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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대란 속에서 서울 도시 본당신자들의 산골 공소 단체순례 - 왜정말년 갖 결혼한 형님대신 입대하러가던 양병묵 신학생 이야기!

글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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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공소 신자들의 신앙심에서나 볼 수 있었던 소박하고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양 루카 소년의 열열한 사제 성소와 형제애를 보여주는 1945년 왜정 말년의 오산수 공소 신자들의 애타던 기도와 8월 15일 성모 몽소 승천 대축일에 성모님께서 베푸신 2차 세계대전에서의 연합군 승리와 일본의 패망으로 조선이 해방을 맞는 기적에 감사를 드리며,,,!!! -변기영 몬시뇰


 


코로나 대란 속에서도, 서울 도시 본당신자들의 산골 공소 단체순례(2021.09.10.)

 - 곡수리성당 에서 미사참례 -

 

서울 도시 본당신자들의 산골 공소 단체순례(2021.09.10. 오전 10시. - 곡수리성당에서 미사 봉헌 -)

공소는 본당들의 어머니요, 교구들의 할머니입니다. 박해시대에는 동서고금 모든 본당이나 교구청은 텅텅 비어 신앙인들의 말소리와 기도소리, 숨결이 사라졌어도, 공소들은 살아서, 사라진 본당들과 교구청들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는 거룩한 음성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1950년 6.25.사변 때, 북한 공산당 인민군들이 점령하여 차지하고 있던 서울에서 가장 크게 번화하였던 명동 대성당은 텅 비어 주야로 적막강산이었듯이 !! 


그러나 심산궁곡의 산골 공소들은 살아서 움직였습니다. 그 해 7월 초부터 8월과 9월에 명동 대성당과 혜화동 큰 성당과 대신학교는, 심지어 대신학교 운동장까지도 공산군들의 적기가가 울려퍼지고 있을 뿐이었으나, 명동 주교관과 사제관에 머물던 장금구 신부님과 윤공희 새 신부님(현재 광주대교구 은퇴교구장 대주교님), 혜화동 성신대학의 최민순 신부님, 시내 본당의 보좌(?)로 있던 김창린 신부님과 이계항 신부님, 등은 전주교구와 원주교구(?) 몇몇 대신학생들과 함께,


현재의 하남시본당 구산 공소에 가서 머물면서 낮에는 콩밭에 나가서 누어서 피신하고, 밤에는 교우들이 갖다주는 깡보리 밥과 열무김치로 시장끼를 채웠으며, 한 밤중에는 회장내 사랑방에 몰래 모여서 들창문을 이불로 가리고, 젊은 이들이 동네 어구부터 골목마다 보초를 서서 망을 보면서, 촛불아래서 미사를 드렸답니다.


용인군 포곡면과 모현면의 오산수 공소(일명 소울이 마을, 우명동을 포함하여, 현재의 서울대교구 교회묘지가 있는 마을)에는 수원 북수동 본당 보좌로 임명된지 두서너 달밖에 안된 고 최석우 신부님이 불시에 피난하여 와서 산골 공소 오산수 공소 회장 댁 사랑방에 머물면서 지내었답니다.


북수동 본당 보좌 신부였던 최석우 신부님은 사제 지망 대신학생이었던 그 곳 산골 마을 소울이(당시 교우들 5세대 내외가 화전밭하며 살던 곳) 양병묵 루카 신학생을 시켜 혜화동 대신학교를 가서 보고 오게 할 정도로 !!


잡히면 죽어야만 하는 상황에서도, 신학교 입학이 허가되고 확정되었던 소울이 마을의 양병묵 신학생은 3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공산당원들의 눈을 피해가며, 걸어서 굶어가면서 천호동으로 해서, 끊어진 일차선 광진교 다리 아래 노젓는 작은 배를 사정사정하여 얻어타고 건너가 낙산으로 해서 공산당 인민군들이 식사하러 간 사이에 내려가서 대신학교 성당까지 몰래 들어가서 제단 뒤와 제의방에 모셨던 순교복자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를 참배하고 무사히 오산수 공소 소울이 마을로 돌아와 걱정하며 눈이 빠지게 기다리시던 최신부님께 보고를 드렸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신학생 때, 젊은 시절의 복음처럼 들렸습니다.


본당과 교구청과 대신학교는 텅비어 기도소리가 그쳐도, 본당의 어머니요, 교구청의 할머니 같은 공소와 공소의 신자 마을들과 신자 가정들만은 살아서, 숨소리조차도 사라진 본당과 교구청과 신학교를 기도하며 둘러보는, 살아있는 신앙의 단체입니다.

- Msgr. Byon


코로나 대란 속에서도, 서울 도시 본당신자들의 산골 공소 단체순례(2021.09.10.)

 - 곡수리성당 에서 미사참례 -


코로나 대란 속에서도, 서울 도시 본당신자들의 산골 공소 단체순례(2021.09.10 - 곡수리성당 미사참례 -)


코로나 대란 속에서도, 서울 도시 본당신자들의 산골 공소 단체순례(2021.09.10 - 곡수리성당 미사참례 -)


코로나 대란 속에서도, 서울 도시 본당신자들의 산골 공소 단체순례(2021.09.10 - 곡수리성당 미사참례 -)


코로나 대란 속에서도, 서울 도시 본당신자들의 산골 공소 단체순례(2021.09.10 - 곡수리성당 미사참례 -)


코로나 대란 속에서도, 서울 도시 본당신자들의 산골 공소 단체순례(2021.09.10 - 곡수리성당 미사참례 -)


코로나 대란 속에서도, 서울 도시 본당신자들의 산골 공소 단체순례(2021.09.10 - 곡수리성당 미사참례 -)


코로나 대란속에서도, 서울 도시 본당신자들의 산골 공소 단체순례(2021.09.10 - 곡수리성당 미사참례 -)


코로나 대란 속에서도, 서울 도시 본당신자들의 산골 공소 단체순례(2021.09.10).- 곡수리성당 미사참례-


코로나 대란속에서도, 서울 도시 본당신자들의 산골 공소 단체순례(2021.09.10 - 곡수리성당 미사참례 -


코로나 대란속에서도, 서울 도시 본당신자들의 산골 공소 단체순례(2021.09.10 - 곡수리성당 미사참례 -)


코로나 대란속에서도, 서울 도시 본당신자들의 산골 공소 단체순례- 곡수리성당 미사참례 (2021.09.10) - 

미사 후 순례 길을 다시 계속하여 떠나기 전에, [외상 커피 그늘막]에서 목을 축이는 신자들.


코로나 대란속에서도, 서울 도시 본당신자들의 산골 공소 단체순례(2021.09.10 - 곡수리성당 미사참례 -)


코로나 대란속에서도, 

서울 도시 본당신자들의 산골 공소 단체순례

(2021.09.10. 오전 9시. - 곡수리성당에서 미사 봉헌 -)

 

공소는 본당들의 어머니요, 교구들의 할머니입니다. 박해시대에는 동서양의 모든 본당이나 교구청은 텅텅 비어 신앙인들의 말소리와 기도소리, 숨결이 사라졌어도, 공소들은 살아서, 박해로 사라져가던 본당들과 교구청들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는 거룩한 음성이 그치지 않았던 한국 천주교회 신앙의 고향이었습니다. 지금은 고물상의 창고에서 먼지로 된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는, 아무 짝에도 별로 쓸모가 없도록, 8순 고개를 넘기며 다 낡아빠진 늙은 사제가, 그래도 겨우 미사라도 바치며 지키고 있지만, 공소는 난국의 본당과 교구청과 신학교를 보살피는 신앙의 보금자리였습니다.    

 

지나간 1950년 6.25.사변 때만 하더라도,북한 공산당 인민군들이 점령하여 차지하고 있던 서울에서, 한국천주교회의 얼굴이오, 심장과 같이, 가장 크게 번화하였던 명동 대성당은 텅 비어 주야로 적막강산이었듯이 !! 

 

그러나 심산궁곡의 산골 공소들은 살아서 움직였습니다. 그 해 7월 초부터 8월과 9월에 명동 대성당과 혜화동 큰 성당과 대신학교는, 심지어 대신학교 운동장까지도 공산군들의 적기가가 울려퍼지고 있을 뿐이었으나, 명동 주교관과 사제관에 머물던 장금구 신부님과 윤공희 새 신부님(현재 광주대교구 은퇴교구장 대주교님), 혜화동 성신대학의 최민순 신부님, 그리고 시내 본당 보좌신부들이었던 김창린 신부님과 이계항 신부님, 등은 전주교구와 원주의(?) 몇몇 대신학생들과 함께 구산 공소신자들의 기도와 희생과 보호를 받으며 피난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현재의 하남시 본당 관활이었던 구산 공소에 가서 머물면서 낮에는 콩밭에 나가서 누어서 피신하고, 밤에는 교우들이 갖다주는 깡보리 밥과 열무김치로 시장끼를 채웠으며, 한 밤중에는 회장내 사랑방에 몰래 모여서 들창문을 이불로 가리고, 젊은 이들이 동네 어구부터 골목마다 보초를 서서 망을 보면서, 촛불아래서 미사를 드렸답니다. 

 

서울 시내에서 좀 떨어진 구산 마을 공소는 일찌기 1801년 신유년 박해로 정약종 아오스딩 성인이 순교하신 후 어머니와 누이들과 함께 온 가족이 모두 거지가 되어 다니던 7세의 어린 소년 정하상 성인과 훗날의 중국인 주문모 야고버 신부님,여항덕 알렉시오 신부님, 최초의 프랑스 선교사 솨스탕 정신부님, 마카오로 떠나기 전, 15세의 김대건 소년,등이 성 김성우 안당의 형제들 집에서 은거하였던 곳으로, 후에 이 구산 공소에서는 많은 사제들과 수녀들이 배출되었으니, 수원교구 고 김은식 신부님과 현재 박건순 신부님, 고태훈 신부님, 김학렬님과 김학무 신부님 형제, 윤민재 신부님, 등과 구산공소 출신으로 인천교구 강 신부님과 박신부님등,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성직자들이 가난한 공소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또한, 용인군 포곡면과 모현면 지역의 심산궁곡에 위치한 오산수(吳山水) 공소(일명, '소울이' 마을, 우명동(牛鳴洞)을 포함하여, 현재의 서울대교구 교회묘지가 있는 마을)에는 6.25 당시 수원 북수동 본당 보좌로 임명된지 두서너 달 밖에 안된 고 최석우 신부님이 서울이 북한 공산군들에게 개전 3일만에 함락된 직후, 곧 수원도 점령되리라는 소식에, 불시에 산골 공소 모현면 오산수 공소 회장 댁 사랑방에 피난하여 와서 머물면서 지내었는데, 이 오산수 공소에서도 일찌기 구한국 말과 왜정 초기 그 어렵던 시기에, 북만주 지역에까지 선교사로 파견되었던 유신부님을 비롯하여 현재 수원교구의 이상영 신부님, 등이 배출된 공소입니다.

 

북수동 본당 보좌 신부였던 최석우 신부님은 사제 지망 정식 대신학생이었던 그 곳 산골 마을 소울이(당시 교우들 5세대 내외가 화전밭 하며 살던 곳) 출신의 양병묵 루카 신학생을 시켜, 화염과 포성이 험악한 그 살벌한 전란 중에도 혜화동 대신학교를 가서 보고 오게 할 정도로, 믿음직한 청소년 사제 지망생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잡히면 죽어야만 하는 상황에서도, 신학교 입학이 허가되고 확정되어 재학 중에 모두 귀가조치 되었던 소울이 마을의 양병묵 신학생은 3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공산당원들의 눈을 피해가며, 걸어서 굶어가면서 천호동으로 해서, 끊어진 일차선 광진교 다리 아래 노젓는 작은 배를 부리는 농부한테 사정사정 하여 배를 함께 얻어타고 광진교 나루를 건너가서, 혜화동 낙산으로까지 숨어들어 올라가서, 공산당 인민군들이 식사하러 간 사이에 내려가서 대신학교 성당까지 몰래 들어가, 제단 뒤와 제의방에 모셨던 순교복자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를 참배하고,무사히 오산수 공소 소울이 마을로 돌아와, 안절부절하며 걱정하며 눈이 빠지게 기다리시던 최석우 신부님께 보고를 드렸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신학생 때 직접 몇차례나 들은, 우리에게는 젊은 시절의 복음처럼 들려, 공포와 고통과 위험을 잊게하던 힘을 주는 이야기였습니다.

 

본당과 교구청과 대신학교는 텅비어 기도소리가 그쳤어도, 본당의 어머니요, 교구청의 할머니 같은 공소와 공소의 신자 마을들과 신자 가정들만은 살아서 활동하며, 혹독한 전란의 현장 박해 중에서, 숨소리조차도 사라진 본당과 교구청과 신학교를, 기도하며 둘러보는, 살아있는 신앙인들의 발걸음이였습니다.

Msgr. Byon -

 

추가 참고 논고: 

 

故 양병묵 신부님 8순 전날 방문기 기고문.

 

양병묵 신부님은 형님대신 軍에 입대했던 한국판 聖 꼴베 신부 !?

 

양신부님은 본래 오산수 소우리(牛鳴洞) 출신입니다. 용인 명동 교회 묘지 입구 좌편 등너머 산골로,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 산골이라서, 해가 오전 11시 경에 떠서, 오후 3시 경에 진다는 심산궁곡입니다.

변기영 몬시뇰께서 팔순하루 전날에 양병묵 은퇴신부님 예방(수원교구, 나자로마을 장주기요셉관에 계신 은퇴선배신부님,2010.03.17)

 

1945년 초여름(아마 6월 중순경?), 대동아 전쟁 말기, 수원 북수동 본당 관할 공소였던 양병묵 소년은 본당 신부님의 정식 허락으로 서울 신학교 가기 직전, 신부님이 사제되기를 지망한 신학생 때, 그 형님은 결혼한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아마 2달 미만으로 그 해 봄 판공 때 혼배성사을 받고!?), 당시 왜정 말년에 軍에 입대하라는 소집 영장을 아랫 마을 구장한테서 받자, 동생으로서, 15세의 양루까 소년 학생은 체격이 이미 壯丁이었고, 두 형제가 마치 쌍둥이처럼 체격도, 얼굴도, 목소리도, 모두 너무 닮아 똑 같아서, 어려서부터 이웃과 가족들도 부를 때 종종 혼동할 정도였으므로, 형님대신 자신이 軍에 입대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읍니다, 

 

집안에서는 반대로 난리가 났었으나 이를 무릎쓰고, 다른 청년들과 함께 모여, 아랫 마을 구장님 마당에 모여서, 목청이 떨어지도록, “덴노헤이까 반사이(天皇陛下萬歲)!를 부르면서, 모현면 소재지 돌자개에 집합하여, 면 창고에서 자면서 간단한 훈련을 받으며 며칠 후, 면 단위 청년들은 모두 용인으로 가서, 군청 창고에서 몇 주일을 머물면서 간단한 제식훈련을 받고, 다시 수원으로 행군하여 가면서, 역시,"대일본 만세"와 "천황폐하 만세"를 목이 터져라고 함께 부르면서, 수원에서는 달포가 넘도록 훈련과 사전 교육을 받고나서, 다시 출정을 위해 평택 항으로 싱가폴로 가는 배를 타러가서, 타고 갈 배를 기다리며 8월 초순까지 훈련을 받으며 대기하다가, 마침내 8월 15일로 출발 날짜가 확정되고, 대만이나 필립핀으로 떠나는 배가 준비되어, 총알받이로 떠나려던 참이었읍니다. 

 

고향 땅 조선의 흙 한 줌씩을 싸서 주머니나 허리춤에 차고 지니고 다니며8월 15일 오후배를 오르기로 되었으나, 이날 정오 12시에, 일본천황의 무조건 항복선언이 라디오로 발표되는 바람에, 출정 출국이 무기 연기되고, 며칠 후, 기쁨에 넘쳐, 각자 자기 마을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1957년 성탄 때(?) 신학교 공부를 마치고, 훌륭한 사제가 되었읍니다. <몇 차례 들었던 양신부님의 말씀을 강론 때만 했던 이야기를 적어서, 이미 수차례, 양신부님 축일과 금경축 때 천진암성지 홈페지와 수원교구 사제 계시판에 변기영 신부가 올렸던 글입니다.- Msgr. Byon->

변기영 몬시뇰께서 팔순하루 전날에 양병묵 은퇴신부님 예방(수원교구, 나자로마을 장주기요셉관에 계신 은퇴선배신부님, 2010.03.17)

  

사실, 미국의 나가사끼 원자폭탄 투하 때문이 아니라, 소우리 산골 교우들과 양신부님 가족들, 특히 그 형님과 형수와 온 가정이 너무나 열심히 묵주의 기도를 바쳐서, 마침내 그 해 8월 15일, 성모승천 축일, 뜻밖에도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이 되어, 배에 오르기 직전 양신부님은 고향에 돌아와 마침내 훌륭한 사제가 되시어, 엄청난 일들을 하셨읍니다. 

 

1950년 6월 25일, 주일날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일제히 38선을 넘어,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자, 혜화동 대신학교와 명동 교구청과 대성당의 모든 신부들과 신학생들은 황급히 피신하기 시작하였으니, 당시 공산군들은 신부들을 잡히는 대로 거의 다 처형하였습니다(사제 82명, 주교 5명, 수년 35명, 신학생 수사 29명, 도합 150여명이 처형되었읍니다). 

1950년 6월 25일 당시 수원 북수동 본당 보좌신부로 있던 故 최석우 신부님은 급한대로, 우선 오산수 소우리 양신부님 동네로 피난을 하였는데, 모두들 명동 교구청과 혜화동 신학교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며,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양병묵 신학생은 용감하게 우선 혜화동 신학교에 갔다 오기로 결심하고, 잡히면 죽는 처지에서, 콩밭 고랑을 누비며, 혜화동 신학교에까지 가서, 낙산 마루에 숨어서, 내려다보며, 운동장에서 훈련하던 인민군들이 사라진 틈에, 몰래 신학교 성당에까지 들어가서, 기도하고 나와서,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니,,, 참 기가 맥히는 일이죠.

 

 

신학교가 밀양으로, 부산으로, 서울로, 이동될 때도, 피난 길에서의 고통은 아주 심하였는데, 그래도 지금 건장한 老益壯으로서, 오늘이 8순이시라기에, 어제 오후 잠간 들려, 인사를 드리며 자세히 뵈오니, 아직도 젊으셨을 때처럼, 紅顔은 不變이셨습니다. 부디, 수원교구의 산 역사로서 오래오래 건강히 더욱 장수하시기를 빕니다. Msgr. Byon

 

수원교구 전 상서국장, 북수동본당 주임, 소화국민학교장, 등 역임한 이계항 은퇴신부님 근황. 2010. 3. 17. 안양 라자로 마을, 장주기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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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곡수 성당 공소 미사 시간 

       추석절 한가위 미사 9월 21일 화요일 오전11시/평일 매일 미사 오전 9시/매 주일 미사 오전 10시(변기영 몬시뇰 집전) 

다만 매월 첫 주일에는 공소 신자들 위한 오후 2시 미사(양평본당 주임 이형동 신부님 집전)

입력 : 2021.09.12 오전 9:2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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