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天主敎會創立先祖 洗者 若翰 曠菴 李檗先生 墓 移葬秘史
韓國天主敎會 創立主役 李檗 先生 墓 移葬準備委員會
總務 卞 基 榮 神父 記述 - 1997. 6. 15.~1999. 9. 26.
1. 한국천주교회 창립자 광암 이 벽 성조의 묘를 찾아서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로 이장하여 모신 지도 벌써 18년이라는 그리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이 일은 나에게 지나간 25년간의 사제생활을 통하여 가장 감격스러웠던 사건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벽성조의 묘를 찾고 또 이장하여 모시던 일은 내가 천진암 성지개발에 전적으로 매달리게 되는 출발의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하였다.
2. 나는 그 동안 비교적 남달리 많은 충돌을 무릅쓰고 여러 가지 일에 관여하게 되었었다. 특히 한국천주교회 창립200주년 기념을 위하여 1980년 5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5년간은 주교회의에 가서 200주년 기념 5개년계획 입안을 비롯하여 103위 시성추진에 주력하면서,동시에 한편으로는 천진암 성지 개발, 특히 100년계획 대성당 건립 착수에 따른 힘에 겨운 일들을 교회 소유의 땅 한평없는 황무지에서 추진하느라 많은 충돌을 피할 수가 없었다.
3. 지금 되돌아다보면 사제로서 사실 다시 생각만 해도 겁이 나는 부동산 확보와 수년간에 걸친 대규모 토목공사 추진과 지휘 등, 質과 量에 있어 내 역량을 초과하는 엄청난 일들을 피할 수 없었던 나로서는 이제 다시 지나간 기억들을 더듬어가며, 일기장에 한두 줄씩 적어놓았던 것을 뒤적거리면서, 내가 해온 이러한 일들에 관해서 앞으로 혹시라도 관심을 갖는 後學들이 있을까하여,이를 미리 내다보면서, 後輩들을 위하여 이 자료집 머리말에 몇 가지씩 생각나는 대로 밝히고자 한다.
4. 그리고 앞으로 이 글을 읽을 後學들이 내게 대한 오해나 잘못된 先入觀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부득이 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들어가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결코 내 자신에 대한 유치한 제 자랑이나 혹은 다른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은 전혀 아니며, 다만 필요하다고 여기는 단순한 생각으로 이를 쓰고자 할 뿐이다. 물론 이를 읽어가다가보면 주님의 손길이 하시는 일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이나 의도와 다를 수도 있고, 또 주님께는 그렇게 하실 능력과 자유와 권리가 있으시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서 읽는 이들이 깨닫게 되기도 할 것이다.
5. 이제 내가 지금까지 사제로서 해온 대부분의 일들에 대하여 나는 이렇다 할 특별한 소질도 없으며, 공부한 적도 없고, 전문가도 아니었다는 점을 眞率하게 밝히는 것이 겸손아닌 정직한 자세라고 하겠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전문가들을 제치시고, 왜 지식도 경험도 없는 나를 부르셔서 이러한 일들을 하게 하시는지, 그 섭리에 내 자신이 놀랄 뿐이며, 아마 그 신비의 질문을 수수께끼로 삼아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할 뿐이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學歷이 다르고 實力이 다르며, 經歷이 다르고 能力이 다르며, 地位가 다르고 業績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직업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쓰는 나는 切感하지 않을 수 없다.
6. 본래 나는 歷史에 관한 공부나 성지개발, 또는 聖賢들의 묘를 찾아 移葬하는 일에 대하여 취미도 관심도 지식도 경험도, 또 그러한 일에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전혀 없던 사람이었다. 내가 학창시절에 소질이 있었다면 외국어 분야였고, 대신학생 때 취미를 가지고 공부한 분야는 당시의 神秘神學이었으며, 신부가 된 후 석사학위 과정 3년, 박사학위 과정 5년을 모두 수료하였지만, 과목은 신비신학이었다. 신학생의 신분으로 쓴 논문이나 번역하여 출판한 책들도 聖人傳記라든가 [義人의 영혼 안에 內住하시는 聖三位]에 관한 것 등, 그러한 분야였고, 지도교수 역시 당시 그 분야에 심취해 계시던 국내에서 가장 존경받으시던 최민순 신부님이셨다.
7. 한마디로 나는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과 지금 일하고 있는 이 분야가 내게 선천적인 소질이 있는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다만 이러한 교회의 일들이 내게 닥치므로 이를 외면하지 않고, 천주와 교회를 위하여 닥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였고, 지금도 매일 닥쳐오는 일을 피하지 않고 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또 하지 않을 수도 없지 않은 것이 우리의 처지이다. lfj한 일을 하게하시는 것이 주님의 은총으로 확신하고 있다.
8. 그래서 내가 대신학생 때는 책을 번역하고 글을 쓰는 일에 취미가 있어서, 학생의 신분으로서 이미 여섯권의 책을 내고 있었는데, 당시 옆에서 나를 알고 있던 이들은 장차 내가 글쓰는 학자신부가 될 거라고 여겼었으나, 내 앞에 찾아온 직무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9. 사제가 되자마자, 나는 수원교구청의 주교(윤공희주교)비서 겸 교구 기획관리실장(조원길신부) 보좌로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였던 평신도지도자 교육과 가톨릭쎈타 건립 등의 계획수립과 추진에 불가피하게 관여하게 되었고, 離農人口가 급증하던 당시, 지금 내 기억에 1971년 말을 전후하여 당시 수원교구 신자 45,000여명 중 1년에 8,000여명내외가 離農하여 서울로 移住하고 있었던 때이므로, 나는 불가피하게 농민운동에 뛰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이 일은 교구 내의 일부 선배 신부님들과 교구장님의 시책변경으로 여의치 않게 되었었다.
10. 그래서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석사학위를 받은 이후, 박사과정 공부를 할 겸, 신자 500여명 내외의 당시 시골 본당이었던 신장 성당으로 가게 되었고, 본당 내의 관할구역 안에 있던 구산 김성우 안또니오 순교복자 묘소에 기념 비석 건립과 남한산성 성지 매입 및 천진암 터 확보 등에 손을 대지 않을 수가 없었었으니, 버려지고 있는 성지들을 차마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11. 동시에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기념 준비위원회 초대 사무국장으로 임명받으면서, 역시 신비신학 공부와는 거리가 있는 실제 사목 현장의 기념사업에 약 5년간 매달리게 되었는데, 200주년 기념의 성격과 방향을 설정하고 그 한계를 그어보는 일은 지금 생각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실로 일종의 창의적인 産苦와 함께 적지 않은 반대와 방해를 감수하며 극복해야만 했었다. 마치 새로운 기종(機種) 최신형 대형 비행기를 만들어 이륙시키려는 것과 흡사한 모험이었다.
12. 그런데 이러한 모든 일이 사실 학생 때 내가 즐겨 공부하던 당시 이른 바 神秘神學 분야는 아니었었다. 이처럼 지금도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학창시절부터 3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내가 하고싶어하던 공부도 아니고 좋아하는 일거리가 아님을 솔직히 밝히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내게 닥쳐오는 일이니 피할 수가 없을 뿐이다. 남들은 내가 개발사업이나 대규모 토목공사 등에 소질이나 취미라도 있는 양 느끼는 모양이고, 또 내가 없는 일이나 없어야 할 일을 만들어서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만들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가진 불가피한 일들로 내게 느껴지기 때문에 손을 대게 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내가하는 일을 내가 종아하는 줄 알지만, 내가 좋아한다기보다도 내가 부지런히 할 따름이다.
13. 이 기회에 천주교 성지에 대한 관심과 순교 선조들에 대해서 내가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내력을 간결히 말해 두고자 한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의 이 방면에 관한 내 자질형성에 다소라도 끼친 영향들을 우선 내 자신이 회상해 보고싶기 때문이며,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배경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14. 1957년 9월에 미리내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나는 영세 대부님과 함께 순교 복자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를 참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만 해도 묘소 주변은 잡풀이 수북한 채 신자들의 공동묘지가 정면과 좌우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이미 나이가 벌써 18살이었고 국민학교 졸업장밖에 없던 소년이었으므로, 혹시 내가 천주교 신부가 되도록 김대건 신부님이 천상에서 나를 이끌어 도와주신다면, 신부가 된 후에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를 깨끗하게 갈 가꾸겠다고 마음을 먹고 아주 소박하고 단순한 생각으로 기도를 바쳤던 기억이 난다.
15. 1년 후에 용인군 이동면 천리 경당에서 12월 8일에 견진 성사를 받았고 1959년에는 미리내 성당에 와서 한국말을 배우고 있던 프란치스꼬회의 배유선 신부님(Justin Bellerose)께 우리말을 가르쳐 드리며, 한 두달 동안 머문 적이 있었는데, 틈틈이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를 찾아 같은 기도를 바쳤던 생각이 난다.
16. 수도생활에도 취미가 있던 나는 복자회와 살레시오회를 거쳐 10여년 후에 내가 사제가 되어 수원교구 주교 비서 겸 기획실 보좌로 있을 때 가끔 내 출신 본당인 미리내 공소(그 당시에는 사제가 머물지 않는 공소로 되어 있었음)에 가서 미사를 드렸는데 그때도 같은 생각이었다.
17. 1972년 여름 7월17일, 중복날 용인 본당 신부로 부임해온 후에 당시 총회장이었던 이 재학 회장과 김영길씨 그리고 다른 일부 회장들로부터 문경 가는 연풍 계곡에 좋은 磐石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돌을 성지 미리내 표석으로 쓰도록 가져오는 계획을 세우기로 하였다. 나는 내 자가용 찝차(당시 우리 수원교구에 자가용 승용차를 가지고 있는 신부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90씨씨짜리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었다)와 운전기사, 그리고 지금 기억에 운반비용 60여만원, 남자회장 3명,또 운반 중 검문소 통과를 위하여, 용인경찰서로부터 경찰서장의 협력으로 경찰1명, 이렇게 준비하여 10일이나 걸려서 가져온 것이었다.
18. 처음에는 3일이면 된다고 하였으나, 크레인의 붕대가 부러지고, 와이어줄이 끊어지는 등, 차질이 생겨, 서울에서 크레인이 2번이나 새로 연풍까지 내려가야했기 때문인데, 이회장이 나중에 와서 보고하는 말이, 모두들 자연석 무게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여, 처음에는 2톤짜리로 본 돌이 실상은 13톤이상이나 나가기 때문에 크레인을 5톤짜리, 10톤짜리, 20톤짜리 이렇게 3차례나 바꾸어 들어내느라고 시일이 더 걸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두 개의 돌 중 하나는 미리내 성지에 세웠고, 또 하나는 교구청(화서동 소재 구 교구청) 안마당에 세우게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미린내 성지를 직접 책임맡지도 않은 새파란 젊은 신부가 연풍까지 사람을 보내어 마을사람들에게 다소간의 사례를 하고서 제법 큰 돌을 가져온 것이 성지 가꾸기에 첫 관심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19. 지금 미리내에 세운 그 돌에는, [님은 가시고,,,]로 시작되는 하한주신부님의 詩가 새겨져 있지만, 본래 그 돌 운반계획을 세워 추진한 나의 운반 목적은, 김대건신부님의 얼굴 모습을 음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그 이유는 그돌의 원산지인 연풍에는 음각불상(국보55호?)이 있는데, 그것이 있는 자연 岩山의 바로 아래 계곡의 하천 밑에서 당시 마을삼람들의 협력으로 가져온 同質의 水晶鑛石이기 때문이다.그런데 가져온 사람과 쓰는 사람이 바뀌니, 용도도 바뀐 경우라 하겠다.
20. 당시 나는 교구 당가신부(현재 관리국장에 해당함)였던 한의수신부를 설득시켜 미리내 성당 뒤의 산을 매입하도록 하였었는데, 내 기억에 지금 성직자 묘소로 사용되고 있는 산으로 생각하고 있다. 성지 주변의 산은 되도록 넓게 매입하여야 성지가 고요히 보전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21. 용인 본당 신부로 재직하면서, 김대건신부님이 소년시절과 사제된 후에 사시던 집터가 있는 마을로 알려진 현재의 양지성당 골배마실 성지에서 류 봉구 신부님을 모시고 순교자 현양대회를 3개 본당(용인, 양지, 이천)이 공동개최하였는데, 물론 행사준비와 주선은 주로 내 자신이 직접하였고, 류봉구 신부님으로 하여금 주례와 강론을 하시게 하였다. 결과는 매우 좋았다. 교우들이 더욱 열심해지는 것 같아서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자주 순교자현양대회를 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22. 1973년도 말 성탄 전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용인본당 주임신부로 있을 때, 돌아가신 정원진 신부님(1900년에 탄생하시어 1976년에 선종하신 신부님이신데,그 당시에는 은퇴하여 계셨다)께서 일부러 용인 성당에 오셔서 나에게 “변신부님과 한 3일 같이 좀 머물다 가도 되겠는가?”하시기에 나는 아주 대환영한다고 말씀드리고 “방이 있으니 더 오래 머무셔도 좋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정원진 신부님께서는(혜화동 성당을 건축하신 분) 약 3일동안 머무시면서,식사 때는 물론 식사 후에도 계속하여 나에게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인 천진암 주어사 터가 있는 앵자산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고, 가는 길, 즉, 곤지암에서는 하루 한 번 양평을 오고 가는 시외 버-스가 있지만, 시간도 잘 안 지키고 또 오지 않을 때도 적지 않은 그 차를 잡아타기가 힘들므로, 곤지암에서 내려서 걸어가려면 남이고개를 넘어 상품에서 주어말을 찾아가야 하고, 그 동네에 가서 박씨노인을 만나면 잘 설명해 줄 것이라고 하셨다.
23. 정 신부님께서는 주어 말에 가셔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앵자산을 넘어 논이 되어 있는 천진암 터를 거쳐서 절막(우산 2리 마을 옛터)으로 해서 퇴촌으로 걸어서 번내(翻川)에 와서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을 거쳐 부천 자택으로 돌아가시기까지 이야기를 내게 소상히 다해 주시고, 略圖까지 그려 주셨으며, 천진암 주어사 터가 있는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를 지키고 가꾸는 일은 변신부가 해야만 하겠다고 간곡히 설득하셨다.
24. 그러나 당시 나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있었으므로 솔직히 말하면 귀밖으로 들리는 내용이었고, 은퇴하신 선배 신부님 앞에서 예의상 공손한 체 하면서,“네,네”하면서 대답하는 것을 할아버지 신부님께서는 그나마 아주 흐뭇하게 여기셨었다.
25. 1974년 말에 두 번째로 교구청에 근무하도록 교육원장 겸 사목국장으로 임명된 후 나는 오기선 신부님을 따라서 여주 범골 신학교 터를 처음 답사하였고, 그 후도 오기선 신부님을 모시고 더 갔었다. 그리고 당시 내가 창간하였던 수원교구 사목지에 남한산성 순교지, 범골, 구산 등 교구 내 성지를 매호에 탐방보도 형식으로 몇 차례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 반응은 매우 좋았다. 특히 서울의 일부 선배신부님들로부터 참 잘하는 일이라고 칭찬을 들었다.
26. 그때 나는 용인에서 창설한 가톨릭농촌사회지도자교육원을 김주교님께서 교육원으로 명칭을 바꾸어 수원 교구청으로 이동시키시고, 나로하여금 교구 사목국장을 겸임하면서 수원에 와서 교육원 운영을하게 하였으므로, 두 번째로 교구청에 와서 근무하는 동안 농민 운동과 동시에 교구 내 성지들을 자주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미리내 성지의 핵심인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 좌우 정면이 잡풀이 수북한 공동묘지로 둘러쌓인 상태였으니 다른 곳들이야 어떠하였겠는지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27. 사실은 서품 후 바로 교구 주교 비서로 재직할 때도 몇 차례 윤공희 주교님께서 아침 식사 때, 고 남상철 회장의 편지를 거론하셨는데, 내용인 즉,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인 천진암 주어사 터가 있는 앵자산 일대를 천주교회가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구가 원래 가난하던 시절이었고(지금 내 기억에 1970년도 초, 수원 교구 내 20여개의 본당 중에서 재정자립을 하고 있던 본당들은 불과 4,5개 정도였다), 또 윤공희 주교님께서는 새로운 일거리를 착수하는데, 당시 매우 신중히 하시는 편이어서, 때로는 답답하리만큼 아주 주저하시는 것으로 느껴졌고, 따라서 천진암 주어사 지역에 대한 성지 개발이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28. 그래서 신장성당(당시 신자 500여명) 주임으로 있던 김 정원 신부로부터 한두 번 천진암 터가 있는 산골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선종완신부님이 새로 세운 수녀회의 수련소 자리를 소개하여 달라고 나에게 말씀하셔서, 사실은 천진암 터라는 곳에 수녀원 수련소를 짖게 하여볼가 하는 생각도 있고해서 한 번 가보기로 하였다. 즉 그 당시만해도 나는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터의 의미와 가치와 중요성을 사목국장답지 못하게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실정이었고, 더우기 이러한 성역에 수녀원이 들어가면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지 수녀회들의 생존과 운영에 대하여도 정말 잘 모르는 철부지였다. 그러나 선신부님께서 수녀회를 세우시고 항상 당신이 미사와 고백성사를 주시며 피정까지 시키셨는데, 당신 아닌 다른 신부가 최초로 피정간론을 1주일씩 하도록 하신 것은 내가 처음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피정지도를 한 그러한 관계로 그 수녀회의 수련소 후보지를 찾아볼 겸해서 천진암을 가보기로 한 것이었다.
29. 그래서 1974년 말에 교구청에 간 다음 1975년 11월 하순에(21일 성모 자헌 축일) 처음으로 천진암 터를 방문하였다. 그후 1976년 봄에 내가 신장성당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구산 성지와, 당시는 구산이나 미리내에 대해서도 성지라는 이름을 거의 쓰지 않고, 그냥, “미리내 복자 김대건 신부님 묘소”, 혹은 “구산 복자 김안당 묘소” 등으로만 부르던 시대였는데, 나는 천진암 터가 있는 퇴촌면 우산리 산골을 가끔 찾으면서 잊혀진 교회 창립의 연고지에 한 조각 돌이라도 세워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막연히 갖고 있었다.
30. 1977년도와 1978년도에 가난한 구산교우들의 성금을 받아 구산에 있는 순교 복자 김 성우 안토니오의 묘소에 비석을 건립하면서 당시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던 나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주역이었던 이 벽 선생에 관해서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31. 1978년 봄에는 천진암이라는 월보를 이웃 본당 신부님들과 함께 발행하게 되는데, 사실 이 월보는 경안본당 주임이었던 유진선 신부님 등이 월보 이름을 [천진암]으로 하도록 나 없이 결정하고 편집을 내게 맡겼으며, 같은 날 거의 같은 시간에 나는 서울에 가서 천진암 강학 기념사업회를 결성하였다. 유진선신부님이나 이웃본당신부님들과 사전에 무슨 업무계획이나 업무분담이 이야기된 적도 없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정말 동시에 두곳에서 다른 사제들에 의해서 동일한 목적으로 향한 두가지 업무가 우연히 시작된 것이다.
32. 나는 박희봉신부님, 오기선신부님, 등 선배들과 여름내 모금을 하였으나 당시 20여만원 밖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 돈으로 철간판 하나를 만들어 세울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해 9월에 가서야 천진암 터에 땅을 일부 매입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천진암 강학회를 개최했던 선인들의 묘와, 그분들의 후손 및 저서, 유물 등을 찾고 싶었고, 교회사 연구소를 비롯한 관계 전문학자들에게 몇 차례 문의하였으나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33. 마침내 그해 가을 성지 현장에 관해 가장 많이 알고 계시던 오기선 신부님께서도 이 벽 선생의 묘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몇 차례 내게 말씀하시므로, 당시 30대 후반의 의욕이 넘치는 나는 지금까지 이 벽 선생의 묘를 찾아보려는 노력조차 해본 사람이 없었으니, 못 찾을 때 못 찾더라도 노력이나 한 번 해보겠다는 자세로, 이 벽 선생의 묘를 찾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그러고 보니 어디에선가 그 묘가 내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고, 어느 산기슭에서 김대건 신부님의 묘처럼 잡풀이 수북한 채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 마치, 회상하듯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34. 그때부터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벽선생의 묘를 찾는 일을 화제로 삼았고 듣는 사람들은 나를 미치광이처럼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 벽 선생의 인적 사항을 교회사에서 우선 확인한 결과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며 아버지는 이부만(李簿萬), 형은 이격(李格), 동생은 이석(李晳), 그리고 두 형제는 무관(武官)이었다는 기록이 나왔다.
35. 그 때부터 이벽 선생의 묘를 찾기 위한 생각이 마음과 머리에 가득 차 있었으며, 누군가, 무엇인가가 무섭게 내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는 힘을 나로서는 도저히 뿌리칠 수도 외면할 수도 없을 만큼,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어디에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벽 선생의 묘를 찾으러 떠날 차비를 해야되는 사람처럼 느껴져 오는 것을 누를 수가 없었다.
36. 그러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경주 이씨 이벽 선생의 족보를 입수하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던 차에 경안본당 주임 유진선 신부님이 하루는 와서 자기가 지난 가을 판공성사때 경주이씨가 많이 살고 있는 마을을 알게 되었다고 귀띔해 주었다. 나는 즉시 유진선 신부님을 내 포니 자동차에 태워드리고 경주 이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경안면 목리(木理) 마을을 찾아갔다.
37. 그날은 1979년 1월 8일이었다. 그날 경주 이씨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을 찾아가서 족보를 보자고 하였더니 시골집 벽장문을 열고 족보가 담긴 나무상자를 꺼내서 내 앞에 내놓았는데, 그 여러 권의 족보를 모두 뒤적거린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돈을 만원(당시 노동자들의 이틀 품값)을 꺼내 그 노인에게 술값으로 드리고 이벽 선생 가족 이름을 적어주며, 즉 이 부만, 이 격, 이 석, 할아버지인 이달(李鐽) 등, 이러한 이름들을 찾거든 바로 알려 달라면서 내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38. 열 하루가 지난 후 즉 1월 19일에 마침내 그 노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적어준 경주이씨 들의 이름이 나오는 족보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길로 목리에 가서 처음으로 왜정때 순 한문으로 미농지(美濃紙)지에 발행된 이벽선생 족보를 보게 되었고, 그것을 광주에 가지고 나와서 전자복사를 뜬 다음 족보는 본인에게 돌려주고 그 족보에 나오는 묘소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39. 이벽 선생의 할아버지 이달과 아버지 이부만 공의 묘는 포천 화현리(花峴里(화현리))에 있는 것으로 나왔고, 이 벽 선생과 이벽 선생의 형인 이격, 그리고 아우인, 이 석, 이 3형제분의 묘소도 같은 곳 화현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40. 나는 즉시 포천에 가서 화현리를 찾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화현면(花峴面)으로 되어 있는 곳이지만 그 당시에는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로 되어 있었다. 화현리에 가서 노인들과, 국민학교, 파출소 책임자들에게 족보 복사본을 나누어주며 200여년 전 경주 이씨들의 묘소가 있는 곳을 물어보았으나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41. 그래서 약 한 달 가까이, 20일 동안 서너차레 내 자신이 묘를 찾으러 다녔었으나 허사였다. 때로는 현등산과 운등산에서 올무를 놓아 산토끼 등 산짐승을 잡아 포천장에 갖다 팔아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냥꾼을 소개받기도 하였는데, 이 사람이 산에 있는 묘소를 가장 잘 안다고 하였다.
42. 그러나 모두 허사였다. 2월 15일, 몇차레 허탕을 친 나는 그날도 신장성당에서 아침에 빵과 커피로 간단한 식사를 하고 묘를 찾으러 가서 오후 3시가 되도록 점심을 굶은 채 여기저기 산비탈을 헤매던 중 실망에 차서 일동 만세교 쪽으로 차를 몰고 돌아오는 길에, 한길 가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마당에 눈을 쓸고 멍석을 펴놓고는 시골 남자들이 윷놀이하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가려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볼 마음으로 차를 세우고 그 노인들에게 가서, “이 마을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노인들의 말이 “화현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깜짝 놀라서 “화현리는 저 아래 국민학교와 파출소가 있는 곳이 아닙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노인의 말이 국민학교가 있는 곳은 화현 1리이고, 화현리가 하도 커서 화현 2리, 3리, 4리, 5리까지 있는데, 일동 끝으로 가장 끝에 있는 자기네 마을이 화현 5리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43. 그래서 나는, “이 화현 5리에 200여년 전 경주 이씨 양반들의 묘가 혹시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노인들 중에서 가장 유식해 보이는 송원배 노인이 불그스레한 얼굴에 흰 수염을 약간 느리우고 마고자를 입은 아주 부유한 옷차림으로 나에게 대답하였다. “경주 이씨 묘는 우리 마을에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없이 돌아서서 내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오는데, 그 노인이 내 뒤통수에 대고 하는 말이, “참, 요새 세상에 기특한 젊은이로군, 조상의 묘를 찾아다니다니, 여보, 젊은이, 선대(先代)에 무슨 벼슬을 했노?”하고 물었다. 즉, 조상이 얼마나 유명한 벼슬을 했길래 조상의 묘를 찾아다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돌아서서 그 노인을 바라보며, “한양에서 좌포장 벼슬을 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즉 내 속마음으로, 이벽 선생은 벼슬이 없었지만 이격 장군은 좌포장 벼슬을 했었으므로 얼떨결에 그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그 송원배 노인이 말하기를, “그러면 이포장의 묘를 찾는다 이거지? ”, “그렇습니다 ” “그 이포장의 묘가 저기 있는데!” 나는 깜짝 놀라서 “어디에 있지요? 가보실 수 있읍니까?”하였더니, 송원배 노인은 “그런데 이포장은 전주이씨지” 하고 다시 실망시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44. 이벽 선생은 분명히 경주 이씨이므로 그냥 돌아서서 오려다가 얼핏 번갯불처럼 스치는 생각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벼슬이라는 것은 오래가지 못하고 항상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말처럼 바뀌는 것이니, 비록 전주 이씨 이포장의 묘라도 가보면 혹시 그 곳에 비석이라도 있다고 할 때, 그 비석에 전임자나 후임자 중에서 경주 이씨 이포장, 이격 장군에 대한 무슨 단서가 될 만한 기록이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그 묘에 가보자고 하였다. 그런데 송원배 노인의 말이, “이포장네 묘를 흥수네가 관리를 해왔지. 그 훙수가 죽으려고 정신이 까물까물 하는데 아직 않죽었어”하는 것이었다.
45. 나중에 알아보니 유흥수(柳興洙)라는 노인은 그 마을에서 태어난 송원배 노인과 동년배 죽마고우로서 약 3년 전부터 병석에 누워 몇 번이나 인사불성이 되어 무의식 상태로 며칠씩 있다가 깨어나곤 했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자가용차가 드물던 시절이라서, 어느덧 윷놀이는 중단이 되고 마을의 이장, 반장 등 약 10여명의 어른들이 내 주위에 모였고 나는 송원배 노인을 재촉하여 다 죽어가고 있다는 유흥수 노인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런데 송원배 노인의 말이 “젊은이가 찾는 묘는 경주 이씨 이포장의 묘라면서, 자기 친구인 유흥수네가 관리해 온 묘는 전주이씨 이포장의 묘이니 가볼 필요가 없지 않은가? 뭣하러 가보자는 거야?” 하며 유흥수 노인 방문 면담을 귀찮게 여기는 태도였다.
46. 그러나 내 재촉 때문에 송원배 노인의 집에서 큰 길 건너 서쪽 밭 가운데 있던 유흥수 노인이 사는 집을 찾아갔다. 그 집은 울타리도 대문도 없고 마루도 없이 방 두 개에 부엌 하나인 그야말로 초가 삼간이었다. 초가집 지붕은 여러해 동안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덮지를 않았기 때문에 지붕이 썩어서 여기저기 골짜기가 나 있었고 눈 녹은 물이 골짜기로 처마 밑에 떨어지고 있었으며, 추녀는 내 이마에 닿을 정도였다. 그래서 몸을 구부리고 흙으로 된 봉당을 한 발짝 올라서서 옛날 조선식 창호지를 바른 방문의 무쇠고리를 잡아 열고 들어갔다. 그 방은 윗방이었고, 방바닥은 국민학교 학생들의 공책장을 뜯어서 여기저기 땜질하여 발라놓은 차디찬 냉방이었다.
47. 유흥수 노인은 피골이 상접하여 다 죽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아마 몇 달동안 세수나 면도도 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덮고 있는 이불은 솜이 여기저기 뭉쳐서 마치 행여 지붕처럼 펄럭펄럭하는 상태였고, 싸늘한 방에, 대소변을 방안에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악취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그 마을의 이장과 다른 몇몇이 같이 들어갔었는데 이장이 들어가면서, “할아버지 서울에서 사람이 왔어요”하고 소리를 질러도 이 노인은 쳐다볼 기운도 없었다. 아마 죽기전 까지 내 얼굴을 똑똑히 바라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장과 반장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켜 앉혔는데, 그 때 송언배 노인이 “이 사람아, 서울에서 사람이 왔네” 하였지만 그래도 쳐다보지 않았다. 양쪽에서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은 유흥수 노인은 힘이 없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으로 간신히 가르키는데는 방 윗목에 약 2미터 거리의 구석에 있는 큼직한 두레박용 깡통을 가리켰다. 소변을 보기 위해서 그것을 달라는 시늉을 했다. 이장이 그것을 가져다가 소변을 보도록 깡통을 기울여서 몸에 갖다가 대니,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몸을 가리울 샐각도 없이 다내놓고 약간의 소변을 본 후 다시 쓰러져 누우려고 했다.
48. 그러자 송언배 노인이, “ 이 사람아, 자네네가 이포장네 묘를 관리해 왔지?” 하고 큰소리를 지르자,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약간 끄덕일 뿐이었다. 이어서 송언배 노인이, “ 그 이포장이 전주 이씨지?” 하고 소리 지르니까, 역시 기운이 없어서 한 마디도 말소리는 내지 못하고 다만, 종전처럼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대신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약간 좌우로 저으면서 그렇지 않다는 표시를 했다. 그래서 내가 옆에서 보고 있다가, “그러면 그 이포장이 무슨 이씨입니까?” 하고 큰 소리로 물었다. 옆에서 부축하고 있던 이장이 내 말을 되받아서 “할아버지 그 이포장이 무슨 이씨에요?”하고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물었는데, 입을 열고 말하는 유흥수 노인의 입에서는, 소리는 나오지 않고, 아래 위 앞니가 다 빠진 상태여서 입만 우물거릴 뿐 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마치 “형주 이씨”하는 듯 했다.
49. 옆에 있던 이장이, “경주 이씨에요?” 하고 묻자 그 말에 고개를 상하로 약간 끄덕이며 “그렇다”는 표시를 했다. 그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무척 기뻤다. ‘아마 이벽 선생의 형인 이격 장군의 묘가 아닌가?’하는 성급한 확신부터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송언배 노인이 옆에서 이제 자기 주장과 달라지자, 마치 장기두다가 다투는 시골 노인들처럼, 벌써 자기 주장이 옳고 유흥수 노인의 주장이 틀리니, 자기편을 들어달라는 식의 말을 하였다.
50. 즉 그때부터는 나를 젊은이라고 하지 않고 “선상님,”이라고 했다. “여보 선상님, 이 흥수 녀석의 말을 믿지 마시오, 2,3년동안 죽었다가 깨나고 죽었다가 깨나고 해서 정신이 까물까물해요, 지금도 제 정신이 아닙니다. 내가 이 마을에서 16대째 살아왔고 글방 훈장도 젊어서부터 해오던 사람이니 내가 정확히 알지요. 그 묘는 경주 이씨 이포장의 묘가 아니고 전주 이씨 이포장의 묘요”하고 말을 하였는데, “전주 이씨”라는 발음이 나올 적마다 다 죽어가던 유흥수 노인은 마치 기를 쓰고 반대하듯 “아니라”는 표시로 고개를 좌우로 겨우 조금씩 내저으며 부정하는 표시를 강하게 하려고 안간 힘을 쓰는듯하였고, 우리들이 다짐하며 묻는, “경주이씨” 소리가 나오면 “그렇다”는 표시로 고개를 아래위로 조금씩 끄덕거리었다.
51. 그래서 나는, “만일 그 이포장의 묘가 경주 이씨라면 그 묘나, 그 부근에 있는 이 포장의 가족 묘 속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하나라도 아십니까? ” 하고 물었다. 그 노인의 소리는 들을 수 없었으니 입모양이 마치 “이 적의 묘”라고 하는 듯, 격과 비슷한 입모양을 하면서, 우리가 “누구의 묘요? 그 이름이 뭡니까?”하고 “누구”소리를 몇 번 하자 유흥수 노인은 손으로 방바닥에 천천히 나무목 자(木)를 쓰고 그 오른쪽에 각각 각(各) 자를 써서, 즉 이를 格자, 격을 쓰면서 이포장, 이격 장군의 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52. 그러는 동안 틈만 있으면 송원배 노인은,“저 흥수의 말은 믿지 말라”고 강변하였고, 나는 묘 속에 있는 “그 이포장이 이격이라는 것을 할아버지가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하는 질문을 거듭하였다. 이장도 내 말을 되받아서 유흥수 노인의 귀에 대고 “그 묘가 경주 이씨 이포장, 이격의 묘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유흥수 노인은 우리들에게 시달리며 들볶인 탓인지 혀와 입술이 처음보다는 조금씩 더 알아볼 만큼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들릴까말까하는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우리에게 밝혀준 내용은 그 경주 이씨 이격 장군의 딸이 자신의 고조 할머니이기 때문에 자기가 모를 수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 고조 할아버지 즉, 이격 장군의 사위가 되는 자기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그 지역의 경주 이씨 가족묘를 관리해왔다는 것이었다.
53. 나는 가지고 온 이벽 선생 족보를 펴서 살펴보았다. 이벽 선생의 형 이격 장군의 딸이 문화 유씨 유명규에게 시집갔다는 기록이 나왔다. 이 유명규가 유흥수 노인의 고조부가 된다는 얘기였다. 다 죽어가는 70노인에게서 내가 들고 온 족보에 기록된 내용과 일치하는 말을 들었을 때 비록 이 벽 선생의 묘를 아직 찾지는 못했어도, 마치 이미 묘를 찾은 듯 기뻤고,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까지 와 있음을 느끼자, 나는 뛸 듯이 기뻤으며, 현장에를 가보자고 재촉했다.
54. 그래서 그 노인에게 약값으로 쓰도록 돈 만원을 드리고 우리는 그 묘가 있는 마을 앞 언덕으로 갔다. 사실 유흥수 노인은 나에게 경주 이씨 이벽 선생가족의 묘군이 있는 곳을 가르쳐 준 후 한 달도 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유흥수 노인이 살던 집은 3년 후에 다 헐리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새마을 주택이 들어서 있다. 그 당시 유흥수 노인은 사위가 죽은 자기 딸의 며느리도 과부가 되어 있었는데, 이 딸의 며느리한테 얹혀서 밥을 얻어먹고 있었다. <계속>
55. 나중에 이벽 선생의 묘를 찾아 이장한 후 약 한달 후에 내가 화현리 그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는 이미 유흥수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그 마을 노인들의 이야기를 종합한 결과, 이 벽 선생의 묘를 찾아 모시려는 천주교 신부인 나를 만날 때까지 약 3년간 며칠만큼씩 일체 곡기를 끊고, 물도 잘 넘기지 못하여, 죽었다가 깨어나곤 하기를 수차례 했다는데, 이는 분명히 천상에 계신 이벽 선생께서 내가 도착할 때까지 그 노인의 생명을 연장해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었다.
56. 그날 우리가 약 500미터 떨어진 작은 언덕의 밭둑에 있는 묘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며, 가지고 간 족보에 적혀 있는 묘의 방향을 맞추어 보고 있을 때, 김승호라는 그 일대의 땅 공동묘지 관리인이 나타났다. 그 지역은 함경북도에서 피란해 나온 신창읍 읍민회 공동묘지로 되어 있었고 5만여 평에 달하는 땅을 경주 이씨들로부터 매입하여 신창읍민들의 공동 묘지로 사용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찾아온 묘지 관리인 김 승호 씨는 내가 경주 이씨 후손인 줄로 착각하고, 이장공고 시효가 벌써 몇 차례 지났으니, 남아있는 경주 이씨 묘들 약 4, 5기를 빨리 이장해 가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발굴해서 없어져도 자기들은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경주 이씨 후손이 아니라는 점과 천주교 신부라는 점을 밝히고, 지금 찾는 묘가 200년 전 유명한 사람의 묘이므로 이 묘를 찾으면 바로 후손을 찾아 이장해 가겠노라고 대답하였다.
57. 밭둑에 있는 이벽 선생의 묘로 추정한 그 묘 앞에서 나는 기도를 바쳤고, 흐뭇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즉시 오기선 신부님, 박희봉 신부님 류흥렬 박사에게 이벽 선생의 묘를 찾았다는 소식을 전하자 세 분은 뛸 듯이 기뻐하시며 즉시 가보자고 하여 2월 23일 우리는 포천 화현리를 함께 찾았고 묘 앞에서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이격장군과 그 후손들이 살았었다는 큰 조선 개와집 집터를 방문하였으며 그 집은 내가 도착하기 3년 전에 무너져서 허물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집터에서 옛날 조신시대의 돌쩌귀, 문고리, 무쇠 사각못 등을 주어가지고 왔다.
58. 그후 나는 여러 주교님들에게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이신 광암 이벽선생의 묘를 포천 화현리에서 찾았으며, 이를 이장하여야만 된다는 내용의 편지를 띄웠다. 그리고 이벽 선생은 한국 천주교회가 각 교구로 분할되기 전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이시니, 모든 주교님들이 함께 이장을 주선하셔야 되겠다는 뜻을 전달하고, 돈이 없던 나는 이장비용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지금 내 기억에 다른 주교님들은 대답도 없으셨고 ,부산교구의 최재선 주교님만이 격려 편지와 함께 당시 5만원을 내게 송금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5만원이면 지금 약 50만원 정도(?) 될 것으로 본다.
59. 그런데 후손을 찾지 못하면 남의 묘를 함부로 발굴 이장할 수 없었으므로 후손을 찾는 일이 시급한 형편이었다. 그러던 차 다음날 어떤 책장사가 와서 백과사전을 사라고 조르므로 경주 이씨 이벽 선생의 가족이나 종친회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수 없겠느냐고 미친 사람처럼 얘기를 했더니, 그 사람이 서울 약수동 중앙시장에 있는 대창 한약방을 찾아가면 한의사 이 종수 씨가 있는데, 그분이 경주 이씨들의 거주지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60. 나는 2월 24일 오후에 바로 약수동 중앙시장에 있는 대창 한약방 이종수씨를 찾아갔다. 서울인데도 골목에 싸리문을 해 달은 안층 행랑채로 기억되는 사랑방에서 한약을 걸고 있었다. 내가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기에 경주 이씨 족보관게로 여쭤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노라 하였더니, 한약을 지으러 온 줄 알고 기뻐하던 그 노인은 별로 좋지 않은 안색을 하며 밖에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61. 내 기억에 그 날 나는 정말 무서운 인내를 가지고, 저녁도 굶으면서, 약 3시간 이상을 기다렸다. 그 한의사는 손님들을 다 내보낸 후에도 나를 부르지 않았고, 자신이 저녁을 다 먹고 나서야 , 그 때까지 문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나를 불렀다, 몹시 불쾌하고 화가 났지만 꾹 참으면서 들어갔다. 나는 경주 이씨가 아니고, 천주교회의 신부인 변기영 신부이며, 200여년 전 경주 이씨 중에 아주 저명한 분인 광암 이벽 선생의 묘를 포천 공동묘지에서 발견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어디에 사는 줄을 모르므로, 그 후손들이 어디 사는지 알면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62. 그 한의사는 왜정때 문중의 족보를 편찬하면서, 여러 후손들이 족보를 사 가지고 간 후에, 대금을 지불하지 않아서, 수금이 잘되지 않고 하여, 족보관계로 종친 중에 누가 찾아오면, 아예 쳐다보기도 싫을 정도로, 우선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길 뿐더러, 매우 부담스러워 하는 처지인 듯 하였으며, 내 신분을 알고 난 후에는 너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는 얘기를 거듭 몇번 했다. 그리고 족보에 나오는 경주 이씨 이 벽, 이격의 후손들은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공근리에 살고 있으니 그곳에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다.
63. 주일을 지내고 나서 2월 21일 화요일, 나는 신장성당 총회장이었던 이원호 교수와 명동성당문 앞에서 성모사진관을 내고, 오랫동안 아마 수십년 사진을 찍어온 신봉림씨를 데리고, 횡성군 공근면 공근리를 찾아갔다. 눈이 덮인 산골 마을을 들어가 보니, 정말 심산 궁곡이었고, 그곳 공근리 마을 사람들의 말은, 이벽 선생의 후손들이 서울로 이사간 지 20여년이나 지났다는 것, 그리고 경주 이씨들이 이사간 서울 주소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실로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떤 천주교 신자 한 사람이 와서 경주 이씨들이 모두 서울로 이사간 것은 아니고, 일부는 횡성군 가담리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64. 그래서 횡성군 가담리를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공근리에서 나왔다. 횡성에서 원주 쪽으로 오다가 첫째 큰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가담리가 보이는데, 길은 좁은 마찻길이었다. 가다보니 어떤 부인이 어린아이를 업고 오바로 들 씌운 다음 다른 작은아이를 손으로 잡고 눈길을 걸어서 앞에 가고 있었는데, 아무리 빵빵 거려도 길을 비켜 주지를 않았다. 그래서 계속해서 클락션을 눌렀더니 그 부인은 비좁은 마찻길의 가장자리로 비키며 유리창으로 나를 들여다보며 하는 말이 “어머, 한국 신부님이네”하였다. 알고 보니 그때까지 횡성 본당은 약 40년 동안 서양 신부님이 맡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신부를 보자 무척 반가운 모양이었다. 그 부인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무척 기뻐서 “어머 ! 한국신부님이시네! 신부님 어디에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가담리에요”, “우리 동네에 왜 가세요?” “가담리 사세요?” “그러믄요, 가담리 누구를 찾아가세요?” “그 가담리에 상국씨, 상철씨, 상만씨, 기형이, 덕형이, 완형이,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그 부인은 “어머, 우리동네 사람들 이름을 모두 외워가지고 오셨네”하며 매우 기뻐하였다.
65. 내 차에 그 부인과 애들을 태우고, 가담리에 들어가서 이 상국씨 집을 찾아갔다. 아직 싸리문이었고 문패는 안마루의 가운데 기둥에 붙어 있었다. 이상국 씨는 서울에서 사람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마루를 걸어 나왔다. 당시까지 이상국 씨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선생님이 이 상국 씨시지요?”하고 묻고, 내가 천주교 신부라는 것을 알렸다. 어떻게 자기 이름을 알고 찾아왔느냐고 하길래, “이 상국 선생님의 7대조 조부님 이름을 아십니까?”고 물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하였다.사실 7대조 조부의 이름을 아는 이는 드물다. 내 자신도 나의 7대조 조부님의 이름을 모른다.
66. “댁에 족보가 있습니까?” 하였더니, 목침을 놓고 딛고 올라가서 벽장문을 열고 새까맣게 때가 묻은 조그마한 나무 상자를 꺼내어, 그 뚜껑을 열고, 족보를 꺼냈다. 나는 ,"갑 3권 33페이지를 보시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아니, 남의 족보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선생님이 이상국 씨, 아버지는 성우, 할아버지는 종학, 증조부는 규복, 고조부는 병영씨이고 현고조는 현모, 7대조부가 이벽 선생이 아닙니까?”고 족보를 하나하나 짚으며 알려 주었다. 이상국 씨는 “그렇구먼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벽 선생의 묘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하고 묻자, “모르죠, 저희 4대조 조부께서는 묘가 강원도 땅에 있으나 그 이상 선대의 묘는 어디 있는 지 모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선대에 당쟁으로 인하여 강원도 땅에 낙향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67. 나는 이 상국 씨에게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신창읍민회 공동 묘지 한 복판에서 이벽 선생의 묘를 찾았다는 것과 이장공고 시효가 지났으므로, 묘를 발굴하고 파괴하면 실묘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벽 선생은 한국 천주교회를 창립한 중요한 분이니 묘가 없어지는 것은 후손이나 우리 후대인들이 방관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역설하였다. 이 상국 씨는 횡성에서 농협조합장도 하였고, 지방 유지급으로, 즉시 모든 것을 알아듣고,조상의 묘를 모르고 있던 후손에게 묘를 찾아주고 알려주고, 실묘를 하지 않도록 거들어주시는 것에 감사한다고 예의를 다하여 말하였다.
68. 그러자 성당에 갔던 이상훈 씨(이 상국씨의 형)의 부인이 돌아왔다. 나는 그 부인의 안내로 횡성 군청에 양정계장으로 있던 8대종손 이 완형 씨를 만났고 또 성당으로 갔다. 그곳 주임신부님은 부재중이었으므로 주임신부님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뜻밖에도 이벽선생의 천주 공경가와 성교 요지가 얇은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며칠 전에 도착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본당 신부님이 그해 년초부터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의 역사를 배워야 한다며 몇 주일 째 이벽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유흥렬 박사의 교회사를 가지고 강의하였는데, 그 이벽 선생이 자신의 7대조 시할아버지가 되시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이상국 씨의 형수 정 율리안나 씨는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였다.
69. 그런데 이상국 씨의 말이 강원도 산골에서는 돈을 만지기가 어려우니, 우선 주먹에 무엇을 쥐고 가야 되므로, 우선 장을 좀 본 후에 오는 일요일 (3월 4일)에 신장 성당으로 신부님을 뵈러 가면, 신부님은 자동차를 가지고 계시니, 포천 화현리 7대조 묘에 성묘하도록 해주시겠느냐고 청하였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쾌히 승낙하고 기다리겠노라고 하였다.
70. 1979년 3월 4일 주일 오전에 이상국 씨와 그 아들 이 완형 씨, 이 기형 씨가 신장 성당에 왔고, 미사참례를 한 후에 함께 포천 화현리로 향했다. 의정부 쯤에 가서 이상국 씨가 “신부님, 저희는 천주교 신자가 아닙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서, “그래서요?” 하고 물었다. “뭣 좀 사 가지고 가서 제사를 올려야 겠는데요” “좋습니다. 그러시지요” 의정부에서 북어와 사과 등을 산 후, 포천군 내촌면 화현 5리 신기동 마을에 우리가 도착한 후, 후손 이상국 씨 등은 미리 적어 가지고 온 제문을 읽으며 제사를 지냈다.
71. 그 때 김승호 씨라는 분이 올라왔다. 함경도 신창 읍민회에서는 약 5만 여평의 땅을 사서 그 일부를 공동묘지로 쓰고 있었는데, 김승호씨는 바로 이 묘지의 관리인이었다. 이상국 씨가 그 동안 묘를 관리해 주어서 고맙다며 약간의 돈을 김승호 씨에게 주었고, 김승호씨는 묘를 빨리 이장해 가라고 하였다.
72. 그런데 필자의 생각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옛날 벼슬까지 한 양반의 묘이기 때문에 비석이 있을 법도 한데, 비석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니, 왜 비석이 없습니까?” 하고 물의니, 마을 이장님의 얘기가 “비석은 해서 뭐합니까?” 하는 것이었다.
“비석이 없으니 이벽 선생의 묘인지 이부만 공의 묘인지, 이 묘가 누구의 묘인지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파 보면 알지요! 묘를 파보면 누구의 묘인지 다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묘를 파 가지고 어떻게 압니까?”
“묘를 파보면 묘 속에서 이름이 나오잖아요!”
“묘 속에서 어떻게 이름이 나와요?”
“아 이런 딱한 양반 보게, 이장해 간다면서 그걸 모르세요? 묘를 파면 거기서 지석이 나와요”
“지석이 뭔데요?”
나는 지석이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던 것이다. 그 만큼 우리 천주교 신부들은 사실 무식했다.
“옛날 묘는 파면, 그 안에 묻힌 사람의 이름을 새긴 흙이나 돌이나 그릇이 나와요. 그것을 지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이 묘도 파면 나오겠네요?”
“그럼요, 나오지요. 전에 이 부근에 있는 다른 묘들을 팠을 때도 다 나왔어요”
“그럼 이것도 한 번 파봅시다”
73. 묘를 파보는 날을 언제로 잡을까 의논하다가 4월 11일로 잡았다. 그 날은 그해의 성주간 월요일이었다. 나는 이장에게 사람 아홉 명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못자리를 할 때이고 해서 한 사람 당 4천원씩을 주겠다고 했다(당시 그 마을에서 하루 품값은 3천원이었다). 가래와 삽도 준비하고, 쌀 한 말을 담가서 술도 해두라고 부탁하며, 비용을 주었다.
74. 4월 11일 바로 그해 성주간 월요일에, 횡성에서 오신 이 기형씨와 정 율리안나씨 두 분, 그리고 나와 이원호 교수를 비롯한 몇 명이 이벽 선생의 묘를 확인하러 갔는데, 그 동네에서도 이장과 반장 등 꽤 여러 명이 왔기 때문에 현장에는 열 다섯명 정도가 참가하여, 우리가 한달 동안 기도하러 다니던, 밭둑에 있는 그 묘를 팠다. 묘의 가운데 부분을 파자 정말 지석이 나왔다. 지석은 흙을 다진 후 한문 글씨를 새긴 후 글씨자리의 흙을 파내고 숯가루를 넣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벽 선생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한문으로, “密陽朴氏之墓”라는 여자 묘 이름이 나왔다. 모두들 생각도 하지 않던 일인지라 깜짝 놀랐다. 옛날에는 여자들이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지석에도 그냥 “朴氏”, “金氏” 등, “~氏”라고만 적었고, 남자 묘인 경우에는 지석에 이름이 나오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판 묘는, 남편 묘가 있어서 같이 쓴 것도 아니고 여자 혼자의 묘였던 것이다.
75. 그러자 옆에 있던 송언배 노인이,
“여보 선상님, 그거 보시오, 그 흥수 놈이 3년 전부터 죽으려고 정신이 까물까물하고 며칠씩 죽었다가 깨어나곤 했는데, 그 녀석 말을 왜 믿으시오? 내가 그래도 이 마을에서 16대째 살아오고 수십 년을 아이들 한문 가르치며, 글방 훈장 노릇을 한 사람이오, 내가 "전주 이씨 묘"라고 하지 않았오 !?”
“그럼, "全州李氏之石"이 나와야지, 왜 밀양 박씨, 여자묘 지석이 나옵니까?” 하며, 나역시 반문삼아 한마디 대꾸를 하였다.
“전주 이씨가 우리나라 이씨 조선의 왕족이고, 왕족이니까 ,소실을 많이 두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전주 이씨의 소실 묘이지요. 소실이니까 합장도 못하고 따로 쓰는 거예요”
76. 듣고 보니, 송노인 말도 일리는 있었다. 횡성에서 내려온 이 기형씨는(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으므로) 얼굴색이 달라지면서, ‘강원도 산골에서 조용히 잘 살고 있는 우리 후손들에게, 7대조 할아버지 묘가 있다는 둥 해서, 포천땅 공동묘지까지 와서 남의 여자 묘를 발굴하게 하느냐’며 내게 항의삼아 따졌다(물론 이장 비용은 다 내가 낸 것이었지만). 하여간 나도, 이미 주교님들한테 이벽 선생의 묘를 찾았다고 알려놓은 터인지라 앞이 캄캄했고, 이원호 회장도 특유의 함경도 회령 사투리로 “기거이, 기거이, 참 기럴 수가 있읍네까!? 기럴 수는 없지요!” 하면서 주위를 뺑뺑 돌아 다녔다.
77. 그래서 나도 나도 핑게를 대는 것이 아니라, 운명 직전의 유흥수 노인이 가르켜 준 이야기를 하면서, “저 아래 있는 이 격 장군의 묘라고 알려준 묘를 한 번 파봅시다”하며, 약 3백 여m 좌편 언덕 아래로 내려가서, 낮은 잔디 언덕 위의 밭둑 위에 있는, 유흥수 노인이 내게 알려준 이격 장군의 묘를 찾아갔다(이 격 장군의 묘를 알려 준 유흥수 노인은 내게 묘 자리들을 알려 준 후 불과 1주일 후에 바로 세상을 떠났다고, 며칠 후에 알게 되었다.
78. 만일 내가 죽어가던 그 노인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 전에 돌아가셨더라면, 이벽 선생의 묘는 영원히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두번째 발굴한 무덤 가운데를 파내려 가자, 바로 지석이 나왔는데, 그 지석에는 한문으로“淸州韓氏之墓”라고 쓰여 있었고, 이번에도 또 여자묘 지석이었다.
79. 그러자 후손, 이 기형씨는 화가 좀 난듯, “천주교 신부님이 사람을 속입니까?” 하였고, 이 원호 총회장은 자기 본당 신부가 헛짚어서, 개망신을 당하고 있으니까 “이원호 회장도 이번에는 두번째나 허탕을 쳐서인지, 그 특유의 함경도 회령 사투리로, “기거이, 기거이, 참 기럴 수가 있읍네까!? 기럴 수는 없지요!” 하면서 주위를 빙 빙 돌아 다녔다.. 그 동네의 이장과 반장도 “묘도 모르는 사람들이 묘를 찾겠다고 하는구먼”하면서 핀잔을 주었으며, 송언배 노인은 오지도 않았었고, 후손들은 모두 화가 나 있었다. 그 때의 내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80. 나로서는 이벽 선생 묘를 찾았다고 이미 주교님들한테 편지를 띄운 데다가 최재선 주교님은 이장에 쓰라며, 5만원이나 돈을 보내셨었고, 오기선 신부님은 박희봉 신부님과 함께 신자들을 데리고 와서 기도를 바치는 등, 법석을 떨었는데, 두번씩이나 엉뚱한 여자묘지석이 또 나왔으니, 사기를 친 꼴이 된 것이었다.
81. 그때가 오후 세시쯤이었다. 그곳에는 고총이 여러 개가 있었는데, 나는 이 석 장군의 묘 방향이 맞는 묘를 파보자고 하였다. 후손들도, 그 마을 사람들도, 모두들, 더 파보나마나니, 파나마나 라고 여기 저기서 모두들 중얼거렸다. “품값은 내가 주는 것이니, 갑시다”하면서, 그곳에서 4,5, 백미터가량 떨어진 위쪽 언덕에 이석 장군 묘로 알려준 곳에 올라왔다.
82. 역시 이 묘에도 비석은 없었다. 왜 비석들을 세우지 않느냐고 묻자, 이장과 노인들의 말이, 옛날에는 정변이 일어나면 묘를 다 파버렸기 때문에 알리지 않기 위해서, 상돌만 있지, 비석은 파묻거나 깨뜨려 버린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 묘에 간 나는 묘를 파기 전에, 성모님께 정말로 간절히 기도를 했다. “성모님, 이 묘 속에서 다른 사람 지석이 나오더라도 기적으로 좀 바꾸어주셔서, 제가 망신 좀 당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앞으로 다른 일로 망신을 당하는 것은 괜찮지만, ‘변신부가 순교 선조들의 묘를 찾는다고 설치다가, 허탕치고 사기를 쳤다’고 망신을 당하게 되면, 내 후배들이 다시는 순교 선조들을 위한 일 하기를 꺼려하고, 하지 않을 테니, 이런 일로 망신은 당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면서 진짜로 열심히 기도를 드렸다.
83. 고총 위에는 해방 후 기둥감 소나무들을 한 벌목한 후 잔 솔이 서까래 감이 되도록 자란 굵은 소나무를 베어버린 후 묘를 파자 지석이 나왔다. 거기에는 “總府副將慶州李公晳之墓巽坐”라고 쓰여 있었다. 지석은 조선 강회로 네모 반듯하게 단단하게 만들고 그 위에 한문으로 글씨를 쓴 다음, 글씨를 파내어 그 자리를 숯가루로 메꾼 것이었다. (본 홈페지와 천진암 홈페지의 Gallery 메뉴, 이벽성조 이장 사진 화보 참조)
84. 시간은 벌써 오후 4시쯤 되었고, 나는 성주간 월요일 예절 때문에 신장으로 빨리 돌아와야 했으므로 후손 중의 한 사람인 이 상만 씨에게 묘를 또 하나 파보고 내일 와서 얘기를 해달라고 일렀다. “ 고총이 이 부근에 일곱 개나 있고, 이벽 선생의 동생 묘가 나왔으니 분명히 이벽 선생의 묘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 자동차(당시 250만원 짜리 포니였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2천만원 정도 된다)를 팔아서라도 비용을 댈 테니 고총을 다 파봅시다” 이석 장군의 묘가 확인되자 용기나 난 것이다.
85. 신장성당에 돌아온 나는 성주간 월요일 저녁미사를 드렸고, 이튿날, 전날 발굴하라고 지시한 고총에 대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 상만 씨 등 후손들이 아침 일찍왔다.
“신부님, 나왔어요”
“뭐가 나왔어요?”
“<李檗>이라는 이름이 나오긴 했는데, 앞에 ‘通德郞’이라는 말이 붙어서 “ 通德郞慶州李檗之墓”라고 쓰여 있어요. ‘通德郞’이 뭡니까?”
“通德郞이요? 글세, 나도 잘 모르겠는데요”
족보에 보니까 通德郞이라는 벼슬을 했다고 나왔다. 나중에 유홍렬 박사의 말을 들어보니, 通德郞이란 先代에 벼슬을 한 이가 있을 때, 그 후손들에게 그냥 내려주던 것이란다. 때로는 시험을 보게 하여 내리는 윤리적 벼슬 지위라고 하였다. 나는 바로 포천으로 가서 갓등산 꼭대기에 있는 하루 전 봉분을 파헤쳤다가 다시 덮은 묘를 파보았는데, 조선 강회를 네모반듯하게 다지고 글씨를 새겨 바짝 말린 후에, 글씨를 파내어서 그 자리를 숯가루로 메꾼 誌石이 나왔다. 거기에는 “通德郞慶州李檗之墓”라고 쓰여 있었다. 네 번째로 판 묘에서 나온 것이다.
<천진암성지 홈페이지와 변기영 몬시뇰 사랑방 홈페지의, Photos 메뉴의 이벽성조 묘 이장 사진 화보 참조>
86. 나는 주교님과 몇몇 주요 관계인사들에게 알렸다. 부활 후, 4월 20일 경에 김남수 주교님, 오기선 신부님, 유홍렬 박사, 이기형 씨 등이 지석 확인을 하기 위해서 그곳에 또 갔었고, 4월 18일에는 혜화동에 모여서 '韓國天主敎會 創立主役 李檗 先生 墓 移葬 準備委員會' 를 결성하였다. 위원장은 김 남수 주교님, 부위원장은 박희봉 신부님과 후손대료로 이상국씨에게 맡아 달라고 부탁하고, 나는 모두의 의견일치로, 또 자천,자칭 총무를 하기로, 만장일치로 정하였다. 유홍렬 박사와 오기선 신부님과 최석우 신부님께는 전화로 고문을 해주실 것을 청했더니, 모두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후손들인 이상만 씨, 이상철 씨 등은 이장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김대건 신부님의 전기, '성웅 김대건 전'을 쓰신 김구정씨가 대구에서 올라오셔서, 대구교구 대표로 이장위원으로 참석키로 하였다.
87. 문제는 移葬地를 어디로 할 것인 지였다. 박희봉 신부님께서는 이벽선생의 묘를 서울 절두산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셨는데, 서울에 모셔야 신자들이 자주 참배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나는, 이벽 선생은 천진암 강학회에서 한국 교회를 시작하신 분이니, 천진암으로 모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이 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었는데, 대구에서 대구에서 오신 김구정 노인이, 처음에는 과묵하게 조용히 듣기만 하다가, 갑자기 화를 내면서,
“ 이벽 선생의 묘를 절두산으로 모신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천진암으로 모셔야지요. 이벽 선생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절두산에 왜 모십니까? 그것은 안됩니다.” 하였다.
88. 그래서 박희봉 신부님의 주장이 좀 수그러드셨다. 만약에 수그러드시지 않으면, 나는 ‘묘를 찾은 사람은 나니까, 내 마음대로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또 김구정씨가 오시기 직전에도 후손들에게 이장지를 물어보았을 때, 이상국 씨와 이상만 씨 등이, “우리는 변신부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저희가 변신부님 덕택에 조상의 묘를 찾았는데, 우리가 무슨 낯으로 어디로 모시라고 말씀드리겠습니까? 저희는 변신부님 말씀만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했었다. 그래서 김구정씨가 강력하게 말한 덕택에, 결국 천진암 성지로 모시기로 확정이 되었다. 대신 박희봉 신부님께서, 앞으로 이장하게 되면, 이벽 선생의 시신을 당신이 계신 혜화동 성당에서 하룻밤 묵으시게 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89. 移葬日은 5월 1일, 5월 3일(석가탄일), 5월 31일, 6월 15일, 등이 거론 되었으나, 이장 비용이 전무하고, 위원들이 모이지 않아, 현충일인 6월 6일이 가장 유력하게 전망되었었으나, 이역시 이장 비용이 전무하였고, 돈을 내겠다는 위원도 전혀 없었다. 그날 사실 모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장은 실행되지 못했다. 사실은 그해 5월 3일에 순교자 현양대회를 개최하면서 이장을 하기로 하였으나, 이역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계속>
90. 이벽성조의 위치나 천진암 성지의 성격 상, 전국 차원의 교구가 합심 참여함이 당연하지만, 우선 서울교구와 수원교구가 공동으로 최초의 천진암 행사를 주최하여, 옛날의 광주군에 속했던 서울과 수원의 본당신부들, 즉,천호동의 김병일 신부님, 돌아가신 청담동의 최창정 신부님, 논현동에 계셨던 것으로 기억되는 김덕재 신부님, 그리고 경안 성당의 유진선 신부님 등 우리가 모여서 [순교자 현양대회]라는 타이틀로 남한산성에서 거행하였는데, 사실은 이름만 두교구의 공동주최이지 실무는 신장성당에 있던 내가 주로 주선하고 주관하였다. 서울과 수원의 다른 관련 본당 회장들이나 신부님들은 마지 못해 참가해 주는 선심행사처럼 되어갔다.
91. 당시에는 천진암에 오는 교통사정이 나빠서 차가 들어올 수가 없었기 때문에 행사장소를 남한산성으로 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6월 6일에 이벽 선생 묘를 이장하려고 했던 것인데, 돈도 없는데다가 준비가 되지를 않았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6월 8일 10시에 혜화동 성당에서 다시 이장위원회가 열렸는데, 그때 김구정씨가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그리고 신봉림 씨(명동성당 정문 앞에서 사진관을 하고 있는 사람), 유홍렬 박사 등도 참석하였다. 移葬日을 6월 14일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돈도 없는 데다가 준비도 될 것 같지가 않아서 6월 24일로 하기로 하였다. 그 날은 이벽 선생의 본명인 요한세자의 축일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2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