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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하느님의 종, 殉敎者 李承薰 進士의 李檗 聖祖 欽慕 詩, [光風霽月] 小考와 東西洋의 聖人觀- 正道論

글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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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殉敎者 李承薰 進士의 李檗 聖祖 欽慕 詩,
[光風霽月] 小考와 東西洋의 聖人觀
 
하느님의 종 李承薰 進士의 李檗 聖祖 欽慕 詩, [光風霽月] 小考 
 
1775년, 10월 (乙未年 上月), 하느님의 종 이승훈 진사는 처갓집이 있는 마재에 갔다가, 정약현, 약전, 약종, 약용,4 형제 사돈들과 함께, 때마침 천진암 天學 道場에서 修道하던 광암 이벽 성조께서 누님 댁(정약현의 집)에 종종 들리던 터에, 만천 이승훈 진사는 처 사돈이 되는 德祖 이벽 광암 공을 모시고, 당시에 天學이라고 부르던 天主敎에 관한 도리와, 서양의 새 학문에 관한 강의를 들었는데, 그 내용에 대해서뿐 아니라, 天學을 강의하는 광암 이벽 성조의 박학다식하고, 성현군자다운 그 인격과 영웅호걸의 기백과 長河와 같은 언변에 너무나 감격하고 경탄한 나머지, 20여세의 젊은 학자 이승훈 진사는 아래와 같은 글을 지었다. 
 
襟懷灑落光風霽月之無邊, (금회쇄락광풍제월지무변)
思慮淸明長天秋水之相暎, (사려청명장천추수지상영) 
 
初譯
 
襟懷를 灑落하는 光風과 霽月의 無邊함이여!
思慮는 淸明하여 長天과 秋水가 相暎함이로다!
 
意譯-1
 
가슴에 품은 회포가 고결하기 그지 없어, 빛과 바람으로 비가 개인 하늘의 달 빛이 끝없이 가 없는 비춤이니, 생각과 마음은 맑고 밝아서 높고 멀고 긴 하늘이 가을 물에 서로 비침이로세 !
 
意譯-2
 
옷깃에 배어 있는 것도 말끔히 씻어내려 떨어뜨리는 빛과 바람에 장마철 비가 개인 밤 하늘의 달빛이 끝없이 비추어 가이 없으니, 그 생각과 마음은 맑고 밝아서, 멀고 높은 긴 하늘이 가을 물에 서로 비춤이로세!
 
     註: 
 
*‘光風霽月’이라는 말은 본래 중국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품을 경탄하며 칭송했던 표현인데, 후대에 오면서 동양에서는 학덕을 겸비한 능변가로서, 실로 박학다식한 성현 군자에 대해서 탄복하며 쓰는 표현이다. 그래서 識者들간에는 종종,“그 어른이야말로 참으로, [광풍제월]이지! 하는, 경탄사로 쓰는 말이다.!”
 
* 乙未年 上月(1775, 음력 10월), 마재 강 둑 언덕에서 앞 강물을 바라보며 지은 詩文이다. 이른 봄이나 늦가을에는 기온이 차서, 물 속의 불순물이 모두 바닥으로 가라앉기 때문에, 호수나 강물이 거울같이 맑아, 늦 가을이나 이른 봄에는 물이 맑고 깨끗하여,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거울 같은 물 속에 비치어 보인다.
 
* 9년 후, 甲辰年 4月(1784년 음력 4월 15일) 봄에, 광암 이벽 성조의 누님(정약현의 부인 경주이씨) 일주기 제사를 지낸 후, 정약전, 약종, 약용, 형제들은 이벽 성조와 함께 아침 일찍 마재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오면서, 당시 22세의 청년 정약용이 배 위에서 지은 詩文에서 유사한 풍경을 읊은 대목이 나온다.
 
* 즉, ",,,봄은 깊히 무르익어, 강가 양쪽에는 붉은 꽃 잎들이 빗 방울처럼복숭아 꽃 잎이 조금씩 떨어지는데, 바람도 고요히 잠자는듯 하여, 뱃 전 아래 흐르는 강물은 거울 같이 맑아서, 강물 속에는 하늘이 내려와 들어 있음이 보이네 그려 !! 春深兩岸看紅雨 (춘심양안간홍우)/風靜中流俯鏡天 (풍정중류부경천)/,,,"
 
* <1784년>[同友人李德操檗乘舟入京]
 
啼樹黃鸝逆客船 (제수황리역객선)/水邊村落始朝煙 (수변촌락시조연)/春深兩岸看紅雨 (춘심양안간홍우)/風靜中流俯鏡天 (풍정중류부경천)/蘇軾才高談水月 (소식재고담수월)/名重若神仙 (이명중약신선)/深知拙劣無賴 (심지졸렬무뢰)/欲把殘經報昔賢 (욕파잔경보석현).
 
* 이 시문에서, 22세의 정약용은 이벽 성조와 함께, "서울로 들어가면서(入京)"라는 표현을 썼는데, 만일 이러한 표현을 의금부 도사를 하던 그 아버지 정재원이 보았다면 막내 아들 정약용은 혼쭐이 날만큼 야단을 맞았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상감 마마가 거하시는 도성, 서울에 에 감히, '들어간다(入京)'는 말은, "서울로 올라간다(上京)"고 해야지, '서울에 들어간다'는 말은 역적들이나 아니면, 대국의 사신들이 쓸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왜정 때까지도, 아니, 해방 후, 또 지금도 까지도, 부산이나 평양에서,수원이나 춘천에서, "서울에 올라간다(上京)"고 말하지, 수원이나 대전에서, 서울에 들어갔다가 나온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오랜 우리의 문화관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이벽 성조로부터 천학과 서양 신학문을 배운 정약용을 비롯한 청년 학도들은, 당시의 박제가, 이덕무, 등, 우리나라 사회의 현대화를 위한 개혁정신으로, 上京이라는 말 대신 入京이라는 말을 사용할 정도로, 당시 우리나라 사회 개혁에 天學徒들이 공감하며 동참하려는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동양의 聖賢, 君子나, 處士, 居士, 道士, 및 光風齊月 같은 儒.佛.仙.道의 문학적인 표현을, 사실 서양 언어에서 적당한 단어를 찾기는 쉽지 않다. Savant나 Saggi, Sagio, Saint, Sanctus, 등, 유사한 말들이 없지는 않지만, 문명의 격차에서 꼭 맞는 용어를 동양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바오로 사도께서 일찌기 신약시대 초기부터 Sancti Sanctorum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여,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일반 신자들(fideles)을, 지금도, '聖徒들'이라는 말로 쓰기도 한다.
 
* 그런데, 1950년 교황 비오 12세께서 시복하신 119위의 중국 순교자들이 2000년 聖年에 와서 교황 성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하여 모두 聖人(Sanctus)으로 諡聖되자마자, 중국 문화계 종교담당 인사들에 의해서 매우 장기간 ,아마 지금까지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판과 비평이 계속되었었다. 거의 모두가 순교자로 시성되신 분들이었는데, 중국이나 한국에서 말하는 聖人觀과 로마 교회의 공경 대상인 聖人들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 상이하기 때문이었다.
 
* 孔子나 孟子나 묵자같은 학덕이 출중한 위인들을 聖人視하는 중국인들의 생각으로는,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천주교라는 종교의 도인들 중에 영세도 하지 않은 초보자 쟝 파일루나 치주제 같은 그다지 유식하지도 않은 예비 신자들을, 순교 성인으로 추대한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103위 성인들과 124위 복자들과 새로 시복될 하느님의 종들에 대해서도 중국인들의 시각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 그런데,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도 일반인들이 좀 쉽고 당연하게 성인으로 인정하고 존경할 수 있는 분들 중에는, Matteo Ricci나 Adam Schall 같은 선교사들이나, 또는 文度公 정약용 승지나, 문도공 자신이 聖賢이라고 칭송하며 언급하던 광암 이벽 성조나 대학자 녹암 권철신, 직암 권일신, 같은 분들이 시복이나 시성되어 존경과 추앙을 받는데 대하여는 매우 긍정정인 인식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사실 로마 교회가 시복, 시성한 중국. 한국. 일본, 3국 교회의 복자들과 성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순교자들이다. 특히, 서방 교회 선교사들의 선교의 결실로서, 신앙의 용사들이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일터전이 넓고 다양하여, 순교자 외에도 많은 학자들과 교육가들, 사목자들, 자선사업가들, 수도자 성인성녀들이 있다. 그런데 동양인들, 특히, 중국인들에게 쉽게 성현으로 존경받는 이들은 역사적으로 박학다식한 성현군자들이다.
 
* 한마디로, 특히, 중국과 일본의 복음화를 위하여, 극동 아시아 지성인들도 쉽게 당연시할 수 있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의 시복이나 시성은 이러한 면에서 볼 때, 124위 복자들보다도, 103위 성인들보다도, 가장 먼저(in primo), 별도로(separatim), 되도록 신속히(quam primum), 시복, 시성되셨어야 할, 우리나라 천주교 신앙의 제1세대 선조들로서, 자발적인 진리탐구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만나뵙고 신앙을 실천하였으며, 사도시대의 신자들처럼, 성사생활을 하기 이전에 이미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 신앙생활의 공동체를 이루었으니, 이는 세계 모든 교회에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공식 강론; 2014. 8. 14. 방한 첫날 한국주교님들에게,또, 2013. 3. 7.한국주교님들의 Roma 정기 예방, Ad limina 때 하신 말씀 참조).- Msgr. Byon -
 
****************************正道論*******************************************
 
 주변국들의 핵무기 보유에 우리 종교인들은 침묵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우리는 모두 保守도, 進步도, 中道도, 아닌, 모두가 正道로만 걸어가야!
 
중국, 일본, 북한, 소련, 미국, 등 주변국들의 핵무장과 핵무기 보유,및 핵실험에 우리 종교인들은 침묵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특히,오늘의 정치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保守도, 進步도, 中道도, 아니다. 모두가 국민들의 앞에 서서, 正道로만 걸어가야 한다.
 
태평양과 태서양 작은 무인도 여기 저기서는 미.영.불 등 서방 강대국들의 핵실험이 1990년대 들어 계속되었었다. 제주도 만큼씩 한 불덩어리가 바다 속에서 터지니 해수 온도 상승은 물론 기류 이변 원인이 되어, 의외의 지역에까지 엘리뇨와 라니냐 등으로 태풍과 폭우의 기후 이변이 극심하게 되어 수십만 명씩 이재민이 나고 있다. 아시아 대륙의 고비 사막과 북극 凍土에서는 중.소.의 지하 핵실험으로 사천성 지역에까지 지진이 확대된다고 하였었다.
 
세계 도처의 지성인들과 성직자들은, 특히 교회는 이에 반대하며 중단하라는 경고를 큰 목소리로 외쳤었다. 천진암 성지의 다국어 홍보물에서도 용기를 내어 거론하였었다.(Berceau de l'Eglise Catholique en Coree No. 12. 1994. 5. 25./이달의 천진암 불어판 제12호). 뒤이어 2개월 후,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그 전부터 준비해오시던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 실험 제조 금지를 역설하시며, 국제사회의 무기거래 밀무역이, 일반 생필품 무역에 못지 않다는 보도가 한창일 때, 그 현실을 개탄하시며, 각국 지도자들의 시급한 각성과 시정 결단을 강력히 촉구하셨다.
 
북한에서 지하핵실험이 예상된다는 보도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군사 전문가들이나 정치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사시에 불행히도 악용되어 무기화할 때, 몇 명 안되는 그 전문가들은 죽거나 다치기도 않겠지만, 많은 인류와 세계에 파멸의 가공할 위협이며 심각한 당면 문제가 아닌가?
 
더구나 핵무기가 국가나 정권을 지키지 못하며, 핵무기로 돈을 벌 수는 없다. 구 소련이 핵무기가 없어서 무너졌는가? 핵무기가 적어서 경제난으로 백성들이 굶주렸는가? 中共이 지금 이만 큼 밥술이나 먹게 된 것이 핵무기 덕택이 아니다. 등소평의 개방 덕분이다.미국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다른 나라들이 무서워서 미국 상품을 사주는 나라는 없다.핵무기로 남북통일을 이룰 수는 없다. 전쟁을 좀 덜 마다하는 강대국들을 끌어들일 뿐이다.
 
심각한 북한 핵 문제를 놓고 보수와 진보가, 마치 해방 후 모스크바 삼상회담 직후처럼, 서로가 옳다고 떠들며, 차라리 중도를 걷자는 비굴하고 무책임한 政治家然하는 자들도 없지 않다. 良心도, 愛國心도, 事理 판단력도, 洞察力도 없는 사람들이 설치고 있는 것이다.
 
핵문제가 어디 정치문제며 사상문제며 노선문제란 말인가? 핵문제에는 保守도, 進步도, 中道도, 南韓도, 北韓도, 社會도, 宗敎도, 天主敎도, 佛敎도, 따로 무관하게 있을 수가 없다. 사실 保守도 아닌 사람들이, 더구나 進步도 아닌 사람들이, 더더구나 그건 中道가 아니고, 양다리 걸친 타협이란 이름의 책임회피와 직무유기를 다반사로 여기는 사람들이 현명하고 정상적인 지도자들처럼 보이려고 한다. 실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여기에는 오직 正道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오늘날 保守도 아니고, 進步도 아니며, 더구나 中道는 더욱 아니고, 오직 正道로만 나아가야 한다! 세상에는 뒤엉킨 길도 많지만, 바르고 곧은 길은 하나 뿐이 아닌가? 길가를 스치는 바람은 길이 아니다. 나무잎을 흔들며 지나갈 따름이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 사회가 나아갈 길은 保守도 아니고, 進步도 아니며, 그렇다고, 더구나 中道도 아니니, 오직 正道로만 나아가야 한다. 정치인도, 사법인도, 언론인도, 종교인도, 아니, 우리 국민 모두가,! 물론, 進步도, 保守도, 또 中道역시, 모두 正道 위에서, 正道만은 벗어나지 말아야만 하겠다!
 
進步가 正道를 벗어날 때, 모험과 위험의 함정으로 빠지는 길이 되고, 또 保守가 正道를 벗어나면, 기득권 유지 위한 부패로 인하여, 퇴보와 패배의 길로 가게 된다. 모두가 모를 수 없는 正道는 애국심과 신앙심과 양심이 가르쳐 주는 것이니, 이는 국가와 민족과 가정의 바탕이 되는 힘이다. 강대국의 國力이란 군사력이나 핵무기나 경제력이 아니라, 그 바탕이 되는 正道를 걸어가는 國民意識 수준이다.
 
사실 中道는 오늘날 우리 사회 안에서 거의가 타협의 산물이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약자의 몸부림이며, 반대와 방해를 피하면서, 존경과 영광과 추앙을 받고, 인기를 얻고자 하는 이들이 양편에서 던지는 돌에 맞을 용기가 없어서, 아주 비겁한 무골충이나, 보호색 변신만능의 오징어 같은 인생길을 찾는 이들이 가는 숨바꼭질 옆길이다. 인간사회의 외형을 규정하는 中道는 결코 우리가 걸어갈 正道가 아니다. 특히 지도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아니다.
 
따라서 비록, 中道가 오늘날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절충과 타협의 길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벗어나서는 아니 되는 正道는 아닐 때가 허다하다. 그런데 본래 正道로 향하는 길은 쉽고 편한 길이 아니라, 외롭고, 괴로운 길이다.
 
그러기에 文度公 요한 丁若鏞 承旨도, 1827년 늦봄, 65세의 노구를 이끌고, 어린 시절 자신이 10여 년간이나 공부하던 母校, 天眞菴을 마지막으로 다녀가면서, 고달프고 서글픈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 때나 이때나 나는 항상 한평생 괴로운 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한척의 조각 배 신세로세”(猶然苦海一孤舟)- 丁若鏞 全集 2卷, 詩文集, 天眞逍遙集).
 
그렇다. 正道는 올바른 길이다. 이 길은 걸어가기가 매우 외롭고 괴로운 길이다. 이 길을 가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외롭다. 또 正道가 있는 이 세상에는 굽은 길들이 뒤엉켜 있는데다가, 우리 자신들도 正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君子에게 있어서 中道는 必勿樂行해야 하며, 正道는 고독한 苦行의 길임을 각오해야 한다. 지쳐서 땀에 젖은 이마를 식혀주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은 正道가 아니고, 아예 길도 아니다. 길가와 길 위를 스치고 지나며, 나무잎을 흔들고 갈 뿐이다. 오늘날처럼 선풍기 만능시대에는,,,,!,
 
중국 태산의 절벽 아래를 굽이굽이 흐르는 三峽 계곡에서 돛단배를 타고 내리며, 허다한 갈림 길 나루터마다 내려서, 나룻배 다시 바꿔 갈아타고 오르내리기를 거듭하는 나그네의 여로처럼, 우리네 인생길은, 李白의 표현대로, “참으로 다니기도 어렵고. 살아가기도 힘든 길이다. 내리고 또 탔다가 다시 내려서 갈아타야만 할 갈림 길이 많기도 하기에!”(忽復乘舟夢日邊, 行路難!, 行路難!, 多岐路!- 李太白의 名詩, 行路難 )
 
어제의 進步는 오늘에 와서 保守가 되고, 그 사이에는 당장은 가장 지탄을 덜 받아 좀 안전한 中道가 있다지만 거기는 박쥐들이 왕노릇하는 동굴이 있을 뿐이다. 정치도, 사업도, 정당도, 정책도, 사람도 종교도 수시로 바꾸며, 모든 것을 다시 바꾸어 가며 살더라도, 누구도 바꿀 수는 없는, 또 바꾸어서는 아니되고, 반드시 함께 걸어가야 하는 正道는 벗어나지 말도록 하자 ! 그래야만 참되고 올바른 保守와, 진정한 進步와, 초탈한 中道가 보일 것이다.
 
保守도, 進步도, 中道도, 아닌, 우리 모두는 正道 위에서 걸어가자! 특히, 지도자는 외롭고, 괴롭고, 고달픈 正道를 걸어가야 한다! Msgr. Byon 
 
 
입력 : 2017.03.13 오후 9:21:17
입력 : 2017.03.12 오후 11: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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