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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가 나아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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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복, 전 광주시 문화원장님과 이삼 스님 일행 변몬시뇰 예방 - 지평, 용문 전투 70 주년 회고하며 -

글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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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복, 전 광주시 문화원장님과 이삼 스님 일행 변몬시뇰 예방
 
   이상복, 전 광주시 문화원장님과, 이삼 스님 일행이 바쁘신 중에도, 변 몬시뇰을 찾아주셨읍니다. 이상복 원장님은 우리 선조들이 천진암 성지를 본거지로 하여 이룩한 광주실학사와 한국천주교회 창립사를 광주시 역사서에 출판하므로서, 전 세계에 광주역사를 빛나게 하셨으며,또 천진암 성지에도 많은 전나무 묘목을 기증하시어, 지금은 이미 서까래 감들이 되었읍니다. 
 
   이삼스님은 우리나라에서 대금연주에 조예가 깊으시어, 많은 제자들을 두고 있으며, 무형문화재들을 육성하고 계십니다. 특히 이상복 원장님은 수목학에 정성을 다하시어, 대량으로 각종 묘목을 재배하고 계시며, 우리나라 산립녹화와 임업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셨으며, 민둥산이 많은 북한에 묘목밭을 조성하여, 북한의 시골 젊은이들에게 수목학을 가르쳐주어, 북한의 산림녹화에도 크게 기여하시고 계십니다.
    

이상복 전 광주시 문화원장님과 이삼 스님 일행 변몬시뇰 예방(2020.03.11)


이상복 전 광주시 문화원장님과 이삼 스님 일행 변몬시뇰 예방(2020.03.11)


이상복 전 광주시 문화원장님과 이삼 스님 일행 변몬시뇰 예방(2020.03.11)


이상복 전 광주시 문화원장님과 이삼 스님 일행 변몬시뇰 예방(2020.03.11). 이삼스님은 몬시뇰의
쾌차를 비는 대금연주를 들려주셨다.



이상복 전 광주시 문화원장님과 이삼 스님 일행 변몬시뇰 예방(2020.03.11)



이상복 전 광주시 문화원장님과 이삼 스님 일행 변몬시뇰 예방(2020.03.11)

이상복 전 광주시 문화원장님과 이삼 스님 일행 변몬시뇰 예방(2020.03.11)



이상복 전 광주시 문화원장님과 이삼 스님 일행 변몬시뇰 예방(2020.03.11)-이삼스님이 몬시뇰의
쾌차를 비는 대금연주에, 몬시뇰의, [이 풍진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그러나
여든살 넘은 손가락은 자꾸 다른데를 눌러서 그만 딴 소리가 자꾸 나오는 바람에,,,!


이상복 전 광주시 문화원장님과 이삼 스님 일행 변몬시뇰 예방(2020.03.11)



이상복 전 광주시 문화원장님과 이삼 스님 일행 변몬시뇰 예방(2020.03.11)



이상복 전 광주시 문화원장님과 이삼 스님 일행 변몬시뇰 예방(20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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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복 전 광주시 문화원장님과 이삼 스님 일행 변몬시뇰 예방(2020.03.11)


이상복 전 광주시 문화원장님과 이삼 스님 일행 변몬시뇰 예방(2020.03.11)


이상복 전 광주시 문화원장님과 이삼 스님 일행 변몬시뇰 예방(2020.03.11)


이상복 전 광주시 문화원장님과 이삼 스님 일행 변몬시뇰 예방(2020.03.11)


이상복 전 광주시 문화원장님과 이삼 스님 일행 변몬시뇰 예방(20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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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차 내방한 귀빈 일행들에게, 몬시뇰 강의 개요;
 
 
코로나바이러스 극복을 위시하여,이 광난의 시국을 극복하는 국민정신 교과서로, 70년 전 바로 이 때(1951년 2월 말~3월 초), 중공군 100만대군의 인해전술로,1.4후퇴로 미군의 흥남철수에 이어, 바로 이곳 지평전투와 용문산 전투는  최대의 처절한 전투지역이었음을  소개하였다.
 
중공군 3개사단 4만5천여명이 서울 재탈환을 위하여 지평면과 용문산에 집결하였고, 모택동의 오른 손 같은 팽덕회 장군이 사령관이었으며, 국군은 동두천과 화천 지역에 있던 6사단이 중공군한테 대패하여 1만이 넘던 사단 병력 중에 탈영병 심하여, 불과 수백여명만이 살아남아 후퇴, 지평에 모였고, 원주와 홍천 지역에 있던 아군 8사단역시 중공군한테 대패하여 1만 5천여명의 사단 병력 중 불과 수백여명만이 용문산까지 후퇴, 다시 모였으며, 미8군의 1`개연대 병력은 흥남철수로 사기가 저하되어, 전의를 잃고있었는데, 프랑스군은 몽클라르 중령(실제는 현역 3성장군이었음)이 이끄는 1개 대대 600 여명이 모두였다.
 
그러나 후퇴한 6사단과 8사단 잔여병들을 재결집하여, 장도영장군의 지휘로 용문산 계곡에서 중공군 1만 8천여명을 사살한데 비하여, 아군은 불과 수백여명만이 전사하는 대승전으로, 아군은 총알이 하나도 남지 않을만큼, 모두 쏘며 싸웠고, 3일간을 굶어가며, 주로 백병전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였다. 이 전투로 생존한 중공군은 산맥 넘어 가평으로, 한탄강으로 후퇴하며, 처음으로 휴전을 제안하였다. 만일 그 때 여기서 중공군을 격퇴시키지 못했다면, 서울은  한강이남으로, 수원이나 평택, 혹은 대전으로 다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인들을 기억하며, 그 어떤 난관도 극복하기로 결심을 다짐합시다. -Msgr. Byon- 
    
 
중장 계급 스스로 버리고, 중령 계급을 자청하여, 
한국전에 참전한, 프랑스 Monclar 대대장 전적지 순례 ! 

변기영 몬시뇰, 하창호 장군 지평전투 전적지 순례(2017.06.14).
1950년 11월, 800명의 프랑스군인 전투 대대를 이끌고, 한국전에 참가하여, 용문, 지평 전투에서, 남하하는 중공군을 격파한 Raoul Monclar 중령(1892~1964)은 본래 헝가리 이민 출신으로, 1,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프랑스와 현대 세계 전쟁사의 영웅으로 전설적인 명장이다.  
변기영 몬시뇰, 하창호 장군 지평전투 전적지 순례(2017.06.14)


변기영 몬시뇰, 하창호 장군 지평전투 전적지 순례(2017.06.14)

변기영 몬시뇰, 하창호 장군 지평전투 전적지 순례(2017.06.14)



   
  프랑스 몽클라르 장군과 미국 릿치웨이 장군
 
 오늘 (2017.06.14), 변기영 몬시뇰, 하창호 장군 지평전투 전적지 순례

한국전에 참가하여, 1951년 2월, 600명의 프랑스군인 전투 대대를 이끌고,  용문,지평 전투에서, 남하하는 중공군을 격파한 Lieutenant Colonel Ralph Monclar 중령(1892~1964)은 본래 헝가리 이민 출신으로, 프랑스 현대 전쟁사의 영웅이며, 전설적인 명장이다. 20세 중반까지 세계 1차대전에 참전하여 명성을 떨쳤고,계속 군생활에 몸담아 2차 대전에서는 프랑스와 연합국의 승리를 위하여, 독일 히틀러 군과 싸우며, 빛나는 무공을 세워, 2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 육군 중장으로 전화 복구사업에도 많은 공헌을 하고 있던 현역 3성 장군이였다.
   1950년 한국 6. 25 전쟁 때, 한국전에 파견된 프랑스군 대대는, 남하하는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1.4 후퇴 때, 비극의 함흥철수 작전 이후였고, 프랑스 군 1개 전투부대 600명을 거느린 부대는 본국에서 부대가 창설될 때, 대대장 후보를 찾는 과정에서, 3성 장군의 몽클라라 중장은 남들이 대부분 기피하는 한국전 파견을 자청하였으나, 대대장 후보는 중령급이라야 하므로, 국방성의 반대로 불가능해지자, 중장 계급을 포기하고, 중령계급 인준을 자청하였으며, 프랑스 전국에서 한국전 파견병 지원자를 모집, 대대장으로 참전하여, 용문, 지평, 임진강, 등지에서 남하하는 중공군 수 개 사단 부대들과 첫 전투를 하였고, 중공군을 가평전투, 임진강 전투, 등에서, 계속 격파하였다.사실 중공군의 전의를 꺾고, 휴전 제안으로 방향을 돌리게 한 것도, 프랑스군 몽클라라 장군 대대의 역할이 컸다. 
  
    몽클라르 중령은 본래 현역 3성 장군으로서, 프랑스 국방성 한국전 참전 관계 담당관 회의에서, 스스로 별 셋의 계급장을 떼어내고, 중령 계급장을 붙이게 강요하여, 신설부대의 정식 대대장으로 한국전에 참전할 수가 있었다. 당시 59세였던 몽클라르 중장은 부인이 아기를 가져, 남편의 한국전 참전을 강력히 반대하였으나, [세계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싸우는 용사]의 길을 택하였다.
    오늘 (2017.06.14), 마침, 평소 필자가 잘 아는 이 시대 우리 국군의 자랑스러운 하창호 장군(육군 소장)이 곡수리 성당을 방문하여, 지평 전투 전적지 곡수리의 기념 성지를 순례하면서, 몽클라라 장군의 빛나는 일생과 한국전에서의 큰 업적을 필자에게 소상히 알려주었다. 실로, 감명 깊게 들었고, 오늘날 감투병 중환자들이 난무하며 국가의 안위를 위협하는 지금, 혼자서 듣기에는 아까운 이야기였다. 하장군 같은 서북부 전선의 현장과 여기에 깃들어있는 전쟁사와 전투정신을 겸한 智將이 국방을 지키는 한,우리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을 것이다.
<Msgr.Byon>
1951년 2월 13일~16일까지 있었던, 양평군 지평 전투에서, 프랑스 Monclar 중령 대대가 중공군 3개사단의 공격을 막아내고, 후퇴시키기 시작하게 만든 승전지.- 2016 년 12월 5일 지평전투 전적지 순례
  
1951년 2월 13일~16일까지 있었던, 프랑스 Monclar 중령 대대가 중공군 3개사단의 공격을 막아내고,
후퇴시키기 시작하게 만든 승전지.<2016년 12월 5일 지평전투 전적지 순례-Msgr. Byon>

 
1951년 2월 13일~16일까지 있었던, 프랑스 Monclar 중령 대대가 중공군 3개사단의 공격을 막아내고,
후퇴시키기 시작하게 만든 승전지.<2016년 12월 5일 지평전투 전적지 순례-Msgr. Byon>지평면 사무소 옆에는, 국방부에서 건립한 기념관이 있다. -
   장군의 본래 이름은, Raoul Charles Magrin-Vernerey, 이었는데, 2차 세계대전 중에 주로 해외파병 부대의 지휘관으로서 부르기 쉽게 이름을 짧게 줄인 것이, Ralph Monclar 였다. monclar는,  mont + clara (빛나는 東山, 明山,白山, 華山, 등의 의미를 지니는데), 아직 근거 문헌은 못 보았으나, 필자의 짐작에, 헝가리에서 프랑스로 이민올 때, 프랑스 동북 지방, Lyon 위의 Claire Monts (明山,) 읍내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던 연유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Claire Monts 읍내는 16세기부터 새로 창립된 수도회로서 예수회의 초기 명강사 교수 신부들이 강의하는 학원이 있었을 만큼, 교육에 일찍 개명된 곳이어서, 명석한 자녀들 교육을 위하여, 그리로 이주하거나, 기숙사를 찾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예컨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이미 4백여년 전에 언급하며 서술하였음을, 교황 Pius XII 세가 격찬한, 저명한 성인 주교 학자인 Saint Francoise de Salles도 부유한 가정출신으로, 고향 Annesy에서 바로 Paris로 유학가지 않고, Claire Monts에서 고등과 교육을 마쳤었다.  
Msgr. Byon- 
<이하는 퍼온글.  hkjri의 블로그, 한국전쟁당시 프랑스대대장 랄프 몽클라르중령,작성일 2013.07.14 20:36작성자  이대성.->

France’s Impact on the Korean War

After the North Koreans invaded South Korea in June of 1950 an emergency session of the United Nations was convened to gather military support for the Republic of Korea. 16 countries from the United Nations offered military aid that fell under United States command. The total international force of all 16 countries combined only equaled one tenth of the US military’s contribution to the defense of Korea with many of the international soldiers being rear echelon types. So the actual amount of combat soldiers was much lower.
However, countries that did offer combat soldiers usually sent their best. England, Australia, New Zeland, and Canada all sent units that went on to fight heroically in great battles such as The Battle of Kapyong and The Battle of the Imjim. Sword wielding Turkish and Thai soldiers were also highly respected for their combat skills. However, out of all the international soldiers sent to fight in the Korean War, one battalion to me sticks out more than all the others. This is due partly to their combat record and also to the reputation and personality of their commander. That unit is the French Battalion de Coree under the command of the then Lieutenant Colonel Ralph Monclar.
The French Battalion consisted of 39 officers, 172 non-commissioned officers and more than 800 enlisted personnel, the battalion arrived at Pusan on November 30, 1950. During the war 3,421 French soldiers would fight in Korea.
One battalion of soldiers may seem like a small contribution from a country as large and wealthy as France, but you need to look at the historical context of those times. France was deeply involved in heavy combat in Indochine against communists insurgents there, then they had a insurgency in Algeria to combat, plus military commitments to secure their colonies in Africa. Obviously France was spread very thin and could only afford the one battalion. However, the one battalion they did send was an all volunteer battalion composed of some of their top soldiers led by France’s best commander Ralph Monclar.

Legendary French Foreign Legionaire Ralph Monclar

Now why would their best soldiers volunteer to go fight in Korea? First of all, many French soldiers were still embarrassed by the performance of the French military during World War II. This was an opportunity on an international stage to show that World War II was just a fluke and that the French were back. You had others that simply hated communists. Some fought simply for the glory, others were in it for the money since the battalion’s volunteers were payed quite well. Then you had some that volunteered because they had already been to the hot steamy jungles of Indochine and the cold winters of France and figured that Korea would be a nice year around temperate Mediterranean climate since the 38th parrallel runs through the Mediterranean Sea. How wrong those guys were.
The commander of the battalion, Raoul Charles Magrin-Vernerey, who in World War II shortened his name to Ralph Monclar to be more understandable to Allied forces, was actually a 3 star general before the war and voluntarily took a demotion to Lieutenant Colonel to lead the battalion. He was a veteran of World War I where he was wounded seven times and received eleven awards for valor. After World War I, he was left 90% disabled from his wounds. He was sent to Syria to heal and up and lead soldiers there. By 1924 he was fully recovered and was selected for the French Foreign Legion and led soldiers in Morrocco, the Middle East, and Vietnam. During World War II Monclar and 500 French soldiers joined the Free French forces in England. They went on and fought and defeated the Italian Axis forces in Eritrea. He was on the verge of retirement in 1950 when he volunteered to lead the French battalion in Korea.,,,. 

 ㅡ 몽 클라르  중령(본래의 계급은 육군 3성 중장) 대대의  전적지 순례-

1951년 2월 13일~16일까지 있었던, 양평군 지평 전투에서, 프랑스 Monclar 중령 대대가 중공군 3개사단의 공격을 막아내고, 후퇴시키기 시작하게 만든 승전지.- 2016 년 12월 5일 지평전투 전적지 순례 <Msgr.Byon>
 
1951년 2월 13일~16일까지 있었던, 프랑스 Monclar 중령 대대가 중공군 3개사단의 공격을 막아내고,
후퇴시키기 시작하게 만든 승전지.<2016년 12월 5일 지평전투 전적지 순례-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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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3.13 오후 11: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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