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집, [성당 사랑의 기도가] (祈禱歌)
가사: [마음의 성당] 건립과 [성당 사랑의 기도 노래]. 작사 변기영 신부.1980. 인준 김남수 주교 .
주님의 집으로 가자 할제 / 나는 몹씨 기뻤노라. / 주님의 집에 가서 나의 주님께 / 나는 모든이의 복을 빌겠노라. /
주여, 주님의 집은 내 마음의 그리운 고향이기에 / 나는 주님의 집 생각에 / 내 마음 애태우다 지치나이다. /
참새도 새끼치는 둥지를 틀고 / 제비도 제 집을 짖사오니 / 나는 주님의 집을 세우고 / 거기서 주님을 찬미하리이다.
곡조:.<변기영 신부 작곡, 4부 합창 편곡 차인현 신부(?)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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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 작곡, 수정, 편곡 완료 - 1980년 ~1986년 변기영 신부, : 인준 - 1980년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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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집], 우리 [성당 사랑의 기도가]를 부르며 ,,,, !
[성당 사랑의 기도가] 내력 * 본래 이 성가는 1980년 9월 5일, 양평 본당 성당 건물이 화재로 전소하자, 당시 본당 주임 젊은 송병수 신부는 경악하며 실망하여 낙담하며, 울며불며 몇몇 교우들과 힘을 합쳐, 불에 탄 성당 터 재터미 한 쪽에 임시 천막을 치고, 매일 평일 미사와 주일 미사도 울면서 바치며, 당시 서울 퇴계로 주교회의 4층에 있던, 한국주교회의 200주년기념위원회 사무국장으로 기획수립과 요원 선발인사 업무에 몰두하던, 시골 태생의 못나고 무능한 선배, 필자의 집무실까지 찾아와서도 울먹였는데, 내게는 실로 가슴이 뭉클하며 찡하는 충격을 주는 강론 소리로 들렸다.
당시 천진암 성지는 필자가 무일푼으로 정말 기적같이 교회 땅 한평도 없던 심산궁곡 골짜기에서, 급한대로 우선 땅만 약 7만여 평 주로 임야를(지금은 38만 5천여 평) 확보하고, 한민족백년계획천진암대성당건립운동에 착수하여, 우선 기도문 초안을 작성하여 교구장 김남수 주교님의 허락을 받아, 천진암 성지 큰 행사 때마다도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성당 터와 주변의 수 만평 대성당 터닦기의 엄청난 7년간의 대규모 강한 암반 50m 높이 굴착과 평탄의 극난한 토목공사도 이 기도로 힘을 내며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빈 손으로 실제로 아무 일없이, 정말 무사고로 마쳤다. 그런데 교구장 주교님께서는, 우선 이런 기도를 가장 시급히 필요로하는 곳들이 생기면, 양평본당의 경우처럼, 당시 화재로 다 타버린 재터미에 교우들과 함께 주임신부가 천막에서 울먹이며 매일 평일미사와 주일미사를 드린다니, 교구장 주교의 마음이 오죽하랴! 또 그 본당신부는 하다못해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허둥대는 처지므로,,,,,!
그런데 당시 전국에서 가난한 교구로 소문난 수원교구에 대신학생들은 전국에서 서울 대교구 다음으로 가장 많아서 대신학생들의 학비 수업료와 기숙사비를, 거듭되는 재촉에도 제 때에 납부하지 못하자, 대신학교 운영을 맡아, 몹시 쪼들리고 시달리다 못한 서울대교구 총대리 최 모이서 신부는 나와 수원교구 당가(경리담당) 서강하 신부가 동석한 자리에서, 혜화동 대신학교 운영이 너무 어려워, 진지한 자세로, 부득이 30 여명에 달하는 수원교구 소속 대신학생들은 수원교구청으 로 돌려 보내어, 수원교구청에서 수업을 하게 할 수 밖에 없다고, 정말 듣기에 매우 섭섭한 아주 심한 말까지 할 때였다. 특히, 교구장 윤공희 주교는 전남 광주대교구장으로 전보되고, 후임 김남수 주교는 임명되기 전으로, 좀 속된 표현으로, 수원교구는 무주공산 같은 상태였다. 그러나 성령이 계시어,,,!
그러나 서울 수원 교구 분리 이전에, 특히 1886년을 전후하여, Eusenius Ghost 신부(한국 성 고 신부) 주도하에 서울 한양의 명동대성당 건축을 위해 종현 언덕에 성당 터전을 닦기 시작할 당시 전국에 조선인 성직자는 1명도 없었고, 수녀도 1명조차 없을 때 전국 천주교 신자 수는 약 1만여명 내외 미만으로, 전국에 신부들은 파리외방전교회원 10명 뿐이고, 한양에는 신도들이 불과 2백~3백 여명 내외 뿐, 모두 주로 중인계급 비노동자들로, 막노동 인력 신도들은 서울 근교의 구산공소와 안양 하우현 지역의 가난한 시골 농민 신도들, 등 오늘의 수원교구 신도들이 부역 봉사의 중심을 이루며, 오늘의 서울대교구 건설을 도맡아 하였고, 당시 서울교구 소속 사제의 다수는 수원교구와 대전교구 출신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 고생한 시골 교구가 일시 교구장 부재 결손으로 30 여명에 이르는 대신학생들을 돈없다고 수원으교구청으로 내려 보낸다니, 서럽기만 하였다. 그래서 서울 시내는 눈을 씻고 봐도 신자들 보기가 힘든데다가, 그나마 주로 노력동원 대상들은 아니었다. 대신학교 건축과 명동대성당 건축에 수십년씩 수원, 안성, 용인, 이천, 왕림, 평택, 등, 우리 시골 교우들이 매년 달포 이상씩 반복하여 부역하며 무보수의 희생적인 봉사로 함께 지었다는 역사는 여러 오래된 본당과 공소 노인회장들의 증언이 생생하여, 우리 시골 교구 사제들의 마음 속에서 부활하는듯 하였다.,,,,!
오죽하면 가을 추수 후 본당들의 교구 공납금 쌀이 들어올 때까지만이라도 참아 주든가, 혹은 큰 살림하는 대교구에서 임시 차용하여 대납해주기를 부탁하러 서울 대교구청 사무실에 갔다가, 마치 놀부 형님 집에 갔던 흥부처럼, 야단만 되게 맞자, 서신부도 나도 하도 기가 막혀, 다른 국장 신부들이 다 있는 데서, 특히, 철부지 젊은 변기영 신부의 입에서는, 이 때나 그 때나 겁도 없이, 그 큰 목소리로, '오늘 밤에 서부전선이라도 좀 터져서, 인민군이 한강 다리까지만 서너번 왔다 갔다하여, 서울대교구장 대주교와 서울 대본당신부들이 피난 보따리 이불이랑 등에 걸머지고, 수원교구 시골본당 보좌신부들 방문 앞에 와서, 하룻밤만 자고 가게 해주게 하는 소리를 서너번만 들어봤으면 좋겠다 ! '는, 신부답지 않은 독한 말까지 얼떨결에 튀어나오자, 나보다 나이는 두살 어리지만 신품은 내게 2년 선배로 학생 때부터 도서관 일로 나와 친하던 주교 비서 박준영 신부가 뛰어 나와 손으로 내 입을 막으며, 어이, 변신부, 점심이나 하러 가세. 바로 요 집 뒤에 [신정]에 가서 내가 샤브샤브 사줄께, 하며 우리를 끌고 나갔다.
독침과 같은 이 말은 한동안 서울과 수원 교구의 선배 사제들 사이에 이야기거리기도 하였다. 교구장 주교가 없던 교구라 더 만만히 보는듯 하였다. 오죽하면 저 새 신부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왔으랴 !? 이 사껀은 바로 얼마 안되어 후임 수원교구장 주교(김남수 주교)가 선임되면서, 서울교구 내에 비공식적인(Virtualiter) 수원교구 사제 양성 부인들 후원회, [울술라회] 탄생을 가져왔다. 조원길 신부의 업적이다.
전국에서 가난으로 소문난, 수원교구의 구석구석마다, 실로 가난이 자갈처럼 깔린 수원교구에서 가장 가난한 산악지대 양평 시골본당이 화재로 성당을 잃은 고통을 전국 모든 본당과 교회 기관에도 알려서, 성금이야 기대하기 힘들겠지만, 다소간의 성금의 송금이 어려우면 관심과 기도라도, 위로나 격려전화 한 마디라도 해주도록 도움을 청해 보자고 교구장님은 말씀하셨다. 그래서 기도문도 새로 지을 겨를이 없자, 급하게 마련하느라고, 이미 성지에서 사용하는 기도문을, '천진암 성지' 라는 말마디와, '백년계획천진암대성당건립' 명칭, 등만 빼고 다듬어서, 천진암 성지 인쇄물로 전국 교회기관에 배포하였다.
그러나, 온 나라의 정치 경제가 어려워,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청 안 뜰에까지 나와 장관들과 함께 콩을 심었다는 뉴스가 나오던 던 시절이라, 성금은 수원교구 몇몇 본당에서만 체면상으로 조금씩 그래도 보내왔으며, 곁에서 볼 때, 솔직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송병수 신부만이 홀로 불철주야로 발품을 팔며, 세련되지 않고 시골의 촌티나는 그러나 순진한 동냥꾼 일부 사제들의 어색한 말품을 팔고 다니느라고 동분서주하며, 불탄 양평본당의 새 성당 건물 건축은 그래도 애타는 마음 뿐이었지만, 그나마 억지로라도 바로 서둘렀으나, 실로 빈 손으로 시작하며, 하늘만 바라보고 기도할 뿐이었다. 그래도 송신부의 열성과 고통으로 이듬 해, 즉, 1981년 6월 24일(?) 경, 송신부는 맨 손으로 기도하며 성당을 거의 완공시켜, 우선 비를 가리는 지붕까지 6월말에 준공하였다. 교구에서도 모두 천주님과 양근 지역 권철신, 권일신, 등, 순교신앙선조들에게 깊은 감사를 올렸다 !
그런데 막연한 장기계획 100년계획의 천진암 성지에서는 위 기도문을 바치면서 계속 생각도 못하던 은총의 도우심을 받았다., 예컨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안중본당 관할 안정리에 주둔한 미 8군의 802 공병대대가 미 본토로 이동하여 해체되기 전에, 천진암 성지 안에까지 훈련하러 왔다가 성지 주임 변기영 신부의 완강한 제지로 새벽에 부대장 매커루크 소령(D. M. Major Makaruk)과 변신부 간의 일어난 토론을 계기로, 1년간 부대훈련 삼아 큰 토목공사를 해 줄듯 보였는데, 사실은 총 3년간(1989~1991). 대민업무로 막대한 분량의 토목 난공사를 하였다. 그러나 당시 매커러 소령은 공병 장교가 아니었고, 특수 헬기부대장이었다.
그런데 Major Makaruk 소령은, 오늘날 전쟁이 극심한 UKRAINA 출신으로, 당시는 공산권이이라서, 출신 모국이 소련 관할이라서, 사관학교 동기생들보다 진급이 좀 늦고 힘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부하들한테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공병과 장교가 아니었는데도,미8군의 헬기부대 특수부대 소속 부대장으로서 교회를 위하여 천진암 성지와 미군 본부 사이에 좋은 가교역할을 하였다.
매커러 소령의 주선과 후원으로 미 802 공병단이 약 2년 간에 걸쳐 추가로 천진암 대성당 터의 극난한 암반 굴착 기초공사를 담당하였고, 씨크레퍼 등을 비롯한 한국에는 없던 중장비 팀이 떠난 후, 미완성으로 중단되자, 공사는 아주 난감했었으나, 열심한 기도전문가들의 기도에 힘입어, 터닦기 공사는 전국 천진회원들의 뜨거운 기도로, 천주교신자도 아닌 ,최무웅 사장의 지원으로 그나마 오늘의 모습으로 마치게 되었다. 천주님께 감사를 !
그런데 체코 프라하의 1,000년(AD 935년~1929년) 걸린 대성당은 터닦기에만 400 여년(AD 935년~1,344년) 걸린데 비하면, 당시 그곳의 거기 3천여평보다 10배 이상 더 드넓은 3만 여평의 천진암 대성당 터 강암반 난공사가 불과 7년(1985년~1991년) 여에 끝난 것은, 주로 천진회원들의 기도와 2 분들의 공이 컸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들의 고마운 업적을 바티칸에 알리도록 주한 교황청 대사에게 추천하여, 소련계 우크라이나 출신의 동방교회 신자인 매커러 소령에게는 당시 주한 교황청 대사 이반 디아스 대주교(훗날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장관 추기경, Ivan Cardinal Dias)의 승인과 후원으로, 로마 교황님이 주시는 평신도 최고 훈장, St. Gregorio 십자 훈장을 받게 하였다.
1991년 12월 4일(수) 오전 11시, 천진암성지 주임 변기영 신부가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시성추진 및 천진암대성당건립추진차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를 뵈옵고, 천진암대성당 터 제7차 공사를 무상으로 봉사한 미신자 최무웅 사장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대성당 건립 기도문은 신구약 성경에서 명구와 대의를 더 추려 재편집, 작곡한 후, 성지의 큰 행사 때마다 행사 순서에 넣어 특별 성가대가 정성껏 불러왔다. 그 때의 천진암 성지처럼, 지금 일부 새 본당에서 성당은 지어야 할텐데 땅도, 건축비도 없이, 새 성당 건립 중인 본당들 뿐 아니라, 이미 완공된 성당의 모든 본당 신도들도, 자기가 사는 집이나 주변의 학교, 병원, 백화점, 오락장, 체육관, 또는, 자주 찾는 친지들의 잘 지은 집보다 못지 않게, 우리 자신이 다니는 자기네 성당, 즉, 주님의 집도 소홀함없이, 잊지 않고 사랑하는 신도들이 된다면, 반드시 주님의 집이 저들을 또한 사랑하며, 아끼고, 지키고, 가꾸며, 도우며, 키울 것이니, 되도록 매일 미사 후 성당 문을 나서기 전, 노래로, 이 기도를 바치며 귀가하는 신도들이나 본당이나 단체는 뜻밖의 기적같은 일들을 받게 되리라 믿는다.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 대성전, 특히, 유롭 여러 나라 신도들과 로마 베드로 대성당을 비롯한, 선진 각국의 신도들 마음 속에는 자기네 교구 주교좌 대성당 뿐 아니라, 각자가 태어나 유아영세하고 잔 뼈가 굵어진 고향본당의 성당건물을 잊지 않고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을 한평생 간직하고 살아 가듯이, 우리도 우리의 선조들이 목숨을 바쳐야만 살아나오던 무서운 박해 중에도 우리 한국 순교 선조들의 피로 물든 발자욱을 뒤따라 가야 할 우리에게는 아직 예루살렘 성전도, 로마 바티칸 언덕의 성 베드로 대성당도 없으므로, 우리들의 성당, 주님의 집을 기억하고 늘 사랑하며 잊지 않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라도 항상 거룩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마음으로 항상 그리워하는 우리 마음 속의 성당도 세워야 하며, 우리 손으로 지어, 잊지 말아야 하겠다. 각자 모두 우리의 성당을 사랑하자. 외출이나 여행 중에는 우리 성당 주님의 집을 그리움으로 참배하며 사랑하고, 이 험난하고 흉악한 한 세상을 살아가자.
우리가 할 일은 너무나 많고, 인생은 너무나 짧은데, 세월은 너무나 빠르고, 세상은 너무도 흉악하며, 우리가 가진 것은 없으나, 그래도 유일한 재산으로, 우리 모두에게는 주님의 집이 있지 않은가 ! ? 주님의 집, 우리 [성당 사랑의 기도가]를 부르며, 금년 부활절을 앞둔 성주간을 주님의 집, 우리 성당에서, 우리 [성당 사랑의 기도가]를 모두가 모여 함께 부르며 거룩히 지내자!
<2023. 3. 25.卞基榮 몬시뇰,입력 : 2023.03.25 오전 10: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