한 모든 일이 사실 학생 때 내가 즐겨 공부하던 당시 이른 바 神秘神學 분야는 아니었었다. 이처럼 지금도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학창시절부터 3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내가 하고싶어 하던 공부도 아니고 좋아하는 일거리가 아님을 솔직히 밝히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내게 닥쳐오는 일이니 피할 수가 없을 뿐이다. 남들은 내가 개발사업이나 대규모 토목공사 등에 소질이나 취미라도 있는 양 느끼는 모양이고, 또 내가 없는 일이나 없어야 할 일을 만들어서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만들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가진 불가피한 일들로 내게 느껴지기 때문에 손을 대게 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내가하는 일을 내가 종아하는 줄 알지만, 내가 좋아한다기보다도 내가 부지런히 할 따름이다.
13. 이 기회에 천주교 성지에 대한 관심과 순교 선조들에 대해서 내가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내력을 간결히 말해 두고자 한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의 이 방면에 관한 내 자질형성에 다소라도 끼친 영향들을 우선 내 자신이 회상해 보고싶기 때문이며,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배경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14. 1957년 9월 27일에 미리내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나는 영세 대부님과 함께 순교 복자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를 참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만 해도 묘소 주변은 잡풀이 수북한 채 신자들의 공동묘지가 정면과 좌우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이미 나이가 벌써 18살이었고 국민학교 졸업장밖에 없던 소년이었으므로, 혹시 내가 천주교 신부가 되도록 김대건 신부님이 천상에서 나를 이끌어 도와주신다면, 신부가 된 후에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를 깨끗하게 갈 가꾸겠다고 마음을 먹고 아주 소박하고 단순한 생각으로 기도를 바쳤던 기억이 난다.
15. 1년 후에 용인군 이동면 천리 경당에서 12월 8일에 견진 성사를 받았고 1959년에는 미리내 성당에 와서 한국말을 배우고 있던 프란치스꼬회의 배유선 신부님(Justin Bellerose)께 우리말을 가르쳐 드리며, 한 두달 동안 머문 적이 있었는데, 틈틈이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를 찾아 같은 기도를 바쳤던 생각이 난다.
16. 수도생활에도 취미가 있던 나는 복자회와 살레시오회를 거쳐 10여년 후에 내가 사제가 되어 수원교구 주교 비서 겸 기획실 보좌로 있을 때 가끔 내 출신 본당인 미리내 공소(그 당시에는 사제가 머물지 않는 공소로 되어 있었음)에 가서 미사를 드렸는데 그때도 같은 생각이었다.
17. 1972년 여름 7월17일, 중복날 용인 본당 신부로 부임해온 후에 당시 총회장이었던 이 재학 회장과 김영길씨 그리고 다른 일부 회장들로부터 문경 가는 연풍 계곡에 좋은 磐石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돌을 성지 미리내 표석으로 쓰도록 가져오는 계획을 세우기로 하였다. 나는 내 자가용 찝차(당시 우리 수원교구에 자가용 승용차를 가지고 있는 신부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90씨씨짜리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었다)와 운전기사, 그리고 지금 기억에 운반비용 60여만원, 남자회장 3명, 또 운반 중 검문소 통과를 위하여, 용인경찰서로부터 경찰서장의 협력으로 경찰1명, 이렇게 준비하여 10일이나 걸려서 가져온 것이었다.
18. 처음에는 3일이면 된다고 하였으나, 크레인의 붕대가 부러지고, 와이어줄이 끊어지는 등, 차질이 생겨, 서울에서 크레인이 2번이나 새로 연풍까지 내려가야했기 때문인데, 이회장이 나중에 와서 보고하는 말이, 모두들 자연석 무게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여, 처음에는 2톤짜리로 본 돌이 실상은 13톤 이상이나 나가기 때문에 크레인을 5톤짜리, 10톤짜리, 20톤짜리 이렇게 3차례나 바꾸어 들어내느라고 시일이 더 걸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두 개의 돌 중 하나는 미리내 성지에 세웠고, 또 하나는 교구청(화서동 소재 구 교구청) 안마당에 세우게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미리내 성지를 직접 책임맡지도 않은 새파란 젊은 신부가 연풍까지 사람을 보내어 마을사람들에게 다소간의 사례를 하고서 제법 큰 돌을 가져온 것이 성지 가꾸기에 첫 관심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19. 지금 미리내에 세운 그 돌에는, [님은 가시고,,,]로 시작되는 하한주 신부님의 詩가 새겨져 있지만, 본래 그 돌 운반계획을 세워 추진한 나의 운반 목적은, 김대건신부님의 얼굴 모습을 음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돌의 원산지인 연풍에는 음각불상(국보55호?)이 있는데, 그것이 있는 자연 岩山의 바로 아래 계곡의 하천 밑에서 당시 마을사람들의 협력으로 가져온 同質의 水晶鑛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져온 사람과 쓰는 사람이 바뀌니, 용도도 바뀐 경우라 하겠다.
20. 당시 나는 교구 당가신부(현재 관리국장에 해당함)였던 한의수 신부를 설득시켜 미리내 성당 뒤의 산을 매입하도록 하였었는데, 내 기억에 지금 성직자 묘소로 사용되고 있는 산으로 생각하고 있다. 성지 주변의 산은 되도록 넓게 매입하여야 성지가 고요히 보전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21. 용인 본당 신부로 재직하면서, 김대건신부님이 소년시절과 사제된 후에 사시던 집터가 있는 마을로 알려진 현재의 양지성당 골배마실 성지에서 류 봉구 신부님을 모시고 순교자 현양대회를 3개 본당(용인, 양지, 이천)이 공동개최하였는데, 물론 행사준비와 주선은 주로 내 자신이 직접하였고, 류봉구 신부님으로 하여금 주례와 강론을 하시게 하였다. 결과는 매우 좋았다. 교우들이 더욱 열심해지는 것 같아서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자주 순교자현양대회를 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22. 1973년도 말 성탄 전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용인본당 주임신부로 있을 때, 돌아가신 정원진 신부님(1900년에 탄생하시어 1976년에 선종하신 신부님이신데, 그 당시에는 은퇴하여 계셨다)께서 일부러 용인 성당에 오셔서 나에게 “변신부님과 한 3일 같이 좀 머물다 가도 되겠는가?”하시기에 나는 아주 대환영한다고 말씀드리고 “방이 있으니 더 오래 머무셔도 좋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정원진 신부님께서는(혜화동 성당을 건축하신 분) 약 3일 동안 머무시면서, 식사 때는 물론 식사 후에도 계속하여 나에게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인 천진암 주어사 터가 있는 앵자산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고, 가는 길, 즉, 곤지암에서는 하루 한 번 양평을 오고 가는 시외 버-스가 있지만, 시간도 잘 안 지키고 또 오지 않을 때도 적지 않은 그 차를 잡아타기가 힘들므로, 곤지암에서 내려서 걸어가려면 남이고개를 넘어 상품에서 주어말을 찾아가야 하고, 그 동네에 가서 박씨노인을 만나면 잘 설명해 줄 것이라고 하셨다.
23. 정 신부님께서는 주어 말에 가셔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앵자산을 넘어 논이 되어 있는 천진암 터를 거쳐서 절막(우산 2리 마을 옛터)으로 해서 퇴촌으로 걸어서 번내(燔川里)에 와서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을 거쳐 부천 자택으로 돌아가시기까지 이야기를 내게 소상히 다해 주시고, 略圖까지 그려 주셨으며, 천진암 주어사 터가 있는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를 지키고 가꾸는 일은 변신부가 해야만 하겠다고 간곡히 설득하셨다.
24. 그러나 당시 나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있었으므로 솔직히 말하면 귀밖으로 들리는 내용이었고, 은퇴하신 선배 신부님 앞에서 예의상 공손한 체 하면서, “네,네”하면서 대답하는 것을 할아버지 신부님께서는 그나마 아주 흐뭇하게 여기셨었다.
25. 1974년 말에 두 번째로 교구청에 근무하도록 교육원장 겸 사목국장으로 임명된 후 나는 오기선 신부님을 따라서 여주 범골 신학교 터를 처음 답사하였고, 그 후도 오기선 신부님을 모시고 더 갔었다. 그리고 당시 내가 창간하였던 수원교구 사목지에 남한산성 순교지, 범골, 구산 등 교구 내 성지를 매호에 탐방보도 형식으로 몇 차례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 반응은 매우 좋았다. 특히 서울의 일부 선배신부님들로부터 참 잘하는 일이라고 칭찬을 들었다.
26. 그때 나는 용인에서 창설한 가톨릭농촌사회지도자교육원을 김주교님께서 교육원으로 명칭을 바꾸어 수원 교구청으로 이동시키시고, 나로 하여금 교구 사목국장을 겸임하면서 수원에 와서 교육원 운영을 하게 하였으므로, 두 번째로 교구청에 와서 근무하는 동안 농민 운동과 동시에 교구 내 성지들을 자주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미리내 성지의 핵심인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 좌우 정면이 잡풀이 수북한 공동묘지로 둘러쌓인 상태였으니 다른 곳들이야 어떠하였겠는 지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27. 사실은 서품 후 바로 교구 주교 비서로 재직할 때도 몇 차례 윤공희 주교님께서 아침 식사 때, 고 남상철 회장의 편지를 거론하셨는데, 내용인 즉,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인 천진암 주어사 터가 있는 앵자산 일대를 천주교회가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구가 원래 가난하던 시절이었고(지금 내 기억에 1970년도 초, 수원 교구 내 20여개의 본당 중에서 재정자립을 하고 있던 본당들은 불과 4,5개 정도였다), 또 윤공희 주교님께서는 새로운 일거리를 착수하는데, 당시 매우 신중히 하시는 편이어서, 때로는 답답하리만큼 아주 주저하시는 것으로 느껴졌고, 따라서 천진암 주어사 지역에 대한 성지 개발이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28. 그래서 신장성당(당시 신자 500여명) 주임으로 있던 김정원 신부로부터 한두 번 천진암 터가 있는 산골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선종완 신부님이 새로 세운 수녀회의 수련소 자리를 소개하여 달라고 나에게 말씀하셔서, 사실은 천진암 터라는 곳에 수녀원 수련소를 짓게 하여볼까 하는 생각도 있고 해서 한 번 가보기로 하였다. 즉 그 당시만 해도 나는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터의 의미와 가치와 중요성을 사목국장답지 못하게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실정이었고, 더욱이 이러한 성역에 수녀원이 들어가면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지 수녀회들의 생존과 운영에 대하여도 정말 잘 모르는 철부지였다. 그러나 선신부님께서 수녀회를 세우시고 항상 당신이 미사와 고백성사를 주시며 피정까지 시키셨는데, 당신 아닌 다른 신부가 최초로 피정강론을 1주일씩 하도록 하신 것은 내가 처음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피정지도를 한 그러한 관계로 그 수녀회의 수련소 후보지를 찾아볼 겸해서 천진암을 가보기로 한 것이었다.
29. 그래서 1974년 말에 교구청에 간 다음 1975년 11월 하순에(21일 성모 자헌 축일) 처음으로 천진암 터를 방문하였다. 그 후 1976년 봄에 내가 신장성당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구산 성지와, 당시는 구산이나 미리내에 대해서도 성지라는 이름을 거의 쓰지 않고, 그냥, “미리내 복자 김대건 신부님 묘소”, 혹은 “구산 복자 김안당 묘소” 등으로만 부르던 시대였는데, 나는 천진암 터가 있는 퇴촌면 우산리 산골을 가끔 찾으면서 잊혀 진 교회 창립의 연고지에 한 조각돌이라도 세워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막연히 갖고 있었다.
30. 1977년도와 1978년도에 가난한 구산교우들의 성금을 받아 구산에 있는 순교 복자 김 성우 안토니오의 묘소에 비석을 건립하면서 당시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던 나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주역이었던 이 벽 선생에 관해서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31. 1978년 봄에는 천진암이라는 월보를 이웃 본당 신부님들과 함께 발행하게 되는데, 사실 이 월보는 경안본당 주임이었던 유진선 신부님 등이 월보 이름을 [천진암]으로 하도록 나 없이 결정하고 편집을 내게 맡겼으며, 같은 날 거의 같은 시간에 나는 서울에 가서 천진암 강학 기념사업회를 결성하였다. 유진선 신부님이나 이웃본당신부님들과 사전에 무슨 업무계획이나 업무분담이 이야기된 적도 없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정말 동시에 두곳에서 다른 사제들에 의해서 동일한 목적을 향한 두가지 업무가 우연히 시작된 것이다.
32. 나는 박희봉 신부님, 오기선 신부님, 등 선배들과 여름내 모금을 하였으나 당시 20여만원 밖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 돈으로 철간판 하나를 만들어 세울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해 9월에 가서야 천진암 터에 땅을 일부 매입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천진암 강학회를 개최했던 선인들의 묘와, 그분들의 후손 및 저서, 유물 등을 찾고 싶었고, 교회사 연구소를 비롯한 관계 전문학자들에게 몇 차례 문의하였으나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33. 마침내 그해 가을 성지 현장에 관해 가장 많이 알고 계시던 오기선 신부님께서도 이 벽 선생의 묘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몇 차례 내게 말씀하시므로, 당시 30대 후반의 의욕이 넘치는 나는 지금까지 이 벽 선생의 묘를 찾아보려는 노력조차 해본 사람이 없었으니, 못 찾을 때 못 찾더라도 노력이나 한 번 해보겠다는 자세로, 이 벽 선생의 묘를 찾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그러고 보니 어디에선가 그 묘가 내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고, 어느 산기슭에서 김대건 신부님의 묘처럼 잡풀이 수북한 채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 마치, 회상하듯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34. 그때부터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벽선생의 묘를 찾는 일을 화제로 삼았고 듣는 사람들은 나를 미치광이처럼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 벽 선생의 인적 사항을 교회사에서 우선 확인한 결과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며 아버지는 이부만(李簿萬), 형은 이격(李格), 동생은 이석(李晳), 그리고 두 형제는 무관(武官)이었다는 기록이 나왔다.
35. 그 때부터 이벽 선생의 묘를 찾기 위한 생각이 마음과 머리에 가득 차 있었으며, 누군가, 무엇인가가 무섭게 내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는 힘을 나로서는 도저히 뿌리칠 수도 외면할 수도 없을 만큼,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어디에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벽 선생의 묘를 찾으러 떠날 차비를 해야 되는 사람처럼 느껴져 오는 것을 누를 수가 없었다.
36. 그러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경주 이씨 이벽 선생의 족보를 입수하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던 차에 경안본당 주임 유진선 신부님이 하루는 와서 자기가 지난 가을 판공성사때 경주이씨가 많이 살고 있는 마을을 알게 되었다고 귀띔해 주었다. 나는 즉시 유진선 신부님을 내 포니 자동차에 태워드리고 경주 이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경안면 목리(木理) 마을을 찾아갔다.
37. 그날은 1979년 1월 8일이었다. 그날 경주 이씨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을 찾아가서 족보를 보자고 하였더니 시골집 벽장문을 열고 족보가 담긴 나무상자를 꺼내서 내 앞에 내놓았는데, 그 여러 권의 족보를 모두 뒤적거린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돈을 만원(당시 노동자들의 이틀 품값)을 꺼내 그 노인에게 술값으로 드리고 이벽 선생 가족 이름을 적어주며, 즉 이부만, 이격, 이석, 할아버지인 이달(李鐽) 등, 이러한 이름들을 찾거든 바로 알려 달라면서 내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38. 열 하루가 지난 후 즉 1월 19일에 마침내 그 노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적어준 경주이씨 들의 이름이 나오는 족보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길로 목리에 가서 처음으로 왜정때 순 한문으로 미농지(美濃紙)지에 발행된 이벽선생 족보를 보게 되었고, 그것을 광주에 가지고 나와서 전자복사를 뜬 다음 족보는 본인에게 돌려주고 그 족보에 나오는 묘소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39. 이벽 선생의 할아버지 이달과 아버지 이부만 공의 묘는 포천 화현리(花峴里(화현리))에 있는 것으로 나왔고, 이 벽 선생과 이벽 선생의 형인 이격, 그리고 아우인, 이 석, 이 3형제분의 묘소도 같은 곳 화현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40. 나는 즉시 포천에 가서 화현리를 찾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화현면(花峴面)으로 되어 있는 곳이지만 그 당시에는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로 되어 있었다. 화현리에 가서 노인들과, 국민학교, 파출소 책임자들에게 족보 복사본을 나누어주며 200여 년 전 경주 이씨들의 묘소가 있는 곳을 물어보았으나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41. 그래서 약 한 달 가까이, 20일 동안 서너차레 내 자신이 묘를 찾으러 다녔었으나 허사였다. 때로는 현등산과 운등산에서 올무를 놓아 산토끼 등 산짐승을 잡아 포천장에 갖다 팔아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냥꾼을 소개받기도 하였는데, 이 사람이 산에 있는 묘소를 가장 잘 안다고 하였다.
42. 그러나 모두 허사였다. 2월 15일, 몇 차례 허탕을 친 나는 그날도 신장성당에서 아침에 빵과 커피로 간단한 식사를 하고 묘를 찾으러 가서 오후 3시가 되도록 점심을 굶은 채 여기저기 산비탈을 헤매던 중 실망에 차서 일동 만세교 쪽으로 차를 몰고 돌아오는 길에, 한길 가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마당에 눈을 쓸고 멍석을 펴놓고는 시골 남자들이 윷놀이하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가려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볼 마음으로 차를 세우고 그 노인들에게 가서, “이 마을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노인들의 말이 “화현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깜짝 놀라서 “화현리는 저 아래 국민학교와 파출소가 있는 곳이 아닙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노인의 말이 국민학교가 있는 곳은 화현 1리이고, 화현리가 하도 커서 화현 2리, 3리, 4리, 5리까지 있는데, 일동 끝으로 가장 끝에 있는 자기네 마을이 화현 5리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43. 그래서 나는, “이 화현 5리에 200여 년 전 경주 이씨 양반들의 묘가 혹시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노인들 중에서 가장 유식해 보이는 송원배 노인이 불그스레한 얼굴에 흰 수염을 약간 느리우고 마고자를 입은 아주 부유한 옷차림으로 나에게 대답하였다. “경주 이씨 묘는 우리 마을에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없이 돌아서서 내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오는데, 그 노인이 내 뒤통수에 대고 하는 말이, “참, 요새 세상에 기특한 젊은이로군, 조상의 묘를 찾아다니다니, 여보, 젊은이, 선대(先代)에 무슨 벼슬을 했노?”하고 물었다. 즉, 조상이 얼마나 유명한 벼슬을 했길래 조상의 묘를 찾아다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돌아서서 그 노인을 바라보며, “한양에서 좌포장 벼슬을 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즉 내 속마음으로, 이벽 선생은 벼슬이 없었지만 이격 장군은 좌포장 벼슬을 했었으므로 얼떨결에 그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그 송원배 노인이 말하기를, “그러면 이포장의 묘를 찾는다 이거지? ” “그렇습니다. ” “그 이포장의 묘가 저기 있는데!” 나는 깜짝 놀라서 “어디에 있지요? 가보실 수 있습니까?”하였더니, 송원배 노인은 “그런데 이포장은 전주이씨지” 하고 다시 실망시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44. 이벽 선생은 분명히 경주 이씨이므로 그냥 돌아서서 오려다가 얼핏 번갯불처럼 스치는 생각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벼슬이라는 것은 오래가지 못하고 항상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말처럼 바뀌는 것이니, 비록 전주 이씨 이포장의 묘라도 가보면 혹시 그 곳에 비석이라도 있다고 할 때, 그 비석에 전임자나 후임자 중에서 경주 이씨 이포장, 이격 장군에 대한 무슨 단서가 될 만한 기록이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그 묘에 가보자고 하였다. 그런데 송원배 노인의 말이, “이포장네 묘를 흥수네가 관리를 해왔지. 그 흥수가 죽으려고 정신이 까물까물 하는데 아직 안 죽었어”하는 것이었다.
45. 나중에 알아보니 유흥수(柳興洙)라는 노인은 그 마을에서 태어난 송원배 노인과 동년배 죽마고우로서 약 3년 전부터 병석에 누워 몇 번이나 인사불성이 되어 무의식 상태로 며칠씩 있다가 깨어나곤 했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자가용차가 드물던 시절이라서, 어느덧 윷놀이는 중단이 되고 마을의 이장, 반장 등 약 10여명의 어른들이 내 주위에 모였고 나는 송원배 노인을 재촉하여 다 죽어가고 있다는 유흥수 노인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런데 송원배 노인의 말이 “젊은이가 찾는 묘는 경주 이씨 이포장의 묘라면서, 자기 친구인 유흥수네가 관리해 온 묘는 전주이씨 이포장의 묘이니 가볼 필요가 없지 않은가? 뭣하러 가보자는 거야?” 하며 유흥수 노인 방문 면담을 귀찮게 여기는 태도였다.
46. 그러나 내 재촉 때문에 송원배 노인의 집에서 큰 길 건너 서쪽 밭 가운데 있던 유흥수 노인이 사는 집을 찾아갔다. 그 집은 울타리도 대문도 없고 마루도 없이 방 두 개에 부엌 하나인 그야말로 초가삼간이었다. 초가집 지붕은 여러 해 동안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덮지를 않았기 때문에 지붕이 썩어서 여기저기 골짜기가 나 있었고 눈 녹은 물이 골짜기로 처마 밑에 떨어지고 있었으며, 추녀는 내 이마에 닿을 정도였다. 그래서 몸을 구부리고 흙으로 된 봉당을 한 발짝 올라서서 옛날 조선식 창호지를 바른 방문의 무쇠고리를 잡아 열고 들어갔다. 그 방은 윗방이었고, 방바닥은 국민학교 학생들의 공책장을 뜯어서 여기저기 땜질하여 발라놓은 차디찬 냉방이었다.
47. 유흥수 노인은 피골이 상접하여 다 죽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아마 몇 달 동안 세수나 면도도 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덮고 있는 이불은 솜이 여기저기 뭉쳐서 마치 행여 지붕처럼 펄럭펄럭하는 상태였고, 싸늘한 방에, 대소변을 방안에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악취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그 마을의 이장과 다른 몇몇이 같이 들어갔었는데 이장이 들어가면서, “할아버지 서울에서 사람이 왔어요.”하고 소리를 질러도 이 노인은 쳐다볼 기운도 없었다. 아마 죽기전 까지 내 얼굴을 똑똑히 바라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장과 반장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켜 앉혔는데, 그 때 송언배 노인이 “이 사람아, 서울에서 사람이 왔네.” 하였지만 그래도 쳐다보지 않았다. 양쪽에서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은 유흥수 노인은 힘이 없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으로 간신히 가르키는 데는 방 윗목에 약 2미터 거리의 구석에 있는 큼직한 두레박용 깡통을 가리켰다. 소변을 보기 위해서 그것을 달라는 시늉을 했다. 이장이 그것을 가져다가 소변을 보도록 깡통을 기울여서 몸에 갖다가 대니,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몸을 가리울 생각도 없이 다 내놓고 약간의 소변을 본 후 다시 쓰러져 누우려고 했다.
48. 그러자 송언배 노인이, “ 이 사람아, 자네네가 이포장네 묘를 관리해 왔지?” 하고 큰소리를 지르자,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약간 끄덕일 뿐이었다. 이어서 송언배 노인이, “ 그 이포장이 전주 이씨지?” 하고 소리 지르니까, 역시 기운이 없어서 한 마디도 말소리는 내지 못하고 다만, 종전처럼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대신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약간 좌우로 저으면서 그렇지 않다는 표시를 했다. 그래서 내가 옆에서 보고 있다가, “그러면 그 이포장이 무슨 이씨입니까?” 하고 큰 소리로 물었다. 옆에서 부축하고 있던 이장이 내 말을 되받아서 “할아버지 그 이포장이 무슨 이씨에요?”하고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물었는데, 입을 열고 말하는 유흥수 노인의 입에서는, 소리는 나오지 않고, 아래 위 앞니가 다 빠진 상태여서 입만 우물거릴 뿐 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마치 “형주 이씨”하는 듯 했다.
49. 옆에 있던 이장이, “경주 이씨에요?” 하고 묻자 그 말에 고개를 상하로 약간 끄덕이며 “그렇다”는 표시를 했다. 그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무척 기뻤다. ‘아마 이벽 선생의 형인 이격 장군의 묘가 아닌가?’하는 성급한 확신부터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송언배 노인이 옆에서 이제 자기주장과 달라지자, 마치 장기두다가 다투는 시골 노인들처럼, 벌써 자기주장이 옳고 유흥수 노인의 주장이 틀리니, 자기편을 들어달라는 식의 말을 하였다.
50. 즉 그때부터는 나를 젊은이라고 하지 않고 “선상님”이라고 했다. “여보 선상님, 이 흥수 녀석의 말을 믿지 마시오, 2,3년 동안 죽었다가 깨나고 죽었다가 깨나고 해서 정신이 까물까물해요, 지금도 제 정신이 아닙니다. 내가 이 마을에서 16대째 살아왔고 글방 훈장도 젊어서부터 해오던 사람이니 내가 정확히 알지요. 그 묘는 경주 이씨 이포장의 묘가 아니고 전주 이씨 이포장의 묘요”하고 말을 하였는데, “전주 이씨”라는 발음이 나올 적마다 다 죽어가던 유흥수 노인은 마치 기를 쓰고 반대하듯 “아니라”는 표시로 고개를 좌우로 겨우 조금씩 내저으며 부정하는 표시를 강하게 하려고 안간 힘을 쓰는듯하였고, 우리들이 다짐하며 묻는, “경주이씨” 소리가 나오면 “그렇다”는 표시로 고개를 아래위로 조금씩 끄덕거리었다.
51. 그래서 나는, “만일 그 이포장의 묘가 경주 이씨라면 그 묘나, 그 부근에 있는 이 포장의 가족 묘 속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하나라도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 노인의 소리는 들을 수 없었으니 입모양이 마치 “이 적의 묘”라고 하는 듯, 격과 비슷한 입모양을 하면서, 우리가 “누구의 묘요? 그 이름이 뭡니까?”하고 “누구”소리를 몇 번 하자 유흥수 노인은 손으로 방바닥에 천천히 나무목 자(木)를 쓰고 그 오른쪽에 각각 각(各) 자를 써서, 즉 이를 格자, 격을 쓰면서 이포장, 이격 장군의 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52. 그러는 동안 틈만 있으면 송원배 노인은,“저 흥수의 말은 믿지 말라”고 강변하였고, 나는 묘 속에 있는 “그 이포장이 이격이라는 것을 할아버지가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하는 질문을 거듭하였다. 이장도 내 말을 되받아서 유흥수 노인의 귀에 대고 “그 묘가 경주 이씨 이포장, 이격의 묘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유흥수 노인은 우리들에게 시달리며 들볶인 탓인지 혀와 입술이 처음보다는 조금씩 더 알아볼 만큼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들릴까 말까하는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우리에게 밝혀준 내용은 그 경주 이씨 이격 장군의 딸이 자신의 고조 할머니이기 때문에 자기가 모를 수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 고조 할아버지 즉, 이격 장군의 사위가 되는 자기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그 지역의 경주 이씨 가족묘를 관리해왔다는 것이었다.
53. 나는 가지고 온 이벽 선생 족보를 펴서 살펴보았다. 이벽 선생의 형 이격 장군의 딸이 문화 유씨 유명규에게 시집갔다는 기록이 나왔다. 이 유명규가 유흥수 노인의 고조부가 된다는 얘기였다. 다 죽어가는 70노인에게서 내가 들고 온 족보에 기록된 내용과 일치하는 말을 들었을 때 비록 이 벽 선생의 묘를 아직 찾지는 못했어도, 마치 이미 묘를 찾은 듯 기뻤고,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까지 와 있음을 느끼자, 나는 뛸 듯이 기뻤으며, 현장에를 가보자고 재촉했다.
54. 그래서 그 노인에게 약값으로 쓰도록 돈 만원을 드리고 우리는 그 묘가 있는 마을 앞 언덕으로 갔다. 사실 유흥수 노인은 나에게 경주 이씨 이벽 선생가족의 묘군이 있는 곳을 가르쳐 준 후 한 달도 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유흥수 노인이 살던 집은 3년 후에 다 헐리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새마을 주택이 들어서 있다. 그 당시 유흥수 노인은 사위가 죽은 자기 딸의 며느리도 과부가 되어 있었는데, 이 딸의 며느리한테 얹혀서 밥을 얻어먹고 있었다.
55. 나중에 이벽 선생의 묘를 찾아 이장한 후에 내가 그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유흥수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그 마을 노인들의 이야기를 종합한 결과, 이 벽 선생의 묘를 찾아 모시려는 천주교 신부인 나를 만날 때까지 약 3년간 며칠씩 죽었다가 깨어나곤 하기를 수차례 했다는데, 이는 분명히 천상에 계신 이벽 선생께서 내가 도착할 때까지 그 노인의 생명을 연장해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었다.
56. 그날 우리가 약 500미터 떨어진 작은 언덕의 밭둑에 있는 묘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며, 가지고 간 족보에 적혀 있는 묘의 방향을 맞추어 보고 있을 때, 김승호라는 그 일대의 땅 공동묘지 관리인이 나타났다. 그 지역은 함경북도에서 피란해 나온 신창읍 읍민회 공동묘지로 되어 있었고 5만여 평에 달하는 땅을 경주 이씨들로부터 매입하여 신창읍민들의 공동 묘지로 사용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찾아온 묘지 관리인 김승호 씨는 내가 경주 이씨 후손인 줄로 착각하고, 이장공고 시효가 벌써 몇 차례 지났으니, 남아있는 경주 이씨 묘들 약 4, 5기를 빨리 이장해 가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발굴해서 없어져도 자기들은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경주 이씨 후손이 아니라는 점과 천주교 신부라는 점을 밝히고, 지금 찾는 묘가 200년 전 유명한 사람의 묘이므로 이 묘를 찾으면 바로 후손을 찾아 이장해 가겠노라고 대답하였다.
57. 밭둑에 있는 이벽 선생의 묘로 추정한 그 묘 앞에서 나는 기도를 바쳤고, 흐뭇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즉시 오기선 신부님, 박희봉 신부님 류흥렬 박사에게 이벽 선생의 묘를 찾았다는 소식을 전하자 세 분은 뛸 듯이 기뻐하시며 즉시 가보자고 하여 2월 23일 우리는 포천 화현리를 함께 찾았고 묘 앞에서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이격장군과 그 후손들이 살았었다는 큰 조선 개와집 집터를 방문하였으며 그 집은 내가 도착하기 3년 전에 무너져서 허물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집터에서 옛날 조신시대의 돌쩌귀, 문고리, 무쇠 사각못 등을 주어가지고 왔다.
57. 그 후 나는 여러 주교님들에게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이신 광암 이벽선생의 묘를 포천 화현리에서 찾았으며, 이를 이장하여야만 된다는 내용의 편지를 띄었다. 그리고 이벽 선생은 한국 천주교회가 각 교구로 분할되기 전 교회 창립의 주역이시니 모든 주교님들이 함께 이장을 주선하셔야 되겠다는 뜻을 전달하고, 돈이 없던 나는 이장비용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지금 내 기억에 다른 주교님들은 대답도 없으셨고 부산의 최재선 주교님만이 격려 편지와 함께 당시 5만원을 내게 송금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59. 그런데 후손을 찾지 못하면 남의 묘를 함부로 발굴 이장할 수 없었으므로 후손을 찾는 일이 시급한 형편이었다. 그러던 차 다음날 어떤 책장사가 와서 백과사전을 사라고 조르므로 경주 이씨 이벽 선생의 가족이나 종친회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수 없겠느냐고 미친 사람처럼 얘기를 했더니, 그 사람이 서울 약수동 중앙시장에 있는 대창 한약방을 찾아가면 한의사 이종수 씨가 있는데, 그분이 경주 이씨들의 거주지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60. 나는 2월 24일 오후에 바로 약수동 중앙시장에 있는 대창 한약방 이종수씨를 찾아갔다. 서울인데도 골목에 싸리문을 해 달은 안층 행랑채로 기억되는 사랑방에서 한약을 걸고 있었다. 내가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기에 경주 이씨 족보관계로 여쭤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노라 하였더니, 한약을 지으러 온 줄 알고 기뻐하던 그 노인은 별로 좋지 않은 안색을 하며 밖에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내 기억에 무서운 인내를 가지고 약 3시간을 기다렸다. 그 한의사는 손님들을 다 내보낸 후에도 나를 부르지 않았고 저녁을 먹고 나서야 나를 불렀다, 몹시 불쾌하고 화가 났지만 꾹 참으면서 들어갔다. 나는 경주 이씨가 아니고 천주교회의 신부인 변기영 신부이며, 200여 년 전 경주 이씨 중에 아주 저명한 분인 광암 이벽 선생의 묘를 포천 공동묘지에서 발견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어디에 사는 줄을 모르므로, 그 후손들이 어디 사는지 알면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61. 그 한의사는 왜정때 족보를 편찬하면서, 여러 후손들이 족보를 사 가지고 수금이 잘되지 않고 하여 족보관계로 누가 찾아오면 우선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길 뿐더러 매우 부담스러워 하는 처지인 듯하였으며, 내 신분을 알고 난 후에는 너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족보에 나오는 경주 이씨 이 벽, 이격의 후손들은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공근리에 살고 있으니 그곳에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다.
62. 주일을 지내고 나서 2월 21일 화요일, 나는 신장성당 총회장이었던 이원호 교수와 명동성당에서 오랫동안 사진을 찍어온 신봉림씨를 데리고 횡성군 공근면 공근리를 찾아갔다. 눈이 덮인 산골마을을 들어가 보니, 정말 심산궁곡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이벽 선생의 후손들이 서울로 이사간 지 20여년이나 지났다는 것, 그리고 경주 이씨들이 이사간 곳의 주소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실로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떤 천주교 신자 한 사람이 와서 경주 이씨들이 모두 서울로 이사간 것은 아니고, 일부는 횡성군 가담리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63. 그래서 횡성군 가담리를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공근리에서 나왔다. 횡성에서 원주 쪽으로 오다가 첫째 큰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가담리가 보이는데, 길은 좁은 마찻길이었다. 가다보니 어떤 부인이 어린아이를 업고 오바로 들 씌운 다음 다른 작은아이를 손으로 잡고 눈길을 걸어서 앞에 가고 있었는데, 아무리 빵빵 거려도 길을 비켜 주지를 않았다. 그래서 계속해서 클락션을 눌렀더니 그 부인은 비좁은 마찻길의 가장자리로 비키며 유리창으로 나를 들여다보며 하는 말이 “어머, 한국 신부님이네”하였다. 알고 보니 그때까지 횡성 본당은 약 40년 동안 서양 신부님이 맡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신부를 보자 무척 반가운 모양이었다. 그 부인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무척 기뻐서 “신부님 어디에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가담리에요”, “우리 동네에 왜 가세요?” “가담리 사세요?” “그러믄요, 가담리 누구를 찾아가세요?” “그 가담리에 상국씨 상철씨 상만씨, 기형이 덕형이 완형이,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그 부인은 “어머, 우리동네 사람들 이름을 모두 외워가지고 오셨네.”하며 매우 기뻐하였다.
64. 내 차에 그 부인과 애들을 태우고, 가담리에 들어가서 이 상국씨 집을 찾아갔다. 아직 싸리문이었고 문패는 안마루 가운데 기둥에 붙어 있었다. 이상국 씨는 서울에서 사람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마루를 걸어 나왔다. 당시까지 이상국 씨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이 이상국 씨시지요?”하고 묻고 내가 천주교 신부라는 것을 알렸다. 어떻게 자기 이름을 알고 찾아왔느냐고 하길래, “이 상국 선생님의 7대조 조부님 이름을 아십니까?”고 물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하였다. 사실7대조 조부의 이름을 아는이는 드물다.
65. “댁에 족보가 있습니까?” 하였더니, 목침을 놓고 딛고 올라가서 벽장문을 열고 새까맣게 때가 묻은 나무 상자를 꺼내어 족보를 꺼냈다. 나는 갑 3권 33페이지를 보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아니, 남의 족보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선생님이 이상국 씨, 아버지는 성우, 할아버지는 종학, 증조부는 규복, 고조부는 병영씨이고 현고조는 현모, 7대조부가 이벽 선생이 아닙니까?”고 족보를 하나하나 짚으며 알려 주었다. 이상국 씨는 “그렇구먼요”하고 대답하였다. “이벽 선생의 묘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하고 묻자, “모르죠, 저희 4대조 조부께서는 묘가 강원도 땅에 있으나 그 이상 선대의 묘는 어디 있는 지 모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선대에 당쟁으로 인하여 강원도 땅에 낙향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66. 나는 이상국 씨에게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신창읍민 공동 묘지 한 복판에서 이벽 선생의 묘를 찾았다는 것과 이장공고 시효가 지났으므로 묘를 발굴하고 파괴하면 실묘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벽 선생은 한국 천주교회를 창립한 중요한 분이니 묘가 없어지는 것은 후손이나 우리 후대인들이 방관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역설하였다. 이상국 씨는 즉시 모든 것을 알아듣고 조상의 묘를 모르고 있던 후손에게 묘를 찾아주고 알려주고 실묘를 하지 않도록 거들어주시는 것에 감사한다고 예의를 다하여 말하였다.
67. 그러자 성당에 갔던 이상훈 씨(이상국씨의 형)의 부인이 돌아왔다. 나는 그 부인의 안내로 횡성 군청에 양정계장으로 있던 8대종손 이 완형 씨를 만났고 또 성당으로 갔다. 그곳 주임신부님은 부재중이었으므로 주임신부님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뜻밖에도 이벽선생의 천주 공경가와 성교 요지가 얇은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며칠 전에 도착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본당 신부님이 그해 년초부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배워야 한다며 몇 주일 째 이벽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유흥렬 박사의 교회사를 가지고 강의하였는데, 그 이벽 선생이 자신의 7대조 시할아버지가 되시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이상국 씨의 형수 정 율리안나 씨는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였다.
68. 그런데 이상국 씨의 말이 강원도 산골에서는 돈을 만지기가 어려우니, 우선 주먹에 무엇을 쥐고 가야 되므로 우선 장을 좀 본 후에 오는 일요일 (3월 4일)에 신장 성당으로 신부님을 뵈러 가면, 신부님은 자동차를 가지고 계시니, 포천 화현리 7대조 묘에 성묘하도록 해주시겠느냐고 청하였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쾌히 승낙하고 기다리겠노라고 하였다.
69. 1979년 3월 4일 오전에 이상국 씨와 그 아들 이 완형 씨, 이 기형 씨가 신장 성당에 왔고, 미사참례를 한 후에 함께 포천 화현리로 향했다. 의정부쯤에 가서 이상국 씨가 “신부님, 저희는 천주교 신자가 아닙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를 몰라서 “그래서요?” 하고 물었다. “뭣 좀 사 가지고 가서 제사를 올려야 겠는데요.” “좋습니다. 그러시지요.” 의정부에서 북어와 사과 등등을 산 후, 포천군 내촌면 화현5리 신기동 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이상국 씨 등이 미리 적어 가지고 온 제문을 읽으며 제사를 지냈다. 그때 김승호 씨라는 분이 올라왔다. 함경도 신창 읍민회에서는 약 5만평의 땅을 사서 그 일부를 공동묘지로 쓰고 있었는데, 김승호씨는 바로 이 묘지의 관리인이었다. 이상국 씨가 그 동안 묘를 관리해 주어서 고맙다며 약간의 돈을 김승호 씨에게 주었고, 김승호씨는 묘를 빨리 이장해 가라고 하였다.
70.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옛날 양반의 묘이기 때문에 비석이 있을 법도 한데, 비석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니, 왜 비석이 없습니까?” 하고 물의니, 이장의 얘기가 “비석은 해서 뭐합니까?” 하는 것이었다.
“비석이 없으니 이벽선생의 묘인지 이부만 공의 묘인지, 이 묘가 누구의 묘인지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파 보면 알지요! 묘를 파보면 누구의 묘인지 다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묘를 파 가지고 어떻게 압니까?”
“묘를 파보면 묘 속에서 이름이 나오잖아요!”
“묘 속에서 어떻게 이름이 나와요?”
“아 이런 딱한 양반 보게, 이장해 간다면서 그걸 모르세요? 묘를 파면 거기서 지석이 나와요”
“지석이 뭔데요?”
나는 지석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들었던 것이다.
“옛날 묘는 파면, 그 안에 묻힌 사람의 이름을 새긴 흙이나 돌이 나 그릇이 나와요. 그것을 지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이 묘도 파면 나오겠네요?”
“그럼요, 나오지요. 전에 이 부근에 있는 다른 묘들을 팠을 때도 다 나왔어요.”
“그럼 이것도 한 번 파봅시다”
71. 묘를 파보는 날을 언제로 잡을까 의논하다가 4월 11일로 잡았다. 그 날은 그해의 성주간 월요일이었다. 나는 이장에게 사람 아홉 명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못자리를 할 때이고 해서 한 사람 당 4천원씩을 주겠다고 했다(당시 하루 품값은 3천원이었다). 가래와 삽도 준비하고, 쌀 한 말을 담가서 술도 해두라고 부탁했다.
72. 4월 11일 월요일에, 횡성에서 오신 이기형씨와 정 율리안나씨 두 분, 그리고 나와 원호 교수를 비롯한 몇 명이 이벽 선생의 묘를 확인하러 갔는데, 그 동네에서도 이장과 반장 등 꽤 여러 명이 왔기 때문에 현장에는 열 다섯 명 정도가 참가하여, 우리가 한 달 동안 기도하러 다니던, 밭둑에 있는 그 묘를 팠다. 묘의 가운데 부분을 파자 정말 지석이 나왔다. 지석은 흙을 다진 후 한문 글씨를 새긴 후 글씨자리의 흙을 파내고 숯가루를 넣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벽 선생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밀양박씨지묘”라는 여자묘 이름이 나왔다. 모두들 생각도 하지 않던 일인지라 깜짝 놀랐다. 옛날에는 여자들이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지석에도 그냥 “朴氏”, “金氏” 등등, “~氏”라고만 적었고, 남자 묘인 경우에는 지석에 이름이 나오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판 묘는, 남편 묘가 있어서 같이 쓴 것도 아니고 여자 혼자의 묘였던 것이다.
73. 그러자 옆에 있던 송언배 노인이,
“여보 선상님, 그거 보시오, 그 흥수 놈이 3년 전부터 죽으려고 정신이 까물까물하고 며칠씩 죽었다가 깨어나곤 했는데, 그 녀석 말을 왜 믿으시오? 내가 그래도 이 마을에서 16대째 살아오고 수십 년을 훈장 노릇을 한 사람이오, 내가 전주 이씨 묘라고 하지 않았오?”
“그럼, 전주 이씨 지석이 나와야지 왜 밀양 박씨, 여자묘 지석이 나옵니까?”
“전주 이씨가 우리나라 이씨 조선의 왕족이고, 왕족이니까 소실을 많이 두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전주 이씨의 소실 묘이지요. 소실이니까 합장도 못하고 따로 쓰는 거예요”
74. 횡성에서 내려온 이기형씨는(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으므로) 얼굴색이 달라지면서, ‘강원도에서 조용히 잘 살고 있는 우리 후손들에게, 7대조 할아버지 묘가 있다는 둥 해서는, 포천땅 공동묘지까지 와서 여자 묘를 발굴하게 하느냐’며 따졌다(물론 이장 비용은 다 내가 낸 것이었지만). 하여간 나도, 이미 주교님들한테 이벽 선생의 묘를 찾았다고 알려놓은 터인지라 앞이 캄캄했고, 이원호 회장도 특유의 함경도 사투리로 “기거이, 기거이, 참” 하면서 주위를 뺑뺑 돌아다녔다.
75. 그래서 나는 “저 아래 있는 이 격 장군의 묘를 한 번 파봅시다”하며, 언덕 위의 밭둑 옆에 있는, 유흥수 노인이 내게 알려준 이격 장군의 묘를 찾아갔다(이 격 장군의 묘를 알려 준 유흥수 노인은 내게 묘자리를 알려 준 후 바로 돌아가셨다. 그 노인이 나를 만나기 전에 돌아가셨더라면 묘는 영원히 찾지 못했을 것이다). 무덤 가운데를 열자 금방 지석이 나왔는데, 그 지석에는 “청주한씨지묘”라고 쓰여 있었고, 이번에도 또 여자 묘를 판 것이었다. 그러자 이 기형씨는 화가 나서, “천주교 신부님이 사람을 속입니까?” 하였고, 이 원호 총회장은 자기 본당 신부가 개망신을 당하고 있으니까 “신부님, 기거이, 기거이, 참”하고 있었다. 동네의 이장과 반장도 “묘도 모르는 사람이 묘를 찾겠다고 하는구먼”하면서 핀잔을 주었으며, 송언배 노인은 오지도 않았었고, 후손들은 모두 화가 나 있었다. 나로서는 이미 주교님들한테 편지를 띄운 데다가 최재선 주교님은 이장에 쓰라며, 5만원을 보내셨었고, 오기선 신부님은 신자들을 데리고 와서 기도를 하는 등 법석을 떨었는데, 엉뚱한 여자묘지석이 나왔으니, 사기를 친 꼴이 된 것이었다.
76. 그때가 오후 세시쯤이었다. 그곳에는 고총이 여러 개가 있었는데, 나는 이 석 장군의 묘와 방향이 맞는 묘를 파보자고 하였다. 모두들 파나마나 라고 했지만 “품값은 내가 주는 것이니, 갑시다.”하면서, 그곳에서 4,500미터 위쪽 언덕에 이석 장군 묘로 알려진 곳에 올라왔다. 역시 이 묘에도 비석은 없었다. 왜 비석들을 세우지 않느냐고 묻자, 이장과 노인들의 말이, 옛날에는 정변이 일어나면 묘를 다 파버렸기 때문에 알리지 않기 위해서, 상돌만 있지, 비석은 파묻거나 깨뜨려 버린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 묘에 간 나는 묘를 파기 전에, 성모님께 정말로 간절히 기도를 했다. “성모님, 묘속에서 다른 지석이 나오더라도 기적으로 바꾸어서 망신 좀 당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앞으로 다른 일로 망신을 당하는 것은 괜찮지만, ‘변신부가 순교 선조들의 묘를 찾는다고 설치다가, 허탕치고 사기를 쳤다.’고 망신을 당하게 되면, 내 후배들이 다시는 순교 선조들을 위한 일을 하지 않을 테니 이런 망신은 당하지 말게 해주십시오.” 하면서 진짜로 열심히 기도를 드렸다.
77. 고총 위에 자란 굵은 소나무를 베어버린 후 묘를 파자 지석이 나왔다. 거기에는 “總府副將慶州李公晳之墓巽坐”라고 쓰여 있었다. 지석은 조선 강회로 네모 반듯하게 단단하게 만들고 그 위에 한문으로 글씨를 쓴 다음, 글씨를 파내어 그 자리를 숯가루로 메꾼 것이었다.
78. 시간은 벌써 오후 4시쯤 되었고, 나는 성주간 월요일 예절 때문에 신장으로 빨리 돌아와야 했으므로 후손 중의 한 사람인 이 상만 씨에게 묘를 또 하나 파보고 내일 와서 얘기를 해달라고 일렀다. “ 고총이 이 부근에 일곱 개나 있고, 이벽 선생의 동생 묘가 나왔으니 분명히 이벽 선생의 묘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 자동차(당시 250만원 짜리 포니였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2천만원 정도 된다)를 팔아서라도 비용을 댈 테니 고총을 다 파봅시다” 이석 장군의 묘가 확인되자 용기나 난 것이다.
79. 신장에 돌아온 나는 성주간 월요일 미사를 드렸고, 이튿날, 전날 지시한 고총에 대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 상만 씨 등 후손들이 왔다.
“신부님, 나왔어요.”
“뭐가 나왔어요?”
“<이벽>이라는 이름이 나오긴 했는데, 앞에 ‘通德郞’이라는 말이 붙어서 “通德郞慶州李檗之墓”라고 쓰여 있어요. ‘通德郞’이 뭡니까?”
“通德郞이요? 글세, 나도 잘 모르겠는데요.”
80. 족보에 보니까 通德郞이라는 벼슬을 했다고 나왔다. 나중에 유홍렬 박사의 말을 들어보니, 通德郞이란 先代에 벼슬을 한 이가 있을 때, 그 후손들에게 그냥 내려주던 것이란다. 나는 바로 포천으로 가서 갓등산 꼭대기에 있는 묘를 파보았는데, 조선 강회를 네모반듯하게 다지고 글씨를 새겨 바짝 말린 후에, 글씨를 파내어서 그 자리를 숯가루로 메꾼 지석이 나왔다. 거기에는 “通德郞慶州李檗之墓”라고 쓰여 있었다. 네 번째로 판 묘에서 나온 것이다.
81. 4월 20일 경에 김남수 주교님, 오기선 신부님, 유홍렬 박사, 이기형 씨 등이 지석 확인을 하기 위해서 그곳에 또 갔었고, 4월 18일에는 혜화동에 모여서 이벽 선생 묘 이장 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장은 김남수 주교님, 부위원장은 박희봉 신부님과 이상국씨에게 맡아 달라고 부탁하고 나는 자칭 총무를 하기로 하였다. 유홍렬 박사와 오기선 신부님과 최석우 신부님께는 전화로 고문을 해주실 것을 청했더니 모두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후손들인 이상만 씨, 이상철 씨 등은 이장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때 마침 김대건 신부님의 전기를 쓰신 김구정씨가 대구에서 올라오셔서, 대구교구 대표로 이장위원으로 참석시켰다.
82. 문제는 移葬地를 어디로 할 것인 지였다. 박희봉 신부님께서는 이벽선생의 묘를 서울 절두산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셨는데, 서울에 모셔야 신자들이 자주 참배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나는, 이벽 선생은 천진암 강학회에서 한국 교회를 시작하신 분이니 천진암으로 모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이 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었는데, 대구에서 갑자기 대구에서 오신 김구정 노인이 화를 내면서,
“ 이벽 선생의 묘를 절두산으로 모신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천진암으로 모셔야지요. 이벽 선생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절두산에 왜 모십니까? 그것은 안됩니다.”
83. 그래서 박희봉 신부님이 좀 수그러드셨다. 만약에 수그러드시지 않으면, 나는 ‘묘를 찾은 사람은 나니까, 내 마음대로 할 테다’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또 김구정씨가 오시기 직전에 후손들에게 물어보았을 때 이상국 씨와 이상만 씨 등이, “우리는 변신부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저희가 변신부님 덕택에 조상의 묘를 찾았는데, 우리가 무슨 낯으로 어디로 모시라고 말씀드리겠습니까? 저희는 변신부님 말씀만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했고, 김구정씨가 강력하게 말한 덕택에, 결국 천진암 성지로 모시기로 확정이 되었다. 대신 박희봉 신부님께서, 앞으로 이장하게 되면, 이벽 선생의 시신을 당신이 계신 혜화동 성당에서 하룻밤 묵으시게 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84. 移葬日은 현충일인 6월 6일로 정했는데, 잘 실행되지 못했다. 그해 5월 3일에는 서울교구와 수원교구가 공동으로 최초의 천진암 행사를 주최하여, 옛날의 광주군에 속했던 서울과 수원의 본당신부들, 즉, 천호동의 김병일 신부님, 돌아가신 청담동의 최창정 신부님, 논현동에 계셨던 것으로 기억되는 김덕재 신부님, 그리고 경안 성당의 유진선 신부님 등 모여서 [순교자 현양대회]라는 타이틀로 남한산성에서 거행하였는데 사실은 이름만 두 교구의 공동주최이지 실무는 신장성당에 있던 내가 주로 주선하고 주관하였다.
85. 당시에는 천진암에 오는 교통사정이 나빠서 차가 들어올 수가 없었기 때문에 행사장소를 남한산성으로 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6월 6일에 이벽 선생 묘를 이장하려고 했던 것인데, 돈도 없는데다가 준비가 되지를 않았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86. 6월 8일 10시에 혜화동 성당에서 다시 이장위원회가 열렸는데, 그때 김구정씨가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그리고 신봉림 씨(명동성당 정문 앞에서 사진관을 하고 있는 사람), 유홍렬 박사 등도 참석하였다. 移葬日을 6월 14일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돈도 없는데다가 준비도 될 것 같지가 않아서 6월 24일로 하기로 하였다. 그 날은 이벽 선생의 본명인 요한세자의 축일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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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세례자 요한이벽,
베드로 이승훈,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권일신,
암브로시오 권철신,
복자 아우구스티노 정약종
약전
Msgr. Byon 2017-05-10 / 조회 680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5.16 광장에서 거행된 한국순교복자 103위의 시성식 광경. 당시 언론과 보도기관에서는 100만여명으로 보도하였으나, 필자(Rev. Peter Byon)는 55만명~60여만명으로, 내한한 성청 인사들에게 보고 하였었다.
(Sua Santita Giovanni Paolo II aveva concelebrato la messa per la canonizzazione dei 103 Beati martiri coreani, con molti Cardinali, Arcivescovi, Vescovi, sacerdoti e fedeli cattolici - circa 500.000 - a Seoul il 6 maggio 1984. Per quella canonizazione, il Rev. Byon, rettore di Chon Jin Am, il luogo natale della Chiesa, aveva servito per 5 anni (1980~1984) come segretario esecutivo generale della commissione episcopale per la canonizzazione dei 103 Beati Martiri coreani.>(Photos by Baeck-Nam-Shick).
Canonizzazione dei 103 Beati martiri coreani in Seoul 1984 !
-새로 다시 쓰며 읽어 보는 -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5위,
평신도 순교자들의 자발적인 신앙사 약전
하느님의 종, 세례자 요한이벽, 베드로 이승훈,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권일신,암브로시오 권철신,
복자 아우구스티노 정약종
2012년 11월 18일 / 2013년 7월 15일 수정 일부 보완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장 겸 천진암박물관장 변기영 몬시뇰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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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다시 쓰며 읽어 보는 -
韓國天主敎會 創立聖祖 五位
平信徒 殉敎者들의 自發的인 信仰史 略傳
Ioannes Baptista李檗(1754~1785)
Petrus李承薰(1756~1801)
Franciscus Xaverius權日身(1742~1792)
Ambrosius權哲身(1736~1801)
Augustinus丁若鍾(1760~1801)
2012 년 11월 18일
韓國天主敎會 發祥地 天眞菴 聖地
韓國天主敎會創立史硏究院 / 天眞菴博物館
- 새로 다시 써서 읽어 보는 -
배달겨레의 天主 信仰史와 한국천주교회 創立史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5위 평신도 순교자들의 자발적인 신앙사 약전>
들어가는 말
1. 복자, 교황 요한바오로 2세께서는 1984년 봄 한국을 방문하시어, 5월 6일에 서울에서 103위 한국 순교복자들을 시성하셨고, 같은 해 10월 14일 주일에는 로마 사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한국 순교 성인 103위 첫 번째 축일 대미사 강론을 통하여, "한국인들은 선교사가 한국에 오기 전에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신앙을 실천하여 교회를 세웠으니, 이는 세계 교회사에 유일한 경우"라고 말씀하신 후, 한국의 저 평신도들을,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로 여겨야 한다고 언명하셨다.
2. 그 후 1989년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시어 국제 성체대회를 집전하시고 가신 후, 1993년 9월 21일, 천진암 성지 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정초식에 당시 주한 교황대사 죤 블라이티스 대주교를 통하여 보내주신 교황 공식 문헌의 머릿돌 교황 강복문에서, ‘천진암 성지를 한국천주교회 탄생지(발상지)’라고 언명하셨다. 그런데 전 세계에 순교 성지는 많지만, 천주교회 발상지가 있는 나라는, 베들레헴 성지가 있는 이스라엘과, 천진암 성지가 있는 대한민국, 두 나라 뿐이다. 天上으로부터 천주 성자의 강생으로 인류구원의 천주교회가 시작된 聖地 이스라엘과, 이와는 달리, 우리나라는 地上에서, 한국인들이 천주교 신자가 되기 전에 非信者들의 신분으로, 마치 동방박사들처럼, 자발적으로 진리의 빛을 찾아 천주교회를 연구하여 알고 신봉하기 시작하였다.
3. 한국 천주교회의 자발적인 이 특이한 교회 창립사와 신앙정신은 오늘날에까지 계승되어, 한국 교회 발전의 뿌리와 줄기와 힘이 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천주교회의 품 안에 들어와,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우리나라 천주교회 발전을 위해서뿐 아니라, 전 세계 교회의 발전에도 힘껏 이바지하기 위하여, 그 옛날의 한국처럼, 아직 복음이 충분히 보급되지 않은 나라의 비신자 형제들을 위하여, 한국천주교회 창립사를 바르게 알고 지키며 가꾸어 나가야 하며, 또한 이 은총의 교회역사를 온 세계 만민들에게 알려서, 저들에게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이 본보기가 되도록 힘써야 하겠다.
4. 세계 만민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섭리가 우리 한민족을 천주의 진리로 비추어 주시고, 구원의 교회로 인도하여 주신, 그 기묘한 내력을 우리 모두가 보다 폭넓고 깊히 있게 이해하며, 하느님께서 우리 선조들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리고, 또 나아가 우리 신앙선조들의 그 정신과 덕행과 교훈과 모범을 본받아, 우리 모두가 신앙의 선조들을 닮아가며 몸받기 위하여, 간결하게나마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5위 평신도 순교자 신앙인들의 약사를 추려서 함께 알아보고자 한다.
5.그런데 한국천주교회의 기묘한 창립이 우연히, 갑자기 돌출된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으로, 머나먼 옛날부터 하느님께서 우리 선조들에게 베풀어주신 종교적 자질과 신앙문화의 터전을 되돌아보므로 인하여, 진리의 움을 틔우고, 신앙의 싹이 돋아 자라게 한, 우리 민족의 정신적 바탕을 먼저 이해하고 염두에 두면서,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창립사를 읽어야만 우리가 이를 보다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6. 세계 모든 민족들이 선사시대부터 모두 각기 자기들 나름의 종교적 문화나 관습을 가지고 있었듯이, 우리겨레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우리 겨레가 머나먼 옛날부터 다른 민족들의 종교 신앙사와 좀 다르다고 할만한 독특하고 월등한 종교적 대상을 신앙하는, 천주 사상을 가지고 살아나온 흔적과 체취가 한국 상고사를 연구한 비신자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이미 많이 밝혀져 왔고, 또 오늘에까지 우리의 생활과 정신문화 속에 전승되고 있어서, 이를 먼저 이해하기 위하여, 아주 간결하게라도 우리 겨레의 내력을 살펴보고 들어가기로 하자.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일반 신도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들은 되도록 줄이고, 아직까지 많은 이들이 자세히 모르고 있던 200여년 전의 우리 문화 관습과 여러 가지 사정을 되도록 해설하여 보태고자 하였다.
1. 韓民族의 由來와 天主恭敬 思想의 來歷
7. 우리 배달겨레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와 우리 민족 천주공경 사상의 내력을 먼저 살펴보면, 하느님은 우리 배달겨레에게 천주신앙의 정신적인 남다른 자질을 특은으로 주셨으니, 우리겨레는 예로부터 자신들을, 밝은 겨레, 배달겨레, 밝달 민족, 빛의 아들들, 힌옷을 즐겨 입는 민족, 白衣民族, 天神族, 혹은 天孫族. 등으로 부르면서, 자신들은, ‘하느님의 겨레’로 알고, 믿고, 하느님께 天祭를 올리며 살아왔다. 그리하여 먼 옛날부터 늘 하느님을 최고의 유일신으로 위하며 모시고 살아왔고, 또 하느님께서는 우리겨레와 늘 함께 계신다는 신념을 가졌으며, 늘 우리겨레를 보살펴주신다는 굳은 신앙을 가지고, 기도하고 제사를 올리며 오늘날까지 오랜 세월을 살아 내려왔으니, 사실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의 겨레’다.
8. 이러한 신념은 신구약 성경의 말씀이며 가르침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아들들아, 너희는 주님께 영광과 권능을 바치거라"(시편 28장). 베드로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을 시작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읍니다"(사도행전 10장 34절)
9. 일찌기 먼 옛날, 우리겨레는 세계의 지붕이라고 부르는 파미르 고원과 우랄알타이 산맥과 天山 산맥이 걸쳐 있고 天池라고 부르는 호수가 있고, 만년설이 덮혀있는 높고 크고 신비스러운 여러 대소 산맥 봉우리들 중에, 한문자(漢文字)가 생겨서 표기되기 그 이전부터 오랜 세월을 두고 그 지역 사람들이 불러왔고, 지금도 부르고 있는, 배달봉(倍達峰), 박달봉(博達峰), 박격달봉(博格達峰), 등으로 불리는 天山 산맥 자락에서 살던 부족이었다. 그래서 자기 부족들의 이름을 배달산 부족, 박달 종족, 등으로 불렀으니, 이는 우리나라 姓氏들의 本貫과 같다. 배달, 박달, 등의 뜻은, 밝은, 빛이 있는, 하얀, 등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여러 부족들 중에서 배달봉 아래 살던 이 부족들은 먼 옛날 해 돋는 나라 동쪽을 향하여 반만년이상 일만년 내외의 오랜 세월을 두고 이곳 한반도까지 민족이동을 하여 왔다. 그 걸어온 길을 따라, 조상들의 무덤을 찾는 후손들의 효성과 종교적인 발걸음이 가고 오던 길은, 훗날 ‘비단길’ 즉, silk road 라는 생존과 상업의 무역로가 되었으니, 지금의 베드로 대성당이 있는 로마의 공동묘지 바티칸과 라인강 가의 숲속이었던 꾈른 대성당 지역과, 갈대 숲이 우거졌던 뉴욕의 성 패트릭 대성당을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우리나라 서울의 명동역시, 명동대성당(옛날 이름은 鐘峴聖堂)이 들어서기 전에는 한양성의 南山 자락, 서울의 남산골 변두리 였었다. 종교적 시설물이 자리잡으면, 선천적으로 종교심을 타고난 우리겨레는 자주 찾으며 모이게 되기 마련이다.
10. 지금 한반도 각처에서 발견되는 고인돌과 구석기(舊石器), 신석기(新石器), 청동기(靑銅器) 시대 유적을 보면 적어도 1만 5천년 전 후부터 이미 이 곳에는 불을 피우며 석기(石器)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단체로 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겨례가 오랜 세월 살고 있는 이땅에서 태고(太古) 적에 지구상에 처음 발생한, 발원지는 아니니, 우리 한반도가 몽고족에 속하는 우리겨레의 발원지가 아니라는 사실에는 모든 학자들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디에선가 이리로 이동하여 온 것은 분명하므로, 우리 민족의 상고사(上古史)가 밝혀주는 문화 흔적들을 되짚어 아시아 대륙을 동에서 서로 횡단하며 찾아가다 보면, 우리 겨레는 먼 옛날 지금의 천산산맥(天山山脈) 자락에서 살다가 아시아 대륙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면서 오랜 세월을 두고 이리로 이동하여 온 것이 확실하다.
11. 지형상으로도 세계의 지붕이라고 부르며 古代 인류의 발상지로 여기는 파미르 공원과 천산 산맥에서 보면 西北쪽은 모두 우랄산맥과 알타이 산맥, 남쪽은 곤륜산맥과 히말라야 산맥, 북쪽은 천산산맥과 태산준령, 등으로 파밀 고원에 연결되어 막혀 있으나, 동쪽으로만은 중국의 한 복판을 西에서 東으로 가로 트여 있다. 마치 原始 인류의 조상들이 동쪽으로 해돋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라는 지형적 알림과 안내와도 같이.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황하문명의 평야지대를 관통하며 한반도에까지 이르도록, 험산준령으로 좀 덜 막혀 있고, 드넓게 극동까지 열려 있는 아시아 대륙을 관통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12. 홍산문화(紅山文化)라고도 부르며, 근대에 와서 활발히 발굴 확인되고 있는 오늘의 中國과 북쪽 내몽고 지역 赤峰山 주변의 上古時代 紅山文明이나, 요동 지역의 遼河文明은 나일강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에집트 문명이나 유프라테스 강가의 페르시아 문화보다 수천년이 훨씬 앞서며 오래동안 꽃피웠던 上古時代 文明으로서, 모두 오랜 세월 중국 漢字語 기록에서 東夷族으로 부르며 기록되어온, 우리 배달겨레 韓民族이 극동의 한반도에 오기 전에 이룩하였던 문명의 발자취들이었다. 칼과 활같은 兵器로 발달한 문명이 아니라, 천주신앙으로, 天祭敎 문화를 이룩한 天孫族들의 평화롭고 거룩한 문명이었다. 天帝 공경의 정신으로 해돋는 나라, 빛고을을 향하여 꾸준히 수천년에 걸쳐 서서히 이동하며 大同思想으로 마을을 이루고, 나라를 세우며, 꽃피운 문화 민족의 이동이었다.
13. 다만 우리겨례의 민족이동 이유는, 주로 사냥을 하며 살던 先史時代부터 수렵하기 쉬운 곳을 찾아 나선 경제적인 목적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른 민족들이 사는 곳을 점령하고 정복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도 아니었으며, 오로지 하늘에 떠서 지나가는 해를, 하느님의 얼굴,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으로 믿고, 모시고, 섬기며, 햇님이 거하며 다스리는 저 높은 하늘도 우러러 위하면서, 날마다 해가 떠오르는 동쪽으로 가면, 햇님의 나라, 맑고 밝은 ‘빛의 나라’, ‘빛 고을’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4. 우리 민족이 수 천년 내지 일만년 이상에 걸쳐 아시아 대륙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면서, 깊고 넓은 많은 강물을 건느며, 높고 다소 험준한 큰 산맥들을 넘고 돌면서, 마을과 고을을 이루고, 크고 작은 부족 국가와 나라를 세우면서, 수십년 수백년씩 부족의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며, 민족이동을 하여 왔음을 되새겨볼 때,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출발하여(출애급기), 사하라 사막과 홍해를 건느고 시나이 산맥을 돌면서 약 40여년에 걸쳐 지금의 예루살렘 지역으로 돌아왔던 사실은, 한민족이 줄잡아도 고조선 건국 이전 5천여년에 걸쳐이어온 悠久한 민족이동에 비할 바가 아니다.
15. 따라서 우리 겨레는 밝은 빛을 숭상하며, 흰옷을 즐겨 입던 겨레였다. 저 멀리 만년설로 덮여 있던 선조들의 고향 천산 산맥을 뒤로하며 떠나온 우리겨레는 부족의 경사나 큰 날에는 자기네 종족을 표시하는 흰옷을 입었으며, 부모님들의 장례 때도 모두 힌 옷을 입어, 최근에까지 이를 소복(素服)한다고 하였다. 1919년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서거하였을 때는 온 나라의 2천만 동포들이 몇 달 동안 모두가 힌옷으로 소복하였으므로, 온 나라가, 특히 서울 장안은 힌옷 입은 사람들의 물결이 차고 넘치듯 하여, 당시 서양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古代 중국의 史記에서까지 종종 우리겨레를 白衣民族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16, 또한 마을마다 거의가 다 흔히 작고 큰 거룩한 동산을 등지고 살면서, 山을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로 여기며, 山들을 신성한 곳으로 믿고, 조상이 죽으면 쉽게 하늘에 오르도록 산에다 묘를 쓰기도 하였다. 한국학의 선구자들, 특히 아시조선(兒時朝鮮), 등을 저술한 육당 최남선(1890~1957) 선생을 비롯한 조선 考古學의 선구자들은 우리겨레의 上古史에 관하여 연구하고 나서, 우리겨례의 선조들은 자신들을 天神族으로 神聖視하는 믿음이 있었음을 거룩한 史話로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17. 그리하여 지금부터 대략 적어도 일 만년을 전후하여 우리 선조들은 자신들을 밝은 겨레, 배달겨레, 빛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며, 빛의 나라, 빛 고을을 찾아서 극동지방과 지금의 한반도에까지 오게 되었고, 자기들이 자리잡는 마을 이름도 빛고을(광주:光州), 별고을(성주:星州), 볕고을(양성:陽城), 밝은 고을(명주:明州), 흰 고을(백성:白城), 맑은 고을(청주:淸州), 빛나는 고을(화성:華城),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를 즐겨하였으며, 자기네 고을 주변에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거룩한 산이 있어서, 힌 뫼, 밝은 뫼, 등을 뜻하는, 白頭山, 長白山, 太白山, 小白山, 白山, 白石山, 등으로 불렀으니, 만년설이 없고, 힌 돌이나 힌 바위가 없는 남부지방의 名山들 중에도 白山으로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는 한마디로 고대인들의 언어 표현으로는, ‘聖山’이라는 뜻이다.
18. 따라서 선사시대부터 다른 민족들처럼, 우리겨레도 부족에 따라서는 호랑이, 곰, 독수리 같은 동물을 위하는 지파들도 있었지만, 산이나 강, 바다나 별, 달이나 해나 하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부족들이 많았고, 특히 해(日)와 하늘(天)에 대한 정성은 큰 나무나 동물이나 지상의 산이나 강물 공경과는 한 차원 높은 부족 신앙의 대상으로서 至高至上의 신적 존재로 받들었다. 특별히 햇님은 선사인들에게 가장 고마운 신비의 존재였으니, 선사인들이 날마다 겪으며 가장 두려워하는 밤의 어두움을 매일 아침 사라지게 하며, 온 누리를 밝혀주고, 겨울철 추위 속에서도 따뜻한 햇살을 내려주는 햇님은 쌓인 눈과 어름을 녹이며 새 봄을 주는 신적인 존재로 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남향동문을 가장 좋은 집터로 여기고 있는 것은 햇님을 숭상하는 정신에서 기인한 것이다.
19.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렵생활을 위주로 하던 우리겨레가 농경문화로 서서히 생활을 바꾸면서, 일조량이 많아 농사하기에 더 적합한, 따뜻한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정착하면서, 하느님을 공경하는 그 정신은 더욱 정리되고 발전되어, 거룩하고 아름답게, 특히 순수하고 소박하고 진솔하고 경건하게 계승되고 발전되어 내려왔으며, 수렵에 주로 의존하던 생활에서 가내 목축업으로 발전시키고, 마침내 농경문화로까지 정착하면서는, 간장, 된장, 김장 김치, 같은 발효식품 발명 등으로 급속도로 부족별 발전을 이룩하였다.
20. 아시아 대륙의 내륙에서는 주로 귀한 돌 소금,석염에 의존하다가 3면이 바다로 되어 있는 한반도에 이르러서는 천일염 개발이 수월하였고, 풍성한 농산물과 각가지 광물자원 발견과 활용으로 상공업의 발전도 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갈래의 크고 작은 부족국가를 이루면서 같은 종족 간의 충돌로 적지 않았지만, 종교적인 신앙면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하고 일맥상통하는 특징이 있었으니, 마침내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天主님을 공경하는 천제교(天祭敎) 종교신앙 생활시대의 문화를 다같이 꽃피우게 하였다.
21. 그리하여 지금부터 약 반만년 전쯤, 단군조선 시대를 전후하여서는 하늘 공경과 어른 공경, 족장 공경이나 나라님 공경이 어느 정도 제도화되고 풍습화할 정도로 발달하여, 하늘에 제사 드리는 예식이 극동의 한민족 거주지에서는 지역을 따라 여기저기 찬란하게 발전하였다. 특히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관습은 보편적이며 오랜 전통으로 이어오던 신앙으로서, 우리겨레의 자연스럽고 순수하며 진솔한 한울님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고, 현대에 와서까지도,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하는 민족신앙이 애국가에서도 불려지고 있듯이, 우리겨레의 마음 속에는 늘 하느님의 얼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국가 건립과 계승의 근거를 하느님께 두어, 古朝鮮과 三韓時代를 전후하여서는 지역마다 시대마다 명칭과 형식만이 조금씩 다르던 동일한 의미의 天祭敎 문화의 경축일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음력 10월에 있었는데, 근대에 와서 열강들의 침략이 극심해지자, 開天節 이라는 명절로 통일하여, 민족기원의 최대 기념일로 제정하고 지금까지 경축하고 있다.
22. 이렇게 우리겨레는 선사시대부터 반만년 전, 유사이래로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하느님 공경에 특별한 정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렵생활 시대에서나 농경생활 시대에서나 지역마다 대소간의 부족 국가를 세우면서도, 하느님 공경에 있어서만은 거의 대동소이한 방법과 정도였지만, 공통된 특별한 정성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민족의 이러한 종교 정신과 문화는 지금까지도 온 국민의 마음과 생활 속에 깃들어 있으니, 예를 들어, 매년 음력 10월 3일에 경축하는 개천절, 즉, ‘하늘이 열린 날', '하늘을 열은 날’은 그 의미와 성격이 다른 나라나 다른 민족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축일이다.
23. 지금은 태양력을 따르지만,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최근까지도 본래의 전통을 따라 음력으로 10월 3일을 개천절로 지내었다. 이는 음력 8월 15일 한가위,추석과 음력 1월 1일 설날을 지금도 음력으로 지내고 있듯이, 개천절도 음력으로 따져서 지내는 것이 역사와 전통문화 계승 발전에 더 합당하다고 하겠다. 이스라엘 민족과 2천년의 역사를 가진 천주교회에서 예수부활 대축일을 태양력으로 일정한 날에 기념하지 않고, 음력을 따라 매년 다른 이동축일로 지내고 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24.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개천절이 들어 있는 음력 10월에는 매년 마을마다 고을마다 대동소이하게 함께 마련하고 함께 참여하여 올리는 천제를 올리면서, 대대로 전해 오는 조상님들의 묘를 찾아 성묘하며 時祭를 올리므로, 10월은 모든 달 중에 가장 먼저 위에 두는 크고 ‘높은 달’, 즉, ‘上月’, ‘상달’이라 부르며, 하느님 공경과 조상님 공경에만 집중하는 ‘聖月’로 지내었으니, 마치, 오늘날 우리 천주교회의 5월, 성모 성월이나, 한국교회의 9월, 순교자 성월, 사순절이나 대림절처럼, 이슬람의 라마단 기간과도 유사하게, 특별한 신심과 정성의 달이 음력 10월이었다.
25, 심지어, 1950년 6. 25 사변 전까지만 해도, 구걸하는 걸인들의 각설이 타령에는, “10월이라 상달이니, 상제(上帝)님께 제사하세. 10월이라 상달이니, 조상님께 제사하세” 라는 내용의 노래 귀절이 있어서, 아무리 흉년이 들고, 살기가 어려워도, 마을마다 고을마다 상제 하느님께 제사하고, 자자손손 집집마다 조상님께 제사하라는 걸인들의 교훈적 외침이었다. 그래야 제사에 바쳤던 떡이나 술이나 고기를 걸인들도 좀 얻어 먹고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애국가에서 부르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말과 개천절의 내력은 적어도 반만년 이상 오래된, 우리 민족의 천주 사상과 정성을 밝히 전승해 주고 있는 민족 정신문화의 거룩한 유산이다.
26, 따라서 우리나라에는 아주 멀고 먼 옛날 고대로부터 지역마다 시대마다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종교가 적지 않았었는데, 대부분이 하느님 공경 정신을 터전으로, 바탕으로, 윤리적 근거로 하고 있으며, 불교나 도교나 유교나 천주교나 기독교 같은 외래 종교들까지도 우리 민족이 쉽게 이해하고 수용하여 보완하면서 우리 것처럼 지키고 아끼고 가꾸기 위하여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까지 바쳐가며 발전시킬 수 있었던 이유도, 우리 민족은 모든 종교가 지닌 행선피악과 상선벌악의 공통점을 이미 알고 있고, 믿고 있었기에, 이에 공감하며 실천할 수 있는 토대가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종교적 정신문화 속에 선천적으로 뿌리내려져 성장하여 왔기 때문이다.
27, 그러므로, 한국천주교회가 다른 나라들처럼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 선조들이 자발적으로 천주교회를 창립하는데 가장 지대한 영향을 주어 가능하게 하였던 요인과 바탕은 바로 우리 민족의 선천적인 종교적 자질을, 마치 하느님이 미리 마련해 주신 역사적인 터전처럼 결정적 요소가 되었음을 인정해야 하며, 그 외의 학업이나 생업 같은 조건은 시대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일시적인 성격을 띤 時事的이 부수적 조건으로 보아야 한다. 한마디로, 한국천주교회의 기묘한 창립사는 갑자기, 우연히, 한 때, 우발적으로 돌출된 사건이 아니라, 먼 옛날부터 준비되어 온(remota praeparatio) 요인들을 바탕으로 하여, 합당하고 적절한 계기를 당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28. 예를 들어,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정약종 등, 우리 신앙 선조들이 당시 사회의 관습대로, 소년시절부터 千字文으로부터 시작하여 사서삼경, 등 유학을 배웠는데, 그렇다고 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유학자들이 세웠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부족하고 잘못된 부당한 표현이다. 사실 당시 유학자들은 처음 출발하는 천주교회를 극심하고 잔인하게 박해하였을 뿐이다.
29. 선사시대로부터 유사이래로, 삼국시대와 조선시대 뿐 아니라 현대에 와서도 적지 않은 신흥 민족 종교가 탄생하였는데, 이 역시 어느 특정 종교나 특정 학문의 영향이라기보다도, 한민족의 선천적인 종교적 자질과 역량을 터전으로 삼아, 적절한 계기가 주어지면 새 종교들이 적지 않게 탄생하여 내려온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회 외에도 유학이 들어오기 전 우리 고대 사회나, 혹은 유학을 수학하지 않은 후대 일부 지역에서도 여러 가지 토착적인 종교가 출발하였었는데, 모두가 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이었으니, 유학자들이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민족은 토속적인 고유한 여러가지 종교들을 자생시키는 종교적 바탕을 선척적으로 타고 났다는 사실을 참고삼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산업화와 과학과 경제의 발전으로 유롭의 여러나라에서는 탈교회 현상이 심각한 편인데 반하여, 한국에서는 경제발전에 정비례하여 종교도 발전하고 있음은 우리겨례의 선천적인 종교적 자질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0. 弘益人間 정신을 비롯한 우리겨례의 정신문화는 우라겨레의 여러 가지 民族宗敎의 출발과 발전의 터전이 되고, 근거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건국과 국가발전의 힘이 되었으니, 대륙 세력과 해양세력의 끊임없는 침공을 당하면서도, 지금 이처럼 위대한 대한민국을 세워 세계적인 힘있는 큰 나라로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우리겨레의 역사와 철학이 민족종교 탄생과 발전의 원천이 되었음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외래 종교들을 수용하고 소화하며 융합하여 우리것으로 발전시키는 역량도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사에서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사실이다. 사실, 새로운 외래 종교에 대한 박해는 조금 먼저 들어온 외래종교나 철학 사상에 의해서 여러 가지 계기로 일어난 所致였다. 현대사에 있어 100여년간(1785~1885)에 걸친 천주교 박해도 주로 儒林들에 의해서 저질러졌으며, 특히 2차대전 후(1945~1955) 150여명의 천주교 성직자들이 처형된 것도 소련의 영향으로 유물론과 무신론 공산주의 사상에 의해서였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고유한 정신문화는 종교와 사상을 초월하는 愛國愛族의 역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31. 또한 우리 민족은 대부분의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행선피악의 정신을 선천적인 천주 사상으로 폭넓게 수용하고 종합하여, 이미 반만년 전에는 대부족국가로 통합하던 단군조선을 세울 때,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치도의를 건국이념으로 삼았는데, 이는 경천애인의 天主 공경 사상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천주 신앙의 터전 위에서, 계시의 씨앗이 어렵지 않게 진리의 움을 티우고, 신앙의 싹이 돋아나게 하여,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로 성장, 발전하기까지, 이와 관련된 중요 인물과 장소와 역사적 사건들을 우선 몇가지 만이라도 추려서, 간결하게 요약하여 되돌아 보고자 한다.
3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한국에 오셔서, 1839년과 1846년 2차례 박해 중에 순교한 103위 순교복자들을 시성하였다. 그러나 사실, 1839년 이전에 이미 조선에서는, 1785년 을사년 박해, 1791년 신해년 박해, 1795년 을묘년 박해, 1801년 신유년 박해, 1815년 을해년 박해, 1827년 정해년 박해, 이렇게 6 차례에 걸쳐 큰 박해가 전국 각처에서 있었다. 수 많은 한국신자들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오기도 전에 그리스도교 구원의 진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였고, 이 새로운 종교를 전파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던 상황에서, 특히 다섯 분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은 열정적으로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웠고, 마침내는 자신들의 생명까지 천주와 교회를 위하여 용감하게 영웅적으로 봉헌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피로써 증거하였다. 한마디로 배달겨례 스스로 싹틔운 교회가 피를 뿌리며 자라났으며, 목숨을 바치며 살아나온 것이다. 이 거룩한 하느님의 역사가 지금까지 역사 자료 소실와 연구미비로 일부 잘못 전하여 왔음을 조금이라도 바로 잡아 온 세계에 알리고, 후대인들에게 전해야만 하겠다.
33. 따라서 거의 한 세기(1785-1885)에 걸쳐 있었던 한국천주교회의 참혹한 박해의 최초 시발점으로서 그 뿌리와 줄기가 되는 것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5위 평신도 순교자들의 자발적인 신앙사였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위대한 신앙선조들의 생애와 정신과 덕행과 업적과 교훈을 간결히 추려서 이하에서 알아보는데 있어서, 그동안 거듭되던 박해로 인하여 역사 자료 보전이나 전승이 극난하여 잘못 알려진 부분들을 바로잡고,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소간의 설명을 필요로 하는 곳이 적지 않다. 이제 전 세계 교회가 놀라운 역사로 인정하고 감탄하며 격찬하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있어서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함께 모으며, 거룩한 순교 선혈로 그리스도의 길을 함께 걸어간 우리 신앙의 선조들 중에, 우선 5위 성현들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34.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으로 순교하신 위대한 스승이며 대학자였던 세례자 요한 광암 이벽(1754-1785) 성조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에 온 힘을 기울이다가 마침내 생명을 바친, 베드로 이승훈 베드로(1756-1801) 진사와, 당시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권일신 (1742-1792 대학자, 그의 형 암브로시오 권철신(1736-1801) 대학자, 또 새로 탄생한 한국천주교회 내의 최초 전도단체였던 明道會 초대 회장 아우구스띠노 정약종(1760-1801) 호교론가의 신앙과 활동과 순교사를 요약하여 살펴보기 위하여, 먼저 우리 신앙선조들, 특히 교회 창립의 주역이었던 광암 이벽 성조의 가문과 그 집안 선조들의 내력을 간단하게라도 두루 살펴보는 것은 매우 필요한 공부가 아닐 수 없다. 마치 뿌리없는 나무가 없고, 터 없는 집이 없듯이, 갑자기 우연히, 제절로 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새로운 종교의 출발은 교리나 조직이나 서적이나 지식이나 권력이나 재력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된 장소와 시대와 인물과 문화의 上下, 先後, 左右, 內外의 환경과 여건의 요소가 구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분들에 대한 호칭도, 200 여년 전 우리의 문화와 관습을 따라, 가능한 한 당시 어려서부터 자타가 부르던 관습부터 시작하여 써 나가므로써 보다 역사성을 살려보고자 한다.
2.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 특히 이벽 성조의 집안 내력
35. 우리나라 천주교회 창립의 주동역활을 한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의 이름은 세자요한 광암 이벽 덕조(1754~1785)다. 1784년 늦은 봄, 천주교회에서 받은 세례명은 세자 요한이고, 1770년 경에 스스로 지은 号는 광암(曠菴)이며, 문중의 족보에 올린 관명은 檗이고, 어려서 부모가 지어서 집에서 부르던 兒名은 字가 덕조(德祖)인데, 후에 정약용과 안정복, 등 남들이 修道와 修德에 志操가 변함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德操라고 쓰거나 부르기도 하였다. 이벽 성조는 1754년 경주이씨 집안에서 아버지 이부만과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포천현의 안골 꽃마루 새터말(內村面 花峴里 新基洞)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빼어나서 집안과 이웃이 모두 범상한 아기로 여겼다고, 정학술의 李檗傳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어려서부터 이목구비가 선인도골(仙人道骨) 형으로 출중하게 수려하고, 자라면서 기골이 장대한 체격을 지니고 있어, 집안에서는 물론 마을과 친지들을 감탄케 하였으며, 총명하고 예의범절이 너무나 근엄하면서도 온화하여, 장차 위대한 큰 인물이 되어, 집안과 가문을 크게 빛낼 것이라고 아버지는 믿고 있었다. 아버지 이부만은 늘, 우리 둘째 아들 덕조가 크면, 반드시 우리나라와 우리 가문에 큰 영광이 될 것이라고 자주 말하며, 끔찍이 사랑하고 아끼던 소년이었다.
36. 이벽 성조는 고려 때 몽고족대란 중에 세워진 元 나라의 침략과 통치 150여년 간에몇몇 고려 왕들, 특히 忠宣王을 모시던 명재상 익제 이제현의 직계 15대손이고, 조선시대 倭敵의 임진왜란 7년 중 宣祖 임금을 모시고 救國 外交에 공헌한 명재상 지퇴당 이정형의 직계 10대손이며, 만주족이 세우던 靑 나라 초기 병자호란 9년 동안 昭顯世子를 모시고 심양을 거쳐 북경에 가서 Adam Schall 신부와 교분을 맺으며 조선인 시종관 중에 3명의 수행원을 영세시켜 귀국한 서장관 黙菴 이경상의 직계 5대손이다. 즉 이벽 성조는 가문의 전통으로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외국 문물을 현장에 가서 다년간씩 접촉하며 견학하여 박학다식한 재상들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난 천재적인 영특한 후예였다.
37. 우리가 지금 부르는 세자 요한 광암 이벽 성조에 관하여 좀더 다시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으니, 이벽 성조는, 경주이씨 양반 집안 출신으로 1754년에 아버지 이부만과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르던 兒名은 덕조(德祖)였으나, 족보상의 이름은 檗이라고 하였으니, 그 당시 족보상의 이름은 평소에 자타가 사용하지 않고, 공식적인 경우에나 쓰였다. 15 세 전후 1770년 경, 천진암에 입산 수도를 시작하던 때부터는 남들이, 특히 정약용의 글에 덕조(德操)라고 쓰기도 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자신이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 号는 광암(曠菴)이었다. 1784년 늦은 봄, 이승훈 진사가 북경에서 돌아온 후, 영세할 때 자신이 선택한 세례명은 세자 요한이다.
38. 그의 조상들은 6 가야 시대를 전후하여 月城李氏로서 신라 건국에도 크게 이바지한 씨족이었다. 慶州李氏 가문에서는 이미 고려와 조선, 두 왕조를 거치면서 나라의 임금들을 측근에서 모시는 중요하고 높은 관직을 맡았었다. 예를 들어, 고려 때 익제 이제현은 13세에 당시 고려의 성균관 시험에 1등 합격하고, 이어서 15세에 과거 시험에 바로 합격하여, 어려서부터 관직에 오르기 시작한 英材였다. 그는 훗날 조선 천주교회를 세우는데 중심 역할을 한 이벽 성조의 15대 직계 조상으로서, 고려가 몽고족 元 나라 침략으로 국난을 당하자 조정의 재상이자 위대한 학자로서 볼모로 북경에 머물면서, 볼모로 함께 끌려온 고려 왕을 모셨으며, 고려에서는 처음으로 性理學 같은 철학을 체계화하고 확립하였으며. 몽고족이 세운 元 나라의 침략으로 고려의 다른 왕들이 볼모로 북경에 교체되어 가 있을 때도, 여러 왕들을 수행하며 보필하기도 하였다. 이제현이 북경에 머물고 있던 20 여년 동안에는 그 곳에서 고려의, 특히 충선왕과 함께 만권당(萬卷堂)이라는 철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원 나라의 다른 중국인 학자들과 함께 여러 해 동안 古代 선유(先儒)의 儒學을 가르치며, 母國 고려의 젊은 영재들을 원 나라 북경으로 선발하여다가 유학시켜, 國權回復 운동을 은밀히 추진하기도 하였다.
39, 또 원 나라 황실에 끈질기게 요청하여 어려운 허락을 받아, 1316년부터 1323년까지 3차에 걸쳐 지금의 티벳 서남부와 위그루 지역, 아시아와 유럽의 접경인 天山 부근과, 특히 서촉(西蜀)의 名山들 중에 아미산까지 가서 제단을 모으고, 고려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致誠을 드리며 하느님과 天地神明께 제사를 바쳤고, 터어키 접경 지역까지, 중앙아시아의 동북부 명승지를 순례하며 천지신명께 치성을 드리고,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정성을 다하여 충선왕을 모시고 聖地를 찾아 함께 애절히 기도하며, 고려의 독립과 함께, 몽고인들로부터 국왕이 하루속히 석방되기를 기원하였다. 사실, 당시 고려인들 중에 이렇게 다년간 가장 머나먼 수만리 순례의 길을 3차례나 다녀온 사람은 익제 이제현 외에는 없었고, 門下侍中 이제현이 유일한 학자였다.
40. 그 중 첫 번째 순례 때는 충선왕을 모시고 함께 순례하였다. 다만 당시 고려인들은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하느님과 동일한 개념의 천주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반만년 전부터 하늘과 땅의 주인으로 유일신 하느님을 인식하고 섬기는 종교정신을 지니고 있는 민족이었기에, 당시 고려의 문하시중(현재의 국무총리에 해당) 이제현은 7 년 동안이나 걸리는 장기간의 3 차례에 걸친 머나먼 수만리 길의 이 순례를 통해서, 이미 그 주변에 많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일부 들어와 있던 그리스도교 문화를 조금씩 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41. 그리고 고려로 돌아오면서는 다양한 학문 영역의 적지 않은 외국 책들을 가지고 들어와서 후학들의 교육에도 집중하여 크나큰 성과를 내었다. 원 나라의 국운 융성과 원나라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순례라고 핑계를 대었지만, 사실은 고려의 국권회복을 上帝 天主 하느님께 기원하면서, 원나라와 싸우며 적대관계에 있던 서쪽 끝 지금의 동 유롭 서양나라 들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순례였다. 그래서, 이제현 문하시중이 요청하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순례길에는 원 나라 황실에서 눈치를 챘는지, 충선왕은 함께 가지 못하게 하고, 이제현 일행만이 치성드리고 오라는 허락을 그나마 가까스로 받았으며, 충선왕은 오히려 甘肅省 지역으로 더 고통스러운 머나먼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고려의 일반 백성들도 救國의 마음만으로 애타하던 시절, 고려의 조정 대신들이 유람이나 관광을 다니는 수준은 아니었다.
42. 또 이제현의 직계 5대 후손이 되는 지퇴당 이 정형은 광암 이벽 성조의 직계 10대조로서, 1593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조선의 임금 선조가 신의주까지 피난하는 국난을 겪을 때, 측근에서 왕을 보필하였고, 조선으로서는 역부족이었던 왜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중국 明 나라의 지원군 파병을 요청하라는 왕명을 받아, 명 나라 북경에 파견되어, 이를 성사시키기도 하였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그는 그의 제자이며 14년 아래 후배였던 芝峯 이수광과 함께 서양 문화에 관한 많은 책들을 가지고 귀국했고, 이 책들 가운데에는 유럽선교사들이 번역했거나 저술했던 천주교에 대한 책들, 天主實義, 職方外記, 등도 들어있었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후, 이정형과 이수광 두 사람들은 교대로 지금의 天眞菴이 속해 있는 廣州郡의 현감을 역임하면서, 광주 지역에 학문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특히 서양문물을 소개하며 광주실학(廣州實學)을 싹틔우기 시작하였다.
43. 7년간의 임진왜란 이후, 즉 1637년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仁祖 임금이 항복하게 되자, 광암 이벽 성조의 직계 6대조 이경상 또한 조선의 이 국난 중에 조정에서 왕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중요한 직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경상은 인조 임금의 명으로 靑 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昭顯世子를 8년간이나 수행하는 서장관 직무를 받아 성실히 수행하였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소현 세자와 이경상은 당시 북경에 머물면서, 거기서 선교 활동하고 있던 독일인 Adam Schall 예수회 신부와 친분을 맺고, 소현 세자의 허락을 받아, 이경상은 자신이 데리고 간 그의 조선인 시종 3명으로 하여금 아담 샬 신부한테서 1645년 봄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아담 샬 신부와 정신적으로 친해진 서장관 이경상과 소현세자도 입교 영세하였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불분명하다. 귀국 후, 국내 政敵들은 아직도 親明派와 親淸派와 親父王派, 등으로 정국이 불안하던 중이라서, 자신들의 생소한 서양 종교인 천주교 입교나 영세는 감추거나 밝히지 말아야 하는 것이 지혜롭게 여길 때였다. 적어도, 소현세자가 귀국 후 두 달도 채 되기 전에 독살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의문을 낳게 한다.
44. 8년간의 볼모생활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올 때에는 아담 샬 신부의 배려와 주선으로, 아담 샬 신부가 세례를 베풀어준 5명의 중국인 영세 신자들도 함께 데리고 조선으로 귀국하였으니, Adam Schal 신부의 주선으로 모두 8명의 영세신자들로 구성된 마치 평신도 선교단과도 같이 교회 서적들과 성물들을 구입하여 가지고, 소현세자와 이경상 서장관과 함께, 지금의 해외 성지 순례를 다녀오는 신자들처럼, 희망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45. 그러나 1645년 봄 귀국하자마자 2 개월 후, 소현 세자는 갑자기 독살로 죽음을 당하였다. 9년간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과 장례는 독살로 밖에는 달리 설명이 안되는 죽음의 현상이 궁중기록으로 알려졌으니, 갑자기 죽은 소현세자의 시신은 머리의 두 눈, 코, 귀, 입, 7곱 구멍과 하체 두 곳, 모두 전신 9개 구멍에서 출혈이 쏟아지고, 온 몸은 진흙덩이처럼 상해 있었고, 시신 입관 때도 참관자들을 극히 통제하며, 극비리에 궁중 내관 몇몇이 하였다는 기록으로 독살임이 증명되고 있다.
46.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천주교 사제 Adam Schall 서양 선교사와 접촉하면서 청 나라에 9 년 가까이 있으면서, 명 나라를 멸망시키는 청 나라 군대의 북경 함락에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청 나라의 지지를 받으므로, 국내에서는 아직도 중국의 구정권인 명 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우는 대신들의 증오심과, 남한산성 함락으로 삼전도에 끌려나와 청 라 장군 한테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던 仁祖 임금의 증오심도 소현세자의 독살에 무관하다고 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서양의 이상한 종교를 믿는 신도들을 8명이나 데리고 온 소현세자의 신앙도 문제가 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47. 소현세자가 비운에 세상을 따나자, 북경에서 귀국할 때 데리고 들어온 다섯 명의 중국인 신도들은 즉시 중국으로 다시 귀국조치되었고, 세자의 비서실장(서장관)이었던 이경상 역시 바로 사직당하고 낙향하여,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북경에서 Adam Schall 신부한테 세례까지 받고 함께 귀국하였던 3명의 그 시종들에 대해서는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종적이 묘연하여, 아무런 기록도 국내에서는 더 이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훗 날, 북경에서 1784년 2월 24일(?) 이승훈 진사 1 인의 영세보다 139년이 앞서는 1645년 이경상이 부리던 소현세자의 시종관들 3명의 입교 영세와 韓.中 8명의 영세 신자단 귀국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추후 계속 2013. 7.17. Msgr. Byon>
48.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이 벽 성조의 가문은 나라와 임금에 충성하면서, 학문과 천주교 신앙과 접촉과 관계 발전에 당시로서는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회 분위기로서는 서양문물이나 서양 종교에 관한 분야는 돋보일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오로지 왕에 대한 애국심과 충성심으로 매우 유명한 집안이 되었다. 고려 몽고족 대란 때 이벽 성조의 15대조 이제현이 1250년 원나라 서북 쪽 순례 여행 때 천주교 문화와 간접 접촉을 하였고, 조선 임진왜란 때 이벽성조의 10대조 이정형이 1594년 이수광과 더불어 천주교 서적을 들여왔고, 천진암이 있는 경기도 광주(廣州) 부윤으로 재직하면서 서양 지식과 實學 사상을 일깨웠으며, 병자호란 때 이벽성조의 5대조 이경상이 1645년까지 소현세자를 모시고 9년간 심양에 머물다가 북경에 가서 아담 샬 신부와 교분을 맺고, 천주교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49. 그리하여 경주이씨 집안 서가에는 선조들이 수년간씩 머물던 해외에서 들여온 귀한 외국서적들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으므로, 그 후손들은 다른 문중의 후손들에 비해 외국의 새로운 학문에 보다 쉽게 또 넓게 접할 수 있었으며, 남들이 볼 수 없는 해외서적들을 읽은 지식으로 식견이 넓어서, 출세에도 도움이 되었으니, 오성과 한음으로 더 알려진 이항복, 이덕형, 등 경주이씨 문중에서는 훌륭한 명재상들과 중요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3. 이벽 성조의 천진암 천학당 강학과 한국천주교회의 창립
50. 그런데, 이 경상의 5대 후손으로 태어난 천재적인 소년 이벽 성조는 어려서부터 부귀공명을 위한 현세적 출세와 성공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간곡히 바라며 명하였어도 과거 시험 준비는 하지 않았다. 물론, 이벽 성조 자신도 집안의 서가에 있는 그많은 책들을 읽었겠지만, 젊어서부터 그의 관심은 오직 학문과 진리 탐구에만 집중하는 것이였다. 그러한 학문적 열정으로 인해 그는 儒學을 비롯하여 천문학, 지리학, 수학, 曆學, 의학, 기하원본, 天學 같은 다양한 영역에 대한 깊은 지식과 지혜를 갖출 수 있었다. 특히 天學, 즉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진리에 대한 매력과 갈증은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51. 물론 그 당시 조선에는 그리스도교가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몇몇 학자들이 서양학문을 다루는 책들을 읽었고, 그런 책들 가운데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책도 있기는 하였지만, 이들의 관심은 학문적인 호기심에 그쳤으나, 이벽 성조의 열정은 天學을 알보는데 그치지 않고 실행하는 데까지 힘쓰는 매우 특별한 방향이고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집안에 내려오는 책들 덕분에 일찍부터 그리스도교를 더 쉽게 접하고 알 수가 있었기에, 천주교 진리탐구에 더욱 몰두하면서 이벽 성조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교리의 참된 의미와 깊은 뜻을 이해하는데 전념했다. 그리고 보다 더 효과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조용하고 외딴 곳, 즉 당시 불교의 암자였던 천진암이 있는 앵자산으로 입산하여 은거하며 修道하였다.
52, 본래 우리나라 역사상 훌륭한 청소년 名人들 중에는 삼국시대 전후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15세 전후에 가정을 떠나, 주로 계견성(鷄犬聲) 들리지 않는 심산궁곡(深山窮谷)에 들어가서 움막을 짖거나 혹은 불교 암자나 道敎의 초라한 시설물에 거하면서, 학문연구와 정신수양, 무술연마에 집중한 사람들이 많았고, 고등교육기관이 없던 시대에는 불가피하게 이를 본받아 후학들도 隱居하며 修道에 힘쓰는 관습이 있었다.
53. 예를 들어 신라통일에 기여했던 花郞徒들은 왕족이나 귀족 집안의 子弟로서 15세 경에 入山하여 수도하며 인격을 陶冶한 후, 18세나 20세 경에 화랑이 되어 下山 하였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학문과 종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護國의 名師들이 대부분 그러했다. 무술연마에 있어서뿐 아니라, 종교나 학문에 있어서도 같았다. 원효대사, 의상대사, 이차돈, 혜초, 최제우, 등뿐 아니라, 남이장군, 김덕령 장군, 김유신, 김춘추, 등이 대부분 10대 중반이나 후반의 젊은이들로서 은거하며 수양에 들어갔었으니, 대학이나 대학원, 연구소 같은 제도적인 고등교육기관이 없던 시절에, 젊은 청소년들 자신이 개척하는 자기수양의 길이었다.
54. 훗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후, 독립군의 결성과정에서도, 김좌진, 이범석, 홈범도, 윤봉길, 유관순, 등이 모두가 10대 중반과 20대 미만의 남녀 청소년들이었으니, 모두가 오늘날의 청소년들에 비하여 매우 일찍 위인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우리 한민족의 청소년들이 학문과 수양의 인격도야에 은수자다운 방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던 시대상황과 당시 젊은이들의 자질과 열정을 이해하는 것은, 마치 신약시대에 광야에서 은수하던 세례자 요한이나, 그 후 광야의 안또니오처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55. 천진암에 은거하던 광암 이벽 성조의 이러한 자아수련은 15세를 전후하여 입산한 후 30대까지, 즉,1770년부터 1784년 늦은 봄까지 약 15년 동안 계속되었으니, 이승훈 진사가 북경에 파견되어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에서야 下山하여 서울로 入城하였다. 이벽 성조는 보다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서울 수표동 자택으로 이사하기 까지, 약 15년 정도 지속되었다. 한편, 이벽 성조의 학문, 덕행, 성품 등에 대한 명성이 당시 젊은 학자들 사이에 아주 높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정약용 자신과 그의 두 형제들, 정약전과 정약종, 그리고 이승훈, 권상학, 권상문, 등과, 특히 이 젊은이들이 천주교신앙의 종교적 공동체로 발전하면서 저명한 연장자인 권일신, 권철신 같은 학자들도 훗날 이벽 성조를 열심으로 추종하며 자신들은 이벽 성조의 제자들이라고 자칭하였다고, 벽위편과 정약용의 문헌은 밝히고 있다.
56. 1770년부터 입산수도한지 7년 후, 즉 1777년부터는 이벽 성조를 중심으로 젊은 소년 선비들이 모여들어 종종 학문연구 모임이 앵자산 천진암에서 열렸었는데, 당시 유학자들 사이에서 종종 개최하던 이러한 학문적 연구모임을 당시는 강학(講學)이라고 불렀다. 본래 조선시대의 강학은 특히 궁중에서 정식으로 가장 수준 높게 개최되었었는데, 왕의 아들들을 교육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로서, 세자로 책봉된 동궁(東宮)의 학업을 점검하고 발전시키기도 하여, 이를 전담하는 강학관(講學官)이 있었고, 강학법(講學法)이 있었으며, 강학당(講學堂)이 있던 때도 있었다. 또한 양반 학자들의 문중에서나 지방의 서원(書院)이나 좀 이름난 書堂이나 큰 사찰에서도 개최되어, 박학다식(博學多識)한 젊은 선비들이 학계에 진출(데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강학에는 저명한 대학자들의 참석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강학 후에는 향사례(鄕射禮) 같은 큰 축하행사도 있었다.
57. 그런데 이벽 성조께서 천진암에 입산하던 시기는 1768년 누님이 마재(馬峴)의 정약현과 결혼하던 해를 전후하여, 누님 댁에서 가까운 강건너 두미(斗尾)에 집을 마련하여 거하던 때로서, 몇몇 기록에서는 1770년으로 입산수도의 시작 연도를 말하고 있으니, 천진암에 16세로 입산수도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찾아오는 소년들에게 단순한 한학(漢學)을 가르치던 천진암 서당의 젊은 선생이었으나, 여기서 소년들을 가르치면서 학문에 더욱 깊히 7년 정도 면학(勉學)한 후, 즉 1777년 정유년 경부터는 젊은 소년 선비들끼리 강학을 개최하였었으며, 1779년 기해년 경에는 세간에 소문도 자자하여, 권철신 같은 대학자들도 참석하는 수준높은 학문적 강학이 열리기도 하였다.
58. 언제부터 이벽 성조가 천진암에 은거하며 공부하기 시작했는지 그 정확한 시기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문헌에 몇가지 기록들이 있으니, 1770년과 1776년, 1778년, 1779년, 등이다. 즉, 15세 전후부터 30세가 되던 1784년 늦은 봄 4월 중순까지, 약 15년 정도 천진암을 본거지로 삼고 학문과 수도와 천학 강학과 천주교 신앙수련에 집중하였다., 종종 下山하는 경우는, 부모 생신이나 조상 제사 같은 큰 일이 집안에 있을 때와, 친지들이 알려주는 대학자들의 詩會나 큰 모임이 있을 때였다.
59. 천진암 강학에 관하여 1850년 경 다불뤼 주교는 1777년 강학을 기록하였고, 정학술은 1830년대에 기록한 이벽전에서 1778년 무술년과 1779년 기해년에 이벽선생이 천진암에 은거(隱居)하며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학문을 가르쳐서, 선비들의 단체, 총림을 이루었다고 하였으며, 정약용은 1816년과 1822년 경에 기록한 문헌에서 1779년 겨울에 천진암에서 훌륭한 강학이 개최되었었으나, 그 후 7년(1785) 경에, 천진암 강학을 비방하는 소리가 일어나서, 다시는 그러한 좋은 강학을 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60. 그런데, 정학술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이벽전의 내용이 정약용 아니고는 다른 사람이 쓸 수 없는 것들이 있어서, 이벽전 역시 정약용이 1830년 이후 그의 말년에 정학술에게 하필(下筆)한 것이거나, 혹은 자신이 假名으로 기록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니, 1827년에 천진암을 마지막으로 3일간 다녀가며 정약용이 지은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의 詩文 속에는 假名이나 他人 명의로 자신의 신상에 대한 詩感을 기록한 문장들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정약용 승지의 말년에 쓰여진 문헌을 보면 짐작과 이해가 되는 사안이다. 사실은 문헌과 문맥은 내용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것이고, 작자 명의는 그 다음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박해시대에 쓴 정약용의 기록들이나, 황사영의 백서, 등이다.
61. 이러한 강학회에서는 학문적 연구를 하고 어떤 주제에 대한 토론이 진지하게 진행되었는데, 1777년부터 시작된 천진암 강학회가 1779년을 전후하여 몇 년 동안 절정을 이루었으며, 천진암 강학회에서 젊은 청소년들이 집중적으로 다루고 실천하던 것은 주로 서양의 新學問과 天學이었다. 강학이 본 궤도에 오르던 1777년을 중심으로 참석자들의 나이를 살펴보면, 당시 이벽 성조, 23세, 정약용 15세, 정약종 17세, 정약전 19세, 이승훈 21세, 이총억 14세, 등이었다. 당시 우수한 젊은 선비들이 모이는 이 모임에는 당시 권철신 같은 저명한 학자들이 참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62. 그 시절 양근 갈산리의 대학자, 41세의 권철신 성현도 천진암 강학에 참석하여 젊은 선비들과 호흡을 같이 하던 적이 없지 않았으며, 천진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주 중리의 처갓집에 수개월씩 머물면서 장인어른이 되는 순암 안정복(順菴 安鼎福)을 스승으로 모시고(師事) 배우던 권일신 성현(35세)도 그 형 권철신처럼, 정약용네 형제들과 함께 천학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천학에 빠져들어가는 젊은이들을 타이르러, 牛山莊이라고도 부르던 천진암 天學堂에 안정복 같은 학자도, 강학회에 참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모임을 주도하던 이벽성조를 비롯한 젊은 선비들을 孔孟의 正道로 다시 돌아오도록 권유하기 위하여, 그도 방문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당시 대학자로 명망이 높던 순암 선생이 첩첩 산중이었던 광주산맥 상상봉 밑에 있는 띠풀집 몇채밖에 없던 절막 까지 소미(쇠메, 牛山里, 天眞菴 天學堂)에 다녀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63. 그러나 이벽성조께서는 몇 년 후 이가환이나 이기양 같은 대학자들이 공개토론회에서 질문에 막혀 답변은 못하면서도, 체면상 즉시 천주교에 입교를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저명한 학자들을 찾아가 전교하는 일은 헛수고이며 시간낭비로 여겨 적극적으로 찾지를 않았다. 체면과 위신 때문에 새 종교의 진리를 따르기를 주저하는 저명인사들이 지금이나 그 때마 항상 있게 마련이다. 이 점에서 볼 때, 권철신, 권일신 성현들의 인격과 심성이 얼마나 훌륭한 분들이었는지 잘 들어난다.
64. 그래서, 순암 안정복은 자신의 사위 권일신의 형 권철신에게 보낸 서찰에서, “자네들이 전에는 척불(斥佛)로 불교를 배척하더니, 이제는 천주교에 매혹되어 속수무책이라니, 그 천주교 책을 좀 내게 가지고 오도록 말하여도 이덕조(이벽)가 광주 땅에 와서 거하며, 광주를 종종 들리면서도 내게 다녀가지 않으니, 천주교는 자네들을 그렇게 가르치는가? ”하고 몹시 얺잖은 불쾌감을 표하였다.
65. 여타의 강학회처럼, 천진암에서의 이 강학회에서도 처음에는 유교,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책들의 내용을 다루었다. 그러나 이벽 성조의 주도하에 강학회의 성격이 급속히 천주교 교리 연구와 신앙 실천으로 바뀌어 나가게 되었으니, 학문적 성격의 강학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실천 운동의 단체로 발전한 것이다. 즉, 진리는 진실하게 실제생활에 있어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務實力行의 廣州實學 정신이었다. 훗날 정약용은 이 때 천진암에 모여, 천학을 연구하고 실천하던 선비들의 단체를, 마치 불교의 총림(叢林), 즉 ‘스님들의 단체’와 다름이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其門下如叢林).
66. 이벽 성조께서 순교하시고 5년이 지난 후에, 이승훈 성현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이 시기에 이벽 성조는 천주교 신앙에 대해 이미 매우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열심히 더 많은 것을 실천하고 있었다. 강학회에 참석했던 젊은이들이 처음에는 학문연구에 집중 했지만 후에는 가톨릭 교리 연구와 신앙 실천에 더 열성적이었다. 그리하여 이벽 성조를 웃어른(爲上)으로 모시고 그의 지도를 받는 신앙의 단체를 형성하고 발전시켰다.
67. 그 당시 이분들의 업적 중에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살펴보면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으니, 천주교회에는 천주께 봉헌된 날, 주일이 있음을 알고, 당시 우리나라에 요일이 알려지지 않은 시절임에도 불고하고, 음력으로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을 천주님의 날로 하루를 정하여 주일로 삼고, 하루 종일 노동을 하지 않고 기도하며 묵상하고 단식하면서 그 날을 거룩하게 지냈다. 또한 십계명을 지키고 교회의 규정들을 지키는 데 전념하며, 천주공경가와 십계명가 같은 성가를 지어 부르기도 하였다.
68. 이 때 이벽성조께서는 부모님 생신이나 조상님들 기일같은 날이라야 부득이 下山하여 고향이나 친지들 집에 들리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터득하고 믿고 있는 천주교 천학에 대하여 다른 선비들에게 알리고자, 누님댁이 있던 마재와, 녹암 선생의 제자들이 많이 모이던 양근 葛山의 권철신 서당이나, 작은 아버지 호만 공이 큰 부호로서 많은 선비 식객들이 늘 붐비던 춘천 馬足山아래 샘밭(泉田里) 서당이나, 포천 花峴里 本家나, 성호 이익선생의 서당이 있는 安山이나, 남쪽 연안 바다 건너 충남 내포지방의 온양과 덕산, 삽교 지역의 선비들 모임이나, 경주이씨들이 거주하던 미리내, 등 여러 곳을 바람을 쐴 겸, 세상 선비들의 생각을 깨우쳐줄 겸 종종 찾아가 天學을 설법하며 周遊天下하기도 하였다.
69. 1779년 기해년 강학 때도 이처럼 몇주간이나 달포씩 下山하여 周遊하다가 마재의 누님댁에 들려, 정약전, 정약종, 이승훈, 정약용, 등 몇몇이 함께하는 연구회가 녹암 선생을 모시고 주어사라는 山寺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嚴冬雪寒에 밤중까지 걸어서 찾아갔다가, 그 모임은 앵자산 넘어 천진암에서 하고 있음을 듣고, 그 밤으로 장산을 넘을 수 밖에 없었으니, 그 저명하신 대학자 녹암 권철신 선생 어른께서 와서 계시다는 사실을 듣고도, 비록 엄동에 눈이 많이 쌓인 높은 산 광주산맥 험준한 주봉이라도 넘어가야 예의지, 밤중이라고 그대로 주어사에서 밤을 보낼 수는 없는 것이 당시의 선비들이 지닌 상식적인 예의였다.
70. 사실 대지가 30 여평에 불과한 비좁은 주어사 터에서 학자들의 연구 모임이나 강학은 물리적으로도 사실상 어려운 것이므로, 3 천여평 넓은 대지에 金堂이나 요사체 외에도, 客舍와 書堂과 禪房과 讀書堂 등이 있던 넓직한 천진암 天學堂에 모여서 학문을 토론한다는 소식이 잘못 전해졌었기에, 이벽 성조는 그 밤으로 산을 넘어 천진암에 이르러, 10여일간을 지내며 함께하게 되었다. 당시 가장 나이가 어린 정약용은 41세의 대학자 권철신도 참석했던 이 기해년 강학을 가장 감격하여 훗날, 둘째 형, 정약전 묘지명과 녹암 권철신 묘지명과 자신의 자찬 묘지명, 등에 이 강학을 몇 차례나 기록으로 남겼다. 사실 대학자 권철신의 참석으로 용기백배하게 된 젊은 선비들의 이 강학은 한국천주교회 탄생과 창립의 큰 계기가 되었다.
71. 천진암에서의 이러한 강학회가 1779년 이후로 적어도 7년간은 지속되었는데, 이 모임에서 이벽 성조는 신구약 성서를 요약한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지어 제자들이 받아 써서 익히도록 하필(下筆)하였고, 당시 천학총림(天學叢林)의 단체가(團體歌)처럼, <天主恭敬歌(천주공경가)>를 지어 부르게 하였으니, 마치 東學 초기에 敎徒들이 부르던 呪文이나 초기 東學의 歌詞(가사)처럼, 우리나라에서 시작되는 신흥 종교들이 으레 신앙의 기도 겸 노래를 지어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천주공경가는 天學叢林歌로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천주교 청소년들의 자발적인 自作 聖歌이며, 天學堂의 團體歌였다.
72. 이 강학회에 참석했던 인물 중 정약종 성현은 <십계명가>를 지어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강학회로 시작한 천진암의 천학총림은 사실상 한국가톨릭교회의 최초 신앙 단체였다. 50여년 후, 조선에 입국하여 조선 천주교회 순교사를 조사하여 연구하고 집필한 Daveluy 주교는 그의 저서 첫 페이지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이 강학회의 성격을 정당하게 평가하였다: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천주교회 역사의 시작은 이벽의 이 위대한 강학회에서 시작되었다".
73. 이 강학 공동체, 천학총림은, 이벽 성조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젊은 선비들의 최초 <그리스도교 단체>로서, 진리와 신앙에 대한 열정으로 이벽 성조와 그를 추종하던 젊은 선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출발하였고, 점점 발전하여 갔으며, 선교사나 성직자나 천주교 신자가 없이 자발적으로 소박하고 순수하게 자기들끼리 탄생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갖 태어난 한국천주교회 신앙인들의 이 단체가 드디어 나라 밖으로까지 가서 천주교회의 각종 예절과 생활 규정을 알아보려고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74. 그리하여, 서양선교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북경 교회에, 수차례에 걸쳐 이벽 성조께서는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의 대표자로 광암 이벽 성조 자신을 대신하는 <대리자> 파견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조선과 중국 사이의 왕래가 일년에 한두번 사신들과 몇몇 상인들 외에는 없었고, 일반인들에게는 매우 제한되어 어려웠던 관계로, 그런 시도들은 매번 아무런 결과도 없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우리 신앙선조들의 열망은 마침내 그 결실을 보게 되었으니, 이벽 성조의 제자이자 강학회의 일원이었던 이승훈 진사가 1783년 가을 중국사신으로 가는 그 아버지의 수행원으로 북경에 갈 기회를 얻게 된 것이었다. 이벽 성조는 즉시 이승훈 진사에게 한국신자 공동체의 <대리자> 로서의 임무를 맡기며, 천주교회에 대해 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오고, 아울러 세례도 청하여 받도록 하며, 또한 기도서들을 가지고 돌아올 것을 명하였다.(李承薰 李檗大奇之 檗曰 北京有天主堂 天主堂有西洋西士傳敎者 求信經一部 幷請領洗 必勿空還,,,-黃嗣永 帛書).
75. 이벽 성조는 이승훈 성현이 받은 이 임무가 조선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사명인지를 강조하면서 온 마음과 주의를 기울여 사명을 완수할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이때 이승훈 성현의 태도에 대해 다블뤼 주교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기록하였다: <이승훈은 이벽의 말을 위대한 큰 스승, 대도사(大道師)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Il a recu la parole du Maitre)>고 다불뤼 주교는 기록하였는데, 프랑스어에서, 문장 속에 나오는. ‘스승(maitre)이라는 단어를, 대문자로 시작하는, ’Maitre'라고 하였으니, 이는 보통 ‘스승’들의 말씀이 아니고, 공자, 맹자, 플라톤, 소크라테스, 같은, 인류의 위대한 큰 스승, 大道師, 新興 大宗敎의 敎主님의 말씀처럼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76. 또한 이벽 성조 순교 후 반세기가 지난 1836 봄에 조선에 입국했던 성 Pierre Maubant신부도 파리외방선교회의 신학교 총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 역사적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벽은 그리스도교를 전적으로 전심으로 받아들였고, 몇몇 다른 改宗者들과 함께 마음과 힘을 합하여 이승훈을 자신의 대리자로 1783년 북경에 파견하였다.
77. 이승훈 진사는 주어진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그는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까지 받았는데, 베드로라는 본명은 이승훈 진사가 출국하기 전에 이미 이벽성조께서 미리 정해준 것이었다고 Daveluy 주교는 그의 문헌에서 밝히고 있다. 이승훈 진사는 1784년 2월 24일(?) 북경 북당에서 프랑스 선교사 예수회원 Joseph de Grammont 신부한테서 세례성사를 받고, 천주교 신앙생활과 예절거행에 관한 서적들과 성물들을 가지고, 같은 해 3월 말 경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78. 이 책들을 받고나서 이벽 성조는, 천주교회 신앙생활과 예절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더 깊히 연구하는데 전념하는 동시에 자발적으로 그 신앙을 실천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벽 성조는 자신의 본명을 세례자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정하여 세례를 받았는데, 이는 그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으므로, 세례자 요한에 비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같은 해 대학자로서 제자들이 많았던 권일신 성현은 선교활동의 주보가 되는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의 본명을 정해주었다. 이를 보면 이벽성조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을 위하여 이승훈 북경 파견 이전부터 이미 주도면밀하게 연구하고 사목계획을 수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9. 그 때부터 이벽 성조의 활동은 더욱더 열성적이었고,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가톨릭 신앙의 복음 전파 본부를, 그가 15년 가까이 머물면서, 제자들과 함께 천학 연구와 강의와 기도와 묵상에 열중하며 실천하던 본거지 천진암으로부터 자택이 있던 서울의 수표동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마음 먹고, 1784년 음력 4월 중순에 서울로 들어가서, 수표동에 마련해 두었던 자택을 천주교 집회소로 삼아 포교활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80. 그리하여 서울에 입성한 후에는 아주 공개적으로 천주교회를 전파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당시 서울에서 저명한 학자였던 이가환(훗 날 공조판서)과 이기양(훗날 문의현감)과 같은 당대의 대학자들과 천주교에 대한 공개적인 대 토론회를 열었는데, 천주교 교리와 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운집한 선비들 앞에서 비교하며 토론하는 것이었다. 사실 두차례에 걸친 학문적 이 토론회는 학자들이 먼저 제안한 것이였으니, 광암 이벽이 잘못된 종교를 믿고 퍼뜨리므로 타이르고 가르쳐서 바른 길(孔孟의 正道)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차례의 걸친 공개토론회에서 저명한 이가환, 이기양 같은 대학자들도 이벽성조의 적수는 아니었다. 2 명의 저명한 당대 학자들을 굴복시키며 승리하므로써, 서울 장안에는 새로운 종교, 천주교가 선비들의 화제가 되었고, 적지 않은 젊은 선비들이 입교하게 되었다.
81. 이벽 성조의 공개적인 선교활동과 여러 학자들과의 토론으로 그는 1년 동안 500여명을 천주교회로 입교시킬 수 있었다. 이승훈 진사가 중국에서 돌아온 후였으므로,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여 천주교회를 알고 믿고 있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서로가 세례를 주고 받으며 전도하기에 힘썼다. 새로 탄생된 한국 교회의 창립 초기 신도들은 더욱 힘을 얻어, 이벽 성조와 함께 주님의 복음을 각자의 벗들과 친지들에게, 이웃 사람들에게 알리며, 공개적으로 선전하고 권면하면서 많은 이들을 개종시켰다. 적지 않은 이들이 세례를 받았고, 함께 가톨릭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사실 천진암 강학회와 천학총림에 함께한 젊은 학자들이 서울로 들어와 이벽성조의 자택을 집회소로 삼아 약 1년간 전도하여 입교시킨 사람들은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희생적인 봉헌과 용감한 순교로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주초와 기둥이 되었다.
4. 서울에서의 전도활동과 최초의 박해 및 이벽 성조의 순교
82. 당시의 엄격한 신분제도와 사회 분위기는 남녀가 불평등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새로 갖태어난 천주교회 신도들의 모임과 운영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러므로 당시 조선 백성들에게 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선포하고자 이벽 성조는 사도적 활동의 본거지를 옮길 결심을 하였다. 그 이유는 이벽 성조 주변에는 양반 남자들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中人 계급과 賤民 계급의 사회계층 사람들과 여자들도 적지 않았으므로, 경주이씨 양반의 집안이었던 수표동 이벽 성조의 집에는 양반이 아닌 중인들이나 상민들, 특히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출입하는 것도, 모임을 갖는 것도, 당시로서는 매우 어려웠다. 세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므로, 사회의 흉이 될뿐 아니라, 천주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트집거리였다.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양반과 천민, 남의 남자들과 남의 집 여자들이 같은 집에 함께 출입하며 모여서, 교리강의를 함께 듣거나, 함께 기도를 바치는 것 뿐 아니라, 한 방에서 자리를 같이한다는 것 자체가 큰 흉이며, 망칙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83. 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이벽 성조의 제자 중 하나였던 김범우 통역관이 명례방 장례원 부근에 있던 자신의 집 한 채를 교회가 사용하도록 내놓게 되었으니, 바로 지금의 명동 대성당 자리한 곳이다. 김범우 토마스는 한의사요, 통역관으로서 중인신분의 집안이었으며, 그의 조상 때부터 여러 세대를 통하여 집안에 외국어 학원을 운영하면서, 당시 대부분 통여관들의 관습대로, 한의원이나 약제상을 운영하고 있어서, 그의 집에는 모든 사람들이, 남자건 여자건, 양반이건 천민이건 드나드는 것이 자유로워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수표동에 있던 이벽 성조의 집보다는 많은 이들이 더 편리하고 자유롭게 모일 수가 있었고, 교리강습이나 기도회 같은 전례를 거행하는 집회소로 매우 적합하였다.
84. 더구나 명례방 앞에서부터 남대문에 이르는 거리와 골목은 주로 중국인 사신단의 수행원들이나 중국 상인들이 머무는 여관들과 음식점들과 각종 상품들을 팔고 사는 상가들이 최근까지도 많이 몰려 있어서, 북경에 출입하는 조선인들이나 중국인들과의 접촉이나 연락이 수월한 지역이었다. 그리하여 문도공 정약용 승지도 마재에서 상경하여 처음에는 회현동 산비탈 퇴계로 부근에 방을 얻어 머물다가 조정에 근무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명례방 입구에 집을 마련하여 1800년대까지 10여년가까이 머물렀던 이유는, 중국인들 편에 신간 중국 서적 구입 등이 편리하였기 때문이었다.
85. 이처럼 이벽 성조께서 명례방 장례원(掌隷院) 옆에 있는 토마스 김범우 통역관의 집으로 천주교회 집회소를 정한 것은 새로 입교하는 내국인 신자들의 편의와 당시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외국 천주교회, 즉 북경 천주교회와의 연락이나 접촉이 수월하여, 국내외적으로 매우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통역관 겸 한의사였던 토마스 김범우은 지금의 서울 명동과 소공동 지역에 8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선대부터 역관이었으므로, 통역관들의 경우, 중국어, 몽고어, 왜어, 만주어 같은 외국어 학원과, 한의원이나 한약 재료상을 겸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더욱이 당시 사회가 남녀 차별이나 양반 천민 계급으로 환자들을 진료하는 좀 이름난 의원들의 한의원에는 집 안에 여러 채의 집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양반집 여인들이 천민 집안의 남정네들과 같은 한방에서 진맥을 보며 침을 맞고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86. 그런데 유력한 가정의 젊은 선비들을 많이 제자로 삼아 존경을 받던 이가환, 이기양 같은 대학자들이 공개 토론회에서 광암 이벽 성조한테 굴복한 후, 구름같이 모여 오는 신입교우들로 인하여 명례방은 점점 천주교 신자들이 자주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이벽 성조의 설교와 가르침을 받으며, 모든이가 그를 위대한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는 곳이 되었다.
87. 한편, 한국 초대 신도들의 이러한 가톨릭 신앙 실천 선교활동은, 조선사회의 근대화, 사회계급 타파, 남녀 성차별의 철폐, 등, 사회개혁운동도 은연 중에 수반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이 당시 기득권을 쥐고 잘 살고 있던 양반들에게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볼 때 천주교라는 종교는 세상을 온통 뒤집어 놓는 사회혁명을 조장하는 것으로 매우 위험시하였고, 이런 우려가 사실 한국에서의 천주교회에 대한 최초 박해의 원인을 더욱 가중시켰다.(1785).
88. 그런데 당시의 초대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출발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진 것은 아니었고, 다만 문중과 가족들에 의한 박해로 시작하도록 유도되고 있었으니, 추조판서(秋曹判書) 김화진의 추조금리(秋曹禁吏)들이 도둑이나 도박꾼들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천주교신도들의 집회소였던 명례방 김범우의 집을 급습하여, 남녀가 한 집안에 모여 이상한 종교를 믿는 행위를 한다고, 참석자들을 잡고보니, 대부분 양반집 자제들이므로,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고, 집주인 김범우 통역관만 중인계급이므로 체포하여 감금하고 모진 매를 때렸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양반들은 대역죄가 아니고서는 벌을 줄 수가 없었는데, 교회의 지도자들은 대부분이 모두 양반들이었다.
89. 그런데 추조금리들이 보고하는 당시 급습 현장에 대한 이야기 중에는 흥미로운 현상도 들어 있다. 즉, 1785년, 乙巳年 봄에 명례방 장례원 앞에 있던 김범우의 집에 사람들이 출입하므로 들어가 보니, 이벽이라는 자가 얼굴에 힌 분을 바르고, 푸른 도포자락 같은 큰 수건을 머리에서부터 어깨를 덮으며 내려 쓰고는 아름목 쪽 벽을 등지고 앉아서 설법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앞에는 권철신, 권일신, 권상학, 부자들과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들이 모두 책을 하나씩 손에 들고는 이벽 앞에서 무뤂을 꿇고 모시고 둘러 앉았으며, 모두가 이벽을 스승님이라 부르고, 자신들을 그의 제자라고 자칭하였으며, 이벽이 그들을 엄히 꾸짖고 책망하는데, 너무나 엄격하여, 우리 유교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기강보다 훨씬 더 근엄하였다고 하였다.
90. 이승훈 진사가 북경 성당에서 영세하고 귀국한지 1년 후이고, 나이가 이벽 성조보다 권철신은 18세 위이고, 권일신도 이벽 성조보다 나이가 12세 위의 부모벌 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당시 이벽 성조의 위상을 쉽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얼굴에 분을 바르고 어깨에 푸른 수건을 썼다는 것은 아마 이승훈 진사가 북경에서 북당성당에서 처음 미사에 참석하면서, 녹색 제의를 입은 사제의 제복과, 서양 신부의 얼굴이 너무 힌색이므로, 미사를 올릴 때는 사제가 얼굴에 바르고 하는 줄 알고 전하는 이야기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91. 하여간 계획적이며 조직적이라고 짐작이 가는 추조판서의 禁吏들은 만만한 중인계급의 집주인 김범우 통역관만 붙들어다가 집중 매질을 하였다. 수표동에서 명례방으로 옮겨온 후, 양반과 상민들이 중인 계급의 김범우 집에 모여 함께한다고해도 당시 사회의 계급 타파 운동은 불가능다는 고정관념이 아주 확고한 관리들은 강경한 태도로 김범우를 다루었다. 즉, 중인 계급의 통역관 김범우 주제에, 양반집 나리들과 자제들을 집에 모이게 하여 함께 呪文을 외우면서 기도를 한다고하여, 中人도 양반이 되는 줄로 알지 말아야 한다는 뜻도 강하게 내비치는 매질이었다. 따라서 권철신, 권일신, 권상학,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과 이승훈, 이벽 같은 양반들에게는 매질을 할 수 없으니, 집주인 김범우 역관만이 양반들을 대신하여 매를 맞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천주교회 역사상 어떤 천주교 신도가 다른 신도들 대신 처음으로 혹심한 매를 맞은 첫 박해였다.
92. 김범우는 경상남도 밀양군 丹場面 丹場里(오늘의 삼랑진 부근)로 유배를 보내었고, 이벽 성조를 비롯한 권철신 대학자의 형제들과 자제들, 정약용과 그 형제들, 이승훈, 등 양반 신분의 신자들을 모두 禁吏들의 손에 이끌려 완력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여,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비록 왕의 어명으로 천주교를 금하기 전이라서, 정부 차원의 정책적인 박해로 보기 어렵다고도 하지만, 사실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1785년 乙巳年의 첫 박해부터 官權과 권력에 의해서 계획되고, 개입된 공식 박해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왕의 어명으로도 천주교를 금지할 수 있도록 여론을 일으키고, 상관들에게 보고하여, 빠르게 국무회의에도 알게 하려는 의도가 엿보이기도 하는 첫 박해였다. 이리하여 천주교에 대한 나쁜 선전이 양반 학자들과 선비들의 세계에 신속하게 전달되어, 여론화시키므로써, 서울 장안이 발칵 뒤집어지기라도 하는양 급진전하게 되었다.
93. 다만 양반들은 官에서 직접 손을 대지 않는 반면, 각 가정과 가문을 작극하고 동원하여 문중박해로 유도하였으니,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의 모든 문중에서 들고 일어나서, 각 문중에서는 자녀들이 천주교라는 오랑캐의 道를 못하도록 압력과 박해를 가하게 하였다. 그 모임에 참석한 저명 인사들 문중에서 모두 들고 일어나도록 하여, 권철신의 안동권씨 가문과, 정약용의 라주정씨 가문과 이승훈 진사의 평창이씨 가문에서는 문중의 원로들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94. 그러나 권철신과 권일신의 명망을 넘는 인사들이 고향 양근지역에는 그리 많지도 않아서, 앞에 나서서 천주교를 공격하려는 이들이 거의 없었으며, 정약용 집안에서도 그 아버지 정재원이 의금부 도사, 진주 목사, 화순군수, 등 비교적 큰 벼슬을 하고, 특히 막내 아들 정약용은 조정에서 상감마마를 직접 가깝게 모시는 사이므로, 라주정씨 집안 문중의 친지들 중에도, 앞에 나서서 공격하려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승훈 진사의 평창이씨 문중에서는 학자 층의 원로들 중 일부에서 다소간의 우려 섞인 공격이 있었으나, 아버지 이동욱이 계묘년(1783년)에 동지사로 북경에 갈 때, 아들 이승훈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갔었고, 서양 신부한테 영세까지 하고, 천주교 책들과 성물들을 매입하여 들여온 사실 때문에, 사실 이동욱은 상감한테까지 알려져서 문책이라도 당할까 걱정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우선 북경에서 사가지고 온 천주교 책들을 뺏어다가 안마당에서, 문중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버리며, 아들 이승훈을 야단치는데 그쳤다.
95. 그러나, 이벽 성조의 경주이씨 문중과 가정에서는 가장 극심한 탄압과 박해가 불가피하였으니, 그 이유는, 이벽 성조가 신흥종교 천주교의 중심 敎主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다 잘 알고 있고, 인정하고 있던 터이기 때문이었다. 왕조실록에서까지, “李檗은 邪學의 一世之也 共知也”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천주교를 믿고 전파하는 저자들은 모든 양반문중의 족보에서 이름을 삭제해야만 한다는 通文을 만들어, 천주교 반대 세력의 선비들이 장안의 4대문 안팎으로 돌리며 신속하고 맹렬하게 천주교 신도들을 공격하며 박해를 선동하기에 이르렀다.
96. 특히 이벽 성조의 경주이씨 문중과 집안에서는 정치적으로 반대 세력에 있던 선비들한테서 맹렬한 비난과 공격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초기 천주교 신앙인들뿐 아니라, 교회에 적대적이었던 사람들까지도 이벽 성조를 천주교회의 우두머리요 創始者로 모두가 이미 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뿐 아니라, 이벽 성조의 형제들인 李格, 李晳이 그리 낮지 않은 武官職에 있었기에, 승진 경쟁의 대상자들과 문중에서도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다른 문중이나 다른 가정들보다 박해의 정도가 아주 훨씬 더 심각할 정도로, 당시 사회의 선비들이 집중 공격을 하였다. 천주교를 반대하던 유교 양반 학자들이나 젊은 선비들은 천주교를 믿는 이벽 성조와 그 일당들을 족보에서 하루속히 이름을 삭제하여, 천민이 되게 하라고 야단이었다. 이런 경우, 집안의 家長은 탄압과 공격의 화살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었다. 연일 들어닥치는 선비들마다, 모임마다 이벽 성조와 천주교도들 타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가족들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이벽성조의 아버지 이부만은 차라리 아들 이벽에게 외출 금지를 명할 수 밖에 없었다.
97. 그런데 이벽 성조의 아버지 이부만은, 모든 양반집의 명문대가들과 마찬가지로, 체면과 위신을 아주 소중히 여기며, 성격이 좀 괄괄하고 다혈질적인 무관 기질이 있는 사람으로서, 천주교회에 대해서는 아예 거들떠보거나 관여하고 싶어하지를 않았고, 바로 그 아들의 마음에서 천주교 신앙을 근절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98. 아버지 이부만은 아들 이벽 성조가 천주교회 신앙을 버리도록 아무리 권고하고 달래도 모든 노력이 허사였다. 더욱이, 경주 이씨 문중의 어른들은 이부만이 그 아들의 천주교 신앙을 포기시키지 못한다면 이부만과 그 아들들의 이름을 경주 이씨의 족보에서 삭제할 것이니, 姓氏를 아주 바꾸고, 가문에서 나가라고, 위협하며 무서운 압력을 가혔다. 가정의 존폐가 달렸을 뿐 아니라, 경주이씨 가문 전체가 상감으로부터, 전국 유림들로부터 무시와 배척과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고 더욱 가중된 압력을 조직화시켜, 장안의 온 사회가 들끓었다.
99. 당시에 족보에서 이름이 없어진다는 것은 양반자격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고, 따라서 관직에 있던 아들은 벼슬을 빼앗기고 평민으로 내려와야 했으며, 새로이 벼슬길에 나아가지도 못한다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이미 관직에 있는 아들들도 탈관삭직(脫冠削職)을 면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는 아들 이벽 성조를 집에 감금하고, 종교적 활동 뿐 아니라 아예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든간에 밖에 나가는 것을 금하고, 문중에는 이벽 성조가 더 이상 천주교를 믿지 않는다고 문중회의에 거짓통보를 하였다.
100. 그러나 이벽 성조의 학식과 인품과 기질을 잘 알고 있던 유교의 학자들, 특히 공개토론회에서 패배한 대학자 이가환과 이기양의 일부 제자들 중에 젊은 선비들은 이벽이 천주교를 버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벽 성조는 신앙포기는 안될 말이라며 만민의 아버지 조물주 천주 공경을 만민이 모두 반드시 해야 할 본분임을 굳세게 그러나 공손하면서도 힘있게 반복하여 말할 뿐이었다.
101.아버지 이부만은 아들이 교회활동을 정녕 그만두지 않는다면, 집안이 망하게 되었으므로, 이를 보고 사느니보다는 차라리 자살하겠노라고 아들을 협박하며, 대청마루 들보에 바줄로 목을 매달기까지 하며, 극단적인 행동으로 자살시도를 하였다. 온통 집안은 난가였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도 허사로 돌아가자 이부만은 마침내 이벽 성조를 집안에 완전히 감금한 상태에서,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라고 선언하면서, 밥도 주지 말라고 명하며, 차라리 굶어서 죽기를 바랐으니, 당시 궁중에서나 양반가에서 있었던 餓死罰을 아들에게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벽은 신앙포기를 거부하며, 이른 바, 不撤晝夜로 食飮을 全閉하고 衣冠을 갈아입지 않았다. 사실 아버지가 목을 매달고 난릴를 치는데, 아들은 평소처럼 밥을 먹으며, 여의 때처럼 잠을 자며, 태연할 수는 없는 것이다.
102. 그래서, 餓死罰을 부모가 자녀에게 내리는 것은 마지막 방법이었다. 가정과 가문과 나라의 存亡이 좌우되는 막중한 부모의 명을 거역하는 다 큰 자식을 죽이기까지 해야만 하는 경우에 이르러, 그렇다고 부모가 자식을 차마 칼로 찔러 죽이거나, 또는 가축도살자들이 개를 잡을 때처럼, 자식의 목을 차마 바줄로 묶어서 매달아 죽일 수는 없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독살시켜 죽이거나, 또는 좀 부드럽게(?) 자식을 굶겨서 서서히 죽게 하는 餓死罰이 당시 왕궁에서나 양반 대가에서는 종종 있었던 일이다.
103. 이벽 성조 당시의 임금이던 正祖의 아버지 思悼世子(莊獻世子)도 1762년 그 아버지 英祖의 御命으로, 손자(후에 正祖)가 열 살 되던 해, 아들 세자를 아사벌을 내려 죽게 하였다. 세자 때문에 영조 임금은 몹시 진노하여 대궐 안마당에 나무로 궤짝(뒤주)을 만들어 사도세자를 집어넣고 나무 덮개에 한 자(30cm) 짜리 긴 쇠못을 사방 한 자 간격으로 위에서 아래로 박아, 궤짝 속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고, 부근 둘레를 병졸들이 지켜서 물 한 모금도 궤짝 틈으로 들여보내지 못하게 御命을 내려 10여일가까이 굶겨서 죽게 하였다. 그 후, 신유박해 때는 경기감사 이익운의 아들 이명현 역시, 천주교를 버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버지 이익운이 강제로 아들에게 飮毒시켜 죽였다.
104. 그런데 사회와 문중으로부터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무서운 압력을 받고 있던 이부만 공은, 아사벌로도 31살의 건장한 청년이었던 이벽 성조가 8, 9일이 지나도록, 숨을 거두지 않고 있어서, 모두가 지칠대로 지쳐 있어서, 더 이상의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모두 단념하기에 이르러, 당시 왕궁에서 있었던 사도세자의 경우처럼, 측근들의 강요와 억압에 따라, 기왕에 버린 자식이오, 가는 자식이므로, 아사벌을 내린 지 열흘 후 마침내 아들 이벽 성조가 속히 세상을 떠나게 하려고 강제로라도 음독시키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독을 마신 사람이 운명할 때는 대부분이 본능적으로 눈을 부릅뜬다든가 몸을 비틀며 용을 쓰기 때문에, 곁에 있는 사람들이 차마 보기 힘든 모습이므로, 이불이나 넓은 천으로 덮어서 보이지 않게 하여, 숨이 끊어져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조용히 되기를 기다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벽 성조의 한 맺힌 순교의 운명 순간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측근들은 두꺼운 이불을 여러 겹으로 이벽 성조의 몸을 겹겹이 멍석처럼 말아서, 머리 쪽과 발 부분을 막아서, 아예 숨을 쉬지 못하도록 하여 窒息死 당하였으니, 1785년 을사년 음력 6월 14일이었다(니벽전).
105. Daveluy 주교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 Daveluy 주교의 『조선순교사 비망기』
1786년(병오년) 봄에 이벽은 중국인들이 역병, 혹은 염병이나 열병이라고 하던 흑사병에 걸려서, 8, 9일을 앓은 뒤, 땀을 흘리기 시작하자, 돌보던 사람들이 여러 겹의 이불로, (마치 멍석으로 몸을 말아서 묶듯이 하여), 이벽의 몸을 감싸서 말아 덮고는, 땀도 흘리지 못하고 숨도 쉬지 못하도록 덮고 막아서, 이벽은 무거운 여러 겹의 이불 속에서 숨이 막혀 질식사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 때 나이는 33세였다,
(Au printemps de l'année 1786(Piengo) il fut pris de la peste courante (le Jo ping des Chinois) et après huit ou neuf jours quand la sueur commençait à sortir ceux qui le soignaient l'enveloppèrent de plusieurs couvertures, malgré tous les soins et efforts qui lui furent prodigués, il ne fit qu'étouffer sous ces lourds vêtements et la sueur ne pouvant percer et sortir, il en mourut à l'âge de 33 ans.)
106. 당시 경주이씨 문중의 목판본 족보와, 이벽성조 장례식에 참석한 정약용이 지은 輓詞 詩文에 모두 연도가 1785년 乙巳年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당시 조선에 역병, 즉 흑사병이 돌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런 전염병 사망자도 없었으므로, 60여년 후, 1850년대에 프랑스 선교사 Davluy 주교가 언급한 연도와 역병 기술은 잘못된 소문을 듣고, 기술된 것으로 보인다. 不撤晝夜, 食飮全廢, 및 衣冠을 갈아입지 않았다는 등의 소문이 와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107. 결국 Daveluy 주교는 이벽성조께서 와병 중 질식사하도록 숨을 막아 살해 되셨다는 사실은 알려주고 있는데, 아사(餓死)벌로 굶어 죽었다는 말이나, 독살(毒殺)되셨다는 말이나 땀을 못내게 질식(窒息)시켜 살해했다는 말이나, 모두가 일맥상통하는 비명으로 운명하였음을 의미하는 같은 내용이다.특히 열병에는 땀을 흘려야만 살아나게 마련이고, 이는 당시 조선인들의 상식이다. 그래서 미운 사람에게 저주와 악담을 할 때, ‘염병에 걸려서 땀을 못내고 죽을 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땀을 못내도록 이불로 겹겹이 몸을 말아서 땀을 흘리지 못하게 하고 숨도 쉬지 못하게 하여 질식시켰다는 것이 Daveluy 주교의 역사서 기록이다.
108. 죽음을 앞둔 이벽 성조가 벽에 특필대서하여 써붙이고 면벽 좌정하여 묵상하며 기도했다는 殞命詩는 천주교신앙의 확고하고 장렬한 표현이다.(巫峽中峯之勢死入重泉, 銀河列宿之年錦還天國 !)
영웅호걸들의 운명시는 각양각색이다. 정포은, 전봉준, 예수님이 운명 전 최후로 하신말씀, 등,,,
이벽성조의 순교는 당시 조선사회가 天學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중에 압력을 가하여 불가피하게 초래한 결과다. 결국 이벽 성조는 한민족 구원을 위한 신앙수호를 위해 10여일간굶긴 후 강제로 음독시키고, 여러 겹 이불로 몸을 말아 질식사를 당하여 집안에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제물이 되었다.
109. 당시 완전히 비그리스도교 국가였던 이 땅에서 주님께 바쳐진 한국교회의 첫 번째 제물을 위해서는 이렇게 연결된 三重의 사형 방법이 사용되었으니, 곧, 아사벌 후 강제 음독과 밀폐시켜 窒息死 시키는 처절하고 잔인한 수단이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벽 성조의 죽음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순교였다. 즉, 가톨릭교회를 반대하는 자들이 품고 있던 신앙에 대한 증오심(in odio fidei)으로 당한 순교였고, 두 번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한 효성으로 받아들인 순교였다. 신앙이 아니면 죽지 않을 수 있었고, 부모의 명을 거스르는 불효를 하지 않기 위해서 받아들이는 죽음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동시에, 그의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부모의 명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의 순교는 사회와 문중의 극단적 압력에 의한 것이었으나, 영웅적인 죽음이었고, 사실 그런 압력으로 인해 그는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5. 임시준성직자단 결성과 권일신 성현의 순교
110. 한편, 권일신 성현(1742-1792)은, 한국 가톨릭 교회의 창립에 함께 했고, 1784년 세례를 받을 때, 세례명도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라고 정했을 정도로 복음선포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또 많은 활동을 하였지만, 1785년의 박해 동안에는 많은 탄압을 받지는 않았다. 문중에서 그의 형 권철신 성현 (1736-1801)은 왕세자 문효세자의 스승으로 추대될 만큼 위대한 대 학자였고, 권일신 자신 또한 대학자로 저명했을 뿐 아니라 왕의 총애와 존경을 받고 있었다. 다른 세 명의 형제들 또한 문중에서는 중요한 인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당시 권씨 문중 사람들 중에 앞에 나서서, 이들을 공격하며 박해할만한 이들이 없었다. 그러나 권일신 성현은, 김범우가 체포되어 유배되는 것을 보고서는 자발적으로 관리들에게 나아가 자신 또한 김범우와 같은 종교를 신봉하는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밝히 말하였다. 사실, 그는 이벽 성조보다 8살이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벽 성조가 머리가 되어 처음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다닐 때, 제일 먼저 진심으로 그를 추종하였다.
111. 이벽 성조가 순교한 후, 권일신 성현은, 이승훈 성현, 권철신 성현, 정약종 성현 등 교회의 다른 창립자들과 함께 교회를 이끌어나갔다. 창립주역 이벽 성조를 잃고 가족, 친지, 이웃들의 박해로 고난을 받으면서도, 이들 교회창립선조들은 천주께 대한 신앙으로 좌절하지도, 또 희망을 잃지도 않았다. 크나큰 열정을 가지고 그들은 진리를 전파하는데 전념했고, 도처에 흩어진 신자들을 모으는데 몰두하였다.
112.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의 탁월하고 출중한 주요 활동 중의 하나는 <준성직자단>의 결성이었다. 이승훈 성현은 주교와 사제들로 구성된 교계제도를 북경에서 본 적이 있었다. 또 미사에 참례하였고, 성사를 거행하는 것도 보았었다. 그러므로, 교회창립주역이자 수장인 이벽 성조가 순교한 후에 한국교회에는 무엇보다도 그런 교계제도가 필요해 보였다. 사도적 계승과 교회직무제도에 대해 자세히 몰랐던 이들은, 나이로도 연장자이기는 했지만 무엇보다도 지혜와 덕이 뛰어났던 권일신 성현을 주교로 선임하였고, 이승훈 성현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권철신, 권일신, 등이 사제직무를 맡았다. 이들은 전국을 몇 지역으로 구분하여 맡아서 책임을 지고, 복음을 선포하고 세례와 고백성사, 성체성사를 거행하였다. <선한 의도> 에서 비롯된 그런 활동들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개종자들의 숫자는 전국에서 놀라우리만치 증가했고, 신자들의 활동은 더욱더 열성적이 되었다.
113. 그러나 처음부터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었던 가톨릭 교회 신앙과 전례에 대한 연구로 이들은,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준성직자단 체제에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일단 의심이 들자 이들은 약 2년 정도 지속했던 이 활동을 즉시 중단하였고, 권일신 성현과 이승훈 성현은 북경의 주교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들의 활동이 올바른 것이 묻기로 하였다. 사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신자들 앞에서 자신들의 인간적 권위를 내세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들에게는 오직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 그리고 하느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만이 있었기에, 교회직무를 모욕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수많은 어려움을 뚫고 이 편지를 북경주교에게 보내는데 성공한 이들은 주교의 답장을 받게 된다.
114. 여기서 잠시 당시에 조선인들이 북경에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쨌든, 이들은 주교의 명대로 즉시 <준성직자단>의 활동을 중지하고 대신 신자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일과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이후 교회의 성장이 좀 주춤하는 상황이 되어, 상당히 늦추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창립선조들은 북경 주교의 명에 대하여 즉시, 그리고 겸손하고 진실하게 순종하였다. 이들의 신앙이 얼마나 진실하고 참된 것이었는지, 이들이 <준성직자단>의 체계를 세웠던 그 의도가 얼마나 좋고 정당한 것이었는지를 반증한다.
115. 권일신 성현이 자신의 생명을 주님께 바치는 데에는 이벽 성조의 순교 이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1791년 조선에는 제사문제로 인해 국가적 차원에서의 박해가 일어났다. 제사는 1789년 북경주교가 보낸 편지에 의해 금지되었다. 복음선포에 대한 권일신 성현의 영향과 역할이 온 나라에 결정적이고 중요했기 때문에, 신앙을 증오하는 이들은 그를 교회의 우두머리, 교회의 지도자로 지목하고 고발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는 11월에 체포되었고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는데, 잔인한 고문이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천주께 대한 자신의 굳은 신앙을 변함없이 고백하였다. 그를 매우 존경하며 아끼던 왕은 그의 생명을 구하고자 했고, 그래서 관리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그의 마음을 돌려놓으라고 명했다. 고문, 탄압, 협박은 점점 더 잔혹해졌고, 이에 회유, 유혹까지 더해졌다. 권일신 성현의 마음을 바꾸려는 모든 수단과 방법들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래도 그를 사형에 처하고 싶지는 않았던 왕은 그를 제주도로 귀양을 명하였다.
116. 잔혹한 형벌과 고문, 수많은 태형으로 그의 몸은 유배지로 바로 떠날 수 없을 정도로 상해 있었으므로, 서울에 며칠간 머무르면서 몸을 추스려야 했다. 그 동안, 왕은 권일신을 잃고 싶지 않았으므로, 몇몇 관리들을 보내어 그를 설득하게 하였지만 이번에도 허사였다. 권일신 성현은 반복해서 그 신앙을 고백할 뿐이었다: 즉, 천주교 신앙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과는 다르다는 것이지, 나쁘고, 틀린 것이 아니라는 선언이었다(其學大抵異於孔孟之學妖誕不正 / 西洋之學異(於?)孔孟之學妖誕不正).
117. 권일신 성현은 1791년 음력 11월 3일에 체포되어, 한달동안 모진 고문을 당한 후, 12월 3일에 제주도로 유배령이 확정되었으나, 여늬 유배자들처럼, 유배령과 함께 즉시 유배 길을 떠나지 않고, 年老한 老母의 임종을 볼 수 있도록, 가까운 충남 예산으로 유배지가 바뀌었으며, 고문으로 받은 혹심한 상처를 먼저 치료하고 떠나도록 정조 임금의 배려로, 10일간을 서울 매제 이윤하의 집에서 치료한 후 그는 유배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귀양길 첫날밤에 머문 용인(지금의 신갈 구성면 소재지 駒邑) 관아의 첫 주막에서 머물 때 뒤따라온 자객들에 의하여 타살당하여 1791년 음력 12월 15일(?) 경에 순교하였다. 사실 開國功臣의 후예로서 역대 임금들이 보살피던 대학자였으므로, 권일신 학자는 왕이 다시 그를 언젠가는 불러드릴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시기심과 증오심에 불타던 그의 반대자들이 보낸 자객이 그를 몽둥이로 때려 죽였던 것이다. 1807년 정묘년에 편찬된 안동권씨 목판본 족보에는 권일신 성현이 천주교신앙 때문에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權日身以邪學杖斃”. 이러한 전승은 권오규 변호사(1900-1996)와 그의 동생 권오진 회장역시 집안에 내려오는 말을 증언하고 있다.
6.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의 순교.
118. 권일신 성현의 형 권철신 성현 (1736-1801)은, 남아 있던 교회창립선조들, 즉 이승훈 성현, 정약종 성현과 함께 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창립선조들 가운데 그는 가장 연장자로서, 이벽 성조보다도 나이가 18세나 많았다. 그는 유학에 있어서 대학자였고 그의 명성은 온 나라에 자자했다. 젊은 학도들이 전국에서 그의 가르침을 듣고자 몰려들었다. 사실 바로 이 때문에 광암 이벽 성조가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려고 했을 때, “그가 이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의 명망으로 천주교를 믿기 위하여 그를 따르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하며 권철신 성현을 선택했던 것이다.
119. 이벽 성조의 판단은 옳았다. 전국에서 모여든 그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신자가 되었고 이들이 전국 각 지역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으며 천주교는 전국에 퍼져나갔다. 권철신 성현의 활동이 그의 동생의 활동에 비해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지만, 교회 안에서의 그의 존재 자체가, 그리고 그의 참되고 진실한 삶 자체가 신자들 가운데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심리적 무게중심이 되었으며, 의지가 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복음이 전파되는 데 큰 힘이 되었고, 중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한국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졌다.
120. 따라서 바로 이 때문에 1801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반대자들이 그를 교회의 우두머리로 왕에게 고발했던 것이다. 그를 존경하며 아끼던 왕이 승하한 후, 정치적 권력이 가톨릭을 증오하는 이들의 손에 넘어갔고, 마침내 그 또한 체포되었다. 그는 용감하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이미 65세의 노구는 고문을 견디기에는 너무 쇠약했다. 그의 몸에 가해진 잔혹한 매질은 체포된 지 겨우 두 주일이 지나서 그의 생명을 앗아갔다. 즉 권철신 성현은 1801년 신유년 봄 체포되어 감옥에서 잔혹한 매를 맺고 신앙 때문에 순교하였다. 1807년 발행된 안동권씨의 목판본 족보에는 그의 순교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권철신은 천주교 때문에 신유년에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즉, 권철신은 1801년 음력 2월 11일(양력 3월 24일) 체포되어, 같은 음력 2월 25일 (4월 4일) 심한 고문 후에 감옥에서 打殺당하여 순교하였다.<權哲身辛酉以邪學杖斃>,
한국교회의 창립에 관여했던 다른 인물들, 즉 이승훈 성현과 정약종 성현도 같은 해, 즉 1801년 봄에 순교하였다. 이승훈 성현의 신앙에 대한 탄압은, 이미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 즉 이벽 성조가 순교하게 되는 첫 박해 때부터 시작되었다. 문중의 박해는, 비록 이벽 성조의 집안에서만큼 참혹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집안에서도 극심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가지고 있던 천주교에 대한 모든 책을 압수해 가족과 집안의 친척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랐다. 그에게는 그토록 소중했던 책들이 눈앞에서 불길에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의 고통을 다음의 시로 표현하였다:
“天上의 변함없는 法道와 地上의 인간 사회 윤리와 紀律은 서양과 동양에서 한계가 있어 서로가 다르도다. 일몰 후 하늘과 땅 사이의 어두운 구렁에 찬란한 무지개 교량(橋梁)은 이를 마셔버리는 안개 속에 묻혀 가리워지도다. 오직 한 마음으로 바치던 정성 (香)은 책들이 불에 탈 때, 어찌 함께 아니 타고 마음 편하였으랴. 이제는 하는 수 없이 저 멀리 조묘(潮廟)나 바라보며, 내 처지와 흡사하게 살다간 문공 한유(文公 韓愈)를 추모(追慕) 하며 후배(後輩) 답게 제사를 올리노라. 자신의 굳건하고 항구한 신앙을 그 힘겨운 상황에서 표현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중국의 현자인 潮洲의 문공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天彛地紀限西東 暮壑虹橋唵靄中 一炷心香書共火 遙瞻潮廟祭文公>
이 어려운 온갖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벽 성조의 순교 후에 그는 처갓집 丁氏 집안의 형제들, 곧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과 함께 계속해서 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특히 그는 정약용과 더불어, 준성직자단 결성을 추진하고, 조직하여, 권일신 성현을 주교로, 그리고 그 자신과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 정약용, 최창현 등을 선임하였다. 이 제도가 중단된 후에는 북경주교가 허락했던 활동들만을 계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에 사제들을 보내주기를 수 차례에 걸쳐 북경주교에게 탄원하였다. 사실, 교회 창립자들의 활동으로 인해서, 이 땅에 처음으로 선교사, 즉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들어왔을 때에 조선에는 이미 사제없이 조선 평신도들끼리 세례를 준 영세자가 4000 여명이나 되는 천주교회로 성장하여 있었다(1795).
다른 한편, 이 외국인 사제가 조선에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조선에서는 다시 박해가 일어났(1795)고, 최인길 마지아 역관을 비롯한 몇몇 신자들의 희생으로 주문모 신부는 박해를 피해 다음 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1801) 몇 년 간 사목활동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이승훈 성현은 1795년에도 끌려 다니며 심한 박해를 당하였고, 유배형까지 받았다. 그러나 1801년에는 다시 체포되어 혹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의 신앙이 항구하고 굳건한 것을 보고 박해자들은 조서를 조작하여 이승훈 성현이 배교를 했다는 거짓 소문이 돌게 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이렇게 했던 것은, 학자들과 신자들 사이에 그의 명성과 위치가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이들이 그의 학문적 지혜와 높은 덕을 칭송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박해자들이 보았을 때는, 만약 이승훈 성현이 배교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조선의 다른 선비들과 일반 신자들도 더 이상 그리스도교를 신뢰하지도 더 열정을 가지고 믿고 따르지도 않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승훈은 1801년 음력 2월 11일(양력 3월 24일)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후, 같은 해 음력 2월 26일(양력 4월 8일) 서소문에서, 정약종, 최창현, 주문모, 등과 함께 斬首당하여 순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대한 이승훈 성현의 굳건한 신앙과 영웅적인 용기는 온갖 고문 앞에서도 더욱 더 드러날 뿐이었다. 칼에 목이 떨어지기 전 그가 남긴 시 한편은 이러한 그의 신앙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사형장에 도착한 그의 형제 이 치훈은, 이승훈 성현에게, 왕에게 목숨을 살려달라는 한 마디만 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이승훈 성현은 그를 꾸짖으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달려 있고 물이 솟아올라 위로 역류하면 연못이 다하여 마르느니라(月落在天水上池盡). 다시 말해, 그의 목은 박해자들의 칼 날에 땅에 떨어질 지라도, 천주께 대한 그의 신앙 (달)은 항상 하늘에 달려 있을 것이며, 박해자들의 현세적 권력(물) 이 넘어설 수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물이 위로 역류하면 연못의 물은 마르고 연못은 없어질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굳은 신앙을 고백하면서 이승훈 성현은 1801년 봄 서소문에서 칼에 목이 떨어졌고, 이 땅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장 고귀하게 증거하였다.
같은 날, 정약종 (1760-1801) 도 칼날아래 자신의 생명을 천주께 바쳤다. 그는, 정약전과 정약용의 형제로서, 명석하고 학구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부터 과거를 봐서 관직에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대신 여러 분야의 학문들, 처음에는 유학, 도교, 그리고 특히 이벽 성조의 영향하에 천주교를 연구하는데 전념하였다. 특히 이벽 성조의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했던 것은 그로 하여금 천주교를 실천하는데까지 이르게 하였다. 이승훈 성현이 북경으로부터 돌아온 이후, 그 또한 아우구스티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가톨릭 신자로서의 삶을 사는데 더욱 더 전념하였다.
1785년에 문중 차원에서 일어났던 첫 번째 박해 동안, 그는 그의 아버지가 문중에서 매우 권위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많은 탄압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1791년에 일어난 두 번 째 박해에,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를 심하게 비판하였고 그 아들이 천주교를 신봉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약종 성현은 이 모든 탄압을, 부모에 대한 효심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 실천하면서, 영웅적 인내로 견뎌냈다.
천주교에 대한 책들을 더 깊이 연구하면서 그는 어떠한 교리든지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특히 신자들의 교육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신자들을 만날 때마다, 열심히 교리를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런 열정으로 인해 그는 한국어로 된 교리책을 저술하여 편찬하는데, 그 이름을 <主敎要旨> 라고 하였다. 집필하던 또 다른 책, <聖敎全書>는 그의 순교로 말미암아 끝을 보지 못했다. 당시 한글이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상민의 글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양반이었던 그가, 그것도 유학의 대가였던 그가 한글로 된 교리서를 썼다는 것은 그 자신이,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사상과 사랑을 그 중심으로 삼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편, 이미 1799년, 한 관리가 그를 가톨릭 신자들의 우두머리로 지목하면서 왕에게 고발한 적이 있었다. 사실 그는 신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주문모 신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중국인 신부는 교리에 대한 그의 깊은 지식과 신자들에 대한 열정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그를 가톨릭교리 연구모임이었던 <명도회>의 회장으로 임명하였었다. 그러므로 의심할 나위 없이 그는, 신자들에게 뿐 아니라 천주교를 증오하는 이들에게조차 한국교회의 대표자 중 하나로 여겨졌던 것이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마침내 그는 체포되었고, 박해자들은 그의 모든 저술들 속에서 다음의 교리 문장을 찾아냈다: <가톨릭 신자들은 생명을 얻기 위해 세상과 마귀와 육신에 반대해야 한다>. 여기서 세상이라는 단어를 통치자라고 해석하면서 박해자들은 그를 대역죄로 고발하였고 그는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단두대 앞에서 그는 형 집행자들에게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돌아올 것을 권유하는 동시에 사형을 집행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 사형집행자들이 땅을 보도록 자신의 머리를 눕히려 하자 이를 거부하고 반대로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 눈을 뜨고 하늘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에 놀란 사형 집행자들이 그의 머리를 내리치는데 실수를 하여 머리가 반밖에 잘라지지 않자, 그는 십자표를 그으며 두 번째 칼날을 받기 위해 몸을 처음의 위치대로 움직였다. 이렇게 그는 주님과 교회에 신앙의 최대의 증언인 순교를 바쳤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 다섯 분의 교회창립자들의 순교 후에 (1785-1801), 한국가톨릭 교회는 1886년까지 계속되는 박해 아래 살아갔다. 이 길고 어두운 시기 동안 한국교회는 의기소침하고 축소되는 대신,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계속하여 성장하였다. 예를 들어 1831년에는 조선교구가 설정되었고 1836년에는 조선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방인 사제 양성을 위하여, 정하상이 뽑은 소년들 3명이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 피에르 모방 신부의 추천을 받아 마카오로 보내게 되었다. 세 명의 신학생 후보자들은 김대건, 최양업, 최과출이었다. 이들 중 두 명은 열 다섯 살, 한 명은 열 네 살이었으며 둘은 사제가 되었으니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이며 한 살 어렸던 최과출 프란치스꼬는 서울에서 마카오까지 6개월간이나 걸어서 갔던 여행에서 얻은 병으로 마카오에 도착한지 7개월 만에 숨을 거두었다.
조선에서는 박해가 중단 될 때까지 수 만 명의 신자들이 순교했다. 이 피로 물든, 그러나 영웅적이며 영광스러운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에서, 한국 신자들의 활동은 교회의 삶에 있어서 동맥과 같은 것이었다. 이들은 성령에 의해 인도되어 자신들의 땀과 피로 한국 교회를 발전시키고 성장시켰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간결하게 추려서 본 바와 같이, 이 기적적인 삶과 활동과 순교의 한국천주교회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원천에 한국천주교회의 다섯 분의 창립자들이 있으며 그 중심에 광암 이벽 성조가 계시다. 광암 이벽 성조로부터 권철신 성현, 권일신 성현, 이승훈 성현, 정약종 성현이 천주교를 배우고 신앙을 받았다. 이벽 성조는 서울에서 복음전파의 활동을 하면서 온 나라에 복음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권씨 집안 사람들, 곧, 권철신 성현과 권일신 성현을 선택했다. 권씨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처음에는 권철신 성현과 권일신 성현으로부터 유학을 배우고자 전국에서 몰려들었던 학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이들이 호남과 충남지역에서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으며, 이들 또한 마침내는 천주께 대한 신앙을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바쳤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그리고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는 이존창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존창은 권철신 성현과 권일신 성현의 제자였다. 윤유일은, <준성직자단>의 적법성을 문의하기 위해 북경교구장에게 보내는 편지를 비롯해서, 선교사를 요청하는 편지들을 북경에까지 가지고 갔던 인물인데, 그 또한 권일신 성현의 제자였다.
이렇게 창립선조들의 영적인 자녀들 외에도, 창립자들의 후손들 또한 그 선조들의 신앙과 피의 증언의 모범을 따랐다. 예를 들어 권철신 성현의 아들 권상문은 - 원래 권일신 성형의 아들인데 권철신 성현에게 입양되었다-, 1801년에 순교하였고 그의 손자인 권복과 권석도 그 할아버지의 길을 따랐다. 권복은 참수되었고 권석은 감옥에서 순교한다. 권일신 성현의 아들은 신앙 때문에 유배되었으며 그의 딸 권데레사도 신앙으로 인해 참수되어 1984년에 시성되었다.
정약종 이승훈은 1801년 음력 2월 11일(양력 3월 24일)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후, 같은 해 음력 2월 26일(양력 4월 8일 ?) 서소문에서,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주문모, 등과 함께 斬首당하여 순교하였다.
한편, 정약종 성현은, 신학생이자 목자가 없던 조선천주교회를 이끌었으며 조선교구설정의 주역인 정하상 성인의 아버지다. 정하상은 조선교구설정을 요청하기 위해, 목숨이 위협받는 북경 삼천리 길을 그의 친구와 교대로 22차례에 걸쳐 다녀왔다. 사실, 정약종 성현이 신앙으로 인해 참수되었을 때, 정약종 성현의 맏아들 정 철상이 함께 순교하였으며 (1801), 그로부터 38년 후 1839년 바로 같은 자리에서 그의 아내와 딸 그리고 둘째 아들인 정하상이 순교했던 것이다. 정약종 성현을 제외한 이들 모두는 1984년에 시성되었다.
이승훈 성현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그의 아들들도 순교하거나 유배되었다(1866). 그의 손자 이재의 토마스는 정하상처럼 국내 신학생이었고, 부제품을 받았으며 앵베르주교와 그후임자 페레올 주교의 비서 겸 복사를 하였고, 정하상, 김대건신부, 등 1839년 기해년 박해와 1846년 병오년 박해의 순교자 79위 시복 준비를 위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였다. 피의 증언은 4세대 그리고 5세대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천주교회의 다섯 분의 창립자들은 가톨릭 신앙과 가르침만이 아니라, 신앙의 최대의 증언인 순교정신까지도 그 후손들에게 전해주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100년간 지속된 박해 동안, 적어도 3만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며, 이들 가운데 오직 103명만이, 그것도 창립선조들의 3대, 4대, 5대 후손들만이 교회 안에서 성인의 반열에 드는 영광을 입었다.
불행히도 한국교회는, 200여 년 동안 순교의 피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면서 이 선구자들의 무덤의 자취를 잃어버렸고 최근에 (1979년) 이르러서야 기적적으로 공동묘지에서 그 무덤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이분들이 쓰셨던 편지들과 책들도 몇몇 군데에서 발견되었다. 200여 년 전 이분들이 영원한 진리를 연구하기 모였던 곳, 하느님을 찬미하였던 천진암에 이분들의 묘를 이장하였고, 특히 다섯 분들 가운데 권일신 성현의 유해는 손상되지 않은 채 보존되어 있다. 이제, 수많은 신자들, 미신자들, 한국인들뿐 아니라 외국인들이 이 한국인 평신도 교회 창립자들을 공경하기 위해 이분들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의 신앙, 활동, 순교, 삶에 자극을 받고 용기를 받는 것이다.
사실 한국의 가톨릭 신자 수는 1979년 백만 명에서 현재 5백 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학문적 영역에서는 다섯 분의 한국교회창립자들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파리, 프라이부르그, 타이완 등지에서 6편의 박사학위논문이 나왔다. 전국에서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이분들의 정신, 자발적인 가톨릭 신앙실천 정신을 배우고자 오고 있다. 사실 이분들의 열정, 자발적인 신앙실천운동, 그리고 순교로 마감한 이분들의 삶은 비단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뿐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진리를 찾는 모든 이들의 모범임에 틀림없다. 바로 이 때문에 한국천주교회창립 5위 선조들은 보편교회 안에서 성인으로서 영광을 받으셔야 하며, 미신자들이 진리에로, 즉 그리스도에게도 돌아오게 하는 데에 모델로써 제시되어야 한다.
J. H. Lonford, The Story of Korea, London 1911, 245.
정약용, <녹암묘지명>, 1822. 여유당전서 1권 324 에 수록.
정학술, 니벽전, 1837년 필사본. 영인본은,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소, 한국천주교회창립사자료집 3권, 1996, 20.
정약용에 따르면 강학회는 1779년에 열렸다. 정약용, <녹암묘지명> (1822), 여유당전서 1권, 경인문화사 1969, 324면 참조. 반면 다블뤼주교는 1777년이라고 쓰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이승훈, 북경주교에게 보낸 서한 (1787). 이 편지는 Andreas Choi, L’érerction du premier vicariat apostolique et les sorgines du catholicisme en Corée, Paris 1961, p. 94 에 게재되었다.
정약용, <녹암묘지명> (1822), 여유당전서1권, 경인문화사 1969, 324면 참조.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vol.IV,manuscrit copies,p.6
김대건, Generalis notitia super nascentem Ecclesiam Coreanam, 1845 ;파리외방전교회신학교 장상 (a Langlois Superiore del Seminario della M.E.p.)에게 모방신부가 양지에서 1838년 12월 3일에 보낸 편지 편지. 이 편지는 Archivium di M.E.P., v. 577, f519 에 있다; 황사영 백서, 1801.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vol.IV,manuscrit copies,p.10.
파리외방전교회신학교 장상 (a Langlois Superiore del Seminario della M.E.p.)에게 모방신부가 양지에서 1838년 12월 3일에 보낸 편지 편지. 이 편지는 Archivium di M.E.P., v. 577, f519 에 있다.
조선왕조실록 47권, 1801, P. p. 374. 375. 410; 이만채, 벽위편, 1801년 천주교신자들에 대한 판결문, P. 1.
당시 조선에서 자녀들이 집안이 망하게 될 위험에 처하게 할 때 그 자녀들에 대한 이런 벌은 전혀 낯선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그러했고 경기감사 이익운의 양아들이 양아버지, 경기감사에 의하여 공개적으로 독살되기도 하였다.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t copies, p.24.독살설은 이벽성조의 묘를 1779년 천진암으로 이장할 때, 전문의사 권흥식박사가 그 치아가 검게 타 있던 것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던 것으로, 중에, 문중에서 장차 멸문시킬 斯文亂賊이므로 음독시겼다는 후손들의 전승을 재확인한 것이다. 당시의 사진과 의학적 소견서자료는 유해와 함께 천진암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정약용, <녹암묘지명> (1822), 여유당전서1권, 경인문화사 1969, 324면 참조.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t copies, p. 42-51.
안동권씨 족보, 1807년 목판본, 12면.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t copies, p. 42-51.
안동권씨 족보, 1807년 목판본, 12면.
이 시는, 추안급국안, 25, 선조원년, 아시아문화사 1978, 20면에서 실려있다. 이 시에 대한 해석은, 변기영, 한민족 조선천주교회 창립사,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 2004, n. 36 <제살과 뼈를 태워 빛이 되어 남을 비추고 천주께 제물이 되는 한 토막의 초와 같이> 를 참조. 이 시에서 조주의 문 공이란 당나라의 한우를 가리키는 말로써 그의 사상에 대한 오해로 고통을 받다가 부당하게 죽은 인물이다.
邪學懲義, 1805. 보람문화사 1977, p. 171을 참조.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자료 전승에 관하여.
그 동안 우리나라 천주교회 창립에 관한 역사는 일찌기 북경의 Alexandel Gouvea 주교가 1797년에, ‘조선의 일곱 순교자들에 관한 이야기’ 라는 제목의 보고서 형식으로, 당시 중국의 교황청 관리자로 겸직하던 泗川省 교구장 Martin Caradra 주교에게 간결하게 기술하여 쓴 것이 처음인데, 이것은 조선을 한번도 방문하여 보지 못한 폴투갈 선교사 주교가 북경 주교로 근무하면서 조선에서 북경에 왔다가는 신자들한테 들은 이야기를 일부 적은 것이라서,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에 관하여, 이벽 성조를 비롯 권철신 권일신 등 창립성조들과 천진암 강학회 등에 관하여는 전혀 기록되지 않고, 북경에 파견되어 영세하고 귀국한 이승훈 진사에 관하여만 언급하고 있다.
그나마, Li라는 사신단의 왕족이 수학공부에 관심이 있어서 북경에 왔다가 수학을 배우고자 선교사들을 찾아와서 세례까지 받고 가서 조선에 전도했다고 적고 있는데, 폴투갈의 Coimbra대학에서 수학박사 학위를 받고 북경 선교사 주교로 온 자신의 수학실력이 조선을 비롯한 극동 중국 선교에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은근히 들어내기 위한 인상을 받는다. 그 이유는 이승훈 진사는 북경에 가기 전이나 갔다온 후나, 수학 공부에 관심이 있었다는 흔적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승훈 진사가 프랑스인 예수회원 Joseph de Grammont 신부한테 세례받은 것도 밝히지 않고, 오히려 그라몽신부는 마카오로 추방하여, 죽을 때까지 북경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여, 마카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구베아 주교의 보고서 편지는 당시 한국 천주교회에 관하여 유롭 언어로 쓰여진 유일한 첫 이야기였으므로, 라틴어, 폴투갈어, 이태리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으로 번역되어, 30여년간 한국으로 오는 유롭 선교사들의 필독서가 되어 있었다.
그 후 1845년에 입국한 프랑스 외방전교회의 Daveluy 주교가 1850년대에 ‘조선 순교자 비망록’이라는 제목으로 기술한 자료를, 조선에 한번도 와본 적이 없는 프랑스인 Dallet 신부가 편집한 것이 1872년에 프랑스어로 발행되어, 한국천주교회의 빛나는 창립사를 유롭 교회에 그래도 제대로 대강 알린 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1785년부터 혹심한 박해를 7 차례나 겪은 뒤에, 더구나 박해 중에 계속 숨어다니면서 호롱불 아래서 다불뤼 주교가 기록한 것이어서, 자료 수집은 물론 집필의 여건이 어렵던 시절, 그나마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의 기록문헌, 朝鮮聖敎史記(?)를 가지고 번역하며 기술한 것인데다가, 다불뤼 주교 자신이 아직 한국의 문화와 관습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질 수 없던 때라서, 사실 파악을 제대로 할 수가 없을 때였다. 그래도, Daveluy 주교의 덕택으로 우리나라 교회 창립사를 이만큼이라도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었으니, 우리 모두가 무한히 감사해야 할 것이다. 끝
* 冊名만 듣고, 아직 직접 보지 못한 자료들
이벽 성조의
李檗日誌 4권 (1770-1784 기록)
天主密驗記 (1785) 天堂地獄記, 令得敬神記, 險世聞得記, 來世豫言記,
崇禮義 (1779 전 후 기록)
권철신 성현의
虞祭義,(1779 전 후)
* 천진암 강학을 전후 이벽 성조와 논쟁 내용.
정약용 승지의
天眞菴 講學誌 (830년 이후에 마재(馬峴) 자택에서 집필)
朝鮮 聖敎史記 (1836년 운명 전 기술)
정약전의
天眞菴 講學誌 (1816년 이전 牛耳島에서 집필)
이승훈 진사의
燕京 西洋 傳敎者 相面記(1783년 북경에 다녀온 후 1785년 이전 기록)
* 김양선 목사 부인 소장. 끝
Writer : 변기영 몬시뇰 Date : 2013-10-30 15:02 /
이벽 성조의 慶州李氏世譜 편찬년도
初刊譜, 甲子譜 1684
二刊譜 戊辰譜 1748, 갑자보 후 64년만에.
-1754년 갑술년 이벽 성조 탄생, 1785년 을사년 늦봄에 순교 ---
三刊譜
甲戌譜 1814 ---- 이벽성조 순교 29년 후, 1748 戊辰譜 후 66년만에.
戊申譜 1848 ----이벽성조 순교 후 63년, 갑술보 후 34년만에,
四刊譜
癸酉譜 1873 19권 --- 이벽성조 사후 88년 후, 1814 갑술보 후 59년만에.
甲戌年 1934 54권 --- 그 중 국당공파 계보는 17권>-이벽성조 사후 149년 후에,
1873 계유보 후 61년만에.
이경상 癸卯생 1603년 정해년 1647년 졸 44세 묘 신혈리, 소현 세자 서장관, 묘 신혈리.
준만-무-현영-종주-건용.
李鐽 1703 癸未생-1773 癸巳졸 71세 戊申년 1728 무과 호남병마절도사부총관
李溥萬 1727 丁未생-1817 丁丑졸 91세 추증 이조판서 묘 화현리
李浩萬 1730-庚戌생-1753 癸酉졸 84세
李顯稷 1795 乙卯생 1876년 丙子졸 82세, 한성판윤, 병조판서, 어영대장, 등.
李格 天老 1748 戊辰생-1812 壬申졸 65세 己丑 1769 무과 황해병마절도사부총관 묘화현리
李檗 德祖 1754 甲戌생-1785 乙巳졸 32세, 묘 화현리
李懋 德叟 1758 戊寅생-1793 癸丑졸 36세, 묘 화현리
李晳 大叟 1759 己卯생-1829 己丑졸 71세,庚子년 1780 무과,제남병사,묘 화현리
李懋 德叟 1758 戊寅생-1793 癸丑졸 36세, 癸卯 방어사, 추증병조참판,묘화현리
顯英 景實 1777 丁酉생-1849 己酉졸,72세,금별부총관,병사,묘,화현리(現봉수리경계)
顯謨 景文 1784 甲辰생-1847 丁未졸,64세, 通德郞1848년 戊申보에(이벽顯謨)묘샘밭
顯夔 景一 1790 庚戌생-1838 戊戌졸 49세, 장단부사/ 이석의 (계자) 묘 화현리
秉榮(秉周) 1814 甲戌생-1838 戊戌졸 24세, 현능참봉, 묘 춘천 샘밭
국당공파 경주이씨세보(1848년) 戊申譜 5권에만 繼配가 49명이나 나오지만, 해주정씨는 수록되지 않았다. 특히, 이벽성조의 손자 秉周의 파평윤씨와의 결혼은 수록하였으나, 이벽 성조는 안동권씨 혼인만 나온다. <상세한 설명은 추후에 올림>
주요 자료 표시:<사용법 추후 해설>
➀➁➂➃➄➅➆➇➈➉➊➋➌➍➎➏❼❽❾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