弘益人間 韓民族 精神史의天學初函 福音宣布
2022. 6. 6.Msgr. 卞基榮
서론 : 만유의 만물은 자기 존재 이유와 존재 목적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 않다. 눈은 눈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고, 귀도 귀를 듣기 위함이 아니며, 위장도 위장을 소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自存者만이 자신이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처럼 파리는 파리시민만을 위한, 프랑스 국민만을 위한 파리가 아니고, 세계만민을 위한 파리라는 말들을 하게 된다.
단군 성조의 弘益人間 統治 理念은 3천여 년 간 극동지역의 만민이 태평성대를 이루며 인류 문화를 세계화시키는 치국 통치이념이었다.
국토가 세계에서 가장 넓은 소련과 중공의 공산당 정권이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어, 천문학적 재정과 자칭 천하무적이라는 군사력을 투입하며, 무죄한 인명피해로 전쟁이 그치지 않는 현실을 직시하자.
Missionary와 Mission과, Missa는 동일 어원에서 왔다.
殉敎는 최상의 宣敎다. Martyrium Missionarium est !
순교 없는 선교는 불가하다! Nullum martyrium sine missionario !
존경과 명성과 아쉬움 없는 순교의 길은 없다.
한국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의 어렵고 외로왔던 고달픈 선구자들의 선교의 길-
蔓川公 북경파견과 영세귀국 - 집신 신고 걷던 눈길북경 3천리 길.-
丁夏祥 회장의 김대건 최양업 최과출 사제 양성 - 마카오 가는 2만리 길-
無血의 殉敎는 언제나 어디서나 가능하다. 소화 데레사의 작은 길도 !
참고 문헌:
李承薰, 李檗大奇之, 檗曰, 北京有天主堂, 天主堂 有西洋西士傳敎者, 求信經一部, 幷請領洗, 必勿空還,,,
<,,,이승훈 이벽대기지 벽왈 북경유천주당 천주당유서양서사 전교자 구신경일부 병청영세 필물공환,,,>
1783년 11월 18일, 순교자 이승훈 진사의 북경파견 제 236주년(1783~2019)을 기념하며 한국 103위 성인 미사 봉헌 중에 변기영 몬시뇰의 강론 중 황사영 백서 주요 발췌 요지
순교자 이승훈 진사가 북경 성당으로 출발하던 날이 있기까지!
하느님의 종, 순교자 황사영 帛書 중에서. 黃嗣永 [帛書] 끝에서부터 홍색 표시 22줄~21줄.- 선교사 없이 한국인 평신도들에 의해서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되었음을 최초로 알린 황사영 공의 帛書
[,,,,,主恩之於東國 可謂廻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
而主特擧斯道 而親舁之繼 又以授聖事者預之
種種特恩 指不勝屈, 罪人,,,,,]等
[,,,,,,주은지어동국, 가위회월심상, 초미상유전교자래,
이주특거사도, 이친여지계, 우이수성사자예지,
종종특은 지불승굴, 죄인,,,,,,]
<,,,주님께서 우리나라 동국에 내려주신 은총은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가히 말할 수 있으니, 일찍이 우리 교를 전하는 자들이 오기 전에, 주님께서는 이 도를 특별히 높이 들어 보이시고, 또 친히 계속 마주 붙잡아 주시어, 성사 거행할 자도 미리 마련해주셨으니, 가지가지 베풀어주신 특은들은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손가락으로 꼽아가며 세어볼 수가 없습니다.,,,>- 卞基榮 몬시뇰 譯述 -
主恩之於東國, 可謂廻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 而主特擧斯道, 而親舁之繼,
주은지어동국, 가위회월심상, 초미상유전교자래, 이주특거사도, 이친여지계,
又以授聖事者預之, 種種特恩指不勝屈,,, 罪人,,,等
우이수성사자예지, 종종특은지불승굴,,, 죄인,,, 등
以此自慰而慰人, 忍死延生,,,
이차자위이위인, 인사연생,,,
주해:
① 可謂廻越尋常,
우리나라의 복음화는 세계 여러 다른 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같은 예를 찾아볼 수 있는 수준을 초월한다고 가히 말할 수 있는 특은입니다.
② 初未嘗有傳敎者來
우리나라의 복음화는 일찍이 처음부터 선교사가 오기 들어오기 전에,
③ 主特擧斯道
주님께서 이 眞理의 道를 들어 높여 알게 하셨고(천주교의 도리를 다른 종교들 교리보다 더 높이 들어 보이시고),
④ 而親舁之繼
천주님 친히 몸소 두 손으로 친히 계속 이 眞理의 道를 붙들어 주시며
인도해주셨고(마치 교제상이나 절구를 양손으로 마주 잡아주듯),
⑤ 又以授聖事者預之
더욱이 성사은총을 베풀어줄 사람까지도 미리 마련해 주셨으니, (*북경교구 사제나 북경 본당신부는 이승훈 진사에게 세례성사 주기를 거부하는 상태로, 교황 명으로 임시 해산 조치되었던 북경성당에 손님 신부, 식객으로 있던. 예수회의 프랑스 국적 요셉 드 그라몽 신부를 두고 말함).
⑥ 種種特恩指不勝屈
그 여러 가지 특은을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면서 세어보기에는 손가락 수가 모자랄 정도입니다.,,,,,,
⑦ ,,,忍死延生,,,,
이제 혹독한 박해 속에서, 죽어가는 고통을 참고 견디는 순간순간으로
저희들은 목숨을 이어가며 삶을 연장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黃嗣永 進士 帛書 1801년 10월 29일, 배론에서 저술>
天眞菴, 이곳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주역 이벽 성조께서, 1770년부터 1784년까지 학업과 修道에 전념하던, [李檗 聖祖의 讀書處]와 講學堂, 天學道場이 있던 곳으로, 1777년경부터는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권상학, 김원성, 이총억, 등 젊은 선비들이 모여 함께 天學을 연구 실천하였으며, 때로는 권철신 같은 당시 저명한 학자들도 참석하는, 천주교 교리연구와 실천의 講學會도 종종 열어서, 학문적 수준에 있던 天學(天主敎)을 종교적 신앙차원으로 승화시켜, 천주교 기도와, 십계명 준수를 위해 음력으로 주일을 제정하고 지키는, 천주교 신앙수련의 道場이 있던 곳입니다.
이벽 성조께서는 천진암 天學道場에서 젊은 선비들에게, 新敎之說, 즉 天主敎를 가르치고, 天文學, 地理學, 數學, 曆學, 幾何原本 같은 新學問도 가르쳐, 여기서 이벽 성조께 공부한 丁若鏞 선생은 훗날 正祖 임금을 도와 우리나라 문예부흥과 근대화를 위하여 크게 공헌하였으니, 이곳은 정약용 선생이 주로 10세 前後부터 20세 前後까지 자주 와서 머물고, 늙어서는 65세 때에도, 찾아와 며칠씩 머물던, 丁若鏞선생의 母校이기도 합니다.
젊은 선비들이 모여서, 이벽 성조를 웃어른으로 모시자(爲上), 이벽 성조께서는 門下生들에게 聖敎要旨를 지어서 받아쓰게 하셨고, 선비들은 天學 총림(叢林), 즉 천주교 신앙단체를 결성하였으며, 1783년 말에는 새로 改宗하여 入敎한 선비들과 합심하여, 북경 천주교회로 이승훈 진사를 자신의 대리자로 파견하였으며, 1784년 봄 2월에 영세하고 귀국하자, 그 해 음력 4월 중순 즉시 서울 수표동 이벽 성조 자택으로 본부를 옮겨, 傳敎 集會所를 차렸으니, 천진암은 바로 한국천주교회 신앙운동의 發祥地이며, 本據地요, 한국천주교회의 誕生地였습니다.
1785년 乙巳年 봄에는 수표동에서 明禮坊 김범우 통역관의 집으로 옮겨, 더욱 더 천주교를 전파하자, 한국 최초의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어, 1885년 말까지 100년간의 잔혹한 박해 중에도, 천진암에서 갓 태어나 서울로 올라간 나이어린 한국천주교회는 피를 뿌리며 자랐으며, 목숨을 바치며 살아 왔으니, 여기서 출발한 젊은 선비들의 신앙단체가 오늘의 한국천주교회로 성장하는 데 있어, 천진암은 敎會 創立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천진암 성지는 한국에서 천주교 신앙의 움이 트고, 천주교회 신앙생활의 싹이 돋은, 신앙의 고향이며, 사람과 장소와 思想에 있어, 儒 ․ 佛 ․ 天이 합류하여 새 宗敎史가 이루어진, 우리겨레 정신문화의 특징이고,우리 나라의 자랑이며, 한국천주교회의 뿌리요, 얼굴입니다.
<韓國天主敎會發祥地天眞菴聖地委員會>
天眞菴記
(端午日陪二兄游). 李檗讀書猶有處, 苑公棲跡杳難尋, 風流文采須靈境, 半日行杯半日吟(副護軍丁若鏞, 1797년)
李檗之最先溺邪一世之也共知也(闢衛編, 李基慶, 1801)
被李檗者最是邪黨中巨魁諸賊之招狼…. 若論邪黨之渠魁則李檗….
(朝鮮王朝實錄, 1801)
昔在己亥冬, 講學于天眞菴, 走魚寺雪中, 李檗夜至, 張燭談經…. 權哲身嘗於冬月, 寓居走魚寺, 講學會者 金源星, 權相學, 李寵億, 等 數人, 鹿菴自授規程, 令晨起掬氷泉盥潄, 誦夙夜箴, 日出誦敬齊箴, 正午誦四勿箴, 日入誦西銘, 莊嚴恪恭不失規度, 當此時, 李承薰亦淬礪自强…. 嘗從李檗…. 李檗首宣西敎, 日身熱心從檗
(墓誌銘, 丁若鏞, 1816)
天眞菴, 余蓋三十年重到也, 石徑細如線, 昔我童時游, 豪士昔講讀, 暗泉劣一線, 重來愴客心, 入山非喜佛, 寅緣慙講德, 書帙見隨陰, 禪燈廢少林, 尙書此燒鍊, 寺破無舊觀, 芬芳旣沈歇, 禪房無處舊人求, 前躅凄迷不可求, 樓前寮舍半墟丘, 粥鼓斜陽念舊游, 三十年來重到客, 猶然苦海一孤舟, 我欲來此住, 無人示方便
(天眞消搖集, 丁若鏞, 1827)
戊戌, 己亥, 曠菴 李檗周遊天下, 一到廣州, 鴛鴦山寺(天眞菴)隱居, 丁氏李氏 賢友賢士勉學, 天文, 地理, 醫學, 曆學, 數學, 幾何, 新敎之說, 等, 奇學多博, 道友衆徒如叢林, 聖敎要旨下筆(李檗傳, 丁學術, 1830)
天眞山 寺之遊….(丁學淵, 1850), 等.
Il(Ni Pieki) embrassa la religion Chretienne et de concert avec quelques autres prosélytes il envoya en 1783 à Peking un autre délégué égalemant nommé Y(Ni Seung Hun-i) mais d'une autre famille, pour prendre de plus amples informations sur cette religion sainte. Y(Ni Seung Hun-i) s'adressa aux Missres. frainçais et en fevrier 1784 fut baptisé, sous le nom de Pierre(P. Maubant, 1838)…."
C'était en l'année 1777(tieng iou). Le fameux docteur Kouen T'siel sin-i, accompagné de Tieng Jak Tsien-i et plusieurs autres nobles studieux et amateurs de la science, se rendit dans une pagode pour s'y livrer ensemble à des études profondes…. Une arrivée si étrange répandit la frayeur parmi les habitants de cet édifice isolé et perdu dans le sein des montagnes….“L'histoire proprement dité commence aux conférences de Ni Pieki. Les grandes conférences de Ni Pieki
(A. Daveluy 1850).”
In illo tempore, non nulli Doctores Coreani secesseerant in solitudinem…. inter eos eminebant Ni-Tek-Tso, cognominatus Pieki, Kuen-Tsiel-Sin-i, Tieng-Jak-Tsien et Tieng Jak Iong…. ut statim suos mores divinis praeceptis conformare decreverint(1770)(Compend. Histr. Pulo-Pinang, 1881).
In 1720…. The Korean Ambassador in Peking…. For fifty years(1770) after their importation of the books…. Then they were studied and debated by a small coterie of noble Koreans…. For thirtheen years he pondered over them…. At last, in 1783, Pieki…. to go on in Peking…. to confer with the priests…. and learn the ceremonies of their religion (Joseph H. Longford, 1911)…. et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