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무혈순교자들의 마지막 숨결소리

Bloodless Martyrs' Breathless Voices

나는 있는 나다 / 사탄 / 회개 - 김창렬 주교님<Contemplative writings of the Most Rev.Kim retired, hermitic Bishop in Je Joo island.>

글 : 주교 김창렬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하기
  • 스크랩
제주교구 원로 교구장 김창렬 주교님의 깊은 묵상록과 주옥같은 말씀을, [오늘의 無血 殉敎者들의 숨결 - Breathless Voices of the Bloodless Martyrs]에 우리 부족한 후학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공경하올 김주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연로하신 주교님을 도와드리는 현순심 다리아 자매님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순교자들이 외치는 소리-Voice of Martyrs]라는 메뉴의 명칭을, [오늘의 無血 殉敎者들의 숨결 - Breathless Voices of the Bloodless Martyrs]로 곧 바꾸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그대로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을 모두 [무혈의 순교자 군상]으로 들어 높히고 찬양하며, 그 숨결 소리를 여기에도 옮겨봅니다. 존경하옵는 우리 사부님, 김창렬 주교님의 심오하고 주옥같은 묵상록을 읽어가다 보면, 성령의 감도하심에(by the inspiration of the Holy Spirit) 의하여 쓰여지는, 거룩하며, 순수하고, 진솔하며, 소박하여, 뜨거운 영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순교자들의 모후이신 성모님처럼, 무혈의 순교 선조들의 숨막힌듯 애타는 숨결 소리를 여기에 게재하도록 우선 윤허를 받은 글들입니다.

주교님의 심오한 묵상의 주옥같은 문장은 일체 그대로, 절대로 아무런 첨삭이나 수정이 없이, 보내주시는 그대로, 반드시 '그대로 게재함'을 철칙으로 삼고, 준수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2023년 순교자 성월 9월 26일, 이제는 모두 성인반열에 오르신 103위 옛 순교복자 축일에 이곳 곡수리 공소 성당 하느님의 종 순교자 사우거사 권일신 기념서재에서, 오늘의 無血 殉敎者들의 숨결 -Breathless Voices of the Bloodless Martyrs>에 묻혀서, 변기영 몬시뇰 올림.


사탄 -1

 

1

 

사탄, 건드려서는 안 될 존재인가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는 성직자나 수도자 또는 평신도 구별 없이 거의 모든 신자들이 생각하기를 피하고 말하기를 꺼려 하며 듣기를 싫어하는 대상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사탄’, ‘마귀’, ‘악마또는 악령이라고 불리는 존재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실재를 외면하지 말고 정면으로 대해야 한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주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것이 바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고 죄와 죽음의 근원이며 지배자인 마귀로부터의 속량贖良이다. 또한 그분의 부활은 그것들에 대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승리와 개선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인류의 적대자며 구원 사업의 방해자고 죄와 죽음을 조성하며 세상과 육신을 조정하는 마귀에 대해 모른 채 외면하거나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된다.

사람이 되신 말씀이 인류 구원 역사의 주역이심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사탄이 그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것도 틀림없다. 한 무리의 천사들이 사탄으로 추락하게 된 것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불순명과 반항심, 그리고 교만이었다. 사탄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도 못된 본성을 발휘해 성공을 거두었다. 인류의 타락과 이에 따른 모든 피조물의 저질화는 그놈 승리의 표지다. 사탄은 자기 손아귀에 들어온 인간과 세상을 제멋대로 지배하고 부렸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인류 구원 계획에 따라 다행히 인류 앞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됐다. 그런데 은총의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을 앉아서 지켜만 볼 사탄이 아니었다. 그놈은 은총의 시대를 여시려는 예수 그리스도를 쓰러뜨리기 위해 감히 도전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 알듯이 예수님은 그놈의 도전을 통쾌하게 물리치셨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

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 2,14-15)

원천을 손상시키지 못한 사탄은 독을 품고 인간 하나하나를 손상시키려 나섰다. 그래서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창세 3,15)라는 하느님의 판결문대로 그놈과의 결전은 이제 인류의 운명이 됐다. 인류는 역사를 통해 악마와 쉴 새 없이 투쟁해 왔으며 그 투쟁은 세상 종말에 가서야 끝을 볼 것이다. 인류 역사는 하느님이 지켜보시며 간섭하시는 가운데 인간이 사탄과 벌이는 투쟁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하시는 일을 사탄은 사사건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방해한다. 그놈은 조반니 파피니36가 말한 대로 어떤 모습이라도 취한다. 그놈은 천의 얼굴을 가졌다. 때로는 마귀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놈의 유혹하는 방법은 때에 따라,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다르다. 사탄의 작전은 인간의 작전과 비슷하다. 가장 강한 곳을 치려고 한다. 큰 영향력을 가진 대상부터 고른다.

사실 많은 사람들, 특히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야 할 사람들까지도, 마귀가 있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산다. 마귀를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그놈의 존재를 부정한다. 마귀의 최후의 계획은 자기가 죽었다는 소문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탄의 작전에 말려들어 오늘날 주님의 양을 치는 많은 목자들이 사탄에 대해 무관심하게 됐고 그놈에 대해 가르치거나 언급하기를 꺼려 하며 심지어는 그렇게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게까지 됐다. 그러한 목자들 때문에 오늘날 우리 한국의 가톨릭 기도서에서 마귀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20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바쳐온 십자가의 길기도문 중에는 삼구三仇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기도서의 십자가의 길7처에서는 삼구 중에서 세속과 육신 둘만 남았고 그 원흉인 마귀는 빠졌다. 전통적 교리 안에 자리 잡았던 삼구나 사말四末은 이제 교회의 고어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낱말이 됐다. 삼구 중에 마귀는 차츰 없는 존재로 알려지고 세속과 육신은 말씀이신 성자의 육화로 말미암아 성화됐다는 전제 아래 거리낌 없이 친숙해질 수 있는 것들로 여겨지게 됐다. 마귀에 대한 무관심과 방임적인 신앙 풍토, 그리고 속세와 육신에 친화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사말에 대한 가르침이 자연히 약화되는 것이 오늘날 실상이다. 마귀를 얘기하지 않는다면 죄와 죽음에 대해 얘기할 근거를 잃어버리고 구원이나 구세주에 대한 가르침도 의미를 상실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구마의 은사를 받은 어느 신부님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마귀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복음서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으며 한 미사 강론에서는 가톨릭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사말 교리를 확실히 가르치지 않는다면 우리 신앙생활에 큰 구멍이 생기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2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탓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는 정통적인 올바른 신앙 감각을 지니고 충실히 생활하는 신자가 많다. 그들은 오늘날 교회 안에 버젓이 또는 은밀히 번지는 이단적 교설, 불온사상, 세속화 경향 등을 심각하게 걱정한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그러한 병폐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돌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 공의회 업적의 위대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이 사실을 거듭 강조하셨다. 2차 바티칸 공의회를 20세기 가톨릭교회의 금자탑이라고까지 말씀하셨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이 출판된 지 5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문헌들에 친숙한 가톨릭 신자들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은 큰 문제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바로 소재 가치가 다른 화폐가 동일한 명목 가치를 가진 화폐로 유통되면, 소재가치가 높은 화폐는 유통 시장에서 사라지고 소재가치가 낮은 화폐만 통용된다는 그레셤의 법칙과도 같이 정통 신앙의 정신에 따라 그 문헌들을 올바로 해석해 주는 신학자나 목자의 소리는 너무도 약하고, 그것을 지나치게 피상적으로 왜곡해서 해석하는 일부 신학자나 아마추어 논평가의 떠드는 소리는 너무나 요란하다는 점이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공의회를 빙자하는 거짓 교사와 목자의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다. 설익고 덜된 신학자들이 허위적이고 왜곡된 교설의 권위를 위하여 걸핏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들먹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공의회가 세속화의 구실이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2000227일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실적 평가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언명하셨다. “교회는 언제나 교리의 올바른 해석법을 잘 알아왔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사실은 과거 모든 시대의 신앙의 연속 선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와의 단절을 가정한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또한 요한 23세 교황님으로부터 공의회의 대업을 이어받아 훌륭하게 이고 마무리하신 바오로 6세 교황님도 누구든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신앙, 전통, 수덕, 애덕의 실천, 희생정신,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십자가에의 충성에 대해 교회가 가르쳐 온 바를 완화한다고 해석하든지, 원리 원칙도 없고 초월적인 목적도 없이 나약하고도 변덕스러우며 상대적인 세속적 사고방식에 대해 관대하게 양보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든지, 이전보다 더 용이하고 덜 철저한 크리스천 신앙 형태를 포용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완전히 오해를 하는 것이다.”라고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신앙의 한 측면인 마귀와 그의 세력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 안에 명백히 들어 있다. 공의회는 예닐곱 곳에서 사탄’, ‘악령’, ‘’, ‘그 옛날의 뱀’, ‘암흑의 세력’, ‘이 세상의 권력자를 말한다. 또한 전체 공의회 문헌 가운데 현대 세계에 가장 개방적인 사목헌장에만도 너덧 번 마귀와 그의 세력이 등장한다. 이 사실을 볼 때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 사탄에 대한 가르침이 쇠퇴하는 현상을 결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3

 

사탄의 황금시대인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거리낌 없이 마귀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그것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다. 교회는 설립자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사도 시대부터 지난 세기 중엽까지 2천여 년 동안 마귀를 항상 경계해야 할 실재로 가르치는 한편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와 그 세력들을 제어해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교회가 돌연히 그 고귀한 직무를 잊어버리거나 버려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만일 그 직무를 유기한다면 그것은 분명 교회가 사탄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사탄이 인류 구원의 방해자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데서 생겨난 일일 것이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마귀를 입에 올리는 사목자는 시대착오적인 구식쟁이로 취급되고 있다. 심지어 마귀에 대해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는 교황님에게 반기를 들기까지 하니 어떻게 된 일인지를 모르겠다. 1972629일 바오로 6세 교황님은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악마의 연기가 어떤 틈을 타서 하느님의 성전에 들어왔다는 생각을 합니다. …… 그리스도가 그토록 빈번히 복음에서 이 인간의 적에 대하여 언급하신 것을 보고 우리는 의혹, 불확실, 문제의식, 불안, 불만의 씨를 뿌림으로써 혼란을 조성하기 위해, 교회 일치적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과를 교란하기 위해, 그리고 교회로 하여금 환희의 찬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들어온, 자연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교황님의 이 말씀은 당시 세상을 술렁이게 했다.

그리고 19721115일 일반 알현 석상의 인사말에서 교황님이 마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때에는 마치 회칙 <인간 생명Humanae Vitae>을 발표하셨을 때와 같은 항의가 교회 안팎의 매스컴을 통해 몇 달 동안 빗발쳤다. 그때 그분의 말씀은 이러하다. “죄란 우리와 이 세상에 악마라고 하는 어둡고 적대적인 첩자가 침입한 상태며 작용입니다. 악의 실재는 한낱 결핍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작용하는 힘, 스스로 타락했고 또한 타락시키는 살아 있는 정신적 존재입니다. 그것은 무섭고 비밀에 찬, 그리고 불안하게 만드는 실재입니다. 이 실재를 인정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성경와 교회의 가르침의 뿌리를 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이를 모든 피조물과 달리 하느님에 근원을 갖지 않은 진부한 주장이라고 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거짓 실체’, 또는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의 알려지지 않은 원인의 개념적이고 망상적인 의인화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그러합니다.” 교황님은 당신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신 다음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악령은 적1호입니다. 그놈은 바로 유혹자입니다. 우리는 이 어둡고 유혹하는 존재가 실재하며, 그 영향이 끊임없이 행사됨을 압니다. 악령은 인간의 윤리적 균형 감각의 교활한 파괴자며 욕정, 환각, 탐욕, 망상적 논리 또는 무질서한 사회적 접촉을 통해 오류를 퍼뜨리려고 우리 안에 파고드는 데 능란하고 음흉한 유혹자입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은 서거하시기 1년 전에 가지신 일반 알현 때 다시 한 번 그 주제를 화제에 올리셨다.

우리 사회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참된 인간성의 지평으로부터 추락하고 있다면, 그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 성경은 우리에게 온 세상이 악에 의해 지배되리라는 통렬한 경고를 합니다.” 교황님의 이러한 가르침에 대한 반응은 번번이 발악이며 항의였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교황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팎에 득실거리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사탄의 황금시대며 오늘날 세상은 그놈의 황금 어장이라는 느낌을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전체 교회의 신앙 실태는 버려두고 한국 교회만 보더라도 냉담 신자가 전체 신자의 3분의 1을 넘는다. 만일 우리 교회 안에 마귀에 대한 부정적 또는 방임적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면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는 무리가 더욱 늘어나리라는 것이 나의 추측이자 염려며 슬픔이다.

 

4

 

사탄, 그것은 우리가 모름지기 들먹여야 할 존재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섭리로 다행히 제2의 성령 강림 시대로 들어서면서 마귀의 흉측한 모습과 그 음흉한 계략은 서서히 탄로가 나기 시작했다. 종전에는 사탄과 무관한 것으로 여겨지던 것들이 사실은 사탄이 조종하는 가짜 그리스도라는 것을 성령은 우리에게 깨우쳐 주신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의 배후에는 언제나 사탄이 도사리고 있음을 성령은 우리에게 일러 주신다. 가짜 그리스도는 반드시 세상 종말에만 나타나기로 된 인물들만이 아니다. 이미 2천 년 전에 요한 사도는 다음과 같은 말로 당시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적이 온다고 여러분이 들은 그대로, 지금 많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1요한 2,18)사실 사탄이 조종하는 가짜 그리스도들은 인간의 모습이나 다른 여러 가지 모습을 취하고 역사에 나타나 꾸준히 인류를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게 했다. 사탄은 정치, 경제, 문화, 외교, 군사, 종교, 언론, 출판, 교육, 과학, 제도, 관습, 스포츠 등 어디라 할 것 없이 인간사와 세상사의 전반에 걸쳐 가짜 그리스도들을 무수히 만들어 부려 왔다. 모든 형태의 미신 행위가 그놈의 수중에 들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각종 비밀 결사와 범죄 조직도 그놈의 것이며 소비 주의, 물질주의, 배금사상, 뉴 에이지, 퇴폐적인 풍조·문화·예술·영화·음악·유행, 종교 무차별주의, 윤리적 상대주의, 신학 따위도 그놈의 시나리오에 의한 것이다.

우리가 죄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사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결코 유별나다고 할 수 없다. 이야기하기 꺼려할 일이 절대로 아니다. 누구 때문에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는가? 사탄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놈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미 말했듯이 악마는 제 이야기가 그리스도인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기를, 제 계략이 탄로 나지 않고 방해받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놈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며 그놈을 빈번히 들먹여야 한다. 기탄없이, 가차 없이 아무 때나 공공연하게 얘기해야 한다. 분명히 사탄은 하느님의 백성이 자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무관심하기를 바란다. 성서 학자나 신학자가 자기에 대하여 입을 다물어 준다면 그놈은 매우 좋아할 것이다. 성직자나 수도자가 그렇게 해 준다면 더욱 좋아서 날뛸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비롯해 자기로 인해 생겨난 죄와 지옥에 대해 얘기하기를 신학자와 사목자가 기피하거나 싫어한다면 그놈으로서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마귀가 모든 기회와 온갖 사물과 사건을 빼놓지 않고 이용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교회의 잘못과 실수나 성직자와 수도자에 관한 추문 따위는 그놈에게 더없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런 것들은 신자들이 구원을 향해 가는 길에 깔린 돌들인데 마귀들은 그것들을 깔아 놓은 다음 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늘 눈여겨본다.

평신도든 수도자든 성직자든 상관없이 본의 아니게 사탄의 앞잡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놈은 누구라도 자기의 앞잡이나 심부름꾼으로 부려 먹을 수 있을 만큼 영리한 존재다. 인류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사탄이 자기 앞잡이들을 시켜 외치는 유혹의 소리를 들으셨다. 그 소리들을 우리 모두 지금 들어 보자.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 내 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마태 27,40.42-43)예수님은 전에도 이미 그와 같은 유혹의 소리를 들으셨는데 이는 놀랍게도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당신 사도단의 단장이라고도 할 수 있고 당신 정예 부대의 대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베드로의 소리였다. 그 소리는 이러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당하는 일)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인간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 얼마나 갸륵한 마음씨와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베드로의 호소인가? 그런데 그때 그는 다름 아닌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훼방하는 악마의 도구며 앞잡이였던 것이다.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준엄하게 명령하시는 예수님의 구마驅魔행위가 이를 증명한다. 이런 것을 볼 때 마귀의 대변인, 대리인, 또는 앞잡이가 될 위험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고 그놈의 공격에서 면제된 성역聖域이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에페 6,11-12)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베드로 사도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 5,8-9)하고 권고했던 것이다.

 

5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이름을 알게 됐고 그 이름을 받들고 사랑하며 그 이름의 힘으로 살게 됐다. 우리는 그 이름으로 구원을 받게 됐다. 그 이름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하느님의 자녀가 됐다. 그 이름으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가르치며 병을 고쳐 주고 상처를 낫게 하며 마귀를 쫓아내게 됐다. 치유와 구마는 이제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미개발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제2의 성령 강림 시대의 도래와 함께 개발되기 시작한 분야이기도 하다. 신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악의 세력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나는 영적인 눈으로 본다. 악마에게 마음과 정신이 잡히면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불가능해진다. 예루살렘의 치릴로 성인은 예비자 교리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전에는 어둠 속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태양을 본 후 시력을 찾아내어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분명히 보듯이, 성령을 모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조명을 받아, 인간 시력의 범위를 넘어 그가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의 말대로 내가 전에는 모르던 것을 이제는 확실히 깨달았다. 성령의 비추심으로 가정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온전한 가톨릭이 아닌 가정에서는 마귀의 공세가 매우 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신자가 가장이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에서 신자 식구들은 힘겨운 신앙생활을 한다. 십자고상이나 성상, 성화같은 것을 제대로 모시지도 못하고 기도도 제대로 바치기 어려우며 식사 때 기도드리는 것마저 눈치를 살펴야 할 형편이다. 이런 가정에서 어떻게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자녀들에게 종교 교육을 바르게 시킬 수 있겠는가? 나는 외짝 교우의 신세를 안다. 가정을 이루고 나서 일부 구성원이 신자가 됨으로 부분 신자 가정이 되는 경우도 어려움이 많지만 처음부터 관면 혼배로 외짝 교우가 된 경우에는 대다수 비신자 식구들의 압력을 받게 되므로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악마는 어떤 누구라도 이용하지만 외짝 교우 가정에서는 그놈이 이용하고 사주할 사람들이 많다. 지금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본당에서 성사혼보다 관면혼의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나는 이를 매우 불안하고 염려스러운 일로 여긴다. 혼인성사의 은총이 베풀어지지 않는 결합을 우리는 완전히 축하할 수 없다. 가톨릭 신자로서 어떻게 그 결합을 무턱대고 기뻐할 수 있겠는가? 우리 교회의 일곱 가지 성사 중의 하나로 꼽히는 중대한 혼인성사를 받지 않고 가정생활을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당사자들이 부끄러워해야 한다. 성품성사를 받지 않은 사제는 있을 수 없다. 그 성사를 받지 않으면 사제 생활을 할 수 없다. 부부 생활에 필요한 성사 은총이 베풀어지지 않는 관면혼은 비유의 적절성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성품성사의 은총을 받지 않은 사제 생활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관면혼이라는 것을 매우 예외적인 것으로 여겨야 하며, 사목자들은 이미 많이 생겨난 외짝 교우의 가정을 특별한 관심으로 보살펴 주어야 한다. 가끔 그런 가정들을 방문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가정과 식구들로부터 마귀를 몰아내 주는 한편 외짝 교우 자신이 악의 세력의 기운을 느낄 때마다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어야 한다. 사목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그 이름에 의지하고 그 이름으로 구원 사업에 힘써야 한다. 구원 사업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사목자들이 그 일을 우습게 알기를 가장 바라고 부추기는 것은 다름 아닌 마귀 바로 그놈이다. 사제들이 무서운 원수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주님의 양들이 신앙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보편적인 실정이 아닌가 싶다. 많은 사제들이 주님에게 받은 강한 무기를 쓰기는 고사하고 자신들에게 그 무기가 있다는 사실마저 모르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구원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살지만 인생 최후의 승리는 아직 우리의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승리는 투쟁을 전제한다. 그 투쟁은 우리 각자 안에서, 우리 가정 안에서 그리고 사회 안에서 치러지도록 되어 있다. 그 투쟁의 대상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인간이 아닌 사탄이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는 말도 그 진리를 반영한다. 내 자신은 사랑하되 나의 나쁜 점은 미워해야 한다. 가정에서도 식구들을 사랑하면서 그들의 잘못만은 미워해야 하며 사회에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마해야 할 경우가 자주 있다. 자신과의 싸움이란 표현은 자기를 조정하는 악마와의 싸움을 말한다. 또 원수진 사람과의 싸움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사탄과의 싸움인 동시에 그를 원수로 여기도록 부추기기 위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악마와의 싸움이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미워하지 말고 그를 밉게 만들고 있는 악마를 미워해야 한다. 동시에 그를 미워하게 하는 내 안에 있는 악마도 미워해야 한다. 가정에서도 그렇게 해야 할 경우가 많을 것이다. 어떤 가정의 식구들이 술이나 도박에 중독되어 있는 가장 때문에 슬픔과 두려움 속에 나날을 보낸다고 한다면 나는 모든 식구들이 그를 사랑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의 세력을 몰아내 주고 가끔 성수를 집 안팎에 뿌리기를 권한다. 그렇게 하면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쉽게 얻을 것이다. 악마는 너와 나의 적이며 인류 공동의 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별적으로 사탄과 싸우는 동시에 공동 작전으로 사탄에게 대적해야 한다.

이 일을 어려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악의 세력과 맞서서 싸우는 데 필요한 힘과 무기를 충분히 갖췄기 때문이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써 악의 세력을 쳐부수신 예수님의 구원 공로로 우리에게는 악의 세력을 격퇴하고도 남을 하느님의 은총이 항상 있다. 또 우리에게는 마귀의 머리를 발로 짓누르고 계신 성모님이 계시고, 미카엘 대천사를 비롯한 천사들의 군대와 수호천사가 있으며 성인들의 무리가 있다. 그러니 마귀와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뜻을 높이 받들어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악마와 대항해 싸워야 한다.

나의 이 주장이 모든 계층의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어느 정도나마 도움을 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마귀의 정복자이며 죄와 죽음의 승리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기도로써 이 글을 맺는다.

 

 

친히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권세를 잡은 자를 쳐 이기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진심으로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옵니다.

주 예수님, 이 땅에서 창조와 구원이 계속 이루어지는 한

사탄의 방해 공작은 계속될 것이옵니다.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한

시기투성이 그놈의 공격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옵니다.

저희는 개인으로나 공동체로서 그놈에게 시달리다 못해

때로는 그놈의 밥이 된 적도 있사오나

당신은 언제나 손을 펴시어

우리를 살려 내셨나이다.

제아무리 악마의 공격이 심할지라도

우리가 그러한 기억을 늘 되살려 당신에게 의지하며

그놈과 꿋꿋이 맞서 싸우게 해 주소서.

그리고 악마에게는 항상 겁을 넣어 주시어

감히 우리를 잡으려 들지 말게 해 주소서.

만일 그놈이 새로운 전략으로 공격을 꾀하려 하면

주님, 미리 그것을 우리 앞에 폭로해 주소서.

지극히 복되신 어머니 마리아님을

우리와 사탄과의 투쟁에 개입시키신 주님,

우리로 하여금

우리 어머니도 되시는 그분의 전구로써

싸움에 필요한 당신의 은총을

풍성히 받아 누리게 해 주소서. 아멘

 

 

                                               나는 있는 나다 -2

 

기본 중의 기본 신앙

 

하느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누구나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대답을 요청받는다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 내 대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 나는 그 생각을 수정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말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사랑에 앞세워야 할 말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존재를 그분의 사랑에 앞세워야 된다는 것을 나는 깨달은 것이다.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의 이름으로 알려주신 것은 바로 나는 있는 나다.’이다. 이는 당신 자신을 존재로서 계시하신 말씀이다. 이리하여 천주 존재의 신조는 그리스도교의 으뜸 진리로서 첫 자리에 놓인 교리가 된 것이다.

 

도전받는 기본 신앙

 

그런데 나는 있는 나다.’라고 일러 주신 지 수천 년이 흘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아버지를 인간과 함께하시는 분으로 계시하신 지도 이천 년이 넘은 오늘날 이 중대한 기본 신앙이 도전을 받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가끔 내가 무신론과 사신론死神論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신으로 떠받드는 세상이니 말이다.

 

2022년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에 그리스도인을 표방하는 이의 숫자는 24463십만 명이고, 그 중에서 로마 가톨릭 신자 수는 125612만 명으로 되어 있다. 통계상의 숫자는 이러한데 지구촌의 신앙 실태는 어떠한지 훑어보자.

우선 가장 크고 가장 인구가 많은 이 대륙의 거의 전체가 그런 모습이 아닌가. 주님께서 당신 말고는 다른 신이 있을 수 없다고 하셨으니, 계시된 하느님이 아닌 그런 신들은 모두 뜨내기들이요 가짜들인 것이다.

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가톨릭 신자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아시아 이외의 대륙들을 보자. 유럽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지적한 대로 한때 꽃피었던 그리스도교 신앙이 경제적 풍요와 소비주의에 젖어 계속 번지는 무관심, 세속주의, 무신론으로 인해 그리스도교가 뿌리째 흔들리는 땅이다. ‘교회의 맏딸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스스로 포기한 프랑스는 목하 불신앙의 첨단을 달리고 있고, 많은 이들이 일생에 세 번만, 곧 세례 때와 혼인 때 그리고 자기 자신의 장례 때 이던 것이 이제는 그것이나마 없어진 유럽의 신앙 실태이다.

한편 중남미의 대륙에서는 복잡한 인종적, 사회적, 문화적 원인으로 인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떠나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오늘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마치 자라다 만 겨자 나무, 부풀어 오르다 만 밀가루 반죽을 바라보는 심정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역대 교황님들은 복음화의 기치를 내걸고 온 힘을 세계 복음화에 기울여 왔다. 이러구러 지금은 새 복음화라는 단어를 쓰기로 되었는데, 이것은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며, 결국 원점에서 시작하자는 것이다. 곧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간절한 염원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도리어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군상은 늘어만 가고 있으니 답답하고 안타깝고 억울하고 슬프기 그지없다. 새 복음화라는 말이 인제 와서는 한낱 요식적인 구호에 지나지 않게 되어가고 있고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수도 점점 줄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가 18, 8)라고 하신 것이 예수님의 기우가 아니라고 느껴진다.

 

 

하느님의 생각과 길

 

원래 회두는 쉽지 않은 일이다. 교회 안에 머무르면서 저지르는 죄나 잘못들은 사함을 받아 쉽게 회두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를 떠난 사람, 곧 배교자는 사정이 다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일찍이 배교자들의 회두를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베드로 사도 역시 같은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 신분과 그 특혜를 저버리는 날에는 순전히 거저 베풀어지는 특별한 은총이 아니고서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확신인 것 같다.

개인의 경우가 그러하다면 집단의 경우에 있어서는 원상회복이 더욱 불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어느 한 민족이나 어느 대륙이라도 신앙을 버리게 되면 다시는 원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이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도 있다. 그 말씀에 따르면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지만,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매우 좁고 또 그 길은 비좁아서, 그리로 들어가는 이들은 적다는 것이다.

냉철한 두뇌로 인식하고 판단한다면 지구촌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의 인류 창조 및 구원 계획은 실패한 것이 될 터인데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전지·전능·전선하신 하느님에게 실패란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느님은 실패하거나 후회할 일을 섭리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지 않은가! 미움과 저주가 아니라 사랑과 축복에 의한 인류 창조 및 구원 성업이 아닌가!

위에서처럼 인류구원 문제에 얽혀 있는 나는 불현듯 하느님으로부터의 충격 요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권능이 일시에 사람을 압도하여 당신의 존재 앞에 머리 숙이고 무릎 꿇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 충격 요법의 발상은 이사 55,8~9에 의한 것이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운니지차 또는 천양지간이란 말은 인간의 척도로는 측량 불가능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인데, 사실 하느님과 인간 간의 차이는 무한과 유한의 차이요, 무궁한 차이다.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으니,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께는 가능하다고 하신 그 말씀이다. 우리의 것과는 무한히 다른 생각과 길을 지니신 하느님을 믿기에 나는 인류구원을 위한 기상천외의 좋은 결정을 해 놓고 계실 그분께 희망과 기대를 걸게 되는 것이다.

 

마리아 파우스티나 성녀가 지은 하느님 자비의 호칭기도의 마지막 호칭은 요행수가 있음을 일깨워 주는 하느님의 자비여이다. 이것 역시

우리를 같은 곳으로 이끌어 주고 있는 것임이 틀림없다.

신형 코로나19의 충격 속에서도 하느님의 존재를 외면하고 버티는 사람들을 보면, 이 충격 요법의 효과도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충격 요법을 말하는 것은 다만 인간 측의 어떠한 외침이나 몸부림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파격적인 은총만이 이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뿐이다.

 

 

회개 -3

 

1

 

회개는 구원의 기본 조건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강조해서 받은 가르침 가운데서도 회개(참회)는 주요한 것이었다. 또한 회개는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고리기도 하다. 회개는 구약 시대의 막을 내리고 구원자를 맞이할 준비를 시키기 위해 하늘에서 파견된 요한 세례자의 외침이었고(마태 3,2; 마르 1,4; 루카 3,3 참조), 신약의 창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최초의 목소리를 높이신 말씀이셨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이렇게 볼 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파할 사명을 받은 사도들이 사명 수행의 첫 단계에서 회개를 외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구원의 길을 묻는 사람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열흘간의 다락방 피정에서 거쳐 온 그 길을 그대로 제시한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공식을 알려 준 셈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먼저 굳은 마음을 깨야 한다. 부수어야만 한다. 아집이나 자만심이나 자신감을 깨 버려야 한다. 매일, 매 순간 그래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지나치게 나를 믿고 너무나 도도하고 당당하다. 그래서 믿음의 은혜가 내게 들어올 수 없고 따라서 선물인 성령을 받지 못하게 된다. 내가 사도들보다 낫다고 우길 수 있을까? 그들에 비해 더 많은 교리 지식을 가졌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나는 결코 본바탕이나 교육에 있어서 그들보다 나은 점이 없다. 그들은 신학자 중의 신학자며 신학의 주인공이신 분에게 직접 배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취할 태도나 갈 길은 사도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나도 그들처럼 자만심이나 자신감을 포기하고 회개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은총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공로는 우리 주변에 늘 넘쳐흐른다. 구원의 수단들은 주위에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성화되지 않는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회개하지 않아서다.

시 말하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고 성령이 그 사람 안에서 활동하실 수가 없다. 성화의 조건, 구원의 조건은 무엇보다 먼저 회개다. 대사大赦를 입기 위한 첫째 조건도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다. 이는 작은 죄에 대한 애착까지 배제하는 진정한 고백을 말한다. 참된 회개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간단하고 단순한 내용을 설명하며 긴 말을 늘어놓았는데 이 명제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겸손을 통해서 일을 이루시는 분이다. 그것이 그분의 수법이며 방식이다. 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정말로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이다. 가진 것을 다 내어놓으시고 비천한 종의 신분을 취하신 예수님의 모범과, 성자의 거울로서 그분을 반영하신 성모님의 겸손은 자만과 자신감에 도취되어서 겸손한 척하는 나를 반성하게 만든다. 나는 자세를 바로 잡아서 가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즉 회개해야 한다.

 

2

 

모든 사람은 죄인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회개에서 면제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예수님의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고 한 말씀이 구원자인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은 죄 없는 사람도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분의 의도는 바리사이와 같이 의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데 있었다. 구원자가 필요 없는 그런 의인이 이 세상에 있을까? 없다. “산 이는 누구도 당신 앞에서 의로울 수 없습니다.”(시편 143,2)라고 한 시편 작가의 고백은 진실이다. 다만 양성화된 죄인이냐 음성적인 죄인이냐 하는 차이, 즉 드러난 죄인이냐 숨겨진 죄인이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칼 스턴의 말은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그는 그의 저서 불기둥The Pillar of Fire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우리가 악에 관심을 가졌다면 우리는 제일 먼저 자신을 쳐다보아야 한다. 내 자신 안에는 내게 늘 붙어 다닐 만큼 끈질긴 악이 발동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소씨마 원장은 자기 수사들에게 현재 그들이 자기를 대접해 주는 것보다 자신이 진정 못한 사람으로 알아 달라고 그들에게 애걸한다. 모든 성인의 통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인의 통교도 있는 법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현대 심리학, 특히 정신 분석학을 하는 사람들이 흔히 반그리스도교적 철학을 표방한다며 그들의 학문 자체를 비난한다. 그런데 그 비판가들은 정신 분석학이 사실 교회가 언제나 가르쳐 온 진리를 다시 확인해 준 사실을 잊었다. 즉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살인자와 도적의 소굴이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 잠재적인 측면이 왜 나의 이웃에게서는 표출이 되고 내 안에서는 잠재한 채로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대가 할 일이 아니다. 그대 안의 잠재적 악과 내일 신문 지상에 대서특필될 다른 사람의 드러난 악과의 차이는 종이 한 장보다도 얇고 우리의 생각 이상 신비스러운 것이다. 모든 행위는 초시간적 요소를 지닌다. 그리고 모든 악한 행위는 나를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요소를 지닌다. 그래서 오랜 세기 동안 가톨릭 신자들은 어린이건 어른이건, 남자건 여자건 모두 나는 내 사랑하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나이다.’ 하며 고백의 기도를 바친 것이다.”

이런데도 혹시 스스로 죄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성인 몇 분의 자화상을 보여 주고 싶다. 이 성인들은 여러 가지 자화상이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 회개(참회)와 관련이 있는 것만 보여 주고 싶다. 이 자화상들은 하느님과 인간 앞에서 행한 그들의 공적 고백이다. 이 고백들은 영적으로 허약한 나에게 크나큰 위로와 힘이 돼 준다.

먼저 바오로 사도는 이런 고백을 했다.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들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1,30) 이런 사람에 대해서라면 내가 자랑하겠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내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으렵니다.”(2코린 12,5)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1코린 15,9-10)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로마 7,19.24-25)

이어서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에서 고백한 말을 소개한다. “아버지가 아들이 가는 길에 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급히 앞질러 가서 아무도 모르게 그 돌을 치워 버렸습니다. 아들은 선견지명이 있는 애정을 받았지만 아버지의 손으로 예방된 불행을 모르기에 아버지에게 감사함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고, 아버지가 고쳐 준 앞의 경우보다는 아버지를 덜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아버지의 도우심으로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면 아버지를 더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의인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고 용서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선견지명이 있는 하느님의 사랑, 그 사랑의 대상이 된 이 아이가 바로 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정도가 아니라, 저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제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가 당신을 많이 사랑하기를 기다리셨던 것처럼 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저를 어떻게 형언할 수 없이 사랑하셨는지 미리 알려 주셔서, 이제는 제가 당신을 미칠 듯이 사랑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회개하는 영혼보다 더 사랑하는 깨끗한 영혼은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얼마나 이 말을 거짓말로 만들고 싶은지 모릅니다.”

한편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자서전을 쓰라는 지도 신부님의 명령을 받고 몇 번이나 거절했다고 술회한다. 그것은 죄 많은 자기의 행적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성녀는 자신의 자서전인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나는 내 기도 방식과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들에 대하여 쓰라는 명령과 함께 완전한 자유를 받고 있는 터이므로 중대한 내 죄들과 사악한 생활을 명확히 그리고 상세히 묘사할 허락이 내려졌으면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내게 큰 위로가 되었으련만 실은 달리 결정되어 나는 이 일에 관하여 엄격한 제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생애에 관한 이 책의 독자 누구나가 명심해 주기를 간청하는 바는 하느님께로 회두한 모든 성인들의 생애 중에서 내게 위로가 될 만한 것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내 생애가 그렇게 사악했다는 이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기도도 죄책감을 전혀 지니지 않고사는 사람들을 충분히 각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기억이 저 사정들을 회고할 때, 내 주여, 당신께 무엇으로써 감사드리리이까? 나의 주님,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께 감사드리오리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오리다. 크고도 많은 나의 죄악들이 해빙하듯 녹아 없어진 것을 나는 오로지 당신의 은총과 자비의 덕으로 돌리옵니다. 또한 내가 죄 없이 지내왔음도 당신의 은총의 덕이었음을 나 이제 아오니, 그렇지 않고서야 죄를 죄로서 사랑하기까지 한 내가 어찌 범죄하지 않을 수 있었사오리까? …… 이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의 의사이신 당신의 사랑을 입어 병의 치유를 얻은 나를 비웃지 말게 하시옵고 오히려 이 글로 해서 그가 당신 사랑하기를 나와 같이, 아니 나보다 더하게 하시옵기를 바라오니 죄의 깊은 구렁에 빠졌다가 회생한 나를 보고 그가 나와 같은 구렁에 빠지지 않고 보호되고 있음은 오로지 당신의 은총으로 말미암음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오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이야기를 계속하려 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회개와 통회와 찬미라고 했다. 회개담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찬미다.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은 그 자체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젊어서 죄의 생활을 했다. 그러나 하느님 은총의 세계에 받아들여지고 나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그는 자기의 생활을 회고하는 고백록에서 어린 시절에 있었던 아주 사소한 몇 가지 일들을 회상하며 크게 뉘우친다. 그의 고백을 최민순 신부님의 번역으로 여기에 옮긴다.

더구나 나는 부모의 식량 고방과 식탁에서 훔쳐내기까지 했습니다. 탐식이 시키기도 했거니와 아이들에게 줄 것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놀이에도 남보다 뛰어나고 싶은 허욕에서 승리를 속여서 얻는 것이 일쑤였습니다. 나 자신은 곧잘 다른 아이들에게 하는 짓이라도 남한테서 발견하는 날이면 이보다 못 참는 일이 어디 있으며, 모질게 꾸짖는 것이 아니더이까? 그러면서도 나 자신이 들켜서 비양을 듣는 때는 지기는커녕 도리어 무섭게 덤비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어린이의 천진난만이겠나이까? 아니오이다. 주여, 아니오이다. 하느님, 당신께 비나이다.”

주여, 당신의 율법이, 그리고 죄악으로도 말살할 수 없는 인간 마음에 쓰인 법률이 도둑질을 처벌한다는 것은 틀림없사오니 어느 도둑이 딴 도둑을 예사롭게 봐 주나이까? 부자라도 가난에 몰려 하는 도둑질을 참아 주지 않으리다. 그런데 나는 그 도둑질을 하려 들었고, 사실 범하였습니다. …… 우리 집 포도밭 근처에 배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주렁주렁 열리기는 했지만 그 열매의 모양이나 맛이 따먹고 싶을 정도는 못 되었습니다. 어느 이슥한 밤을 타 …… 개망나니 우리는 나서서 나무를 흔들고 과일을 땄던 것입니다. 잔뜩 태짐이 될 만큼 따가지고는 왔으나, 한바탕 실컷 먹어 보자는 것도 아니었고 두세 개 맛을 보았지만 이내 돼지 떼에게 던지고 말 것을, 다만 하지 말라는 짓을 우정 해 보는 흥미로 그러던 짓이었습니다. 보소서 내 마음을, 하느님 내 마음을 보소서. 그 심연의 밑바닥에 당신의 자비가 있었나이다. 이제 내 마음이 당신께 아뢰옵나니, 거기서 찾는 것이 무엇이더니까. 상 없이 못된 놈 되는 것, 내 못됨의 까닭이야말로 못된 뜻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걸 사랑했습니다. 스스로 망하는 것을 사랑하고, 내 결함을 사랑하되 결핍한 것을 사랑함이 아니오라, 내 결함 자체를 사랑했습니다. 더럽던 내 마음, 당신의 조임쇠에서 멸망으로 내달아, 파렴치로 무엇을 이라기보다 파렴치 자체를 욕구하였던 것이옵니다.”

이만하면 충분한 고백이 아닐까? 성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쯤 더 써 내려가다가 다시 그 일을 회상하며 참회하고 고백한다.

내 도둑질아, 가엾던 내가 너 안에 사랑한 것이 무엇이더냐? 아으, 내 나이 열여섯 살 적의 밤에 지은 내 죄악이여! …… 좋으신 하느님, 모든 것의 창조주, 나의 가장된 진시여, 당신이 지으셨기에 그 여름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렇건만 가여운지고. 내 영혼은 그것을 탐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나은 것들이 내게는 푸짐하였지마는 도둑질하는 목적 하나로 그것을 탐낸 것이었고, 그러기에 딴 것을 이내 팽개쳐 버렸사오니 죄악만이 그토록 달콤해서 맛보았던 것입니다……. 주 하느님이시여, 내 이제 그 도둑질 안에 무엇이 그리도 좋았더냐고 물어 봅니다. 그러나 실상 아무런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나는 성인의 고백을 보며 해도 너무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인은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그 일을 들추어 고백한다.

스스로 되새겨지는 일들에서 가엾던 내가 거둔 열매가 무엇이었습니까? 특히 도둑질, 딴 목적이 없이 오직 그 자체를 위하여 저질렀던 그 도둑질! 그것은 본디 없음이거늘 나는 더욱 가엾은 놈이 아니더이까.”

끈질기기도 하시지. 그래도 성에 차지 않으신지 또다시 그 일을 주님 앞에 끌어내어 뉘우치신다.

보소서 내 주여, 내 영혼의 생생한 추억이 당신 앞에 있으옵니다. 아뢰옵건대 훔치던 물건이 아니라, 훔치기 그것이 즐거워서 하던 짓인 만큼 난 혼자로선 도둑질을 아니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따로 혼자만 즐기는 일이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뉘 있어 얼키설키 꼬이고 꼬인 이 매듭을 풀어 주리까. 더럽습니다. 들여다보기 싫고, 거들떠보기도 싫을 지경입니다. 당신만을 원하오니 정의여, 순결이여, 깨끗한 눈들이 뵈와도 뵈와도 뵙고 싶은 아름다움, 고운 맵시여.”

큰 잘못도 예사로 저지르던 그가 소년 시절에 있었던 아주 사소하고 시시한 일에 대해 법석을 떨며 계속 죄를 뉘우친 것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맑고 깨끗하고 거룩한 영혼을 지니게 된 그에게 사소한 잘못이라는 것이 따로 없게 된 이유를 알아야 한다. 백발이 성성하게 나이든 노인이, 신자가 아니었던 어린 시절에 어머니 지갑에서 2~3천 원 꺼내 쓴 일에 대해, 또는 또래들과 어울려 참외나 수박 서리한 일에 대해, 또는 친구들과의 노름에서 사소한 규칙을 어긴 일에 대하여 심각한 표정으로 그 일들을 고백하고 반성한다면 그를 어떻게 보겠는가? 비정상적인 노인으로 보지 않을까? 그러나 거룩하고 위대한 참회자 아우구스티노는 무한히 아름다우시고 거룩하시고 순결하신 분 앞에 비쳐진 어린 시절의 자기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3

 

쉽지 않은 회개

회개는 쉬운 것이 아니다. 진정한 회개가 쉽지 않음은 내 자신의 체험에 의한 것이다. 쉽지 않은 이유는 한마디로 비뚤어진 인간성 때문이다.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이 완전히 부패하지는 않았다 해도 원죄의 원인인 교만과 불순종의 흔적만은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 달갑지 않은 유산으로 인해 사람이 남의 허물은 잘 볼 줄 알면서 자신의 허물은 보지 못한다. 다윗은 하느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사울의 손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의 임금이 됐고 자신이 모시던 사람의 딸과 아내들까지 품에 안았으며 온 이스라엘과 유다의 딸들까지 받았다. 그래도 모자란다고 했다면 어떤 여자든지 더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하느님을 얕보고 그분의 눈에 거슬리는 짓을 했다. 부하의 아내를 범하고 그 부하를 죽여 버렸다. 이러한 소행에 빗대어 예언자 나단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가축을 많이 가진 부자가 가난한 사람이 애지중

지하는 단 한 마리의 암컷 새끼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대노하여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그런 짓을 한 그자는 죽어 마땅하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나단은 그 부자가 바로 다윗임을 엄숙히 선언한다(2사무 12,1-15 참조). 여기서 다윗은 삼척동자라도 뻔히 알 수 있는 죄인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원죄에 물든 본성과 사욕을 지닌 내 자신의 모습이다. 그래서 인간성을 개조하러 오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

참회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내가 참회를 너무나 자주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바치는 주님의 기도문과 성모송을 비롯해 매일 몇 차례씩 참회 기도를 바친다. 아침, 저녁으로 고백 기도나 통회 기도를 바치고 미사전례 때 모든 것에 앞서 고백 기도와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바친다.또한 고해성사도 자주 본다. 이런 이유로 나는 참회를 잘 한다고 믿으며 심지어 내 잘못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참회를 한다고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참회 행위가 반드시 완전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고백 기도나 통회 기도를 자주 하다 보니 자연히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소리 기도가 되어 실제로 참회를 안 했는데 마치 제대로 참회한 것처럼 착각하기가 쉽다는 뜻이다. 한편 우리 교회에서는 성사 은총의 사효성事效性을 강조한 나머지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요소가 결여된 참회를 하곤 한다. 개신교 신자들은 우리와 달리 성사의 은총을 받을 길이 없으므로 자연히 하느님을 향한 직접적이며 주관적인 참회 행위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이 자기 죄를 덮어 주었다는 주관적 확신을 얻어야 하므로 그들의 참회 행위가 자연히 과장되거나 격한 양상을 띠는 것이다. 최근 들어 우리 교회 안에도 그와 비슷한 참회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것이 결코 개별적 고해성사를 대신할 수는 없지만 객관적 성사 은총을 지나치게 믿어서 무디어지게 된 양심을 주관적이고 직접적이며 동적인 참회로써 보완해 주는 것은 사실이다.

적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의 고질적인 양심 불감증이 많은 경우에 형식화되고 기계화된 기도나 성사나 전례 생활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회하나마나’, ‘고해성사 보나마나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도 불감하고 그분의 위협에도 불감인 상태를 말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완고한 마음과 불감증에 걸린 양심은 그러한 자비나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불감증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종교시인 알렉산더 포프의 <인간론>이 머리에 떠오른다.

 

죄악!

죄악은 하도 험상궂은 몰골의 괴물이어서

그놈을 미워하기 위해 굳이 쳐다볼 필요조차 없다네.

그러나 보는 일이 잦아져 그놈의 면상이 낯익어지면

처음에는 견디어 내고 다음에는 가여워하다가

끝내는 얼싸 안게 된다네.

 

이렇게 죄의 더러움을 볼 수 없을 만큼 맛들이게 되면 회개는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회개가 쉽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한 두려움이나 어려움이다. , 그만두어야 하고 버려야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서 클라우디우스 임금은 햄릿의 아버지이자 자기 형인 국왕을 시해하고 형수인 왕비를 빼앗아 살다가 자기 신변에 닥친 위험을 느끼고 하늘을 향해 통회의 기도를 바친다. 그러나 결국 아무 소용 없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아, 어떤 모양의 기도가 내게 소용되리오?

나의 추악한 살인죄를 사해 주리오?

그것은 될 수 없는 일 내게 살인을 하게 한 목적물들,

곧 내 임금관, 내 야욕,

그리고 내 비를 나 아직 가지고 있거늘,

범죄를 계속하는 자 어찌 사죄 되리오?

이곳 현세의 탁류 속에서는 도금된 죄악의 손이

정의를 뿌리치고

사악한 재물이 법을 매수하는 때 드물지 않도다.

그러나 저 천상에서는 아니 그러하니 그곳에는 변통이 없고,

그곳에서는 행위가 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놓을 터

우리는 우리의 죄과와 맞닥뜨려 증거를 대지 않을 수 없으리.

 

바로 이러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의 최초의 권유며 명령인 회개는 기쁜 소식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최초의 일성으로 우리에게 회개를 가르치셨을 때 그분은 자루 옷을 뒤집어쓰고 재를 얹는모진 속죄를 뜻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소식으로서 회개를 명하셨다. 기쁘고 장하게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때를 선포하신 것이다. 이는 제2, 3의 회개 등 모든 회개에 해당되는 말이다. 나지안죠의 그레고리오 성

인은 하느님에게는 인간의 회개와 구원보다 더 마음에 드는 일이 없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들과 교회에서 성취되는 모든 신비들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계시되고 성취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회개와 구원보다 하느님의 뜻에 더 맞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나의 회개와 구원은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입력 : 2023.10.04 오후 6:06:29
Copyright ⓒ 변기영 몬시뇰 사랑방 Servant Hall of Msgr. Byo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