洗者 若翰 曠菴 李檗聖祖 墓 移葬 秘史 - 회고 자료-
Msgr. Byon
곡수성당의 2023년 성탄절과 연말, 2024년 연초와 새해 전례시간 알림
Me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 !
<2023년-성탄절과 연말, 2024년 새해 미사 시간표>
▣ 2023년 예수 성탄 저녁 대미사 :12월 24일(주일) 오후 7시
▣ 2023년 예수 성탄 낮 대미사 :12월 25일(월요일) 오전 10시
▣ 2023년 성가정 축일 주일 미사 : 12월 31일(주일) 오전 10시
▣ 2023년 송년 감사 묵상회 후 성체강복 :12월 31일(주일) 오후 7시
▣ 2024년 신년평화통일 기원 미사 : 2024년 1월 1일(월요일) 오전 10시
▣ 2024년 신년 첫 주일 미사 : 2024년 1월 7 일(주일) 오전 10시
<성탄절과 연말 연시 대미사와 성체강복은 Gregorian 성가로 합니다.>
주일과 대축일 미사는 오전 10시에, 평일 미사는 오전 9시에 봉헌합니다.
양평본당 주임신부님 미사는 매월 둘째주일 오후 2시로 바뀌었습니다.
2023년 12월 12일, 수원교구 양평본당 곡수리 공소 Msgr. 卞 基 榮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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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연재 예정 -1->
Brief history of the foundation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韓國天主敎會創立聖祖
洗者 若翰 曠菴 李檗聖祖 墓 移葬 秘史
Church history in Korea
이벽성조의 묘를 찾아서-집필 중 초고 소개 - Msgr. Byon
Brief history of the foundation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韓國天主敎會創立先祖 洗者 若翰 曠菴 李檗先生 墓 移葬 秘史
-이벽 성조의 묘를 찾아서- -제1부-
韓國天主敎會 創立主役 李檗 先生 墓 移葬準備委員會
總務 卞 基 榮 神父 記述 / 1997. 6. 15.~1999. 9. 26.
-이벽 성조의 묘를 찾아서-
<배달겨레 종교문화사 개관 -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개요 - 하느님의 종 5위 약전
- 이벽 성조의 족보 - 기타 자료 발췌, 등. ->
이 글은 1979년, 이벽성조 사후 195년만에 포천 공동묘지에서 이벽성조의 묘를 기적적으로 찾아내어,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으로 이장한, 변기영 신부가 이벽성조의 묘를 찾아 이장하기 까지의 내력을 회고하여 쓴 기록이다. 앞으로 글이 쓰여지는 대로 계속 연재됩니다.
이제 몇일 후면 85세가 되는 늙고 낡은 필자는 그동안 틈틈이 적었던 자료며 회고 내용들이 파도처럼 폭주하는 일거리들로 이리저리 다 사라져 가고 있고, 또 80이 넘어가면서부터는 건망증이 심해져서 아주 잊어버리고 있기에, 이나마라도 주어 모아서 후학들을 위하여 남기고자 합니다. 필자 변기영 몬시뇰 2030/11/28.
1. 한국천주교회 창립자 광암 이 벽 성조의 묘를 찾아서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로 이장하여 모신 지도 벌써 18년이라는 그리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이 일은 나에게 지나간 25년간의 사제생활을 통하여 가장 감격스러웠던 사건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벽성조의 묘를 찾고 또 이장하여 모시던 일은 내가 천진암 성지개발에 전적으로 매달리게 되는 출발의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하였다.
2. 나는 그 동안 비교적 남달리 많은 충돌을 무릅쓰고 여러 가지 일에 관여하게 되었었다. 특히 한국천주교회 창립200주년 기념을 위하여 1980년 5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5년간은 주교회의에 가서 200주년 기념 5개년계획 입안을 비롯하여 103위 시성추진에 주력하면서, 동시에 한편으로는 천진암 성지 개발, 특히 100년계획 대성당 건립 착수에 따른 힘에 겨운 일들을 교회 소유의 땅 한평없는 황무지에서 추진하느라 많은 충돌을 피할 수가 없었다.
3. 지금 되돌아다보면 사제로서 사실 다시 생각만 해도 겁이 나는 부동산 확보와 수년간에 걸친 대규모 토목공사 추진과 지휘 등, 質과 量에 있어 내 역량을 초과하는 엄청난 일들을 피할 수 없었던 나로서는 이제 다시 지나간 기억들을 더듬어가며, 일기장에 한두 줄씩 적어놓았던 것을 뒤적거리면서, 내가 해온 이러한 일들에 관해서 앞으로 혹시라도 관심을 갖는 後學들이 있을까하여, 이를 미리 내다보면서, 後輩들을 위하여 이 자료집 머리말에 몇 가지씩 생각나는 대로 밝히고자 한다.
4. 그리고 앞으로 이 글을 읽을 後學들이 내게 대한 오해나 잘못된 先入觀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부득이 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들어가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결코 내 자신에 대한 유치한 제 자랑이나 혹은 다른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은 전혀 아니며, 다만 필요하다고 여기는 단순한 생각으로 이를 쓰고자 할 뿐이다. 물론 이를 읽어가다가 보면 주님의 손길이 하시는 일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이나 의도와 다를 수도 있고, 또 주님께는 그렇게 하실 능력과 자유와 권리가 있으시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서 읽는 이들이 깨닫게 되기도 할 것이다.
5. 이제 내가 지금까지 사제로서 해온 대부분의 일들에 대하여 나는 이렇다 할 특별한 소질도 없으며, 공부한 적도 없고, 전문가도 아니었다는 점을 眞率하게 밝히는 것이 겸손아닌 정직한 자세라고 하겠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전문가들을 제치시고, 왜 지식도 경험도 없는 나를 부르셔서 이러한 일들을 하게 하시는지, 그 섭리에 내 자신이 놀랄 뿐이며, 아마 그 신비의 질문을 수수께끼로 삼아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할 뿐이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學歷이 다르고 實力이 다르며, 經歷이 다르고 能力이 다르며, 地位가 다르고 業績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직업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쓰는 나는 切感하지 않을 수 없다.
6. 본래 나는 歷史에 관한 공부나 성지개발, 또는 聖賢들의 묘를 찾아 移葬하는 일에 대하여 취미도 관심도 지식도 경험도, 또 그러한 일에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전혀 없던 사람이었다. 내가 학창시절에 소질이 있었다면 외국어 분야였고, 대신학생 때 취미를 가지고 공부한 분야는 당시의 神秘神學이었으며, 신부가 된 후 석사학위 과정 3년, 박사학위 과정 5년을 모두 수료하였지만, 과목은 신비신학이었다. 신학생의 신분으로 쓴 논문이나 번역하여 출판한 책들도 聖人傳記라든가 [義人의 영혼 안에 內住하시는 聖三位]에 관한 것 등, 그러한 분야였고, 지도교수 역시 당시 그 분야에 심취해 계시던 국내에서 가장 존경받으시던 최민순 신부님이셨다.
7. 한마디로 나는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과 지금 일하고 있는 이 분야가 내게 선천적인 소질이 있는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다만 이러한 교회의 일들이 내게 닥치므로 이를 외면하지 않고, 천주와 교회를 위하여 닥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였고, 지금도 매일 닥쳐오는 일을 피하지 않고 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또 하지 않을 수도 없지 않은 것이 우리의 처지이다. 이러한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은총으로 확신하고 있다.
8. 그래서 내가 대신학생 때는 책을 번역하고 글을 쓰는 일에 취미가 있어서, 학생의 신분으로서 이미 여섯권의 책을 내고 있었는데, 당시 옆에서 나를 알고 있던 이들은 장차 내가 글쓰는 학자신부가 될 거라고 여겼었으나, 내 앞에 찾아온 직무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9. 사제가 되자마자, 나는 수원교구청의 주교(윤공희주교)비서 겸 교구 기획관리실장(조원길신부) 보좌로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였던 평신도지도자 교육과 가톨릭쎈타 건립 등의 계획수립과 추진에 불가피하게 관여하게 되었고, 離農人口가 급증하던 당시, 지금 내 기억에 1971년 말을 전후하여 당시 수원교구 신자 45,000여명 중 1년에 8,000여명내외가 離農하여 서울로 移住하고 있었던 때이므로, 나는 불가피하게 농민운동에 뛰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이 일은 교구 내의 일부 선배 신부님들과 교구장님의 시책변경으로 여의치 않게 되었었다.
10. 그래서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석사학위를 받은 이후, 박사과정 공부를 할 겸, 신자 500여명 내외의 당시 시골 본당이었던 신장 성당으로 가게 되었고, 본당 내의 관할구역 안에 있던 구산 김성우 안또니오 순교복자 묘소에 기념 비석 건립과 남한산성 성지 매입 및 천진암 터 확보 등에 손을 대지 않을 수가 없었었으니, 버려지고 있는 성지들을 차마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11. 동시에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기념 준비위원회 초대 사무국장으로 임명받으면서, 역시 신비신학 공부와는 거리가 있는 실제 사목 현장의 기념사업에 약 5년간 매달리게 되었는데, 200주년 기념의 성격과 방향을 설정하고 그 한계를 그어보는 일은 지금 생각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실로 일종의 창의적인 産苦와 함께 적지 않은 반대와 방해를 감수하며 극복해야만 했었다. 마치 새로운 기종(機種) 최신형 대형 비행기를 만들어 이륙시키려는 것과 흡사한 모험이었다.
12. 그런데 이러한 모든 일이 사실 학생 때 내가 즐겨 공부하던 당시 이른 바 神秘神學 분야는 아니었었다. 이처럼 지금도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학창시절부터 3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내가 하고싶어 하던 공부도 아니고 좋아하는 일거리가 아님을 솔직히 밝히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내게 닥쳐오는 일이니 피할 수가 없을 뿐이다. 남들은 내가 개발사업이나 대규모 토목공사 등에 소질이나 취미라도 있는 양 느끼는 모양이고, 또 내가 없는 일이나 없어야 할 일을 만들어서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만들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가진 불가피한 일들로 내게 느껴지기 때문에 손을 대게 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내가하는 일을 내가 종아하는 줄 알지만, 내가 좋아한다기보다도 내가 부지런히 할 따름이다.
13. 이 기회에 천주교 성지에 대한 관심과 순교 선조들에 대해서 내가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내력을 간결히 말해 두고자 한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의 이 방면에 관한 내 자질형성에 다소라도 끼친 영향들을 우선 내 자신이 회상해 보고싶기 때문이며,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배경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14. 1957년 9월 27일에 미리내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나는 영세 대부님과 함께 순교 복자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를 참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만 해도 묘소 주변은 잡풀이 수북한 채 신자들의 공동묘지가 정면과 좌우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이미 나이가 벌써 18살이었고 국민학교 졸업장밖에 없던 소년이었으므로, 혹시 내가 천주교 신부가 되도록 김대건 신부님이 천상에서 나를 이끌어 도와주신다면, 신부가 된 후에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를 깨끗하게 갈 가꾸겠다고 마음을 먹고 아주 소박하고 단순한 생각으로 기도를 바쳤던 기억이 난다.
15. 1년 후에 용인군 이동면 천리 경당에서 12월 8일에 견진 성사를 받았고 1959년에는 미리내 성당에 와서 한국말을 배우고 있던 프란치스꼬회의 배유선 신부님(Justin Bellerose)께 우리말을 가르쳐 드리며, 한 두달 동안 머문 적이 있었는데, 틈틈이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를 찾아 같은 기도를 바쳤던 생각이 난다.
16. 수도생활에도 취미가 있던 나는 복자회와 살레시오회를 거쳐 10여년 후에 내가 사제가 되어 수원교구 주교 비서 겸 기획실 보좌로 있을 때 가끔 내 출신 본당인 미리내 공소(그 당시에는 사제가 머물지 않는 공소로 되어 있었음)에 가서 미사를 드렸는데 그때도 같은 생각이었다.
17. 1972년 여름 7월17일, 중복날 용인 본당 신부로 부임해온 후에 당시 총회장이었던 이 재학 회장과 김영길씨 그리고 다른 일부 회장들로부터 문경 가는 연풍 계곡에 좋은 磐石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돌을 성지 미리내 표석으로 쓰도록 가져오는 계획을 세우기로 하였다. 나는 내 자가용 찝차(당시 우리 수원교구에 자가용 승용차를 가지고 있는 신부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90씨씨짜리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었다)와 운전기사, 그리고 지금 기억에 운반비용 60여만원, 남자회장 3명, 또 운반 중 검문소 통과를 위하여, 용인경찰서로부터 경찰서장의 협력으로 경찰1명, 이렇게 준비하여 10일이나 걸려서 가져온 것이었다.
18. 처음에는 3일이면 된다고 하였으나, 크레인의 붕대가 부러지고, 와이어줄이 끊어지는 등, 차질이 생겨, 서울에서 크레인이 2번이나 새로 연풍까지 내려가야했기 때문인데, 이회장이 나중에 와서 보고하는 말이, 모두들 자연석 무게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여, 처음에는 2톤짜리로 본 돌이 실상은 13톤 이상이나 나가기 때문에 크레인을 5톤짜리, 10톤짜리, 20톤짜리 이렇게 3차례나 바꾸어 들어내느라고 시일이 더 걸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두 개의 돌 중 하나는 미리내 성지에 세웠고, 또 하나는 교구청(화서동 소재 구 교구청) 안마당에 세우게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미리내 성지를 직접 책임맡지도 않은 새파란 젊은 신부가 연풍까지 사람을 보내어 마을사람들에게 다소간의 사례를 하고서 제법 큰 돌을 가져온 것이 성지 가꾸기에 첫 관심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19. 지금 미리내에 세운 그 돌에는, [님은 가시고,,,]로 시작되는 하한주 신부님의 詩가 새겨져 있지만, 본래 그 돌 운반계획을 세워 추진한 나의 운반 목적은, 김대건신부님의 얼굴 모습을 음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돌의 원산지인 연풍에는 음각불상(국보55호?)이 있는데, 그것이 있는 자연 岩山의 바로 아래 계곡의 하천 밑에서 당시 마을사람들의 협력으로 가져온 同質의 水晶鑛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져온 사람과 쓰는 사람이 바뀌니, 용도도 바뀐 경우라 하겠다.
20. 당시 나는 교구 당가신부(현재 관리국장에 해당함)였던 한의수 신부를 설득시켜 미리내 성당 뒤의 산을 매입하도록 하였었는데, 내 기억에 지금 성직자 묘소로 사용되고 있는 산으로 생각하고 있다. 성지 주변의 산은 되도록 넓게 매입하여야 성지가 고요히 보전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21. 용인 본당 신부로 재직하면서, 김대건신부님이 소년시절과 사제된 후에 사시던 집터가 있는 마을로 알려진 현재의 양지성당 골배마실 성지에서 류 봉구 신부님을 모시고 순교자 현양대회를 3개 본당(용인, 양지, 이천)이 공동개최하였는데, 물론 행사준비와 주선은 주로 내 자신이 직접하였고, 류봉구 신부님으로 하여금 주례와 강론을 하시게 하였다. 결과는 매우 좋았다. 교우들이 더욱 열심해지는 것 같아서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자주 순교자현양대회를 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연재 -1- 추후 계속>
<계속>