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
모두가 79세, 80세, 81세들이다. - 2018.10.12
1953년 3월, 7월말 휴전을 앞두고 남북 전투가 극에 달하던 해 봄에,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이, 한번도 동창회에 못나간 변기영 몬시뇰을 그래도 동창생이라고 쳐주고, 여겨주고 찾아왔다. 정말 반갑고, 고맙고, 즐겁고, 놀랍고, 정겹고, 가슴이 뭉클하는 순간들이다!
그런데, 그 옛날 어린 시절처럼, 아직도 이렇듯 순수하고, 소박하고,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모습들과 자태들이 아직도 정겹게 느껴지는 벗들이다. 남사국민학교 출신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시골 사람들이다. 지금처럼 살벌하고 험악한 시대에, 그래도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들 있었구나 ! 8도 출신의 약삭빠른 잘 난 사람들이 이른 바 서울로 몰려들어서, 종종 깎쟁이들과 날건달들이 북적거린다는 서울 생활 반세기가 넘도록 피해망상증에 짓눌려 하루하루를 살아가다가,,, 참으로 오래간만에 소박하고 순수한 어린이같은 한국 노인들을 만나 보니,,, 혹시 누가 이런 순수한 사람들을 보고 싶거든 1950년대를 전후한 용인군 남사면 남사국민학교 출신들을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이가 어렸던 권혁문이는 작년에 77세로 대학원을 수료하고, 논문을 제출하고, 정정당당히 심사를 통과, 석사학위를 받았단다!!! 일부 정치인들과 학자연하는 사람들까지 학력위조가 종종 보도되는 이 시국에 우리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출신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정말 보기 드문 일이다.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 1953년,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이
기차로 도착한다는 용문역까지, 변기영 몬시뇰이 마중을 나갔다. 이런 일 생전 처음이다.(2018.10.12)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 1953년,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이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 1953년,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이
기차로 도착한다는 용문역까지, 변기영 몬시뇰이 마중을 나갔다. 이런 일 생전 처음이다.(2018.10.12)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 "창렬이 아녀? 자네가 양만옥이라고 ?, 그 때는
키가 아주 컸었지, 항상 부반장을 했었지?, 1953년,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이다.(2018.10.12)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1953년,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2018.10.12) 용문역에 마중나간 변기영 몬시뇰 ! 생전 처음 이런 마중하는데!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 1953년,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이
기차로 도착한다는 용문역까지, 변기영 몬시뇰이 마중을 나갔다. 이런 일 생전 처음이다.(2018.10.12)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 1953년,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이
기차로 도착한다는 용문역까지, 변기영 몬시뇰이 마중을 나갔다. 이런 일 생전 처음이다.(2018.10.12)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 1953년,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이
기차로 도착한다는 용문역까지, 변기영 몬시뇰이 마중을 나갔다. 이런 일 생전 처음이다.(2018.10.12)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 1953년,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이
기차로 도착한다는 용문역까지, 변기영 몬시뇰이 마중을 나갔다. 이런 일 생전 처음이다.(2018.10.12)
1953년, 3월, 국민학교 졸업 후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이 참으로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보내고 이제서야 그래도 이렇게 만나게 되네 그려!(2018.10.12). 모두들 아직 살아 있었네 그려 ! "자네가 돈웅이지?,,, 학생 때는 꼬마였었는데, 그 동안 키가 많이 컸네 그려! 만옥이는 학생 때 아주 키가 크고 부반장을 많이 했었지! 건설업으로 사업해서 돈도 많이 벌었었다고 들었는데, 용인군의 순진한 남사면 시골 사람들을 속여 먹지 않으면 누구를 속이랴? 사기를 크게 당했다니 ! 그래도, 으젓하네! 우리가 10여세의 어린 입으로 거의 매일 자주 부르던 교가의 후렴 정신을 따라 살고 있네 그려!! 뒤에서 원자폭탄이 터져도 뛰지 않기로 하세. 태산의 무게를 가지고, 고개나 돌려 잠시 돌아보고, 다시 걸어가며, 교가를 부르세!!!
동촌에 높히 솟은 남산봉아래,/소리없이 흐르는 맑은 시내물/
큰 새들 노래하며, 춤추는 곳에, 뿌리깊히 터 잡은 평화한 학원/
아름다운 그 이름, '남사' 라네!
<후렴> "모여라, 동무야, 함께 나가자!/ 굳세고, 바르고, 용맹스럽게 !"
- 이일령 교장(?) 작사, 이보현 선생 작곡(?) -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
1953년,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2018.10.12)
용문 전철역을 떠나기 전에, 내년에 또 만나야지,,,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 우리 동급생들 중에는 어린 편에 속하던 윤학영 동창이 완전 백발의 용문산 산신령처럼 옆에 와 앉으니, 비로서 나도 늙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구려! 그래도 나는 아직 머리에 까만 구두약 바르지 않는 자연산 검은 머리인데, 앵자산 산골에서 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터를 닦으며 30여년 살면서, 취나물, 다래 순, 산나물 먹으며 살아서인지, 산돼지가 아무리 늙어도 백 돼지 되는 법이 없다더니, 내역시, 늘 자연산 검은 머리가 그대로인데, 요즈음에 와서는, 그 많던 머리카락이 술술 빠져서 줄어들고 있을 뿐이라네. 1953년,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2018.10.12)이 65년만에 만나서, 한우 전문 고바우 설렁탕 집에서, 쇠머리 수육과 지평 막걸리와 고바우설렁탕으로, 점심을 함께 하며, 10여세 때의 시골 국민학교 시절을 회상하며,,,,<사진 허관순 실장 >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 1953년,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2018.10.12) 한우 전문 설렁탕 집에서, 쇠머리 수육과 지평 막걸리와 고바우설렁탕에서 점심을 하고나서,,,,,
<사진 허관순 실장 > 변기영 몬시뇰 서재에 와서 옛 추억에 젖어,,,,10여세 적의 시골 국민학교 시절을 회상하며,,,,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 1953년,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2018.10.12),이 점심 후, 곡수리 성당 사우거사 기념서재 변몬시뇰 집무실에 와서 ,,,,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 1953년,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2018.10.12)이 변 몬시뇰한테서 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건립 기념메달을 받아 들여다보며,,,,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 1953년,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2018.10.12) 점심 후 변기영 몬시뇰 서재에서 다과를 하며, 옛 추억에 젖어,,,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 1953년,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2018.10.12) [변기영 몬시뇰 사랑방]과 [천진암 성지] 홈페이지를, 순진한 어린이들처럼, 관심과 경탄으로 들여다 보며, 잠시나마 만사 제쳐놓고 여기에만 정신 집중하는 80대의 노익장들 !!!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 1953년,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2018.10.12)이 [변기영 몬시뇰 사랑방]과 [천진암 성지] 홈페이지 관리 실무 현장을, 아마 생전 처음보는 시골 노인들답게 순진한 어린이들처럼, 관심과 경탄으로 들여다 보며, 집중하는 소박한 80대의 노익장들 !!!
나이가 좀 어렸던 권혁문이는 작년에 77세로 대학원을 수료하고, 논문을 제출하고, 정정당당히 심사를 통과,
석사학위를 받았다. !!! 실로 우리 모두가 태극기도 걸어놓고, 애국가도 봉창하며, 몇번이고 거듭거듭 안 보통 특별축하를 해야겠다!!!
나이가 어렸던 권혁문이는 작년에 77세로 대학원을 수료하고, 논문을 제출하고, 정정당당히 심사를 통과,
석사 학위를 받았단다.!!! 참 기가 맥혀서!! 실로 우리 모두가 태극기도 드높히 걸어놓고, 애국가도 목청껏 봉창하며, 안보통으로 특별축하를 몇번이고 해야겠다!!! 신문 방송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학력 위조하는 일부 정치인들이나 대학 교수들과 전혀 달리, 우리 동창 권혁문이 77세에 석사학위 통과한 쾌거는 실로 전란 중에 그 시절 우리 모두가 점심도 굶어가며 학교 다니던 어린이들 우리 중에, 늦게라도,,,,정말, 남사국민학교 권혁문이 얼마나 위대하게, 참으로, 훌륭하게, 우리의 존경과 영광을 받아야만 할 국민들의 사표가 아니랴. !!!
65년 만에 처음 만나는 80대의 변기영 몬시뇰 동창생들 1953년, 용인군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생들(2018.10.12)
사진을 바라보면서, 1951년 늦 여름, 4학년 생도들의 가장행렬 사진, 오른 쪽부터, 유순자, 김영균, 윤학영(벙거지 모자), 최돈웅(벙거지 모자), 권혁문(까만 교복 대학생), 수건을 머리에 강은 어머니 역의 변기영, 개똥모자 신사복 남선우, 힌 수염의 양만옥, 검은 상의 입은 이한봉, 흰 치마 수건의 이상철, 군대 입영받은 구본욱, 김학영,현역병들 가장한 비행기 조정사 조병준, 이기정, 장순강, 이옥순, 조화영, 뒤에, 등등...
온 나라가 전쟁 중이던 1951년 여름, 남사국민학교 운동회 날,
당시 우리 4학년 학생들의 가장행렬 모습. 온 국민이 전쟁에 집중하던 시절, 비행기를 만들어서, 가운데를 뚫고 어깨걸이로 지고서 들고 나왔다. 급장을 맡았던 나는 (변기영 몬시뇰, 당시 12 세) 엄마 역을 맡아, 가장하여 머리에 수건을 쓰고, 밭을 매다가 군대 가는 아들(검은 양복 뒤)을 따라 나선 장면. 그 뒤에서 그늘에 얼굴을 가리고 있다.자세히 보면, 많은 어린이들이 고무신도 못 신고, 맨 발로 학교에 다니는 코흘리개들이었다.전쟁 중이었으니, 고무신 공장도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던 시절!
전쟁중이라서,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는 학생은 한 반에 한 두 명 정도였다. 가장행렬하는 우리 코흘리개 어린이들을 자세히 보면 고무신도 못 신고 온 맨발의 꼬마들이 적지 않다. 그 때 우리들은 모두 지금의 레바논 피난민 수용소의 어린이들 수준이었다. 특히, 6남매를 키우던 홀어머니 밑에서 집안이 가장 가난하던 나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그래도 명랑하고 온순하고 힘차게 뛰어놀았다. 그래서 1학년 2학기 때부터는 6학년 졸업 때까지 매 학기마다 급장선거에서 절대다수(약 90% 이상의 지지로)의 급우들의 뜻을 따라 반장(급장)을 하였고, 부반장은 양만옥이와 안수강(여학생)이 많았다. 양만옥은 우리들 중에 키도 크고 힘도 세어, 1학년 1학기 첫번째 반장(급장)을 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들은 반장이나 부반장 하는 것을 진심으로 싫어하였으나, 급우들의 선거와 담임 선생님의 임명으로, 정말 순종하는 마음으로 반장을 맡았다. 그 때, 6년간 담임선생님 대신 매일 출석을 불렀던 관계로, 지금까지 동창생들의 이름을 거의 모두 암기하고 있으나, 이번에 만나보니, 얼굴이 너무 변하여 이름과 연결시키기가 힘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우리 동창생들이 얼마나 착하고, 순수하였는지!
그래도, 빈 속으로, 맨 발로 온종일 뛰어놀며 즐거웠던 시골 국민학교 시절! 우리 집이 가장 가난했어도, 급우들은 모두들 나를 좋아하며 학기마다 절대다수 투표로 나를 반장으로 뽑았던 기억이 난다.! 이 때 전교생 우리 어린이들은 날마다 학교에 가고 올 때, 목이 터져라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를 크게 자주 부르면 중공군(당시에는 전방에서 후방으로 휴가 나온 우리 큰 형님들이 말하기를, 북치고, 꽹과리 치며 떼로 몰려온다고, "똥뗑이 놈들"이라고 불렀다)들이 모두 물러갈거라고 했다.
마치, 임진왜란 때, 남도 해안에서, 마을마다, 매일 밤, 아녀자들이 손에 손잡고, "강강 수월래! 강강 수월래!"를 큰 소리로 자꾸 부르면, 왜놈들이 바다 건너로 쫓겨갈 거라고, 믿었던 것처럼!!!그래서 우리 어린이들은 떼놈들이 물러가도록 아래 노래를 자주 큰 소리로 불렀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 대한 남아 가는 데 초개(草芥)로구나 !
나아가자 ! 나아가 ! 승리의 길로!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 ~ ~ ! "
당시 중공군 150만 명 중에 우선 100만 대군이 모택동 아들과 함께 북한의 인민군을 도와 우리와 싸우러 내려와 38선을 넘어 우리나라를 침략하므로, 전국 어린이들은 군가를 부르며, 애국심을 불태웠다. *초개(草芥)- 풀끝에 맺힌 이슬.
남사국민학교 졸업사진(6학년 2반) 단기 연호를 쓰던 시대다. 전쟁 중 우리가 국민학교를 졸업한 단기 4286년은 1953년이다. 이 한장의 사진은 우리들에게 매우 소중하다.우리 반(6학년 2반) 담임 선생님은 권오균 선생님이셨고, 6학년 1반 담임 선생님은 이보현 선생님이셨다. 남사국민학교의 교가를 작곡하셨다고 들었다(교가 가사 작사는 이일령 교장 선생님으로 후에 용인군 교육감 ?). 내 기억에 우리 어린이들은 대부분 집에 돈이 없어서, 졸업기념사진을 찍을 엄두도 못내고, 1장씩 살 돈도 낼 수 없는 집이 적지 않아, 담임선생님이 자신의 월급에서 지불하였던 것으로 생각나며, 졸업사진 찍기 몇일 전부터 담임선생님은 미리 몇 차례 우리들에게 일렀다. 졸업기념사진은 오래오래 간직하고 보는 것이니, 옷을 빨아 입고 오도록 하여, 이른 봄이라 좀 선선한데도, 특히 여학생들은 하얀 저고리와 버선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오라고 하였다. 그래도 여학생 1명은 비싼 미제 구호물자에서 사서 입힌 누런 어른 상의를 줄여서 입고다녔는데, 졸업사진 찍는 날도 힌 저고리 검은 치마를 안 입고 그대로 왔다. 그 시절, 전쟁 중 시골이라서 우리들은 고무신이 찢어지거나 어디가 뚫어지면, 마을에 다니는 신길이 장수 아저씨한테 외상으로 고무신에 가죽을 대고 꾀매어 신던 시절이다. 졸업사진의 여학생들 고무신이 모두 고무신 코가 뾰족한 여자용이 아니라, 뭉둑한 남자용을 빌려서 신고 온 어린이들도 보인다.
<사진을 보면서 ( )안은 살던 마을 이름. 맨 윗줄 오른편부터,생각나는 이름들:<필자, 변기영 당시 14세, 권봉주(창말) 이름 기억 안남, 김영균(각궁말, 작고), 남선우(외동촌), 양만옥(아리실, 반장 선거 때마다 부반장이 되었다. 나는 만년 반장(90%이상 득표, 양만옥은 10% 내외, 우리는 모두 반장이나 부반장을 하기 싫어했고, 억지로 해야 했다),김순태(아리실, 작고), 김진영(중부뜰), 박재호(버등이), 구본욱(통골), 이상철(새말), 김종만(버등이), 이름 기억 안남,이한봉(순뭍), 홍승준(뒷말, 30대에 작고),김학영(통골), 윤학영(아리실), 공영택(중부뜰), 여학생들 5명 중 맨 왼쪽 끝이 장순강(각궁말),다음이 권혁주(방축골,작고), 최돈웅(방축골),권혁문(방축골, 현재, 서울 강남성모병원 근무), 아래서 두번째 줄 여학생들, 우편부터, 이옥순(각궁말), 이름 기억 안남 3명, 5번째, 안수강(중부뜰, 만년 여자 부반장, 몇년 전 작고 소식을 들음, 훗날 우리 반에서는 당시 유일하게, 대학교(서울서 숙명 여 중.고를 거쳐 숙명 여대 입학)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필자가 서울 가톨릭대학(신학과)에 정식으로 들어간 것은 1966년 봄이었다. 단임선생님 좌편으로 4명은 모두 이름 기억 안남, 좌로 두번째 누런 색 상의를 입은 동창이 조화형(?아버지가 음악 선생?),맨 아랫 줄, 좌로부터 3번째가 윤상금(? 중부뜰),그 다음이 하성열(각궁말, 작고 ?), 담임선생님 우편으로 2번째가 남인우(외동촌), 이 외의 동창들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데, 그래도 내가 6년 간 학기마다 반장을 맡아서 출석부를 가지고,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이만큼이나 생각나는 것이고, 틀리는 경우가 꽤 있을 텐데! >
졸업한 후 한번도 만나지 못하고 60여 년 만에 남인우 동창은 몇 년 전 천진암 성지로 나를 찾아왔으나, 하도 늙어서, 서로가 서로를 물론 전혀 몰라보았다. 다만 천주교 신자가 된 남인우 할머니는 학생 때 출석을 부르며 6년간 반장 노릇하던 나를 알아보았으나, 나는 그렇지 못하였다. 내가 위의 졸업사진을 가지고 나와서 함께 찾아보았으나, 내 자신도, 그 남인우 동창 자신도, 자신의 사진을 한동안 우리는 모두가 찾아내지 못하였었다. 참 기가 맥혀!!
세월도 가고, 코흘리게 어릴적 동무들도 가고, 우리의 기억도 사라져 흘러가고 있다.!!! 모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부지런히 각자 인생의 졸업식장을 향하여 흘러가고 있다. 오는 세월 막을 수 있나, 가는 청춘 잡을 수 있나 !? - Msgr. Byon
용인,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기념 사진(1953년 3월), 6학년 1반(남학생들)과 2반(남녀 합동) 모두가 함께 찍은 기념사진. 1학년 때 남학생들로 우선 40명으로 1반을 만들고 남은 남학생들과, 1개 반 40명이 안되는 여학생들을 합쳐 혼합으로 2반이 만들어졌으나, 그래도 1반보다 숫자가 적었다. 그 당시 교장선생님은 한승운 장로님으로 기억된다.
무서운 가난과 천대와 시달림을 겪으며, 섭섭하게도 아직도 죽지 않은 우리 80대 늙은이들은 오늘의 젊은 이들에게 이해를 바라지 말자! 다만 우리가 살아온 그러한 과정이 후대에는 없기를 기도하자!
최근 윤학영 동창이 김순태, 권혁주, 안수강, 홍승준, 등의 작고 소식을 내게 전해 주어서, 먼저 간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우리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은 길을 가고 있다. 동창 윤학영은 독일에 가서 오랫동안 포도주 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귀국하여, 유럽의 어느 나라 포도주보다도 못지 않은 아주 양질의 국산 포도주를 제조하였으며, 재작년 지금 내가 거하는 이곳 곡수성당에 당시 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님과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님이 곡수성당 축성차 오셔서 여러 신부님들과 내외 귀빈들과의 오찬에 윤학영 동창의 특제 포도주가 격찬리에 인기가 제일 높았다. 윤학영 동창에게 감사를!
시골에서 원래 집이 몹시 가난하던 나는 국민학교 졸업 후, 천주교에 입교하여, 남다른 인생관으로, 1971년 사제가 되기까지, 또 사제가 된 후에도, 출가한 성직의 길을 걷느라, 한번도 동창회에 참석을 못하였고, 특히 은사님들을 찾아뵙지 못하여 늘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그래서, 어릴 적 국민학교 꼬마 동창들이 하나씩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도 몇년 뒤에서야 들어서 겨우 아는 처지가 되어, 문상 한 번 못 가고, 기도할 뿐이었다.
"주님, 우리 국민학교 동창들이 이제는 모두 80여세가 되오니, 늙으막에 몸이라도 건강하게 보살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