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E. Mons. Emil Paul TSCHERRIG의 새 추기경 임명 소식과,
1982년 당시 한국천주교회 사제로는 최초(?)의 5년짜리 복수여권 발급 회고!
이번에 교황님께서 새로 임명하신 21명 추기경 중에, S. E. Mons. Emil Paul TSCHERRIG, 주 Argentina 교황청 대사 재직 중, Nunzio Apostolico, 신임 체리 추기경은 일찌기 주한 교황청 대사관에 2 차례나, 1차는 외교관 근무와 활동이 매우 어렵던 시대에 참사관으로 1982년~1984년 3년간, 그 후에 2차는 주한 교황청 대사로, 2004년~2008년의 5년간 재직하며 한국교회 발전에 봉사이상의 혹사를 하였다.
1980년대 초 당시 언론의 보도 표현대로 5.18 광주 사태 직후 매우 혼란한 한국 사회 안에서 대단히 극난한 천주교회 전국 차원의 한국천주교회 200주년기념행사와, 한민족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건립계획 수립과 교회 연륜이너무나 어린 처지에서, 특히, 한국순교복자103위시성추진과, 더욱이, 한국천주교회 역사적인 요한-바오로 2세, 로마 교황의 최초 한국 방문 추진 시도, 등에 관한 한국천주교회 역사상 너무나 생소한 최초의 역사적인 대업 추진에 주한 교황청 대사이던, 당시 우리 사제들이, Sua Gentilezza,라고 존칭하던, Francesco Monterisi 대주교, 현재 로마 주재 추기경을 모시고, 당시 사제 참사관이었던 젊은 체리 몬시뇰은 실로 한국교회 발전에 지대한 역사적인 공헌을 하였다.
1981년 광주사태이후는 해외 우편물 발송과 접수뿐 아니라, 우리 천주교회 성직자들의 외국 방문을 위한 출국은 정말 극난하던 시절이었다. 외국 우편물 접수나 발송은 각종 심한 검열로 인하여, 빨라야 으례 1개월 반이상씩 걸렸었다. 그래서 당시 주교회의에서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사무국장 겸 103위순교복자시성추진부장이라는 무거운 멍애와 큰 감투를 겸하여 지니고 있던 필자는 교황청 시성부와 몇몇 다른 부서들과 로마 연락관, postulatore 와 우리 시복시성 담당변호사와의 필요한 통신이나 우편물 교신을 신속히 하기는 너무나 극난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당시부터2023년 지금 오늘날까지, 54년째 무사고로 재직하고 있는, 주한교황대사관 직원, 첼시오 기사는 한국천주교회 내의 가장 모범적인 최 장기 근속 평신도 직원으로서, 천진암 성지에 교황대사 모시고 종종 순례오면서, 우리의 당시 어려운 로마와의 원활한 문서 우편을 안내하며 주선하여 주려고 애썼다. 그래서 교황대사관의 당시 사제 참사관 몬시뇰 체리의 협력과 교황청 대사 몬떼리시 대주교의 묵인으로, 특히, 당시 참사관 직책의 감독 실무자 체리 몬시뇰의 쉽지 않은 업무 협조로, 103위 순교복자들의 시성추진을 위해 우리도 [대사관의 외교행랑]을 시급할 때마다 종종 같이 함께 쓰도록 주선하였다. 국제적으로 골치아픈 일들을 저지르기도 하는 천주교 성직자들의 업무지원은 일부 그리 달갑지도 않고, 그리 쉽지도 않은, 그러나 불가피한 필요사항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은 당시 귀신같은 관계기관에서 어떻게 알고, 규정 위반이라고 투덜거렸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가간의 공식 외교 우편물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들도 외교행랑으로 보내고 받고 하면, 관계기관으로서는 아무리 신경을 써서 챙겨도, 국내 관계기관의 검열 눈초리와 손길을 피해갈 수 있으므로, 심히 불안하다는 것이었다.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주교특별위원회 사무국장 겸 103위 시성추진부장의 필자가 주도하는 우리 우편물은 이렇게 한편으로는 구박을 받는 대상이면서도 떼를 써서 대사관 외교행랑에까지 끼어들어 이용함으로 약 2주일이면 회신을 받아, 그나마 숨통이 트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우편물 때문에 다른 공식 우편물까지 필요이상 요시찰, 검열 대상이 되어서, 지체시키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며, 관계자들은 서로가 모두 좀 힘들어, 살벌하던 시대였다.
특히, 우리 신부들의 해외 여행이나 외국 방문은 통제가 극심하여, 해외 장기 체류 유학생 신부들 여권도 몇달씩 때로는 1~2년씩 걸려도 나오지 않아, 실업자 같이 빈둥거리며 불안해 하는 방랑 사제들로 해외 출국 대기자들은 애를 먹었다. 특히, 교구장 주교님들까지도, <1년짜리 단수 여권> 발급을, 그나마도 힘들게 애를 먹이면서 내줘서, 단 한번 쓰고 귀국 후 휴지처럼 찢어버리고 마는데, 마치 오늘의 공산권 일부 국가에서처럼, 성직자가 다시 출국 할 때마다, 여권 수속을 다시 몇달씩 걸려서 미리 수속을 일부 해 놔야 하고, 관계기관의 요청이상의 강력한 지시 사항(?)으로, 해외 나가서 만나게 될, 교황님을 비롯한 접촉 대상 인물과, 목적, 등을 미리 알려야 했으며, 그리하여 당시 주교회의 사무총장신부가 우리 성직자들의 출국에 관한 예비 심사를 한다고까지 소문이 날만큼, 사제들 간에는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총장신부도 상부 방침으로 마지 못해, 불가피하여 매우 난처한 일이었다. 특히, 필자같은 젊은 애송이 신부가 교황청을 수시로 방문한다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매우 못 마땅히 여기는 선배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때였다.
그런데 1982년 11월 경, 수원교구장 겸 우리 위원장이신 김남수 주교님의 어려운 묵인하에, 필자가 로마 교황청 방문 여권 수속을, 내 동창신부 형님, 조선종 바오로 사장이 하던 삼방여행사가 시작은 하였으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또, 그 분들의 목소리가 너무나 막강하고 대단하여, 같은 건물의 이웃 사무실 간에도 점심은 고사하고, 그야말로 물 한컵을 맘 편히 얻어 마시기가 어렵던 그 시절, 최대의 비협조를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일도 적지 않았으므로, 필자의 로마 방문 추진은 사실상 의욕과 계획일 뿐, 실현 가능성이 거의 불가능한 매우 실망적이었으며, 실로 난감한 현실이었다.
더우기 당시 교황대사 몬떼리시 대주교는 국내에서 자유로이 처리하기 어려운 일들을 로마에 가서 체류하며 업무를 보고 오시는듯 하기도 하여, 한두달 정도씩 머물던 시절이라서, 대사 부재 중에 사제 참사관 체리 몬시뇰이 대사관 업무와 살림 운영을 책임지고 맡아 할 때였으므로, 자기 권한 밖의 사무라고 필자의 로마 방문과 여권 취득에 외교행정 지원을 처음에는 좀 난처해 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위하여 꼭 필요한 일만큼은,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정확하고 용감한 자세로, 굳세고 바르고 정정 당당히 시행하던 성직자 외교관으로서, 체리 몬시뇰은 교황대사 부재시에 대사의 정상적인 일상 직무를 대행하는 차원에서, 실제로는 광주사태 후유증 사회 분위기인데도 필자를 위한 교황청 방문 여권 관계의 그 어려운 사무처리를 체리 몬시뇰은 과감하게 거뜬히 신속처리하여 주었다. 지금 생각해도Deo Gratias !!! 다.
그래서 몬시뇰 체리는 훨씬 일찍 추기경에 임용되셨어야 할 인격의 성직자였다고 느껴졌었다. 그 때나 이 때나 연륜이 어린 우리 한국교회일부 성직자들처럼,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이나, 하지도 못하는 일이나, 특히 남들이시작한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큰 일들이 대성공을 거두는 경우, 기뻐하기는커녕 우리 교회 안에서 그러한 새로운 일들의 주인공이 되는 당시 흔한 말로 몇 안되는, 문제아(?) 신부들을 못 마땅하게 여기며, 심지어, 시기하고, 질투하며, 억지 심술까지 서슴치 않아, 교황님께서 문서상으로 친필 서명하시여, 교황대사를 통해 공개적으로 공식 행사에서 강복하신 거룩한 성전 건축사업까지도 백지화를 위하여 온갖 수단을 강구한다는 오해를 받는 분위기에서, 오늘날의 현재 일부 한국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교황청 주요 요직에까지 임용되는 것은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폭넓은 인품 덕이오, 성모님과 천상의 우리 순교선조들께서 천상에서 보살피시는 안배의 손길이라고 확신한다. 실제로 천상에서는, 지금 지상에서 들볶이며 허덕이는 오늘의 우리를 굽어보시는 우리 신앙의 순교선조들께서 확실히 계시다는 분명한 사실을 우리 모두는 확신해야 한다.!
더우기, 당시 교구장 주교들도 <1 년짜리 단수여권>, 그나마도 간신히 어렵게 발급받던 시절, 젊은 애송이 변기영 신부가 국내 사제로서 교회 일로는 최초로 <5년짜리 복수 여권>을 받아들고, 쉬쉬하며, 감추려 하여도, 소문은 더 빠르게 나서, 김남수 주교님과 다른 신부들을 놀라게 하는, 당시로서는 실로 놀랄만한 일이었고, 그 외에도 처음 로마에 가는 필자가, 12명 내외의 로마 교황청 대법원 대법관들의 연례 선서식에, 비록 옵서버 자격으로서나마 함께 교황궁 3층 소 회의실에서 참석하고나서, 각국에서 온 10 여명의 장관급 몇몇 극소수의 VIP들과 함께 차례대로 요한-바오로 2세 교황님의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면서 알현하고, 교황님의 기념물로 교회법 새 수정본까지 하사받게 되었으며, 또 전 날 오전에는 장시간 시성부 장관실에 가서 팔라찌니 추기경과의 면담까지 성사되도록 사전에 추천, 주선하신 걸로 믿던 옛날의 체리 몬시뇰과, 오늘의 체리 추기경께, 필자는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계속> Msgr. Peter Byon.
<30여년 전의 교황 방문객 현장 사진들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는, L'Osservatore Romano의 Photos 관리 보전에 감탄이,,,! |
1983년 02.26. 103 시성추진을 위하여 처음 로마 바티칸을 방문하여, 교황 요한바오로 2세를 뵙고, 대법관들 10여명과 함께 기념촬영한 사진-사진을 보면서, 앞줄 대법관들과 교황님 좌편 둘째 줄 뒤로 Giullio Dante 우리 변호사와 같은 줄에서 두번째가 변기영 신부. |
1983년 02.26 .103 시성추진을 위하여 처음 방문하여, 교황 요한바오로 2세를 뵙던 성하의 접견 사진들 중 좋은 장면들 몇장은 귀국 후 모 출판사에서 잠시 참고하여 사용하고 돌려드린다면서 아직까지 반환하지 않고 꿩구어먹은 자리가 되어 아쉬움이 있다. |
1983년 02.26 .103 시성추진을 위하여 처음 방문하여, 교황 요한바오로 2세를 뵙던 성하의 접견 사진들 중 좋은 장면들 몇장은 귀국 후 모 출판사에서 잠시 참고하여 사용하고 돌려드린다면서 아직까지 반환하지 않고 꿩구어먹은 자리가 되어 아쉬움이 있다.
필자가 1971년 천주교회 사제가 된 후부터 일곱 분의 역대 교황님들 치하에서 지금까지 54년 째 사제생활에 매진하여 왔는데, 그 동안 역대 주한교황청 대사 대주교님들 중에 로마 교회의 교황선거권과 피선거권까지 지니는 추기경 지위에 임명되신 분들은, 천진암 성지 개척과 103위 순교복자 시성추진, 및 요한-바오로 2세의 로마 교황 한국 최초 방한 추진과 한민족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건립 추진,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도록 추천하며, 주선하여,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함께해 주셨던, 역대 주한 교황 대사님들, 특히, 프란치스코 몬테리시 대주교님과, 이반 디아스 대주교님,(후에 추기경으로서 인류복음화성 장관 역임), 그리고, 이번에 임명되신, 에밀 폴 체릭 대주교님, 등이다.
전 세계 각국에 파견되고 있는 수많은 교황청 대사 대주교님들을 염두에 두고 되돌아보면, 주 한국교황청 대사 출신의 추기경 선임은, 실로 기적적인 [많은 수]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 모두 지상과 천상에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과 함께 기리 존경과 찬미를 드리도록 해야 하겠다. !-<추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