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우기 새 사제로서 사제품을 받자마자 초대 교구장 윤주교님의 첫 비서 전담신부로 임명되어,서품과 동시에 당시 초대 교구장 윤공희 주교님을 모시기 시작하던 변기영 몬시뇰도 금년 사제서품 53주년으로 동창 김정원 몬시뇰과 함께 참석하여,교구설정 60주년 기념을 맞아 함께 감사 미사를 봉헌하였읍니다. 또한 금년 서품 60 주년을 맞는 최경환 동생 신부님의 바로 위 형님 최윤환 몬시뇰은 서울 교구 신학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이어 수원교구 신학대학 창설 당시 초대 학장을 맡아 교구 설정 연혁에 혁혁한 역할을 하시고,독일 유학 중으로 동생 최경환 신부님 보다 2 개월여 좀 늦게 서품을 받게 되었는데,수원교구로서는 최초의 두 형제가 사제품을 받아 잘 알려진 형 최윤환 몬시뇰도 감사의 기념미사를 오늘 함께 드렸읍니다.Msgr. Peter Byon
수원교구 설정 60주년(1963~2023) 기념 감사 미사 봉헌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맞아, 그동안 산넘고 물건너 허둥대며 달려온 길 개관 회고와 이번 기념행사 사진 화보
<이하 사진 화보는, Photos by Ko Ock Ja Rosa, Heo Kwan Soon Seraphina, and, Park Hee Chan Andrea>
초대 교구장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님은 금년 100세신데, 광주 광역시 대교구 교구장 대주교로 은퇴하신 천수를 하시는 노익장 대원로의 참석과 미사 공동집전으로 기념미사는 가장 뜻깊었읍니다. 특별히, 수원교구 설정과 동시에 교구 출신 첫 사제로 서품받은 최경환 신부님의 사제서품 60주년 기념도 함께 바친 매우 감격적인 경축미사가 아닐 수 없었읍니다. 더우기 수원교구로서는 최경환 신부님과 형님 최윤환 몬시뇰 두분이 다 서품 60주년을 맞아 바치는 이처럼 매우 감사로운 기념미사에 교구장 이용훈 주교님을 비롯하여, 은퇴한 전임 교구장 최덕기 주교님과 이성효, 문희종 현재의 젊은 2 분의 보좌주교님들과 500여명의 교구 내 사제들과 각 본당 평신도 대표들, 그리고, 일부 수도자 대표들이 참석하여 더욱 뜻깊은 축복 속에서 봉헌하였읍니다.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미사 이하 관련사진들 계속(주교좌 정자동성당, 2023.10.06.오후 2시)
수원교구 설정 60 여년 전 그 당시 우리나라는, 한국 사회 전체가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모든 면에서 대대적인 역사적 큰 변화의 현대화 격동기를 맞아, 라디오에서는 날마다, 시간마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 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구를 찾아, 이뿐이도 금순이도,,,단보짐을 쌌다네 ! " 하는 소리가 계속 울려퍼지던 시절이었읍니다.
그래도 우리 수원교구는 그런 와중에도 당시 선조들의 순교정신과 레지오 마리아의 새로운 성모신심으로 매년 8천 여명~9천 여명씩, 수원교구만이 많은 대인 영세자 수를 내어, 전국 모든 교구 중에서 가장 많은 대인 입교 영세자를 내고 있었는데도, 전체 교구 신자 수 통계 발표의 증가에는 별로 반영이 잘 안 되고 있었는데 그 이유로는, 대인 영세자들 보다도, 그리 적지 않은 수의 신자들이 시골 집을 버리고 이농하여 서울로 떠나는,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이주 신자수 통계가 더 많기도 하였기 때문이었읍니다. 그러나, 또 그렇다고 주로 서울로 떠나는 이농 교우들이 무슨 직장이나 지인들도 없이, 집도, 절도 없어도,그래도 교적만은 그대로 시골 고향 본당에 둔 채 서울로 떠나가야 하는, '떠나간 신자들의 교적 보관 교구'처럼 되어, 그 수가 8천여명 내외씩 되던 해까지 있던 시절이었읍니다.
당시 시골 교구로서 4만여명에 불과했던 우리 수원교구 신자들은 그래도 전국 최다 수의 대인 영세자를 내므로써, 위로와 용기를 느끼며 매년 서울 주변에 3, 4천 여명씩 되는 새 본당들을 2~3 개 이상씩 서울 변두리 지역에 시골에서 올라온 신자들로 증설해야 하던 서울대교구는 서울교구나름으로 재정난과 사제 부족을 절감하게 하도록 만들어 주고 있었던 현실이었지만, 상경한 후 주일미사도 제대로 못하는 우리 이농신자들의 성사생활만을 우선 걱정하는 시골 본당 신부들의 목자적 관심과 우려로, 마치 오늘의 해외, 특히, 주미 교포 사목 현장처럼, 또, 폐허가 되다시피하여, 공소예절 주관자와 독서자 조차 부재 현상을 격으며, 주일에 말씀의 전례도 못하는 한산한 공소와 본당과 교구의 재정 결핍이 극심하자, 당시 우리 수원교구의 젊은 사제들은 종종 모이면, 일꺼리를 놓친 반 실업자들처럼, 당면문제 해결책으로, 우리가 틈틈이 서울 가서, 시골 본당에서 가까스레 겨우 영세시키자 이농하여 서울로 온 신자들을 찾아 보살피며 성사생활은 잘 하는지 점검도 하고, 또 어렵지만 교무금이라도 바치게 하자는 이야기가 당시 수원교구 우리 젊은 사제들 사이에서는 실제로 자주 거론되던 때입니다.
그러나 전국 교구 중에 서울대교구 다음으로 신설 수원교구의 대신학생 수가 30 여명에 이르도록 가장 많았는데, 사실은 서울 대교구 신학생 수가 우리 수원교구보다 약간 더 많다고해도, 시골 교구에서, 특히 수원교구의 구교우들 중에 순교자 후손들이 많이 살던 지역에서 갑자기 이농 상경한 시골 본당 출신의 사제 지원하는 학생들 수가 적지 않기 때문이었으며, 대부분이 순교신앙을 지닌 수원교구 지역 태생교우 가정 출신의 대신학생들은 사제가 된 후에도,예컨데, 오기선 신부님, 윤형중 신부님, 황민성 주교님, 박희봉 신부님, 김옥균 주교님, 염수정 추기경님, 등, 주교직을 비롯한 전국 여러 교구의 주요 교회기관들을 담당하는 수원교구 지역 출신 중견사제들 배출이 적지 않았었읍니다.
그러나 당시 C.C.K.의 연말 통계상으로 당시 사제 성소는 가난과 이농으로 인하여 오히려 증가현상을 보이던 시절로서, 마침내 그 때부터 새 대신학교 설립의 필요성까지 이미 거론되었지만, 우리 수원교구 내 사목현장의 구석구석마다 가난이 한여름 강변의 자갈처럼 깔린, 숫자로만 교구민 3, 4 만명이라고 하여, 당시로는 많다고 해도, 실제로는 그리 많다고 볼 수 없었고, 다만 대부분 가난한 시골본당 출신들에 불과한, 전국에서 가장 가난한 우리 수원교구가 마침내 서울 교구에서 분리되어, 초대 교구장으로, 전국에서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도 가장 젊은 30 대의 빅토리노 윤공희 신부님이 교구장 주교님으로 임명되시어, 한겨울 찬 바람보다 더 심하게 계속 불어닥치던 가난 속에서 많은 고초를 겪으셨어야 했읍니다.
그래도 당시 우리나라가 전 세계 저개발 국가로는 선구적인 새마을 운동을 태동시킨 본거지 그 현장이었던 경기 수원 교구 관할지역의 대표적인 농촌 교구로서, 우리 젊은 사제들은 농촌사회 개발운동에 선봉적이었으므로, 교구장 윤공희 주교님은 한국의 농촌이 극빈상태에서 조속히 벗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젊은 피와 함께 새 바람을 불어넣고자, 도청 소재지 수원에서 좀 떨어진 용인 본당 젊은 신부의 요청을 따라, 용인 본당 관할에 현재 수원교구 교육원의 전신인, 한국가톨릭농촌사회지도자교육원 설립을 공문으로 발표하고, 젊은 변기영 새 신부를 원장으로 임명하였읍니다. 그런데 당시 새마을 운동의 선구적인 '농촌사회 지도자 교육'이라는 말을 정부 당국 일각에서는 오해하는 식자들도 없지 않았읍니다.
그런데 설립된지 몇년 안되던 초기 서강대학교의 미국인 출신 박문수(부흐마이어) 부제 (현재 서강대학교 예수회 재단 이사장 신부)를 사목연수로 시골 용인본당 주임 필자한테로 2개월간 보낸 적이 있었는데, 한국어를 전혀 모르므로 본당 주임인 필자와 영어로 생활하면서, 우리는 매우 유익하고 재미있고 즐겁게 살았읍니다. 처음 한국을 자원하여 온 박문수 부제도 함께 참석하는 여름 시골 본당의 회장들 64명이 모두 모이는 연수 겸 친목회는, 당시 용인 군 내 12개 면에 산재한 32개 공소의 회장과 부회장들이 다 모이는 여름 연례 회로써 정말 거룩하고 보기 드문 회합이였읍니다.
당시 우리 수원교구에는 총 480 여개의 공소가 있었는데, 가장 많은 본당이 평택 본당으로 공소가 48개였고, 다음은 안성 구포동 본당으로 공소가 42개였으며, 세번째가 32개 공소의 용인본당이었읍니다. 그래서 한국에 처음 온 박문수 부제를 서강대 총장 신부가 용인본당으로 보내면서 주임신부였던 필자에게, 박부제가 처음 한국에 왔으니,시골 성당 사람들과 어울리며 체험을 하도록 부탁하기에. 나는 매년 여름 개최하는 그 해의 연례 60여명 회장 친목 회합에 미국인 부제님도 함께 하도록 하여, 한국인으로 귀화시켜도 될만큼, 시골 한국인 회장님들과 한데 어울리며 함께하여 시골 성당에서의 사목실습은 대성공적이었다고 느꼈읍니다.
이 미국인 부제님이 용인 시골 본당에서, 시골 신자들과도 아주 잘 어울리면서 잘 지내었는데, 상경한 가난한 아가씨들을 위한 안양근로자회관을 건립하여 운영하던 독일계의 오지리 출신 말가리타 솜마(Margaritha Sommer) 여사는 한국 농촌 출신 가난한 처녀들을 돌보기 위하여 결혼을 포기하고 독신생활을 하던 농촌 여성 운동가로서,함께 농촌출신 아가씨 노동자들을 위하여 한국여성으로서 함께 일하던 한 벨타(?)여사와 함께 안양본당 주임 양병묵 신부님과 더불어 모두가 당시에는 농촌 출신 상경하는 남녀 청소년들에게 고마운 소문이 날 정도로, 선교사들도 농촌 사목에 깊은 관심과 정성을 기울였읍니다.
그런데 가난한 우리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일어서 볼 수도 없는 한국 농촌사회를 위하여, 실로 고마운 당시 서강대학교의 미국인 출신 유능한 예수회원 프라이스 신부님을 비롯한 예수회 교수 신부님들의 주선으로, 태국 방콕 부근 명승지 스왕카니바스에서 서울농대 일부 교수들도 한두명이 우리와 함께 참여하는, 아시아 농촌사회 지도자 114 명이 모여 개최하며 동참하는 1개월간의 국제적인 공동연수에도 수원교구 윤공희 주교님은 우리 수원교구 젊은 사제가 이들과 함께하며 주도적으로 참여하도록 윤리적인(moral support) 후원을 아끼지 아니하셨읍니다.
당시로서는 매우 중요한 이 모임의 참가자들의 왕복 항공여비를 포함해서 막대한 비용을 독일의 미세레올과 오지리의 가톨릭 부인회가 적지 않은 그 경비 전액을 담당하였는데, 아시아에서 농촌지역 개발에 영향을 주던 다국적 기업들(multi-national bodies)에 관하여 분석검토하는, 당시로서는 실로 매우 중차대한 제6분과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변기영 신부가 선임되어, 사회를 보며, 발표도 하고, 주도할 정도로, 그러나 사실 우리는 이미 국내에서도 수원, 용인에서는 물론, 원주 문막 성당(미국인 남신부 근무)과 제주도 이시도로 목장의 아일랜드 출신 임신부님 한테까지 가서도 극빈상태에서 상경하며 허덕이는 한국농촌 개혁을 위한 연석회의를 할정도로, 우리교구 젊은 사제들은 국내외에서 농촌의 구조적 개혁 주도에도 선두를 달리며 힘을 모으며 애를 쓰던 시기였읍니다.
그리하여 우리 수원교구의 윤공희 주교님은 사제 2명(조원길 신부와 하재별 신부)을 위 교육원 부원장 후보로 내정, 임명하고, 영원한 동정성모회원 수녀 2명도 선발 의뢰하여, 필립핀에 2 년간씩 파견 교육 겸 연수케 하였읍니다. 정부도 수원교구 젊은 사제들의 이러한 활동이 정부의 제도화 시책을 선행하는 새마을 운동 제도화를 위해 요주의시하며, 당시 제도화를 시도하던 새마을 운동의 여러 지역과 기관들의 출발의 선도적인 자극제로 참고하였었다고 들었었읍니다.
이즈음 우리 수원교구는 전국 교구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평신도 지도자교육 3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교육을 실시하였읍니다. 그런데 당시 시골에서 회장들 피정이나 사제들 연수에는 으례히 서울서 저명한 신부나 교수가 초빙되어 와야만 했었으나, 당시 우리교구의 3개년 계획 발표와 시행은 좀 달라서, 교구 내 각 군청 소재지의 좀 큰 본당들을 임시 교육시설로 삼고, 본 교구 사제들로 강사들을 자체 편성하여 교구청에서 2,3일씩 사제들이 숙식하며 공동연수하면서 강의 준비를 하였는데, 교구장 윤공희 주교님은 사제들의 이러한 모습에 너무나 감격하시여, 서울 가서 대교구장 서리 하시며 받으신, 실로 시골 수원교구에서는 그 당시에 구경하기도 어려웠던 선물로 받은 죠니워카나 각종 양주병들을 모두 가지고 1층 식당으로 내려오셔서 우리 젊은 신부들을 격려하시며 우리들과 호흡을 함께 하셨읍니다. 그 시절 25개 본당 중 본당 신부 부재상태로 4 개본당이 있었고, 30여명이 채 안되던 교구사제들의 화기애애하고 순교자다운 열성은 지금도 우리에게 가장 그리운 추억의 시대입니다.
이러한 본 교구 사제 중심의 강사 인력 확보를 위한 자력, 자립, 자치, 정신으로 평신도 지도자들 회장 교육과 수련 실시 지속으로, 서울의 이름난 강사 후보들이 좀 덜 바빠지고 실업자들이 되어간다는 농담마져 생겼으며, 이를 위해, 지도자 육성을 위한 지도자 후보들로서 본 교구 출신의 해외 유학 사제 증가 확대안도 중요시하게 되었고, 타 교구에서는 견학차 몇몇 교구 사목국장들이 수원교구청을 종종 방문할 정도로, 평신도 지도자 교육의 시범지가 되었었읍니다.<현재 가톨릭신문 전신인, 당시 대구 가톨릭주보 참고.그 후, 20여년 후에 서울대교구에서 주간 평화신분 창간>
초대 교구장 젊은 윤공희 주교님은 가난한 우리 교구의 가난을 최대의 재산으로 삼고, 순교자다운 무혈의 순교자 정신으로 현실의 부조리를 극복하자,고 외치시며, 그 후 주교회의에서도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는 시국성명서를 내기까지 하였다.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지도자 양성에 온 힘을 기울이던 우리 교구는, 용인본당 지역에 전국에서는 물론 아시아 극동 지역에서는 가장 적절한 농촌 사회 지도자 대교육원 건립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해외 원조 요청도 순조롭게 추진되어, 당시로서는 놀랄만한 지원을 하던 고마운 독일 교회의 협력을 받기로 잠정 협의하게 되었었읍니다.
그러나, 갑자기 교구장 윤주교님이 전남 광주 대교구장 대주교로 가시는 바람에, 새로 김남수 신부님이 수원교구 주교로 임명되어 오시자, [우리 수원] 지역에서 사목하던 교구 내의 몇몇 주요 중견 선배 사제들은, 서울농대와 농촌진흥청과 농사시험장, 등이 있는 [우리 수원]으로, 가톨릭농촌사회지도자교육원 건립 후보지를 용인에서 수원으로 옮겨, 변경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여, 우선 주인공 변기영 신부는, 교구장 주교 공석기간 때부터 다시 수원 교구청 사목국장 겸 교육원장으로 미완성 교구청을 지키며 부득이 인사조치되어, 교구청을 교육원으로 삼아 일을 지속하게 하였읍니다.
그러나 선교지방의 모든 개발사업추진 중의 주인공이나 장소를 변경하면 해외 지원기관들의 불신을 자아내기 쉽다는 것을 모르던 소박한 우리 교구는 거액 예산 지원계획까지 문서상으로 거론되던 일이 모두 취소되게 되었읍니다. 그래도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 양성 정신은, 다른 교구에서는 감히 꿈도 못꾸며 비판적이었던 대신학교 설립 추진의 이해와 협력의 폭이 김남수 주교님에 의하여 뒤이어, 오늘의 수원대신학교 설립과 교구 교육원 계승 유지의 실뿌리가 되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 교구는 한국천주교회 지도자 육성의 전국화에도 지도자 양성의 불쏘시개가 되었읍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회 발전과 외형적 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으나,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의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교회 창립선조들의 빛나는 역사를 회고하며, 더우기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의결사항에 신중하여, 돌다리도 먼저 두드려보고 건너갈 만큼 더디다는 평을 듣던 주교회의의 힘든 합의 그 이상의 결의와 주도적인 참여 도출에 힘입어,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행사와 103위 순교복자들의 시성추진과, 로마교황 성하의 한국 방문 초청과 맹인 2천여명 개안 무료시술과, 마카오에 김대건 신학생 동상 건립과 바티칸박물관의 한국관 개편 자료 보완, 등을 시도하는데 성공한 것은 기적적인 성과였읍니다. 대성당 하나 없던 103위 성인들의 기적적인 탄생은 주교회의 103시성추진 위원회가 명동대성당의 건립사를 되돌아보며, 재고하며 숙고하기에 이르렀읍니다.
특히, 전국에 서울대목구 하나뿐이던 한국 교회는, 서울 명동 대성당 터닦기를 착공하려고 시도하던 1885년 초, 당시 우리나라 전국에는 한국인 사제나 수녀가 1명도 없었고, 프랑스 선교사들만 주교 1 명을 포함해서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모두 선교사 신부 10명 뿐이었던 시절, 한양의 시내 서울 신자는 불과 300 여명 내외 미만으로, 전국 교회가 모두 100 여년간의 박해로 전국 신자들이 1만 여명도 채 안되던 때, 박해를 피하여 입산한 난민 신자들은 심산궁곡에서 도토리와 칡뿌리를 주식으로 하며 살고 있다고 하던 시절에, 그래도, 마침내 프랑스 선교사들은 서울 남산의 북편 중간 봉아래 쇠북을 매달고 치던 낮은 봉 종현(鐘峴) 지역을 매입, 거기에 드디어 1886년 명동대성당 터닦기를 착공하였읍니다.
그래서, 터를 닦으며 시작한 명동 대성당을, 건축 동안은 물론이고, 완공 후에도, 늘, 지금까지도, 종현 성당(鐘峴 聖堂) 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는데, 풀어 말하면, '쇠북을 매달고 치던 산마루에 지은 성당'이라는 뜻입니다. 즉,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한양의 장안 백성들이 대부분 상감 마마를 따라 강화도 입구나 남한산성 주변으로 피난갔을 때, 한양을 점령한 적군들 즉, 왜병들이나 오랑캐 호병들과 싸우기 위해서, 서울 장안에 숨어 있거나 남아 있는 조선 청년들을 모이라고, 큰 북 테두리에 마른 쇠가죽을 덫씌우고 큰 쇠못을 박아서 북을 만들어 칠때마다 쇳소리와 마른 소가죽 퉁기는 소리가 나게 하는, '쇠북을 매달고 치던 산마루'였기 때문이었읍니다.
그리하여 1905년 한일합방 후에나, 1945년 해방 후까지도, 또, 1950년 6.25 사변 후까지도, 서울시의 행정구역 동명이 변경돼도, 아니, 지금도, 구교우들 중에는, 명동대성당을 늘, "종현성당(鐘峴聖堂)"이라고 불러왔고, 부르고 있으니, 착공 때부터 자연스레 불러오던 명동대성당의 옛 이름으로 본명이나 원명이라고나 할까 !? 오래된 원래 본 이름이기도 합니다. 마치 유롭, 특히, 로마의 사도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여타 대성당들 역사를 지닌 호칭처럼 !
그러나 건평 427평의 1,500 여명을 겨우 수용하는 명동 서울 현 대성당 시대를 뒤로 하고, 선구적인 우리 교구는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 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 건립계획을 수원교구장 이름으로 결정하고 발표하여 추진하자, 교황 성 요한바오로 2세께서는 친필 작성,서명하신 천진암 대성당 머릿돌 교황 강복문을, 주한 교황대사 John Bulaitis 대주교님을 통하여 1993년 9월 21일, 공식적으로 개최된 3만여명이 넘는 전국 신도들이 참석한천진암대성당 정초식 대행사 중에,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님에게 하사하셨읍니다. 성 요한바오로 2세 교황성하께 감사를 드립시다. 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 건립은 전국 교회를 위한, 아니, 전 세계의 보편 교회를 위한 성당입니다.
그런데 죤 불라이티스 대주교님은 천주교 신자가 1명도 없던 Mongolia와 Roma 교황청 Vatican과 최초로 국교를 맺기에 성공하여 정상화하고, 현직 주한 교황청 대사로서 초대 주 몽고 교황청 대사직을 약 10여년 가까이 겸직하시면서, 대전교구 사제들의 몽골리아 선교활동을 주선하시다가 ULAAN BAATAR교구도 설정하시고나서 알바니아 교황청 대사로 전근되시어, 근무하시다가 최근 선종하셨으며, 지난 9 월말부터 10월 초까지 4박 5일간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몽골리아 사목방문을 천상에서 참관하시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갖가지 당면한 난관을 헤쳐가면서도 우리 수원교구는 항상 이를 물리쳐가며, 전국 교회 차원의 실로, 각가지 엄청난 사목 계획을 착안하며, 추진하고, 성사시키는데 온갖 반대와 무시와 최대의 비협조도 아끼지 않고 베풀어주는 난관들을 극복하면서, 무혈의 순교정신으로, 사실상 단순히 우리 교구 차원을 넘어서, 전국 교회의 공동사목 계획과 실천에 적지 않은 도움과 영향을 주는 현장 본보기의 구심점이 되었고, 또한 중심이 되었으니, 일부 지방 교구들의 일반 새 본당의 성당건립 계획도 그 교구 나름으로의 대성당 건립 계획으로 확대 수정, 변경하고 완성하기에 이르게 되었다고 들었읍니다.
이제 교구 설정 60 주년을 기념하면서 회고하건데, 더우기, 수원교구에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도 '성지'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다고 주교회의에까지 서울의 일부 기관에서 저명한 사제들이 반대하며 재고 진정서를 제출하며, 한국에는 성지가 없다고 문제를 삼자, 전국성지관리자협의회를 조직하여 10 여년간이나 총무직을 우리 수원교구 사제가 맡으며, 한국의 성지들을 지켜야 했던 시절이 있었읍니다.
그리하여 우리 수원 교구는 우리 교구 내는 물론 전국 모든 교구의 성지 개척의 계기를 이루는 최선봉에 서서, 불가피한 세속과 교회 내외의 비판과 충돌을 극복하며,사제 성소 육성 해결의 일환으로도 그 현장이 되는 대신학교 설립의 서울 혜화동 성신대학 이후의 시범이 되었고, 국내 신학대학 다수 건립이 지금까지 일부 문제점은 있으나, 그래도 많은 사제들을 탄생시키는 일은 급성장하는 교회 발전에 최우선의 가장 필요한 교육사업임을 확인하여 주고 있으며, 우리나라 교회의 미래를 다짐해주고 있읍니다. 천주께 감사를 드립시다.
이제 선교지방 천주교회의 대목구 시대의 차원을 넘어, 교회의 자치적인(Communitas Sui Juris) 치교사목을 할 수 있는 정식 교구와 대교구로 틀이 잡히도록 앞당겼다고 믿습니다. 그 사목현장에서 무혈의 순교 정신으로 불타는 우리 교구 젊은 사제단의 교구 설정 60주년 기념 감사미사 봉헌을 사진이라도 함께 보며, 회고와 전망을 소홀히 하지 말고 감사하며 모두가 함께 기뻐합시다. - Msgr. Peter Byon- <계속>
제단의 사진을 보면서 왼편부터, 최윤환 몬시뇰과 변기영 몬시뇰, 사진 우편의 금년 100세 노구로 전남 광주 광역시에서 오신 노익장으로, 수원교구 초대 교구장 (1963년~1973년) 빅토리노 윤공희 대주교(은퇴)와 수원교구 전임 교구장 최덕기 주교(은퇴).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미사(주교좌 정자동성당, 2023.10.06.오후 2시)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미사(주교좌 정자동성당, 2023.10.06.오후 2시)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미사(주교좌 정자동성당, 2023.10.06.오후 2시)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미사(주교좌 정자동성당, 2023.10.06.오후 2시)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미사(주교좌 정자동성당, 2023.10.06.오후 2시)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미사(주교좌 정자동성당, 2023.10.06.오후 2시)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미사(주교좌 정자동성당, 2023.10.06.오후 2시)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미사(주교좌 정자동성당, 2023.10.06.오후 2시)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미사(주교좌 정자동성당, 2023.10.06.오후 2시)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미사(주교좌 정자동성당, 2023.10.06.오후 2시)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미사(주교좌 정자동성당, 2023.10.06.오후 2시)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미사(주교좌 정자동성당, 2023.10.06.오후 2시)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미사(주교좌 정자동성당, 2023.10.06.오후 2시)
제단 좌로부터 2번째가 서품 53주년의 김정원 몬시뇰, 3번째가 서품 60주년의 최경환 원로 사제 !
답사하시는 초대교구장 빅토리노 윤공희 대주교 !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미사(주교좌 정자동성당, 2023.10.06.오후 2시)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미사(주교좌 정자동성당, 2023.10.06.오후 2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