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님 성지 순례기(2022.10.25.)
성 다불뤼 주교님은 본래 고향이 프랑스 파리에서 북쪽 국경에 비교적 가까이에 있는 아미엥(Amien)으로, 아버지는 아미엥 시의 시장도 하였었고, 형님은 아미엥 교구의 교구장 주교였으며, 후에 대주교에까지 임명된 분이었다. 어머님은 신앙심이 매우 돈독하신 분으로, 여동생들과 누나들 중에는 3명이나 수녀님들이 있었다.
다불뤼 소년은 공부를 잘하여, 파리에 있는 유명한 술피스(Sulpice) 대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프랑스에서는 장차 주교나 대신학교 교수 신부 후보를 양성하는 대학으로 소문이 날 정도의 아주 유명한 대신학교 출신이다.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사로 일하시는 안동교구장으로 은퇴하신 두봉 주교님과, 또 이미 작고 하신, 전에 서울 혜화동 가톨릭신학대학 교수로 다년간 1971년 서품자들인 우리들에게도 여러 해 교의신학을 가르치셨던 노 다니엘 부셰 교수 신부님도 슐피스 출신으로, 매우 박학다식한 명강의 교수님이셨는데, 두분 다 술피스 대신학교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다불뤼 신부는 당시 선교사들 중에 유일하게 21년 간이나 되는 가장 오랜 기간을 조선에 머물면서 고향을 떠난 후 다시는 부모 형제들을 한번도 만나보지 못하고 머나먼 극동 조선의 산골과 시골을 누비며, 1845년 김대건 신부님이 수난하신 병오년 박해부터, 1815년 정해년 박해와, 1839년 기해년 박해와1866년 병인년 박해, 등, 여러 박해를 피해다니는 동안, 굶기가 일쑤였으나 묵묵히 견디고 거치며 지내면서, 부단한 노력으로 다불뤼 신부는 한국어와 한문지식에도 능통하였고, 교리문답 해설서, 신명초행, 회죄직지, 성찰긔략, 천당직로, 등 여러 저서와 순교성가도 작사작곡하여 신자들에게 숨어서 가르쳤으며, 특히, [한국순교자 비망기] 저술로, 한국천주교회 창립사와, 특히 조선교구 설정 이전의 한국교회역사, 즉, 한국 초대 천주교회사 저술로 한국교회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만일 다불뤼 신부의 [한국순교자 비망기] 저술이 없었더라면, 전 세계에 빛나는 평신도들이 주인공이 되어 이룩한 한국천주교회 창립사와, 특히, 79위 시복식도, 103위 시성식도,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필자는 한국주교회의에 근무하면서 103위 시성을 전후하여 일곱 여 차례나 아미엥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다불뤼 성인의 생생한 발자취를 이곳 저곳 구석구석에서, 아직도 강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위대한 성인들에게는 죽음이 없다. 사람들은 성현 군자들이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그 분들의 일생과 업적, 역할, 숨결은 모두 이 지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남겨주고 간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잔인한 박해가 그치지 않고 이어지던 21년간이나, 박해의 그 현장, 조선의 극빈상태였던 시골과 산골에서, 더우기, 김대건 새 신부가 체포, 구속되어, 5개월여가 넘도록 매일 한두 차례씩 문초실과 고문하는 마당에 불려나가서 모진 형벌과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조차도, 어렵게나마 굼에굼에 소식을 듣던 시절, 다불뤼 신부님은 언제 포졸들의 발자국소리가 자신의 방문 앞을 찾아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태에서, 단 하룻밤도 불안한 마음이 없이, 마음놓고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고, 죽음을 맞이하며 대기하는 각오로, 지칠대로 지쳐 쓰러진 몸으로, 위대한 순교자 알렉시오 황사영 진사 어른이 그의 백서(帛書)에서 말하던 인사연생 (忍死延生) 으로, 즉, 죽어가는 순간순간의 죽음을 참고 견디는 것 그 자체가바로 지금 우리 교우들이 살아가는 삶의 연장일 뿐이라고 북경 교구장 주교님께 보고하던 그대로였다.
그래서 다불뤼 주교님도 포졸들의 눈을 피하고 손길을 빠져나가며 하루 하루를 인사연생하느라 주교님도 온종일 피난길 산비탈길을 헤매며 지쳐서 느러진 몸으로 잠 속으로 떨어질 따름이었으며, 조석으로 한 때 식사만이라도 입에 맞는 식사를 고향에서처럼 먹어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성 다불뤼 주교님 앞에는, 드디어 잔인한 칼아래 목을 늘여 바치라는 순교제가 마침내 기다리고 있었으니, 우리 한국의 모든 성직자들은 늘 겸손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자세를 바르게 하며, 옷깃을 여미고, 늘 반성과 회개하는 심정으로 한국 성직자들의 거울이신 순교성인 다불뤼 주교님 앞에서 기도해야 하겠다.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103위 순교복자 시성식 때, 프랑스 신자들의 외국인 순례자 주력 신자 단체가 480 여 명이나 천진암 성지에, 프랑스 사제들 70 여명과, 주교님들 10 여명이 포함되어, 함께 와서 순례하며 미사와 순수 한정식으로 점심을 하였는데, 그 중에 아미엥 시를 중심으로 주로 유롭 지역과 전 세계에 산재한 다불뤼 문중에서만, 약 200 여명에 달하는 신자들이 참석함으로써, 우리 실무자들을 감격케 하였다.
당시 한국주교회의 순교자시복시성추진위원회 총무 겸 103위 시성추진부장, 및 당연히 한국주교회의의 시성식기획위원회 위원장을 겸하고 있던 필자는 그동안 지금까지 몇차례 이를 밝혔던 내용이다, 그런데 심산궁곡 수세식 변소는 물론 상하수도 조차 없던 당시 천진암 성지에서는 일반 국내 순례자들을 위한 식당도 전무하던 때이므로, 모두가 집에서나 본당에서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서 산골 도랑물을 마시던 때이므로, 프랑스 외국인 500 여명의 점심 준비가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백 데레사(신치구 장군 부인) 자매님의 주선으로 군 장성부인들과 영관장교 부인들이 30여명 동원되어 순수 한정식 점심 준비와 점심 봉사를 성공적으로 하여, 우리에게 아주 생소한 이 큰 잔치를 마쳤고, 프랑스 신도들 관리와 안내와 지휘는 마르셀 펠리스 배신부님(파리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장, 안동교구 영주 공소에 영주본당 건립 신부)과 동료 회원 신부님들이 맡아 하였었다.
현재 신리 성지 본당 주변에는 신도들이 거의 없어서, 필자의 짐작에 아마 100 여명(?)이나 될지 모르지만, 그나마 모두 먹고 살기 어려워서 무슨 일이라도 시켜서 할만한 젊은이들은 출타하여 없고, 노인들 뿐이고, 지금은 대전교구의 젊은 신부님 한분과 서울 샬트르 바오로회 수녀님들 두분이 성 다불뤼 주교님의 발자욱으로 다져진 드넓은 1만여평 터전을, 지금은 금잔디밭으로 다듬어지고 꾸며진 성지의 잡풀들과 싸우며, 여러 시설들을 손발이 다 닳도록 관리하느라고, 봉사 아닌, 그 이상의 실로 닥치는 일들을 안 할 수도 없는 무리한 혹사를 하는 모습이 좀 안쓰럽고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신리 성지 본당은 전국의 모든 성지 중에 가장 깨끗하고 깔끔하고 아주 거룩하게 다듬어진 성지로서, 더구나, 비록 최근 코로나 대 난국에 전국 모든 성지와 다름없이 여기도 순례자들의 발길은 좀 뜸하다고나할까, 좀 끔한 편이지만, 적막한 시골 성지의 본적지에 명실상부한, 가난이 자갈처럼 깔린 거룩한 분위기는 순례자들의 영혼을 한층 더 거룩히 성화하여 주고 있다. 원래 거룩한 성덕이란 가난을 의복으로 삼고, 이부자리로 삼아, 성덕과 가난이 공생동거하게 마련이니, 베들레헴 주막거리 주막집 마굿간의 말구유에 호적을 둔 가족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주머니의 가볍고 얄팍한, 그래서 서른 해가 넘도록 아무 부담없이 함께 지니고 다니며, 함께 만고풍상을 다 겪는 [지갑 어른]을 열어뵙고 보니, 83세의 늙고 낡은 은퇴신부가 아직도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서, 그래도, 천주교 사제가 박해시대도 아닌데, 반평생 사제생활을 마친 후, 주변머리 없는 어느, '은퇴 사제는 영양부족으로 마침내 굶어서 죽었다더라' 하는 바보들의 영광스러운 찬미 소리는 나오지 않도록, 50평생 머슴살이한 수원교구 주교님이 매월 보내주시는 은퇴사제 생활비 쓰다 남은 것 삼십 여 만원을, 그냥 몽땅, 다, 여기서,,,!
성지의 이 집 살림꾼 사정이 금잔디에 잡풀 뽑는 일꾼을 한나절만이라도 반명 구하기도 쉽지 않을텐데,,,! 이 나마 큰 살림 살이에 무슨 도움이 되리오마는,,,! 그래도 그냥 몽땅 바치고 가야만 맴이 편할 것만 같아서,,,! 설마인들 성지에 왔다가 주머니를 털어 드리고 돌아가는 바람에, 머무는 공소 사제관의 항아리에 쌀이 더 빨리 떨어져서, 드디어, 각종 원인모를 질병들의 영양실조 회오리 바람 속에서 어떤, 은퇴 사제는 마침내 굶어서 외로이 세상을 떠났다더라 하는, 바보들이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만은 들리게 되지 않게 해야 옳지 않으랴,,,,!? 그래도 오늘은 모두 바치고 가야 한다.Msgr. By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