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들이 외치는 소리-Voice of Martyrs]라는 메뉴의 명칭을, [오늘의 無血 殉敎者들의 숨결 - Breathless Voices of the Bloodless Martyrs]로 곧 바꾸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그대로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을 모두 [무혈의 순교자 군상]으로 들어 높히고 찬양하며, 그 숨결 소리를 여기에도 옮겨봅니다. 존경하옵는 우리 사부님, 김창렬 주교님의 심오하고 주옥같은 묵상록을 읽어가다 보면, 성령의 감도하심에(by the inspiration of the Holy Spirit) 의하여 쓰여지는, 거룩하며, 순수하고, 진솔하며, 소박하여, 뜨거운 영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순교자들의 모후이신 성모님처럼, 무혈의 순교 선조들의 숨막힌듯 애타는 숨결 소리를 여기에 게재하도록 우선 윤허를 받은 글들입니다.
주교님의 심오한 묵상의 주옥같은 문장은 일체 그대로, 절대로 아무런 첨삭이나 수정이 없이, 보내주시는 그대로, 반드시 '그대로 게재함'을 철칙으로 삼고, 준수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2023년 순교자 성월 9월 26일, 이제는 모두 성인반열에 오르신 103위 옛 순교복자 축일에 이곳 곡수리 공소 성당 하느님의 종 순교자 사우거사 권일신 기념서재에서, 오늘의 無血 殉敎者들의 숨결 -Breathless Voices of the Bloodless Martyrs>에 묻혀서, 변기영 몬시뇰 올림.
(이것은 김창렬 주교가 받은 영감에 의한 글이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무한히 감격스러운 사랑, 그 사랑에 닿기만 하면 무엇이나 가릴 것 없이 녹아버린다.
그 사랑의 본질에 의해 내 문제는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나의 경우뿐 아니라 장구한 인류 역사를 통해 저질러진 그 무수한 죄악들이 어떻게 용서되겠는가?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적인 인류를 비롯한 전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서는 이것이 아닌 다른 어떤 방법이 따로 있을 수 없기에 하는 말이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곧 하느님이 실패할 가능성을 우리가 전제해서는 안 된다.
그분은 실패를 모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구원에 대한 희망을 한가슴 안고 기뻐하자! 거듭 말한다. 기뻐하자! 정녕 우리는 낙천주의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서 마련해 놓으신 영복을 기다리며 기쁨에 넘쳐 웃으며 살자! 아멘! 알렐루야!
한恨
1
한恨의 민족 한韓민족
몇 해 전 로마에서 만난 한 유럽 국가의 외교관은 ‘한국’ 하면 한을 연상하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말한 것을 보면 한은 한민족 고유의 감정인 것 같다. 이는 외국어에서 한을 대신할 표현을 찾을 수 없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사실 우리말로도 한의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나는 한을 설명하려고 할 때면 언어의 한계성을 느낀다. 한은 선험적, 실존적으로 느껴지고, 체험적으로 파악되는 실재일 뿐이다. 어쨌든 한국의 문화는 한의 문화다. 한은 한국적인 모든 것에 스며있다. 또한 한국인의 핏속에 하나의 유전자로서 흐르며 한국의 언어, 풍습, 문학, 예술 등 모든 분야에 깔렸다. 소설, 시의 밑바닥에는 한이 흐른다. 회화, 조각, 음악(국악, 가곡, 가요, 농어민의 구슬픈 가락)안에도 한은 서려 있다. 민속놀이, 탈춤의 풍자와 해학 속에서도 한은 작용한다. 한은 우리 민족의 관습이나 행태에 있어서 한풀이의 형식으로 표출된다. 국회 의사당에서 종종 벌어지는 소란을 보라. 다름 아닌 한풀이인 것이다. 일상화된 거칠고 발악적인 집단 항의를 보라. 그것 역시 한풀이다. 헤어짐, 특히 사별하게 될 때의 오열이나 통곡, 다스려지거나 다듬어지지 않은 그 몸부림 또한 한의 작용이다. TV에서 끊임없이 방영되는 먹는 장면하며, 남녀 구별 없이 보기 흉하게 입을 쫙 벌리고 게걸스럽게 먹는 꼴하며, 그것을 클로즈업 하여 보여 주는 교양 없는 PD나 카메라맨의 악취미 등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 역시 우리 민족 속에 뿌리내린 한의 소치다. 이 모든 것은 선진국에서든 후진국에서든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라는 민요의 가사처럼 우리 민족의 부정 심리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한임에 틀림없다.
정녕 우리 한민족은 한의 민족이다. 그래서 민족적으로 겪고 당한 통분스러운 사건들을 상기하고 돌아보는 기념일들도 많다. 그런 일을 혹시라도 잊을까 봐 달력에 한을 품은 날들을 새겨 두고 길이길이 기념하며 슬픔을 되씹는다. 가령 3월 1일, 4월 3일, 4월 19일, 5월 18일, 6월 25일, 11월 3일, 12월 12일 등이 그런 날들이다. 그럼으로써 한이라는 것을 더욱 크게 키워 나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년 그날들이 오면 똑같은 기사와 논설, 똑같은 연설과 강연, 똑같은 기록 영화나 드라마 따위를 억지로 듣고 읽고 보았다. 집단적 악취미인가? 아니면 민족적 자학인가? 하여간 이런 방식으로 우리 한민족의 가슴 속에는 계속 증오의 불길이 타올라 한이 체질화가 됐다. 광복절만 해도 그렇다. 다른 나라에서는 독립 기념일이나 해방의 날이 즐겁고 기쁘기만 한 경축일인데 우리의 광복절은 그렇지 않다. 기쁨보다는 오히려 한의 감정이 넘치고 한이 그날의 분위기를 지배해 왔다.
한을 머금은 기념일이 하나하나 늘어나는 것을 보며 나는이러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달력은 온통 원한을 상기시키고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기념일들로 채워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우리 민족 공동체의 한은 모두 외국, 특히 일본과의 관계 아니면 우리 동족 사이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한 가지 한스러운 일이 잊히거나 아물기도 전에 줄줄이 이어지는 한스러운 사건들! 뭐 좋은 일이라고 그것들을 씹고 되씹는지! 그것들을 연료로 사용해서 증오심과 복수심과 적개심을 태우기라도 하는 것인지! 마치 삶을 지탱하는 받침대처럼 그것들을 쓰는 것인가? 한스러운 사건이 과연 세세대대 자자손손 물려주고 물려받아야 할 일이겠는가 또는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로 하여금 그 한을 물려받게 하여 그들의 맑고 깨끗한 정서에 문신文身하는 것이 과연 옳고 잘 하는 일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처럼 한스러운 일을 달력에 모두 적고 기억하려 든다면 유럽 국가들의 달력은 한의 기념일로 꽉 차 있을 것이다. 그들의 긴 역사를 보면 매우 큰 그리고 매우 잦은 민족적, 국가적, 종교적 분쟁이 있었으며 같은 민족, 같은 나라, 같은 종교 안에서도 너무도 많은 참사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달력을 보면 그런 것들로 더럽혀지지 않고 깨끗하다.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서는 서로 원망할 일이나 미워할 일은 이미 잊혀졌고 서로의 상처들은 이미 아물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지금 많은 분야와 여러 차원에서 하나를 이루는 일에 힘쓴다. 유럽 27개국은 지금 연합체를 이루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민족이 한의 민족이라는 사실을 더욱 뚜렷이 드러내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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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 배리背理
3세기의 서방 교부 테르툴리아누스41는 인간은 그리스도인다운 품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 민족이 천성적으로 그리스도인다운 마음을 지닌다고 강하게 주장할 자신은 없지만 천부적으로 깊은 종교적 심성을 지녔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내가 한의 배리를 알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한의 배리를 통해 잠든 우리를 늘 흔들어 깨우며 정신을 차리게 하신다. 또한 우리에게 상대적인 것과 지나가 버리거나 없어지고 말 현세의 사물의 무상과 허구를 깨우쳐 주신다. 그럼으로써 현세의 것에 만족하거나 집착하지 못하게 하시고 늘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을 찾게 만드신다.
한국에서 남달리 전교가 잘 된다는 사실은 자타가 공인한다. 나는 한국 문화가 한과 결별하지 않는 한 이 현상이 지속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는 또한 나의 소망이기도 하다. 한국의 특성 덕분에 가톨릭뿐만 아니라 어떠한 종교도 한국에서는 잘 된다. 개신교 종파들도 번성하고 불교 역시 잘 자란다. 원시 종교나 사이비 종교, 심지어는 미신과 같은 모조 신앙도 극성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방한하셨을 때 지적하신 것처럼 한국 가톨릭교회는 분명히 교육이나 생활 수준의 서민층에 비해 중산층 이상의 엘리트 계층에서 강세를 나타내는 특징을 가졌다. 이런 현상을 자랑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 교회가 서민층을 향해 선교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서민층과 함께 부유층과 지식층에서도 똑같은 호응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모두의 공동 유산인 한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부의 많고 적음, 지식 수준의 높고 낮음은 상관없다. 한반도에 한민족으로 태어난 이상 물려받은 한을 품고 살아야 할 운명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다.
지구상의 다른 나라나 민족들이 어떻든지 우리가 한과 결별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의 기정사실이다. 한국 교회가 이루어 나가야 할 과업은 바로 이것이다. 즉 한이 영적 축복의 도구와 매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한이 은총과 축복에 연결되면 부활의 환희를 가져온다.
한에도 순수하고 깨끗한 한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후자는 독을 가진 한이다. 독이란 무엇인가? 바로 증오며 적개심이고 복수심이다. 그런 것이 없는 한은 우수와 비애의 감정일지언정 매우 아름다울 것이다. 우리 개인이나 민족의 모든 한을 그런 순수하고 깨끗한 한으로 만들어 축복의 도구가 되게 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원이다. 즉 우리 한에서 그리고 한스러운 사건들에서 미움, 적개심, 복수심 따위의 독을 빼 버렸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달력이 온통 한스러운 기념일로 채워진다 한들 무슨 문제겠는가? 나는 오히려 그러한 사건들을 기꺼이 기념하며 또한 그러한 일들이 줄줄이 이어지기를 바랄 것이다. 이는 내가 십자가의 배리를 믿듯이 한의 배리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영광이 따르고 죽음에 부활이 이어지듯이 한과 고통은 영적 축복을 동반하는 것이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1997년 10월 19일 전교 주일에 교회 학자 칭호를 받으셨다. 성녀는 자신이 받는 고통과 전교의 밀접한 관계를 자기 자서전인 ‘한 영혼의 이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괴로움은 두 팔을 벌리고 저를 맞이했고, 저는 그 품에 반갑게 뛰어들었습니다……. 제가 수도원에서 하려고 한 것은 서원식을 하기 전 시험 기간 동안 예수님의 거룩한 발 아래에서 맹세한 것처럼 ‘영혼들을 구하고 특히 신부님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면 그에 맞는 방법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기에, 괴로움이 더하면 더할수록 괴로움에 끌리는 마음이 더해 갔습니다.” 성녀의 이 개인적 체험이 바로 우리 교회의 체험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우리나라에서 전교가 잘 되는 이유가 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독이 들어 있는 한이지만 그로 인한 우리의 고통을 하느님이 보시고 이미 우리나라와 겨레 위에 풍성한 영적 축복을 내려 주셨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무사하고 편한 날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미 내 안에 자리 잡은 신념이다.
한에 관련해서 내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바로 무독성 한을 만드는 것이다. 한에서 독을 제거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한에서 독을 빼내기만 한다면 하느님은 그 순화되고 정화된 한을 통해 더 풍성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3
오직 감사할 뿐
외국의 한 사회 학자가 우리나라에서 오래 머무르면서 여러 가지 조사를 하고 간 적이 있다. 일을 끝내고 떠날 때 소감을 말해 달라는 청을 받자 그는 한국이 망할 조건은 고루 갖추었음에도 망하지 않고 잘 버티는 비밀을 알아내지 못하고 돌아간다고 했다. 내가 만일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가 알아내지 못한 비밀, 그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의 정답을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이라고.
물론 한은 고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한을 통해 우리나라와 겨레에 축복을, 특히 영적 축복을 내리신다. 우리의 지난 역사가 이를 말해 준다. 기나긴 조선 왕조는 한민족에게 한의 시대였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 한을 수단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순교의 특은까지도 내려 주셨다. 조선이 망하고 곧바로 일제 시대가 뒤를 이었다. 그렇게 우리 민족은 또 다른 형태의 고난을 겪게 됐다. 그 한스러웠던 일제 시대가 끝나자 또 다른 한의 시대인 조국 분단의 시대가 왔다. 우리는 지금 그 시대를 산다. 이 한은 이전의 어떤 시대보다도 더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우리 민족 전체가 고통을 나누며 사는 이 분단 시대에도 우리가 받는 한의 크기에 비례하는 크나큰 영적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현재 우리가 겪는 경제 불황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물론 이 달갑지 않은 사태는 우리의 새로운 한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우리나라를 위한 영적 축복의 매체가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전화위복의 이치를 한에서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언젠가 주님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내 마음에 넣어 주셨다. “자연을 원망하면서 어찌 자연의 창조자며 그 주인이신 분의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며 그분에게 감사드릴 수 있겠는가. 내 곁에서 삶을 함께 나누는 형제들을 싫어하거나 미워하면서 어떻게 내게 그들을 붙여 주신 분의 사랑을 느끼며 그분에게 감사할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주님의 작품인 자연이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 어떻게 내게 작용하든 내가 그것을 하느님과 관련지어 대한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거나 감사할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웃 형제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내가 겪는 모든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처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같은 말을 해야 할 것이다.”
아웅산 테러 사건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국민 모두와 함께 분개하고 슬퍼했다. 더욱이 그 희생자들 가운데 주치의로 대통령을 수행했던 나의 수하 교수도 있었기에 더욱 비통한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느님에게 감사의 미사를 봉헌했다. 나를 미쳤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신앙의 이치는 십자가의 이치와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는 그러한 나의 행위가 어리석고 비위에 거슬리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 또는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8)라고 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어떻게 보면 미친 사람의 소리가 아니겠는가? 어떤 처지에서라도 불평이나 원망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며 모든 처지, 모든 경우, 모든 사정, 모든 상황에서 감사해야 된다는 말씀이니 말이다. 아니 이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등의 계명을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야말로 얼마나 미친 소리 같은가! 바로 그러한 비정상적인 가르침 때문에 유대교의 지도층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심지어 불경스럽게도 그분을 미치광이로 봤던 것이다. 지금이라고 그런 사람들이 왜 없겠는가? 나는 아웅산 사건 이후로 누구를 증오하고 저주하기보다는 이런 일을 주님이 하나의 민족적 희생으로 받아 주시기를 기도하고 그로 인해 베풀어 주실 영적 축복에 대하여 감사드리는 것이 마땅하고 옳다고 생각했다.
그런 신념이 있기에 나는 계속 같은 자세를 견지한다.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사건이나 사고 소식을 접하게 될 때마다 주님의 섭리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감사를 드려왔다. 2009년 12월에 4대강과 세종시 문제 등을 둘러싸고 국회가 몹시 소란스러울 때도 나는 이 은둔소의 작은 경당에서 조용히 감사 미사를 봉헌했다. 주님은 찡그린 낯이 아니라 부드러운 표정을 좋아하시기에 평온한 마음과 몸가짐으로 봉헌하였다. 그와 같은 감사 미사를 봉헌한 곳은 한국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지구본에서는 손톱만 한 크기일 뿐인 한국이 지구촌에서는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 요새 여러모로 증명된다. 내가 걸어온 길이 세계에서 한국이 이런 위치를 차지하는 데 한몫 거들었다고 주장한다면 망언일까?
분단과 경제 불황 시대에 사는 우리 민족 위에 풍성히 내려 주실 주님의 축복에 대해 감사해야 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의 고난이 끝나는 날, 우리 민족의 앞날에 오히려 희망이 없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 순교자들과 박해를 겪은 선조들의 한이 있었기에 오늘의 축복받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존재하게 된 것처럼 오늘 우리가 겪는 한이 있기에, 특히 북한 형제들이 당하는 모진 박해와 수난이 있기에, 우리나라와 교회는 밝은 내일을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외친다. “오, 복스러운 한아! 네가 아니었다면 과연 한민족이 이토록 하느님을 열렬히 찾았겠는가? 네가 아니었다면 과연 한국 국민이 영원한 가치와 내세를 이토록 열렬히 동경하였겠으며 절대자를 향해 이토록 힘차게 함께 걸어갈 수 있었겠는가? 하느님의 사자使者한아! 제발 우리를 떠나지 말아다오. 네가 있기에 나는 그대를 보내신 분을 체험하며 지낸다. 네가 있어서 한민족은 축복받은 민족이어라!”
-은수잡록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