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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혈순교자들의 마지막 숨결소리

Bloodless Martyrs' Breathless Voices

주시는 하느님 / 하느님의 모순과 부조리 / 하느님의 사랑과 자유 / 같은 피 / 상쇄相殺 / 완전한 위탁 / 눈물 / 하느님 사랑의 전령들 / 경이감(驚異感) / 나는 있는 나다 / 도전받는 기본 신앙 / 하느님의 생각과 길 / 보편애 / 상징과 비유 / 섭리 / 무세(無勢)의 길 / 무세의 예수님 / 유세의 교회 / 제 영성의 길 하나를 공개 / 부정(否定)의 길은 / 편애(偏愛) / 죄의 신학의 소산 / 고통과 기쁨을 수반하는 십자가

글 : 주교  김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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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원로 교구장 김창렬 주교님의 깊은 묵상록과 주옥같은 말씀을, 우리 부족한 후학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공경하올 김주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연로하신 주교님을 도와드리는 현순심 다리아 자매님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순교자들이 외치는 소리-Voice of Martyrs]라는 메뉴의 명칭을,[오늘의 無血 殉敎者들의 숨결 - Breathless Voices of the Bloodless Martyrs]로 곧 바꾸기로 하였읍니다. 그러나 내용은 그대로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을 모두 [무혈의 순교자 군상]으로 들어높히고 찬양하며, 그 숨결 소리를 여기에도 옮겨봅니다. 존경하옵는 우리 사부님, 김창렬 주교님의 심오하고 주옥같은 묵상록을 읽어가다 보면, 성령의 감도하심에(by the inspiration of the Holy Spirit) 의하여 쓰여지는, 거룩하며, 순수하고, 진솔하며, 소박하여, 뜨거운 영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순교자들의 모후이신 성모님처럼, 무혈의 순교 선조들의 숨막힌듯 애타는 숨결 소리를 여기에 게재하도록 우선 윤허를 받은 첫 글입니다.

주교님의 심오한 묵상의 주옥같은 문장은 일체 그대로, 절대로 아무런 첨삭이나 수정이 없이, 보내주시는 그대로, 반드시 '그대로 게재함'을 철칙으로 삼고, 준수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2023년 순교자 성월 9월 26일, 이제는 모두 성인반열에 오르신 103위 옛 순교복자 축일에 이곳 곡수리 성당 하느님의 종 순교자 사우거사 권일신 기념서재에서,<오늘의 無血 殉敎者들의 숨결 -Breathless Voices of the Bloodless Martyrs>에 묻혀서, 변기영 몬시뇰 올림.

+. 찬미 예수님

 

나누고 싶은, 영감에 의한 글 하나를 보내드리오니 저의 무례함을 너그러이 용납하시고, 소납해 주시기를 삼가 바라옵니다.

 

 

2021. 12. 23.

새미은총의 동산에서

은수자 김창렬 주교 드림

 

 

                                                                                                 주시는 하느님-1

 

하느님의 본성은 주시는 것이다. 주시되 부스러기가 아니라 옹골진 것을, 흠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것을 주신다. 잡물이 끼어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것을 주신다. 주님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주시는 분이다.

비록 우리의 유한성으로 인해 작아질 수밖에 없지만 실제로는 광대무변한 것이다.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당연히 영원한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내게 가장 좋은 것,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주신다. 당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주시는 것은 최고, 최상의 것이다. 그런데 이 길에는 당연히 십자가가 들어있다. 예수님은 내 등에 그 십자가를 얹어 놓고 나를 데리고 가신다. 나로서는 모든 잡념을 버리고 온전히 그분이 해주시는 대로 전 존재를 내어 드리기만 하면 되니 이 얼마나 편하고 쉬운 일인가!

 

 

 

+. 찬미 예수님

 

하느님의 모순과 부조리의 보완문을 보내드리오니, 용납하여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2022. 2. ?

제주 새미은총의 동산에서

김창렬 주교 배

 

                                              하느님의 모순과 부조리-2

 

하느님은 인간에게 붙여주신 이성을 초월하신다. 하느님은 인간 측에서 보게 되면 모순과 부조리의 존재이시다. 인간의 눈에는 세상사와 인간사가 모순과 부조리투성이인데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니 그렇지 않은가?
  이에 대하여 마음이 편하지 않은 사람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 곧 하느님의 모순과 부조리가 아니고 인간 이성의 냉혹한 판단을 기준으로 한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으리라는 이 사실을 말이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일이 근본적으로 그분의 모순과 부조리를 말해준다. 더욱이 말이 안 되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의 사형 언도를 받고 십자가형에 처해 지신 일이다.
  묵주의 기도 중 고통의 신비내용을 보라! 하느님의 모순과 부조리를 깨닫지 않을 수 없으리라.
  나는 나 자신을 하느님의 그 모순과 부조리의 최대 수혜자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 고마워라!하느님의 모순과 부조리 덕분에 나는 영생에 대한 희망을 한 가슴 벅차도록 안고 그렇게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유-3

 

하느님은 무한한 사랑과 자유를 지닌 분이시다.

우선 창조사업을 하실 수도, 하지 않으실 수도 있는 자유를 지닌 분으로 생각해 보면, 그분의 사랑은 제한을 받게 된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하기에 창조사업을 아니할 수 없게 된다. 창조사업은 절대로 하느님의 심심풀이가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넘쳐흐르는 사랑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하나의 필연이다. 하느님의 창조사업은 그분의 무한한 자유와 그분의 무한한 사랑이 온전히 합치된 사업이다.

하느님의 구원사업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은 그분으로 하여금 죽음의 그늘 밑에 앉아있는 인류를 구원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본성에 따르는 자연적이며 필연적인 요소다. 하느님의 사랑은 본성상 영원히 넘쳐흐르는 힘인 것이다.

 

이에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본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사랑과 자유가 온전히 일치하는 가운데 나를 내셨고 또 구원하셨다.

 

나는 내가 그러한 존재임을 온몸과 온 마음으로 느끼며 살고 있다.

 

 

 

+. 찬미예수님,

 

나누고 싶은 글 두 편을 보내드리오니 한번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22. 3.11.

제주 새미은총의 동산에서

김창렬 주교

 

같은 피-4

 

사랑하는 그대여, 그대와 나는 어떤 관계이며 어떤 사이인가?

우리는 남남이 아니다. 또한 단순한 친구나 벗도 아니다. 그러한 사이라면 그대와 내가 제아무리 가깝다 하더라도 우리 혈관에는 각각 다른 피가 흐르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그대와 나 사이에는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 황공하옵게도 너와 나의 혈관에는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그분이 세우신 성체성사 덕분이다. 그 성사로 그분의 피가 우리 안에 들어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알아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그것은 실제로 예수님의 피가 우리 심장과 혈관에 흐르게 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라는 것이다. 성령이 아니시면 예수님의 피는 그대나 내 안에서 활동하지 못할 것이다. 성령의 힘으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 살고 있음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와 나, 그리고 모든 남녀 교우들이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자비로, 같은 피를 나누는 진짜 형제요 자매들이라는 진리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로써는 같은 신앙을 나누는 관계만을 가질 뿐 같은 피를 나누는 형제의 관계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상쇄相殺

 

 이미 부정의 영성이란 제목 아래 말한 바이지만, 나는 죄와 겨람 덩이이다. 나는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 말하기를 망설이거나 머뭇거리지 않는다. 사실 나는 아침마다 이렇게 기도를 한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철부지를 가여워하시고, 이 어린아이를 귀여워해 주소서. 이 병신을 애련히 여기시고, 이 병자를 측은히 여기소서.>

 

이 기도는 이곳 현세에서 비교적 높은 자리에 올려진 내가 저곳 내세에서는 낮은 자 또는 꼴찌가 되지 않기 위한 예방책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기도를 좋게 여기심을 나는 느낀다. 무어니무어니 해도 내게 필요한 것은 상쇄를 위한 낮춤이다. 나는 나 자신을 낮추고 낮추고 더 낮추어야 할 몸이다.

 

 

혹여 하나의 참고 거리가 될까 하여 저 자신을 위해 써놓은 글을 그대로 보내오니 용납하소서.

 

2022. 3. 21.

제주새미은총의 동산에서

김창렬 주교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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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한 위탁-5

 

나는 내 안에서 은밀히 깨우쳐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얘야, 너는 내 섭리에 공연히 상관하거나 참견하거나 내가 하는 일에 끼어들지 말아라. 너는 오직 내가 하는 일을 눈여겨보면서 성령의 힘으로 그 의미를 새겨야 할 입장에 서 있는 몸임을 알도록 하여라.

인간은 서로 제 뜻을 내놓거나 제 의견을 내세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인간의 뜻이나 소견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로지 내 뜻만이 존재할 뿐임을 잊지 말아라.”

 

20년 전 나는 은퇴 주교관 거실 일각에 미사를 지내거나 성체조배를 하기 위한 경당을 마련해 놓았다. 그러고 나서 나는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얘야, 네가 나를 모시는 게 아니라 내가 너를 데리고 산다.” 하시는 것이었다.

 

능동자와 수동자의 자리가 바뀌고 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평온을 누리게 되었다. 나의 수호성인인 바오로 사도는 자기 안에는 자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을 하였는데, 나는 지금 그와 엇비슷한 상태에서 살고 있다.

 

 나는 완전한 위탁(perfecta commissio) 상태에서 그대로 살기만 하련다. 그분의 뜻에 따라 수동자로서 무슨 일을 할 적에도 나는 그님 앞에서 거치적거리지 않으려 한다.

 

 

눈물-6

 내 눈은 눈물에 인색하다.

내 기억 속에는 단 두 번, 조부상과 모친상을 당했을 때 눈물을 많이 흘리며 소리 내어 운 일들이 들어있다. 그러고 나서 내 눈물의 샘은 말라버렸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영적 차원에서 눈물이 내 감정을 따라주지 않아 신앙생활이나 영성 분야에서 큰 공허감을 지니고 사는 것이었다. 이 견디기 힘든 상태에서 가까이 지내던 한 사제의 권유와 성령의 감도로 나는 성직자·수도자를 위한 성령쇄신 묵상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 묵상회가 진행되는 동안에 나는 눈시울을 적시는 정도의 가냘픈 눈물과 흐느낌을 체험하였다. 이에 나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한 몸 가득히 느끼며 감격하였다. 그것은 매우 소중한 성령의 선물임이 틀림없었다.

그 묵상회가 계기가 되어 나는 영적인 눈물을 흘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었다. 개중에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의 이야기도 있었다.

나는 나대로 사목 활동을 하면서 비록 조용하고 여린 낙루 현상이기는 하지만 수시로 사사로이 겪거나 공석에서 드러내 보이곤 하였다. 성령의 이 은사는 그 뒤로 한 7~8년 동안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느닷없이 그 은사가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나의 전 존재로 느끼고 있어서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마냥 흘려야 할 때 하필 그렇게 되었으니!!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나는 눈물의 은혜를 청하는 기도를 자주 드렸다. 그런데 번번이 허사였다. 성직자·수도자 성령쇄신 기도회에서도 도움을 청하여 형제자매들이 나를 둘러서서 기도를 해 주었지만,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은 내게 조용히 이렇게 일러주시는 것이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나에게서 눈물의 은혜를 받게 되면 너는 분명히 날마다 쉬지 않고 줄곧 눈물을 흘릴 것임을 알고 미리 막은 것이란다,

 

 , 고마우신 하느님의 무한한 도량이여!!

 

 

                                                 하느님 사랑의 전령들-7

 

이미 언젠가 말한 바 있지만, 하느님은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알려주시기 위해 사람들을 보내신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비신자 등 가리지 않고 줄곧 보내신다. 그 사랑의 메신저, 사랑의 전령들을 통해 주님은 당신의 사랑을 끊임없이 내게 일깨워 주신다.

나도 그 누군가를 위해 하느님 사랑의 전령이 되기를 바랐는데 주님께서는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알려주셨는데 그것은 글로써 하라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내 글을 받아 읽고 좋은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한두 가지 예를 들면 어떤 이는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반감으로 가슴에 응어리가 져 마음은 평화를 잃고, 언행은 거칠고, 신앙생활은 냉담 상태였다. 그런데 내 글을 몇 차례 읽고 나서 냉담을 풀고 화해 성사를 통해 평화와 웃음을 되찾아 언행이 온유해져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그 벅찬 감격을 억제할 수 없다며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나 부인과 함께 나를 찾아왔으며 지속적으로 찾아뵙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또 한 사람은 은퇴한 사회과학 곧 사회 계열의 경제학 교수였는데 그는 영성 계열의 나의 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는 교회의 모든 가르침을 철저히 따라 사는 모범신자였지만 그것은 마음이 아닌 주로 머리로 하는 신앙생활이었다. 한데 나의 글을 몇 차례 읽고 나서 그의 신앙생활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참고로 그의 변화된 증표의 글 하나를 본인의 승낙 아래 말미에 첨부하련다.)

 

 이 외에도 이렇게 변화된 이들이 적지 않은데 이 현상은 나로 하여금 글을 통해 하느님 사랑의 전령으로서 신념을 가지고 일하도록 촉구한다.

 

 

주님 안에 사랑하는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잘 계십니까?

혹시 그간 병원에 다녀가셨나요?

보내주신 글월 잘 받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저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가늠할 수가 없답니다.

 

아버지를 불러 보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입니까?

지금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갑자기 아버지를 뵙게 된다면,

아마도 펑펑 울어 버릴 것 같습니다.

너무나도 보고 싶습니다.

그날이 언젠가 오겠지요.

장마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장마철에 건강 잘 챙기십시요.

항상 몸 건강하시고, 마음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2022. 6. 21. ○○○ 올림.

 

 

경이감(驚異感)-8

 

1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일으키신 큰 기적을 보고 놀라움과 경악에 사로잡힌 나머지 제자들은 믿는 사람이 되었다. 이와 같이 놀라움이나 경악은 믿음에 선행하는 법이다. 놀라움이 없으면 믿음은 식어지고 끝내는 사라지고 말리라.

경이감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절대적이다. 그러기에 나는 자연계에서 경이의 대상을 큰 것에서만 찾지 않는다. 가령 우주, 지구, 높고 넓은 산, 망망대해 같은 것에서만 찾지 않는다. 주위에 있는 것 모두가 경이롭지 않은가. 스쳐 지나가거나 무심히 보아 넘기거나 밟고 지나갈 만큼 흔하다.

초자연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큼직한 계시 진리만이 경이로운 것이 아니라 주변에 흔한 것도 경이롭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기에 나는 언제 어디서나 은총과 축복을 만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경이감으로 감싸여 있으니 단지 주님을 만나 뵙는데 그치지 않고 그분과 하나 되어 있음을 체험하며 살고 있다. 참으로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주님과 거리감 없이 지낸다.

 

2

 

가장 존귀한 것은 가장 천한 것을 허락하고 극존칭은 극비칭과 통한다며 하느님을 거리낌 없이 로 부른 때도 있었다.

물론 하느님을 버릇없이 아무렇게나 대하고 그분에게 무례하게 말씀드려도 좋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전례 때 그래서는 더욱 안 된다. 전례에는 그 나름의 격식과 표현이 따로 있는 법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의를 갖추고 하느님 대전 앞에 설 때보다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부담 없이 그분 앞에 있을 때 그분의 현존을 더 쉽게 체험하게 된다. 또한, 창조와 구원 사업에 나타난 그분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고 끈끈한 정을 느낄 수 있다.

하느님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할 때 나는 에둘러 말하는 제3인칭 저희를 몰아내고 직설적으로 우리를 사용한다.

성가 <예수 마음>에는 성심께, 성심과, 성심에라는 단수 2인칭을, 그리고 성가 <사제의 마음>에도 역시 사제라고 단수 2인칭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그 가사들이 나의 마음을 끈다.

 

나는 이 성가들을 부르거나 들을 때마다 언제나 감동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도 적지 않다.

 

 

                                                나는 있는 나다-9

 

기본 중의 기본 신앙

 

하느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누구나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대답을 요청받는다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 내 대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 나는 그 생각을 수정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말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사랑에 앞세워야 할 말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존재를 그분의 사랑에 앞세워야 된다는 것을 나는 깨달은 것이다.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의 이름으로 알려주신 것은 바로 나는 있는 나다.’이다. 이는 당신 자신을 존재로서 계시하신 말씀이다. 이리하여 천주 존재의 신조는 그리스도교의 으뜸 진리로서 첫 자리에 놓인 교리가 된 것이다.

 

도전받는 기본 신앙

 

그런데 나는 있는 나다.’라고 일러 주신 지 수천 년이 흘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아버지를 인간과 함께하시는 분으로 계시하신 지도 이천 년이 넘은 오늘날 이 중대한 기본 신앙이 도전을 받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가끔 내가 무신론과 사신론死神論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신으로 떠받드는 세상이니 말이다.

 

2022년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에 그리스도인을 표방하는 이의 숫자는 24463십만 명이고, 그 중에서 로마 가톨릭 신자 수는 125612만 명으로 되어 있다. 통계상의 숫자는 이러한데 지구촌의 신앙 실태는 어떠한지 훑어보자.

우선 가장 크고 가장 인구가 많은 이 대륙의 거의 전체가 그런 모습이 아닌가. 주님께서 당신 말고는 다른 신이 있을 수 없다고 하셨으니, 계시된 하느님이 아닌 그런 신들은 모두 뜨내기들이요 가짜들인 것이다.

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가톨릭 신자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아시아 이외의 대륙들을 보자. 유럽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지적한 대로 한때 꽃피었던 그리스도교 신앙이 경제적 풍요와 소비주의에 젖어 계속 번지는 무관심, 세속주의, 무신론으로 인해 그리스도교가 뿌리째 흔들리는 땅이다. ‘교회의 맏딸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스스로 포기한 프랑스는 목하 불신앙의 첨단을 달리고 있고, 많은 이들이 일생에 세 번만, 곧 세례 때와 혼인 때 그리고 자기 자신의 장례 때 이던 것이 이제는 그것이나마 없어진 유럽의 신앙 실태이다.

한편 중남미의 대륙에서는 복잡한 인종적, 사회적, 문화적 원인으로 인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떠나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오늘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마치 자라다 만 겨자 나무, 부풀어 오르다 만 밀가루 반죽을 바라보는 심정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역대 교황님들은 복음화의 기치를 내걸고 온 힘을 세계 복음화에 기울여 왔다. 이러구러 지금은 새 복음화라는 단어를 쓰기로 되었는데, 이것은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며, 결국 원점에서 시작하자는 것이다. 곧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간절한 염원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도리어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군상은 늘어만 가고 있으니 답답하고 안타깝고 억울하고 슬프기 그지없다. 새 복음화라는 말이 인제 와서는 한낱 요식적인 구호에 지나지 않게 되어가고 있고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수도 점점 줄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가 18, 8)라고 하신 것이 예수님의 기우가 아니라고 느껴진다.

 

 하느님의 생각과 길

 

원래 회두는 쉽지 않은 일이다. 교회 안에 머무르면서 저지르는 죄나 잘못들은 사함을 받아 쉽게 회두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를 떠난 사람, 곧 배교자는 사정이 다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일찍이 배교자들의 회두를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베드로 사도 역시 같은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 신분과 그 특혜를 저버리는 날에는 순전히 거저 베풀어지는 특별한 은총이 아니고서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확신인 것 같다.

개인의 경우가 그러하다면 집단의 경우에 있어서는 원상회복이 더욱 불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어느 한 민족이나 어느 대륙이라도 신앙을 버리게 되면 다시는 원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이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도 있다. 그 말씀에 따르면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지만,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매우 좁고 또 그 길은 비좁아서, 그리로 들어가는 이들은 적다는 것이다.

냉철한 두뇌로 인식하고 판단한다면 지구촌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의 인류 창조 및 구원 계획은 실패한 것이 될 터인데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전지·전능·전선하신 하느님에게 실패란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느님은 실패하거나 후회할 일을 섭리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지 않은가! 미움과 저주가 아니라 사랑과 축복에 의한 인류 창조 및 구원 성업이 아닌가!

위에서처럼 인류구원 문제에 얽혀 있는 나는 불현듯 하느님으로부터의 충격 요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권능이 일시에 사람을 압도하여 당신의 존재 앞에 머리 숙이고 무릎 꿇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 충격 요법의 발상은 이사 55,8~9에 의한 것이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운니지차 또는 천양지간이란 말은 인간의 척도로는 측량 불가능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인데, 사실 하느님과 인간 간의 차이는 무한과 유한의 차이요, 무궁한 차이다.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으니,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께는 가능하다고 하신 그 말씀이다. 우리의 것과는 무한히 다른 생각과 길을 지니신 하느님을 믿기에 나는 인류구원을 위한 기상천외의 좋은 결정을 해 놓고 계실 그분께 희망과 기대를 걸게 되는 것이다.

 

마리아 파우스티나 성녀가 지은 하느님 자비의 호칭기도의 마지막 호칭은 요행수가 있음을 일깨워 주는 하느님의 자비여이다. 이것 역시

우리를 같은 곳으로 이끌어 주고 있는 것임이 틀림없다.

 

신형 코로나19의 충격 속에서도 하느님의 존재를 외면하고 버티는 사람들을 보면, 이 충격 요법의 효과도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충격 요법을 말하는 것은 다만 인간 측의 어떠한 외침이나 몸부림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파격적인 은총만이 이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뿐이다.

 

보편 애-10

 

악의 정의는 선의 결함이라고 한다(Malum est defectus boni). 그렇다면 미움은 사랑의 결함(Odium est defectus amoris)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분의 그 명령, 그 뜻을 따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그것을 절실히 체험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러기에 고해성사를 보고 또 보곤 한다.

이에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곧 모든 죄의 뿌리는 사랑의 결함에 있다.

언제면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질 수 있을까?

온통 사랑으로 꽉 찬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날 그 굴레에서 풀려나리라.

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차제에 성모님이 내 머리에 떠오른다. 우리의 그 어머니는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골고루 받아들이고 대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아드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가리옷에게도 분명히 연민의 정을 지니셨으리라.

 

나도 그래야겠다. 좋고 싫고, 마음에 들고 안 들고, 곱고 밉고 하는 차원을 넘어 모든 사람을 품에 받아들이고 사랑해야겠다.

 

상징과 비유-12

 

요 얼마 전, 그것이 아파트인지 단독 주택인지 알 수 없었지만, TV로 방영된 한 집을 보았다. 그 집은 매우 협소하여 사람이 화장실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잠자리는 몸 하나를 겨우 누일 정도였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반사적으로, 예사롭게 여겨 무심히 넘겨온 내 처지에 눈을 번쩍 뜨게 하였다. 나는 큰집과 넓은 뜨락과 그것들을 감싸는 수림 속에 포근히 안겨 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하나의 상징이요 비유로 내게 다가왔다. 나의 이 여유와 호화로움은 하나의 상징과 비유로서 외적·육적·현세적 차원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내적·영적·내세적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앞엣것은 일시적인 것인데 반하여 뒤엣것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 보이는 상징과 비유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느껴야 한다는 말이다.

 

주님께서 깨우쳐 주신 이 진리는 무한하기에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지필묵으로 그리기에는 지면(紙面)이 넉넉지 않으니 아, 안타깝기 그지없어라!

 

 

자연, 초자연, 인간, 전후좌우, 상하 어디를 둘러보든지 나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상징과 비유들이다. 나는 무한한 사랑 속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순간과 자리마다 느끼며 사노라니 나의 인생은 기쁨으로 가득하다. 고통과 시련도 하느님 사랑의 상징과 비유로 승화되게 된다.

 

섭리-13

 

섭리는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이 결정하신 것이다. 나는 그 섭리를 전 존재로 느끼며 살고 있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기고, 내가 무슨 일을 겪게 되더라도 그것을 주님의 섭리로 받아들인다.

살아가면서 나는 허다한 세상사, 인간사들을 본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주님의 섭리로 여겨보는 것이다. 주님 친히 결정하신 것으로 인정하면 견디기가 쉬워지더라. 그분은 내게 사랑 아닌 것을 주시지 않는다. 나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행하시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고통과 시련도 그분 사랑의 소치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분의 섭리 밖에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크고 작은 비극적 사건들이 하나같이 주님 섭리에 의한 것이다. 노아의 홍수도 제2위 천주성자의 육화와 십자가형, 헤로데 왕에 의한 베들레헴 아기들의 무자비한 학살, 에디트 슈타인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참사, 하느님의 교회사에 들어있는 허다한 영욕들, 인류사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무수한 비극적 사건들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 들어있다. 개중에는 우리가 알고 싶지 않고 생각하거나 말하기가 두려워 피신하고 싶은 것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나치스에 의한 유대인의 악마적 학대와 대학살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행하시는 의미와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본성이 사랑인 하느님은 미움이 아니라 사랑밖에는 하실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베들레헴의 어린아이들이 순교성인으로서 우리 전 교회의 현양을 받고 있으며,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서 순교한 에디트 슈타인 곧 성녀 데레사 베네딕다 수녀가 유럽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과 찬양을 받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보면서 아우슈비츠 등, 수용소들에서 희생된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영생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을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임을 믿는다.

 

무세(無勢)의 길-13

 

  가려져 온 파스카 신비의 일면: 무세의 배리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십자가 뒤에 오는 영광이라든가, 수난과 죽음 뒤에 맞이하는 부활이라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가톨릭 신자 누구나 글이나 강론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 명제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설명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나는 지난 사순 시기와 예수 부활대축일을 지내면서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파스카 신비의 일면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형제자매들과 나누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여기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가톨릭교회가 좋은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이왕 종교를 가지려면 천주교를 택하겠다느니, 이왕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가톨릭 신자가 되겠다느니 하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었다. 그런데 십 년 전의 이야기지만 그 당시 춘계 주교회의 때 개신교 및 불교와의 비교를 통해 우리 가톨릭의 위상 내지 인지도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때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선호도가 불교, 천주교, 개신교 순으로 드러났다.

그 이야기는 비록 전과 같지는 않다 하더라도 아직은 일반 무종교자나 비신자들의 종교 선택에서 우리 가톨릭교회가 첫째려니 생각하며 살던 나를 놀라게도 하고 슬프게도 했다. 도대체 이렇게 된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물론 그 원인은 복합적이겠지만, 그 한 가지 이유는 우리 가톨릭교회가 파스카 신비의 중대한 일면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일면이란 바로 파스카에 있어서의 무세無勢의 배리를 말한다. ‘무세는 곧 부활을 위한 죽음이요, 영광을 위한 십자가다. 파스카의 어린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가르치신 교리와 행동으로 보여 주신 모범이 바로 무세의 배리이다.

 

무세의 예수님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어 보면 내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직면하거나 도전을 받으신 문제는 바로 였다.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분은 40일간의 피정을 가지셨다. 그 피정을 마치고 메시아로서의 사명 수행을 위해 막 나서려던 때에 받으신 것이 바로 에 대한 유혹이었다. 마귀의 두 가지 도전과 한 가지 제안(마태 4,1-11 참조)은 바로 득세得勢, 세도勢道, 세력勢力, 권세權勢, 행세行勢에 대한 것이었다. 파스카 양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그 유혹을 단호히 뿌리치고 물리치셨다.

그 후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까지 3년 동안 그분은 늘 제자들에게 유세有勢를 경계해야 된다고 가르치셨고, ‘를 만들거나 잡지 말라는 교훈을 주셨다. 산상 설교는 바로 무세에 대한 가르침인 것이다.(마태 5장 참조)온유와 겸손을 당신에게서 배우라는 것도 그것이다.(마태 11,29 참조)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신 말씀(루카 14,7-11)하며 무세객無勢客을 식사에 청하라는(루카 14,12-14)말씀도 같은 맥락의 교훈이다. 제자들에게 세속의 통치자처럼 세도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도 세를 경계하라는 교훈이었다.(마르 10,42-45)큰 권세와 세도를 꿈꾸면서 당신에게 득세를 종용하던 베드로 사도를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꾸짖으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 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가 속된 것이고 마귀와 연계된 것이며 구원 사업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기 전에 빌라도를 향해 분명히 선언하신 것도 무세의 진리이다.

내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다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 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요한 18,36)

그분은 말씀으로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당신 자신이 그 의 유혹과 도전을 과감히 물리치셨다. 놀라운 기적을 보이시거나 좋은 일을 하심으로써 자연히 조성될 를 그분은 애써 예방하거나 물리치셨다. 당신이 일으키신 기적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시거나 또는 조용한 곳을 찾아 기도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셨다.

한편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외아들의 를 더할 나위 없이 철저하게 꺾어 주셨다. 그분께서는 예수님을 둘러쌌던 (추종자들과 세인들의 인기)를 모두 물리치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로 하여금 반대편의 에 가담하게 하셨다. 심지어는 예수님 곁에 남아 있던 사도들의 작은 무리마저 흩어 주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분으로 하여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라는 처절한 하소연을 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무세의 극치인 수치스럽고 잔인한 죽음을 당하셨고 그 결과로 마침내 그분은 죽으신 지 사흘 후에 영광스러운 부활을 맞이하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파스카이다. 이것이 파스카의 원형이며 표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파스카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고 명하신다. 그분은 우리도 현세에서 그 무세의 배리를 터득하여 당신처럼 살다가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누리도록 초대하신다. 부활과 영생에 들어가는 길은 무세의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

 

유세의 교회

 

이제 우리의 시선을 교회로 돌려 보자. 그 창설자가 보여 주신 파스카의 길을 제대로 걸어왔는지 뒤돌아보는 것은 우리 구원에 매우 유익할 뿐 아니라 필요한 일임을 나는 굳게 믿는다. 만일 우리가 진실하고 솔직하다면 보편 교회 2,000년 역사와 한국 교회 220년 역사에서도 창설자가 의도하신 무세의 이치를 수용하지 못한 많은 증거들을 찾아볼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보편 교회는 창설 초기 300, 우리 한국 교회는 선교 초기 120년 동안만 무세의 시대였다. 보편 교회는 그 무세의 시대가 지난 후 수 세기 동안 자체의 구조와 운영 면에서 를 길렀고, ‘를 누렸으며, ‘를 과시하고 휘둘렀다. 양심 있는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도 그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대의명분으로 내세울 수 있는 사정들이 없지는 않았다. 포교, 교세 확장, 야만족과 미개인들의 교화, 호교, 이단 척결, 미신 타파, 성지 복구 및 수호 등이 그것이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세계 복음화, 인권 옹호, 사회 정의 구현, 사회 복지 등이 형성의 명분을 제공한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명분들이 동시에 사탄이 즐겨 이용하는 미끼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는 분명히 우리에게 큰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우리는 그 유혹에 빈번하게 넘어가 큰 해를 입어 왔고 현재도 그로 인해 큰 고통을 받고 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이 있고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말도 있지만 교회의 는 크거나 작거나 교회로 하여금 반드시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한다. 그것이 실세이든 허세이든 를 조성하거나 키우거나 잡았다 하면 반드시 비극이 따르게 마련이다.

가장 두드러진 예가 이른바 종교 개혁이다. 프랑스 혁명과 그 뒤를 이은 비그리스도적 프랑스 국가의 출현도 그 예다. 허다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를 처형당하게 한 그 혁명 역시 유세의 교회가 원인으로 되어 있는 하나의 큰 비극이다. 오늘날의 중남미 교회의 어려운 상황들도 그 예에 속한다. 여하튼 우리 교회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 숱한 비극적 사건들과 남부끄러운 스캔들의 대부분은 파스카의 원리를 무시한 유세有勢의 대가이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에 맛 들인 교회를 파멸에서 구해 준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이었으며 그 은총을 입은 영혼들의 겸손과 가난 그리고 무세의 힘이었다. 무세의 길을 통해 영광을 누리고 계신 성모님을 비롯하여 아씨씨의 프란치스코 성인, 또는 막강한 권세 속에서도 무세자無勢者로 살다가 마침내 모든 권력과 특전, 재산과 사랑하는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을 본받아 완전 무세 상태에서 순교한 토머스 모어 성인과 같은 순교자들, 그리고 수많은 성인 성녀들의 무세의 힘이었다.

아씨씨의 프란치스코 성인 영성의 독창성은 무세에 있다. 성인은 우리 교회가 마냥 를 부리던 시기에 무세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십자군의 유세성有勢性은 적을 자극한 탓으로 결국 교회에 적지 않은 해를 끼치게 한 데 반해 프란치스코 성인의 무세성無勢性은 흉포한 술탄을 누그러뜨렸다.

 

그는 의 유혹을 이기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쓰러지는 교회를 받쳐 주었다. 이것이 바로 성인의 위대함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뱀처럼 그리고 비둘기처럼 처신하면서 그 시대와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로 인해서 병약해진 교회를 정화하고 희생시키기 위해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사람이었다.

 

 

제 영성의 길 하나를 공개하는 일을 너그러이 하량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3. 3. 21.

제주 새미 은총의 동산에서

은수자 김창렬 주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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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否定)의 길은 나의 길-14

 

나는 글을 수단으로 하여 부정의 영성을 말해 왔다.

수동의 기도, 반비례의 논리, 병신 이야기, 어리광의 영성, 약점 자랑하기 따위다. 나를 부정의 길로 인도한 것은 복음서이다.

 

복음 성경에 내게 감명과 위안을 주는 장면들이 나온다.

선민임을 내세우는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던 이교도 사마리아 여인이 선민을 제쳐 놓고 구원의 은혜를 받아 입는 장면이 그 하나요,

깨끗해진 열 명의 나병 환자 중에 오직 이방인 단 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 장면이 그 둘이요,

선민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지만,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이교도 과부에게만 파견되는 장면이 그 셋이요,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그 선민 중에는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오직 이교도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하게 되는 장면이 그 넷이다.

이들은 모두 선민 이스라엘인들이 멸시하여 상종하지 않는 기피의 대상이었다.

 

부정의 길은 구원을 보증하는 황금의 길이다. 이 길은 많은 성인들이 걸어간 길이다. 사도 성 마태오는 그 한 표본이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곳곳에서 자기의 허약함과 죄를 공개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들은 나와 그를 친근한 사이로 만들어 준다.

또 그중에는 소화 데레사와 아빌라의 성녀 예수의 데레사가 있다. 이 거룩한 영혼들이 나와의 상거(相距)가 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친근한 정을 지니게 되는 것은 그들의 낮춤의 자세 덕이다.

소화 데레사는 자서전 <한 영혼의 이야기>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기가 갈 길에 돌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급히 앞질러 가서 아무도 모르게 그것을 치워주셨기에 자기는 누구보다도 큰 죄인이라 했다,

 

한편 아빌라의 성녀 예수의 데레사는 어떠했는가? 자서전, 완덕의 길, 영혼의 성, 창립사 등의 작가인 성녀의 말을 듣고 싶다. 성녀는 자기의 자서전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했다.

나는 내 기도 방식과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들에 대하여 쓰라는 지도 신부의 명령과 함께 완전한 자유를 받고 있는 터이므로 중대한 내 죄들과 사악한 생활을 명확히 그리고 상세히 묘사할 허락이 내려졌으면 했습니다. 그렇더라면 내게 큰 위로가 되었으련만 실은 달리 결정되어 나는 이 일에 관하여 엄격한 제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생애에 관한 이 책의 독자 누구나가 명심해 주기를 간청하는 바는 하느님께로 회두한 모든 성인의 생애 중에서 내게 위로가 될 만한 것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내 생애가 그렇게 사악했다는 이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은 나로 하여금 그 성인과의 친화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대하여 나는 그의 <고백록> 27장에 나오는 그의 부서지고 낮추인 말을 여기에 옮기련다.

 

내 기억이 저 사정들을 회고할 때, 내 주여, 당신께 무엇으로서 감사드리리까? 나의 주님,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께 감사드리오리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오리다. 크고도 많은 나의 죄악들이 해빙하듯 녹아 없어진 것을 나는 오로지 당신의 은총과 자비의 덕으로 돌리옵니다. 또한, 내가 죄 없이 지내왔음도 당신의 은총의 덕이었음을 나 이제 아오니, 그렇지 않고서야 죄를 죄로써 사랑하기까지 한 내가 어찌 범죄하지 않을 수 있었사오리까?…… 이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의 의사이신 당신의 사랑을 입어 병의 치유를 얻은 나를 비웃지 말게 하시옵고 오히려 이 글로 해서 그가 당신 사랑하기를 나와 같이, 아니 나보다 더하게 하시옵기를 바라오니 죄의 깊은 구렁에 빠졌다가 회생한 나를 보고 그가 나와 같은 구렁에 빠지지 않고 보호되고 있음은 오로지 당신의 은총으로 말미암음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오이다.”

 

나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느님,

내게 부정의 길을 알려주시고 그 길을 따라 걷게 하시니 감사드리옵니다.

내가 큰 죄인임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놓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크신 은혜이옵니다.

 

주님께서는 내 약점을 두고 자랑하는 나를 무척 좋아하심을 조심스레 느끼나이다.

 

 

편애(偏愛)-15

 

눈에 결함이 있어 나는 신부 되기에도 합당치 않은 인물이었다. 그런데 되지 않으려고발버둥 치는 놈을 하느님은 기어이 주교로 만들어 놓으셨다.

더구나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구석에서 끌어내시어 성도 로마에서 공부를 시키시고 성 베드로 대 성전에서 교황님의 손으로 주교로 만드시어 중앙제대에서 교황님과 함께 서품 미사를 봉헌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어찌 예사로운 일이라 하겠는가! 그리고 이 어찌 나에 대한 하느님의 편애 또는 특전과 특은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나는 죄인이다. 보통 죄인이 아니라 대죄인이다. 나는 이 말을 병적인 죄의식에서가 아니라 건전한 죄의식에서 하는 것이다.

건전한 죄의식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더 깊이 그리고 더 뚜렷이 그분의 편애를 느끼게 된다.

 

모든 사람이 나보다 낫고 내가 누구보다도 못하다고 가식이나 에누리 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내 입버릇처럼 되어가고 있다. 하느님은 편애로써 가장 큰 죄인인 나를 감싸주심을 나는 느낀다. 그분은 나를 가장 큰 편애를 받은 기록의 소유자로 만드시려는 게 아닌가 싶다.

 

 

위의 <편애>를 포함한 나의 짧은 묵상글들은 모두 내가 개척하고 

추구한 죄의 신학의 소산이라 하겠다.

 

이 죄의 신학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이다.

 

주님의 기도의 후반은 청하는 부분이다. 예수님은 오직 둘만, 일용할 양식죄의 용서를 꼽아 넣으셨고, 한편 성모송은 아예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못박아 놓고 만든 기도이니 말이다. 이렇게 죄의 신학은 굳건한 기초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김창렬 주교가 글 하나를 보내드리오니 너그러이 용납해 주시면 저에게 큰 기쁨이 되겠습니다.

 

2023. 9. 29.

제주 새미 은총의 동산에서

은수자 (null)

 

고통과 기쁨을 수반하는 십자가-16

 

고통은 동시에 기쁨이 되는 이치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먼저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나서 다음에 우리의 주의를 하느님께로 돌려 봅시다.

내가 글 쓰는 것은 하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이지만 동시에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으로 나와 다른 이들에게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리아 자매님!

그대가 나를 돕느라고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내가 그 도움으로 기뻐하는 것을 알고나로 인한 고통을 오히려 기뻐하지 않으시는가요? 나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충동으로 글들을 쓰게 되는데 그것이 내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 글을 읽는 이들이 그 글로 위로와 힘을 얻는 것을 알고 기뻐하게 됩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도 마찬가지이고, 사목자들의 희생도 그러합니다. 자기의 희생으로 자신과 다른 이들이 득을 보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우리의 주의를 하느님께로 돌려 봅시다. 무한히 큰 별들로 이루어진 은하가 수억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광대무변한 대우주를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과 한 본체이신 성자와 함께 말씀 한마디로 생겨나게 하셨습니다.

성부께서는 인류를 영멸에서 영생으로 옮겨주시기 위해 당신 외아드님을 사람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보내셨는데 바로 그 순간 그분의 신원과 운명은 일변하여 인류의 주인이셨던 분이 그 인류의 종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머리 둘 곳조차 없을 만큼 비참하였지만, 그분은 그 고통을 기뻐하셨습니다. 극심한 당신의 고통으로 인류가 속량 되어서 죄에서 벗어나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특히 십자가는 얼마나 큰 고통 거리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십자가라는 말이 고통의 상징이며 그 대명사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가장 큰 고통 거리인 십자가가 가장 큰 기쁨 거리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다리아 자매님,

생각해 보십시오.

허기와 갈증을 속에서 몸이 편태를 당하여 온 살이 찢겨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멀리서 바라보기에도 황공한 거룩한 그 얼굴에 손찌검과 침 뱉음과 주먹질을 당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당신 자신의 몸 하나도 가누지 못하는 탈진 상태에서 당신이 못 박혀 매달리실 그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시다가 세 번씩이나 넘어지시고 끝내는 주저앉아 버리신 예수님이십니다.

마침내 군중들에 의해 십자가에 끌어 올려지고 그런 그들을 위해 단발마적 고통 속에 몸부림치시며 조롱과 저주와 온갖 욕된 말로 수모를 당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당신의 고통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을 내다보시면서 기뻐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극도의 고통과 극도의 기쁨을 연상케 하는 십자가, 우리는 그 십자가에 대한 깊은 감동 없이 넘기는 날이 단 한 번도 없도록 합시다. <추후 계속>2023/09/30. PM.15:00.

입력 : 2023.09.30 오후 2:3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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