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서 쓰고가신 가시관을, 나도 쓰고 가오니,
이 뒷날 님께서 뒤돌아보시며 날 보시거든, '님 닮았다' 해 주소서!
"님은 가시고,,,무궁화는 피었나이다.,,!
님께서 쓰고 가신 피묻은 저 가시관을,
오늘 나도 마다 않고 쓰고 가오니,
이 뒷 날 님께서 뒤돌아 날 보시거든,
'님 닮았다'하옵소서 ! 님이시여 !" <하한주 신부 원작 시문, 변 몬시뇰 의역>
8월 8일 오늘은 1984년 하한주 신부님께서 선종하신 날입니다. 선종 기일을 알려주는 젊은 신부님에게 감사하며 부끄럽습니다. 사실 이 늙은이가 젊은이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일인데! 몸이 늙으면 마음도 기억도 이제 낡았나 봅니다. 부끄럽지만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구 사제들만 들어가서 읽는 몇자 쓴 것을 옮겨드립니다.
1976년 3월부터 1984년 돌아가시기 전, 빈센트 병원에 가셔서 꽤 여러 달 입원하여 계실 때까지, 하신부님께서는 신장 성당에서 약 1 km 가 남짓한 덕풍리 길가에 마련하신 적벽돌 단독 주택에 사셨는데, 매주 월. 수. 금, 일, 4일의 점심은 내 청을 받아 들여, 운동삼아 신장 본당 사제관에 오셔서 나와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즐거워하셨읍니다. 별 다른 손님이 없으시면, 제가 없어도 매일 점심에 성당에 오셔서 잡수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매일 오면 출퇴근이 되므로, 3~4일 정도만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나 저 때나 항상 부스럭거리며 일을 적지 않게 만들어 하는 나는 식복사가 항상 2~3명 정도 있어서, 모두가 하얀 수염을 길게 느러트리시고 쓰다듬으시면서 하신부님께서 성당 대문에 들어오실 때면 남한산성에서 하산하시는 산신령님이신 듯 교우들과 직원들이 모두 기뻐하며 존경하였습니다.
매년 성주간 성금요일 주님의 수난복음 후의 강론과 첫영성체 하는 어린이들의 첫 고백성사도 하신부님께 맡겨드린 고정된 일이었읍니다. "골고타, 어디메뇨?,,,"로 시작되는 그리 짧지 않은 하신부님의 성금요일 강론은 연로한 회장님들에게 연례 피정강론이었고, 첫 영성체 어린이들과 여름방학 때 주일 미사 중 어린이들 고해성사도 하신부님의 고정된 직무처럼 신부님께서는 싫어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가끔 혼이 나서 울며 고해소를 나오는 어린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퇴촌공소 도마치 김요셉 회장도 야단을 맞고 고해소에서 울며 나온 이야기를 지금도 만나면 한답니다.
동창이셨던 최민순 신부님과 박고안 신부님 유봉구 신부님과 함께 추어탕이나 보신탕을 하는 모임을 용인 본당 주임신부시절부터 종종 가졌었는데, 매월 한 번씩 하기로 한 추어탕회 월례 모임 약속은 잘 지켜지질 않았읍니다. 핑계가 아니라, 1980년 5월부터 주교회의에 불려가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준비위원회 사무국장 일을 하면서부터 5년 간은 거의 매일 새벽 5시 기상하여, 저녁 11시나 돼야 신장 사제관에 돌아오는, 봉사 아닌 혹사에 시달리고 지치던 시기였습니다.
대 선배이신 은퇴 사제 하한주 신부님이 사제관에 오시면 독서를 과히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하시며 저와 독서 내용에 관해 이야기하시는 것을 좋아하셨읍니다. 종종 대신학교 때 듣지 못했던 귀한 사제생활 경험담 말씀은 젊은 사제의 영혼에 매우 소중한 별식이기도 하였읍니다.,,,끝이 없어 한이 없겠기에,,이만 그치렵니다.
왜정 때, 대동아 전쟁 말기에 시골 사제들의 생활이 하도 궁핍하고 어려워서 고생하시던 말씀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빈센트 병원 의사가, "신부님 그래 천주님이 정말 계실까요? 어떻게 알 수 있어요 ?!" 하자, 하한주 신부님은, "내가 있으니까, 천주님이 안 계실 수가 없지!" 하시자, 의사 선생님도 참 그렇군요! 하셨다는 이야기는 훗날까지 전해진 명언으로 남아있답니다.
“님은 가시고,,,무궁화는 피었나이다.,,! 님께서 쓰고 가신 피묻은 저 가시관을, 오늘 나도 마다 않고 쓰고 가오니, 이 뒷 날 님께서 뒤돌아 날 보시거든, 님 닮았다 하옵소서 ! ”
<하한주 신부님의 시문 발췌 약술 -Msgr. Byon><변기영 몬시뇰 2020-08-08 AM 04:13:07 수원 사제게시판 현정수 신부님 글 덧글>
<님께서 쓰신 가시관을, 나도 쓰고 가오니, 이 뒷 날 뒤돌아 날 보시거든, '님 닮았다'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