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님들 위한 설날 합동 연미사 오전 11시 2023년 1월 22일 주일 오전 11시 곡수성당>
최초 개종 입교자 김복수 요셉 초대 공소 회장을 기억하고,
2022년 12월 15일은,일부 성지에서 [하느님의 종] 사우거사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현을 반세기 가까이 기념해오던 큰 기념일입니다. 이 때를 계기로, 우리 곡수 공소 교우들 중에 몇몇이 지난 해부터 준비해 오던 곡수 공소 첫 전교자를 기억하는 한 조각 돌을 세워보자고 준비하던 중, 교구장 이용훈 주교님의 비문 감수 겸, 특히, Latin어 문안을, 주교님께서는 해박하신 라틴어 학식으로 감수하여 주셔서, 이를 받아, 비록 작은 비석이나마, 마침내 이 해가 다 저물기 전에 폭설과 혹한 속에서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세우게 되었읍니다.
우리 곡수 공소의 김복수 초대 회장의 영세 대자들 중에, 공소의 전 회장도 한동안 역임한 한기수 요한 현 공소의 총무와, 현재 몸은 비록 타 본당에 가서 살고 있지만, 마음만은 이 공소를 이르키는데 온 힘을 함께 다하던, 이곳 우리 고향 곡수리 성당의 이성희 세실리아, 이태용 비오, 등 모두 70 대를 넘긴 옛 신자들의 정성으로, 아담하고 거룩하게, 그러나, 소리없는 한 마디 강론처럼, 당당하게 금년 엄동설한에도, 더욱이, 혹한 중 폭설 직전에, 양평 본당 이형동 신부님과 존경하올 우리 수원 교구장 이용훈 주교님의 배려와 윤허로, 뜻깊은 한 조각 돌이 세워졌읍니다 ! 우리 모두 천주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천주교회는 어제와 오늘이 또 내일도 모두가 하나입니다 !
한국 천주교회는 다른 나라 교회와 달리 외국인 선교사 성직자나 수도자에 의해서 시작되지 않고, 아직 천주교 세례도 받지 않은 입교 지망자 한국인들에 의해서, 자발적인 진리탐구와 소박하고 진솔한 순수 신앙 실천에 의해 창립되었음은 이제 전 세계 교회 대부분의 지성인들이 다 잘 알고 경탄하는 바이며, 역대 교황님들의 말씀과 문헌에, 특히 현 교황님의 선언과 최근 강론에서도 밝혀지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선교사의 발길이 들어오기 전에], 전 세계 교회사에 빛나는 자발적인 창립사는 바로 순교자 알렉시오 황사영 진사가 1801년 신유년 박해 때 배론 은신처에서 옹기 굽는 가마 속에서 비단 한 폭에 써서 북경 교구장 주교에게 보내는 그의 백서에서 처음으로 문자로 밝힌 것이, 당시 북경과 마카오와 한양의 선교사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읍니다.
원문과 함께 간단히 그 뜻을 역술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방의 우리나라 한국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일반 상식으로는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큰 은혜를 베푸셨다고 가히 말할 수 있으니, 최초로 천주교를 전하는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주님께서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이 천주교를 특별히 높히 들어 보이시고, 더우기, 주님 친히 손수 우리 선조들과 함께 마주하시어, 가르치고 전승하게 하시고, 세례 성사 등 성사를 베풀어주실 성직자도 미리 마련해주셨으니, 그 갖가지 특별한 은총을 세어 보려고 하나씩 손꼽아보기에는 손가락이 모자랍니다.] <主恩之於東國 可謂廻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 而主特擧斯道 而親舁之繼 又以授聖事者預之 種種特恩 指不勝屈 - 黃嗣永 [帛書].
순교자 황진사의 백서 내용이 한양과, 리스본, 파리, 로마에까지 알려지면서 역대 여러 교황님들의 문헌에도, 특히 최근의 교황 성 요한-바오로 2세의 강론과 현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에서는 아주 명확히 강조하시는 역사가 되었읍니다. 그런데, 순교자 알렉시오 황사영 진사의 문맥 중에, [,,,又以授聖事者預之,,,], 즉, [,,,주님께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성사를 베풀어 줄 성직자까지 미리 마련해 주셨으니,,,] 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데, 이는 광암 이벽 성조께서 천진암 강학으로 모인 선비들 중에 세례성사를 받고 오도록 이미 몇차례나 북경에 자신의 대리자(Delegues)를 보냈으나, 북경교구청의 사제들은 우리 조선인들에게 세례주기를 거부하였으니, 북경에서 세례만 주어 보내면, 조선에는 사제가 없어서 매주 미사와 고백성사도 받을 수 없으므로,세례만 받고 귀국한 신자는 주밀 미사도 궐하는 대죄를 바로 범할 수 밖에 없으므로, 앞으로 조선에 어떤 사제가 들어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읍니다. 사실 주일 미사 참례를 한번이라도 빠지는 천주교 신자는 대죄를 면치 못하고, 만일 고백성사를 받지 않고 영성체하면 성체를 모독하는 대죄가 되기 때문이었읍니다. 여기서 피에르 모방 신부가 '대리자(Delegat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당시 천진암을 중심으로 하는 자발적인 천주교 신앙의 공동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읍니다.
그래서, 예수회가 교황청으로부터 해산명령을 받고, 갈 데가 없던 프랑스인 예수회원 요셉 드 그라몽 신부가 북경 북당 성당에서 식객처럼 손님 신부로 머물면서 이승훈 진사의 이야기를 듣고,, 그곳 교구 허락없이 이승훈 진사에게 비록 불법으로 부당하게 몰래 세례를 주게 되었으나, 세례만은 유효한 것이므로,(validum sed illicitum), 이로 인하여 그라몽 신부는 북경교구장 주교가 내리는 벌을 받아, 마카오로 쫓겨나서, 거기서 죽을 때까지, 중국 내의 북경 교구 관할 지역 내에는 물론이고, 자신이 세례를 주어 보낸, 보고싶은 이승훈 베드로가 산다는 조선도 북경 교구 관할이므로, 그 한양에도 올 수가 없음을 한탄하며 있음을 전제하고 읽어야 할 대목입니다.
그런데 비록 좀 다르기는 하지만, 곡수리 마을에서 최초의 선교자 김영수 요셉의 전교로 새로 입교하는 영세 예비 공소신자들은 당시 신도들이 거의 없던 지역에서의 본당 관할 영역 자체가 분명치를 않아서, 행정 구역상 양평이 여주와 경계가 되는 곡수리 마을은 주변의 용문 본당과 양평 본당, 및 여주 본당과 이포나루 건너 이천본당 등, 어디로 속해야 하는지도 아는 이가 거의 없고 또 말들도 없지 않아서, 실제로 어려움도 적지 않았읍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선교사없이, 한국인 평신도들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창립되었다는 이 빛나는 역사는 바로, 순교자 황사영 백서의, [主恩之於東國, 可謂廻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와, [而主特擧斯道, 而親舁之繼, 又以授聖事者預之,,,]문장이 최초로 알게 하는 글이었읍니다.>
그런데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서 [하느님의 종] 광암 이벽, 만천 이승훈, 녹암 권철신, 직암 권일신, 및 복자 정약종, 등의 순교 선조들 발자욱을 따라, 현재의 양평본당 관할에 속한 지평면 곡수리 공소역시, 외국인 선교사나 국내 성직자나 수도자에 의하여 시작되지 않고, 우리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전교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평신도들의 선교 기념비가 이번에 우리 교구에서 처음으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는 지금 로마에서 하느님의 종 이벽 성조를 위시하여 133위 순교 선조들의 시복선포를 기대하며 재촉하는 한국 교회의 실증적 역사 표석이기도 할 뿐더러, 천주교회는 평신도가 바로 주인공(protagonista) 임을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금년에 여러차례 강론하셨기 때문입니다.
1949년 강원도 영월에서 가족들과 함께 곡수 2 리 마을 동편의 대평리 저수지 입구 산밑 개울가로 이사온 김영수 요셉은 손수 초가로 조그마한 질그릇 공장을 짖고, 거기서 질그릇 화로와 시루, 가벼운 물방구리, 뚜가리 같은 질그릇을 만들어 역시 작으마한 질그릇 굽는 가마에 구워서, 지게에 지고, 부인과 함께 이고 지고 곡수리 마을로 다니며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면서, 이곳 마을에는 천주교 신자가 한 명도 없던 시절이라, 천주교를 전혀 모르고 있으므로, 천주교를 알리고 권하여, 1년에 한 두 집씩 외짝 교우들이나마 입교시키며, 교리를 가르쳐서, 20 여 km 이상 걸어서 성탄과 부활 때에만 다녀와야 하는 양평본당에 가서 천주교회 미사 예절에 참석하였으며, 가난하고 외로운 신자로서 요셉 김영수 전교자는 자신이 직접 가르친 예비신자가 세례를 받게 되어도 대부로 세울 신자가 없으므로, 자신이 대부도 서서, 새로 입교 영세자를 하나씩 늘려 나갔습니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당시 이곳 곡수리와 주위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유교를 숭상하면서 불교를 믿고 있었으나, 김영수 요셉 부부의 열성에 감명을 받아, 천주교회로 개종하는(conversus) 이들에 관하여, 일찌기 최초로 한국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 피에르 모방 신부는, 1838년 ,양지공소에서 파리 본부로 보내는 글에서,이러한 첫 조선인들의 개종에 대해서, 마치 구약시대 이스라엘 부족으로 결혼이나 여타의 이유로, 타부족들의 기존 신앙과 종족 소속도 변경을 의미하는 proselytes, 라는 강한 표현을 쓰고 있기도 하였는데, 현재도 필립핀 도서 지역의 다부족 사회에서처럼, 당시 조선의 유교와 불교가 몸에 밴 본토인 원주민 조선인들의 개종을, 사도 바오로가 사오로나, 아오스딩 성인처럼, 한 때 전에는 잘 법대로 살다가 후에 타락한 신자들이 회개(conversio),하는 것과는 좀 상이한 강한 표현을 쓰기도 하였읍니다. 하여간 교리를 배워 입교한 영세자가 한 두 집씩 생기게 되었고, 6.25 사변 후,1955년에 최초로 처음 개종하여 입교, 영세한 대자 김복수 요셉은 곡수리에 너덧 댓집 새 신자가 늘면서, 양평 성당으로부터 공소로 정식 지정을 받게 되자, 김복수 요셉 새 공소 첫 회장은 눈부신 활동으로, 마을 신자 공동체를 크게 발전시켰읍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월 18일 자, "공소의 재발견" 8 번, [곡수 공소] 편 참조>
그런데 곡수리 공소 신자 공동체의 출발과 발전 과정은 우리나라 시골 농촌지역의 대부분 본당들의 표본으로서, 과거 천진암 산골에서 한국천주교회가 처음으로 태동되어 자라나던 모습과 매우 비슷합니다. 전 세계 비가톨릭 신자들의 개종을 위하여 매우 거룩한 모범입니다. 특히, 춘천교구의 최초 신자 공동체를 이룩한 엄주언 말딩 두 형제들이 1896년, 춘천에서 살 때 자신의 집 행낭에 달포 이상 머물던 대나무 소쿠리 장사한테 들은 천주교에 관하여 그 신앙생활까지 더 잘 배워 알기 위하여는 천진암으로 가서 아직 그곳에 잔존하는 천주교 선비들한테 몇년간 배우고 오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듣고, 굳게 결심하고, 두 형제가 먼저 천진암을 탐방하고 온 후, 일부러 두 형제 가족이 천진암 암자 주변으로 이사하고, 3년간이나 교리공부를 하고, 서울 명례방에 머물던 프랑스 선교사 목신부(?)님이 경기도 광주 지역 공소 순회 방문(목리 ?) 때 천진암에도 들리시는 기회가 되어, 온 가족이 천진암에서 프랑스 선교사 목신부님 한테서 정식 영세를 하고나서, 두 형제 가족 모두가 전교하기 위하여 다시 춘천 고향으로 돌아와서, 오늘의 춘천교구 중림동 주교좌 본당 주변의 윗너부랭이와 아랫 너부랭이에까지, 주변 이웃 사람들에게 전교하여 지금의 춘천교구 주교좌 성당 건립의 중심적인 주인공으로 크게 활약하였음을, 춘천교구는 교구 창립사에서 밝히고 있읍니다.<춘천교구 사목국에서 발행한, 춘천교구 70주년 기념, [우리 선조, 우리 터전] (장익 주교 편찬) (2010년 춘천교구 사목국 발행) 참조>
한국 천주교회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도 거룩히 신앙을 이어가는 자발적인 이러한 역사는 옛날에만 있었던 옛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도 내일에도 이름이 비록 덜 알려져 있는 오늘과 내일의 제2, 제3의 이벽,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이승훈, 등, 거룩한 성인들의 반열을 위하여, 133위 순교복자들의 시복시성에 교황청 시성부에서도, 목숨을 바쳐가며 살아남은, 지방 교회 신도들의 희생에, 비록 만시지탄이 없지 않으나, 보다 신속하게 화답하는 시복의 기쁜 소식을 주저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기도하며, 새로운 학교 설립이나, 새로운 수도원 건립 못지 않게, 평신도 선교 활동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온 교회가 다함께 평신도들의 전교활동에 대해서도 물심양면으로 전국이 거교회적인 참여와 후원을 배가하도록 기도해야 하겠읍니다. 특히, 한국 시골 공소들은 읍내 본당들의 신심과 신앙의 어머니이며, 나아가, 각 교구들의할머니 신앙의 본거지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국 교구의 시골 본당들, 안성, 용인, 여주, 이천, 충주, 인천, 개성, 강릉, 등, 모두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전도로 신자 공동체가 출발하였읍니다. 특히, 김대건 신부님이나 프랑스 선교사 주교 신부님들의 활동 역사에 못지 않게, 우리 주변의 실로 거룩한 성인다운 평신도들의 업적과 활동이 잊혀지지 않게 역사를 지킵시다.
예컨데, 구산 공소 성지의 김정호 회장, 장호원 감곡 성당의 남상철 회장, 특히, 춘천 주교좌 죽림동 본당의 엄주언 말딩 회장, 더우기, 용인 본당 도사리 공소 출신의 권형규(요셉) 회장, 등으로, 특히, 용인 지역 15개 면 내에 17개 공소를 수십년에 걸쳐 농한기 겨울마다 전교활동으로 하나씩 하나씩 신설하고,은이 본당과 양지본당, 포곡면의 두개울에 있던 앞고지 본당, 및 6.25 사변 직후 1.4 후퇴 이후에 용인 읍내 성당, 등의 여러 본당 신설 때마다 각 새 본당의 초대 총회장으로서 10 여년 이상씩 봉사하여, 현 교황님의 표현대로, 교회의 주인공으로서 저 여러 본당들 총회장 직도 차례로 맡아, 모두 50 여년간 실로 거룩히 총회장직 50년을 봉사하였읍니다.
그런데 권형규(요셉) 회장은 손이 귀한 집안의 하나 밖에 없던 3대 독자 외아들까지 주님의 사제가 되겠다는 외아들의 희망에 동의하여 성신대학에 입학하게 허락하였으나, 순교신앙이 깊고, 천재적인 머리와는 달리, 몸이 허약하여 차부제품 받기 전에 불가피하게 2년간이나(?) 휴학을 중복하며 연기하였었으나 회복되지 않아 사제품에는 이르지 못하였읍니다. 후에 건강이 차차 회복되어 그 어렵던 국립 서울대하교 법대에 편입, 졸업 후, 국가고시를 거쳐 관직에 충실하였고, 나중에 경기도 건설국장으로 관직에 있으면서도, 수원 주교좌 조원동 본당에서 매주 토요일 저녁에 평신도들에게 [천진암 강학]을 여러 해 동안 양병묵 루까 본당신부님과 함께 계속하였읍니다. 대신학생으로서 두뇌가 출중한 권신학생의 성신대학 동창생들 중에는, 김수환 추기경, 박희봉 신부, 이문근 신부, 정하권 몬시뇰(?),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읍니다. 권형규 회장의 업적과 생애는 광암 이벽 성조와 그 동료 한국교회 창립선조들의 뒤를 잇는 순교 한국 평신도 활동의 모범이었읍니다. "평신도들이 우리 천주교회의 주인공(protagonista)이니, 평신도들은 가정을 세우고, 자녀를 낳아 키우고 가르쳐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로 육성하며, 교회를 건설하고, 발전시키며, 운영한다"고, 프란치스코 현 교황님은 금년에도 여러 차례 말씀하셨읍니다.
그래서, 경향잡지의 서상요 바오로 기자에게, 필자는 전 용인본당 출신 사제로서, 또 용인 본당 제3대 주임신부도 역임하면서, 당시 용인 본당 내의 32개 공소에 봄 가을 판공 때마다 전 현직 회장님들한테 적잖이 들어 알게 된 바를 경향잡지의 서상요 바오로 기자에게 이야기하여 주었더니, 서기자는 이를 바탕으로, 1978년 12월 호 경향잡지 특집, '이 달의 인물'로, 용인본당 권형규 요셉 회장의 활약상을 집필하여 게재하였읍니다.>.
우리 한국의 본당이나 공소의 회장님들 중에는 거룩한 사도직의 모범이 되는 성인다운 우리의 선배들이 허다하므로, 이 선구자 선조들은 우리 나라 교회의 평신도들 뿐 아니라 성직자들에게도, 나아가, 전 세계 교회 신도들에게도 거룩한 신앙의 거울이며 교과서로서, 우리 신앙사의 보배이므로, 전국 모든 교회기관에서는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 뿐 아니라, 평신도들의 거룩한 활동 역사도 지키고 보전되도록 해야 하겠읍니다.,
째째하고 창피스러울 정도로 같은 한 시대의 같은 종교 단체를 일터로 하여 천주님을 위하는 교회 안에서, 마치 시기와 질투심으로 광난하는 일부 정치인들처럼 부끄럽고 못된 뻔식이 뻔돌이 뻔순이 무리들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서 이벽 성조를 비롯한 거룩하고 위대한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의 선조들과 선배들과 선임자들이 순교정신으로 이룩한 영웅적으로 거룩히 빛나는 업적을 감탄하고 격찬하며 찬미하고 감사하며 본받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부끄럽고 뻔뻔스럽게도 없는 흉을 짐작으로 만들어 보태고 붙여가며 비평과 비난으로 헐뜯고 할퀴고, 모든 업적을 지우며 망치기에 치중하는 짓을 본업으로 삼고자 하는 못난이들이 없지 않으나, 이는 못하게 막아야 할 것입니다. 남들이 잘한 일을 보면 자신이 잘못한 일을 보는 것보다 더욱 외면하고 싫어하다 못해 증오하며, 파괴함으로써 자신을 들어내려는 소아마비적 사고방식을 버리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함혈분인선오기구 -含血吩人先汚其口>.진리와 진실과 정의는 영원하여, 누구도 백지화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혹한과 폭설 속에 이 해가 저물어가는 성탄을 앞두고, 양평 본당 곡수공소의 최초 전교자 김영수 요셉과,
최초 개종 입교자 김복수 요셉, 등, 초대 공소 회장님들을 기억하며, 한 조각 돌을 세우면서 !!! Msgr. Byon. 2022/12/19.
최초 개종 입교자 김복수 요셉 초대 공소 회장을 기억하고,
2022년 12월 15일은,일부 성지에서 [하느님의 종] 사우거사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현을 반세기 가까이 기념해오던 큰 기념일입니다. 이 때를 계기로, 우리 곡수 공소 교우들 중에 몇몇이 지난 해부터 준비해 오던 곡수 공소 첫 전교자를 기억하는 한 조각 돌을 세워보자고 준비하던 중, 교구장 이용훈 주교님의 비문 감수 겸, 특히, Latin어 문안을, 주교님께서는 해박하신 라틴어 학식으로 감수하여 주셔서, 이를 받아, 비록 작은 비석이나마, 마침내 이 해가 다 저물기 전에 폭설과 혹한 속에서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세우게 되었읍니다.
우리 곡수 공소의 김복수 초대 회장의 영세 대자들 중에, 공소의 전 회장도 한동안 역임한 한기수 요한 현 공소의 총무와, 현재 몸은 비록 타 본당에 가서 살고 있지만, 마음만은 이 공소를 이르키는데 온 힘을 함께 다하던, 이곳 우리 고향 곡수리 성당의 이성희 세실리아, 이태용 비오, 등 모두 70 대를 넘긴 옛 신자들의 정성으로, 아담하고 거룩하게, 그러나, 소리없는 한 마디 강론처럼, 당당하게 금년 엄동설한에도, 더욱이, 혹한 중 폭설 직전에, 양평 본당 이형동 신부님과 존경하올 우리 수원 교구장 이용훈 주교님의 배려와 윤허로, 뜻깊은 한 조각 돌이 세워졌읍니다 ! 우리 모두 천주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천주교회는 어제와 오늘이 또 내일도 모두가 하나입니다 !
한국 천주교회는 다른 나라 교회와 달리 외국인 선교사 성직자나 수도자에 의해서 시작되지 않고, 아직 천주교 세례도 받지 않은 입교 지망자 한국인들에 의해서, 자발적인 진리탐구와 소박하고 진솔한 순수 신앙 실천에 의해 창립되었음은 이제 전 세계 교회 대부분의 지성인들이 다 잘 알고 경탄하는 바이며, 역대 교황님들의 말씀과 문헌에, 특히 현 교황님의 선언과 최근 강론에서도 밝혀지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선교사의 발길이 들어오기 전에], 전 세계 교회사에 빛나는 자발적인 창립사는 바로 순교자 알렉시오 황사영 진사가 1801년 신유년 박해 때 배론 은신처에서 옹기 굽는 가마 속에서 비단 한 폭에 써서 북경 교구장 주교에게 보내는 그의 백서에서 처음으로 문자로 밝힌 것이, 당시 북경과 마카오와 한양의 선교사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읍니다.
원문과 함께 간단히 그 뜻을 역술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방의 우리나라 한국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일반 상식으로는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큰 은혜를 베푸셨다고 가히 말할 수 있으니, 최초로 천주교를 전하는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주님께서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이 천주교를 특별히 높히 들어 보이시고, 더우기, 주님 친히 손수 우리 선조들과 함께 마주하시어, 가르치고 전승하게 하시고, 세례 성사 등 성사를 베풀어주실 성직자도 미리 마련해주셨으니, 그 갖가지 특별한 은총을 세어 보려고 하나씩 손꼽아보기에는 손가락이 모자랍니다.] <主恩之於東國 可謂廻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 而主特擧斯道 而親舁之繼 又以授聖事者預之 種種特恩 指不勝屈 - 黃嗣永 [帛書].
순교자 황진사의 백서 내용이 한양과, 리스본, 파리, 로마에까지 알려지면서 역대 여러 교황님들의 문헌에도, 특히 최근의 교황 성 요한-바오로 2세의 강론과 현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에서는 아주 명확히 강조하시는 역사가 되었읍니다. 그런데, 순교자 알렉시오 황사영 진사의 문맥 중에, [,,,又以授聖事者預之,,,], 즉, [,,,주님께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성사를 베풀어 줄 성직자까지 미리 마련해 주셨으니,,,] 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데, 이는 광암 이벽 성조께서 천진암 강학으로 모인 선비들 중에 세례성사를 받고 오도록 이미 몇차례나 북경에 자신의 대리자(Delegues)를 보냈으나, 북경교구청의 사제들은 우리 조선인들에게 세례주기를 거부하였으니, 북경에서 세례만 주어 보내면, 조선에는 사제가 없어서 매주 미사와 고백성사도 받을 수 없으므로,세례만 받고 귀국한 신자는 주밀 미사도 궐하는 대죄를 바로 범할 수 밖에 없으므로, 앞으로 조선에 어떤 사제가 들어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읍니다. 사실 주일 미사 참례를 한번이라도 빠지는 천주교 신자는 대죄를 면치 못하고, 만일 고백성사를 받지 않고 영성체하면 성체를 모독하는 대죄가 되기 때문이었읍니다. 여기서 피에르 모방 신부가 '대리자(Delegat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당시 천진암을 중심으로 하는 자발적인 천주교 신앙의 공동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읍니다.
그래서, 예수회가 교황청으로부터 해산명령을 받고, 갈 데가 없던 프랑스인 예수회원 요셉 드 그라몽 신부가 북경 북당 성당에서 식객처럼 손님 신부로 머물면서 이승훈 진사의 이야기를 듣고,, 그곳 교구 허락없이 이승훈 진사에게 비록 불법으로 부당하게 몰래 세례를 주게 되었으나, 세례만은 유효한 것이므로,(validum sed illicitum), 이로 인하여 그라몽 신부는 북경교구장 주교가 내리는 벌을 받아, 마카오로 쫓겨나서, 거기서 죽을 때까지, 중국 내의 북경 교구 관할 지역 내에는 물론이고, 자신이 세례를 주어 보낸, 보고싶은 이승훈 베드로가 산다는 조선도 북경 교구 관할이므로, 그 한양에도 올 수가 없음을 한탄하며 있음을 전제하고 읽어야 할 대목입니다.
그런데 비록 좀 다르기는 하지만, 곡수리 마을에서 최초의 선교자 김영수 요셉의 전교로 새로 입교하는 영세 예비 공소신자들은 당시 신도들이 거의 없던 지역에서의 본당 관할 영역 자체가 분명치를 않아서, 행정 구역상 양평이 여주와 경계가 되는 곡수리 마을은 주변의 용문 본당과 양평 본당, 및 여주 본당과 이포나루 건너 이천본당 등, 어디로 속해야 하는지도 아는 이가 거의 없고 또 말들도 없지 않아서, 실제로 어려움도 적지 않았읍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선교사없이, 한국인 평신도들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창립되었다는 이 빛나는 역사는 바로, 순교자 황사영 백서의, [主恩之於東國, 可謂廻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와, [而主特擧斯道, 而親舁之繼, 又以授聖事者預之,,,]문장이 최초로 알게 하는 글이었읍니다.>
그런데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서 [하느님의 종] 광암 이벽, 만천 이승훈, 녹암 권철신, 직암 권일신, 및 복자 정약종, 등의 순교 선조들 발자욱을 따라, 현재의 양평본당 관할에 속한 지평면 곡수리 공소역시, 외국인 선교사나 국내 성직자나 수도자에 의하여 시작되지 않고, 우리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전교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평신도들의 선교 기념비가 이번에 우리 교구에서 처음으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는 지금 로마에서 하느님의 종 이벽 성조를 위시하여 133위 순교 선조들의 시복선포를 기대하며 재촉하는 한국 교회의 실증적 역사 표석이기도 할 뿐더러, 천주교회는 평신도가 바로 주인공(protagonista) 임을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금년에 여러차례 강론하셨기 때문입니다.
1949년 강원도 영월에서 가족들과 함께 곡수 2 리 마을 동편의 대평리 저수지 입구 산밑 개울가로 이사온 김영수 요셉은 손수 초가로 조그마한 질그릇 공장을 짖고, 거기서 질그릇 화로와 시루, 가벼운 물방구리, 뚜가리 같은 질그릇을 만들어 역시 작으마한 질그릇 굽는 가마에 구워서, 지게에 지고, 부인과 함께 이고 지고 곡수리 마을로 다니며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면서, 이곳 마을에는 천주교 신자가 한 명도 없던 시절이라, 천주교를 전혀 모르고 있으므로, 천주교를 알리고 권하여, 1년에 한 두 집씩 외짝 교우들이나마 입교시키며, 교리를 가르쳐서, 20 여 km 이상 걸어서 성탄과 부활 때에만 다녀와야 하는 양평본당에 가서 천주교회 미사 예절에 참석하였으며, 가난하고 외로운 신자로서 요셉 김영수 전교자는 자신이 직접 가르친 예비신자가 세례를 받게 되어도 대부로 세울 신자가 없으므로, 자신이 대부도 서서, 새로 입교 영세자를 하나씩 늘려 나갔습니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당시 이곳 곡수리와 주위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유교를 숭상하면서 불교를 믿고 있었으나, 김영수 요셉 부부의 열성에 감명을 받아, 천주교회로 개종하는(conversus) 이들에 관하여, 일찌기 최초로 한국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 피에르 모방 신부는, 1838년 ,양지공소에서 파리 본부로 보내는 글에서,이러한 첫 조선인들의 개종에 대해서, 마치 구약시대 이스라엘 부족으로 결혼이나 여타의 이유로, 타부족들의 기존 신앙과 종족 소속도 변경을 의미하는 proselytes, 라는 강한 표현을 쓰고 있기도 하였는데, 현재도 필립핀 도서 지역의 다부족 사회에서처럼, 당시 조선의 유교와 불교가 몸에 밴 본토인 원주민 조선인들의 개종을, 사도 바오로가 사오로나, 아오스딩 성인처럼, 한 때 전에는 잘 법대로 살다가 후에 타락한 신자들이 회개(conversio),하는 것과는 좀 상이한 강한 표현을 쓰기도 하였읍니다. 하여간 교리를 배워 입교한 영세자가 한 두 집씩 생기게 되었고, 6.25 사변 후,1955년에 최초로 처음 개종하여 입교, 영세한 대자 김복수 요셉은 곡수리에 너덧 댓집 새 신자가 늘면서, 양평 성당으로부터 공소로 정식 지정을 받게 되자, 김복수 요셉 새 공소 첫 회장은 눈부신 활동으로, 마을 신자 공동체를 크게 발전시켰읍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월 18일 자, "공소의 재발견" 8 번, [곡수 공소] 편 참조>
그런데 곡수리 공소 신자 공동체의 출발과 발전 과정은 우리나라 시골 농촌지역의 대부분 본당들의 표본으로서, 과거 천진암 산골에서 한국천주교회가 처음으로 태동되어 자라나던 모습과 매우 비슷합니다. 전 세계 비가톨릭 신자들의 개종을 위하여 매우 거룩한 모범입니다. 특히, 춘천교구의 최초 신자 공동체를 이룩한 엄주언 말딩 두 형제들이 1896년, 춘천에서 살 때 자신의 집 행낭에 달포 이상 머물던 대나무 소쿠리 장사한테 들은 천주교에 관하여 그 신앙생활까지 더 잘 배워 알기 위하여는 천진암으로 가서 아직 그곳에 잔존하는 천주교 선비들한테 몇년간 배우고 오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듣고, 굳게 결심하고, 두 형제가 먼저 천진암을 탐방하고 온 후, 일부러 두 형제 가족이 천진암 암자 주변으로 이사하고, 3년간이나 교리공부를 하고, 서울 명례방에 머물던 프랑스 선교사 목신부(?)님이 경기도 광주 지역 공소 순회 방문(목리 ?) 때 천진암에도 들리시는 기회가 되어, 온 가족이 천진암에서 프랑스 선교사 목신부님 한테서 정식 영세를 하고나서, 두 형제 가족 모두가 전교하기 위하여 다시 춘천 고향으로 돌아와서, 오늘의 춘천교구 중림동 주교좌 본당 주변의 윗너부랭이와 아랫 너부랭이에까지, 주변 이웃 사람들에게 전교하여 지금의 춘천교구 주교좌 성당 건립의 중심적인 주인공으로 크게 활약하였음을, 춘천교구는 교구 창립사에서 밝히고 있읍니다.<춘천교구 사목국에서 발행한, 춘천교구 70주년 기념, [우리 선조, 우리 터전] (장익 주교 편찬) (2010년 춘천교구 사목국 발행) 참조>
한국 천주교회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도 거룩히 신앙을 이어가는 자발적인 이러한 역사는 옛날에만 있었던 옛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도 내일에도 이름이 비록 덜 알려져 있는 오늘과 내일의 제2, 제3의 이벽,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이승훈, 등, 거룩한 성인들의 반열을 위하여, 133위 순교복자들의 시복시성에 교황청 시성부에서도, 목숨을 바쳐가며 살아남은, 지방 교회 신도들의 희생에, 비록 만시지탄이 없지 않으나, 보다 신속하게 화답하는 시복의 기쁜 소식을 주저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기도하며, 새로운 학교 설립이나, 새로운 수도원 건립 못지 않게, 평신도 선교 활동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온 교회가 다함께 평신도들의 전교활동에 대해서도 물심양면으로 전국이 거교회적인 참여와 후원을 배가하도록 기도해야 하겠읍니다. 특히, 한국 시골 공소들은 읍내 본당들의 신심과 신앙의 어머니이며, 나아가, 각 교구들의할머니 신앙의 본거지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국 교구의 시골 본당들, 안성, 용인, 여주, 이천, 충주, 인천, 개성, 강릉, 등, 모두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전도로 신자 공동체가 출발하였읍니다. 특히, 김대건 신부님이나 프랑스 선교사 주교 신부님들의 활동 역사에 못지 않게, 우리 주변의 실로 거룩한 성인다운 평신도들의 업적과 활동이 잊혀지지 않게 역사를 지킵시다.
예컨데, 구산 공소 성지의 김정호 회장, 장호원 감곡 성당의 남상철 회장, 특히, 춘천 주교좌 죽림동 본당의 엄주언 말딩 회장, 더우기, 용인 본당 도사리 공소 출신의 권형규(요셉) 회장, 등으로, 특히, 용인 지역 15개 면 내에 17개 공소를 수십년에 걸쳐 농한기 겨울마다 전교활동으로 하나씩 하나씩 신설하고,은이 본당과 양지본당, 포곡면의 두개울에 있던 앞고지 본당, 및 6.25 사변 직후 1.4 후퇴 이후에 용인 읍내 성당, 등의 여러 본당 신설 때마다 각 새 본당의 초대 총회장으로서 10 여년 이상씩 봉사하여, 현 교황님의 표현대로, 교회의 주인공으로서 저 여러 본당들 총회장 직도 차례로 맡아, 모두 50 여년간 실로 거룩히 총회장직 50년을 봉사하였읍니다.
그런데 권형규(요셉) 회장은 손이 귀한 집안의 하나 밖에 없던 3대 독자 외아들까지 주님의 사제가 되겠다는 외아들의 희망에 동의하여 성신대학에 입학하게 허락하였으나, 순교신앙이 깊고, 천재적인 머리와는 달리, 몸이 허약하여 차부제품 받기 전에 불가피하게 2년간이나(?) 휴학을 중복하며 연기하였었으나 회복되지 않아 사제품에는 이르지 못하였읍니다. 후에 건강이 차차 회복되어 그 어렵던 국립 서울대하교 법대에 편입, 졸업 후, 국가고시를 거쳐 관직에 충실하였고, 나중에 경기도 건설국장으로 관직에 있으면서도, 수원 주교좌 조원동 본당에서 매주 토요일 저녁에 평신도들에게 [천진암 강학]을 여러 해 동안 양병묵 루까 본당신부님과 함께 계속하였읍니다. 대신학생으로서 두뇌가 출중한 권신학생의 성신대학 동창생들 중에는, 김수환 추기경, 박희봉 신부, 이문근 신부, 정하권 몬시뇰(?),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읍니다. 권형규 회장의 업적과 생애는 광암 이벽 성조와 그 동료 한국교회 창립선조들의 뒤를 잇는 순교 한국 평신도 활동의 모범이었읍니다. "평신도들이 우리 천주교회의 주인공(protagonista)이니, 평신도들은 가정을 세우고, 자녀를 낳아 키우고 가르쳐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로 육성하며, 교회를 건설하고, 발전시키며, 운영한다"고, 프란치스코 현 교황님은 금년에도 여러 차례 말씀하셨읍니다.
그래서, 경향잡지의 서상요 바오로 기자에게, 필자는 전 용인본당 출신 사제로서, 또 용인 본당 제3대 주임신부도 역임하면서, 당시 용인 본당 내의 32개 공소에 봄 가을 판공 때마다 전 현직 회장님들한테 적잖이 들어 알게 된 바를 경향잡지의 서상요 바오로 기자에게 이야기하여 주었더니, 서기자는 이를 바탕으로, 1978년 12월 호 경향잡지 특집, '이 달의 인물'로, 용인본당 권형규 요셉 회장의 활약상을 집필하여 게재하였읍니다.>.
우리 한국의 본당이나 공소의 회장님들 중에는 거룩한 사도직의 모범이 되는 성인다운 우리의 선배들이 허다하므로, 이 선구자 선조들은 우리 나라 교회의 평신도들 뿐 아니라 성직자들에게도, 나아가, 전 세계 교회 신도들에게도 거룩한 신앙의 거울이며 교과서로서, 우리 신앙사의 보배이므로, 전국 모든 교회기관에서는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 뿐 아니라, 평신도들의 거룩한 활동 역사도 지키고 보전되도록 해야 하겠읍니다.,
째째하고 창피스러울 정도로 같은 한 시대의 같은 종교 단체를 일터로 하여 천주님을 위하는 교회 안에서, 마치 시기와 질투심으로 광난하는 일부 정치인들처럼 부끄럽고 못된 뻔식이 뻔돌이 뻔순이 무리들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서 이벽 성조를 비롯한 거룩하고 위대한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의 선조들과 선배들과 선임자들이 순교정신으로 이룩한 영웅적으로 거룩히 빛나는 업적을 감탄하고 격찬하며 찬미하고 감사하며 본받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부끄럽고 뻔뻔스럽게도 없는 흉을 짐작으로 만들어 보태고 붙여가며 비평과 비난으로 헐뜯고 할퀴고, 모든 업적을 지우며 망치기에 치중하는 짓을 본업으로 삼고자 하는 못난이들이 없지 않으나, 이는 못하게 막아야 할 것입니다. 남들이 잘한 일을 보면 자신이 잘못한 일을 보는 것보다 더욱 외면하고 싫어하다 못해 증오하며, 파괴함으로써 자신을 들어내려는 소아마비적 사고방식을 버리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함혈분인선오기구 -含血吩人先汚其口>.진리와 진실과 정의는 영원하여, 누구도 백지화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혹한과 폭설 속에 이 해가 저물어가는 성탄을 앞두고, 양평 본당 곡수공소의 최초 전교자 김영수 요셉과,
최초 개종 입교자 김복수 요셉, 등, 초대 공소 회장님들을 기억하며, 한 조각 돌을 세우면서 !!! Msgr. Byon. 2022/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