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수성당 산사태 방지 위험한 돌망태 난공사가 [코로나시국 대난리통]에도 무사고로 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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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수성당 산사태 방지 위험한 돌망태 난공사가 [코로나시국 대난리통]에도 무사고로 완공!(2020. 12. 04.)
"곡수 앞산길 산자락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오늘밤 태풍과 폭우로 매우 위험하오니, 아래 마을 회당으로 대피하시기를 권고합니다." 경고 방송이 며칠을 두고 계속하였다.
지난 여름 폭우와 태풍으로 주변 산골의 일부 가옥이 산사태로 매몰되어 여기저기서 인명피해까지 속출하고 있다는 보도가 꼬리를 물자, 지방 자치단체의 방송과 문자송신 경고가 계속되었다. 양평본당 관할의 50여년 역사를 지닌 곡수리 공소에서 20여년 전에 건축한 성당과 교육관 건물이 뒷동산 절개지에서 2~3m 내외로 너무 가까이 50 여도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이미 2회에 걸친 산사태 토사가 건물 벽에까지 닥쳐서 위험해지자 가난한 시골 신자들 힘으로는 공소 성당 건축도 힘에 겨워, 20여년 전, 김영수 요셉 회장과 김복수 요셉 회장, 등 얼마 안되는 가난한 신문 교우들이 피나는 노력으로 힘을 합쳐, 양평본당의 후원을 받아가며, 공소 성당과 교육관 건물은 기적적으로 마쳤으나, 주변 자연재해에 대한 안전 예방조치까지는 감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하여 폭우와 산사태로 위급해지자, 양평군에 간청하여, 군에서 지름 0.5m X 길이 1m의 구식 돌망태로 15m 길이 5단을 우선 위험지점에 임시 설치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재정사정이 빈약한 산간 지역 군의 그나마 고마운 그 도움으로, 그래도 몇년간은 산사태로 천주교회 성당 건물에서 폭우시에 산사태로 인한 생매장의 인명피해까지 있을 수 있는 위급한 상태에서 아슬아슬하게 폭우때마다 조마조마하며 지내었으나, 이제 금년에는 한계에 다달아서, 산사태 지점이 추가로 점점 확대되어 가자, 드디어 수원 교구 교구장, 이용훈 주교의 허락으로, 교구 관리국(관리국장 황현 신부)에서 손을 대기에 이르렀다.
아직도 우리 시골에서는 돌망태 공사가 그리 흔한 편은 아니다. 그러나 토사가 밀려내리는 산사태 지역에서는 돌망태가 물이 쉽게 걸러서 새어나가고, 돌무게로 토사를 멈추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더욱이, 정신적인 차원에서도 우리에게 주는 교훈적인 면이 없지 않다. 진흙은 한데 모으면, 한덩이 흙덩이가 될 수 있지만, 자갈이나 잔 돌들은 한데 모아도 한덩이 돌이 될 수 없다<세잌스피어>
그런데, 돌들을 한데 모아서 한덩이 큰 돌덩이가 되도록 해주는 강철로 엮겨있는 철사 덕택으로, 물은 빠지게 하고 흙은 걸리게 하는 한덩이 돌을 만들어주는 것이 돌망태다. 장단점이야 다 있겠지만, 작은 돌들을 하나씩 모아서 한데 묶어서 크나큰 한덩이 돌처럼 여러 기능을 하게 하는 것이 돌망태다. 민주국가의 국민 한 사람 한사람이 작은 하나의 돌과같이 각기 혼자서는 별로 힘이 없어도, 강철같은 정신력으로 한데 모이면 크나는 한덩이 돌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다.
성당 남쪽 산의 절개지 동서의 길이 약 30여 m와, 동쪽 산의 절개지 약 27m 내외 양쪽 모두 급경사 50여 도 내외가 되는 절개지 하단에는 그래도 그 어렵던 시절 30cm 두께로 약 1m 높이의 옹벽 콘크리트를 설치하여 당장 급한 토사를 막는 기초가 있어서 위험을 막는 큰 힘이 되었다. 이를 기초로 하여, 이번에도 하단 폭 2m X 높이 1m X 길이 1.5 m 강철망을 연결한 X 길이 4.5m 의 강철망 속에 홍천지역 채석장에서 나온 강한 돌덩이를 채우고, 2단, 3단까지 축조하여 매우 튼튼한 산사태 방지시설이 마침내 이번에 완공되었다. 천주께 감사를 !!
지난 8월부터 수차에 걸친 측량과 설계, 등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주) Next 종합 토건회사가 맡아서, 지난 11월 23일에 착공하여, 우선 약 3일간 불편한 작업로 작업과 작업장 정지작업을 하고, 공사현장 감독 이사의 지휘를 따라 몇명 안되는 인력들이 역량을 총 집중하여, 12월 11일에 본 공사를 무사고로 마쳤다. 천주님께 감사를 !
그동안 중장비 3대(포크레인 02 와 이른 바, 6W 포크레인, 덤프 트럭, 등이 각각 1대씩)와 시공 관리이사(조경운 이사), 교구공사 감독관(김태영 감독), 외에 기술 인력 약 5~6명 내외와 관람객(변기영 몬시뇰, 장희복 공소회장, 등) 3명, 후원 봉사 직원(고옥자, 허관순) 2명 등이 동원되어, 착공한지 2주일(14일)여 만에 위험한 돌망태 공사가 비좁은 난공사의 악조건 속에서도 아무 사고없이 마치게 되었다. 날씨도 아주 한몫을 하며 봄날씨처럼 우리를 도왔고, 뒷마무리하는 12월 13일, 대림 제3주일에는 금년 첫 함박눈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경까지 퍼부었으며,감독관과 천사적인 기술을 지닌 02 포크레인 기사의 봉사로 아주 깔끔하고 깨끗하게 돌망태 공사 현장이 아담하고 예쁘다고 보는 이들마다 감탄할 정도로 뒷 마무리를 잘 하여 주었다.
아주 적은 최소한의 인력으로 오손도손 일하는 이들이, 돌망태에 넣는 돌덩이를 20톤 트럭 20여대 분량을 소비하였고, 중장비 3대가 역시 20여일간을 4, 5명의 시골 마을 자매님들과 함께 무사고로 끝까지 공사를 마쳐주었다! 주님, 이들의 근무 현장과 이들의 가족들에게, 건강과 행복을 내려주옵소서.
노동의 댓가로만 살고, 노동의 댓가만큼만 살 수 있는 것을 만족히 여기는 이 분들의 앞날에 하느님의 손길이 늘 함께 하여 주옵소서 !<보다 상세한 기록은 작업 사진과 함께 추후 알려드립니다.> 주, 성모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리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는 난국이지만, 지난 12월 12일, 통제된 인원들만이 개인적으로 또 산발적으로 참석하는 준공감사제 례를 바쳤다. 전 공소회장 한기수 총무가 붉은 팥 찰시루떡 1말을 해오고, 성모회장 카타리나 자매님이 감주를 만들어 한 양동이를 아드님과 함께 가지고 와서 봉사하였다. 이미 공사중에 다녀가신 양평본당 주임 노성호 신부님이 이번에는 본당 수녀 2분도 동행, 참석하였다. 서울 쪽 아랫 마을 개군면과 한강 가의 대신면에서도 수십명씩 코로나 환자가 발생하였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그래도 교회와 사회의 엄격한 통제하에서, 위생 수칙을 엄수하며, 불편하고 부족한 정성으로나마 우리는 천주님께 감사의 예는 궐하지 않았다!
3주에 한번씩 병원에 다니랴,,, 위험한 돌망태 공사 현장을 지키랴,,, 한 셋트가 되어 3명 직원들도 모두 거의 매주 병원을 다니느라고, 분주하였다. 그런데 어느새 관람객이 아닌 자타가 묵인하며 공인하는 감독관 보조원처럼 되어서, 안전사고 위험을 미리미리 알리고 경고하느라, 이제는 너무 고단하고 피곤하여 허리도 아프기 시작하더니만 또 아프고,,,하지만,,,!
2020년 말의 금번 피할 수 없는 이번 돌망태 자칭 공사감독 조수라도 된듯, 그러나 아마 마지막 일이 되리라고 생각된다. 번번이 이제는 일을 그만 해야지 하면서도,,,! 그러나 팔자에 쓰여 있기나 한듯, 지나간 50여년 간의 공사현장의 사제 인생을 무사고로 살고 가게 해 주시는 주님의 특은을 감사하며,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오늘처럼, 그냥 마냥 하루 해를 넘기며 살아가노라니, 어느덧 이제 팔순을 넘긴 시골의 늙고 낡은 民草의 머리에도 조금씩 희끗희끗한 흰머리 카락이 생기기 시작하고 있다. <관계 사진은 추후 계시> 하늘이 내리는 은총의 瑞雪(서설)은 고요하고 거룩한 성탄 밤처럼 포근하고 조용하다 !
www.변기영몬시뇰사랑방.kr 또는 www.msgr-byon.org 는 www.msgrpeterbyon.org 의 알림.기별.시문에서 퍼온 글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 240 0 |
<1783년 11월 18일, 순교자 이승훈 진사의 북경파견 제 236주년(1783~2019)을 기념하며
한국 103위 성인 미사 봉헌 중에 변기영 몬시뇰의 강론 중 황사영 백서 주요 발췌 요지>
순교자 이승훈 진사가 북경 성당으로 출발하던 날이 있기까지! 순교자 황사영 백서 중에서.
李承薰, 李檗大奇之, 檗曰, 北京有天主堂, 天主堂 有西洋西士傳敎者, 求信經一部, 幷請領洗, 必勿空還,,,
<,,,이승훈 이벽대기지 벽왈 북경유천주당 천주당유서양서사 전교자 구신경일부 병청영세 필물공환,,,>
主恩之於東國, 可謂廻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 而主特擧斯道, 而親舁之繼,
주은지어동국, 가위회월심상, 초미상유전교자래, 이주특거사도, 이친여지계,
又以授聖事者預之, 種種特恩指不勝屈, 罪人,,,等
우이수성사자예지, 종종특은지불승굴,,, 죄인 등
以此自慰而慰人, 忍死延生,,,
이차자위이위인, 인사연생,,,
주해:
<한국천주교회는 전 세계 교회 역사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선교사 없이 시작되었음을 처음으로 거론한
1801년 황사영 백서 속의 역사적인 명언!>
① 可謂廻越尋常,
(우리나라의 복음화는) 세계 여러 다른 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같은 예를 찾아볼 수 있는 수준을 초월한다고 가히 말할 수 있는 특은입니다.
② 初未嘗有傳敎者來
(우리나라의 복음화는) 일찌기 처음부터 선교사가 전혀 들어오기 전에
③ 主特擧斯道
주님께서 이 眞理의 道를 들어 높여 알게 하셨고(천주교의 도리를 다른 종교들 교리보다 더 높이 들어 보이시고,
④ 而親舁之繼
천주님 친히 몸소 친히 두 손으로 계속 이 眞理의 道를 붙들어 주시며 인도해주셨고(마치 교제상이나 절구를 양손으로 마주 잡아주듯),
⑤ 又以授聖事者預之
더욱이 성사은총을 베풀어줄 사람까지 미리 마련해 주셨으니, (*북경교구 사제나 북경 본당신부는 이승훈 진사에게 세례성사 주기를 거부하는 상태로, 북경성당에 손님 신부로서 식객으로 있던. 교황 명으로임시 해산조치되었던 예수회의 프랑스 국적 요셉 드 그라몽 신부를 두고 말함).
⑥ 種種特恩指不勝屈
그 여러 가지 특은을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면서 세어보기에는 손가락 수가 모자랄 정도입니다.,,,,,,
⑦ ,,,忍死延生,,,,
이제 혹독한 박해 속에서, 죽어가는 고통을 참고 견디는 순간으로 삶을 연장하고 있습니다. <黃嗣永 進士 帛書 1801년 10월 29일, 배론에서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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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일은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조선교구설정 교서가 발표된 바티칸에서,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께서는, 교서, "Ex debito pastoralis officii superna Dei,,,"를 발표하여,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갈망하던 사제들이 조선에 입국하여 신자들을 돌보는 조선교구(DIAECESIS COREAE, 당시 대목구)가 설정되었습니다<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조선교구 설정 교서>.
Gregorius XVI세 교황은 지금의 로마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전신, 포교성(Propaganda Fidei) 차관 대주교 시절부터, 조선 교우들이 보내는 편지를 읽고, 선교사가 한 명도 들어가지 않은 아시아 동쪽 끝 먼 나라에서 신자들이 교회를 세우고, 사제를 보내달라고 하므로,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하며, 몇 년 후, 교황이 되자마자, 적지 않은 반대와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선교구를 설정합니다.
[하느님의 至上命令에 대하여 교회가 사목적 직무수행을 소홀히 한 빚을 지고 있는, 직무유기의 부채 덩이를 實感하는 마음으로(Ex debito pastoralis officii superna Dei,,,)],,,)]라는 표현으로 시작한 교황 교서는, 교회가 그 동안 조선 신자들이 성직자 없이,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피를 뿌리며 신앙을 지키고, 목숨을 바치며 살아남아서 간청하는 조선 신도들이 급박한 위기상황에서 구조요청(perpendere necessitas)하는 바를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조선교회 신자들의 애절한 청원(Nos perpensis Coreanorum christianorum necessitatibus,,)을 깊이 숙고한 나머지, 북경교구에서 독립시켜, 조선교구(당시는 대목구)를 설정한다는 교서의 내용은, 우리나라 평신도들의 간청에 의해서 교구를 설정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전 세계 모든 교구 설정은 기존 교구장 주교의 요청이나, 동의로 이루어지므로, 조선교구는 평신도들 간청의 꾸준한 노력으로 설정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프란치스코 현교황님의 Memory Guard 말씀을 상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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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103위 성인 축일 미사 강론 중에 하신 말씀
- 1984년 9월 14일, 로마 사도 성베드로대성당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실상 진리 탐구에 충실한 한국의 저 평신도들 - 즉, 한국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모임인 한 단체는- 중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당시 북경천주교회와의 접촉을 과감히 시도하였고, 특히 새로운 교리서적들을 읽고, 그들 스스로가 알기 시작한 생소한 신앙에 관하여, 자기들을 밝혀줄 수 있을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한국의 남녀 이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fondatori)」이라고 해야 하며,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 없이 - 비록 2명의 중국인 사제들이 잠시 있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 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1836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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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주교님들과의 첫 만남에서 하신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말씀 중에.
서울,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강당에서. 2014년 8월 14일, 목요일
,,,,,기억의 지킴이; 여러분은 순교자들의 후손이고, 그리스도 신앙을 영웅적으로 증언한 그 증거의 상속자들입니다. 또한 평신도들에게서 시작되어 여러 세대에 걸친 그들의 충실성과 끊임없는 노고로 크게 자라난, 매우 비범한 전통의 상속자들입니다.
그들은 성직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평신도였고, 그들 스스로 개척해 나갔습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가 하느님의 말씀과 직접 만나 시작되었다는 것은 뜻이 깊습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에는 아름다움과 진실성이 있어서, 복음과 복음의 요구, 곧 회개, 내적 쇄신, 사랑의 삶에 대한 요구에 이벽과 (한국 천주교회 신앙의) 첫 세대의 양반 원로들은 감동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바로 그 메시지에, 그 순수함에, 거울을 보듯이 자신을 비추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한국 땅에 뿌려진 복음의 비옥함과 여러분의 신앙 선조들이 물려준 위대한 유산은, 오늘날 활기찬 본당 사목구와 교회 단체들의 번창에서, 탄탄한 교리교육 과정에서, 젊은이들과 가톨릭 학교, 신학교와 대학교에 대한 사목적 관심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국가의 정신적 문화적 생활에 대한 역할과 선교에 관한 힘찬 열정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선교지였던 한국은 이제 선교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보편 교회는 여러분이 세계에 파견한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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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사도좌를 방문한(Ad Limina)
한국 주교들에게 하신 연설문 중에서
<2015. 03. 12. 바티칸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한국 교회의 태동기에 내려 주신 셀 수 없는 은총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러한 하느님의 은사에 대한 충실한 응답에도 감사하였습니다.
한국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교회의 성사생활로 온전히 나타내기 전부터 이미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이루어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계급과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예수님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며 주님의 첫 제자들처럼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습니다(사도 4,32 참조).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들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미사 강론, 2014.8.16.).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궁극적인 행동으로 완성되어 그들의 피가 교회 못자리의 물이 되었습니다.
<2019. 11. 18. 곡수리 공소 성당에서 오전 10시 30분 103위 한국 순교성인
기념 미사 중에 변기영 몬시뇰의 강론 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