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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혈순교자들의 마지막 숨결소리

Bloodless Martyrs' Breathless Voices

주님과 내가 나눈 대화 한 토막 - 1 - 아버지 하느님이 나에게.<Contemplative writings of the Most Rev.Kim retired, hermitic Bishop in Je Joo island.>

글 : 주교 김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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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無血 殉敎者들의 숨결 - Breathless Voices of the Bloodless Martyrs - 제주교구 원로 교구장 김창렬 주교님의 묵상록 !

첫 소개드리는 말씀. 제주교구 원로 교구장 김창렬 주교님의 깊은 묵상록과 주옥같은 말씀을 부족한 우리 후학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공경하올 김주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연로하신 주교님을 도와드리는 현순심 다리아 자매님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순교자들의 외치는 소리-Voice of Martyrs]라는 메뉴의 명칭을,[오늘의 無血 殉敎者들의 숨결-Breathless Voices of the Bloodless Martyrs]로 곧 바꾸기로 하였읍니다. 그러나 내용은 그대로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을 모두 [무혈의 순교자 군상]으로 들어높히고 올리며, 그 숨결 소리마저 여기에 옮겨드리고자 한답니다. 존경하옵는 우리 사부님, 김창렬 주교님의 주옥같은 묵상록 게재가 우선 윤허를 받은 첫 글입니다. 2023년 순교자 성월 9월 26일, 이제는 모두 성인반열에 오르신 [103위 옛 순교복자 축일]에 이곳 곡수리 성당, [하느님의 종] 순교자 사우거사 권일신 기념서재에서. 변기영 몬시뇰 드림

<오늘의 無血 殉敎者들의 숨결-Breathless Voices of the Bloodless Martyrs>

     소개의 말씀 - 오늘날 [무혈 순교생활]의 숨결과 그 영성이 울리는 소리 !  <Bloodless Martyrdom in the Martyrs' Breathing today !>

 

     제주교구 원로 교구장 김창렬 주교님의 깊은 묵상과 주옥같은 말씀을 부족한 우리 후학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공경하올 김주교님께 감사를 올립시다. 동시에, 연로하신 주교님을 도와드리는 고마우신 현순심 다리아 자매님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순교자들이 외치는 소리-Voice of Martyrs]라는  메뉴 이름을, [오늘의 無血 殉敎者들의 숨결-Breathless Voices of the Bloodless Martyrs]로 곧 바꾸기로 하였읍니다. 그러나  내용은 그대로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을 모두 무혈의 순교자 군상으로 들어높히고 올리며, 그 숨결을 여기에 옮겨 봅니다. 존경하옵는 우리 사부님, 김창렬 주교님의  주옥같은 심오한 묵상록 게재가 우선 윤허를 받은 첫 글입니다. 

 

     2023년 순교자 성월 9월 26일, 이제는 모두 성인 반열에 오르신 103위 옛 순교복자 축일에 이곳 곡수리 성당,  [하느님의 종], 순교자 사우거사 권일신 기념서재에서, <오늘의 無血 殉敎者들의 숨결 - Breathless Voices of the Bloodless Martyrs> 메뉴에 올리면서, 주교님의 심오한 묵상의 주옥같은 문장은 일체 그대로, 절대로 아무런 첨삭이나 수정이 없이, 보내주시는 그대로, 반드시 '그대로 게재함'을 철칙으로 삼고, 준수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대표, 변기영 몬시뇰 드림- 

                             **************************************************************************************** 

      

김창렬 주교가 그에게 만들어주신 이 대화를 올리오니, 

너그러이 용납해 주시면 저에게 큰 기쁨이 되겠습니다. 

 

                                                                                                                                2023. 9. 21.

                                                                                                             제주 새미 은총의 동산에서

                                                                                                                                      은수자

           

주님과 내가 나눈 대화 한 토막 -1

 

 

아버지 하느님이 나에게

 

네가 전보다 내게 찬미와 감사의 기도  

좀 더 많이 바칠 줄 알게 되었으니 기쁘다.

내게 찬미와 영광을 바치고

내가 준 은혜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늘 간직하면

나는 더욱 많은 은혜를 네게 베풀어 주겠다.

그러나 내게 간청하는 일도 함께하여라.

네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몰라서가 아니다.

네가 내게 무엇을 청한다는 것은

곧 내 능력과 사랑을 인정하는 것이고

네가 약한 존재임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게 간청하기를 그치지 마라.

그가 몸소 내게 바쳤고 또

너희에게 가르쳐 준 기도를 보아라.

내 이름을 찬양하고 내게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그쳤더냐?

그렇지 않음을 너는 안다.

네게 필요한 것을 구체적으로 일러 주며

내게 청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더냐?

그러니 그렇게 하여라.

간청 기도는 단순한 간청이 아님을 알아라.

그것은 네가 내 아들 됨을 깨우쳐 주고

아버지인 나에 대한 신뢰심을 북돋아 주며

내 무한한 지혜와 사랑과 자비심 그리고

내 전능에 대하여 고백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내게 청하기를 주저하지 마라.

 

그런데 네게 일러둘 말이 있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니라

내게 올 때 네가 쓰고 사는 가면을 벗어 버리라는 것이다.

나는 가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네 얼굴을, 네 그대로의 얼굴을 보고 싶다.

가면이나 화장을 한 얼굴은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네 얼굴이 아니지 않느냐?

네가 만일 가면을 쓰고 온다면

네 얼굴을 마주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내 뜻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부득이 얼굴을 돌릴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앞에 나타날 때만이라도 좋으니

그때는 네가 쓰고 있는

모든 가면을 벗어 던지도록 하여라.

네가 내 앞에서 감히 존경받으려 하고

위풍을 드러내려 하려느냐?

네 머리에 쓰고 있는 관,

네 몸에 걸쳐지는 복장들,

네 손에 들려지는 지팡이,

네 손가락에 끼여지는 반지,

이 모든 것을 내던지고 나서

맨 얼굴과 알몸으로 오너라.

내 앞에서 점잖은 척, 스승인 척하는 꼴은

차마 볼 수가 없다.

 

예수 형님께서 나에게

 

너는 기도에 있어서 진실하지 않았지.

마음에 없는 것을

입으로만 외운 일이 많았음을 알지.

빈말을 늘어놓았음을 깨달았지?

내가 가르쳐 준 기도문을

네가 어떻게 외워 왔는지 생각해 보아라.

네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할 때

그 하늘은 네 눈으로 보는 저 하늘이 아니라

가까이할 수 없는 영원무궁한

하느님의 거처를 두고 한 말인 줄 몰랐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기를 빌 때

너는 그분의 이름이

바로 그분 자신임을 생각하지 못했지?

그분은 당신의 이름을

“나는 나다.”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따라서 ‘나’, 즉 그분의 이름은

바로 그분 자신을 뜻하는 것임을 알아라.

또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할 때

너는 그 나라를 어떻게 생각했느냐?

그분의 나라는 내가 말한 대로

여기에 있다. 혹은 저기에 있다고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은총을 입고 사는 모든 사람 안에 있는 나라다.

너는 그것을 생각하며 기도했느냐?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청할 때

저 영원에서와같이 이 피조 세계에서도,

그러니까 지구만이 아니고 온 우주에 걸쳐서

그분의 영원한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도했느냐?

음식의 부족을 느끼지 않고 지내므로

일용할 양식을 간절히 청할 마음 없이

바치지는 않았더냐?

영육 간의 양식이 매일매일 필요한

네 처지임을 아느냐?

네게 잘못한 형제는 용서해 주지도 않으면서

아버지에게는

용서를 자주 청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네 잘못을 인정하면서 용서를 청하긴 한 것이냐?

네가 용서를 청하지 않아도 될 날이

하루도 없음을 깨닫기나 했느냐?

무서운 유혹들이

네 주변에 얼마나 많으며

또 그것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건성으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고’ 하며

입을 놀린 것이 아니냐?

또한, 사탄과 그 세력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음흉하고 끈질기게

악을 조장하는지

알거나 깨닫지도 못하면서

그것들로부터의 해방을 청한 것이 아니냐?

나는 필요 없는 기도를

가르치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발음만 해도 좋을 기도를

가르치지 않았다.

나는 진실하다.

내가 하라고 한 것은

해야 할 일이고

하지 말라고 한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내 육화와 지상 생활과 수난과 죽음이

거짓이나 가식이나 쇼show가 아니듯이

내 가르침도 역시 그렇다.

너는 내 가르침에 충실하고

네가 집행하거나

참례하는 전례와 성사와

성무에 진실하여라.

 

내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형님께

 

내 마음에 일러주신 말씀들을

명심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그것은 당신과 나 사이에 매우 흐뭇한

집안 식구의 만남이 되리라 믿습니다.

나는 이제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고

믿음과 애정을 가지고 살렵니다.

나는 예수 형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살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그 이름을 부를 때 정말 기쁘겠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에는

능력이 있고 치유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을 이용하기를 바라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하여 일상생활에서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상관없이

늘 예수 형님의 이름을 사용하겠습니다.

미신이 행해지는 곳,

혹은 다툼이 있는 곳,

혹은 미움이나 악습에 묶여 있는 곳,

어디서나 그 이름을 불러 내쫓고

혹은 가라앉히고 혹은 풀어주곤 하겠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언제나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을 옆에 모시고

성령 안에서 하겠습니다.

 

김창렬 주교가 글을 올리오니 너그러이 용납해 주시면 저에게 큰 기쁨이 되겠습니다.

 

2023. 9. 26.

제주 새미 은총의 동산에서

은수자

                                 꼴찌는 첫째로, 첫째는 꼴찌로 -2

 

첫째가 꼴찌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다소의 여유를 두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지만(마르 10, 31 참조), 그렇게 된다고 단정하시기도 하셨다.(마태 20, 16절 참조)

 

죽은 다음의 세상에 가 보면 깜짝 놀랄 일이 많을 텐데, 그중 하나가 유명인과 무명인의 자리가 바뀐 일일 거라고 생각한다. 현세와 죽음 이후 세상의 평가 기준이 달라서 서열이나 위계나 자리매김이 지금의 세상과는 달리 반대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 16) 이 세상에서 명성을 떨치던 사람보다 어느 누구의 기억에도 있지 않던 작은 영혼이 천국에서는 더 큰 영광과 영예를 누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나는 두 분의 수녀님과 함께 미사를 지내며 살고 있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될 것이라는 대목의 복음 말씀을 읽는 날 이렇게 강론한 적이 한 번 있다. 즉 “지금은 수녀님들이 나를 위해서 희생하시지만 후의 저세상에서 거꾸로 된 모습을 봅니다. 수녀님들은 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시고 나는 저 밑에서 수녀님들을 우러러보는 그 광경을 봅니다.”

 

나는 나의 사제직, 특히 주교직이 내게 불이익을 주는 하느님의 올가미인 것을 깨닫는다.

                                              

                                        늙음을 되새기며 -3

 

나는 나이를 아주 많이 먹었다. 나이 자랑하는 사람은 팔불출이라 한다. 나는 나이 자랑할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내가 나이를 앞세우는 것을 보고 혹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더라도 노망 또는 요새 흔히 쓰여지는 치매의 탓으로 돌려지면 좋겠다.

 

이 글을 쓰는 의도는 노년에 관하여 내가 이곳저곳에 늘여놓은 수감(隨感)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데 있다.

 

                                                              재생(再生)

 

나이 들면 어린아이가 된다고 한다. 나이를 먹은 만큼 그만큼 더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고, 그러다가 철부지 어린아이의 경계를 뒤로 넘어서면 신생아가 되는 것이다.

재생은 신생아를 시발점으로 한다. 나는 신생아가 되어 내 영적 여정을 시작하려 한다. 신생아가 지닌 유일한 본능은 젖을 찾아 빠는 것이라고 한다. 그와 같이 나의 영적 본능은 하느님을 찾아 꼭 부둥켜안는 것이라 하겠다.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그것을 육성해 나아가는 것이 나의 고귀한 운명이라 여긴다.

 

                                                만각(晩覺)

 

나의 스승이자 동지였으며 많은 이의 사랑과 존경을 받던 신부 한 분이 어느 날 나에게 이르기를 “모두가 나보다 낫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고 그의 진심에서 나오는 실토였다. 그가 그렇게 선언한 것은 그의 나이 50이었을 때이다. 그리고 그는 향년 62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와 헤어져 그분이 계신 곳으로 올라갔다.

 

나는 나를 놓고 생각해 보았다.

해가 가고 나이가 쌓여감에 따라 연하의 사제들이 많이 생기고 제자들도 적지 않아졌다. 그렇게 되면서 그들보다는 내가 나으리라는 얼토당토아니한 생각이 은연중에 내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른 채 살았다.

나는 노경에 이르러서야 그것을 깨달았다. 만시지탄을 금할 길 없지만 늦게나마 나를 제대로 보게 되었다. 아니 주님께서 내 모습을 내 앞에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게 나를 보고 나니 “모두가 나보다 낫다.”라고 한 그 신부님의 말이 바로 내가 할 말임을 깨달았다.

 

지극히 사랑하올 주 하느님,

나는 너무 늦게야 ‘모두가 나보다 낫다’라는 이 말을

하게 되었나이다.

하오나, 내가 그 말을 하기 훨씬 전부터 당신은 나로

하여금 허리를 펴고 고개를 세워 어엿이 나보다 나은

그들 한가운데 살게 해 주셨나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동안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체험하는

은혜와 기쁨에 감싸여 살아왔나이다.

주님의 무한한 사랑의 표증은 헤아릴 수 없이 많사오나

이것은 특별히 나에게 베푸시는

당신의 편애로 느껴지옵니다.

사랑하올 주님, 당신이 나보다 나은 그 많은 형제 자매들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나에게 보여주심 같이

그들은 나를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느끼게 해 주소서.

홀로 위대하신 우리 주 하느님,

감사와 찬미와 영광과 흠숭과 사랑을

이제와 영원히 받으시옵소서. 아멘.

 

                                                              나는 고령자

 

나는 고령자요 장수자이다. 한국 남자의 평균 수명을 훨씬 넘게 살아오고 있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내가 중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소문도 퍼진 터라 나의 생존을 기이하게 여기며 그 비결에 대해 궁금해하는 모양이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방법이나 비결은 여러 가지 있을 터이다. 내 건강의 비결을 굳이 말하자면 주님과의 관계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의 이름’, 그리고 자주 손으로 긋는 그분의 ‘십자’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성모님에 대한 신심과도 관련이 있다. 사실 나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께 아예 나의 일들을 온통 맡겨 놓고 살아간다. 이 밖에도 천사와 성인 성녀들, 특히 내가 ‘담당 성인’이라고 부르는 분들께 대한 나의 신뢰심과 공경도 거기에 포함된다.

나는 이제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고 믿음과 애정을 가지고 무시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 나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예수’라는 이름에는 능력이 있고 치유가 있다는 것을 나는 종종 체험하며 지낸다. 그분께서는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을 이용하기를 원하신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나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도 자주 그분의 이름을 사용한다.

나는 언젠가 ‘노후 대책’이라는 제목으로 쓴 어느 자매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자매는 반신불수의 친정어머니가 불편과 고통과 고독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사는 모습을 보고 그 비결이 계속 바치는 묵주기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으며, 묵주 기도야 말로 매우 좋은 노후 대책임을 믿게 되었다고 했다. 그 자매가 나를 찾아와 본다면 역시 같은 말을 하게 되리라 여긴다. 왜냐하면 묵주 기도를 많이 바치면서 기쁘게 사는 나의 모습을 보겠기에 말이다.

이렇게 사노라면 인생살이가 재미있게 된다. 내가 성령의 한 가지 열매로 꼽고 있는 이 재미는 노년기를 틈타 슬며시 들어오려는 우울증을 얼씬 못하게 만드는 것 같다.

어찌 보면 자기 자랑 같은 이 글이 실은 좋으신 우리 주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려는 일념에서 쓰인 글임을 말해 두고 싶다.

Soli Deo Gloria

 

                                                   장수(長壽) vs 요수(夭壽)

 

일반적으로 장수는 다복이요 요수는 박복이라 하지만 이것은 시정되어야 할 통념이다. 타고난 수명, 하느님이 정해 주신 수명이 천수라고 한다면 생명의 길고 짧음을 가려서 다복이라느니 박복이라느니, 또는 행운이라느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 나이 30세, 사제품을 받은 지 4년이 되던 1957년 봄에 나는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을 찾았더니 예상치 않았던 진단이 내려지면서 내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을 하였다. 내 마음은 두려움과 불안에 가득 찼다. 별 공덕을 쌓아 보지 못하고 사제로서 뜻을 펴 보기도 전에 떠나야 하는 신세, 그리고 내가 떠난 뒤에도 계속 살아 있을 동창 신부들에 대한 시기심에 가까운 부러운 마음이 나를 온통 휘어잡아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렇게 침울한 심정을 미처 다스리지 못한 채 수술을 하루 앞둔 날 오후에 한 분의 병문안을 받게 되었다. 그는 내가 존경하는 은사 최민순 신부님이었다. 그가 내 심경을 물었을 때 나는 솔직하게 참담한 심경을 토로하였다. 내 이야기를 들은 은사는 “그러면 얼마나 살면 공적도 쌓고, 일도 할 만큼 하고 성취욕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내 대답은 이러하였다. “한 쉰 살까지 살면서 사제 수품 25주년을 기념하면 족하겠습니다.” 그는 머리를 좌우로 저으면서 “그렇지 않을 것이다. 비록 자네가 은경축이 아니라 금경축을 지낼 때까지 산다고 하여도 자네는 십중팔구 적지 않은 아쉬움과 공덕에 대한 부족함과 성취 불만 따위를 안타까워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두 시간 가까운 우리 두 사람의 영적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 서서히 내 마음은 안정되고 내 영혼은 평화를 얻게 되면서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그날 밤 나는 그동안 밀렸던 잠을 회복하기에 넉넉할 만큼 달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수술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마취에서 회복된 나의 귀에 한 소리가 들렸다. 개복하고 나서 보니 내게 내려진 진단이 오진이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CT, MRI, 내시경 같은 진찰기들이 있기 전이어서 순전히 X선에 의존해야 했으므로 40일을 두고 여러 차례 투시해 본 뒤에 내려진 진단이지만 그것이 정확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튼 나는 우선 요절을 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살다 보니 사제 수품 25주년을 기념하게 되었고, 그리고 다시 50주년을 치르게 되었으며, 이에 더하여 다이아몬드 또는 소위 회경이라고 하는 60주년까지 넘긴 다음 5년을 더 살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길고도 긴 나의 인생인가.

그런데 나는 그 은사님의 말과 같이 “이제 이만하면 됐다.”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 오히려 살아온 나의 인생을 뒤돌아 볼 때 슬프게도 아쉽고 부족하고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이였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아침마다 이런 기도를 바치고 있다. “죄와 결함덩이인 내가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를 드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이 기도는 빈말이나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다.

내가 이렇게 장황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오직 인생에 있어서의 복의 유무나 팔자의 좋고 나쁨이 수명의 장단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나의 은사는 당신을 위한 이상적인 죽음은 사제로서 일하다가 푹 쓰러지는 것이라고 하더니 그는 소원대로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집필하고 나서 든 잠자리에서 졸지에 주님께 불려간 것이다. 그것은 그가 환갑을 남모르게 말없이 조용히 넘긴 지 3년 뒤인 1975년 8월 19일에 일어난 일이다. 그의 갑작스러운 선종은 내게 충격이 아니라 교훈을 주었다.

 

                                                           늙고 보니(1)

 

내가 늙고 보니 주님의 가르침을 참으로 많이 받은 사람이 되어 있더라.

일신 일 일신 우 일신(日新 日 日新 又 日新). 주님은 내 생애에서 늘 새롭게 가르쳐 주셨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음에 따라서 늘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다. 노년기에 들어서서도 꾸준히 새로운 가르침을 주실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이 주고 계신다. 늙으면 어린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주님은 어린아이에게 하시듯이 늙은 나에게 단순하지만 매우 요긴한 진리들을 가르치고 계신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니 하느님이 더욱 친근하고 고마운 분으로 느껴진다. 그렇게 되면서 자연히 내 일상생활은 재미있게 되더라. 그리고 그런 재미를 별로 느끼지 못한 채 지내온 나의 유년기, 소년기, 사춘기, 청년기, 장년기들이 못내 아쉽고 후회스럽다. 그래서 더욱 이 노년기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며 더욱 재미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늙고 보니(2)

 

늙고 보니 나는 실로 많은 경험이나 체험을 한 사람이 되어 있더라.

내가 경험하거나 체험한 것들 가운데는 좋은 것과 나쁜 것들, 긍정적인 것들과 부정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다. 곧 선(善)과 불선(不善), 선덕(善德)과 악덕(惡德), 영예와 치욕, 성공과 실패 같은 것들이 얽혀 있는 것이다. 이 나이에 불완전한 내 몰골을 쳐다본다. 그럴 때마다 자연히 주님 앞에서 셈 밝혀질 일이 걱정스러워진다.

이러한 나에게는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이 큰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아전인수격인 억지해석이 될지 모르지만 만일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내가 경험하고 체험한 그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내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리라. 나는 이 믿음과 희망으로 내 영혼을 달래며 살고 있다.

 

                                                           늙고 보니(3)

 

늙고 보니 나는 어린이가 되어 있더라.

나는 얼추 어린이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님은 내가 아직 어린이가 덜 돼 있다며 어린이가 되려면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 한다고 하신다.

어린이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 이렇게 항의할 수 있으리라. 체통이라는 것이 있고 지체가 이렇게 높은데 어떻게 어린이가 될 수 있겠는가! 나는 공부와 연구를 많이 해서 내 머리에 들어 있는 것이 많고 이루어 놓은 것도 많거늘! 나는 내 탤런트와 재능과 노력을 기울여 많은 것을 이루어 놓았거늘! 나는 큰 명성과 명예를 얻어 놓았거늘! 나는 높은 지위에 올라 있거늘! 나는 세인의 존경과 칭송을 받고 있거늘! 어찌하여 그리고 어떻게 어린이가 되란 말인가! 이것은 마치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요한 3,4)라고 한 니코데모의 대꾸와 같은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어린이가 되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분의 말씀은 단호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어린이가 된다는 것은 유치해지는 것을 말한다. 유치는 욕스러운 말이다. 내가 어느 성직자 수도자들을 위한 피정에서 유치한 어린이가 된 경험이 있다. 나는 신학생이나 사제로서 그때까지 이를테면 고상한 피정만을 해 왔었다. 피정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이름이 나 있는 분들이었고 강론 내용도 어른들에게 알맞는 것들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그 유명한 분들의 훌륭한 강론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말해서 한 번도 감동을 받은 일이 없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때 내가 참석한 피정은 7~8명의 사제들의 공동 지도에 의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외국 유학을 한 일이 없을 뿐 아니라 그때까지는 해외 성지 순례조차 한 일이 없는 평범한 보통 사제들이었다. 그 피정에서는 나의 취향과는 달리 주로 유치한 성가들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도 신부들의 각자의 어두웠던 체험을 곁들이면서 해 준 강론도 너무나 평범하고 단순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피정은 내게 큰 진리를 깨우쳐 준 첫 번째이며 유일한 피정이 되었다. 그 진리란 다름이 아니라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바로 이것이다.

내가 넘어야 할 큰 턱이 앞에 놓여 있는데 그것을 넘자면 어린이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영적, 정신적, 지적, 신체적, 물적 소유를 버리는 것이요, 내가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소위 경력이나 관록을 무시하는 것이며 위신, 자존심, 체면, 권위, 품위 따위를 묻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 일들이 이루어지더니 거의 자동적으로 그 턱을 넘게 되면서 신앙의 새로운 차원이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뻣뻣한 목의 어른으로서가 아니라 나긋나긋한 어린이로 살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가끔 예수님을 따라서 아버지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나는 때때로 예수님을 따라 이 감사 기도를 바친다.

그 피정을 하고 나서 꽤 오랜 세월이 흘러간 오늘까지도 그때 주님께서 나를 깨우쳐 주신 가르침과 사랑이 계속 내 가슴에 메아리치고 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

 

나는 요새 생을 정리하면서 겪는 일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 지난 생에서 기억하기 싫은 일들, 고통과 수치심 없이는 기억할 수 없는 일들과 마주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걱정하지 마라.”고 하신다. 오히려 그 일들로 인해 “너는 기뻐하며 내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서 내 생을 그렇게 되도록 섭리하셨다고 믿으면서 그런 일들이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사랑과 은총을 더욱 내게 베푸시도록 중개의 역할을 한 것들로 여기고 있다.

오늘(5월 6일) 성무일도 제2 독서에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이런 말씀이 있다. [사도 요한의 말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합니다.” 과연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고 여러분이 물어본다면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것 외에는 다른 이유를 찾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우구스티노 성인 이전에 이미 주님께서 친히 이 진리를 말씀하셨다. 죄 많은 여자 이야기에서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이제 나는 나의 약점을 자랑하게 되었다. 그 약점 때문에 주님은 내게 큰 사랑을 베푸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 진실성을 걸고 말하거니와 주님께서 베푸신 만큼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받기는 엄청 큰 것을 받았으면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너무나 긴 세월을 보내온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의 여정 끝머리에서나마 주님을 많이 그리고 열렬히 사랑해야 함을 나의 존재 전체 로 느끼고 있다.

문득 은사이자 동지였던 최민순 신부님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는 견고한 기초를 놓기 위해 부단히 땅을 깊이 판 분이다. 그래서 그는 그 위에 그윽한 영성과 높은 덕을 쌓아 올릴 수 있었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고 순결한 사제요 스승이었다. 내가 그분을 좋아하고 사랑한 이유는 그의 성덕이었다. 나와 격의 없고 막역한 사제지간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는 여러 차례, 지나칠 정도로 당신을 비하하는 말씀을 서슴지 않고 내게 토로하곤 하였다. 그의 그 많은 글과 시에서도 자기 비하의 표현이 흔히 발견된다. 그러한 높은 영성을 지닌 분과 아울러 산 덕분에 그와 비슷한 영성을 내가 물려받게 된 것이라고 여긴다.

이 자리에서 나는 그와 특별한 인연을 맺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의 대표 시 한 수를 읊조리련다.

 

받으시옵소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아니더라도

여기 육신이 있습니다. 영혼이 있습니다.

본시 없던 나 손수 지어 있게 하시고

죽었던 나 몸소 살려 주셨으니

 

받으시옵소서 님으로 말미암은 이 목숨 이 사랑

오직 당신 것이오니 도로 받으시옵소서

 

갈마드는 세월에 삶이 비록 고달팠고

어리석던 탐욕에 마음은 흐렸을망정

심어 주신 사랑이야 금갈 줄이 있으리까

 

받으시옵소서 받으시옵소서

당신의 것을 도로 받으시옵소서

가멸고 거룩해야 바쳐질 수 있다면

영원이 둘이라도 할 수 없는 몸

이 가난 이 더러움을 어찌 하오리까

 

님께 바칠 내 것이라곤 이 밖에 또 없사오니

받으시옵소서 받아 주시옵소서

 

가난한 채 더러운 채 이대로 나를 바쳐 드리움은

오로지 님을 굳이 믿음이오라.

 

전능하신 자비 안에 이 몸이 안겨질 때

주홍 같은 나의 죄 눈같이 희어지리다

진흙 같은 이 마음이 수정궁처럼 빛나리이다.

 

                                                              소중한 노년기

 

이것은 내 안에서 조용히 알려주신 주님의 말씀이다.

 

“너는 곱고 고결하게 늙어라. 무엇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하려 할 때 그것이 네가 곱고 고결하게 늙는 일에 보탬이 되겠는지 안 되겠는지를 헤아려, 보탬이 될 일만을 가려서 하도록 하여라. 하루에도 몇 번씩 네 일거일동을 살펴, 혹 그 일에 손상을 가져왔으면 뉘우치고 내게 용서를 청하여라.

언제나 네가 받은 시간은 소중한 것이었지만 생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지금에 와서는 더욱 그러하다. 너는 가장 중요한 내 마지막 부름을 받을 날을 많이 남겨 놓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살아가라. 나의 모든 부름은 어떤 의미로 잡아당김이요, 잡아감이다. 그리고 너희가 내 소명에 대한 응답이라고 일컫는 것은 일종의 잡힘이요, 잡혀감이다. 나는 노아를 잡아당겼고 아브라함을 잡아끌었고 모세를 잡아챘으며, 판관들과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잡아당기고 잡아끌었다. 그들은 모두 내게 잡혔던 사람들이다.

너도 지나온 네 생을 뒤돌아보아라. 네가 사람으로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일로부터 시작하여 나를 믿는 사람이 되고 사제가 되고 제주의 사목자가 된 일이며, 그 밖의 모든 네 소명을 생각해 보아라. 그것들이 네가 스스로 택해서 된 것들이냐? 절대 그렇지 않고,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불렀고, 너는 응답했다. 그러나 네가 응답했다고는 하지만 엄격히 말해 너는 내게 잡혔다고 해야 옳다. 마리아 역시 내게 잡힌 사람이었다. 간혹 정신을 가다듬고 얼마 동안 깊이 생각한 적은 있으나, 그는 가장 멋지고 가장 훌륭하게 잡힌 사람이었다. 그는 크고 작은 모든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하였다. 잡히지 않으려고 달아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와 너의 차이점이다. 너는 내가 잡으려 했을 때 몇 번이고 도망친 일이 있었다. 지금도 시킬 일이 있어 너를 부르면 등을 돌리곤 하는 너 자신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네가 어려서부터 나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숨거나 달아났을 때 그대로 내버려 두었더라면, 네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을지 진지하게 상상해 보아라. 정신이 아찔해질 것이다. 그러나 너에 대한 내 사랑과 연민은 숨은 너를 찾게 했고, 달아나는 네 팔을 잡아끌거나 때로는 덜미를 잡게까지 한 것이다. 너는 곧잘 사람들에게 나를 구원의 강요자가 아니라 초대자로 소개한다마는 그 표현이 전적으로 정확한 것이 아님을 너는 이제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부름과 응답’의 개념에다가 ‘잡음과 잡힘’의 개념이 덧붙여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

너는 이제 한 인간의 죽음은 그에 대한 나의 가장 큰 관심이 담긴 부름이요, 마지막 잡아당김 또는 잡아감임을 먼저 너 자신이 깊이 깨닫고 그리고 그렇게 가르쳐라.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부름을 받고 잡아당김을 겪지만, 죽음은 그가 가장 중대하게 생각해야 할 나의 마지막 부름이다. 따라서 죽음은 그가 가장 훌륭하게 응답해야 할 소명이며, 가장 멋지게 해내야 할 잡혀감이라는 것을 강조하여라.”

 

먼저 간 친구를 그리워 넋두리하는 저를 너그러이 참아 주시기 바라면서 보내드리는 글입니다.

2023.7.13.

제주 새미 은총의 동산에서

김창렬주교 드림

                                                    먼저 간 친구를 그리며 -4

 

그 친구란 다름 아닌 백민관 테오도로 바로 그대라네. 비록 같은 학급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가까이 지냈었지. 그러다가 학업을 끝내면서 헤어져, 그대는 파리에서, 나는 로마에서 유학하게 되었지. 지루하리만큼 긴 여름 방학 때 그대를 찾아가면 그대는 작은 오토바이 뒤에 나를 태우고 내가 원하는 곳이면 기쁘게 나와 함께 가준 것이 생각나누먼.

그리스도의 성체 성사로 그분의 피를 나누어 가진 이들은 모두 형제자매들이지만, 그대와 나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으로 말미암아 더욱 특별한 형제지간이 되었지.

 

그리고 귀국한 뒤에 재단으로부터 그대와 내가 함께 서울가톨릭 대학교 교육의 총책임자로 보임되지 않았던가? 그 시기에도 그대는 음으로 양으로 내게 힘이 되어 주었느니라.

그대는 나를 죽을 위험에서 구해 준 일도 있었지. 나는 그 일을 잊을 수 없다네. 여름 방학 때 우리 교수들이 동해안에서 피서했을 때 말이야, 전연 헤엄을 칠 줄 모르는 나는 큰 튜브에 몸을 맡기고 기분 좋게 떠다니고 있었는데 마침 썰물 때가 되어 내 튜브는 마냥 깊은 바다로 떠내려가고 있었지.

그렇지 않아도 나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던 그대는 나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와서 벌써 멀리 떠내려가고 있던 나를 뭍으로 끌어 올려 주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래저래 나는 그대에게 신세를 지고 살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네그려. 내가 그대에게 해준 것은 별로 없고 그대가 내게 해준 것은 정말 많았음을 새삼 고백하네. 그대는 정말이지 내 무능 탓으로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

 

십여 년 전 그대는 그동안 몸담았던 대건관에서 양업관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이후 건강이 점차 나빠져 수차례 병원 입·퇴원을 반복했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일 년 전부터는 성모병원 요양사제관에서 지내게 되었다 하더군.

떠나는 해인 2022년 4월 그대는 요양사제관에서 조촐하게 사제 수품 70주년을 맞이했고, 5월에는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평생을 바친 교정에서 찾아온 친지들과 학생들이 불러주는 스승의 날 노래를 들으며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더이. 그리고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 의지하여 그대의 삶이 담긴 교정 곳곳을 다녀보았다고 하더군.

 

내가 요양사제관으로 그대를 찾아갔을 때 의식이 혼미한 가운데도 순간적으로 나를 알아보고 반가워하기도 했었지.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그대의 얼굴은 표정을 잃고 말았어. 하지만 그 상태에서도 그대는 나의 목소리를 알아보고 손을 꼭 쥐곤 하였느니라.

몇 날을 그렇게 지내다가 나는 제주로 돌아왔는데, 그 며칠 뒤에 그대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귀천했다는 소식이 내게 전달되었다네.

 

그대가 가 있는 그곳에 나도 가서 살게 해주시도록 주님 곁에서 빌어 주게나. 언제나 나에게 잘해 준 그대이기에 가장 크고 가장 좋은 이 천상 선물 얻어 주기를 마다하지 않으리라 나는 믿네.

 

                                                               진짜 인생 -5

 

전례 개혁 이전에는 삭발례로 시작되는 성직의 품수가 일곱이었다. 1품에서 4품까지는 소품이라 하였고, 다른 세 품, 곧 차부제•부제•사제품은 대품이라 하였다.

 

1950년 소위 6•25 동란이 일어난 해에, 군 생활을 할 필요나 의무가 없었던 나는 학장 신부의 명에 따라 시종직(侍從職)인 4품을 받은 성직자의 신분으로 한국군의 졸병이 되었다.

나는 육군본부 소속으로 미국 육군 제1기갑사단 본부에 파견되어 그들과 함께 한국인들을 도우면서 2년을 보내고 육군본부에 복귀하여 1년을 더 복무하고 예편되었다. 그동안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고 별의별 일들을 다 겪었다. 나는 그 시기의 내 인생을 헛된 인생, 희화적(戱畵的) 인생으로 치부하였다.

 

이렇게 허탈한 내 마음속에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당신께서 사람으로서 겪으신 일들, 만나신 온갖 사람들, 개인이나 크고 작은 무리들을 한눈에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바리사이들, 사두가이들, 하시는 일에 사사건건 악평하는 군중, 마귀 두목과 연합한 사기꾼으로 소문을 퍼뜨리는 자들, 하느님의 아들인 당신 신원을 밝히는 것을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단죄하여 십자가의 극형으로 인생을 마치게 한 자들을 한눈에 보이시면서 당신의 인생이 허구가 아니고 진실이며 희화가 아니고 진정한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의 전 생애의 모든 순간, 모든 자리, 모든 고비에 당신이 함께 계셨다고 하시면서 너의 인생이 어찌 진짜가 아닐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나는 이제 내 인생이 결코 병들지 않은 멀쩡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슬며시 해 주시는 하느님(1) -6

 

나는 주님께 버릇없이 또는 염치없이 많은 것을 청한다. 물론 청한다고 다 들어주시는 것은 아니다. 청하는 즉시 해 주시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런데 청한 다음에 무심히 살다 보면 어느새 청한 일이 해결된 경우가 적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내거나 주님을 떠나서 다른 일에 몰두할 때 주님이 소리 없이 오셔서 슬며시 선물을 놓고 가신 것을 깨달았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에게 청하고 싶은 것을 마음에 담아 놓고 산다. 주님은 그것들을 당신 마음에 그대로 담아 두시면서 원하시는 때에 그것들을 내게 주신다. 내 인생은 그러한 일로 가득차 있다. 그중에 몇 가지 선물이 특히 생각난다.

1940년, 일본 정부는 전시 체제에 산수가 그다지 필요치 않다고 여겨 산수를 중학교 입학시험 과목에서 제외시켰다. 그랬다가 즉시 그 결정을 번복하여 그 다음 해부터 산수 과목을 입학시험의 필수 과목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그런데 내가 중학 입학시험에 응시한 해가 바로 1940년이다. 나는 산수 과목이 매우 약해서 근심하던 나를 입학시키시려고 주님이 일본문부성으로 하여금 그러한 조치를 취하게 하셨다고 해석한다. 그 후 나는 주님이 나를 당신의 사제로 만드시려고 나 모르게 슬며시 그렇게 해 주셨음을 깨달았다.

다른 한 가지는 전임 강사 자격도 없는 내가 재단으로부터 교수 자격이 요구되는 직책을 임명받았을 때의 일이다. 그때 나는 문교부의 요청에 따라 로마 유학 당시 받은 성적표를 첨부하여 교수 자격 인정 신청서를 서둘러 제출했다. 며칠 후 문교부의 승인서를 받았는데 이는 점진적 승급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번에 교수가 된 예외적인 일이었다. 이 역시 주님이 슬며시 해 주신 것이며 그때 내가 맡은 직책이 그분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또 다른 하나는 나의 지병인 수전증에 관한 일이다. 나는 신학생 시절 사제가 됐을 때 그 병 때문에 겪을 어려움에 대해 걱정을 많이 했다. 특히 본당 사목자가 깨알 같은 크기의 라틴어로 직접 써야 될 각종 문서들이 걱정거리였다. 그런데 긴 사제 생활 동안 보좌든 주임이든 나는 본당에서 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문서를 작성할 기회는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 역시 주님이 내게 슬며시 해 주신 큰일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슬며시 해 주시는 하느님(2)

 

주님은 드러나게도 일을 하시고 슬며시 하시기도 한다. 그러나그분은 모든 일을 슬며시 계획하신다. 창조 사업과 구원 사업을 홀로 슬며시 계획하셨다. 나의 창조와 구원도 나 모르게 슬며시 계획하신 것이다.

신학교 시절 학칙에 따라 나는 하루의 일과를 끝낸 시간에 양심 성찰을 하였다. 그런데 그 성찰은 그날이 그날 같고 밤낮 같은 자리에 맴돌았을 뿐이었다. 뒤돌아보니 그 성찰을 다른 식으로 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주님께서 슬며시 내게 해 주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성찰하는 것이다. 내가 겪은 일, 한 일, 대인 관계, 어려웠던 일, 기뻤던 일들에서 하느님이 슬며시 해 주신 일을 마음에 비추어 생각해 보는 것이다. 만일 매일 그렇게 했었더라면 내 안에 경이감이 자라났을 것이고 내 생활은 퍽 재미있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슬며시 계획하신 일, 슬며시 해 주신 일들을 떠올려 본다. 헤아릴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새겨 보련다.

지금으로부터 8, 90년 전, 내 유년 시절에 배운 교리에 따르면 우리 교회의 으뜸이 두 분인데 한 분은 볼 수 없는 으뜸인 예수 그리스도이고, 다른 한 분은 볼 수 있는 으뜸인 교황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당시 교황님은 볼 수 없는 으뜸과 같은 분, 그저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분이었다. 천상 예루살렘의 모상인 도성 로마라든가, 하늘나라 성전의 모상인 베드로 대성전 역시 아시아의 한구석에 사는 나에게는 꿈의 도성이요, 꿈의 성전일 뿐이었고 그 사정은 청소년 시기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영상을 통해 움직이는 교황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지구촌도 차츰차츰 좁아지면서 많은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 변화 속에서 나는 나를 위해 슬며시 계획하시어 작성해 놓으신 하느님의 각본에 따라, 나의 능동적 관여 없이,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되는 것을 느꼈다.

 

아, 이 어인 일인가!

천상 예루살렘의 모상이던 꿈의 도성 로마에 가 보았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살면서 공부까지 하였으니!

꿈의 하늘나라 성전의 모상이던 베드로 대성전을 구경하고 무시로 드나들었으니!

교회의 볼 수 있는 으뜸이로되 볼 수는 없었던 교황을 만나보았으니!

어찌 그뿐이랴!

그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회의 으뜸이신 교황으로부터 주교품을 받고 중앙 제대에서 그 으뜸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으니!

 

내 영혼아, 놀라지 마라!

이 모두가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슬며시 계획하신 일들이었느니라.

 

나 이제 무엇을 더 바라며 무엇을 더 기대하랴! 이제 남은 일은 삶과 죽음, 그리고 그 뒤에 생길 일들에 대해서 마음 쓰지 말고 오직 그분께서 나를 위해 슬며시 계획해 놓으신 일들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며 사는 일이 아니겠는가!?

 

저의 수호성인이신 바오로 사도와 저를 인연 맺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 쓰게 된 글을 삼가 보내드리오니 하량하시어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23년 3월 14일

제주 새미 은총의 동산에서

김창렬 주교 드림

 

                                       믿음과 은총으로 -7

 

(믿음과 은총으로): 이것은 내 주교 문장에 들어있는 표어다.

 

내 신앙은 모태 신앙이다. 나는 어머니의 젖과 함께 하느님에 대해 배운 사람이다. 취학 전 어린 나이에 귀로 듣고 배운 주요 기도문과 교리를 잘 외운 덕분에 본당 신부님으로부터 상을 받은 일이 어렴풋이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 후 예수님을 배워 알게 됐고 신학 공부도 하게 됐다. 적지 않은 신학 서적을 읽었고 저명한 신학자들의 강의도 들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신학자로 인정받기까지 한 사람이다.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의 표본으로 인정할 만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내가 하느님과 비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직업적인 신앙인 또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며 사제일 뿐이라고 하셨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나는 그분의 선언에 큰 충격을 받아 스스로를 점검했다. 생각해 보니 그때까지 하느님은 저 멀리 계셔서 내가 매일 몇 차례씩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부르면서도 아버지로 느껴지지 않은 분이었고 예수님은 내가 입버릇처럼 늘 ‘주님’하고 부르면서도 주님으로 체험되지 않는 분이셨다.

 

소위 영명 축일을 맞이할 때마다 나는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었다. 그것은 나의 수호성인과 나 자신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 대한 충성과 사랑에 있어서 그러하였다. 그 밖에 신자들과 교회에 대한 애정에 있어서 그러하였고 선교 열에 있어서 그러하였고 사목자적 정신과 자세에 있어서 또한 그러했었다. 이러한 차이는 그와 나와의 시간적 차이인 2,000년이라는 거리보다 결코 못 하지 않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나는 사제가 되고 나서 여러 해를 보낸 뒤까지 내 수호성인이 잘못 정해졌다고 생각했었다. 내게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모시기에 벅찬 인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께서는 내게 바오로를 내 수호자로 정한 것은 당신의 뜻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다. 그리고 수호성인은 반드시 기질이나 성품이 같아서도 아니고 그의 덕을 본받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내 생활을 보호해 주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내 수호성인의 더 큰 역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다.

아닌 게 아니라 사도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 믿음과 은총에 대하여 깨우쳐 주었다. 그는 에페소서 2장 8절, 곧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라는 말씀에 내 주의를 이끌어 주었다. 이밖에도 구원에 대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한 이 사상이 그의 모든 서간, 특히 로마서 도처에 맥박치고 있음을 내게 알려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오직 감사하는 마음과 기쁨 가운데 편안하게 사도 성 바오로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따르는 동시에 그의 보호와 전구를 청하며 살아가고 있다.

 

                                                      SOLI DEO GLORIA -8

 

“교회의 장상을 포함해서 일반적으로 집권자는 자기에게 올 떡을 가로채는 측근이나 수하를 용납하지 않는다. 떡고물 정도는 주워 먹어도 무방하지만 떡 자체에 입을 대면 안 된다.” 이것은 내 은사 신부님에게 들은 우스갯소리인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나는 이 말이 진실이며 매우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에도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하느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을 사람이 가로챌 수 있으니 말이다.

사제로서 생활하는 동안 “마시옵소서 주여, 우리에게는 마시옵소서, 영광일랑 당신의 사랑과 진실로 말미암은, 영광일랑 오직 당신 이름에 돌려주소서.”라는 시편 구절을 애송해온 나다. 그리고 주교로서 간혹 듣게 되는 “주교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라든가 “주교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영광이라는 말은 하느님께만 쓰십시오. 우리끼리는 그저 반갑습니다. 또는 기쁩니다.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며 고쳐주기까지 한 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로 화려한 사목자 생활을 하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나쁜 버릇이 생겨 오롯이 주님께 보내드려야 할 떡을 내가 한두 입 뜯어 먹고 나서 보내드리곤 하였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만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부분적으로나마 겁 없이 건드린 일이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사제 은퇴법이 생겼는데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은혜로운 법이라고 체험을 통해 말할 수 있다. 그 은퇴법 덕으로 나는 지금 조용히 은거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종이 아닌 친구 곧 측근으로 인정받는 몸으로서 내가 지난날 저지른 무엄한 짓에 대하여 반성과 통회를 할 수 있는 은총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터이다.

요새 우리는 인간 찬양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유한하여 한쪽을 찬양하면 다른 쪽에 대한 찬양은 자연히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따라서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면 하느님께 가는 영광은 줄어들게 된다. 내가 보기에 우리 교회 안에서 좋은 일을 했다는 사람들에 대한 찬양의 소리가 너무 요란하고 큰 것 같다. 그런 사람을 내세워 일하게 해 주신 하느님께는 영광을 충분히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매스컴이 극성스레 일으키는 인간 찬양의 거품으로 인해 하느님은 가려져 버리니 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순교자 현양에도 한계를 두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순교자 감사송>에 있듯이 우리는 연약한 인간에게 주님을 증언할 강한 힘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 살던 유다인들은 결코 인간을 찬양하거나 그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순전히 인간으로만 알고 있던 예수님이 기적이나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을 때마다, 그분이 아니라 인간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 드렸던 것이다. 우리가 유다인들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 곧 사람의 공덕이나 위업에 대하여 인간에게보다는 하느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내가 들은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예전에는 교황선서가 끝나면 새로 선출된 교황 앞에서 지푸라기에 불을 붙여 연기가 날 때 ‘Sic transit gloria mundi. (이와 같이 세상의 영광은 지나가 버리느니라.)하고 그에게 알려주는 의식절차가 뒤따랐다고 한다.

주님은 당신께 가야 할 영광을 측근인 내가 건드리지 않도록 가끔 나를 타일러 오셨다.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내게 표시하는 존경과 대접에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며 늘 겸손하고 스스로 비하해서 내가 받는 존경과 영광을 상쇄하도록 수시로 깨우쳐주신다. 모든 좋은 것을 당신께 돌리고 당신을 내 앞에 세워 나는 당신의 그림자에 가리어져야만 내가 무사하리라고 일러주신다. 그분은 행여 사람들의 존경과 대접이 나를 부패시키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계시는 것 같다. 내가 사목자로서 일할 때 내 딴에 일을 제법 잘했다고 흐뭇해하면 주님께서는 내가 혹시 허영(vana gloria)에 빠지지는 않을까 저허하여 곧바로 내 안에 공허감이나 허탈감을 넣어주심으로써 지켜주시곤 한다.

나는 연중 22주간 화요일 제2독서에 나오는 다음의 준주성범 말씀을 늘 뜻있게 읽는다.

[내 위에 내리시는 당신 깊은 심판 속에 내 모든 헛된 영광은 사라지나이다. 당신 대전에 사람이란 그 무엇이옵니까? “진흙이 어찌 저를 만든 자를 거슬러 스스로 영광을 취하겠습니까?” 참으로 천주께 복종할 마음이 있는 거라면 어찌 헛된 말로써 교오를 바랄 수 있겠나이까? 진리의 명을 일심으로 듣는 그는 온 세상이 떠들어도 교오치 아니할 것이요, 모든 희망을 천주께만 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찬미한다 해도 움직이지 않으리이다. 말을 하는 그 삶들 역시 누구나 다 같은 허무이고, 그 말의 음파와 같이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행복하여라, 영광을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만 돌리는 사람! 하늘나라에서 그가 받을 영광이 크리라!

 

                                                 사랑하는 그대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9

 

나의 사랑하는 이여, 보는 것은 잠깐이지만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평생이라 하더이. 나는 지금 그대를 이렇게 잠깐 만나고 있지만, 그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한평생 갈 것이네. 나는 그 그리움이 후세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일세.

하늘나라는 단순한 명상이나 관상도 아니고 완전한 정밀(靜謐)도 아닐 것이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 서로 간의 사랑으로 꽉 차 있는 곳이 하늘나라일 것이네. 믿음과 희망이 존속되겠지만 그것들 위에 사랑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하늘나라일 것이라 여기네. 그 나라는 결코 조용하거나 잠잠한 곳이 아니라 사랑으로 약동하는 곳일 게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흠숭과 찬미의 노랫소리가 오가는 곳일 게네. 무수한 천사들의 찬미가가 끊이지 않는 곳이 바로 하늘나라이니 그렇지 않겠는가!

그대에게 속삭이는 말이지만, 나는 천사들의 노랫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네. 그리고 그것은 내게 Johann Sebastian Bach를 연상케 했네.

 

작사나 작곡의 동인(動因, motivum)이 중요하기에 교회는 그것을 엄격히 심사하였다네. 하느님을 찬양하는 가사나 곡일지라도 인간의 교만이 서리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 그러기 에 이 심사에 걸려든 Ludwig van Beethoven 음악은 우리 교회에서 사용되지 못하는 것이라네.

한편 같은 프로테스탄트인 J. S. Bach의 곡은 모두 우리 교회 안에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일세. 가령 그의 ‘대 미사곡’이나 78곡으로 구성된 ‘마태오 수난곡’을 들 수 있겠네.

 

내가 들은 천사들의 노래, 나를 떠받치고 하늘로 올라가면서 들려준 그들의 그 노래는 Bach의 Cantata.BWV147 “Jesu Bleibet Meine Freude (늘 나의 기쁨이 되어 주시는 예수)”와 흡사한 것이었다네. 그러나 그 멜로디와 반주 그리고 합창은 사람들의 조야(粗野)함을 벗어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천사들의 그 흠도 티도 없는 순수하고 신령한 노래와는 아주 다른 것일 수밖에 없었다네. 내가 천사들의 노래를 들은 것은 비록 잠깐이었지만 그것은 나의 귀중한 무아경 체험이었다네.

 

무한하신 내 주님의 사랑 -10

 

내 사랑하는 아이야! 너는 나를 무엇으로 알고 있으며 어떠한 존재로 알고 있느냐?

나는 네가 안심하고 내맡길 수 있는 버팀목이다.

네가 그 경지에 이르기를 기다리며 부러진 갈대인 너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인 너를 끄지 않고 아흔여섯 번째 생일을 보게 한 것도 바로 나다.

 

최근에 네 몸의 몇몇 부위에 동시다발적으로 말질을 하게 하여 너로 하여금 병원을 찾아가게 한 것은 바로 나다. 뒤돌아보아라. 그러면 네 주치의를 비롯하여 거의 전 의료진이 동원되어 거짓말처럼 하나같이 네게 호의와 정성과 위로를 주었음을 깨닫게 되리라.

그리고 헤아릴 수없이 많은 네 형제자매들이 기도한 것도 느끼게 되리라. 그 모두 내 계획에 의한 것임을 알아라.

 

아들아, 네게 귀띔하고 싶은 말이 있다. 곧, 네가 무엇이나 스스로 결정하고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너의 그 삶은 자연히 속박에 얽히게 되리라. 그러나 네가 만일 돌이켜 내 결정과 뜻에 온전히 내맡기기만 한다면 네 인생은 혼란에서 벗어나 너는 걱정 없이 평온히 그리고 기쁘게 네 일상을 살아가게 되리라.

 

어린아이에까지 호된 시련을 주면서도 네게는 가벼운 십자가밖에는 내려주지 않는 그 이유를 말해 주마. 그것은 네 어깨와 등이 약하기 때문이며 죄인이면서도 나에 대한 네 사랑으로 몸부림치는 너의 그 마음을 내가 흐뭇이 읽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네 죄를 너를 사랑하는 데 이용한다. 그러니 순간마다 자리마다넘쳐 흐르는 나의 사랑과 은혜를 잊지 마라. 그리고 네 응답은 감사밖에 다른 무엇이 있겠느냐?!

 

이하는 아들의 말이다.

나는 내가 행운아임을 고백한다.

 

                                                      원로 사목자가 되어 -11

 

현역 사목자는 교회와 영성 분야뿐만 아니라 세상사에도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원로 사목자의 칭호가 붙은 지도 4반 세기가 지난 나로서는 세상이나 교회 일에 남이 되어야 한다. 밤낮 쉴 새 없이 씨뿌리고 가꾸고 돌보고 수확해야 할 현역 사목자였을 때에도 나는 무위를 나의 성소라고 털어놓기까지 했다.

사목자로서 공직을 떠난 내가 하는 일은 모두 사적인 것이다. 그중의 하나가 유명을 달리한 동창생들을 위한 기도이다.

1940년 3월에 주님께서는 우리 15명을 동창의 인연으로 맺어주셨다. 우리는 그 섭리에 감사의 정을 지니고 살면서, 우리 가운데 누가 맨 나중에 세상을 떠날 것인지, 누가 끝까지 살아남을 것인지 두서너 번 농담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살다 보니 모두 다 떠나고 내가 바로 그 사람이 되어버렸다. 동창생들이 모두 주님 곁에 가 있을 줄 알고 있으면서도 홀로 남은 나로서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이 나를 누르는 것이었다.

7~8년 전 동유럽 순례 시에 나는 폴란드에서 기적의 <검은 마돈나> 성화를 하나 구해왔다. 그리고 우리를 동창의 인연으로 맺어주신 하느님 께 전구해 주시기를 그 성화 앞에서 매일 기도드리고 있다.

 

나는 검은 마돈나께서 내 청을 물리치지 않으시리라는 심증을 지니고 마음 편안히 살고 있다.

 

                                                     전화위복轉禍爲福 -12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인류의 불행과 재앙, 온갖 화의 근원인 아담의 죄를 복이며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는 전화위복에 대한 찬사이자 전화위복을 하시는 하느님을 향한 고백이다.

원죄가 없었다면 나는 하느님에 대한 매우 불완전한 계시만 받았을 것이다. 하느님이 삼위일체가 아닌 유일신이라는 진리만 알았을 것이다. 삼위일체의 계시가 필요했던 것은 제2위이신 성자와 제3위이신 성령이 인류 구원을 위해 하실 일이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계시는 유일신을 받들던 사람들이 그야말로 크게 놀라 자빠질일이었다. 하느님에게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이 여자의 몸에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다는 것은 상상만 하더라도 신성 모독의 죄를 저지르는 것이었다. 성자가 수치스러운 십자가형을 받은 것도 신성 모독죄를 저질렀다는 이유에서였고 초대 교회 신자들이 유대 교회로부터 박해를 받은 이유도 그러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능력을 인간의 머리라는 좁은 관념의 틀에 가두려는 사람들에게는 성자가 사람의 몸을 취하심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또한 원죄가 없었다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원죄가 그 관계를 가족 관계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두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온다. 마태오 복음서 첫머리에는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족보에 올라 있고(마태1,1-17 참조) 루카 복음서에는 아담이 예수님의 원조로 되어 있다(루카 3,23-38 참조). 바로 예수님이 유다인과 인류의 족보에 올랐다는 증명서며 하느님이 우리 인간의 일가가 되셨다는 증명서다. 하느님은 사람의 일가가 되기 위해 마리아를 선택하셨다. 이로서 마리아는 가장 먼저이자 가장 완전한 하느님의 일가가 되셨다.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의 딸이며 성자 예수의 어머니시고 성령의 짝이시다. 이보다 더 명확하게 일가를 묘사할 수 있을까? 예전에는 묵주 기도를 바칠 때 정식 신비로 들어가기 전에 성모송을 세 번 외웠다. 이때 마리아가 성부의 지극히 거룩한 딸 되심과 성자의 항상 동정이신 어머니 되심과 성령의 지극히 정결한 짝이 되심을 찬미했다. 언제부터인지 그 기도가 사라져 버려 매우 서운하다. 성모 마리아는 교회의 모상이시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교회, 즉 하느님의 백성을 본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심으로써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 한편 인간은 그와 같은 성령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의 형제가 되셨고 우리는 그분의 동생들이 되었다. 하느님의 사람 되심과 인간의 신이 되심은 놀랍기 그지없는 상호 교환이다.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 하느님의 길과 인간의 길이 다르다는 것은 성자의 육화 신비와 제2의 육화라고 할 수 있는 성체 신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하느님은 창조에서 당신의 사랑과 전능 중에 일부만 쓰셨지만, 구원 사업에 있어서는 그 전부를 발휘하신 것 같다.

 

아담의 범죄와 하느님의 구원은 전화위복의 표본이며 그 모체가 된다. 나는 모든 화가 연결됐다고 믿는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화만 볼 뿐 그 뒤에 숨겨진 의미와 화에 연결된 복을 보지 못한다. 가령 인생에 있어서 화 가운데 가장 큰 화인 죽음이 복 중 최고의 복인 영복에 연결됐음을 알지 못한다. 사건이나 사고의 현상만 볼 뿐 그 의미와 그것이 가져다줄 수 있는 복을 보지 못한다. 인류 역사는 사건 사고의 현상과 현실만 보고 그것들이 지닌 하느님의 메시지를 사람들이 알지 못해 복을 얻지 못한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카를로 카레토 수사는 불행의 몇 가지 경우를 예로 들었다. ‘불의를 보라! 굶주린 군상을 보라! 생지옥 같은 인생을 보라!’ ‘내 어린 것이 죽었어. 이 어찌 된 일이냐?’ ‘자동차가 덮쳐 와 내 두 다리를 끊어 놓았지.’ ‘평생 뼈 빠지게 일해서 집 한 칸 마련하고 오붓이 살고 있었지. 그런데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됐단 말이야.’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과 더불어 단란한 살림을 꾸려오면서 고생 고생하던 끝에 만사가 술술 풀리기 시작했지. 그런데 지금 백혈병에 걸려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단 말이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도 다음과 같이 인생의 어두운 면을 지적하셨다. ‘폭력에 내던져지고 모욕당하고 버려진 아이들, 성폭행과 혹사를 당하는 여인들, 소외된 젊은이들과 어른들과 노인들, 줄지은 유배와 피난민들, 세계의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충돌과 분쟁들, 인간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의 그림자들, 특히 싹터 오르는 생명과 자연적인 생의 종말을 위협하는 죽음의 그림자들, 마치 인간이 자신이나 타인 생명의 주인인 양 죽음이 오기 전에 그것을 재촉하는 세태 등.’ 신앙이 없다면 이 모든 일에서 현상과 현실만을 볼 것이다. 그러나 이를 세상에 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화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전화위복의 주님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가능하다.

                                                        

                                                       <계속> 

 

           *  오늘날 [무혈 순교생활]의 숨결과 영성이 울리는 소리 ! * 

                         Bloodless martyrdom in the  Martyrs' breathing today ! >

 

변기영 몬시뇰과 직원 일행, 제주교구 원로 교구장 김창렬 주교님 은퇴 주교관 방문(2021.10.29), 제주교구 동창 허승조 신부님 장례미사 후


변기영 몬시뇰과 직원, 제주교구 원로 교구장 김창렬 주교님 은퇴 주교관 방문(2021.10.29), 제주교구 동창 허승조 신부님 장례미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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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기영 몬시뇰과 직원, 제주교구 원로 교구장 김창렬 주교님 은퇴 주교관 방문(2021.10.29), 제주교구 동창 허승조 신부님 장례미사후



변기영 몬시뇰과 직원, 제주교구 원로 교구장 김창렬 주교님 은퇴 주교관 방문(2021.10.29), 제주교구 동창 허승조 신부님 장례미사후.  <추후 계속>

 

           *  오늘날 [무혈 순교생활]의 숨결과 영성이 울리는 소리 ! * 

                         Bloodless martyrdom in the Martyrs' breathing today ! >

 

제주교구 원로 교구장 김창렬 주교님의 깊은 묵상과 주옥같은 말씀을 부족한 우리 후학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공경하올 김주교님께 감사를 올림과 동시에 연로하신 주교님을 도와드리는 현순심 다리아 자매님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순교자들이 외치는 소리(Voice of Martyrs)]라는  메뉴의 명칭을, [오늘의 無血 殉敎者들의 숨결 (Breathless Voices of the Bloodless Martyrs)로 바꾸기로 하였읍니다. 그러나  내용은 그대로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을 모두 무혈의 순교자 군상으로 들어 높히고 올리며, 그 숨결을 여기에 옮겨봅니다. 존경하옵는 우리의 사부님, 김창렬 주교님의  주옥같은 묵상기 게재가 우선  윤허를 받은 첫 글입니다.  

 

 2023년 순교자 성월 9월 26일, 이제는 모두 성인반열에 오르신 103위 옛 순교복자 축일에 이곳 곡수리 성당, 하느님의 종 순교자 사우거사 권일신 기념서재에서, 변기영 몬시뇰 드림 <오늘의 無血 殉敎者들의 숨결-Breathless Voices of the Bloodless Martyrs >-편집자-

 

입력 : 2023.09.27 오후 2: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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